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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롤라모 카르다노(Girolamo Cardano), 1501~1576 지롤라모 카르다노 (Girolamo Cardano, 1501년 9월 24일 - 1576년 9월 21일) 이탈리아 에서 태어나, 로마에서 죽었다. 수학자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본업은 의사였다. 점성술사, 도박사, 철학자이기도 했다. De propria vita (자서전), 1821 아버지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친구였고, 수학적 재능이 있던 변호사의 사생아로 태어난다. 카르다노의 자서전에는 어머니가 그를 사산시키려 했다고 쓰여 있다. 그의 어머니는 그 외에 3명의 자식을 전염병으로 잃고, 그를 낳은 직후 밀라노에서 파비아로 이주했다. 1520년 파비아 대학에 들어가 의학을 공부하고, 후에 파도바로 학교를 옮겨 약학을 공부한다. 그는 성격이 특이하고 배타적이어서 친구가 거의 없었고, 졸업 후 직업을 찾는 데에도 어려움을 겪는다. 당시 그는 의학을 전공해 의학으로 학위를 받았다. 결혼 후 그는 수학교사가 돼 수학과 물리학을 연구하기도 하고, 시골에서 의사생활을 하기도 했다. 1544년에는 밀라노 대학의 기하학 교수가 됐다. 카르다노는 재판관을 치료해 줌으로써 망명있는 의사가 되고, 돈을 많이 번다. 또한, 그의 소견은 재판장에서 신뢰를 얻는다. 그는 발진 티프스(typhoid fever)를 처음 발견한 의사이기도 하다. -수학적 업적 일반적인 3차방정식의 해법 발표 델 페로는 2차 항이 없는 삼차방정식의 해법을 발견하였고, 타르탈리아는 1차 항이 없는 삼차방정식과 일반적인 삼차방정식의 해법을 발견했으나, 이후에 카르다노가 델 페로와 타르탈리아의 업적을 자신의 업적으로 인정하는 글을 실어 해법과 같이 책으로 발표한다.> (타르탈리아는 카르다노에게 삼차방정식의 해법을 공개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알려주었으나 카르다노가 다음해 논문으로 발표한다. 타르탈리아는 그에게 삼차방정식의 해법을 건 수학경기를 신청한다. 서로에게 문제를 내서 못푸는 사람이 지는 경기였는데, 카르다노의 천재 제자 페라리가 카르다노를 돕는다. 페라리는 3차 방정식의 해법을 이용해 4차 방정식의 해법까지 구했었고, 그것을 알지 못하는 타르탈리아는 경기에서 지게 된다. ) 허수 개념의 도입 3차방정식의 근의 공식을 다루던 도중 음수의 제곱근의 필요성을 느끼고 허수의 개념을 도입하였다. 확률론의 발전에 기여 도박을 좋아하여 확률에 관하여 연구하게 되었다. 확률에 관한 최초의 저서인 ‘주사위 놀이에 대하여’라는 책을 남겼다. 그가 즐겼던 주사위 도박에서 발견한 것이다. 16세기에 행렬식을 정의하였다. -역학 분야의 업적 ‘천체를 제외하고는 영속적인 운동은 없다’는 주장으로 명성을 날렸다. -의사로서의 명성 천식 치료, 탈장 수술법 개발, 발진티푸스에 대한 최초의 임상 기록을 남김. 카르다노가 살던 시대에는 수학경기가 있었는데 주어진 문제를 가장 빨리 푸는 사람에게 상금이 주어졌다고 한다. 카르다노는 상금을 혼자서 많이 갖기도 했다. 1570년에는 종교재판을 받고 몇달간 수감되기도 했다. 점성술을 퍼뜨린 죄였다. 카르다노는 점성술사이기도 해서 자신이 1576년 9월 21일에 죽는다고 하였고, 자신이 옳다고 증명하기 위해 그는 그날 로마에서 자살을 하였다. 또 카르다노는 영예를 누리며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카르다노의 말년 또한 행복하진 못했다. 아내를 잃고 사랑하는 아들이 처형을 당하는 상황을 견뎌야 했다. 수학자 카르다노는 말년에 이런 말을 남겼다. "아들의 파멸을 지켜보며 나는 결국 노름을 끊었다. 그래서 인간은 어떤 학문보다 위대하다." 분류:1501년 태어남 분류:1576년 죽음 분류:이탈리아의 수학자 분류:이탈리아의 의사 분류:이탈리아의 점성술사 분류:이탈리아의 발명가 분류:롬바르디아주 출신 분류:파도바 대학교 동문 분류:파비아 대학교 동문 분류:16세기 이탈리아 사람 분류:16세기 수학자 분류:파비아 출신
장쩌민 (, 1926년 8월 17일 ~ )은 전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와 중화인민공화국 주석으로, 삼개대표사상을 발표했으며 중국 공산당의 제3대 주석(1993 ~ 2003)이다. 1993년 3월 국가 주석에 선출됨으로써 당과 정부의 전권을 완전히 장악하였고, 공산주의 시장경제를 주장한 적이 있다. 상하이 자오퉁 대학 졸업 무렵의 장쩌민 당시 중화민국 장쑤 성 양저우에서 태어났다. 자신들의 친삼촌들 중 하나가 그 당시 불법이었던 공산당에 입당하여 투쟁에서 사망한 후, 그의 부친은 어린 장쩌민에게 신칭 구의 혈통을 지속적으로 상속을 가지려 한 생존 가족원들로 채택을 위하여 제공하였다. 장쩌민은 1946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여 지하 활동을 계속하였고, 이듬해 상하이 자오퉁 대학에서 전기공학과를 전공하여 졸업하였다. 1949년 중국공산당이 중국 대륙에 권력을 차지한 후, 장쩌민은 상하이에서 몇몇의 직위들을 취하였는 데 중국공산당 위원회의 서기장, 식품 공장, 비누 공장, 기계 공장의 공장장을 지냈다. in Changchun.jpg|섬네일|왼쪽|1957년 창춘에서 (중앙에 서있는 이가 장쩌민) 1955년 그는 모스크바에 있는 스탈린 자동차 공장에 연수생으로 보내졌다. 이듬해 귀국 후, 1966년까지 창춘, 우한, 상하이 등지를 옮겨가며 공장관리자 및 공업연구소 책임자로 일하였다.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자 곧 당과 공직에서 추방되어 10년 동안 피신생활을 하다가, 1976년 국무원 제1기계공업부 책임자로 복귀하였다. 1980년 국가 수출입관리위원회 부주임·외국투자관리위원회 부주임을 거쳐 전국 인민정치협상회의 위원이 되었다. 1983년 국무원 전자공업부장(장관)에 오르고, 1984년 국무원 전자공업 진흥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다. 1985년 상하이 시장이 되고, 1987년 상하이 시의 당 서기장직도 겸직, 당 중앙정치국 위원으로 선출되면서 중국의 핵심인물로 떠올랐다. 1989년 6월 당 총서기 자오쯔양이 천안문 광장 시위를 묵인하였다는 이유로 실각하자, 같은 달에 개최된 제13기 4차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당총서기에 선출되었다.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 악수하는 장쩌민 톈안먼 사건에 이어 장쩌민은 망신을 당한 자오쯔양의 뒤를 이으는 데 중국공산당의 총서기로서 덩샤오핑에 의하여 연장 정치인으로 선택되었다. 그해 11월 그는 또한 덩샤오핑이 물러날 때 중앙 군사 위원회의 의장직을 차지하기도 하였다. 덩샤오핑 처럼 장쩌민은 경제적 개혁을 주창하였으나 그는 또한 정치적 개혁이 염려되면서 보수적이도 하였다. 상하이의 시장으로서 그는 경제적 개혁들의 시리즈를 일으켜 시행하였다. 예들 들어, 상하이는 공산당의 교리를 명확하게 폭력을 가함에 불구하고 토지 사용 권리들을 경매하는 데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첫 도시였다. 장쩌민은 외국인 투자인들의 근심들에 대게 책임적이었고, 그일은 그들로부터 칭찬을 얻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9년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는 동안에 중화인민공화국에서 경제와 정치적 상태는 물론 정권의 정책들의 솔직한 비판으로 잘 알려진 상하이의 발간 신문 월드 헤럴드의 편집장 친번리를 면직하였으며, 구실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전선으로부터 일탈한 장기적 기사를 쓴 신문이었다. 몇몇의 학생들이 사망한 상하이에서 벌어진 학생 항의들에 장쩌민의 활동과 실력있는 조종은 그의 정치적 경력을 강화하였다. Putin at the Millennium Summit 6-8 September 2000-23.jpg|섬네일|왼쪽|2000년 유엔에서 열린 밀레니엄 정상 회의에서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상임이사국의 정상들과 함께 공산당 총서기가 된 후, 그는 믿음적으로 새로운 당의 전선을 따랐다. 예를 들어, 그는 1980년대 후반에 중화인민공화국의 국내 정치적 소란에 적개심의 외부 권력에 핑계를 대었다. 1989년 국경일 연설에서 국제적 반동의 힘들이 "사회주의 국가들을 잠입하고 영향을 주는 데 정치, 경제와 문화적 의미들을 채택하여 그들의 일시적 어려움과 개혁들을 개척한다. 그들은 서방 세계의 안 보이는 숭배를 육성한 이들을 통하여 이른바 반체제자들을 후원하고, 서방의 자본주의 세계의 정치와 경제적 모범들, 가격의 분별, 퇴폐적인 아이디어와 생활 방식을 보급시킨다. 그들은 사회주의 국가들에 사고들을 일으키고, 소란의 음모를 짜고, 파괴시키는 활동들에 종사하고 있다."라고 역설하였다. 마찬가지로 그는 당의 공무원들을 고르고 진급시키는 데 전문적 지식들에 "사회주의"에 관한 새롭게 강조를 놓았다. 1990년 인민일보의 앞면 논평에 "사람을 선택하고, 신임하고, 교육을 시키는 데 우리는 당과 정부의 지도자들이 마르크스주의로 충성하는 모든 수준으로 필수로서 혁명적 전망을 가져가야 한다"고 말하면서 두드러지게 인용하였다. Putin 16 July 2001-6.jpg|섬네일|왼쪽|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장쩌민 주석 중화인민공화국의 미래 지도자로서 그를 증진시키는 데 덩샤오핑이 발휘한 노력들 중 악의에서 장쩌민은 자신 이전의 자오쯔양과 후야오방 같은 또다른 과도적인 지도력 인물로서 끝났을 것이다. 1989년 덩샤오핑은 정식으로 물러났다. 장쩌민은 당 혹은 군대 안에서 후원의 기초를 두지 않았고, 1980년대 이래 착수된 자본주의적 모험들은 경제 계급의 불균형을 강조하였다. 장은 일단 1991년 3월 3일을 기하여 중공 반혁명당 집단 사인방 사건으로 무기징역형 복역 중이던 장칭(江靑) 前 중공 국가원수 영부인을 형집행정지 석방한 동시에 가택연금 조치 처분하였고 장칭은 가택연금에 있던 도중 1991년 5월 14일, 향년 77세로 자살하였다. 한편 도쿄 비지니스 투데이는 사회적 체제의 생활비를 위한 정통 대책에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가 농촌들에서 1.67 백만의 소란들을 기록하였다고 보고하였다. 이 소란들은 농부와 정부 사이에 8천명 이상의 사망과 반감의 결과를 가져왔다. 동시에 도시 지역들은 늘어난 범죄를 경험하고, 혁명적 단체들이 나타났다. 1994년 가을에 투쟁 단체가 철도에 폭발물을 놓아 중화인민공화국 육군 13사단으로부터 군인들을 태운 열차를 탈선시켰다. 이 폭발 사건으로 170명이 사망하고, 190명이 부상을 입었다. 더욱 나가 중화인민공화국은 교도소 노동과 정치적 감금을 포함한 인권 학대들의 넓게 퍼진 보고들과 함께 세계의 나머지와 함께 관계가 증가적으로 긴장되었다. 1996년 4월 법률과 체제를 재설립하는 시도에서 장쩌민은 "얀다"(강타)로 알려진 범죄 반대 추진력을 발포하였다. 6달 안의 얀다 운동은 16만명 이상의 구속과 1천번 이상의 사형들에 결과를 가져왔다. 많은 이들은 의안 제출권의 비판적이었어도 정부는 늘어나는 범죄 통계에 의하여 경보가 전달된 중화인민공화국의 시민들에 의하여 잘 받아졌다고 주장하였다. 장쩌민은 또한 홍콩을 개선하고, 자신을 따르는 데 타이완을 납득시키는 시도로 알려지기도 하였다. zemin with wife bush with laura.jpg|섬네일|오른쪽|텍사스 주에서 부시 부부와 함께 한 장쩌민 내외 외교 부문에서는 미국과 유럽과의 친선을 도모하였을 뿐만 아니라 2001년에 평양을 방문하여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정상회담을 가지는 등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관계 개선에 앞장서기도 했다. 또한 1994년 김영삼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하였을 때 장쩌민 주석이 시베리아 범 한 쌍을 기증하였다. 2002년 후진타오에게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직을 넘긴 뒤에도 국가주석직과 군사위원회 주석직을 보유하고 있었다. 2003년 3월 국가주석직을 후진타오에게 넘긴 뒤 1년 정도 군권을 장악하고 있다가 2004년 정계에서 물러났다. 덩샤오핑 리펑 주룽지 양상쿤 분류:1926년 태어남 분류:살아있는 사람 분류:중화민국 대륙 국민정부 초기 시대 인물 분류:중국 공산당의 정치인 분류: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 분류: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인 분류:중화인민공화국 주석 분류:중국의 공산주의자 분류:장쑤성 출신 분류:상하이 자오퉁 대학 동문 분류:상하이방
1912년 은 월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이다. 청(淸) 선통(宣統) 3년 11월 13일 ~ 12월 25일 중화민국(中華民國) 민국(民國) 원년 일본(日本) 메이지() 45년 / 다이쇼() 원년 청(淸) 선통제(宣統帝) 3년 1월 1일 - * 한국 표준시가 동경 135도 기준으로 변경되면서 시간이 30분 앞당겨졌다. **중화민국 건국 선포, 쑨원이 초대 임시대총통으로 취임하였다. 1월 6일 - 의병장 최영우가 경기도 양평에서 검거되었다. 1월 20일 - 조선은행 신축 건물의 낙성식이 거행되었다. 2월 1일 - 《평양일일신보》가 창간되었다. 2월 12일 - 선통제 퇴위. 청나라 멸망. 3월 14일 - 창덕궁 박물관이 준공되었다. 3월 24일 - 호남선의 강경-군산 노선이 개통되었다. 3월 27일 - 오자키 유키오 도쿄시장, 워싱턴 D.C.에 3, 000개 벚나무를 선물한다. 3월 31일 - 최재형, 정재관 등의 독립운동가가 권업회 지부를 니콜라옙스크, 하바롭스크 등에 설치하였다. 4월 10일 - 러시아 제국이 헤이룽 지방의 한국인 2,068호 (4,988명)의 귀화를 인정하였다. 4월 15일 - RMS 타이타닉 침몰. 4월 30일 - 《권업신문》 (주필 신채호)가 창간되었다. 5월 31일 - 조선총독부가 전 관리에게 무관 제복 착용을 지시하였다. 6월 15일 - 부산-장춘 간 직통열차의 운행이 개시되었다. 7월 4일 - 신규식, 박은식 등이 상하이에서 독립운동단체 동제사를 조직하였다. 7월 30일 - 메이지 시대가 끝나다. 8월 13일 -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토지조사사업이 시작되었다. 9월 1일 - 예수장로회 조선총회가 평양에서 창립되었다. 9월 3일 - 경성부 마포에 경성감옥이 설립되었으며, 기존의 경성감옥은 서대문감옥으로 개명하였다. 9월 28일 - 신민회 사건 피의자 105인에 모두 유죄 판결이 내려졌으며, 이들의 1심 선고 형량의 합산은 630년에 달했다. 10월 2일 - 호남선 이리-김제 노선이 개통되었다. 10월 8일 - 제1차 발칸전쟁 세르비아, 불가리아, 몬테네그로가 터키에 선전포고하다. 11월 - 이상룡이 서간도에서 경학사 소속의 부민단을 조직하였다. 11월 5일 - 미국 대선에서 공화당이 루스벨트와 태프트로 분열하여 민주당의 우드로 윌슨에게 정권을 넘겨주다. 11월 28일 - 알바니아가 오스만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였다. 12월 **임병찬이 전라도에서 독립의군부를 조직하였다. **조선총독부가 한글에 대한 가타카나 요음 표기법을 제정하였다. 12월 6일 - 경성 을지로의 황금정선 전차 운행을 개시하였다. 3월 8일 -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잠수함 함장 요아힘 쉐프케. 4월 15일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석 김일성. 5월 25일 - 대한제국 황족 덕혜옹주. 6월 19일 - 대한민국의 역사적인 악마 최태민. 6월 23일 - 미국의 수학자 앨런 튜링. 7월 31일 - 미국의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 8월 4일 - 스웨덴의 외교관 라울 발렌베리. 8월 25일 - 독일민주공화국의 지도자 에리히 호네커. 9월 5일 - 미국의 작곡가 존 케이지. 10월 9일 - 대한민국의 마라토너 손기정(1936년 베를린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10월 17일 - 로마 가톨릭의 교황 요한 바오로 1세. 10월 18일 - 이탈리아의 추기경 아우렐리오 사바타니. 11월 3일 -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 조두남. 11월 15일 - 대한제국 황족 이우. 11월 19일 - 브라질의 축구 선수 도밍구스 다 기아 11월 23일 - 대한민국의 마라토너 남승룡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동메달리스트). 12월 12일 - 대한민국의 시인 윤영춘. 12월 14일 - 예비역 영국 해군 상사 출신의 소믈리에 노동업자 앨프레드 레논(록 밴드 비틀즈 출신 대중음악가 존 레논의 아버지). 2월 4일 - 조선의 독립운동가 김순흠 5월 30일 - 미국의 비행기 발명가 윌버 라이트. 6월 12일 - 프랑스의 정치가 프레데리크 파시 7월 17일 - 프랑스의 수학자 앙리 푸앵카레. 7월 30일 - 일본 122대 메이지 천황 8월 13일 - 쥘 마스네, 프랑스의 오페라 작곡가 물리학상 - 닐스 구스타프 달렌(스웨덴) 화학상 - 빅토르 그리냐르(프랑스), 폴 사바티에(프랑스) 생리학·의학상 - 알렉시스 카렐(프랑스) 평화상 -엘리후 루트(미국) 문학상 -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독일) 음력월 월건 대소 음력 1일의양력 월일 음력 1일간지 1월 임인 대 2월 18일 갑자 2월 계묘 소 3월 19일 갑오 3월 갑진 대 4월 17일 계해 4월 을사 소 5월 17일 계사 5월 병오 소 6월 15일 임술 6월 정미 대 7월 14일 신묘 7월 무신 소 8월 13일 신유 8월 기유 소 9월 11일 경인 9월 경술 대 10월 10일 기미 10월 신해 대 11월 9일 기축 11월 임자 소 12월 9일 기미 12월 계축 대 1913년 1월 7일 무자
1923년 은 월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임시정부(臨時政府) 대한민국(大韓民國) 5년 1월 - 신채호, 작성 1월 1일 - 남대문역을 경성역으로 개명 1월 3일 -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분 수숩을 위해 상하이에서 국민대표회 개최. 1월 5일 - 임시정부 신임 국무총리로 노백린 취임 1월 12일 - 김상옥이 종로경찰서에 폭탄 투척 1월 22일 - 김상옥, 일본 경찰과 접전을 벌이며 저항 끝에 자결. 3월 - 천도교소년회, 소년잡지 창간 3월 8일 - 삼랑진에서 열차가 전복해 60여명의 사상자 발생. 3월 15일 - 의열단 소속 김시현, 유석현 등이 폭탄을 반입하다 서울에서 체포 3월 16일 - 방정환, 윤극영 등이 일본 도쿄에서 색동회 조직 4월 - 연희 전문학교 및 세브란스 의학 전문학교 재인가. 4월 19일 - 최초의 극영화 개봉 4월 16일 - 이동휘가 연해주에서 일본 경찰과 교전 4월 18일 - 미국, 뉴욕에서 양키 스타디움이 개장되다. 4월 25일 **임시의정원, 임시정부 이승만 대통령 탄핵안 제출 **강상호 등이 경남 진주에서 형평사를 설립 5월 - 김규식, 이범석 등이 만주 연길현에서 고려혁명군 조직 5월 1일 - 조선노동자연맹회 주최 노동절 기념 시위행진이 경찰 당국에 의해 불발 5월 5일 - 조선총독부, 감옥의 명칭을 형무소 로 고침 5월 15일 - 평양 시내 전차 시운전 실시 6월 2일 - 김규식, 지청천, 여운형 등이 임시정부를 이탈해 상하이에서 고려공화국을 선포. 6월 11일 - 경성무선전신국 설치 6월 19일 - 미국-영국 채무협정 체결. 미국에 대한 영국의 제1차 세계 대전 채무를 46억 달러로 확정하다. 7월 3일 - 무장 독립단원 150여명이 무산 농사동삼장주재소 습격, 일본 경찰 4명 사살. 7월 28일 - 경성도서관 신축 건물이 낙성개관하였다. 8월 - 조선 전역에 큰 폭우 발생 (1923년 대폭우) 8월 2일 - 미국 대통령 "워런 하딩" 사망 및 "캘빈 쿨리지" 부통령 취임 8월 25일 - 경성전기, 안국동 선 전차 운전 개시. 9월 1일 - 간토 대지진 지진이 도쿄와 요코하마 일대를 강타하여 14만여 명이 사망함. 지진 직후의 혼란 속에서 조선인 학살 사건, 가메이도 사건도 발생함. 9월 2일 - 일본 정부가 민심동요 방지를 위해 한국인 폭동 유언비어를 살포. 9월 3일 - 일본 도쿄에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등이 천황 암살기도 혐의로 검거 9월 8일 - 로건 국제공항 개항. 10월 - 김소월의 가 에 발표. 10월 11일 - 전라남도 순천의 소작인이 소작료 불남 결의. 10월 12일 - 일제 강점기 마산시 ~ 오사카 간 정기항로 개설. 10월 16일 - 월트 디즈니 회사가 월트 디즈니와 그의 형제 로이 디즈니에 의해 설립되다. 10월 29일 - 터키 공화국 성립. 11월 7일 - 전국형평사대표자대회가 대전에서 개최. 11월 8일 - 히틀러, 뮌헨 반란 실패. (~11월 9일) 11월 30일 **평안북도청을 의주에서 신의주로 이전 **대동강인도교 준공 12월 1일 - 진주선 (마산-진주) 개통 1월 15일 - 중화민국의 총통, 리덩후이. 1월 17일 - 미국의 중국학자 데이비드 니비슨. 3월 3일 - 미국의 음악인 독 왓슨. 3월 12일 - 미국의 사회운동가, 여성운동가 클라라 프레이저. 3월 22일 - 프랑스의 마임 배우 마르셀 마르소. 4월 5일 - 독일 출신의 지식인, 정치활동가 에르네스트 만델. 4월 25일 - 미국의 블루스 기타리스트 알버트 킹 4월 29일 - 미국의 영화 감독 어빈 커슈너. 5월 9일 - 대한민국의 영화배우 허장강(호적상의 출생년월일은 1925년 5월 9일). 5월 10일 - 구 소련의 정치인 헤이다르 알리예프. 5월 10일 - 아르투르 카우프만 독일의 법학자. 5월 27일 - 미국의 정치인, 헨리 키신저. 5월 28일 - 작곡가, 죄르지 리게티. 5월 29일 - 사회운동가, 김영욱. 5월 31일 - 모나코의 레니에 3세. 6월 28일 - 대한민국 군인 겸 정치가 김계원. 7월 28일 - 일본의 정치인 와타나베 미치오. 8월 19일 - 이탈리아의 경제학자, 빌프레드 파레토. 9월 2일 - 프랑스 수학자, 필즈 메달 수상자 르네 톰. 9월 16일 - 싱가포르 정치인, 리콴유. 9월 24일 - 미국 수학자 라울 보트. 11월 20일 -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작가 네이딘 고디머 12월 2일 - 그리스의 소프라노 성악가 마리아 칼라스 12월 2일 - 알렉산드르 니콜라예비치 야코블레프, 소비에트 연방 및 러시아의 경제학자이자 정치가. 12월 15일 - 수학자, 프리먼 다이슨. 1월 3일 - 체코 작가 야로슬라프 하셰크 1월 22일 - 한국 독립운동가 김상옥 3월 26일 - 사라 베르나르, 프랑스 연극 배우. 8월 2일 - 미국의 제 29대 대통령 워런 G. 하딩. 8월 19일 - 이탈리아 경제학자 빌프레도 파레토 문학상 윌리엄 예이츠. 물리학상 로버트 앤드루스 밀리컨 생리학 및 의학상 평화상 화학상 음력월 월건 대소 음력 1일의양력 월일 음력 1일간지 1월 갑인 소 2월 16일 경신 2월 을묘 대 3월 17일 기축 3월 병진 대 4월 16일 기미 4월 정사 소 5월 16일 기축 5월 무오 대 6월 14일 무오 6월 기미 소 7월 14일 무자 7월 경신 대 8월 12일 정사 8월 신유 소 9월 11일 정해 9월 임술 대 10월 10일 병진 10월 계해 소 11월 9일 병술 11월 갑자 소 12월 8일 을묘 12월 을축 대 1924년 1월 6일 갑신
아르테미스 ()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달과 사냥·야생동물·처녀성의 여신이다. 로마 신화에 나오는 디아나 ()와 동일시된다. 제우스와 레토 사이에서 태어난 딸로 아폴론과는 남매지간이다. 올림포스의 12신의 두 번째 세대에 속한다. 곰과 사슴, 활과 화살, 초승달, 토끼가 대표적 상징물이다. 몸종들과 함께 숲 속에서 사냥을 하며 돌아다니는 야생적인 처녀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달이 비칠 때 그 모습이 나타나는데 그 때는 산짐승과 초목이 춤을 춘다고 한다. 아폴론과 마찬가지로 활을 무기로 들고다니며 그녀의 화살은 순식간에 목숨을 앗아가므로 희생물에게 아무런 고통도 주지 않는다고 한다. 성격이 거칠고 복수심이 강해서 그녀의 진노에 의해 희생된 사람이 허다하다. 헤라는 레토가 임신한 쌍둥이들이 아버지인 제우스 다음가는 권력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자 큰 뱀 피톤에게 레토를 끊임없이 쫓아다니면서 햇빛이 닿는 곳 어디에서도 그녀의 해산을 어떻게든 막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출산이 임박하자 레토는 곤경에 처했다. 헤라의 저주를 받을 것을 두려워하여 어느 곳도 레토를 받아주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레토는 해산할 장소를 찾아 정처없이 떠돌아다니다가 마침내 오르티기아 섬에 당도하였다. 레토가 발을 디디자마자 포세이돈이 섬 위로 파도를 솟구치게 하여 햇빛을 막아주었다. 헤라의 출산 금지령에 어긋나지 않자 레토는 아르테미스를 낳을 수 있었다. 남매 중 먼저 태어난 아르테미스는 생후 9일째 되던 날 레토가 남동생 아폴론을 낳는 것을 곁에서 도왔다. 아르테미스는 3살이 되자 아버지 제우스에게 선물을 달라고 졸랐는데, 그 선물은 다름아닌 영원한 처녀성이었다. 그녀는 제우스에게 평생 자신이 처녀로 남을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 밖에도 아르테미스는 크레타 섬에서 9살 된 시녀들을 골랐으며, 또 퀴를롭스를 찾아가 활과 화살을 받았다. 아르테미스는 성능을 시험해보고자 화살을 쏘아보았는데, 첫 번째 화살과 두 번째 화살은 나무에 맞았고, 세 번째 화살은 짐승에 맞았으며, 네 번째 화살은 부정한 자들의 도시에 떨어졌다고 한다. 행복한 삶을 살았지만 겸손함이 없었던 테베의 왕비 니오베는 레토는 훌륭한 자식을 2명밖에 낳지 못했지만 자신은 훌륭한 자식을 14명이나 낳았다고 뽐내고 다녔다. 이에 진노한 레토는 아르테미스와 아폴론에게 니오베에게 벌을 내리라고 말했다. 아르테미스와 아폴론은 각각 그녀의 딸 7명과 아들 7명을 모두 활로 쏘아 죽였다. 슬픔을 이기지 못한 남편 암피온은 자살하였고, 니오베는 계속 한 곳에서 흐느끼다 바위로 변해버렸다. 아르테미스와 칼리스토 아르테미스를 섬기는 칼리스토에게 눈독을 들인 제우스는 그녀를 유혹하기 위해 아르테미스로 변신하여 그녀와 동침하였다. 얼마 후 칼리스토는 임신하여 배가 볼록해졌고, 이를 눈치챈 아르테미스는 처녀성을 지키겠다는 자신과의 서약을 지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곰으로 모습을 바꾸는 벌을 내렸다. 곰이 된 칼리스토는 아르카스라는 아들을 낳은 후 숲에서 홀로 지냈는데, 어느 날 장성한 아들과 마주치게 되었다. 한눈에 아들을 알아본 그녀가 아들한테 다가갔지만, 어머니를 몰라본 아들은 겁에 잔뜩 질려 화살을 쏘아 죽이려고 하였다. 이를 본 제우스는 동정심을 느껴 아들을 곰으로 변하게 한 다음 어머니와 아들을 함께 우주로 올려보내 큰곰자리와 작은곰자리로 만들어주었다. 악타이온이라는 이름의 사냥꾼이 숲 속에서 한창 사냥을 하고 있다가 우연히 근처의 개울가에서 아르테미스가 목욕을 하고 있는 모습을 목격하게 되었다. 아르테미스는 자신의 알몸을 본 악타이온에게 물을 뿌려 사슴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러자 악타이온이 데리고 온 사냥개들이 주인을 알아보지 못하고 사냥감인 줄 착각하고 달려들었다. 계속 사냥개들을 피해 달아나다 지친 악타이온은 결국 사냥개들에게 붙잡혀 갈기갈기 찢어졌다. 다이아나 청동상, 진-안토인 후든 (1741-1828) 아르테미스는 자기 못지않은 뛰어난 사냥꾼인 포세이돈의 아들 오리온과 함께 사냥하러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했다. 이를 보던 아폴론은 아르테미스가 오리온에게 반하여 처녀로 살겠다는 맹세를 저버릴지 모른다고 우려하였다. 그러던 중 멀리서 오리온이 머리만 내민 채 수영하는 것을 보고, 아르테미스에게 저 멀리 파도에 떠다니는 저것을 한번 쏘아 맞추어보라고 말했다. 그것이 오리온인지 몰랐던 아르테미스는 활을 겨누어 오리온을 쏘아 죽여버렸다. 뒤늦게 사실을 깨달은 아르테미스는 아폴론의 아들이자 후에 의학의 신으로 숭배받게 되는 아스클레피오스에게 오리온을 살려달라고 애원했으나, 제우스가 이를 가로막았다. 그래서 아르테미스는 오리온의 시신을 우주로 올려보내 오리온자리로 만들어주었다. 고대 에베소 주민들은 아르테미스를 유방이 가득한 여신으로 묘사할 정도로 풍요의 신으로 숭배했다. 데메드리오라는 은장이가 아르테미스 신앙을 이용하여 아르테미스 신전모형을 만들어 팔았는데, "사람이 만든 것은 신이 아니다"라는 성 바울의 설교를 들은 주민들은 더이상 신전모형을 사지 않았다. 데메드리오는 직공들과 은장이들을 선동하여 바울의 제자들을 끌고 극장안에 들어갔으며, 격분하여 이성을 잃은 이들은 모임을 2시간이나 계속하였다. 성 바울은 이들을 진정시키려 했으나, 제자들과 소아시아의 고관들이 말려서 극장안에 들어가지는 못했다. 시청 서기관은 은장이들에게 "여러분의 모임이 소요죄로 처벌될 수 있으므로, 풀어야 할 문제가 있다면 법원과 로마제국의 총독들에게 고소하십시오.아데미 여신을 모독한 것도 아니고, 신전 물건을 절도한 것도 아닌데 이 사람들을 끌고온 것은 경솔한 행동입니다."라고 설득해서 해산시켰다.(사도행전 19장 23절에서 41절,새번역을 인용함) 한글성서의 새번역성서와 개역개정판 성서에서는 아데미라고 음역했다. 아마테라스 Theoi Project, Artemis, information on Artemis from original Greek and Roman sources, images from classical art. Hymn To Artemis - The Virgin Goddess of the Hunt A Dictionary of Greek and Roman Antiquities (1890) (eds. G. E. Marindin, William Smith, LLD, William Wayte) 분류:그리스 신화의 여신 분류:풍요의 신 분류:동물의 신 분류:사냥의 신 분류:달의 신 분류:올림포스 12신 분류:제우스의 자식 분류:기독교의 악마 분류:처녀신
아레스 아레스 ()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전쟁의 신이다. 로마 신화의 마르스와 동일시된다. 제우스와 헤라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며 헤파이스토스와는 형제지간이다. 올림포스의 12신의 두 번째 세대에 속한다. 창, 칼, 방패, 놋쇠 갑옷, 전차, 독수리가 대표적 상징물이다. 같은 전쟁신이자 여동생인 아테나가 전략과 방어를 중시하는 것과는 반대로 전쟁의 광란과 학살, 파괴적인 측면을 상징하였는데, 호전적인 성격과 사나운 성미를 가지고 있어서 다른 신들로부터 미움을 받았다. 전투가 벌어지는 곳마다 네 마리의 군마가 끄는 전차를 타며 나타나 무시무시한 소리를 질러 적군을 두려움에 떨게 하였다. 아레스는 체구가 크고 전쟁을 좋아하지만 힘은 그다지 강하지 않아 대부분의 전쟁에서 패배하였다. 트로이 전쟁에서 헥토르의 편에 서서 그리스군과 싸울 때 디오메데스에게 상처를 입고 쓰러지기도 하였고, 알로아다이에 의해 13개월 동안 항아리에 갇히기도 하였는데, 이처럼 그와 관련한 신화와 활약이 많지 않은 이유는 고대 그리스인들이 아테나와 달리 호전적인 그의 성격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레스의 패배는 전투의 승패는 본능적인 파괴와 호전성보다는 지략과 전술이 좌우함을 상징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아레스도 신들과 기간테스간의 전쟁에서는 활약하여 이긴 적이 있다. 아레스는 거대한 산을 번쩍 들어 기간테스를 깔아뭉개 죽였다. 아레스는 본래 트라키아 지방에서 숭배되었던 신으로 전해지며, 그리스의 일부 북부 지역에서만 숭배되었다. 스파르타에서는 중요한 주신으로 숭배되어 초기에는 전쟁 포로를 아레스에게 제물로 바치기도 하였으며, 라코니아의 게론트라이에서 열린 그의 축제 기간에는 여자들이 신성한 숲에 들어가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이와 반면에 테게아의 여자들은 그를 기나이코토이나스(Gynaikothoinas)라 칭하여 제물을 바치고 찬양하였다. 아테네에서는 아레오파고스 기슭에 아레스에게 봉헌된 신전이 있었다. 모든 신들은 그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부모인 제우스와 헤라, 영웅 헤라클레스(헤베의 남편) 역시 그를 싫어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애인이었던 아프로디테와 불화의 여신인 에리스, 그의 숙부이자 지하세계의 황제 하데스는 그를 좋아했다고 한다. and Mars.jpg|섬네일|right|250px|비너스와 마르스, 보티첼리 호전적인 성격임에도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아레스는 사랑과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사랑을 받았다. 아레스는 아프로디테와 함께 그녀의 남편인 대장장이 신 헤파이스토스를 피해 자주 밀회를 즐겼다. 한번은 사랑을 나누던 중 헤파이스토스가 미리 설치한 그물에 걸려 다른 신들로부터 망신을 당하였는데, 이런 일이 있은 후에도 계속 교제를 하였다. 서로에 대한 관리도 철저하였는데, 아프로디테가 아도니스에게 반하자 아레스는 멧돼지로 변하여 그를 받아 죽이고, 아프로디테는 에오스가 아레스를 사랑하는 것을 알게 되자 그녀가 사랑하게 되는 인간은 모두 죽는 저주를 내린다. 아레스는 아프로디테와의 사이에서 공포를 뜻하는 포보스와 두려움을 뜻하는 데이모스, 에로스, 하르모니아를 낳았다. 에로스는 아프로디테와 에로스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후에 추가된 것이라고도 한다. 아레스는 아프로디테와의 사이에서 낳은 쌍둥이 형제인 포보스와 데이모스를 전쟁터로 데리고 다니며 살육을 할 때마다 적군에게 공포심을 심어 주었다. 불화의 여신 에리스와 그녀의 자식들, 그라이아이 중의 한 명인 싸움의 여신 에니오도 이들과 함께 전쟁터를 돌아 다녔다. 아레스는 아테네의 왕 케크로프스의 딸 아글라우로스 사이에서 낳은 딸 알키페를 포세이돈의 아들 할리로티오스가 겁탈하자 그를 때려 죽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포세이돈이 아레스를 고소하여 이해당사자들을 제외한 올림포스 신들로 구성된 재판이 열리게 되었고, 논의 결과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아레스에게 무죄가 선포되었다. 그 뒤 이 재판을 기념하기 위해 재판이 열린 언덕을 아레스의 언덕이라는 뜻의 아레이오스 파고스라고 부르게 되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종교와 살인에 관한 범죄를 심판하기 위한 법정을 아레이오스 파고스에서 열었다. 오늘날에도 그리스의 최고 법원을 아레이오스 파고스라고 부른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서는 동료 신들과 심지어 부모조차도 아레스를 좋아하지 않았다 전하며 그를 미치광이, 악의 화신, 파괴자, 피투성이의 살인마로 묘사한다. 서사시에서 수록된 트로이 전쟁에서 신들은 이해관계에 따라 개별적으로 전투에 개입하였는데, 아레스는 정의와 명분, 특별히 정해진 진영이 없이 잔인한 전투를 즐기며 많은 살육을 하고자 하였다. 그러던 중 트로이의 편에 서게 된 아레스에게 그리스군이 고전하자, 그리스의 편에 서있던 아테나는 역시 같은 편인 헤라의 명령으로 디오메데스에게 힘을 불어넣어 주어 그가 창으로 아레스의 복부에 상처를 입히도록 한다. 제우스는 아레스가 부상을 당한 채 큰 소리로 울며 돌아오자 이렇게 호통을 친다. "이 변절자야, 나는 올림포스의 신 중 네가 가장 밉다. 너는 전쟁과 싸움 밖에는 모르는구나." 더구나 아테나 역시 이복오빠인 아레스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라버니께서는 포악하고 사나워서 가까이 하기 어렵습니다. 오라버니의의 아우님이신 헤파이스토스 오라버니께서 모든 면에서 차라리 낫습니다." 분류:그리스 신화의 남신 분류:전쟁의 신 분류:감정의 신 분류:불화의 신 분류:올림포스 12신 분류:화성의 신 분류:제우스의 자식
서울특별시장 (서울特別市長)은 서울특별시의 행정 사무를 총괄하는 광역지방자치단체장이다. 다른 광역지방자치단체장은 차관급이지만, 특별시장은 장관급 대우를 받는다. 다만 윤치영 전 시장 대에는 특별히 총리급 대우를 받기도 하였다. 또한 서울특별시장은 정부 지휘 없이 독자적 예산 편성과 일부 세금 조달 등 행정 명령 독자 행사 권한이 있다. 현 재임자는 제37대 박원순 시장이다. 선출 방식 대수 이름 임기 비고 관선 초대 김창영(金昌永) 1945년 8월 15일 ~ 1945년 9월 11일 2대 제임스 S. 킬러프 (James S. Killough) 1945년 9월 12일 ~ 1945년 10월 24일 미군정 최고사령관 존 하지에 의해 임명, 현역 미국 육군 소령 대리 김창영(金昌永) 1945년 9월 12일 ~ 1945년 10월 24일 3대 이범승(李範昇) 1945년 10월 25일 ~ 1946년 5월 9일 대리 김성환(金聖煥) 1946년 5월 9일 ~ 1946년 6월 27일 총무부장으로 임시 대리 4대 김형민(金炯敏) 1946년 5월 10일 ~ 1946년 9월 27일 한성시장(漢城市長)이라는 명칭도 같이 사용하였다. 서울특별시 공식 홈페이지에서는 이 시기의 초대 시장, 즉 김형민 전 서울특별자유시장을 초대 시장으로 소개하고 있다. 선출 방식 대수 이름 임기 비고 관선 초대 김형민(金炯敏) 1946년 9월 28일 ~ 1948년 12월 14일 전재민 수용계획 수립추진 남산동 일본인 여관 13동을 수용소로 활용 요정, 사찰, 빈집 등을 개방하여 전재민 수용 2대 윤보선(尹潽善) 1948년 12월 15일 ~ 1949년 6월 5일 문맹퇴치를 위하여 9개 초등학교 신설, 동회에 국문보급반 편성 운영 관혼상제의 허례허식 타파를 위해 신생활운동 전개 식량배급 행정을 본궤도에 올려놓기 위해 유령인구와 매점매석 단속 3대 이기붕(李起鵬) 1949년 6월 6일 ~ 1949년 8월 14일 한국전쟁으로 부산에 서울특별시 부산행정청을 설치하여 피난온 서울시민 구호업무 3,000명의 걸인을 수용하기 위해 9개의 무료숙박소 설치 운영 1949년 8월 처음으로 운수업자를 지정, 105대의 버스운영(요금 80원) 구분 보수주의 정당, 민주당계 정당 선출 방식 대수 이름 임기 정당 비고 관선 4대 이기붕(李起鵬) 1949년 8월 15일 ~ 1951년 5월 7일 6.25 전쟁으로 피란하는 서울시민 구호 업무를 위하여 부산에 서울특별시 부산행정청 설치 3,000명의 걸인을 수용하고자 9개의 무료숙박소 설치 운영 1949년 8월 처음으로 운수업자를 지정, 105대의 버스운영(요금 80원) 권한대행 전예용(全禮鎔) 1951년 5월 8일 ~ 1951년 6월 26일 서울특별시 부시장 5대 김태선(金泰善) 1951년 6월 27일 ~ 1952년 7월 23일 권한대행 이익흥(李益興) 1952년 7월 24일 ~ 1952년 8월 28일 서울특별시 부시장 6대 김태선(金泰善) 1952년 8월 29일 ~ 1956년 7월 5일 7대 고재봉(高在鳳) 1956년 7월 6일 ~ 1957년 12월 13일 시립병원 등 6개 병원과 보건소의 시설 개선 식수난 해결을 위해 공동정호 100개소 신설 상수도 7만t 증산계획을 국고보조로 시행 8대 허정(許政) 1957년 12월 14일 ~ 1959년 6월 11일 우회도로 정비 및 보도의 대대적인 포장 실시 주택난 해소를 위해 120만평의 미아리지구 택지조성 방안 마련 시립종합병원과 보건소 개방, 방역 위생사업소 운영, 마장동 도축장 완공 9대 임흥순(任興淳) 1959년 6월 12일 ~ 1960년 5월 2일 청계천 암거공사와 용산구∼성동구∼동대문구∼성북구 ∼의정부간 순환도로 추진 1960년 아시아 축구대회 대비 효창운동장에 축구장 개설 4개 보건소 청사 신축 및 공중변소 공동우물, 공중목욕탕 증설 10대 장기영(張基永) 1960년 5월 3일 ~ 1960년 6월 30일 중부병원을 일반병원으로 활용하고, 부속 결핵요양소 신설 23개동의 오물수거 지역확장 및 50개소의 공동우물 설치 노동회관을 보건복지부로부터 인수운영 권한대행 정종철(鄭鍾哲) 1960년 7월 1일 ~ 1960년 10월 8일 서울특별시 부시장 권한대행 김주흥(金柱興) 1960년 10월 8일 ~ 1960년 12월 29일 서울특별시 부시장 민선 11대 김상돈(金相敦) 1960년 12월 30일 ~ 1961년 5월 19일 민주당 최초의 민선 서울특별시장 건전재정을 도모하고, 부정에 일벌백계를 실시함으로써 공직기강확립 도심지 교통량 분산, 각종 공장과 창고의 교외이전 정책 추진 5·16 군사 정변으로 장면 내각 퇴진과 함께 사직 관선 12대 윤태일(尹泰日) 1961년 5월 20일 ~ 1963년 12월 16일 현역 군인 신분의 서울특별시장 1962년 2월 서울특별시행정에관한특별조치법이 제정됨에 따라 중앙관장사무가 대폭이양되고, 행정기구의 대폭적인 개편실시 인구 500만을 기준으로 한 도시계획사업추진 교외지역 발전에 중점을 두고 상하수도 완비 등 사회기반시설 확충 13대 윤치영(尹致暎) 1963년 12월 17일 ~ 1966년 3월 30일 구로, 숭인, 은평, 뚝섬 등 4개지구 4천만평에 대한 도시계획 수립 제2한강교(양화대교) 준공 (1965년 1월 25일), 제3한강교(한남대교) 착공 서울시 최초의 장기계획인 시정10개년 계획 수립 14대 김현옥(金玄玉) 1966년 3월 31일 ~ 1970년 4월 15일 세종로, 명동 등 지하도 개설, 자동차 전용 입체고가도로 건설 및 주요 간선도로 확장 포장 세운상가, 파고다 아케이드, 낙원상가 등 도심재개발 사업 추진 한강개발사업, 남산1 2호 터널 개통, 400여동의 시민아파트 건설 영동1 2지구, 화양 망우지구, 시흥 신림지구 등 대규모 구획정리사업 추진 15대 양택식(梁鐸植) 1970년 4월 16일 ~ 1974년 9월 1일 20년간의 도시기본계획 수립, 계획구역내 6개 지역지구에 대한 건축제한 방침을 정하는 장기계획 수립 영동지구 구획정리사업 등 기본계획 확정 무허가 건물 정리 10개년 계획 및 인구 분산계획 수립 지하철 1호선 건설 16대 구자춘(具滋春) 1974년 9월 2일 ~ 1978년 12월 21일 도시새마을 운동의 약진과 함께 서민주택 건설, 서민생활 보호 등 서민생활 보호를 위한 시책 추진 도시건설의 내실화를 위해 도시기간시설 설치 각종 생활환경시설의 확충 및 불량지구 재개발 등 추진 17대 정상천(鄭相千) 1978년 12월 22일 ~ 1980년 9월 1일 도시의 기능 시설을 배치하여 능률을 제고하고 가로 구조물을 정비 청소행정의 혁신, 도시가스시설 확충 및 의료보험의 확대 등 서민생활안정 종합대책 추진 영세민 취업을 위한 직업알선센터 운영, 에너지 10%절약운동으로 제2의 석유파동 대처 18대 박영수(朴英秀) 1980년 9월 2일 ~ 1982년 4월 27일 올림픽유치단장으로 바덴바덴 IOC총회에 참석하여 88서울 올림픽 유치 「시민헌수운동」을 통해 1천만 그루의 나무를 심는 푸른서울가꾸기 사업의 추진 19대 김성배(金聖培) 1982년 4월 28일 ~ 1983년 10월 14일 지하철 2호선 종합운동장∼교대간, 을지로입구∼성수간 개통 종합운동장 야구장 완공 및 주경기장 건설 추진 20대 염보현(廉普鉉) 1983년 10월 15일 ~ 1987년 12월 29일 지하철2호선, 3호선, 4호선 완공, 한강종합개발 추진, 가락동 농수산물시장 개장, 목동신시가지 건설 아시아경기대회 개최, 서울올림픽대회 준비 경희궁, 보라매, 종묘공원, 석촌호수 공원계획 수립 추진 21대 김용래(金庸來) 1987년 12월 30일 ~ 1988년 12월 4일 제24회 서울올림픽 성공적 개최 상수도 공급, 청소, 주택공급, 복지시설 확충 등 서민생활보호대책 추진 푸른 서울가꾸기 2차 5개년 계획 수립 추진 22대 고건(高建) 1988년 12월 5일 ~ 1990년 12월 26일 시정방침을 시민을 위한 ‘생활행정’시민과 함께하는 ‘참여행정’, 깨끗한 ‘공개 행정’으로 정하고 시정추진 제2기 지하철 건설 추진 및 내부순환 및 북부간선도로 등 도시고속도로 착공 빗물펌프장 확충 및 정비, 제방축조 등 항구적인 수방대책 수립 추진 23대 박세직(朴世直) 1990년 12월 27일 ~ 1991년 2월 18일 24대 이해원(李海元) 1991년 2월 19일 ~ 1992년 6월 25일 도시지하도로 건설을 포함한 중장기 교통대책 마련 추진 식수원인 한강의 효율적인 관리를 위하여 ‘한강관리청’신설 추진 처음으로 쓰레기 소각 처리 방식 도입 25대 이상배(李相培) 1992년 6월 26일 ~ 1993년 2월 25일 주거환경 개선과 문화활동에 대한 지원에 역점을 두고 추진 경희궁, 몽촌토성 등 역사적 유적지 복원사업 추진 불량주택 재개발사업 활성화를 위해 주민동의율을 90%에서 67%로 하향조정 26대 김상철(金尙哲) 1993년 2월 26일 ~ 1993년 3월 4일 역대 최단재임 시장 권한대행 우명규(禹命奎) 1993년 3월 5일 ~ 1993년 3월 7일 서울특별시 부시장 27대 이원종(李元鐘) 1993년 3월 8일 ~ 1994년 10월 21일 각종 규제제도, 법령, 운영방법 등을 재검토하여 시민위주의 쇄신방안 마련 제2기 지하철, 도시고속도로 건설 역점 추진 및 3기 지하철 건설계획 확정 서울정도 600년 사업 추진 28대 우명규(禹命奎) 1994년 10월 22일 ~ 1994년 11월 2일 29대 최병렬(崔秉烈) 1994년 11월 3일 ~ 1995년 6월 30일 각종 시설물의 안전확보와 부실공사 대칙 적극 추진 교통문제 해결을 위한 교통특별대책 수립 추진 민선 30대 조순(趙淳) 1995년 7월 1일 ~ 1997년 9월 9일 민주당(1995)통합민주당(1995~1996)민주당(1996~1997) 시정을 시민중심으로 전환하고 시정운영 3개년 계획과 부문별 중장기 계획 수립 추진 당산철교 재시공 등 각종 도시시설물의 안전점검과 보수 추진 환경기본조례제정, 환경헌장 제정. 서울의제 21 등 환경정책 적극 추진 전국 최초로 사회복지조사 실시하여 시민복지 5개년 계획 수립 권한대행 강덕기(姜德基) 1997년 9월 10일 ~ 1998년 6월 30일 조순 서울시장이 대통령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사퇴하여, 남은 임기 동안을 대행 31대 고건(高建) 1998년 7월 1일 ~ 2002년 6월 30일 새정치국민회의(1998~1999)새천년민주당 (2000~2002) 투명행정 구현을 위한 반부패 시책 추진 (민원처리온라인공개시스템, 청렴계약옴부즈만, 전자수의계약 등) 생명의나무 천만그루 심기, 월드컵공원, 천연가스버스 도입 등 녹색서울 가꾸기 2기 지하철을 임기 내 완성 2002년 한일 월드컵 성공적 추진 32대 이명박(李明博) 2002년 7월 1일 ~ 2006년 6월 30일 한나라당 뉴타운 사업 기반마련 청계천 하천 복원, 서울숲 조성 대중교통체계 전면 개편 서울광장 등 설치 33대 오세훈(吳世勳) 2006년 7월 1일 ~ 2011년 8월 26일 창의시정(다산 콜 센터, 천만상상 오아시스 등) 추진 광화문 광장 조성, 세운초록띠공원 조성 등을 통한 도심 재창조 지하철 9호선 개통 장기전세주택 시프트, 여행 프로젝트 등 서울형 복지 추진 북서울 꿈의숲 조성 등 친환경 서울 구현 및 디자인 서울 추진 전면 무상급식에 반대하여 2011년 8월 24일, 자신의 거취를 걸고 주민투표를 실시하였으나 투표율이 25.7% 에 불과해 이틀 뒤 사퇴 34대 권한대행 권영규(權寧奎) 2011년 8월 27일 ~ 2011년 10월 26일 오세훈 서울시장이 사퇴하여, 남은 임기 동안을 대행(행정1부시장) 35대 박원순(朴元淳) 2011년 10월 27일 ~ 무소속(2011) 민주통합당(2011~2013) 민주당(2013~2014) 새정치민주연합 (2014-2016) 더불어민주당 (2016-) 서울시립대학교 등록금 50% 삭감 (일명 반값 등록금) 맥쿼리 코리아로부터 서울 지하철 9호선 운임 결정권 회수, 민자투자금의 최소운영수입보장제 폐지 심야버스(일명 올빼미버스) 운행 개시 도심 양봉, 도시 텃밭 운영 서울 경전철 우이신설선 개통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관 설립 역대 최장재임 시장 36대 37대 참고 자료 * 윤보선 제2대 서울시장과 이명박 제32대 서울시장은 후에 대통령을 역임했다. * 허정 제8대 서울시장과 고건 제31대 서울시장은 후에 대통령 권한대행을 역임했다. * 고건 제22대 서울시장은 후에 국무총리를 역임했다. * 장기영 제10대 서울시장과 조순 제30대 서울시장은 후에 부총리를 역임했다. 서울특별시청 한성판윤 경성부윤 서울특별시 부시장 http://www.seoul.go.kr/v2007/seoul/mayor_his/mayor.html 분류:1949년 설치
Alpha4.png|섬네일|right|오픈 소스 뮤직 비디오 게임 《스텝매니아》 리듬 게임 이란 음악에 맞춰서 손, 혹은 몸을 사용해 조작하는 게임을 총칭하는 말이다. 리듬 액션 게임 이라고도 한다. 1996년 소니 컴퓨터 엔터테인먼트사의 파라파 더 래퍼를 시작으로 다양한 리듬 게임이 출시되었는데, 특히 1998년 코나미사에서 아케이드 게임장용으로 출시한 비트매니아를 시작으로 리듬 게임 열풍이 불기 시작해 다양한 리듬 게임 시리즈가 출시되었다. 리듬 게임 혹은 리듬 액션 게임은 플레이어의 리듬 감각을 사용하는 액션 게임을 총칭한다. 이 게임은 정확한 타이밍에 지정된 조작을 행하는 것을 요구하며, 화면에는 보통 행해야 하는 조작의 종류와 행한 조작의 정확성을 표시한다. 리듬 게임의 인기는 기타, 드럼이나 마라카스와 같은 악기를 모방한 컨트롤러와 댄스 게임에 사용하기 위한 댄스 매트 등의 시장을 만들었다. 하지만 컨트롤 패드와 같은 기존의 입력 장치 또한 쓰이고 있다. 비트매니아 (beatmania) * 비트매니아 III (beatmaniaIII) 비트매니아 IIDX (beatmaniaIIDX) 댄스 댄스 레볼루션 (Dance Dance Revolution) 팝픈뮤직 (Pop n Music) 기타프릭스 (GuitarFreaks) / 드럼매니아 (DrumMania) 키보드매니아 (KeyboardMania) 파라파라파라다이스 (Para Para Paradise) 댄스매니악스 (DanceManiaX) 유비트 (jubeat) 리플렉 비트 (REFLEC BEAT) 사운드 볼텍스 (SOUND VOLTEX) 아스트로레인저 (Astro Ranger) (굿맨 엔터테인먼트) 이지투디제이 (Ez2Dj) (어뮤즈월드) 이지투댄서 (Ez2Dancer) (어뮤즈월드) 세이빈 사운드 스타 (Sabin Sound Star) (3S 엔터테인먼트) 펌프 잇 업 (Pump It Up) (안다미로) 파라파 더 래퍼 (Parappa The Rapper) (나나온샤) 프로젝트 디바 아케이드 (Project DIVA Arcade) - (세가) 비브리본 (Vib Ribbon) (나나온샤) 스페이스 채널 5 (Space Channel 5) (세가) 삼바 데 아미고 (Samba de Amigo) (세가) 파라파라 파라다이스 (Para Para Paradise) (코나미) 키보드 매니아 (Keyboard Mania) (코나미) 댄스 댄스 레볼루션 (Dance Dance Revolution) (코나미) 드럼 매니아 (Drum Mania) (코나미) 기타 프릭스 (Guitar Freaks) (코나미) 팝픈뮤직 (Pop n Music) (코나미) 태고의 달인 (太鼓の達人) (남코) 기타히어로 (Guitar Hero) (하르모닉스) 록큰 트레드 (Rock n Tread) (자레코) 록큰 피버 (Rock n Fever) (IGS) 네오드럼 (NeoDrumX) (오미크론) 디제이맥스 테크니카 (DJMAX Technika) (펜타비전) 비트크래프트 사이클론 (Beatcraft Cyclone) (누리조이) 캔뮤직 (Canmusic), 보스홀 (Voshall), 패션보스 오투잼 (O2Jam)-온라인 서비스 종료 디제이맥스 온라인 (DJMAX Online)-서비스 종료 디제이맥스 트릴로지 (DJMAX Trilogy) 알투비트 (R2Beat)-서비스 종료 슈퍼 댄서 온라인 (Super Dancer Online) 오디션 (Audition) 온에어 온라인 (On air Online)-서비스 종료 버스트 어 피버 (Burst A Fever) 팝스테이지 (PopStage)-서비스 종료 아스트로레인저 (AstroRanger)-서비스 종료 그루브파티 (GrooveParty) 이지투온 (EZ2ON)-과거 서비스 종료되었다가 현재 서비스 재개 2013년 12월 30일 부로 서비스 다시 종료 클럽데이 (club day) 무브 업 (move up) 러브비트 (love beat) 누리엔 (Nurien) 밴드마스터 (BandMaster) 크레이지 레인 (Krazy rain) osu! 파타폰1,2,3 (Patapon) - 플레이스테이션 포터블 전용 디제이맥스 포터블 시리즈 (DJMAX Portable) - 플레이스테이션 포터블 전용 디제이맥스 테크니카 튠 ( DJMAX TECHNIKA TUNE) - 플레이스테이션 비타 전용 오쓰! 싸워라! 응원단 (押忍!闘え!応援団) - 닌텐도 DS 시리즈 전용 불타올라라! 열혈 리듬혼 오쓰! 싸워라! 응원단 2 - 닌텐도 DS 시리즈 전용 도와줘! 리듬 히어로 (Elite Beat Agents) - 닌텐도 DS 시리즈 전용 리듬에 맡겨라 (무료게임타운) - 피처 폰 전용 리듬천국 골드 / 리듬 세상 (Rhythm Tengoku Gold / Rhythm Heaven) - 닌텐도 DS 시리즈 전용 리듬천국 (Rhythm Tengoku) - 게임보이 어드밴스 전용 프로젝트 디바 (Project DIVA) - 플레이스테이션 포터블, 플레이스테이션 비타, 플레이스테이션 3 프로젝트 미라이 (Project Mirai) - 닌텐도 3DS 전용 리듬스타 (Rhythm Star) - 피처 폰 전용 리듬스타 2 (Rhythm Star 2) - 피처 폰 전용 아이뮤지션 (iMusician) - 피처 폰 전용 아이뮤지션2 - 슈퍼스타 (iMusician 2 - SuperStar) - 피처 폰 전용 리듬체카 (Rhythem Checka) - 피처 폰 전용 뮤직팩토리 (Music Factory) - 피처 폰 전용 뮤직레볼루션 (Music Revolution) - 피처 폰 전용 리얼비트 (Realbeat) - 피처 폰 전용 오스 스트림 (Osu! Stream) - iOS 전용 오스 드로이드 (Osu! Droid) - 안드로이드 전용 뮤직스타 (Music Star) - 피처 폰 전용, PC 연동, PC 노트툴과 연동 탭소닉 (Tap Sonic) - 안드로이드, iOS 전용 탭소닉스타 (Tap Sonic Star) - 안드로이드, iOS 전용 탭소닉 링스타 (Tap Sonic RingStar) - 안드로이드, iOS 전용 오투잼 아날로그 (O2Jam Analog) - 안드로이드 전용 오투잼 U (O2Jam Ultimate) - 안드로이드, iOS 전용 디제이맥스 레이 (DJMAX RAY) - 안드로이드, iOS 전용 디제이맥스 테크니카 큐 (DJMAX Technika Q) - 안드로이드, iOS 전용 Cytus - 안드로이드, iOS 전용 *Tone Sphere - 안드로이드, iOS 전용 Deemo - 안드로이드, iOS 전용 *Arcaea - 안드로이드, iOS 전용 *Lanota - 안드로이드, iOS 전용 *Dynamix - 안드로이드, iOS 전용 *VOEZ - 안드로이드, iOS 전용 *오버래피드 (OverRapid) - 안드로이드, iOS 전용 BMS (Be-Music Script) * PMS VOS (Virtual Orchestra Studio) osu! 스텝매니아 (Stepmania) 비트 (Beats) 분류:비디오 게임 장르 분류:일본의 발명품
한용운 (韓龍雲, 1879년 8월 29일 ~ 1944년 6월 29일)은 일제 강점기의 시인, 승려,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청주. 호는 만해(萬海)이다. 불교를 통한 언론, 교육 활동을 하였다. 종래의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참여를 주장하였으며, 그것에 대한 대안점으로 불교사회개혁론을 주장했다. 3·1 만세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이며 광복 1년을 앞둔 1944년 6월 29일에 중풍과 영양실조 등의 합병증으로 병사하였다. 독립선언서의 "공약 3장"을 추가보완하였다. 또한 옥중에서 조선 독립의 서 (朝鮮獨立之書)를 지어 독립과 자유를 주장하였다. 1910년 일본이 주장하는 한일불교동맹을 반대철폐하고 이회영, 박은식, 김동삼 등의 독립지사(志士)들을 만나 독립운동을 협의하였다. 1918년 11월부터는 불교 최초의 잡지인 《유심》을 발행하였고 1919년 3.1 만세 운동 당시 독립선언을 하여 체포당한 뒤 3년간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하다 풀려났다. 1920년대에는 대처승 운동을 주도하여 중에게도 결혼할 권리를 달라고 호소하기도 하였다. 1926년 시집 《님의 침묵》을 출판하여 저항문학에 앞장섰고, 불교를 통한 청년운동, 언론활동에 참여하였다. 1927년 2월부터는 신간회에 참여하여 중앙집행위원과 이듬해 신간회 경성지부장을 지냈다. 1918년 《유심》에 시를 발표하였고, 1926년〈님의 침묵〉등의 시를 발표하였다. 님의 침묵에서는 기존의 시와, 시조의 형식을 깬 산문시 형태로 시를 썼다. 소설가로도 활동하여 1930년대부터는 장편소설《흑풍》(黑風),《후회》,《박명》(薄命), 단편소설《죽음》등을 비롯한 몇편의 장편, 단편 소설들을 발표하였다. 1931년 김법린 등과 청년승려비밀결사체인 만당(卍黨)을 조직하고 당수가 되었으나 1937년 불교관계 항일단체를 적발하는 과정에서 만당사건(卍黨事件)의 배후로 체포되었다가 풀려났다. 저서로는 시집 《님의 침묵》을 비롯하여 《조선불교유신론》,《불교대전》,《십현담주해》,《불교와 고려제왕》 등이 있다. 일제와 조선총독부에 대한 저항 정신으로 집도 조선총독부 반대 방향인 북향으로 지었고, 식량 배급도 거부했다는 이야기는 매우 유명하다. 또한, 친일로 변절한 최남선에 관하여서는 1937년 자신에게 최남선을 언급한 김홍규에게는 "아직도 최남선이 살아 있소?"라는 막말을 언급하는가 하면, 최남선이 탑골공원에서 인사를 하자, 만해는 모르는 사람이라며 차갑게 대했다고 한다. 만해는 고종 16년인 1879년 8월 29일에 아버지 한응준(韓應俊)과 어머니 온양 방씨(溫陽 方氏)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명은 유천(裕天)이고 자는 정옥(貞玉)이며 용운은 출가 했을때 은사 스님으로부터 받은 법명이다. 만해의 호적상 이름이자 본명은 한정옥이다. 그의 형제로는 형 한윤경이 있었다 본관은 청주이며, 세조 때의 권신 한명회의 동생으로 전구서승(典廏署丞)을 지낸 서원군 한명진(韓明溍)의 후손이었다. 몰락한 양반 사대부 가문 출신으로 아버지 한응준은 홍성군 관아의 하급 임시 관리였으며, 집안은 몹시 가난하였다. 그의 집안은 형 한윤경이 일시적으로 가세를 일으켜 토지를 마련했지만 만해가 토지를 매각해 독립자금으로 썼다고 했다. 유년시대에 관해서는 본인의 술회도 없고 측근에게도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6세부터 성곡리의 서당골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고, 9세에 문리를 통달하여 신동이라 칭송이 자자하였다. 14살이 되던 해인 1892년 풍속에 의해 지주 집의 딸 전정숙과 결혼했으나 그는 가정에 소홀하였다고 한다. 16살 되던 해인 1894년부터는 홍성읍 내 서당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전정숙에게서 아들 한보국을 두었으나 그는 출가하였다. 후일 한보국이 부친인 그를 보러 왔을때 그는 외면하였다 한다. 1894년에 가출하여 동학 농민 운동에 가담하였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는 홍주감영 관군의 중군이 되어 농민군을 토벌하는데 참여한다. 1895년 또는 1897년에 고향 홍성을 떠나 인제군 백담사 등을 전전하며 수년 간 불교서적을 읽었다고 한다. 청년기의 만해 건양 1년인 1896년에 그는 설악산 오세암(五歲庵)에 들어갔다. 후일 그는 나는 왜 중이 되었나 라는 그 자신의 술회에 간략하에 언급하기를 세상에 대한 관심과 생활의 방편으로 집을 떠나 설악산 오세암(五歲庵)에 입산하여 처음에는 머슴으로 일하다가,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고 한다. 출가의 원인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으나, 당시 고향 홍성군 홍주에서도 동학 농민 운동과 의병운동이 전개된 것으로 미루어 역사적 격변기의 상황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동학 농민 운동이 실패한 뒤 한동안 설악산 오세암에 은신해 있다가 다시 고향 홍성군으로 되돌아왔다. 오세암에 머무르면서 그는 불교의 기초지식을 섭렵하면서 선(禪)을 닦았다. 불교에 입문한 뒤로는 주로 교학적 관심(敎學的關心)을 가지고 대장경을 열람하였다. 1896년 하산하여 더 큰 세상을 배우고자 시베리아행을 결심하지만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죽을 고비를 겨우 모면하고 1897년에 귀향하였으나 거처가 없던 그는 1901년 처가에서 2년간 은신하다가 가출한 후 나중에 다시 재출가를 한다. Museum.jpg|섬네일|왼쪽|백담사 경내의 만해기념관 1905년 을사조약 직후 홍성에서는 제2차 의병운동이 일어났고 이때 아버지 한응준은 의병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해 무작정 가출하여 재입산, 백담사(百潭寺)에 가서 김연곡(金連谷)을 은사로 하여 정식으로 출가, 김연곡에게 득도한 다음 전영제에게 계(戒)를 받아 승려가 되었고, 만화(萬化)에게서 법을 받았다. 계명은 봉완(奉玩)이며 법호는 만해(萬海 또는 卍海)라 하였다. 이후 수년 간 불교활동에 전념했다. 이즈음에 불교 관련 서적뿐만 아니라 양계초(梁啓超)의〈음빙실문집 飮氷室文集〉등을 접하면서 근대사상을 다양하게 수용하였다. 1908년 조선 전국 사찰 대표 52인의 한 사람으로 원흥사(元興寺)에서 원종종무원(圓宗宗務院)의 설립에 참여한 뒤 1909년 5월부터 6개월간 원종종무원 시찰단의 한 사람으로 일본 각지를 돌아다니며 신문명을 시찰하고 견문을 넓혔다. 이러한 다양한 경험이 그의 사상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일본을 여행 하던 중에 3·1독립운동 때의 동지가 된 최린 등을 만나 교류하였다. 1909년 12월에 귀국한 뒤 1910년 이후 한문으로 된 불경을 우리말로 옮기는 일, 즉 불교의 대중화작업에 주력하였다. 1909년 초에는 조선불교의 유신을 주장하는 논저《조선불교유신론》을 저술하였다. 1910년 10월에 한일 합방 조약이 체결되자 만주 동북삼성(東北三省)으로 갔다. 이곳에서 만주지방 여러 곳에 있던 우리 독립군의 훈련장을 순방하면서 그들에게 독립정신과 민족혼을 심어주는 일에 전력하였다. 독립군 군관학교를 방문, 이를 격려하고 만주, 몽골, 시베리아 등을 방문하고 귀국하였다. 1909년 초부터 그는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을 집필하여 1910년 초에 탈고하였다. 동시에 그는 백담사에서 거의 독학하다시피하며 대장경을 앙송하고 한문과 인도어로 된 불교 경전들을 한글로 번역하는 작업을 하였다. 한편 1909년부터 그는 승려의 결혼을 허용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만해는 1910년 5월 승려의 결혼을 공식적으로 허락해 달라는 문건을 청원서 형식으로 중추원과 한국통감부에 진정서로 올렸다. 승려에게 결혼을 금지하라고 부처님이 가르친 것은 아니라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대중의 결혼생활, 가장이라는 짐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중생들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승려의 결혼을 허가해 달라는 그의 주장은 그대로 묵살당한다. 한일합방 직후인 1910년 11월에 한용운은 다시 조선총독부에 승려의 결혼을 허가해 줄 것을 청하는 탄원 올렸으나 두 번째 탄원 역시 묵살당하고 만다. 한일합방 직후 조선총독부가 조선인을 차별대우하고 내지인을 우대하자 그는 불만을 드러냈다. 만해의 상좌였던 춘성스님에 의하면 만해는 평소 조선총독부의 조선인 차별 정책에 대해 "왜놈의 머슴살이 같으니라구!"라며 불만을 토로하였다 한다. 1910년 12월 그는 일본이 주장하는 한일불교동맹을 반대철폐하고 이회영, 박은식, 김동삼 등의 지사(志士)들을 만나서 독립운동을 협의하였다. 1911년 송광사에서 박한영·진진응·김종래 등과 승려궐기대회를 개최하여 일본의 조동종(曹洞宗)과 한국불교의 통합을 꾀한 이회광 등의 친일적인 불교행위를 규탄·저지했다. 한편 1913년 회동서간에서 다시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을 발행하였다. 1913년 불교학원과 명진학교의 교사로 초대되어 교편을 잡았다. 1913년 말 범어사에 들어가 범어사의 대장경을 열람하고서 1914년《불교대전 (佛敎大典)》을 저술, 대승불교의 반야사상(般若思想)에 입각하여 종래의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계의 각성과 현실참여를 주장하였다. 1913년 석전 박한영 등과 함께 조선 불교 종무원을 창설하는데 참여했고 그는 사찰을 돌며 강의와 담론을 주도하였다. 1915년 청나라 승려 내림(來琳)의 증보본에 의거하여 정선강의 《채근담 (菜根譚)》의 국한문 혼용체 주해본을 저술하였다. 1917년 8월 조선불교회 회장에 취임했다. 그해 12월 어느날 밤 오세암에서 좌선하던 중 바람에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한용운의 동상 1914년에는 불교 포교의 보편화 대중화를 선언하고 조선불교청년동맹(朝鮮佛敎靑年同盟)을 결성하였다. 조선출교청년동맹의 강령을 손수 지었는데 이를 보면, 첫째로 정교분리(政敎分離), 둘째로는 여러 불교 종단의 통일 또는 연합, 셋째 불교와 사찰의 사회적 진출의 필요 등을 제시하였다. 이는 대중불교의 확산을 위하여 그 출발점을 청년 운동으로 삼아야 한다는 그의 실천행이었다. 그는 불교의 포교가 보편화되려면 일단 청년들에게 침투해야 함을 역설하였다. 천주교와 개신교의 선교 활동, 동학의 포교 확산, 사이비 종교 등의 확산에 긴장한 그는 불교 역시 대중에게 침투하여야 함을 역설하고 불교가 중생의 곁에 가장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방법으로 청소년과 청년층을 공략하는 것을 들었다. 그는 불교의 보편화 운동의 실천을 위하여 승려에서 대중에로 , 산간에서 길가로 등을 내걸었다. 또한 불교 포교의 대중화를 위해서는 교단, 종단간의 갈등을 줄이고 협력하자는 주장을 펼쳤다. 이는 선교진흥론(禪敎振興論)으로 발표되었다. 그에 의하면 불교의 진흥을 위한 필수불가결의 요건은 수행 이상을 확립하는 일이라 하였다. 이에 한용운은 지금까지 조선의 불교는 오교구산과 선교양종이니 해서, 마치 교의(敎義)와 종지(宗旨)가 다른 것처럼 잘못 인식되어 왔다. 선과 교의 본질은 하나이다. 왜냐하면, 선이란 불교의 마음이며, 교란 불교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양자는 서로 배치되는 개념이 아니며, 양자의 이론적 합일과 연대의 실천이 불교 진흥, 포교 확산의 관건이라고 주장하였다. 동시에 한용운은 선원(禪院)이나 강원(講院)의 지도 이념이나 이론, 실수(實修) 등에 있어 외전(外典)도 첨가해야 한다, 그리고 속된 것을 전적으로 배격하지 말 것을 호소하였다. 그는 선교일치를 주장해온 조선 불교의 일승정신(一乘精神)이 새로운 시대의 좌표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또한 해외포교에도 지대한 관심을 기울여서 미국, 중국 등지에 해외법당을 세워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러나 중국은 조선보다 먼저 불교를 받아들인 곳이고 미국 국민들은 대다수가 개신교나 천주교 신자처럼 인식하던 당대의 승려들과 불자들은 그의 해외 포교 주장을 실현 불가능한 이상으로 취급했다. 만해는 1910년부터 대장경과 화엄경 등을 비롯한 불교 경전의 내용을 한글로 번역하여 소개하였다. 1930년대 이후에도 그는 불교 경전의 한글화를 주장했다. 경전의 내용이 한문이나 인도 산스크리트어로서 일반 중생이 읽기에는 너무 힘들다, 어렵다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그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부분은 대장경의 한글 번역이다. 현대포교의 요체는 문서에 의한 홍포였다. 그는 아무리 좋은 말씀도 이해를 하지 못하면 무용지물이라 주장하였다. 불교 경전의 대부분이 한문으로 되어 있어서 일반인이나 문맹률이 높던 당시에는 일반적으로 읽고 이해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방대한 대장경을 쉽게 옮기는 일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는 불교의 교리와 활동, 고승 등에 대한 내용을 한글로 표현했으며《불교대전》에는 대장경 등의 내용을 한글로 해석하였는데 이는 바로 그와같은 시도의 결정이다. 대장경의 요지를 발췌하여 대의를 옮겨 적은 불교대전은 20세기 한국 불교이론서와 《불교성전》들의 효시가 되었다. 그밖에도 그는 불교학 진흥과 포교의 활성화를 위하여서는 각종 금석문(金石文)이나 사장된 자료들이 일반에 소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918년 11월 제자 춘성 등과 함께 월간 불교잡지《유심 (惟心)》을 창간했으며 이 잡지를 통해 불교 논설만이 아니라 계몽적 성격을 띤 글을 발표했고, 또 신체시를 탈피한 신시〈심 (心)〉을 발표하여 문학에 대한 관심을 보였다. 그는 당시 조선불교의 침체와 낙후성과 은둔주의를 대담하고 통렬하게 분석과 비판을 한 저서 조선불교유신론을 발표하여 사상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월간 유심지에서 그는 시 심 (心) 과 수필 고학생, 남모르는 아이들 을 발표하는 등 불교의 보편화와 친숙화를 꾀한다. 불교의 홍보, 포교와 함께 계몽, 자각, 자유정신, 민족정신을 고취하는 논설들을 다수 실은 월간지 유심은 뒷날 그가 관계한《불교》잡지와 함께 가장 괄목할만한 문화사업의 하나가 되었다. 1st movement.jpg|섬네일|왼쪽|140px|서울 탑골 공원에 위치한 3·1 운동 서판 3.1운동 관련자들 사진.jpg|섬네일|210px|오른쪽|1920년 7월 2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기사. 3.1 운동에 참가한 민족대표 48인 공판에 관한 기사, 다섯째 줄 왼쪽에서 네 번째가 한용운 1918년 12월에 발표한 우드로우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감동하여 1919년 1월부터는 전국적인 만세 운동 준비에 참여하고, 백용성(白龍城) 등과 함께 불교 지도자들을 소집하여 손병희 등 천도교 지도자들과 이상재 등 일부 기독교 지도자들과 회합하였다. 그는 독립선언문의 내용을 둘러싸고 최남선과 의견충돌을 하였다. 내용이 좀더 과감하고 현실적이어야 하겠다고 생각하였으나, 최남선 등은 만해의 주장이 급진적이고 과격하다며 반대했고 결국 만해가 제시한 조건들 중 마지막의 행동강령인 공약 제3조 최후의 일인까지 쾌히 우리의 의사를 발표하자 만이 수용, 독립선언서에 수록되었다. 1919년 3·1 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고,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으며 일설에는 용성 선사의 도장도 그가 찍었다 한다. 경성 탑골공원에서 독립 선언서 낭독과 만세 운동에 가담했다가 피신하지 못하고 조선총독부 경찰에 체포되었다. 민족대표자들은 평화 시위를 기획하였는데 시위는 격화되었고, 민족대표자들은 자수를 결심한다. 한편 그는 자수하기 직전의 민족대표자들 중 체포된 뒤 고문당할 것을 두려워하며 걱정하는 민족대표자들을 보고 화장실에서 인분을 퍼다가 머리에 끼얹었다 한다. 이종일의 회고에 의하면 "체포되기 전 만해는 일제의 고문 및 위협에 벌벌 떠는 나약한 민족대표들에게 인분을 퍼다가 머리에 퍼부었다."고 한다. 그는 피신하지 못하고 만세운동을 진행하던 중 탑골공원에서 조선총독부 경무국 순사들에 의해 체포되었다. 이어 피신한 다른 민족대표자들이 자수함으로써 바로 서대문형무소로 넘겨지고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받고 복역하였다. 한편 체포된 만해는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되어 복역하며 재판을 받았다. 이때 옥중에서 변호사는 물론 사식과 보석을 거부할 것을 결의하고 수감생활을 한다. 그리고 옥중에서 조선독립의 서 를 집필하다가 발각되어 결국 원본을 형사에게 제출했다. 그러나 만해는 한편으로 조선독립의 서 를 일본인 서울지방법원 검사에게 제출하기 이전에 일부를 휴지에 작은 글씨로 옮겨 적었다. 그리고 그것을 접어 형무소 밖으로 나가는 의복의 갈피에 집어넣었다. 이렇게 외부로 나온 그 선언서는 상해까지 전달되었다. 인간의 권리와 자유와 평등에 대한 길을 가로막는 어떠한 형태의 무력, 군사력, 압제 정치는 결국 스스로의 덫에 걸려 스스로 패망하게 되리라는 내용이었다. 옥중에서 작성한 조선독립의 서 는 종이를 노끈처럼 말아 유일하게 그의 옥바라지를 하던 춘성 스님을 통해 상하이로 보내져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 1919년 11월 4일의 기사 부록에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 라는 제목으로 발표, 보도되었다. 그가 출옥하자 많은 면회객이 찾아왔다. 그런데 그가 인사를 하는 것을 보고 면회객들은 이상하게 여겼다. 이에 만해는 자신을 마중하러 나온 인사들에게 "너희들은 이런 출옥의 인사를 할 줄은 알고, 인사를 받을 줄은 몰랐더냐?" 하고 대성질타하였다. 1922년 5월 출옥 후에는 언론에 칼럼을 발표하는 동시에 1922년부터 1923년까지 민립대학 설립운동과 물산장려운동 등의 민족운동에도 참여했다. 이 기간 중 그는 김성수, 조만식, 안재홍, 이광수, 방응모 등을 만나 인맥을 쌓기도 했다. 글 못지않게 연설가로서도 남다른 능력을 지니고 있던 그는 1922년 5월 전조선학생대회 주최로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강연회가 개최되자 3인의 종교 지도자의 한 사람이자 연사의 1인으로 초빙되었다. 대회가 열린 날 두 번째 연사로 나선 만해가 강연하자 청중이 극도로 열광하여 결국 다음 사람이 강연을 포기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1922년 9월 잡지《개벽》에 옥중시 무궁화 심으라 를 발표하였다. 한편 그의 속가 형 한윤경은 150섬 이상을 수확하던 홍성군의 대지주였지만 그는 형의 땅을 팔아서 독립운동 자금으로 썼다. 한윤경의 아들이자 조카인 한창국은 일찍 죽고 종손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한다. 1922년 출옥 후에도 일본경찰의 감시 아래에서 강연 등 여러 방법으로 조국독립의 열변을 토하였다. 1920년대에 부인이 있는 대처승이 속인들에게 사이비 중이라고 모욕을 당하는 것을 보고 대처승 운동을 주도하여 중에게도 결혼할 자격을 달라고 호소하기도 했다. 1924년부터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논설위원을 겸하며 계몽, 사회 참여를 촉구, 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칼럼을 송고하였다. 1923년 1월 동아일보에 논설 조선 급(及) 조선인의 번민(煩悶) 을 발표한다. 1924년 조선불교청년회 회장에 취임했고, 다시 조선불교청년회 총재로 선임되었다. 1926년 시집《님의 침묵 (沈默)》을 출판하여 저항문학에 앞장섰다. 님의 침묵에서 그는 인위적으로 한글 표준어를 쓰지 않고 충청도 방언과 토속어가 세련되지 않은 표현으로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향토적 정감의 방언 및 토속어 애용과 서민적인 시어의 활용은 님의 침묵에 민중정신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1925년부터 백담사에서 집필하여 1926년 경성 안동서관에서 발행한《님의 침묵》은 당시 자유주의적, 남녀간의 연애를 위주로 하던 한국문단의 영향을 받지 않고 생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민족의 현실과 이상,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요구되는 주체적 자세에 대해 노래했으며, 더욱이 그것을 풍부한 시적 이미지로 아름답게 형상화해 수준 높은 민족문학의 경지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는 조선의 독립, 혹은 자연을 님 으로 표현하여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부처로도 해석되고 이별한 연인으로도 해석되는 화법을 구사하여 총독부 학무국의 검열 탄압을 피하였다. 1927년 2월에 이인, 김병로, 허헌, 조병옥, 허정숙 등과 함께 종교, 사회단체를 망라한 사회단체 신간회의 결성에 불교계 대표자의 한사람 겸 경성부 서부 지역 대표자의 한 사람으로 적극 참여하여 중앙집행위원의 한 사람이 되었다. 신간회 조직을 결성하는 주도적으로 참여한 그는 1928년 다시 신간회 중앙집행위원의 한사람에 선출되고 신간회 경성지회 회장(京城支會會長)에 피선되어 허정숙 등과 신간회 경성지회에서 활동하였다. 1929년 광주항일학생운동이 일어났을 때는 학생 시위를 보고 그것을 민족적·민중적 운동으로 확산시키고자 민중대회를 계획했으나, 조선총독부 밀정에게 발각, 총독부 경무국에 의해 무산되었다. 1931년 조선불교청년회(朝鮮佛敎靑年會)를 조선불교청년동맹(朝鮮佛敎靑年同盟)으로 개칭, 불교를 통한 청년운동을 강화하였다. 이후 많은 논문과 논설을 발표하여 불교의 대중화와 독립사상 고취에 힘썼다. 특히, 고루한 전통에 안주하는 불교를 통렬히 비판하였으며, 승려의 자질 향상, 불자에게 생계를 의존하지 않기, 기강확립, 생활불교 등을 제창하였다. 또한 주량 조절만 가능하다면 승려들도 음주를 하게 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1930년 잡지《불교(佛敎)》의 필진이 되었다. 1931년 6월 잡지《불교(佛敎)》를 인수하여 사장으로 취임했다. 그전까지는 권상로(權相老)가 맡아오던 이 잡지를 인수하여 불교의 홍포에 온 정력을 기울였다. 같은 해 김법린·최범술·만공·김상호 등이 조직한 청년법려비밀결사인 만당(卍黨)의 당수로 추대되었다. 1931년 6월부터 2년 남짓 동안은 친일파로 전락한 권상로에게 인수한 《불교》를 발간하는 일에 전념한다. 그러나 경영난으로 1933년 9월 결국 권상로에게 재인수하고 만다. 그는 조선 불교가 일본 불교에 예속되지 않고 독립해야 함을 역설하였다. 한편 한 강연에서 그는 조선총독부나 일본 불교에 아첨하는 일부 승려들을 질타하기로 했다. 그간 "세상에서 제일 더러운 것이 무엇인지 아느냐"고 묻자 아무도 그 물음에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세상에서 제일 더러운 것은 똥이올시다. 똥! 그런데 그 똥보다 더 더러운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겠습니까?"라고 하자 역시 아무도 대답을 하지 못했다. 가난한 불자들의 시신을 염습해본 적이 있는 한 사람은 시체라고 하였다. "내 경험으로는 똥보다 더 더러운 것이 송장 썩는 것이올시다. 똥 옆에서는 식음을 할 수 있어도 송장 썩는 옆에서는 차마 음식이 입에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라는 것이다. 그의 말을 듣고 일부는 좌석을 이탈하려 하였으나 좌중에 압도당해 움직일 수 없었다. 이어 만해는 "시체보다 더 더러운 것이 있으니 그것이 무엇일까?"하고 물었다. 아무도 답을 하지 않자 한용운은 굳은 표정으로 강연대를 주먹으로 내리치며 "그건! 바로 여기 앉아 있는 31본산 주지 네놈들이다!"라고 일갈하고는 즉시 단상에서 내려와 퇴장해버렸다. 반일 혹은 일본 불교에의 흡수를 반대하는 그를 두고 불령선인이라는 지적이 계속되었고 그는 결국 조선총독부 형사들의 감시하에 놓이게 된다. 한편 조선총독부로부터 생계비와 연구비를 지원받는 조건으로 전향한 최남선이 탑골공원 근처에서 마주쳤을 때 "오랜만이오. 만해."라고 먼저 인사하자 그는 "당신이 누구요?"며 냉정하게 답하였다. 최남선이 "나는 육당이오. 나를 몰라보겠소?"라고 하자 만해는 "뭐, 육당? 그 사람은 내가 장례 지낸 지 오랜 고인이오."라고 말하고는 사라졌다. 최남선이 전향을 선언하던 날 한용운은 그의 제사상을 마련하고 제사를 지냈다는 소문도 있었다. 1931년 53세의 나이에 주변 친구들의 권유로 21살 연하의 유숙원과 재혼하였다. 유숙원은 결혼하기 전까지 단성사 옆에 위치했던 진성당병원의 간호사로 일하였다. 다음 해에 딸 영숙이 태어나고 1933년에 심우장을 지으면서 여생을 보내며 작품활동을 지속하였다. 1935년 장편소설《흑풍》을 조선일보에 연재하였다.《흑풍》에서는 검열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배경을 청나라를 무대로 하고, 억압에 대한 투쟁정신을 묘사하여 조선총독부에 대한 저항성을 은근히 보여주고 여성해방문제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삽입하여 반봉건 정신 및 여성도 인격체라는 견해를 설파하였다. 1936년 단재 신채호의 시신이 비밀리에 입국한 것을 접하고 방응모와 함께 신채호의 묘비건립과 정약용 서세100년기념회 개최에 참여했다. 1936년《조선중앙일보》에 장편 《후회 後悔》를 연재하였다. 이러한 소설을 쓴 까닭은 원고료로 생활에 보탬을 얻기 위한 까닭도 있지만 그보다도 소설을 통하여 민족운동을 전개하려는 의도가 더 큰 것으로 이해된다. 1937년 불교관계 항일단체인 만당사건(卍黨事件)의 배후자로 검거, 서대문형무소에 재투옥되었다가 석방되었다. 1937년에 독립군 전쟁 중 사망한 김동삼의 시신이 조선으로 도착하였다. 아무도 그의 시신을 거두거나 수습하려 하지 않았는데 한용운이 홀로 찾아가 통곡하며 시신을 수습하였다. 석방 후 불교의 혁신과 작품활동을 계속하였고 1938년에는 장편《박명(薄命)》을 발표하였다. 1938년부터는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에 반대하여 학도병 거부 운동을 벌였다. 작품으로는 여러 장편 외에 장편소설인 《박명(薄命)》이 있고, 저서로는 시집《님의 침묵》을 비롯하여《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십현담주해(十玄談註解)》,《불교대전》,《불교와 고려제왕(高麗諸王)》등이 있다. 그는〈님의 침묵〉외에도《신인 문학》과《삼천리》에 시 꿈과 근심 , 실제 (實際) ,《조광》에 수필 최후의 5분간 , 조선일보에 장편소설 흑풍, 박명, 조선중앙일보에 소설 후회와 중편소설 죽음 등을 발표하였다. 중일전쟁 이후로도 그는 계속 징용이나 보국대 또는 일본군을 찬양하는 글을 쓰지 않으며 강연도 하지 않았다. 또한 강연 협조 등도 거부하였다. 또한 1937년부터 강요된 신사 참배와 일장기 게양을 거부하고, 조선총독부의 일본식 호적에 이름조차 올리지 않았다. 만년에는 경성부 성북동의 심우장을 친히 지어 거처했는데, 심우장은 후일 서울기념물 제7호로 지정되었다. 1939년 경상남도 사천군 다솔사(多率寺)로 내려가 회갑을 맞으면서 몇몇 동지들과 함께 자축연을 가졌다. 다솔사는 당시 민족독립운동을 주도하던 본거지였다. 1940년 5월부터는 창씨개명 반대운동을 하였고 1943년에는 조선인 학병출정 반대운동을 전개했다. 만년에는 방응모, 정인보, 안재홍, 홍명희, 김성수, 만공 등과 교류하며 그들이 보내주는 생활비로 어렵게 생활하였다. 일제의 극심한 탄압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비타협적인 독립사상을 견지하다가, 조선총독부와 마주보기 싫다며 북향으로 지은 성북동 집인 심우장에서 냉방으로 생활하였다. 중풍으로 거동이 불편한 만해의 생계는 그의 친구인 안재홍, 방응모, 김성수, 송진우, 조만식, 최남선, 이광수, 윤치호 등이 십시일반으로 부담해주었다. 말년에 중풍과 영양실조로 고생하였지만 병원 진료를 거부하다가 1944년 6월 28일 조선총독부의 특별 훈련으로 공습경보가 발령되었을 때 혼수상태에 빠졌다. 이후 계속 혼수상태로 있다가 1944년 6월 29일 심우장에서 중풍으로 승랍 49세, 세수 66세로 열반에 들었다. 그가 사망하였던 1944년은 일본 제국이 패망하기 1년 전이자 광복을 1년 앞두고 있던 때라 그토록 염원하던 조국의 독립은 끝내 생전에 보지 못하였다. 그리고 그가 사망한지 1년 후인 1945년 8월 15일에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일본 제국이 패망하게 되면서 대한민국이 광복을 맞이하게 되었다. 만해의 흉상 사망한지 1년 후인 1945년 8월 15일 일본 제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하면서 조선은 광복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한용운 본인은 1년 전에 고인이 되었기 때문에 그토록 염원하였던 광복의 모습은 보지 못하였다. *동지들에 의하여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미아리 사설 화장장에서 다비된 뒤 망우리 공동묘지에 유골이 안치되었다. 후일 그 옆에는 부인 유숙원 여사의 묘소가 오른편에 매장되었다. 그는 문학을 전문으로 하지는 많았지만 님에 대한 그리움과 곧은 지조를 표현한 작품들을 통해 해방후에도 인기를 끌게 되었다. 그후 문인, 저항 시인, 대처승, 출가 승려로만 인식되다가 1960년대부터는 그의 독립운동 역사가 학자들에 의해 재조명 받기 시작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헌을 기려 1962년 3월 1일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1967년 그가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던 탑골공원에는 후에 승려 운허에 의해《용운당 만해 대선사비》(龍雲堂 萬海 大禪師碑)가 세워졌다. 고향인 충청남도 홍성군 홍성읍 남산공원에 동상이 세워졌고 홍성읍내 장터에도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 1973년 신구문화사에서《만해 전집》6권이 간행되었다. 그의 결성면 성곡리 박철동 잠방굴마을 생가지는 1989년 12월 24일 충청남도 기념물 제75호로 지정되었다. 1990년에 생가가 복원되고 기념관이 건립되었다. 1991년에는 만해의 업적을 기리는 만해학회가 설립되었다. 그밖에 만해기념관, 만해사상선양회 등이 세워졌다.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에는 만해문학박물관이 건립되었다. 후에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만해 생가지에는 생가복원에 이어 사당을 건립하고 안내판을 설치하였다. 시와 작품에 있어 퇴폐적인 서정성을 배격하였으며 조선의 독립 또는 자연을 부처님에 빗대어 불교적인 님 으로 형상화했으며, 고도의 은유법을 구사하여 조선총독부나 일제 정치에 저항하는 민족정신과 불교에 의한 중생제도(衆生濟度)를 노래하여 조선총독부 학무국의 검열을 교묘하게 피하였다. 여기에서의 님은 보는 관점에 따라 조선의 독립, 자연, 부처님 혹은 이별한 연인 등으로도 해석이 가능한 어법을 구사하였다. 그는 대표작 님의 침묵을 비롯한 시집, 작품집에서 중심을 이루고 있는 님 은 연인·조국·부처 등 다의적인 의미를 지니며 그에 따라 님의 침묵 이라는 표현은 당시의 민족적 상황을 은유적으로 상징하였다. 또한 세속적인 정감의 진솔성이 불러일으키는 인간적 설득력과 함께 세속적인 사랑을 표출하면서도 세속사의 진부함에 떨어지지 않으며 목소리 높여 민중정신을 강조하지도 않는다는 작품평도 있다. 그는 당시 상황을 시적 주체인 나 가 님과 이별하여 님이 부재하고 침묵하는 시대로 규정하면서도, 님은 이 자리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나 는 진정으로 님의 존재를 깨닫게 된다는 변증법적인 진리 또는 부처에 대한 믿음, 이별한 연인에 대한 애정을 확신, 재다짐하는 것을 드러내고, 새로이 나 는 이 자리에는 계시지 않는 님 또는 돌아올 님과 다시 합일될 수 있다는 뜻을 노래한다. 또한 내가 님과 새로이 만나기 위해서 나는 님이 존재하지 않지만 님에 대한 의리와 절개를 지키고 님에 대한 철저한 복종이 요구되는데, 그 절개와 의리, 복종을 통해서 비로소 님 에 대한 신의도 지키면서 한편으로 나 는 자유로워진다는 복종과 자유의 변증법 을 노래한 것은 역사의 필연성의 인식을 통해 진정한 자유를 획득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출한다. 그는 식민지하에 있는 조국의 운명과 독립의 필연성 또는 오지 아니한 극락세계와 다시 만나게 되는 그 날, 그리고 그 날을 위한 실천, 변함없는 믿음을 통해 진정한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다는 진리를 작품들을 통해 형상화, 승화시켰다. 형식적인 측면에서도 그의 시는 오언절구나 칠언절구, 3.4조 등 당시 조선의 시조, 시의 형식에 얽매이지 않았으며 산문시의 전형이 되었다. 은유와 역설의 자유로운 구사를 보여주며, 정형적인 틀을 완전히 벗어난 산문적 개방 속에서도 내재율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근대 자유시의 완성에도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불교대전 (佛敎大典)》(1913년) 《조선불교유신론 (朝鮮佛敎維新論)》(1913년) 시집 《심》 시집 《님의 침묵》 《유마힐소설경강의 維摩詰所說經講義》(1933년) 《십현담주해 (十玄談註解)》 《불교와 고려제왕 (高麗諸王)》 《조선독립의 서 (朝鮮獨立之書)》 《정선강 채근담》 《흑풍》(1935년) 《후회》(1936년) 《박명 (薄命)》(1938년) 《죽음》 시 꿈과 근심 실제 (實際) 나룻배와 행인 님의 침묵 《최후의 5분간》 그는 모든 중생은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불경의 사상을 인용하여 이를 현대적 자유사상에 연관시켜 생각하였다. 그는 이것이 만인의 평등사상을 설파하였다. 만해의 불교 사상은 흔히 불교사회혁신주의로 요약된다. 그는 조선의 민중이 역사 이래로 지배자들로부터 억압과 수탈을 당해왔음을 인식하고 불교가 민중을 구제하거나, 아니면 현실에서 민중들을 위로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주장하였다. 저서인 《조선불교유신론》에서 그는 불교혁신론을 주장, 산사로 들어가 고결한 이상만을 추구하는 점을 비판하고, 한국불교의 침체와 낙후성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개혁을 주장하였다. 그는 불교사상이 자유주의, 평등주의, 구세주의, 진보적 입장에 서야 함을 역설했다. 그는 어떠한 진리와 진실을 대중에게 강요하지 않는 불교가 미래의 인류문명에 가장 적합한 교리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조선에서는 고결한 이상만을 추구하거나 산에 들어가 낙후성을 면하지 못하고 있음을 비판하였다. 그는 사원운영의 혁신을 주장하는 내용에서 불교의 대중화·민중화라는 기본사상이 도출되어 나온다. 그는 불교의 민중화를 위해 불교 교리와 제도, 불교 재산을 일부 고위층 승려들, 간부 승려들이나 종단이 독식하지 말고 민중화, 사회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청년불교를 제창하고 젊은이들의 불교 포교 및 불교 부흥을 위해 노력했고 《불교대전》 등 불교경전의 한글 번역작업에 착수했으며, 금강경, 화엄경 등 불교 서적의 한글 번역과 불교 서적의 해석서, 해석 칼럼과 논문 등을 발표하였다. 한편으로 《불교교육 불교한문독본》, 《정선강의 채근담 (精選講義菜根譚)》의 편찬에 참여하고 불교잡지인 《유심》, 《불교》 등의 잡지 간행에 힘쓰며 불교학교와 강연회를 주최하는 등 불교의 대중화, 보편화를 위해 노력했다. 또한 그는 생활불교가 되려면 독신이 아니라 생산적인 부부관계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승려는 결혼하면 안된다는 것이 편견이라 주장하고, 승려의 취처(聚妻)를 허락할 것 등을 주장했다. 대중의 결혼생활, 가장이라는 짐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대중의 입장을 이해하겠느냐는 것이다. 그는 승려의 결혼이 불교 교리에 어긋나지 않음을 주장하였고, 원효 등 대처승의 사례를 소개하기도 했다. 결혼의 타당성을 입증하기 위하여 그는 윤리적·생물학적 여러 논거를 제시하였다. 한편 그의 대처승 허용 운동, 승려의 결혼 허가 주장에 대해 불교계에서는 부정적으로 바라봤다. 해방 직후에도 조계종단에서는 만해가 승려의 결혼 자유화를 주장하고, 그 자신도 그것을 실천하였기에 더욱 거북스러운 존재였다. 다만 일부 불교개혁을 추구하였던 운동권 승려의 그룹에서, 불교청년운동을 하는 재가불교청년단체에서 만해를 찾았을 뿐이다. 사원운영에 있어서 그는 염불당(念佛堂)의 폐지와 도시에 사찰 건립을 할 것을 주장하였다. 근본교리에 비추어볼 때 우주에 편재(遍在)한 법신불(法身佛)이 신앙의 대상이 되는 것이지, 결코 특정한 신앙대상이 따로 없는 것이라 보았다. 그는 특히 법당은 산사라는 개념에 반대하였다. 사찰은 사람이 사는 곳에 있어야 하는 것이라는 점이 한용운의 지적이었다. 기존의 염불당 등과 교리에 얽매이는 허례적인 의식들을 타파하고 산중에 있는 절이 도시로 나올 것, 도시로 나와서 여러 국민들과 직접 만나고 직접 면담할 것을 주장했다. 그는 승려들도 노동을 할 것을 주장했다. 최소한 사찰 주변에 땅을 마련하여 자기가 먹을 쌀과 곡식은 스스로 만들며 불자들의 시주에만 의존하는 그릇된 사상을 버리라고 촉구했다. 그는 승려들도 사취(詐取)와 동냥질을 그만두고 스스로 생산활동에 참여할 것을 호소했다. 불교사상의 측면에서 역사를 끊임없는 변전의 운동으로 파악하는 중관론(中觀論)에 기초해 소승적인 소극주의나 현세부정적인 불교를 비판하고 중생의 삶에 참여하고 뛰어들라고 촉구했다. 한용운은 곧 중생의 삶과 일상에서 정토를 구하고, 정토로 인도하자고 역설하였다. 일제 강점기 후반 조선총독부의 조선사찰령 발표에 반대하였다. 총독부는 사찰들이 무분별하게 운영된다는 것을 핑계로 조선사찰령의 발표 이후 거의 모든 사원의 운영권이 총독부의 직속 관리하에 들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통일종단의 조직, 규약, 재정확보 등을 일원화시켜 조선총독부의 관리 감독과 간섭 의도를 무너뜨려야 한다고 보았다. 그에 의하면 현행의 본말사제도(本末寺制度)를 그냥 두되 중앙에 통제기구를 신설하자는 것이었다. 김법린(金法麟) 등을 중심으로 하는 혁신불교파가 세운 불교총무원에서는 이를 그대로 수용하였다. 비록, 당시 승려들의 개혁 의지가 뒷받침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반대와 비방에 시달리렸지만 이는 불교행정조직의 좌표를 제시한 것이었다. 그는 조선 불교가 일본 불교에 편입되는 것을 반대하고 저항하였다. 1910년멀 원종(圓宗) 종무원 이회광이 불교확장이란 미명하에 일본에 가서 조선의 원종이 일본 조동종과 완전히 연합, 동맹할 것 등을 협약하고 오자, 1911년 한용운은 석전 박한영, 백용성 등과 이회광 규탄 및 승려궐기대회를 개최해 이회광을 종문난적(宗門亂賊)으로 규정하면서 원종에 대응되는 임제종(臨濟宗)을 창립한 것은 그의 대표적인 불교자주화운동이다. 임제종 창립을 통해 그전까지는 다소 불분명했던 그의 반제국주의적 사상이 뚜렷해진 것으로 평가된다. 그의 불교자주화운동은 1931년 결성된 조선불교청년총동맹의 이면단체였던 만당활동 등으로 이어졌다. 그는 조선불교청년총동맹의 긴급한 사명으로서 정교분립(政敎分立)과 불교통일의 촉진, 불교의 사회적 진출을 강조하였다. 한편으로 그는 정교분립을 주장하기도 했는데, 이는 종교를 정부 혹은 체제의 하수인으로 삼으려는 조선총독부 학무국 정책에 반대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 1879년 충청남도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출생. 1905년 강원도 인제군 백담사에서 수계 1908년 명진학교(明進學校, 지금의 동국대학교) 졸업. 1908년 조동종대학림에서 연구 28세에 설악산 백담사에서 불문에 귀의. 1911년 박한영 등과 친일불교에 맞서 승려대회 개최 1918년 청년계몽운동지 유심지를 창간,주재 1919년 3월 1일 (→ 3·1 운동) 불교 대표로 독립 운동에 참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3년간 감옥살이. 1924년 불교청년회 회장, 총재 1926년 시집 님의 침묵 출판 1927년 신간회 중앙위원회 위원 1928년 경성지부장 1929년 광주학생운동 민중대회 개최 조선불교동맹 지도자 1931년 만당 당수 1931년 월간 불교지를 인수, 2년간 간행 1944년 서울에서 중풍으로 사망. 자녀는 첫 번째 아내 전정숙 사이에서 얻은 아들 한보국과 두 번째 아내 유숙원 사이에서 얻은 딸 한영숙이 있다. 한보국은 고향인 홍성에서 사회주의 운동을 하다가 한국 전쟁 때 월북하였다.14세에 조혼 풍습에 따라 결혼한 전정숙과는 이혼하고 후에 승려 생활 도중인 1931년 53세에 21세 연하의 유숙원과 결혼하여 대처승이 되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월북한 한보국은 슬하에 2남 5녀를 두었으나 아들 1명은 어려서 요절하였다. 한보국의 다른 부인은 1960년대 무렵 인천에 거주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아버지 한응준(韓應俊, 1856년 ~ 1905년) 어머니 방숙영(方淑英, 1859년 ~ 1912년) * 형 한윤경(韓允慶, 1876년 ~ 1943년) 배우자 전정숙(1877년 ~ 1950년) * 장남 한보국(1904년 ~ 1977년) * 며느리 강씨 ** 손자 ? * 며느리 ? ** 손자 2남 중 1명 요절 ** 손녀 한명심 외 4명 배우자 유숙원(1898년 ~ 1965년) * 장녀 한영숙(韓英淑, 1934년 ~ ) ** 손자 2남 ** 손녀 1녀 민족독립, 불교유신, 자유문학 의 3대 사상가로서 절의의 행적을 남겼다. 강렬한 현실비판 등 현세에서의 실천을 강조한 그의 혁명사상을 가졌다는 평가가 있다. 그는 불교이념에 의한 자유, 평등의 국가사회가 이루어지기를 소망하였다는 평가도 있다. 한편 자유민주주의, 비폭력 무저항주의, 민족자결주의 등에 입각한 소극적, 관념적인 차원에 머물렀다는 시각도 있다.만해 한용운은 대단한 독립운동가다. 스님이면서 독립운동에도 힘썼다. 또 독립 운동을 할때 같이 했던 동지들이 창씨개명 등 일본이 억지로 권유한 것을 하기라도 하면 차갑게 외면했다. 승려의 결혼 허용 주장은 1920년대 1930년대 화제가 되어 사회적 이슈거리와 논란이 되었다. 친하던 벗 또는 호형호제하던 사이로는 이시영(李始榮), 백용성, 최남선, 최린, 김동삼(金東三), 방응모, 신채호, 김성수, 안재홍, 송진우, 정인보(鄭寅普), 김규식, 박광(朴珖), 홍명희, 만공 송월면(宋月面), 이광수, 김일엽, 최범술(崔凡述) 등이 있었다. 그의 문하생들 중에는 춘성도 있었다. 춘성 역시 일제 강점기의 대표적 반일 인사이자 해방 후에도 승려로 활동하였다. 그의 아들 한보국은 일제 강점기의 사회주의자이자 해방 후에는 남로당 당원으로 활동하다가 월북하였다. 1980년대까지 그에게는 아들이 한 사람 있었다는 것 이외에는 아들과 본부인 전정숙의 존재는 세간에 알려지지 않았다. 님의 침묵 3·1 운동 민족대표 33인 민족대표 49인 동학 농민 운동 만해 기념관 신민회 만해한용운심우장 이종욱 만공 춘성 이종욱 김법린 최남선 백용성 박한영 전봉준 서인주 대처승 조선불교회 대한민국 임시 정부 유심 신간회 심우장 안재홍 조만식 방응모 김구 김성수 김일엽 송진우 윤치호 정인보 홍명희 이광수 윤치소 원효 김좌진 김두한 조선일보 동아일보 백담사 김규식 신간회 박헌영 전두환 한보국 독립유공자로 대한민국장을 수여받은 사람 유형관 - 2002년, (야인시대), SBS 드라마 김광식, 《한용운 연구》 (동국대학교출판부, 2011) 윤재근, 《님의 침묵 연구》 (민족문학사, 1985) 김재홍, 《한용운문학연구 1》 (일지사, 1982) 송욱, 《님의 침묵:전편해설》 (과학사, 1973) 박노준·인권환, 《한용운 연구》 (통문관, 1960) 만해기념관 홈페이지 만해 한용운과 아들 한보국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 부자, 애국애족만은 부전자전 승려결혼을 주장한 한용운 한용운:홍성넷 민족대표 33인 한용운과 박희도:“독립의 영(榮), 변절의 욕(辱), 모두 산 자들의 짐인 것을…” 분류: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수훈자 분류:1879년 태어남 분류:1944년 죽음 분류:홍성군 출신 분류:20세기 시인 분류:불교 철학자 분류:민족대표 33인 분류:신간회의 인물 분류:조선의 사회 운동가 분류:대한제국의 승려 분류:대한제국의 작가 분류:일제 강점기의 승려 분류:일제 강점기의 출판인 분류:일제 강점기의 시인 분류:일제 강점기의 불교학자 분류:일제 강점기의 언론인 분류:일제 강점기의 소설가 분류:청주 한씨 분류:20세기 한국 사람 분류:병사한 사람 분류:고문 피해자
킬로그램 국제 원기의 컴퓨터 생성 이미지. 킬로그램 (은 SI 단위계에서 사용하는 질량의 기본 단위이다. 기호는 kg 이다. 국제 단위계의 기본단위 가운데 질량의 단위(킬로그램)만이 역사적인 이유로 그 명칭이 접두어를 포함하고 있다. 질량단위의 십진 배수 및 분수에 대한 명칭 및 기호는 단위 명칭 “그램”에 접두어 명칭을 붙이고 단위기호 “g”에 접두어 기호를 붙여서 사용한다. 킬로그램은 다음과 같은 킬로그램 원기로 정의되는 단위이다. 백금-이리듐으로 만들어진 국제원기는 1889년 제1차 국제도량형총회에서 지정한 상태 하에 국제도량형국(BIPM)에 보관되어 있으며 당시 국제도량형총회는 국제원기를 인가하고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질량의 크기를 결정하는 표준물체로 국제도량형총회에서 지정된 킬로그램원기(백금 90%, 이리듐 10%)가 사용되며, 이 원기의 질량을 1kg으로 정하여 질량을 비교하는 질량의 표준단위로 사용한다. kilogram, 2.jpg|섬네일|국립표준기술연구소에 보관 중인 백금(90%)과 이리듐(10%) 합금으로 이루어진 1kg 원기(原器)의 모습 balance, large view.jpg|섬네일|국립표준기술연구소의 와트 저울 sphere for Avogadro project.jpg|섬네일|아보가드로 프로젝트에 사용되는 1kg짜리 실리콘 구 현재 킬로그램의 정의는 1901년 3차 국제도량형총회(CGPM)가 정한 "kg은 질량의 기본 단위이며 그 질량은 국제 킬로그램원기의 질량과 같다"는 정의에 따른다. 이에 따라 프랑스 파리 근교의 세브르 국제도량형국(BIPM) 금고에는 가로·세로 각 39mm 크기의 1kg 원기 원통이 보관되어 있다. 현재 7개의 SI 기본 단위 가운데 시간(s)·길이(m)·전류(A)·온도(K)·물질량(mol)·광도(cd) 등 6개 단위는 모두 물리적 원리를 바탕으로 정의되어 있는데 반하여, 질량(kg)만이 유일하게 인공적으로 만든 원기를 표준으로 삼고 있다. 하지만, 인공적으로 만든 원기를 표준으로 삼을 경우 인공 원기의 물리적 특성이 변할 수 있다는 문제점이 발생한다. 1kg의 기준이 바뀌면 질량과 관련된 물리량의 정의도 덩달아 바뀌게 된다. 실제로 국제도량형국(BIPM)은 2007년 "kg 원기의 질량이 50㎍(마이크로그램) 줄었다."고 밝혔다. 과학자들이 kg의 정의를 재정립하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인공적으로 만든 인공 원기를 대체하여 kg 표준을 재정립하기 위해 국가간에도 1kg 표준 정의 를 두고 치열한 대립이 발생하고 있다. 이와 같은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다음의 두 가지 방식으로 kg의 정의를 재정립하려는 국제적인 움직임이 있었다. 첫째, 1kg짜리 실리콘 구를 만든 뒤 그 안에 있는 원자 수를 세어 이를 질량으로 환산하는 일명 아보가드로 프로젝트(Avogadro project) 방식과 둘째, 플랑크 상수를 사용하여 전기력을 중력으로 환산하는 소위 와트 저울(Watt balance) 방식으로 kg을 재정의하는 방안 등이 논의되었다. 한국은 미국, 프랑스 등이 연구하고 있는 와트 저울 방식을 지지하였다. 2011년 10월 21일, 프랑스 파리 근교에서 열린 24차 국제도량형총회(CGPM)에서는 120년 이상 킬로그램의 정의로 사용된 국제 킬로그램 원기(原器) 를 폐지하고, 새로운 정의를 도입한다는 방침을 정했다. 2018년 11월 16일 제26차 국제도량형총회(CGPM)에서 아래와 같이 재정의 되었다. 새로운 정의는 2019년 5월 20일 세계 측정의 날부터 발효된다. 새 정의는 질량-에너지 등가를 바탕으로 하고 있어 물질적인 표준 원기 없이 kg 의 정의가 가능하다. SI 접두어는 두 개 이상이 연속해서 붙여질 수 없기 때문에, 접두어 사용시에는 이미 접두어가 붙은 단어인 ‘킬로그램’ 대신 ‘그램’이 사용된다. 예를 들어, 킬로그램의 백만분의 일은 1 µkg (마이크로킬로그램)이 아닌 1 mg (밀리그램)이다. 두 개의 10 데카그램 원기. 그램(g) 톤(t) 질량의 단위 (킬로그램) - 한국표준과학연구원 분류:SI 기본 단위 분류:질량의 단위
아이작 뉴턴 경(, 그레고리력 1643년 1월 4일~1727년 3월 31일, 율리우스력 1642년 12월 25일~1727년 3월 20일)은 잉글랜드의 물리학자, 수학자이다. 학계와 대중 양측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 가운데 1명으로 꼽힌다. 1687년 발간된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프린키피아, "Principia")는 고전역학과 만유인력의 기본 바탕을 제시하며, 과학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저서 중의 하나로 꼽힌다. 이 저서에서 뉴턴은 다음 3세기 동안 우주의 과학적 관점에서 절대적이었던 만유인력과 3가지의 뉴턴 운동 법칙을 저술했다. 뉴턴은 케플러의 행성운동법칙과 그의 중력 이론 사이의 지속성을 증명하는 방법으로 그의 이론이 어떻게 지구와 천체 위의 물체들의 운동을 증명하는지 보여줌으로써, 태양중심설에 대한 마지막 의문점들을 제거하고 과학 혁명을 발달시켰다. 뉴턴은 또한 첫 번째 실용적 반사 망원경을 제작했고, 프리즘이 흰 빛을 가시 광선으로 분해시키는 스펙트럼을 관찰한 결과를 바탕으로 빛에 대한 이론도 발달시켰다. 또한, 그는 실험에 의거한 뉴턴의 냉각 법칙을 발명하고 음속에 대해서 연구했으며, 뉴턴 유체의 개념을 고안하였다. 수학적 업적으로 뉴턴은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와 함께 미적분학의 발달에 대한 성과를 가지고 있다. 또한, 그는 일반화된 이항정리를 증명하고, 소위 뉴턴의 방법이라 불리는 미분 가능한 연속 함수 인 을 푸는 방법을 발명하고, 거듭제곱 급수의 연구에 기여했다. 갈릴레이가 자연현상을 수학적으로 표시가능함을 증명하고, 뉴턴은 그것을 증명했다. 17세기 말경 뉴턴은 물체에 가해지는 힘이 속도가 아니라 가속를 일정한 비율로 증가시킨다는것이 증명되었다. 뉴턴은 1687년 물체의 운동에 관한 3가지 법칙을 "프린키피아 라는 책에서 증명했다.(아래 확인) 뉴턴은 2005년 영국 왕립학회 회원들을 대상으로 한 "아이작 뉴턴과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중에서 과학사에 더 큰 영향을 끼치고, 인류에게 더 큰 공로를 한 사람이 누구인가"를 묻는 설문 조사에서 2가지 모두에서 우세를 보임으로써, 여전히 과학자들에게 영향력이 있음이 입증됐다. 뉴턴은 전통적인 기독교 성직자는 아니었지만, 신앙심 또한 깊었다. 그는 그를 오늘 날까지 기억되도록 만든 자연과학보다도 성서 해석이나 오컬트 연구에 더 많은 시간을 쏟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이클 H. 하트(Michael H. Hart)가 저술한 "The 100"에서 역사상 두 번째로 많은 영향을 끼친 사람으로 기록되었다. 그는 삼위일체설을 부정하였고 유일신인 창조주를 믿었다. 아이작 뉴턴은 율리우스력 1642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에(그레고리력 1643년 1월 4일), 잉글랜드 동부 링컨셔주 울즈소프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뉴턴은 뉴턴의 아버지의 별세 3달 후에 태어났다. 조산아였던 그는 몸집이 매우 작았다. 뉴턴이 3살이었을 때, 그의 어머니가 재혼하면서 그는 외가에 맡겨지게 되었다. 뉴턴은 재혼한 양아버지에게 적대감을 보였고, 이는 뉴턴 자신이 지은 "19살까지의 죄 목록"에도 적혀 있다. 뉴턴의 어머니는 재혼 후 아이를 3명 더 낳았으나, 뉴턴은 자신이 죽을 때까지 결혼을 하지 못했다. 어머니는 8년 후, 두 번째 남편이 죽고 나서야 돌아왔다. 1661년 6월 뉴턴은 삼촌의 권유로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하였다. 그 시절 대학의 가르침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기반을 두고 있었는데, 뉴턴은 이를 르네 데카르트와 같은 현대 철학자의 철학으로 바꾸고, 천문학 역시 갈릴레오 갈릴레이와 같은 천문학자의 이론으로 대신하였다. 1665년 그는 이항정리를 일반화하였고, 이는 훗날 미적분학의 기초가 되었다. 1665년 영국에서는 흑사병이 대대적으로 유행하게 되어, 이 기간동안 케임브리지 대학교는 폐교하였다. 이 시기에 뉴턴은 2년동안 고향에 내려가 있었다. 그의 위대한 업적의 대부분은 이 시기, 즉 1665~1666년에 싹튼 것으로, 유명한 사과의 일화도 이 무렵의 일이다. 2년간의 한적한 시골살이는 과학과 철학에 대한 사색에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으며, 이 시기에 수학, 광학, 천문학, 물리학의 중요한 발견들을 해냈다. 그래서 뉴턴 스스로도 2년간의 휴학 기간에 대해 "발견에 있어서 전성기를 이루었다"고 평가하였다. 1667년 케임브리지 대학교가 다시 문을 열자, 뉴턴은 다시 케임브리지 대학교로 돌아와서 석사 학위를 받았고, 이듬해에는 반사 망원경을 만들었다. 이 공로로 뉴턴은 1672년 왕립학회 회원으로 뽑혔다. 이보다 앞선 1669년에는 뉴턴의 지도 교수였던 아이작 배로 교수의 뒤를 이어서, 케임브리지 대학교 수학과 교수가 된 후, 미적분학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였다. 이 새로운 수학의 발견에 대해서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와의 우선권 문제로 오랫동안 논쟁이 계속되기도 하였다. 그는 새 망원경을 만들어 왕립 학회에 제출함으로써 능력을 인정받기 시작했다. 왕립 학회는 그것에 감명받아 1672년에 뉴턴을 회원으로 선출하였다. 1672년에 획기적인 발견을 했다. 캄캄한 방 안에서 가느다란 빛줄기가 프리즘을 통과하면 빨간색부터 보라색에 이르는 무지개 색과 똑같았다. 이렇게 갈라진 전체색의 빛을 렌즈에 통과시키면 다시 백색광으로 변했다. 뉴턴은 색은 빛의 기본 요소이며, 백색광은 스펙트럼상의 모든 색이 합쳐진 결과라고 결론 내렸다. 또, 스펙트럼상의 모든 색의 빛은 각각 굴절 정도가 다르며 고유하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1675년 박막의 간섭 현상인 뉴턴 환을 발견하였는데, 여기서도 그의 "빛의 입자설"과 네덜란드의 크리스티안 하위헌스가 발표한 "빛의 파동설"의 엇갈린 주장으로, 두 사람 사이에는 한동안 논쟁이 계속되었다.(단, 오히려 라이프니츠와 뉴턴이 서로의 수학적인 업적들을 인정하고 존경했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어서 어느 쪽이 사실인지는 아직도 확실하지 않다.) s tree, Botanic Gardens, Cambridge.JPG|섬네일|케임브리지 대학교 식물원에 있는 "뉴턴의 사과나무" 만유인력의 구상은 오래 전부터 싹이 터 있었으나, 요하네스 케플러의 행성 운동에 관한 3가지 법칙,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지상 물체의 운동 연구, 크리스티안 하위헌스의 진동론 등을 종합·통일하기 위하여, 이론적 연구에 많은 시간을 들였다. 물체 운동 및 만유인력의 기초 법칙을 2대 지주로 하는 이론 역학을 세운 것은 그의 저서 《프린키피아(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에서였으므로, 착상 이래 20년 후의 일이었다.(사람들은 흔히,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진 것을 보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생각해낸 뉴턴의 모습을 떠올리기 쉽지만, 어떤 사람들은 뉴턴의 업적을 극적으로 묘사할려는 사람들이 지어낸 허상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특히, 수학의 왕자라고 불리는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가 대표적인 예이다.) 뉴턴은 1684년 핼리 혜성을 발견한 것으로 유명한 천문학자 에드먼드 핼리와 행성 운동에 대해서 토론할 정도로 천문학에도 식견이 있었다. 1717년, 뉴턴은 에테르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실험을 고안했다. 밀봉된 두 유리 용기에 온도계를 넣었더니. 진공 속에 넣은 온도계가 다른 온도계만큼 빠른 속도로 온도가 올라갔다. 뉴턴은 이것을 공기보다 더 적게 존재하는 미묘한 에테르를 통해 열이 전달되기 때문이라고 결론 내렸다. 뉴턴은 국회의원(1689년)과 왕립 조폐국의 이사(1696년) 등의 사회 활동, 연금술사로서의 활동 등 다양한 활동을 했다. 앙숙 관계였던 로버트 훅이 죽은 뒤, 뉴턴은 왕립학회의 회장(1703년)에 취임하였다. 뉴턴은 1705년에 최하위 훈작사 작위를 받기도 했다. 뉴턴은 1727년 3월 31일 84세의 나이로 평안하게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해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되었다. 공중으로 던져진 볼이 만드는 궤적 곡선 또는 태양 주변을 돌고 있는 행성들의 궤도 곡선은 수학자들에게 커다란 관심거리였다. 대수 체계를 다루는 것은 중세의 이슬람 학자에 의해 발전되었다. 데카르트는 대수 용어(x,y)를 활용하여 기하학적 모양을 설명하기 위한 방법을 보여주었고, 데카르트 좌표라고 알려진 것과 그들이 x,y와 그래프를 이용하여 그린 방법을 보여주었다. 직선의 그래프는 계산하기 쉬운 특성을 가졌다. 바빌로니아 시대 때부터 알려진 공식은 직선 아래의 면적을 계산할 수 있었다. 이 기울기(직선의 경사에 의해 나타나는 변화율)는 y좌표의 값을 관련된 x좌표의 변화로 나눈 값이다. 그러나 곡선에서는 이러한 값들을 계산하기가 더욱 어렵다. 뉴턴 이전의 수학자들은 이것을 하기 위한 한가지 방법으로 근사치를 계산하는 것이라고 깨달았다. 곡선을 연속되는 직선들로, 그리고 곡선 아래의 면적은 연속된 사각형들과 삼각형으로 계산한다. 많거나 작은 사각형들과 삼각형들을 사용하여 더 정확한 근사값을 구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여전히 근사값일 뿐이다. 뉴턴은 울즈소프에 도착하기 전에 이 문제에 대하여 도전을 시작하였다. 1665년 2월에 그는 여전히 대학교 3학년이였다. 그는 프랑스 수학자 페르마와 그의 스승 베로, 둘 다 특정 곡선을 위한 공식을 설명하였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이것들을 모든 곡선에 일반화하여 사용할 수 있는가를 궁금해하기 시작하였다. “나는 페르마의 접선을 그리는 방법으로부터 이 방법에 대한 힌트를 얻었고 이것을 일반화 시켰다.”라고 그는 나중에 밝혔다. 이 문제에 대한 열쇠는 무한 급수를 사용할 수 있는 그의 능력이었다. 뉴턴은 이것을 깨달았다. 무한대까지 더하기 대신에 무한 급수와 관련된 합이 유한의 목표나 한계값과 비슷하다는 것을 께달았다. 그리고 이것을 사용하여 곡선을 사각형으로 구할 수 있었다. 효과적으로 무한수를 사용하고 작은 사각형들을 곡선 아래 면적에 주어서 구했다. 이것이 적분 이다 꽤 중요한 것이므로 잘 봐두는 것이 좋을것이다. # 어떤 물체(질량)에 외부로부터 {힘이작용되지 않으면} 그물체는 원래의 운동상태를 지속한다. 이것을 "관성의 법칙" 라고한다. # 물체에 {힘을 작용하면} 그물체에 (가속도가 붙게되는데), 중요 그가속도의 크기는 "가속도의 작용하는 힘의크기에 비례"하고, 그물체에 질량에 {반비례}한다. # 어떤물체에 작용하는 힘에는 그와 크기가같고, (방향이 반대인힘) "반작용"이 작용한다작용 반작용의 법칙 뉴턴의 과학적 발견은 정밀하며 중력의 힘을 수학적 물리량으로 발견한 것이다.그의 시대에 그는 중력의 역자승 법칙을 밝힌것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중력의 역자승 법칙은 두 물체 사이의 중력 인력은 힘을 두 물체 사이의 거리의 제곱으로 나눈 값에 따라 다르다.사과가 떨어지게 하는 그 힘이 달을 계속 그 접선 방향으로부터 지구를 향해 떨어지도록 하는것이 분명하다.갈릴레오의 책을 읽고 자신의 실험들을 수행하면서 뉴턴은 지표면에서의 중력의 힘이 사과를 지면으로 끌어당기는 힘이라는 것을 알았다. 초기에 그의 책 1권에서, 뉴턴은 중력의 개념을 공식화 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어떻게 달을 이용하여 중력을 연구할수 있는지 설명했다. 만약 이 힘이 매우 작다면 달을 직선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데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너무 세다면 달의 경로를 너무 많이 휘게 하여 달이 자신의 궤도로 부터 지구로 끌려오게 될 것이다 결국 그는 만류인력의 법칙을 설명했다. 왜냐하면 중력은 물체가 무겁든,가볍든 크든,작든 모든 낙하 하는 물체를 똑같이 가속시키기 때문이다.뉴턴은 수학적으로 증명된 전제들을 가지고 천체현상으로부터 물체를 태양이나 몇몇 행성으로 향하게 하는 중력을 유도해 낸다.뉴턴은 프린키피아 3권에서 자연 철학의 두 개의 주류의 통합을 달성했다. 백색광을 분리시키는 프리즘 1672년에 만든 뉴턴의 두번째 반사망원경 뉴턴은 프리즘을 연구했었는데, 프리즘으로 하는 초기 실험에서 뉴턴은 다른 색들은 꺾이거나 다른 각도로 굴절된다는 "굴절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프리즘과 벽 사이에 바늘 구멍이 있는 다른 카드를 놓고 완전 적색 또는 청색의 광선이 분리되어 두 번째 프리즘을 통과하도록 하였다. 두 번째 프리즘은 각 색깔의 광선을 다시 굴절시켜 다른 색을 생성하지 않는다. 그는 청색 빛이 적색 빛보다 더 굴절된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실험은 프리즘이 색을 생성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또한 뉴턴은 "빛은 다른 굴절성의 광선들의 집합이다"라고 정리했다. 뉴턴은 새로운 빛과 색의 이론을 증명하기 위해 그는 두개 더 독창적인 실험들을 고안해냈다. 첫번째는 프리즘에 의해 생성되는 스펙트럼의 경로에 렌즈를 놓는 것이다. 렌즈를 이용해 다른 색 광선들을 합성시키면 원래의 흰색 빛으로 복원시킬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톱니바퀴를 렌즈와 벽 사이에 놓고, 그 톱니가 렌즈로부터 나오는 다른 색 빛의 광선들이 초점에 도달하기 전에 방해하도록 했다. 결과는 벽에 있는 점은 흰 빛이 차단되면서 통과되는 다른 색 광선들에 따라서 변하였다. 독실한 청교도 신자인 뉴턴은 어느 제자가 하느님이 없다고 주장하자, "하느님에 대해서 불경하게 말하지 말게. 나는 하느님에 대해서 연구하고 있다네."라면서 무신론을 주장하지 못하게 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는 성경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고, 성도(Saint)들이 부활하여 하늘에 살면서 눈에 보이지 않게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릴 것이라는 종말론적인 믿음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심판 날 후에도 사람들은 계속 땅에서 살 것이며, 단지 1000년 동안이 아니라 영원히 그러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역사가 스티븐 스노벨렌의 말에 따르면, 그는 그리스도의 임재가 여러 세기 후에 먼 미래에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는데 그 이유가 주위에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사상들이 뿌리 깊이 퍼져있는 것을 몹시 비관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큰 환난이 오기 전에 복음 전파 활동이 전 세계적으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뉴턴은 취미로 연금술에 대해서 연구하였는데, 연구 기록물이 노트 3권 가량이나 되었다고 한다. 뉴턴은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추천으로 국회의원을 역임했는데, 성격이 조용해서 국회의원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다. 그가 1년간의 국회의원 생활을 하면서 유일하게 한 말이 수위에게 한 "문 좀 닫아주시오!"였다고 한다. 뉴턴은 《광학》 제4권에서 물리학 전체를 포괄하고 자신이 선택한 과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통일 이론을 소개하려고 했으나, 그가 책상에 촛불을 켜둔 채 외출했다가 그가 기르던 개인 다이아몬드가 초를 물어서 던져버리는 바람에 아직 공개하지 않은 그의 연구들이 모두 잿더미로 변해버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뉴턴은 조폐 공사의 사장에도 임명되었는데, 그는 화폐 위조범을 잡아 처형하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뉴턴은 젊은 시절에 약혼한 여성이 있었으나, 그가 연구와 일에 매우 몰두하였기 때문에 결혼까지 이어가지는 못하였고, 평생동안 독신으로 살았다고 한다. 그는 시(詩)를 "일종의 천재적인 쓸모가 없는 소리"()로 여겼다. 뉴턴은 손으로 발명품을 만들어 내는 공작에 재능이 있었는데(참고로, 어린 시절에도 뉴턴의 공작 솜씨가 아주 뛰어나서, 초등학생이었던 시절에 학교가 끝난 후, 자신이 직접 만든 물레방아를 돌리고 있었는데, 뉴턴의 솜씨를 샘낸 한 아이가 돌을 던져서, 물레방아를 부숴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화가 난 뉴턴이 그 아이를 흠씬 팼다는 일화도 있다.)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학생일 시절에 휴대할 수 있는 초롱불을 만들어 냈다고 한다. 덕분에 새벽마다 의무적으로 감사성찬례(성공회 미사)에 참석하러 가던 학생들이 편하게 대학교 내 성공회 교회에 갈 수 있었다고 한다. 뉴턴은 남해 회사 주식 사건으로 인해서 2만 파운드를 잃은 적이 있었는데, 이 때 "천체의 움직임은 계산할 수 있어도, 사람의 광기는 도저히 측정할 수가 없다.("I can calculate the movement of the stars, but not the madness of men")"라고 말하였다는 일화도 있다. 뉴턴이 어떤 학자와 식사 약속을 잡았다. 그러나 풀리지 않던 문제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봐도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자, 바람 좀 쐬기 위해서 밖으로 나갔다. 그 학자는 약속을 깜빡 잊은 뉴턴 때문에 혼자 식사를 하고, 결국 뉴턴을 만나지 못한 상태로 집으로 갔다. 문제를 푼 후 뉴턴은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빈 그릇을 보고, "아! 내가 식사를 이미 한 걸 깜빡했군."이라고 말했다는 황당무계한 일화가 있다. 연구하는 도중에 배가 고파진 뉴턴은 하인에게 계란을 가져오라고 했다. 하인이 계란을 가져왔지만, 풀고 있는 문제에 너무 집중을 하는 바람에 끓는 냄비에 계란이 아니라 시계를 넣었다는 일화도 있다. "나는 내가 세상에 어떻게 비춰질지 모른다. 하지만 나 자신에게 나는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은 채 내 앞에 놓여 있는 진리의 바닷가에서 놀며, 때때로 보통보다 매끈한 조약돌이나 더 예쁜 조개를 찾고 있는 어린애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멀리 앞을 내다볼 수 있다면, 그것은 거인들의 어깨를 딛고 서있기 때문입니다." "인류 역사상 뉴턴이 살았던 시대까지의 수학을 놓고 볼 때, 그가 이룩한 업적이 반 이상이다."(독일의 수학자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가 말한 뉴턴에 대한 명언이다. 사람들은 흔히 뉴턴과 라이프니츠가 미적분학을 누가 먼저 발견했는가를 놓고 사이가 나빴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두 사람은 오히려 서로의 수학적인 업적들에 대해서 서로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1671년 유율법() 1684년 물체의 궤도 운동에 관하여() 1687년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 * 뉴턴이 천문학자 에드먼드 핼리의 출판 비용 지원으로 1687년 7월 5일에 출판하였다. 유명한 만유인력의 법칙을 설명할 뿐만이 아니라, 뉴턴 운동 법칙을 통해서 고전역학을 완성한 근대 과학의 명저로 꼽힌다. 1704년 광학() 1707년 보편 수학() 1728년 고대 왕국의 연대기() 1733년 다니엘의 예언과 요한의 묵시록에 관한 평론() 1754년 주목할 만한 성서의 두 변질에 대한 역사학적 해석()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 만유인력의 법칙 미적분학 이항정리 분류:1643년 태어남 분류:1727년 죽음 분류:잉글랜드의 수학자 분류:잉글랜드의 천문학자 분류:잉글랜드의 물리학자 분류:잉글랜드의 철학자 분류:잉글랜드의 작가 분류:잉글랜드의 발명가 분류:잉글랜드의 개신교 신학자 분류:잉글랜드의 성공회교도 분류:영국의 기사 분류:영국의 의전관 분류:영국의 연금술사 분류:이론물리학자 분류:실험물리학자 분류:과학철학자 분류:자연철학자 분류:기하학자 분류:탄도학자 분류:광학자 분류:종말론자 분류:무신론 비판자 분류:아리우스파 기독교인 분류:헤르메스주의자 분류:링컨셔주 출신 분류: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 동문 분류:왕립학회 학회장 분류:지폐의 인물 분류:17세기 잉글랜드 사람 분류:18세기 잉글랜드 사람 분류:17세기 수학자 분류:18세기 수학자 분류:17세기 천문학자 분류:18세기 천문학자 분류:17세기 철학자 분류:18세기 철학자 분류:코페르니쿠스 혁명 분류: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 교수 분류:왕립학회 석학회원
에우클레이데스 (, 기원전 300년경) 또는 영어식 이름으로 유클리드 (, 또는 )는 고대 그리스의 수학자이자 소설가이다. (고대 이집트의 수학자였을 가능성도 있다. 에우클레이데스가 어느 나라 수학자인지 확실하게 밝혀진 사실은 없다.)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의 재위 기간(기원전 323년~기원전 283년)동안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의 부탁으로 최초의 대학이자 도서관, 박물관이라고 불리는 알렉산드리아 대학에서 활동하였고(하지만 이 대학은 현재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며, 정확한 위치도 추측만 하고 있을 뿐이다.), 당시 알려진 정수론 및 기하학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에우클레이데스의 원론》을 집대성한 업적을 가장 높게 평가받고 있다. Euclides, 1703 에우클레이데스의 이름은 (잘, 좋게)+(알려짐, 평판)의 합성어이며, "평판이 좋음, 유명함"이라는 뜻이다. 에우클레이데스의 삶에 관해서 알려진 것은 많지 않고, 그에 관한 소량의 언급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그에 관한 실마리가 될 수 있는 언급마저도 그가 살았던 세기 후에야 프로클로스()와 알렉산드리아의 파포스()에 의해서 쓰여진 것이다. 프로클로스는 5세기에 쓰여진 그의 저서 《주석이 달린 원론》을 통해서 에우클레이데스에 관해 간단히 소개하고 있다. 여기서 에우클레이데스와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 사이의 기하학의 왕도에 대한 일화는 후세의 창작인 것으로 추측되는데, 이는 다른 고대 그리스 수학자인 메나이크모스와 알렉산드로스 3세 메가스 사이의 일화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에우클레이데스(유클리드)의 가장 유명한 저서는 총 13권으로 구성되어 있는《에우클레이데스의 원론》()이다. 기하학 원본이라고도 불린다.(원본은 그리스어로 문자라는 뜻이다.) 에우클레이데스 자신의 독창적인 내용들은 별로 없지만, 그 형태가 단순하고 논리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때 당시까지 밝혀진 기하학과 정수론의 내용들을 다뤘는데, 10개밖에는 되지 않는 공리들에서 465개나 되는 명제들을 유도해냈다. 내용들 중 많은 부분들이 그 이전의 수학자들에게도 이미 널리 알려졌던 것이었다. 하지만 《에우클레이데스의 원론》이 수학사의 고전이 된 이유는 일정한 공리에서부터 결과를 이끌어내는 논리적인 전개였다. 공리 체계에 바탕을 둔 근대 수학은 《에우클레이데스의 원론》에 근원을 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에우클레이데스의 원론》은 수학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저술의 하나로, 출판된 뒤부터 19세기 말 또는 20세기 초까지 수학, 특히 기하학을 가르치는데 중요한 교과서로 쓰였다. 유클리드 기하학이라고 불리는 기하학의 정리들이 작은 공리로부터 출발해서 연역된다. 에우클레이데스의 기하학은 수백 년동안 순수한 기하학 그 자체로 여겨졌으나,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존재가 밝혀지면서 지금은 유클리드 기하학이라고 불린다. 《에우클레이데스의 원론》에 나오는 2개의 정수의 최대공약수를 구하는 알고리즘은 지금도 유클리드 호제법이라고 불리며, 소수의 무한성에 대한 정리 역시 오늘날에도 유클리드의 정리로 불린다. 또한, 《에우클레이데스의 원론》에는 피타고라스의 정리의 독창적 증명이 수록되어 있기도 하다. 《원론》 말고도 현존하는 에우클레이데스의 저서는 다음과 같다. 《주어진 값》()은 기하학에 대한 책이다. 《현상》()은 구면 기하학을 다룬다. 《광학》()은 광학을 다루는 그리스 최고(最古)의 문헌이다. 《도형의 분할에 대하여》()는 주어진 도형을 주어진 비로 분할하는 문제를 다룬다. 아랍어 번역으로 부분만이 현존한다. 《거울 광학》()은 거울을 사용한 기하학 문제를 다루며, 아마 후대의 작품으로 추측된다. 이 밖에도, 문헌에는 에우클레이데스가 집필했다고 수록되어 있는 여러 책들이 전해 오지만, 이들은 짧은 인용을 제외하고는 현존하지 않는다. 《원뿔 곡선》()은 원뿔 곡선을 다룬다. 후에 페르게의 아폴로니오스가 이 내용을 확장하였다. 《포리스마》(). ‘포리스마’()는 어떤 기하학적 작도가 가능할 조건을 제시하는 수학적 정리이다. 《착오의 서(書)》(). 논리적 오류를 다룬다. 《곡면 궤적》(). 이차 곡면에 대한 것으로 추측된다. 아랍 문헌에서는 에우클레이데스가 집필했다고 하는 여러 역학에 대한 책들이 등장한다. 위의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와의 대화뿐만 아니라, 다른 유명한 일화도 전해지고 있다. 어느 날, 에우클레이데스의 강연 도중에 한 제자가 "교수님, 수학은 너무 지루합니다. 도대체 그걸 배워서 어디다가 써먹을 수 있죠?"라고 묻자, 에우클레이데스는 하인을 불러서 "여봐라, 배운 것으로 반드시 이득을 얻으려고만 하는 저 친구에게는 동전 세 닢만 주고 강의실 밖으로 쫓아내라."라고 말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이 일화를 볼 때, 에우클레이데스는 배우는 그 자체를 의미있다고 생각하는 성격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에우클레이데스의 원론 유클리드 기하학 비유클리드 기하학 분류:기원전 4세기 태어남 분류:기원전 3세기 죽음 분류:고대 그리스의 수학자 분류:고대 이집트의 수학자 분류:기하학자 분류:알렉산드리아 출신 분류:그리스계 이집트인 분류:기원전 4세기 그리스 사람 분류:기원전 4세기 이집트 사람 분류:기원전 3세기 그리스 사람 분류:기원전 3세기 이집트 사람
칭기즈 칸 (, 1162년 4월 16일-1227년 8월 25일)은 몽골 제국의 건국자이자 초대 카안이다. 원래 이름은 보르지긴 테무진 (이다. 중국사에는 원(元) 태조 (太祖)로 기록된다. 몽골의 여러 부족을 통합한 군사·정치 지도자로, 초원의 부족들을 통일하고 몽골 제국을 성립시켜 몽골과 중국 지역을 비롯해 한반도에서 중앙아시아와 동유럽에 이르는 넓은 영토를 정복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강, 테무진이 태어난 곳이다. 칭기즈 칸은 1162년에 태어났다고 알려져 있으나 1155년, 1163년, 1167년에 태어났다는 설도 있다. 현재 몽골에서 기념하는 칭기즈 칸의 탄신일은 1162년 11월 14일이다. 테무진의 유년시절에 대한 기록은 자세하지 않다. 칭기즈 칸은 그의 아버지 예수게이가 타타르족과의 전투를 승리로 끝낸 직후에 태어났다. 전설에 따르면 그가 태어날 때 손에 고대 동방 사람들에게 생명을 상징하는 피 한 움큼을 쥐고 있는 등 여러가지 상서로운 징표들이 나타났다. 예수게이는 이를 길한 징조로 생각하여 패배한 타타르 군주, 테무 진 우게의 이름을 따서 자식에게 테무진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칭기즈 칸의 이름에 대한 또 다른 해석으로는 ‘테무진’이 ‘대장장이’라는 뜻임을 근거로 당시 유목민 사회에서 쇠가 중요했음을 반영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그의 유년시대는 결코 행복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9세 때 몽골 왕족 보르지긴족의 후예인 아버지 예수게이가 그의 부족과 오랜 불화관계에 있던 타타르족에 의해 독살되었다. 예수게이가 죽자 부족 사람들은 예수게이와 정적인 타이치우트 일가의 사주를 받아, 예수게이의 미망인 호엘룬과 그 자녀들이 지도력을 발휘하기에는 너무 약하다고 생각하고 기회를 이용하여 권력을 찬탈했다. 이로 인해 테무진의 영세한 가문은 유목민의 일상음식인 양고기와 우유는 전혀 먹지 못하고 풀뿌리와 생선으로 연명하는 극심한 가난을 경험했다. 테무진과 그의 가족은 비록 보르지긴족들의 배척을 받긴 했지만 왕족 출신이라는 이유로 상당한 대접을 받은 것 같다. 무엇보다도 그는 아버지 예수게이가 죽기 전에 정혼해준 아내 보르테를 되찾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몽골 북방에 사는 메르키트족은 예수게이가 그들에게 빼앗은 여자인 호엘룬을 아내로 삼았기 때문에 테무진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메르키트족은 테무진의 아내인 보르테를 납치했다. 테무진은 아버지 예수게이와 의형제를 맺었던 케레이트족의 왕인 토그릴 완 칸에게 사정을 말하여 보르테를 다시 찾아올 수 있었다. 당시 토그릴 완 칸은 몽골 지역 안에서 가장 강대한 통치자였다. 테무진은 결혼기념물로 받은 잘의 모피를 토그릴에게 선물했고 답례로 토그릴 완 칸은 테무진의 흩어진 부족민들을 모아주겠다고 약속했다. 그 후 토그릴 완 칸은 테무진에게 2만 명의 병력을 제공하고 테무진의 어릴 적 친구인 쟈무카도 설득시켜 병력을 제공하게 함으로써 그 약속을 지켰다. 테무진 일가의 궁핍과 이웃 부족의 왕이 제공한 대규모 병력은 상반된 이야기이기 때문에 사실 여부가 의심스러우나, 〈몽골 비사〉, (원조비사)에 나오는 이야기를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강력한 동맹세력의 후원을 받은 테무진은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메르키트족을 패배시켰다. 또한 장래에 자신을 반역할 기미가 있는 부족은 초토화시키는 전략을 세웠다. 이 전략에 따라 그는 메르키트족에 이어 주르킨족의 귀족들도 패배시켰다. 왜냐하면 주르킨족의 귀족들은 테무진의 동맹세력이었으나, 테무진이 타타르족 공격에 나선 틈을 이용하여 그의 재산을 약탈하는 배반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 부족의 귀족들을 사회적 영향력을 이용하여 반란을 일으킬 위험이 있다고 생각하여 모두 처형했고, 평민들은 병졸과 노예로 삼았다. 그는 배후에 적을 남겨놓는 경우가 절대 없었다. 수년 뒤 중국을 침공하기에 앞서 먼저 등 뒤에서 자신을 찌를 유목민 통치자가 없는지 확인했다. 메르키트족을 패배시킨 이래 테무진은 스텝(기마인들이 살던 지역) 지역의 최고 실력자가 되려는 목표를 세웠다. 부족의 지도자들은 테무진의 주위에 몰려들기 시작했고, 12세기말에 이르자 그들 지도자 가운데 일부는 테무진을 몽골족의 칸(왕)으로 옹립하자고 제의했다. 또한 그 지도자들은 전쟁과 수렵에서 테무진에게 충성을 바칠 것을 맹세했다. 그러나 그들이 내놓은 조건을 보면 테무진에게 자신들의 생존을 보장할 수 있는 믿음직스러운 장수가 되어달라는 것이었지, 그들을 지배하는 군왕(君王)이 되어달라는 것은 아니었다. 그 뒤 실제로 일부 부족의 지도자는 그를 배신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테무진은 세력이 미약한 족장에 불과했다. 당시 중국 북부를 통치하고 있던 금(金)나라의 황제는 테무진을 중요하지 않은 인물로 여기고 있었다. 유목민들 사이에 분열을 조장하여 변방의 평화를 유지했던 금은 가끔씩 변방정책을 바꾸어 그들의 동맹세력인 타타르족을 공격했다. 토그릴과 함께 테무진은 그 기회를 이용하여 타타르족의 배후를 공격했다. 세력이 점점 강성해지자 그는 강대한 타타르족과 최후의 결전을 벌인 것이다. 전투에서 타타르족을 패배시킨 뒤 수레바퀴보다 키가 큰 자들은 곧 어른은 모두 죽이고, 단지 아이들만 살려두었는데 이들은 나중에 커서 자신들의 신분을 잊고 몽골의 충실한 추종자가 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금나라 황제는 토그릴에게 왕(王)이라는 칭호를 내렸고 테무진에게는 그보다 낮은 칭호를 내렸다. 실제로 그 후 몇 년 동안 금은 테무진의 존재를 전혀 위협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테무진은 스텝 지역에서 자신의 세력을 구축해나가는 일에 몰두했기 때문에 중국에게 그리 큰 위협이 되지 않았다. 테무진은 조직적으로 모든 정적들을 제거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친구이며 오랜 동료였던 자무카가 조직한 여러 세력의 연합은 그에게 패배를 거듭하여 그 존재가 없어졌고, 타타르족은 몰살당했다. 한편 케레이트족의 왕 토그릴과의 동맹관계도 마침내 붕괴되었고 테무진은 그마저도 최고권력을 잡는 데 장애가 된다고 판단하여 제거하려 했다. 토그릴은 자무카의 설득과 아들의 야망과 질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테무진에게 대항하여 싸울 수밖에 없었다. 테무진은 토그릴을 패배시킨 뒤 케레이트족을 모두 병졸과 노예로 삼았다. 테무진은 저항의 중심이 될 수 있는 옛 정적·귀족 들은 하나도 살려두지 않을 속셈이었다. 그 이유는 첫째, 이들의 군대를 빼앗아 자신의 군대로 삼고, 둘째, 몽골 지역의 분열을 가져온 소속 부족 안에서의 충성심을 분쇄하고, 셋째, 모든 유목민 부족을 통일하여 테무진의 가문에만 충성을 바치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서부지역의 나이만족 통치자는 몽골족의 강력한 세력에 두려움을 느끼고 자무카와 합동으로 연합세력을 형성했으나, 완전히 패배했고 나이만 왕국은 없어졌다. 한편 변덕이 심한 자무카는 마지막 순간에 나이만족 왕을 배신했다. 이같은 전쟁은 1200년대 초반에 벌어졌고 테무진은 스텝 지역의 패자(覇者)가 되었다. 1206년 오논 강변에서 열린 족장대회의에서 테무진은 칭기즈 칸( 전 세계의 군주라는 뜻 )으로 추대되었다. 1206년 모든 스텝 지역을 통치하는 황제로 추대되었을 때 그는 수천 명에 달하는 피복속 부족의 사람들과 그 지역을 자신의 친·인척, 동료들에게 나누어 관리하게 했다. 그리하여 기존 부족·가문의 조직된 형태를 바꾸어 봉건제도와 유사한 조직을 만들어냈다. 1206년은 몽골 및 세계의 역사에 전환점이 되는 해였다. 몽골족은 스텝 지역 밖으로 출정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몽골 자체도 새로운 조직으로 재정비되었다. 칭기즈 칸의 탁월한 지도력으로 인해 통일된 몽골족이 존재하게 되었고, 몽골족은 많은 변천과정(봉건적 분열, 부족간의 세력다툼 재연, 영토병합)을 거쳐 오늘날까지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몽골족의 야망은 스텝 지역 밖으로까지 세력을 확장해 나가는 것이었다. 칭기즈 칸은 세계정복의 원대한 야망을 실현시킬 준비가 되어 있었다. 새로운 몽골국은 무엇보다도 전쟁을 치르기 위한 조직으로 정비되었다. 칭기즈 칸의 군대는 10진법 체제로 나뉘어 엄격한 기강을 유지했고, 보급품과 군비를 갖추었다. 부장(部將)들은 칭기즈 칸의 아들이거나 그에게 절대충성을 바치는 선발된 사람들이었다. 칭기즈 칸은 군사적으로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어서 급속하게 변하는 외부환경에 잘 적응했다. 처음에 그의 군대는 사료가 필요 없는 튼튼한 초식동물인 몽골 조랑말을 타는 기병으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이러한 군대로 다른 유목민들은 패배시킬 수 있었지만 도시들을 함락시킬 수는 없었다. 그러나 곧 몽골족들은 규모가 큰 성읍도 투석기·쇠뇌·사다리와 끓는 기름 등을 사용하여 함락시킬 수 있었고, 흐르는 강물을 다른 데로 돌려놓아 홍수가 일어나게 하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했다. 정착문화를 가진 국가와 접촉하게 되면서 칭기즈 칸은 서서히 공격·파괴·약탈보다 더 멋진 권력의 향유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칭기즈 칸에 대항했던 마지막 몽골 부족인 나이만의 한 신하는 그에게 문화의 유용함을 일깨워 주었고, 몽골어를 문자로 정착시키는 일을 도와주었다. 〈몽골 비사〉에 따르면 1222년말 아무다리야 강(고대명은 옥수스)과 시르다리야 강(고대명은 작사르테스) 지역에서 호라즘 샤 왕조와 전쟁을 벌였을 때, 칭기즈 칸은 이슬람 출신의 측근으로부터 성읍의 의미와 중요성을 배우게 되었다. 한때 금나라의 신하였던 또 다른 측근인 야율초재는 농민과 장인들이 생산해내는 물품은 과세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일러주었다. 칭기즈 칸은 당초 중국 북부의 비옥한 전답들을 말의 목초지로 만들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몽골을 세계 최강대국으로 부상시킬 위대한 정복은 아직 수행되지 않은 단계였고 그 주목표로 중국이 떠올랐다. 칭기즈 칸은 중국 북서쪽 변방지역의 국가인 서하(西夏)와 싸움을 벌여 승리를 거두었고, 1211년 중국 북부에 자리잡고 있던 금을 향해 진격했다. 1214년 금으로부터 막대한 금액의 보상금을 받고 철수했다가 1215년 전쟁을 재개하여 연경을 함락시켰다. 그 뒤 중국 북부의 완전한 장악은 부장인 무칼리에게 맡겨졌다. 칭기즈 칸은 중국에서 더 나아가 호라즘 샤의 정벌에 나섰다. 그 전쟁은 칭기즈 칸의 보호하에 있던 450명의 이슬람 대상단을 몰살시킨 오트라르 시(市)의 지사(知事) 이날축 때문에 촉발되었는데, 호라즘 제국의 샤(황제)는 이에 대한 보상을 거부했다. 호라즘 샤와의 전쟁은 조만간 벌어지게 되어 있었지만 이제 더이상 그 전쟁을 연기할 수 없게 된 것이었다. 이 전쟁에서 몽골족은 끔찍한 야만적 행동을 자행하여 이그만족이라는 악명을 얻게 되었다. 몽골족은 가는 곳마다 도시를 불태웠고, 주민들은 몰살되거나 동족이라도 자신들보다 높은 신분이라면 모두 몰살시키는 몽골군의 앞잡이 노릇을 하도록 강요되었다. 칭기즈 칸이 호라즘 샤를 상대로 무자비한 복수전을 펼쳐나가는 동안 전답과 화원은 황폐화되었고 관개시설은 파괴되었다. 이 광경을 본 칭기스칸은 1223년 철수했고 1226~27년 서하를 상대로 마지막 전역(戰役)에 나설 때까지 전쟁을 벌이지 않았다. 그는 1227년 8월 18일에 죽었다. 칭기즈 칸의 정복활동 및 정복지역. 무자비하고 잔인한 정복자의 모습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지만, 칭기즈 칸은 몽골에서 영웅이자 국부로 추앙받는다. 칸이 되기 이전에 중앙아시아의 투르크-몽골 연맹을 통합하여, 흩어져 있던 부족들에게 동질감을 형성하였다. 세계에서 가장 큰 제국을 건설한 칭기즈 칸은 역설적으로 가장 넓은 지역에 전쟁의 처참함을 가져온 후에 가장 분쟁이 적은 평화의 시기를 가져왔다고 평가되고 있다. 서하와 금을 정복하고 중앙아시아의 호라즘 제국을 포함한 수많은 정복을 통하여 무수히 많은 나라를 합병하였다. 칭기즈 칸은 몽골 제국의 기반을 마련하였고, 역사에 지워지지 않는 기록을 남겼다. 몇 세기 동안 유라시아 대륙의 넓은 영토를 통치했던 몽골 제국은 몽골 제국에 의한 평화시대를 이루고, 인구학과 지정학적으로 큰 변화를 일으켰다. 몽골 제국의 영토는 현대의 몽골, 중국, 러시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몰도바,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조지아, 이란,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아프가니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파키스탄 일부, 터키 일부를 포함하는 것이다. 몽골군은 1260년 봄, 훌라구 칸의 부관인 키트부카의 지휘 하에 시리아의 다마스커스를 출발하여 오늘날 팔레스타인의 가자 지구까지 진출했다. 몽골을 통일한 그는 정착문명 민족에 대한 몽골인 최초의 공격을 시작했다. 서하는 탕구트 유목민들이 감숙, 알라샨, 오르도스에 세운 나라로, 탕구트인들은 티베트 종족에 속했으며 종교는 라마교(티베트 불교)였고 중국의 영향으로 문화가 상당한 수준으로 발달되어 있었으며 한자에서 파생된 문자를 가지고 있었다. 평원에서 전쟁하는 것에 능했던 몽골인들은 서하군과의 유격전에서는 연전 연승을 거두어 여러 차례(1205년-1207년,1209년) 서하를 약탈하고 황폐화시켰다. 몽골의 총공격이 감행된 3차 침략 때 서하군은 전차 부대와 장창 부대를 앞세워 한순간 승리를 거두기도 했으나, 기동력의 부족으로 몽골군의 산개 작전에 속수무책으로 당해야 했고, 결국 총사령관 외명령공이 포로로 잡혀 처형당하며 사실상 궤멸 상태에 빠졌다. 몽골군은 수도인 영하를 포위했으나 공성전의 경험이 없던 몽골군은 이를 함락시키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황하의 물줄기를 바꾸어 영하를 공격하려는 시도도 하였으나 댐 건설의 경험이 없던 그들에게는 댐 건설은 너무 어려운 일이었고, 오히려 사고로 수십명이 익사하는 피해를 보기도 했다(몽골군은 수영을 할 줄 몰랐기에 특히 피해가 심했다). 한편 양종 이안전은 농성 기간 동안 금에 구원요청을 하기도 했으나 거절당했고, 물자 부족에도 시달렸다. 결국 1207년 양종 이안전은 몽골에의 복속을 약속하고 자신의 딸을 보내 칭기즈 칸과 혼인시켰다. 이후 서하는 몽골의 명령을 받아 금나라와 오랜 전쟁을 치렀는데 이는 양국의 국력을 쇠퇴하게 하였다. 1211년 이준욱이 반란을 일으켰고, 양종은 퇴위하였으며 그 해 사망했다. 양종 역시 전왕을 시해하고 왕위를 찬탈한 군주로, 이러한 일이 몇년 안에 잇따라 발생하자 이전의 정치적 혼란과 더불어 금과의 전쟁으로 국력은 급속히 쇠퇴해갔다. 게다가 1219년, 1226년에는 연달아 칭기즈칸의 서정(西征) 참가를 거부하여 칭기즈 칸의 분노를 샀다. 칭기스 칸이 호라즘 원정에 앞서 서하에 사신을 보내 출정을 명령하자 아샤 감부라는 탕구트 고관은 이렇게 답했다. 이는 만약 칭기스 칸에게 충분한 병력이 없다면 그는 최고 권력을 행사할 자격이 없다고 주장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서하인들은 당시 중앙아시아의 최강국이었던 호라즘과의 전쟁에서 몽골군이 패배할 것이라고 예측했기 때문에 나온 반응이다. 또한 그들은 이 판단에 의거해 몽골군의 부재를 틈타 몽골의 영토를 침범하기도 했다. 그러나 호라즘이 몽골의 침입에 무력하게 무너지면서 이러한 서하의 결정은 치명적인 실수임이 드러났다. 1224년, 칭기스 칸은 서하의 반란에 대한 소식을 듣고 서둘러 페샤와르를 떠나 몽골 고원으로 귀환했다. 1225년 봄에 그는 몽골 고원에 도착했고, 여름에는 내정을 다지고, 가을에는 카라 툰의 행궁에서 묵었다. 1226년 가을, 칭기스 칸은 서하에 대한 원정을 개시했다. 칭기스 칸은 사고로 말에서 낙마한 뒤에 열병을 겪었고, 이에 아들들은 원정을 만류했다. 하지만 칭기스 칸은 원정을 강행했다. 칭기스 칸은 우선 서하에 사신을 파견해 서정에 동반하지 않고 그 자신을 모욕한 것을 책망하며 항복을 제의했으나, 서하는 이를 거부했다. 칭기스 칸은 서하의 도시 대부분을 점령했고, 1226년 여름에는 서하 군대를 격파했다. 이후 몽골군은 서하의 수도 흥경을 포위했다. 그때 칭기스 칸은 남하하여 육반산 남쪽에서 야영했다. 라시드 앗 딘은 이 남하의 목적은 칭기스 칸이 남송이었다고 적었다. 그때 서하는 칭기스 칸에게 사신을 보내 한 달 뒤 주민들을 이끌고 도시 밖으로 나와 항복하겠다고 제의했고, 칭기스 칸은 이를 허락했다. 하지만 죽음을 예감하고 있던 칭기스 칸은 는 말을 남겼다. 1227년 8월 18일 또는 8월 25일, 칭기스 칸이 죽자마자 서하의 수도 영하는 함락되고 그 주민들은 학살당했다. 한편 서하를 점령한 칭기즈 칸은 대대적인 민족 학살을 실시했는데, 이는 서하의 호라즘전 참가 거부가 칭기즈 칸을 노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며, 2차 침략에 대한 저항이 끈질겼기 때문에 칭기즈 칸의 섬태멸진 방식의 정복 전쟁에 원인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중국 국영 CCTV의 보도에 의하면, 몽골군은 서하 사람들을 매우 철저하게 살육했기 때문에 현재까지 서하인의 유전자를 가진 서하인의 후손을 발견하기 어렵다고 한다. http://discovery.cctv.com/20070214/100813.shtml 다만 이들 중 살아남은 서하인은 원나라가 세워졌을 때 지배계급인 색목인으로 편성되었다. 정복지 나라의 국민이 이처럼 멸족당한 예는 세계 역사상 찾아보기 힘든 일로, 이는 칭기즈칸과 몽골 제국이 얼마나 잔학한 정복자였는지 알 수 있는 사례이며 학자들에 의해 비판받는 부분이기도 하다. 칭기즈 칸이 젊은 시절 케레이트와 함께 금의 마달갈(장종, 1189-1208)의 신하로서 타타르와 싸운 적이 있었다. 그는 장종의 신하였으며, 장종은 용병의 대가를 지불하였고, 중국식 칭호를 내려주었다. 그의 종증조부 안바가이 칸이 금나라로 끌려가 목마에 못박혀 처참하게 죽은 것을 그는 한시도 잊지 않았다. 마달갈이 죽자 그의 후계자 영제(위소왕)은 칭기즈 칸이 군신의 예를 갖추고 조공을 늘릴 것을 요구하였으나, 그의 사람됨을 알고 있던 칭기즈 칸은 무능한 통치자인 영제의 명령을 거부하고 정복의 기회로 이용하였다.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인이었던 투르크계 웅구트인들이 몽골에서 만리장성으로 가는 산서성 북부의 길을 금을 위해 방어하고 있었다. 1211년 웅구트의 알라쿠쉬 티긴은 금의 정복을 위해 칭기즈 칸에게 이 길을 열어주었다. 그는 북경의 옛 주인이었으나 금에 의해 쫓겨난 거란인들과 연합하여 금나라를 공격하였다. 특히 거란인 출신 장수 석말명안은 몽골군을 도와 금 황제의 목마장을 습격해 수십만 마리의 군마를 탈취하여 몽골군의 기병력을 대폭 증강하는데 기여했다. 1212년에는 거란의 옛 영토인 만주 서남부의 요하에서 야율유가가 반란을 일으켰다. 거란인들은 몽골계 언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퉁구스계 언어를 사용하는 금의 여진족보다는 몽골과 더 친밀한 유대를 가지고 있었다. 야율유가는 몽골의 도움으로 요양을 빼앗고 요나라를 세웠으며 1220년 죽을 때까지 몽골의 가장 충성스러운 신하로서 몽골과 함께 하였다. 이로써 금나라 서북의 웅구트와 동북의 거란은 몽골과 연합하게 되었다. 칭기즈 칸의 금나라 정복은 1211년에 시작되어 그가 죽을 때까지 지속되었으며, 그의 후계자 시대인 1234년에 이르러서야 완성될 수 있었다. 몽골인들은 중국의 오래된 전투방법인 공성전을 다루는 데 어려움이 있었고, 그들이 공포를 조성하기 위해 자주 사용하던 학살의 방법은 인구가 많은 중국인들에게 큰 인상을 주지 못하였다. 또한 여진은 정주한 지 100년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유목민의 용맹함을 여전히 지니고 있었다. 1213년에는 선화를 정복하고 산서 중부를 돌파하여 태원과 평양을 빼앗았다. 이 후 남으로 기수를 돌려 하북과 산둥 평원을 가로질러 하간과 제남을 함락시켰다. 칭기즈 칸이 북경을 봉쇄작전으로 공격하려고 했을 때, 금 조정에는 궁정분란이 일어나 폐제가 호사호에게 암살을 당하였고, 호사호는 폐제의 조카인 오도보(선종)을 제위에 앉혔다. 당시 북경을 공격하고 있었으나 잇따른 실패에다 물자 부족 등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던 칭기즈 칸은 오도보의 화의를 받아들이고,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받고 철수하였다. 이후 오도보는 바로 개봉으로 천도하였고, 칭기즈 칸은 그것을 반격의 준비로 생각하고 다시 북경을 쳐서 마침내 성공적으로 함락해 불사르고 주민들을 학살하였다. 초원의 거주자들은 아무런 과도기적 단계도 없이 도시문명을 가진 고대국가를 소유하게 되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더 나은 방법을 알지 못했던 그들은 난감함에 의하여 방화와 살육을 하게 되었다. 개인적인 약탈은 몽골군의 규범인 야삭에서 금하는 것이었으나, 실제로는 북경에 들어가서 한달 동안이나 약탈을 계속 하였다. 이것은 10세기의 거란이나 12세기의 여진 사람들이 살육을 최소화하고, 그들의 재산을 파괴하지 않음으로써 이전 왕조를 계승하여 차지한 것과 비교해 볼 때 퇴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금은 개봉 천도 이후 섬서성의 일부와 하남성 지역 정도로 축소되었다. 몽골이 중앙아시아에서 전쟁을 하고 있어 여력이 없을 때, 금은 다시 북경을 제외한 여러 성을 수복하였다. 칭기즈 칸의 신하 무칼리는 중국의 작전을 일임받고 지속적인 전투를 계속하였으나 이제 전투는 중국식 공성전으로 완전히 변해 버려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칭기즈 칸은 금나라 정복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으며 그의 아들인 우구데이와 톨루이에 의하여 1234년에야 정복을 마무리 할 수 있었다. 금나라 정복 기간 중 칭기즈 칸은 중앙아시아에서 강성한 세력을 자랑하던 호라즘 제국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몽골과 호라즘의 1차 충돌은 1218년에 있었는데, 1218년 당시 호라즘은 알라 웃딘 무함마드 샤(황제)의 통치 하에 쇠퇴하고 있던 아바스 왕조를 몰아내고 서요를 속국으로 삼으며 중앙아시아를 지배하고 있었다. 당시 몽골에서는 명맥만 유지하던 메르키트족이 반란을 일으켰고 이를 진압한 몽골군은 남은 메르키트 병사들을 서요 국경지대까지 쫓아가 전멸시켰다. 이 때 수만의 군대를 이끌고 서요를 방문한 무함마드 샤의 군대와 마주치게 되었고, 이를 우습게 본 샤가 몽골군에 선전 포고를 함으로써 전투가 벌어졌다. 당시 몽골군은 호라즘군의 3분의 1밖에 되지 않았으나 치밀한 전략과 기마술로 호라즘군 절반을 죽이고 샤의 본진을 습격해 왕실 물품을 소수 탈취했다. 이후 칭기즈 칸은 나이만전 당시 도망쳤던 나이만 족장 타양 칸의 아들 쿠츨루크가 서요의 국왕이 되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장수 제베를 시켜 서요를 공격해 쿠츨루크를 죽이고 서요를 점령함으로써 호라즘과 국경을 맞대게 되었다. 그러나 금나라와의 전쟁 중에 호라즘과 같은 강국과 전쟁을 치를 상황이 아니라고 판단한 칭기즈 칸은 이후 호라즘과 통상을 맺기 위해 사신을 보냈으나, 샤는 편지에 쓰여진 그대를 사랑하는 내 아들처럼 대할 것 이라는, 자신을 비하하는 글귀에 분노했다. 그는 통상에 응하였으나 통상을 위해 방문한 450명의 상단을 오트라르 성의 성주 이날축을 시켜 붙잡아 처형했고, 항의하러 온 사신단마저 처형했다.(일각에는 칭기즈 칸의 전쟁을 위한 계략이 숨어있었다고도 한다). 이는 사실상 선전 포고나 다름이 없었으니 칭기즈 칸은 이에 선전 포고를 하고, 1219년 20만의 병력으로 호라즘 침공을 개시했다. 침공 전 칭기즈 칸은 호라즘 제국 내의 불화와 반목을 이용하는 계락을 펼쳤다. 호라즘은 알라 웃딘의 통치기간 동안 넓은 지역을 정복했으나 내정을 안정시킬 기간이 없어 나라 안 민중과 귀족, 왕족들 간의 파벌 갈등이 심했다. 칭기즈 칸은 호라즘 내의 여러 장수나 귀족들이 몽골과 내통하고 있는 것처럼 한 편지를 샤에게 들어가도록 했고, 몇몇 귀족이나 왕족에게 복속을 제안하기도 했다. 이에 불안해진 샤는 수도를 사마르칸트로 옮기고, 몽골군의 몇 배가 넘던 대군을 이리저리 갈라 배치하는 실책을 저지르게 되었다. 이는 몽골군의 호라즘 정복을 쉽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아바스 왕조에서는 호라즘을 중앙아시아에서 몰아내기 위해 몽골군에게 호라즘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기도 했다. 호라즘을 침공한 몽골군은 오트라르 성을 함락하고 샤의 명에 따라 몽골 대상단을 처형한 성주 이날축의 눈과 귀에 끓는 은물을 부어 처형했다. 이후 몽골군은 호라즘의 전 수도 부하라를 공격해 항복을 받아내고, 샤 알라 웃딘이 숨어있던 사마르칸트까지 포위해 5일만에 함락했다. 샤 알라 웃딘은 함락 전 성에서 빠져나와 달아났고, 칭기즈 칸은 도망친 샤를 잡기 위해 제베와 수부데이 두 장수에게 샤 알라 웃딘 무함마드를 추격할 것을 명했다. 이에 쫓긴 알라 웃딘은 나라 안을 이리저리 떠돌아야 했고, 그가 도중 머문 성이나 마을은 몽골군에게 철저히 짓밟혔으며, 알라 웃딘 무함마드의 어머니인 황태후가 살던 마잔다란마저 함락당하고 황태후는 몽골군에게 농락당해야 했다. 결국 숨을 곳을 찾지 못한 샤는 카스피해의 작은 섬으로 피신했다가 지병으로 숨을 거두었다. 이후 샤의 아들 잘랄 웃딘이 몽골군에 항전했으나 그가 지키던 우르겐치 성은 끝내 몽골군에 의해 함락되면서 아내와 아들을 포함한 일가족을 잃었고, 군대를 모아 파르완에서 시기 쿠투쿠가 이끄는 몽골군을 전멸시키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으나, 패배 소식을 접한 칭기즈 칸이 직접 토벌에 나서자 끝내 당해내지 못하고 패배한 뒤 인더스 강을 건너 도망쳤다가 1년 뒤 쿠르드 산지에서 그곳 주민에게 살해당했다. 한편 호라즘 정벌을 떠나기 전 칭기즈 칸은 서하에 참전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했고, 이는 이후 몽골이 서하를 재침략하여 멸망시키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호라즘 정벌은 몽골군이 중앙아시아를 넘어 아랍, 카프카스, 러시아까지 침략하는 계기가 되었다. 호라즘 정벌전 때 호라즘을 몰아내기 위해 몽골군을 이용하려던 아바스 왕조는 이후 그 몽골군에 의해 멸망했고 바그다드의 칼리프 역시 살해당했으며,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를 제외한 모든 이슬람권이 몽골군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무함마드 샤가 몽골의 대상단을 살해한 것에 대해 많은 이슬람 역사가들은 이슬람 세계를 전쟁으로 몰아넣은 직접적인 요인으로 비판하고 있다. 실제로 무함마드 샤는 뛰어난 통치술로 단기간에 넓은 땅을 차지했으나, 어리석게도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에게 자신에게 칼리프 자리를 넘길 것을 요구해 이슬람 형제의 반감을 샀고, 안정되지 않은 국내 사정을 무시하고 몽골을 도발하여 화를 자초하는 무모한 모습을 보여 후세에 시대착오적인 어리석은 군주로 평가되고 있다. 칭기즈 칸 야담(野談)으로 가득 차 있는 〈원조비사 元朝秘史〉(1240년경)를 제외하고는 몽골 쪽의 자료가 아닌 사료들이 칭기즈 칸이 살았던 시대와 비슷한 시대적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유사 이래 유목민과 정착민은 늘 접촉관계를 유지했다. 이 두 사회는 정반대되는 생활양식을 유지했기 때문에 늘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호의존적인 처지에 있었다. 북방의 유목민들은 남부지역의 일부 주요산품과 그 지역의 사치품들을 필요로 했다. 유목민들이 이같은 물품을 얻는 방법은 무역·대상(隊商)·무력약탈의 3가지가 있었다. 중국의 정착민들은 유목민들이 사는 스텝 지역의 생산품들을 절실히 필요로 하지는 않았지만, 유목족들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여러 방법을 동원하여 유목민들의 내침을 막아내야만 했다. 스텝 지역 유목민들의 단합과 분열은 중국 왕조의 흥망성쇠에 따라 결정되었다. 유목민들은 세력이 강성할 때 결단력 있는 지도자를 옹립하여 다른 유목민 부족들을 복속시켰다. 그 후 중국의 왕조가 쇠망의 길을 걷고 있으면 그들의 세력을 스텝 지역 밖으로까지 확장시켰다. 그러나 유목민들이 이같이 세력을 확장하여 남방정착민들의 문화를 수용하게 되면 결국에는 비극적 결말을 맞았다. 유목민들은 원래 기동성이 뛰어나 후방에서 별도의 물자보급을 받을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세력확장 이후에는 이 전통적인 우월성을 상실해 끝내는 그들이 복속시킨 중국인들에 의해 동화되고 말았다. 그 후 중국에는 다시 강력한 제국이 일어나고 유목민들은 족장들끼리 끊임없이 싸움을 벌여 분열되었다. 이렇게 하여 그들의 흥망성쇠는 계속 반복되었다. 반론 - 원의 붕괴는 강력한 전염성 질환에 의한 유라시아의 붕괴가 직접 원인이다. 이로 인한 국제무역이 축소되어 통치자금의 부족을 초래하고 몽골족은 중안아시아의 초원으로 회귀하게 된 것이 원의 소멸이다. 몽골 정복의 역사는 이같은 형식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데, 이러한 정치적 갈등과 긴장을 배경으로 하여 칭기즈 칸의 생애가 검토되어야 한다. 그는 자신 부족들 내부에 재통일의 기운이 무르익었고 또 그당시 중국과 기타 정착문화를 가진 나라들이 쇠퇴의 길을 걷고 있음을 인식했기 때문에 그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정복자의 길로 나선 것이었다. 칭기즈 칸은 주변 국을 확장해나가면서 자신에게 협력할 경우 자치권을 인정함과 동시에 여러가지 혜택을 부여했다. 그러나 반항하게 되면 그 지역 전체를 풀 한 포기 남김없이 모조리 멸족시켰는데 전멸시킨 사람들의 해골을 모아서 탑을 쌓았다. 바그다드와 이스파한 등의 지역에는 거의 100,000개 가량 되는 해골들로 탑을 쌓기도 했다. 특히 샤리 골골라의 경우 정복활동 도중 징기스칸의 손자인 모토칸(또는 무투겐)이 이 전투에서 전사하였으므로 징기스 칸의 분노를 사서 풀 한 포기 남김없이 모두 죽일 뿐만 아니라 모든 건물을 파괴시켜 전대미문의 폐허로 만들면서 멸망시켰다. 칭기즈 칸이 활발한 정복활동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크게 다음과 같다. 철저한 능력위주의 군 인사행정 계급이 미천한 자라도 능력이 있다면 귀히 쓰지만, 능력이 없는 자라면 계급을 강등했음. 이민족이라 해도 받아들이는 개방적인 인재흡수 승마능력과 기동성이 뛰어난 군대 상인들을 통한 정확한 정보수집 다른 종교(기독교, 이슬람)에 대한 존중 정복하고자 하는 나라가 다종교사회인 경우, 특정종교를 지지하여 내분을 조성 학자인 야율초재와 같이 일함으로써 학식을 이용함. 칭기즈 칸 원년 2년 3년 4년 5년 6년 7년 8년 9년 10년 서력 1206년 1207년 1208년 1209년 1210년 1211년 1212년 1213년 1214년 1215년 육십간지(六十干支) 병인(丙寅) 정묘(丁卯) 무진(戊辰) 기사(己巳) 경오(庚午) 신미(辛未) 임신(壬申) 계유(癸酉) 갑술(甲戌) 을해(乙亥) 칭기즈 칸 11년 12년 13년 14년 15년 16년 17년 18년 19년 20년 서력 1216년 1217년 1218년 1219년 1220년 1221년 1222년 1223년 1224년 1225년 육십간지(六十干支) 병자(丙子) 정축(丁丑) 무인(戊寅) 기묘(己卯) 경진(庚辰) 신사(辛巳) 임오(壬午) 계미(癸未) 갑신(甲申) 을유(乙酉) 칭기즈 칸 21년 22년 서력 1226년 1227년 육십간지(六十干支) 병술(丙戌) 정해(丁亥) 황후 광헌익성황후 홍길랄씨(光獻翼聖皇后 弘吉剌氏) 장남 목종 주치(穆宗 朮赤) 추존황제(追尊皇帝) 차남 성종 차가타이(聖宗 察合台) 추존황제(追尊皇帝) 3남 태종 우구데이(太宗 窩闊台) 몽골 제국의 2대 대칸 4남 예종 툴루이(睿宗 拖雷) 몽골 제국의 임시 대칸 장녀 창국대장공주 코첸 베키(昌國大長公主 火臣 別吉) 창충무왕 패독(昌忠武王 孛禿)에게 하가(下嫁) 차녀 연안공주 체체 이켄(延安公主 撦撦亦堅) 토랍이길(土拉而吉)에게 하가(下嫁) 3녀 조국대장공주 알카이 베키(趙國大長公主 阿剌海 別吉) 불안석반(不顔昔班), 북평왕 진국(北平王 鎭國), 조무의왕 패요합(趙武毅王 孛要合)에게 하가(下嫁) 4녀 운국공주 투멜룬(鄆國公主 禿滿倫) 적굴(赤窟)에게 하가(下嫁) 5녀 아아답로흑 공주(阿兒答魯黑 公主) 태출(泰出)에게 하가(下嫁) 황후 홀로륜 황후(忽魯倫 皇后) 황후 활리걸담 황후(闊里桀擔 皇后) 황후 탈홀사 황후(脫忽思 皇后) 황후 첩목륜 황후(帖木倫 皇后) 황후 역련진팔랄 황후(亦憐眞八剌 皇后) 황후 불안홀독 황후(不顔忽禿 皇后) 황비 홀승해 비자(忽勝海 妃子) 황비 야간 비자(耶干 妃子) 황비 야축 비자(耶逐 妃子) 황후 홀란 황후 올와사씨(忽蘭 皇后 兀洼思氏) 6남 활렬견 태자(闊列堅 太子) 황후 고야별속 황후(古兒別速 皇后) 황후 역걸렬진 황후(亦乞列眞 皇后) 황후 탈홀사 황후(脫忽思 皇后) 황비 야진 비자(也眞 妃子) 황비 야리홀독 비자(也里忽禿 妃子) 황비 찰진 비자(察眞 妃子) 황비 합랄진 비자(哈剌眞 妃子) 황비 내만녀 비자(乃蠻女 妃子) 8남 출아철 황자(朮兒徹 皇子) 요절(夭折) 황후 야수 황후 탑탑아씨(也遂 皇后 塔塔兒氏) 황후 홀로합랄 황후(忽魯哈剌 皇后) 황후 아실륜 황후(阿失侖 皇后) 황후 독아합랄 황후(禿兒哈剌 皇后) 황후 찰합 황후 이씨(察合 皇后 李氏) 황후 아석미실 황후(阿昔迷失 皇后) 황후 완자홀도 황후(完者忽都 皇后) 황비 혼도로알 비자(渾都魯? 妃子) 황비 홀로회 비자(忽魯灰 妃子) 황비 날백 비자(剌伯 妃子) 황후 야속간 황후 탑탑아씨(也速干 皇后 塔塔兒氏) 7남 찰올아 황자(察兀兒 皇子) 요절(夭折) 황후 홀답한 황후(忽答罕 皇后) 황후 합답안 황후 속륵손도씨(合答安 皇后 速勒遜都氏) 황후 알자홀사 황후(斡者忽思 皇后) 황후 연리 황후(燕里 皇后) 황후 독해 황후(禿該 皇后) 황비 완자 비자(完者 妃子) 황비 금련 비자(金蓮 妃子) 황비 완자태 비자(完者台 妃子) 황비 노륜 비자(奴倫 妃子) 황비 묘진 비자(卯眞 妃子) 황비 쇄랑합 비자(鎖郞哈 妃子) 황후 모개 황후(謨蓋 皇后) 황비 숙량합 비자(肅良合 妃子) 고려인(高麗人) 황후 아복합 황후(阿卜哈 皇后) 황비 팔불별걸 비자(八不別乞 妃子) 황후 공주 황후 완안씨(公主 皇后 完顔氏) 황비 탑탑아녀(塔塔兒女) 5남 올로적 황자(兀魯赤 皇子) 황비 미상(未詳) 9남 올로찰 황자(兀魯察 皇子) 생모미상(生母未詳), 요절(夭折) 6녀 고창공주 야립 가돈(高昌公主 也立 可敦) 생모미상(生母未詳), 파이술 아아특 적근(巴而術 阿兒忒 的斤)에게 하가(下嫁) 7녀 포역색극 공주(布亦塞克 公主) 생모미상(生母未詳), 공주(公主)의 외모가 추해 부마(駙馬)가 그녀를 좋아하지 않자, 칭기즈 칸(成吉思汗)은 크게 노하여 부마를 죽였다. 몽골 제국 안바카이 칸 (1994). 《몽골비사》. 유원수 역주. 서울 혜안. 03910. 김호동. (2010). 《몽골제국과 세계사의 탄생》. 파주 돌베개. . 라시드 앗 딘. (2003). 《칭기스 칸 기》 (김호동, 역주). 서울 사계절. . 르네 그루세. (1998). 《유라시아 유목제국사》. 서울 사계절. (원서출판 1939) . 스기야마 마사아키. (1999). 《몽골 세계제국》 (임대희, 김장구, 양영우, 옮김). 서울 신서원. (원서출판 1996). . Paul Ratchnevsky. (1991). Genghis Khan His Life and Legacy . Blackwell Publishing. . 분류:1162년 태어남 분류:1227년 죽음 분류:몽골의 군인 분류:몽골 제국의 칸 분류:원나라의 추존황제 분류:보르지긴 분류:궁수 분류:검객 분류:몽골의 정복전쟁 관련자 분류:지폐의 인물 분류:영웅 분류:대량 살인자 분류:사조삼부곡 등장인물 분류:헹티주 출신
스타니스와프 마르친 울람 (, 1909년 4월 13일 리비우 ~ 1984년 5월 13일 뉴멕시코주 산타페)은 폴란드계 미국인 수학자이다. 수소폭탄의 개발자로 유명하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던 도시 렘베르크(Lemberg, 현재의 우크라이나 리비우)에서 태어났다. 그의 수학 선생은 르부프 학파의 유명한 폴란드 수학자 스테판 바나흐였다. 1938년 미국에 하버드 대학교 주니어 장학생으로 왔다가 장학금을 계속 받지 못하자 위스콘신 대학의 강사진에 들어갔다.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직전 폴란드에서 도피해 온 동생 울람도 부양하였다. 그때 그의 친구 존 폰 노이만이 뉴멕시코에서 추진되는 비밀 계획에 초청했다. 울람이 궁금히 여겨 도서관에서 뉴멕시코에 관한 책을 대출하고 보니 그동안 위스콘신 대학에서 사라졌던 이들의 이름이 책을 먼저 빌려갔던 이들의 목록에 다 있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울람은 미국의 원자폭탄 개발 계획인 맨해튼 계획에 참여하게 되었다. 울람은 그 후에도 수소폭탄 개발에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에드워드 텔러가 제시했던 수소폭탄의 모형이 불충분하다는 것을 지적하고 더 나은 방법을 개발했다. 말년에는 핵 펄스 추진(nuclear pulse propulsion)을 발명했다. 그는 이를 그의 발명 중 가장 자랑스러운 것이라고 밝혔다. 분류:1909년 태어남 분류:1984년 죽음 분류:맨해튼 계획 관련자 분류:미국의 수학자 분류:폴란드의 수학자 분류:미국의 불가지론자 분류:폴란드의 불가지론자 분류:폴란드의 제2차 세계 대전 관련자 분류:미국의 제2차 세계 대전 관련자 분류:하버드 대학교 동문 분류:유대계 폴란드인 분류:유대계 미국인 분류:폴란드계 미국인 분류:20세기 수학자 분류:플로리다 대학교 교수 분류:하버드 대학교 교수 분류:리비우 출신
1975년 은 수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2월 12일 - 대한민국, 유신 헌법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하다. 4월 30일 - 월맹군이 사이공을 함락시켜 남베트남 패망. 베트남 전쟁이 끝나다. 6월 25일 - 모잠비크 독립 7월 5일 - 카보베르데 독립 7월 6일 - 코모로 독립 7월 12일 - 상투메프린시페 독립 8월 6일 -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대한민국의 유엔가입안 부결. 8월 8일 - 대한민국, 싱가포르와 수교. 9월 16일 - 모잠비크, 상투메 프린시페, 카보베르데, 유엔 가입. 9월 16일 - 파푸아뉴기니 독립 10월 8일 * 외딴집 주민 17명 죽인 연쇄 살인범 김대두 경찰에 체포. * 신민당 김옥선 의원, 국회서 `관제 안보 궐기대회 발언해 큰 파문(13일 의원직 자진 사퇴). 10월 9일 - 소비에트 연방 핵물리학자 안드레이 사하로프, 소련인으로는 최초로 노벨 평화상 수상. 10월 10일 - 파푸아뉴기니, 유엔 가입. 11월 11일 - 앙골라, 포르투갈로부터 독립. 11월 12일 - 코모로, 유엔 가입. 11월 25일 - 수리남 독립 11월 27일 - 후안 카를로스 1세, 스페인 국왕으로 즉위. 12월 4일 - 수리남, 유엔 가입. 3월 10일 - 산요 신칸센 오카야마 역에서 하카타 역 구간 개통. 5월 17일 - 엘튼 존의 앨범 《Captain Fantastic and the Brown Dirt Cowboy》, 빌보드 차트 사상 처음으로 핫샷 데뷔. 8월 15일 - 대한민국, 여의도 국회의사당 준공. 9월 2일 - 대한민국, 전국 중앙 학도 호국단 창설. 9월 15일 - 조총련계 재일한국인 7백 명, 추석성묘차 모국 첫 방문. 9월 22일 - 대한민국, 민방위대 창설. 10월 14일 - 대한민국 정부, 부처님 오신 날 과 어린이날 공휴일로 제정. *10월 31일 - 퀸, Bohemian Rhapsody 가 싱글로 첫 등장하다. 12월 5일 - 영동선 고한~백산~철암~북평간 23.7km 전철화 완공. 1월 1일 - * 아랍에미리트의 기업인 칼둔 알 무바라크. * 대한민국의 성우 김상현. * 일본의 만화가 오다 에이이치로. 1월 2일 - 대한민국의 배우 정성화. * 대한민국의 야구선수 손민한 1월 4일 - 미국의 종합격투기 선수 셰인 카윈. 1월 5일 - 대한민국의 성우 홍진욱. 1월 6일 - 일본의 성우 유카나. 1월 21일 -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최윤경. 1월 22일 - 대한민국의 종합격투기 선수 김민수. 1월 28일 - 일본의 성우 카미야 히로시. 1월 29일 - 대한민국의 성우 이광수 2월 2일 - 대한민국의 방송인,전 아나운서 지승현. 2월 10일 - 대한민국의 희극인 이수근 2월 18일 - * 대한민국의 배우 조상기. * 영국의 축구 선수 게리 네빌. * 대한민국 만화가, 디자이너 권윤주 2월 19일 - 대한민국의 배우 윤희석. 2월 22일 - 미국의 배우 드루 배리모어. 2월 25일 - 일본의 성우 치바 치에미. 2월 26일 - 미국의 영화인 드루 고더드. 2월 27일 - 대한민국의 성우 이용신. 2월 28일 - * 대한민국의 성우 이자명. *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 박진철. * 대한민국의 배우 김혜진 * 일본의 성우 하야미즈 리사. 3월 2일 - 대한민국의 배우 이선균 3월 9일 - 아르헨티나의 축구 선수 후안 세바스티안 베론. 3월 10일 - 미국의 배우 한고은. 3월 13일 - 대한민국의 전 아나운서 양승연. 3월 15일 - * 미국의 배우 에바 롱고리아. * 미국의 유명 혼성그룹 블랙 아이드 피스의 멤버 윌 아이 엠. 3월 19일 - 중화민국의 배우, 가수 비비안 수. 3월 24일 - 대한민국의 가수 김희진. 3월 25일 - 대한민국의 배우 이태란. 3월 28일 - 스페인의 축구 선수 이반 엘게라. 4월 2일 - 미국의 배우 애덤 로드리게스. 4월 3일 -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 현 야구 코치 손인호. 4월 10일 - 대한민국의 배우 명세빈. 4월 14일 - 브라질의 종합격투기 선수 안데르송 시우바. 4월 18일 - 대한민국의 성우 정재헌. 4월 30일 - 대한민국의 배드민턴선수 하태권. 5월 1일 - 카메룬의 축구 선수 마르크비비앵 푀. 5월 2일 - 영국의 축구 선수 데이비드 베컴. 5월 5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심정수. 5월 8일 - 대한민국의 방송인, 전 아나운서 정지영. 5월 13일 - 대한민국의 성우 여민정. 5월 16일 -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 현 야구 코치 김필중. 5월 24일 * 대한민국의 배우 우희진. *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 이도형. 5월 27일 - 영국의 요리사 제이미 올리버. 6월 4일 - 미국의 배우 앤젤리나 졸리. 6월 5일 - 대한민국의 방송 기자 강동원. 6월 9일 - 대한민국의 성우 은미. 6월 11일 - * 대한민국의 배우 최지우. * 대한민국의 방송인 한석준. 6월 22일 - 대한민국의 배우 정희태. 6월 28일 - 대한민국의 배우 김수진 7월 5일 - 아르헨티나의 축구 선수 에르난 크레스포. 7월 6일 - * 대한민국의 개그우먼 김숙. * 미국의 힙합 가수 50 센트. 7월 14일 - 미국의 유명 혼성그룹 블랙 아이드 피스의 멤버 타부. 7월 21일 - 대한민국의 작곡가, 프로듀서 황성제. 7월 27일 - 미국의 야구 선수 앨릭스 로드리게스(뉴욕 양키스). 7월 29일 * 한국계 일본인 격투가 추성훈. * 대한민국의 바둑 기사 이창호. * 대한민국의 희극인 김병만. 8월 7일 -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배우 샬리즈 시어런. 8월 9일 - 대한민국의 성우 하미경. 8월 15일 - * 일본의 축구 선수 가와구치 요시카쓰. *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 현 야구 코치 조진호. 8월 20일 - 대한민국의 축구 해설자 서형욱. 9월 2일 -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 현 야구 코치 김우석. 9월 8일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이을용. 9월 10일 - 헝가리의 축구 심판 카사이 빅토르. 9월 13일 - 일본의 성우 콘노 히로미. 9월 19일 - 대한민국의 가수 인호진 (스윗 소로우). 9월 20일 - 미국의 배우 문 블러드굿. 9월 22일 - 대한민국의 배드민턴선수 김동문. 9월 24일 - 대한민국의 기상 캐스터 한희경. 9월 30일 - 프랑스의 배우 마리옹 코티야르. 10월 1일 - 대한민국의 배우 김선아. 10월 5일 - 영국의 배우 케이트 윈즐릿. 10월 6일 - 덴마크의 축구 선수 마르틴 예르겐센. 10월 11일 - 미국의 배우 루이 오자와 장젠. 10월 22일 - 스페인의 축구 선수 미첼 살가도. 10월 24일 -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 현 야구 코치 채종국. 11월 16일 - 일본의 배우 우치다 유키. 11월 12일 - 크로아티아의 축구 선수 다리오 시미치. 11월 17일 - 대한민국의 배우 윤손하. 11월 20일 - 대한민국의 성우 정윤정. 11월 22일 - 일본의 성우 미나가와 준코. 11월 28일 - 대한민국의 야구선수 신경현. 11월 25일 - 대한민국의 배우 김형범. 12월 6일 - * 이탈리아의 기업인 안드레아 아녤리. * 일본의 성우 오하라 사야카. 12월 8일 -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최기환. 12월 11일 - 대한민국의 가수 JK 김동욱. 12월 12일 - 일본의 성우 쿠와시마 호코. 12월 15일 -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최원정. 12월 15일 - 일본의 성우 이케자와 하루나. 12월 16일 - 대한민국의 가수 싸비. 12월 17일 - 미국의 배우 밀라 요보비치. 12월 25일 -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최성용. * 대한민국의 개그맨 김준호. 12월 30일 - 오스트레일리아의 축구 선수 스콧 치퍼필드. 1월 28일 - 체코슬로바키아의 정치인 안토닌 노보트니. 2월 3일 - 이집트의 가수 움 쿨숨. 2월 25일 - 미국의 이슬람 지도자 일라이저 무하마드. 4월 5일 - 중화민국의 총통, 정치가 장제스. 6월 3일 - 일본의 총리 사토 에이사쿠. 7월 3일 - 프랑스의 정치가 기 몰레. 7월 6일 - 나치 독일의 군인 오토 슈코르체니. 8월 9일 - 소련의 작곡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8월 17일 - 대한민국의 장준하. 8월 27일 - 에티오피아의 마지막 황제 하일레 셀라시에 1세. 9월 21일 - 대한민국의 영화배우 허장강. 11월 2일 - 이탈리아의 시인 피에르 파올로 파졸니. 11월 20일 - 스페인의 정치가 프란시스코 프랑코. 12월 4일 - 독일 출신의 정치철학자 해나 아렌트. 경제학상 :레오니드 칸토로비치,찰링 코프만스 문학상 :에우제니오 몬탈레 물리학상 :오게 닐스 보어,벤 모텔손,제임스 레인워터 생리학 및 의학상 레나토 둘베코,하워드 마틴 테민,데이비드 볼티모어 평화상 :안드레이 사하로프 화학상 :콘포스,프렐로그 음력월 월건 대소 음력 1일의양력 월일 음력 1일간지 1월 무인 대 2월 11일 무자 2월 기묘 대 3월 13일 무오 3월 경진 소 4월 12일 무자 4월 신사 대 5월 11일 정사 5월 임오 소 6월 10일 정해 6월 계미 소 7월 9일 병진 7월 갑신 대 8월 7일 을유 8월 을유 소 9월 6일 을묘 9월 병술 소 10월 5일 갑신 10월 정해 대 11월 3일 계축 11월 무자 소 12월 3일 계미 12월 기축 대 1976년 1월 1일 임자
1955년 은 토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1월 17일 - 미 해군이 건조한 최초의 원자력 잠수함인 노틸러스 호 가 항해를 시작하다. 1월 18일 - 중국 인민해방군, 일강산도 점령. 1월 24일 - 저우언라이, 타이완은 중화인민공화국 영토의 일부이고 타이완 문제에 대하여 유엔 등 외국이 간섭할 권리가 없다고 선언. 1월 29일 - 미국 의회, 타이완방위결의안 통과; 대통령에게 무력사용권한 부여. 1월 29일 - 대한민국 단성사 앞 저격사건이 일어나다. 1월 31일 - 중국 국무원, 채택. 2월 27일 - 독일 연방하원의회는 사민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독일연방의 나토 가입을 위한 파리조약 의결. 3월 1일 - 육군 본부, 대구서 서울로 이전. 3월 2일 - 부산역 열차 화재 사고 발생. 3월 21일 - 중공전국대표회의 개최 (∼31일); , , 채택. 4월 1일 - 독일 국적 항공사인 루프트한자가 최초로 운항개시. 4월 4일 - 중공 7기 5중전회 개최; 임표, 등소평 정치국위원에 보선 4. 29 소련 원자로를 중국, 폴란드, 체코, 동독에 제공하는 협정 서명. 4월 18일 - 아시아·아프리카회의(AA회의, 반둥회의)가 반둥에서 개막. 4월 24일 - 아시아·아프리카회의(AA회의, 반둥회의)에서 세계평화 및 협력에 관한 10개항 선언문을 채택. 4월 29일 - 소련 원자로를 중국, 폴란드, 체코, 동독에 제공하는 협정 서명. 5월 9일 - 서독,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가입. 서독 재무장 시작. 5월 11일 - 시운마루호 침몰 사고 발생. 5월 14일 - 바르샤바 조약 체결(소련 및 동유럽 국가들). 5월 25일 - 소련군, 旅順해군기지 철수완료, 중국에 반환. 6월 1일 - 유럽연합, 메시나 ECSC 6개국 외상회담. 유럽통합 재활성화 결의. 프랑스의 정치인 르네 메이어를 공동관리청장으로 임명. 7월 5일 - 중국 제1기 전인대 제2차회의 (∼30일); 등 채택. 7월 9일 * EU 유럽통합 재활성화를 위한 스파크 위원회 업무 개시. * 러셀성명 , 6개국 원수에게 전달되다. 핵무기전쟁에 의한 인류파멸의 위기를 경고한 성명이다. 7월 17일 - 미국, 최초의 디즈니랜드 개장. 7월 31일 - 마오쩌뚱, 중공성,시,구위원회서기회의에서 보고, 전국적인 농업협동화운동을 호소. 8월 1일 - 제1차 중-미회담개시 (제네바). 8월 13일 - 서울적십자병원, 대한민국 최초의 성전환 수술 시행. 8월 18일 - 대한민국, 당분간 일본과 경제 관계 단절. 8월 25일 - 중국 국무원, , 공포. 8월 26일 - 대한민국, 국제통화기금(IMF)과 국제개발은행(IBRD)에 가입하다. 9월 1일 - 우한장강대교 공사가 시작했다. 9월 8일 - 콘라트 아데나워 서독 총리, 제2차 세계 대전 종전후 최초로 소련 방문. 9월 9일 - 소비에트 연방과 독일, 모스크바에서 정상회담 개최, 9월 13일에 양국 국교 수립 선언. 9월 10일 - 프랑스와 모로코 자치협정 조인. 9월 13일 - 서독-소련 국교수립. 9월 19일 - 대한민국, 민주당 창당. 9월 19일 - 아르헨티나 독재자 후안 페론 대통령, 군부 쿠데타로 실각. 10월 4일 - 중국공산당 7기 6중전회(확대)개최 (∼11일); 채택; 채택. 10월 5일 - 미국, 인공위성 제작 발표. 10월 9일 - 제2차 세계 대전 때 생포돼 소련에 억류됐던 마지막 독일군 포로 전원 석방. 10월 11일 - 라오스 정전협정 성립. 10월 12일 - 서독 연방군(Bundeswehr) 발족. (독일의 재무장) 10월 12일 - 한국인 입양 해리 홀트와 버다 홀트 부부가 한국인 전쟁 고아 8명을 입양하고 4명을 미국의 다른 부모에게 입양을 주선하다. 10월 13일 - 장 모네, 유럽합중국을 위한 행동위원회 창설 . 10월 19일 - 중국-북조선, 무역협정 체결. 10월 23일 - 자르 국민투표로 유럽 자치구 거부. 서독으로 귀속 결정. 프랑스는 서독과 완충지대로 삼을 계획이었다. 10월 26일 - 베트남 공화국 건국. 11월 1일 - 베트남 전쟁 발발. 11월 14일 - 미-일, 원자력협정 조인. 11월 15일 - 일본 자유민주당 창당 11월 21일 - 유럽안전보장협력회 의 34개회원국이 파리헌장에 서명. 그 헌장에는 대결과 분열의 시대는 유럽에서 종말을 고했다 라고 적혀있다. 11월 22일 - 중동조약기구(METO) 결성 발표. 1958년 이라크 혁명으로 이라크 탈퇴후 중앙아시아조약기구(CENTO)로 개칭. 11월 26일 - 소련, 100만톤 TNT급의 수소폭탄 실험. 11월 26일 - 영국, 키프로스에 비상사태 선언. 11월 27일 - 소련, 서베를린 자유시화 제안. 12월 8일 - 마오쩌둥 편, 출판. 12월 8일 - 유럽 회의와 각료이사회의가 유럽의 상징으로 파란색 바탕에 12개의 노란별이 수놓인 기를 채택. 12월 14일 - 네팔, 라오스, 루마니아, 리비아, 불가리아, 스리랑카, 아일랜드, 알바니아, 스페인, 오스트리아, 요르단, 이탈리아, 캄보디아, 핀란드, 포르투갈, 헝가리 유엔 가입. 1월 1일 - 대한민국의 정치가 겸 시사평론가 남충희. 1월 6일 - 영국의 배우 로언 앳킨슨. 1월 8일 - 대한민국의 변호사 겸 시사평론가 전원책. 1월 13일 - 대한민국의 전 축구 선수, 현 축구 감독 허정무. 1월 15일 - 일본의 성우 타나카 마유미. 1월 18일 - 미국의 배우 케빈 코스트너. 1월 20일 - 대한민국의 성우 성병숙. 1월 26일 - 스웨덴의 배우 비에른 안드레센. 1월 28일 - 프랑스의 정치가 니콜라 사르코지. 2월 4일 - 대한민국의 정치인 길정우. 2월 6일 - 대한민국의 가수 윤수일. 2월 8일 - 미국의 소설가 존 그리샴. 2월 11일 - 대한민국의 변호사, 아름다운재단 상임이사, 서울특별시장 박원순. 2월 14일 * 대한민국의 시사평론가 겸 대학 교수이며 프리 랜서 방송인 이상로. *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 현 야구 코치 이선희. 2월 21일 - 미국의 배우 켈시 그래머. 2월 24일 * 미국의 기업가 스티브 잡스 (애플 컴퓨터 창업자). * 프랑스의 자동차 경주 선수 알랭 프로스트. 3월 3일 - 대한민국의 가수 강진. 3월 14일 - 아르헨티나의 전 축구 선수 다니엘 베르토니. 3월 17일 - 미국의 배우 게리 시니스. 3월 19일 - 미국의 배우 브루스 윌리스. 3월 21일 - * 프랑스의 전 축구 선수, 현 축구 감독 필리프 트루시에. * 브라질 제38대 대통령 자이르 보우소나루. 3월 22일 - 라트비아의 대통령 발디스 자틀레르스. 3월 25일 - 대한민국의 방송인 김영신. 3월 29일 - 아일랜드의 배우 브렌던 글리슨. 4월 5일 * 러시아의 기업인 레오니트 페둔. * 일본의 만화가 도리야마 아키라. 4월 8일 - 조지아의 전 축구 선수, 현 축구 감독 알렉산드르 치바제. 4월 13일 * 러시아의 정치인 이리나 하카마다. *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전 축구 선수, 현 축구 감독 사페트 수시치. 4월 25일 - 아르헨티나의 전 축구 선수, 현 축구 감독 아메리코 가예고. 4월 27일 - 미국의 기업가 에릭 슈밋. 4월 28일 - 미국의 배우 폴 길포일. 5월 7일 - 대한민국의 전 축구 선수, 현 축구 감독 박성화. 5월 9일 - 스웨덴의 메조소프라노 가수 안네 소피 폰 오터. 5월 10일 - 존 레넌의 암살자 마크 채프먼. 5월 18일 * 영국의 기업인 파하드 모시리. * 홍콩의 배우 주윤발. 5월 29일 - 일본의 전 야구 선수, 현 야구 코치 하나마스 고지. 6월 21일 - 프랑스의 전 축구 선수, 현 축구 행정가 미셸 플라티니. 6월 27일 - 프랑스의 영화배우 이자벨 아자니. 6월 28일 *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 현 야구 코치 오종훈. * 대한민국의 야구인 이광은. **미국의 바리톤 가수 토머스 햄프슨. * 대한민국의 가수 하춘화. 7월 5일 - 대한민국의 야구인 서정환. 7월 6일 - 대한민국의 정치가 김순자. 7월 11일 - 대한민국의 가수 심수봉. 7월 17일 - 대한민국의 문인 양귀자. 7월 21일 - 아르헨티나의 전 축구 선수, 현 축구 감독 마르셀로 비엘사. 7월 22일 - 미국의 배우 윌럼 더포. 7월 26일 - 파키스탄 정치인 아시프 알리 자르다리. 8월 18일 - 일본의 성우 시오야 코조. 8월 20일 - 대한민국의 성우 신성호. 8월 24일 - 미국의 정치인 마이크 허커비. 9월 3일 - 대한민국의 배우 기주봉. 9월 7일 - 러시아의 수학자 에핌 젤마노프. 9월 25일 - 독일의 전 축구 선수, 현 축구 행정가 카를하인츠 루메니게. 9월 27일 - 대한민국의 가수 이치현. 10월 3일 - 아르헨티나의 전 축구 선수 호세 다니엘 발렌시아. 10월 4일 *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 현 야구 코치 김용희. * 아르헨티나의 전 축구 선수 호르헤 발다노. *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 현 야구 코치 유지훤. 10월 16일 - 대한민국의 대학 교수, 동시 통역사 최정화. 10월 28일 - 미국의 기업가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사의 공동 창업자). 11월 8일 - 스위스의 축구인 기젤라 오에리. 11월 13일 - 미국의 배우 우피 골드버그. 11월 14일 - 영국의 기업인 니나 브레이스웰스미스. 12월 3일 - 아르헨티나의 전 축구 선수 알베르토 타란티니. 12월 5일 - 일본의 가수 가와나카 미유키. 12월 15일 - 대한민국의 지방자치행정가 겸 대학 교수 한현택. 12월 17일 - 대한민국의 배우이자 교수 길용우. 12월 22일 - 대한민국의 성우 이규화. 12월 28일 - 중국의 반체제 인사, 인권 운동가 류샤오보. 12월 30일 - 대한민국의 배우 김해숙. 2월 18일 - 대한민국의 교육인 김성수. 3월 3일 - 대한민국의 국회의원 배헌. 3월 9일 - 미국의 흑인 북극 탐험가 매튜 헨슨. 3월 11일 - 영국의 생물학자 알렉산더 플레밍. 4월 18일 - 독일의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7월 20일 - 대한민국의 기업인 문재철. 8월 12일 - 독일의 소설가 토마스 만. 8월 16일 - 대한제국의 황족 의친왕. 9월 30일 - 미국의 배우 제임스 딘. 10월 17일 - 대한민국의 정치인 이병홍. 11월 4일 - 미국의 야구 선수 사이 영. 12월 5일 - 일본의 군인·조선 총독 미나미 지로. 12월 6일 - 미국의 야구 선수 호너스 와그너. 문학상 물리학상 윌리스 유진 램, 폴리카프 쿠시 생리학 및 의학상 화학상 음력월 월건 대소 음력 1일의양력 월일 음력 1일간지 1월 무인 대 1월 24일 을유 2월 기묘 소 2월 23일 을묘 3월 경진 소 3월 24일 갑신 윤3월 대 4월 22일 계축 4월 신사 소 5월 22일 계미 5월 임오 소 6월 20일 임자 6월 계미 대 7월 19일 신사 7월 갑신 소 8월 18일 신해 8월 을유 대 9월 16일 경진 9월 병술 소 10월 16일 경술 10월 정해 대 11월 14일 기묘 11월 무자 대 12월 14일 기유 12월 기축 대 1956년 1월 13일 기묘
1995년 은 일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김종국 제자리걸음 박상철 무조건 SG워너비 살다가 1월 1일 * 스웨덴, 오스트리아, 핀란드가 유럽 연합에 가입하다. * 세계 무역 기구가 발족하다. 1월 6일 - 보진카 계획이 발견되다. 1월 8일 - 대한민국에서 개인정보보호법(개인정보보호에 관한 법률)이 시행되다. 1월 17일 - 일본 한신·아와지 대지진(6,434명 사망, 43,792명 부상, 3명 행방 불명) 발생. 3월 20일 - 옴진리교가 일본 도쿄 지하철에 사린 가스를 살포하다.(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 12명이 사망하였고, 5000여 명이 중독되었다. 3월 30일 - 김종필,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하다. 4월 13일 - 대한민국과 이집트가 대사급으로 격상된 외교관계를 맺고 정식으로 수교하다. 4월 17일 - 청일 전쟁 종전 100주년. 4월 19일 - 미국 오클라호마주에서 폭탄 테러가 발생하다. 168명이 사망하였고, 680명 이상의 사람들이 부상을 입었다. 4월 28일 - 대구 상인동 가스 폭발 사고로 101명이 사망하다. 5월 - 중화인민공화국 산서성에서 장평 대전 당시 생매장된 유해들이 대거 발굴되다. 5월 11일 - 핵확산 방지조약이 무기한으로 연장되다. 5월 27일 - 대법원이 지존파 일당 6명에 대한 사형을 최종 확정하다. 5월 30일 - 서해상에서 대한민국 어선 우성호가 인천항에 귀항 중,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해군 함정의 총격을 받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납치되었다. 6월 27일 - 지방의회 의원 및 지방자치단체의 장을 선출하는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실시되다. 6월 29일 -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로 인해 502명의 사망자와 937명의 부상자가 발생하다. 7월 17일 - 미국 우주비행사 거주 및 작업공간인 Spektr이 우주정거장의 로봇 팔에 의해 모듈의 위치가 변경되다. 7월 18일 - 대한민국 검찰이 지난 5·18 사건과 5·18 관련자들에 대해 공소권 없음 결정을 내렸다. 7월 23일 - 씨프린스호가 제3호 태풍 페이에 휩쓸려 좌초되어 총 99000톤의 기름이 유출되었다. 7월 24일 - 대한민국, 태풍 재니스 상륙. 28일까지 지속되다. 8월 5일 - 미국과 베트남이 재수교하다. 8월 21일 - 경기도 용인군 경기여자기술학원 기숙사 방화로 37명이 사망하고 16명이 부상당하다. 9월 5일 -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창당하다. 9월 8일 - 유고슬라비아 전쟁 당사자들, 제네바 평화 협상에서 보스니아 평화 원칙에 합의하다. 9월 19일 - 워싱턴 포스트와 뉴욕 타임즈가 《유나바머 선언》을 싣다. 10월 2일 - 미국 미식축구 선수 O. J. 심슨 무죄 평결 석방되다. 10월 6일 - 네이처 지에 페가수스자리 51번 별을 도는 행성 발견에 대한 기사가 실리다. 10월 8일 - 을미사변 100주년. 10월 24일 - 충청남도 부여군에서 두 명의 무장 공비가 발견되어 교전 끝에 한 명을 사살하고 한 명을 생포하다. 10월 27일 - 노태우 전 대통령, 연희동 자택에서 비자금 사건과 관련한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하다. 10월 28일 - 대구시민운동장에서 열렸던 《젊음의 삐삐 012 콘서트》 현장에서 1만여 명의 관객이 한꺼번에 입장하려다 8명이 부상을 입었다. 11월 2일 - 지존파 일당과 온보현 등 흉악범 19명에 대한 사형이 집행되었다. 11월 4일 - 텔아비브에서 이스라엘 수상 이츠하크 라빈이 암살당하다. 11월 6일 - 조선 중종 때 정온의 시신, 파주군에서 미라로 발견되다. 11월 12일 - 크로아티아 전쟁 종전. 11월 16일 - 노태우 전 대통령, 재임 당시 5,000억원의 비자금을 조성하고 기업체들로부터 뇌물을 받은 혐의로 구속 수감되다. 헌정 사상 전직 대통령이 구속된 것은 광복 이후 처음이다. 12월 3일 - 전두환 전 대통령, 12·12 사태와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유혈 진압을 주도한 혐의로 구속 수감되다. 12월 6일 - 민주자유당이 신한국당으로 출범하다. 12월 14일 - 보스니아 전쟁이 종전되다. 12월 20일 - 아메리칸 항공 965편 추락 사고 발생. 1월 1일 - 대한민국에서 행정 구역 체계의 개편이 이루어져 직할시가 광역시로 개편되고 전국단위의 도농통합으로 창원시 등 도농복합시들이 출범하다. 1월 8일 - NHK의 드라마 8대 장군 요시무네 방송 개시(~12월 10일) 1월 9일 - SBS TV 모래시계 방송 시작. 2월 1일 - 부산불교방송 개국. 2월 15일 - 대한민국, 러시아, 일본을 연결하는 국제 해저 광케이블이 개통되다. 3월 1일 * 대한민국 케이블TV의 본방송이 개시되다. * 특별시·광역시·도 행정구역 경계가 조정되고 특별시·광역시의 일부 자치구들이 분구되다. * 광주불교방송 개국. 3월 2일 - 현대자동차에서 마르샤가 출시되었다(시판은 같은 달 3일). 3월 16일 - 현대자동차에서 아반떼가 출시되었다.(시판은 같은 달 17일) 4월 3일 - KBS 제2FM 볼륨을 높여요 첫방송. 4월 10일 - 대한민국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현 서원구) 사직동에서 청주예술의전당이 준공 및 개관했다. 4월 15일 - 삼성 라이온즈의 이승엽이 잠실 야구장에서 LG 트윈스와의 경기에서 처음으로 선발 출전하다. 4월 28일 - 쌍용자동차에서 이스타나가 출시되었다.(시판은 7월) 5월 10일 - 김해시 등 시군 통합되어 도농복합시들이 출범하다. 5월 14일 - SBS 네트워크 가맹국이 출범됨에 따라 KNN(舊 PSB부산방송), TBC(舊 대구방송), TJB 대전방송, kbc 광주방송 등 4개 지역 민방 텔레비전이 개국하여 SBS 지역 민방 네트워크 가맹국 체제에 들어가다. 5월 30일 - 윈도우 NT 3.51이 출시되다. 5월 31일 - 이슬람력 설날. 6월 20일 - 기아자동차에서 크레도스가 시판되었다. 8월 4일 - 대한민국, 정보화촉진기본법을 공포하다. 8월 5일 - 대한민국 최초의 통신위성 무궁화 1호 , 미국 케이프커내버럴 기지에서 발사 성공하다. 8월 11일 - 대한민국 광복 50주년 맞아 이듬해인 1996년 3월 1일 국민학교 에서 초등학교 로 명칭을 변경하기로 발표하다. 8월 15일 - 대한민국, 옛 조선 총독부 건물 철거 공사를 시작하다. 8월 18일 - 대한민국, 문화방송, 위성방송사업단이 발족하다. 8월 24일 -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 95를 출시하다. 8월 29일 - 대한민국, 중앙고속도로, 칠곡-안동, 제천-원주, 홍천-춘천간 2차로 개통함. 9월 6일 -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유격수 칼 립켄 주니어가 2,131번째 경기에 출장하면서 루 게릭이 가지고 있던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연속 경기 출장 기록을 깨다. 9월 20일 - 제1회 광주비엔날레 개막. (~11월 20일) 9월 22일 - 중앙일보 가로쓰기 발행 시작. 10월 4일 - 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 시리즈 방영을 개시하다. (~1996년 3월 27일) 11월 7일 - V-리그 대전 삼성화재 블루팡스 창단 11월 9일 - 마카오 국제공항 개항. 11월 13일 - 기아자동차에서 프레지오가 시판되었다. 11월 15일 - 서울 지하철 5호선 왕십리~상일동 구간이 개통되었다. 11월 22일 - 대한민국, 1996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실시하다. 11월 22일 - 영화 토이 스토리가 개봉되다. 12월 1일 - * 대한민국 기독교 케이블TV 채널 CTS가 개국되었다. * 대한민국 최초의 애니메이션 케이블TV 채널 투니버스가 개국되었다. 12월 10일 - 국내 최초의 다채널 사업자였던 온미디어가 설립되다. 12월 12일 - 대동여지도 목판본 발견. 12월 15일 - 수원 삼성 블루윙즈가 K리그 제9구단으로 창단하다. 12월 18일 - 제2경인고속도로 광명 나들목 ~ 석수 나들목 (5.39 km) 구간 개통 12월 23일 - 현대정공(현대모비스의 전신)에서 싼타모가 시판되었다. 12월 28일 - 제2경인고속도로 석수 나들목 ~ 삼막 나들목 (1.22 km) 구간 개통 12월 31일 - 수인선 협궤열차가 마지막 운행을 하다. 이후 복선전철화 완료시까지 16~21년 동안 영업중지되다. 날짜미상 * USL 프리미어 디벨로프먼트 리그의 첫 시즌이 시작되었다. * 미국 전역에 유연 휘발유 사용이 금지되었다. 1월 3일 * 대한민국의 가수 설현 (AOA). * 대한민국의 가수 지수 (블랙핑크). 1월 4일 - 미국의 배우 매디 해슨. 1월 7일 - 대한민국의 배우 홍서영. 1월 9일 * 대한민국의 배우 하승리. * 미국의 배우 니컬라 펠츠. * 멕시코의 축구 선수 카를라 파올라 니에토. 1월 10일 - 일본의 가수 켄타 (JBJ). 1월 17일 - 네덜란드의 축구 선수 도미니크 얀선. 1월 20일 - 대한민국의 가수 김소희. 1월 21일 - 대한민국의 배우 최아라. 1월 22일 - 대한민국의 가수 진이 (오마이걸). 1월 23일 * 대한민국의 래퍼 유영 (헬로비너스). * 중국의 축구 선수 왕솽. 2월 5일 - 대한민국의 쌍둥이 진, 빈 (MVP) 2월 6일 - 대한민국의 가수 종업 (B.A.P). 2월 8일 - 대한민국의 가수 송윤형 (iKON). 2월 9일 - 미국의 가수 쟈니 (NCT). 2월 13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이건욱. 2월 15일 * 대한민국의 배우 고민시. * 독일의 축구 선수 자라 데브리츠. 2월 21일 - 대한민국의 배우 이태환 (서프라이즈). 2월 27일 - 대한민국의 가수 리키 (틴탑). 3월 6일 - 대한민국의 전 가수 진혜원. 3월 12일 - 대한민국의 배구선수 공윤희. 3월 13일 - 대한민국의 축구선수 강현무. 3월 14일 - 대한민국의 배우 박지빈. 3월 20일 - 대한민국의 가수 Kei (러블리즈). 3월 21일 - 대한민국의 전 가수 은교. 3월 24일 - 프랑스의 축구 선수 엔조 지단. 4월 1일 - 대한민국의 프로게이머 이동녕(FXOpen). 4월 3일 - 프랑스의 축구선수 아드리앵 라비오. 4월 6일 - 일본의 가수, 배우 모리모토 류타로 (Hey! Say! JUMP). 4월 7일 - 대한민국의 수영 선수 임태정. 4월 14일 - 대한민국의 배드민턴 선수 이민지. 4월 15일 - 대한민국의 가수 김남주 (에이핑크). 4월 16일 - 대한민국의 가수 강승식 (빅톤). 4월 17일 - 대한민국의 가수 휘인 (마마무). 4월 23일 - 대한민국의 배우 윤예주. 4월 24일 - 대한민국의 쌍둥이 영민, 광민 (보이프렌드). 4월 28일 - 대한민국의 야구선수 심우준. (KT 위즈) 5월 1일 - 대한민국의 래퍼 미미 (오마이걸). 5월 2일 - 대한민국의 가수 육성재 (비투비). 5월 4일 - 대한민국의 가수 예인 (멜로디데이). 5월 7일 - 대한민국의 야구선수 하영민. (넥센 히어로즈) 5월 8일 - 대한민국의 가수 정화 (EXID). 5월 12일 - 벨기에의 축구 선수 엘커 판 호르프. 5월 19일 - 대한민국의 가수 해인 (라붐). 5월 20일 - 대한민국의 야구선수 이진석. (SK 와이번스) 5월 23일 - 대한민국의 가수 김상균 (탑독, JBJ). 5월 26일 - 대한민국의 배우 이예림. 5월 27일 - 대한민국의 배구선수 이아청. 6월 6일 - 대한민국의 방송인 오현민. 6월 8일 - 대한민국의 래퍼 JR (뉴이스트). 6월 12일 - 대한민국의 야구선수 배병옥. 6월 15일 - 대한민국의 전 래퍼 버피. 6월 16일 * 대한민국의 배우 주다영. * 대한민국의 래퍼 희현 (다이아). 6월 18일 - 대한민국의 전 가수 호. 6월 19일 - 대한민국의 야구선수 유희운. (KT 위즈) 6월 20일 - 대한민국의 배구선수 최양비. 6월 27일 - 대한민국의 야구선수 조영우. (한화 이글스) 6월 28일 - 대한민국의 골프선수 김시우. 6월 29일 - 대한민국의 배우 최리. 7월 1일 - 대한민국의 가수 태용 (NCT). 7월 5일 - 대한민국의 가수 혁 (빅스). 7월 10일 * 일본의 가수 신가키 유토. * 노르웨이의 축구 선수 아다 헤게르베르그. 7월 12일 - 영국의 축구 선수 루크 쇼. 7월 14일 - 대한민국의 골프선수 김효주. 7월 18일 - 대한민국의 배우 장성범. 7월 21일 - 대한민국의 가수 백호 (뉴이스트). 7월 23일 - 대한민국의 가수 화사 (마마무). 7월 24일 - 대한민국의 가수 다원 (SF9). 7월 31일 * 대한민국의 래퍼 민우 (보이프렌드). * 대한민국의 가수 Y (골든차일드). 8월 2일 - 대한민국의 가수 진후 (업텐션). 8월 5일 - 덴마크의 축구 선수 피에르에밀 호이비에르. 8월 8일 - 대한민국의 래퍼 에스쿱스 (세븐틴). 8월 9일 - 대한민국의 가수 민현 (뉴이스트, 워너원) 8월 10일 - 대한민국의 프로게이머 김지성. 8월 15일 - * 대한민국의 모델 진정선. * 일본의 가수 오구라 유이. 8월 17일 - 미국의 스케이트 선수 그레이시 골드. 8월 22일 * 대한민국의 쇼트트랙 선수 김아랑. * 대한민국의 야구선수 임동휘. (넥센 히어로즈) * 미국의 배우 줄리엣 고글리아. 8월 25일 - 대한민국의 가수 옹성우 (워너원). 8월 28일 - 대한민국의 야구선수 박광열. (NC 다이노스). 8월 29일 - 대한민국의 배우 이빛나. 9월 1일 - 대한민국의 야구선수 안중열. (롯데 자이언츠) 9월 6일 - 대한민국의 야구선수 임지섭. (LG 트윈스). 9월 10일 - 대한민국의 래퍼 디애나 (소나무). 9월 11일 * 대한민국의 프로게이머 이재선. * 대한민국의 야구선수 이수민. 9월 12일 - 대한민국의 농구선수 신지현. 9월 14일 - 대한민국의 가수 안지영 (볼빨간사춘기) 9월 17일 * 대한민국의 배우 남지현. * 대한민국의 가수 유아 (오마이걸). 9월 18일 - 미국의 가수 메건 리. 9월 22일 - 대한민국의 가수 나연 (트와이스). 9월 26일 - 대한민국의 가수 앤제이. 9월 28일 - 대한민국의 배우 김보라. 9월 30일 - 대한민국의 야구선수 임병욱. 10월 4일 - 대한민국의 가수 정한 (세븐틴). 10월 5일 - 대한민국의 농구선수 김채은. 10월 6일 - 대한민국의 가수 케이시. 10월 7일 * 대한민국의 야구선수 김태진. * 영국의 축구선수 로이드 존스. 10월 10일 - 대한민국의 가수 오승희 (CLC). 10월 13일 - 대한민국의 가수 지민 (방탄소년단). 10월 14일 - 대한민국의 수영 선수 안세현. 10월 15일 * 대한민국의 골프 선수 백규정.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장민호. 10월 16일 - 대한민국의 펜싱 선수 박상영. 10월 17일 * 대한민국의 야구선수 김하성. (넥센 히어로즈) * 대한민국의 가수 미소 (글램). 10월 26일 - 일본의 가수 유타 (NCT). 10월 29일 - 대한민국의 배구선수 이인희. 11월 3일 - 대한민국의 가수 렌 (뉴이스트). 11월 6일 - 대한민국의 래퍼 엑시 (우주소녀). 11월 11일 - 대한민국의 래퍼 쿤 (업텐션). 11월 13일 - 대한민국의 배우 이혜인. 11월 16일 - 대한민국의 가수 창조 (틴탑). 11월 18일 - 대한민국의 프로게이머 남기웅. 11월 20일 - 대한민국의 축구선수 고민성. 11월 21일 * 대한민국의 야구선수 김민혁. (KT 위즈). * 대한민국의 야구선수 장준원. (LG 트윈스). 11월 22일 - 대한민국의 모델 한슬. 11월 23일 - 대한민국의 가수 나영 (구구단). 11월 30일 * 대한민국의 야구선수 안규현. (삼성 라이온즈) * 대한민국의 야구선수 박세웅. (롯데 자이언츠) 12월 4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유서준. 12월 5일 * 프랑스의 축구 선수 앙토니 마르시알. * 캐나다의 피겨 스케이팅 선수 케이틀린 오즈먼드. 12월 7일 * 대한민국의 전 래퍼 최성민. * 대한민국의 가수 소원 (여자친구). 12월 9일 - 대한민국의 가수 나현 (소나무). 12월 14일 - 대한민국의 가수 허찬 (빅톤). 12월 15일 - 대한민국의 배우 연준석. 12월 16일 - 대한민국의 스노보드 선수 정해림. 12월 18일 - 대한민국의 래퍼 나영 (아이오아이, 프리스틴) 12월 19일 - 대한민국의 야구선수 정선호. 12월 20일 - 대한민국의 전 래퍼 T.K.. 12월 21일 - 대한민국의 래퍼 BOBBY (iKON). 12월 25일 * 대한민국의 가수 박재정. * 대한민국의 가수 임영민 (MXM). 12월 26일 - 대한민국의 가수 채진 (마이네임). 12월 30일 * 대한민국의 가수 뷔 (방탄소년단). * 미국의 가수 조슈아 (세븐틴). 미키 맨틀 앨릭 더글러스흄 이츠하크 라빈 1월 29일 - 대한민국의 레슬링 선수 송성일. 2월 4일 - 미국의 작가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2월 25일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군인 오진우. 3월 7일 - 안과 의사, 타자기 연구가 공병우. 3월 14일 - 미국 천문학자 윌리엄 앨프리드 파울러. 4월 17일 - 대한민국의 판소리 명창 김소희. 5월 8일 - 중화민국의 가수 등려군. 5월 24일 - 영국의 정치가, 총리 해럴드 윌슨. 6월 14일 - 미국 소설가 로저 젤라즈니. 6월 17일 - 대한민국의 소설가 김동리. 7월 4일 - 미국 화가 밥 로스. 7월 5일 - 일본의 정치가, 총리 대신 후쿠다 다케오. 7월 13일 - 대한민국의 교육자 겸 사회사업가 박찬주. 7월 16일 - 영국의 문인 스티븐 스펜더. 7월 20일 - 독일 출신의 지식인, 정치활동가 에르네스트 만델. 8월 11일 - 미국 수학자 알론조 처치. 8월 13일 - 미국의 야구 선수 미키 맨틀. 8월 17일 - 경제학자 박현채. 8월 28일 - 독일의 작가 미하엘 엔데. 8월 29일 - 프랑스의 작곡가 피에르 막스 뒤부아. 9월 15일 - 일본의 정치가 와타나베 미치오. 10월 9일 - 영국의 정치가 앨릭 더글러스흄. 11월 2일 - 대한민국의 범죄자 최명복 11월 3일 - 한국계 독일 작곡가 윤이상. 11월 4일 - 이스라엘 수상 이츠하크 라빈. 11월 20일 - 전 듀스 멤버 김성재. 12월 25일 * 대한민국의 의학박사 장기려. * 프랑스의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 경제학상 로버트 E. 루카스 2세 문학상 시머스 히니 물리학상 프레더릭 라이네스,마틴 L. 펄 생리학 및 의학상 에드워드 루이스,에릭 위샤우스,크리스티안네 뉘슬라인 폴하르트 평화상 요세프 로트블라트 화학상 파울 크뤼천,F. 셔우드 폴런드,마리오 몰리나 음력월 월건 대소 음력 1일의양력 월일 음력 1일간지 1월 무인 소 1월 31일 임술 2월 기묘 대 3월 1일 신묘 3월 경진 대 3월 31일 신유 4월 신사 소 4월 30일 신묘 5월 임오 대 5월 29일 경신 6월 계미 대 6월 28일 경인 7월 갑신 소 7월 28일 경신 8월 을유 대 8월 26일 기축 윤8월 소 9월 25일 기미 9월 병술 대 10월 24일 무자 10월 정해 소 11월 23일 무오 11월 무자 소 12월 22일 정해 12월 기축 대 1996년 1월 20일 병진
1987년 은 목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1월 14일 - 서울대생 박종철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 도중 사망하다. 3월 7일 - 중화민국 례위향에서 베트남 보트피플 학살 사건이 발생하다. 3월 22일 -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이 발생하다. 4월 13일 - 전두환 대통령 4.13호헌조치 발표하다. 5월 3일 - 일본의 우익단체 적보대(), 효고현 니시노미야 시에 있는 아사히 신문 한신 지국에 난입하여 기자와 직원을 살해한 사건이 발생하다. 5월 17일 - 미해군 프리깃함 스타크호 피격 사건이 발생하였다. 6월 10일 - 대한민국 서울에서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일어나다. 6월 12일 -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이 브란덴부르크 문에서 이 장벽을 허무시오 (Tear down this wall!) 연설을 하다. 6월 29일 - 노태우가 6.29 선언 발표하다. 대한민국의 민주화. 7월 15일 - 대한민국에 태풍 셀마가 상륙하다. 7월 15일 - 중화민국 정부에서 메이리다오 사건을 바탕으로 타이완 성 계엄령해제 이후복수정당제를 도입하다. 8월 1일 - 메카에서 이란과 사우디 순례자간 충돌로 402명이 사망하다. 8월 5일 - 노태우, 민주정의당 총재에 취임하다. 8월 11일 - 앨런 그린스펀이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의 의장이 되다. 8월 19일 - 대한민국, 전국 95개 대학교 학생들, 충남대학교에서 전국대학생대표자회의(전대협) 결성하다. 8월 28일 - 필리핀에서 코라손 아키노 대통령에 대한 쿠데타가 발생해 55명이 사망하다. 8월 29일 - 오대양 용인 공장서 박순자 사장 등 32명이 집단 자살한 변사체로 발견되다. 8월 31일 - 대한민국, 민주정의당 통일민주당 8인 정치회담이 이루어져 직선제 개헌안 협상을 타결하다. 9월 7일 - 구 동독 사회주의통일당 서기장 에리히 호네커가 동·서독 분단 이후 처음으로 서독을 방문하다. 9월 13일 - 브라질 고이아니아에서 방사능 유출 사고가 일어나 최소 249명이 방사능에 피폭되고 4명이 사망했다. 방사능 유출 물질은 세슘-137였다. 9월 20일 - 제9차 세계언론인대회 서울특별시에서 개막(~25일). 9월 29일 -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와 김대중 고문, 대통령후보 단일화회담 결렬되다. 10월 5일 - 아파르트헤이트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로벤 섬에서 24년을 복역한 고반 므베키가 석방되었다. 그는 소수 백인 남아공 정권에 저항했다는 죄목으로 복역했다. 10월 12일 - 대한민국 국회가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가결시키다. 10월 29일 - 대한민국 헌법 제10호(제9 차 개정 헌법)가 공포되었다.(1988년 2월 25일부터 시행) 11월 6일 - 일본의 다케시타 노보루 총리 선출되어 내각이 성립되다. 11월 29일 -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으로 탑승객 115명 전원 사망하다. 12월 16일 -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으며, 그 결과 노태우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대한민국 초등학교 교과목 중 기존의 1~2학년 우리들은 1학년, 바른생활, 슬기로운 생활, 즐거운 생활이 통합되었다. 대한민국 연극제가 서울연극제로 개칭, 개편되었다. 2월 28일 - TV아사히 슈퍼전대 시리즈의 11번째 시리즈 광전대 마스크맨 방송 시작 3월 1일 - 미국 뉴욕의 제 7 세계 무역 센터가 완공되어, 개장하였다. 이리하여, 세계 무역 센터의 전 건물이 영업을 하게 되었다 3월 5일 - 기아산업(기아자동차의 전신)에서 프라이드가 출시되었다. 4월 1일 - 일본국철(일본국유철도)이 JR로 민영화와 동시에 지역 로컬 단위로 분사화. 4월 8일 - 윤이상의 균형을 위하여 초연. 4월 19일 - 심슨 가족의 파일럿 에피소드가 미국에서 첫 방영되었다. 5월 1일 - 서울 지하철 3호선 중앙청역을 경복궁역으로 역명 변경. 5월 16일 - 해태 타이거즈 선동열과 롯데 자이언츠 최동원의 명경기가 있었다. 2011년에 이 경기를 각색한 영화 퍼펙트 게임이 개봉되었다. 7월 - 대한민국, 무연 휘발유 공급. * 대한민국의 문교부, 5차 교육과정에 개정. * 동차형 새마을호 운행개시 8월 15일 - 대한민국, 독립기념관 개관. 8월 18일 - 대한민국 공연윤리위원회, 〈동백아가씨〉,〈고래사냥〉 등 금지가요 186곡 해금. 8월 26일 - 대한민국 제일제당(현 CJ헬스케어), B형 만성간염 치료제 국내 최초로 개발. 9월 5일 - 대한민국 방송심의위원회, 방송 금지 가요 500곡 해제. 9월 9일 - 배우 강수연, 《씨받이》로 44회 베니스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 9월 24일 - 체외수정으로 임신된 다섯 쌍둥이, 서울대병원서 출생했다. 9월 29일 - 대한민국 국내전화 1천만회선 돌파. 10월 5일 - 기아산업(기아자동차의 전신)에서 콩코드가 출시되었다. 10월 13일 - 코스타리카의 오스카르 산체스 대통령,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됨. 10월 17일 - KBS 1,2TV / MBC TV가 토요일 낮방송을 개시하고 이날을 기해 주말 종일방송체제에 들어감. 11월 16일 - 대한민국의 전라남도 서남부 지역의 문화방송 목포MBC TV방송 개국. 11월 17일 - 대한민국의 충청북도 북부 지역의 문화방송 충주MBC TV 연주소 개국. 11월 20일 - 대한민국의 경상남도 서부 지역의 문화방송 진주MBC 텔레비전 방송국 개국. 11월 21일 - 대한민국의 전라남도 동부 지역의 문화방송 여수MBC TV 연주소 개국, 지역 TV-Local 방송을 시작. 11월 23일 - 대한민국의 경상북도 북부 지역의 문화방송 안동MBC TV 연주소 개국. 11월 24일 - 대한민국의 경상북도 동해안 지역의 문화방송 포항MBC TV 연주소 개국. 11월 26일 - 대한민국의 강원도 영서 남부 지역의 문화방송 원주MBC TV 연주소 개국. 11월 27일 - 대한민국의 강원도 영동 남부 지역의 문화방송 삼척MBC TV 연주소 개국. 12월 3일 - 대한민국의 서울특별시와 충청북도 청주시를 잇는 중부고속도로가 약 3년간의 공사를 끝으로 개통되다. 12월 9일 - 윈도 2.0이 출시되었다. 12월 22일 - 대한민국에서 1988학년도 학력고사 실시. 12월 25일 - 대한민국의 MBC 표준FM 개국. (주파수 95.9MHz, 10㎾) 1월 1일 * 대한민국의 배우 최민. * 대한민국의 배우 한소영. * 대한민국의 희극 배우 임종혁. 1월 3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모상기. 1월 4일 * 잉글랜드의 축구 선수 대니 심슨. * 멕시코의 축구 선수 모니카 오캄포. 1월 5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김명제. * 대한민국의 가수 송민경 (더 씨야). 1월 6일 - 대한민국의 배우 신민수. 1월 8일 - 타이의 왕족 시리완나와리 나리랏. 1월 9일 * 일본의 연기자 이노우에 마오. * 브라질의 축구 선수 루카스 레이바. 1월 11일 - 대한민국의 모델, 배우 김영광. 1월 12일 * 대한민국의 가수 선데이 (천상지희 더 그레이스). * 대한민국의 레이싱 모델 한지은. 1월 13일 - 대한민국의 가수 겸 배우 이승기. 1월 14일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윤준하 (강원 FC). * 일본의 배우 하시모토 아츠시 * 대한민국의 가수 김보아 (스피카). 1월 15일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심영성 (제주 유나이티드). * 대한민국의 배우 곽시양. 1월 18일 * 스위스의 축구 선수 요한 주루. * 대한민국의 배우 윤세인. 1월 19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홍명찬 (SK 와이번스). * 대한민국의 배우, 가수, MC 이현지. * 대한민국의 가수 문현아. 1월 22일 -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배지현. 1월 24일 - 우루과이의 축구선수 루이스 알베르토 수아레스. 1월 25일 - 러시아의 테니스 선수 마리아 키릴렌코. 1월 26일 - 이탈리아의 축구 선수 세바스티안 조빈코. 1월 27일 -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김선신. 1월 30일 * 터키의 축구 선수 아르다 투란. * 대한민국의 레이싱 모델 최유정. 2월 1일 - 이탈리아의 축구 선수 주세페 로시. 2월 2일 * 대한민국의 가수 빅토리아 (F(x)). * 스페인의 축구 선수 헤라르드 피케. 2월 5일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양동원 (수원 삼성 블루윙즈). 2월 6일 * 미국의 배우 데인 드한. * 일본의 배우 이치하라 하야토. * 스웨덴의 축구 선수 리사 달크비스트. 2월 7일 * 일본의 방송인 아키바 리에. * 스웨덴의 축구 선수 구스타브 스벤손. 2월 8일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최철순 (전북 현대 모터스).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구본범. * 이탈리아의 여자 피겨 스케이팅 선수 카롤리나 코스트너. 2월 9일 - 대한민국의 래퍼 이센스 (슈프림 팀). 2월 10일 - * 대한민국의 레이싱 모델 전예희. * 대한민국의 가수, 배우 시원 (슈퍼주니어) 2월 12일 - 대한민국의 배우 한보름. 2월 13일 - 대한민국의 레이싱 모델 최슬기. 2월 16일 - 일본의 연기자 카시이 유우. 2월 17일 * 대한민국의 가수 이보람 (씨야). * 대한민국의 레이싱 모델 천세라. 2월 18일 *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신아영. * 대한민국의 스케이트 선수 성시백 2월 19일 - 대한민국의 배우 허이재. 2월 21일 - 캐나다의 배우 엘런 페이지. 2월 22일 * 대한민국의 연기자 한효주. * 아르헨티나의 축구선수 세르히오 로메로. 2월 24일 * 대한민국의 가수, 뮤지컬 배우 김규종(SS501). * 대한민국의 배우 장인섭. 2월 25일 - 대한민국의 배우 박정민. 2월 26일 - 대한민국의 기상 캐스터 김다은. 2월 27일 - 대한민국의 배구 선수 강영준 (서울 우리캐피탈 드림식스). 2월 28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최정 (SK 와이번스). 3월 1일 - 대한민국의 가수 김그림. 3월 7일 - 프랑스의 축구 선수 벤 아르파. 3월 10일 * 중국의 배우 유시시. * 대한민국의 배우 김주현. 3월 13일 - 대한민국의 래퍼 이코 (JJCC). 3월 15일 - 대한민국의 배우 윤지유. 3월 16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손용석. 3월 17일 * 대한민국의 개그우먼 신보라. * 대한민국의 배우 이애정 3월 18일 * 대한민국의 기상 캐스터 이세라.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신광훈 (포항 스틸러스). * 아르헨티나의 축구 선수 마우로 사라테. 3월 19일 - 대한민국의 가수, 배우 주연 3월 20일 * 대한민국의 미스코리아 이세미나. * 파라과이 출신 방송인, 뮤지컬 배우 아비가일 알데레떼. * 브라질의 축구 선수 조. 3월 23일 -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성유미. 3월 25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류현진 (LA 다저스). * 대한민국의 개그맨 김수영. *3월 26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정범모 (한화 이글스). * 일본의 가수 YUI. * 대한민국의 배우 한지우. 3월 27일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신영록(제주 유나이티드). 3월 29일 - 프랑스의 축구 선수 디미트리 파예트. 3월 31일 - 대한민국의 배우 윤균상. 4월 3일 - 대한민국의 가수, 뮤지컬 배우 박정민 (SS501). 4월 4일 - 독일의 축구 선수 사미 케디라. 4월 6일 - 대한민구의 야구 선수 나승현 (롯데 자이언츠). 4월 8일 - 네덜란드의 축구 선수 로이스톤 드렌테. 4월 9일 * 미국의 가수 및 배우 제시 매카트니. * 프랑스의 축구 선수 블레즈 마튀디. 4월 11일 * 대한민국의 프로게이머 박재혁.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박준혁(성남 FC). *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이재성. * 대한민국의 레이싱모델 민서희 4월 14일 - 대한민국의 배우 하은진. 4월 16일 * 잉글랜드의 축구 선수 에런 레넌. * 체코의 축구 선수 마르틴 페닌. 4월 19일 * 러시아의 테니스 선수 마리아 샤라포바. * 잉글랜드의 축구 선수 조 하트. * 영국의 탐험가 제임스 후퍼. 4월 20일 * 대한민국의 배우 송채윤. * 대한민국의 배우 천우희. 4월 22일 * 대한민국의 래퍼, 배우 광수 (초신성). * 나이지리아의 축구 선수 존 오비 미켈. * 대한민국의 개그우먼 정은선 * 브라질의 축구 선수 다비드 루이스 4월 24일 * 대한민국의 배우 서준영. * 독일의 축구 선수 제르다어 타스치. 4월 25일 - 한국계 미국인 가수 박재범. 4월 27일 * 대한민국의 가수 페이 (Miss A). * 일본의 연기자 스즈키 안. 4월 28일 * 세르비아의 축구 선수 조란 토시치. * 대한민국의 개그우먼 김승혜 4월 29일 * 대한민국의 청각장애인 작가 노선영.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한기주 (KIA 타이거즈). * 대한민국의 성우 황창영. 5월 1일 -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이지현. 5월 2일 - 대한민국의 야구인 강정호. 5월 3일 - 대한민국의 배우 김정헌. 5월 4일 - 스페인의 축구 선수 세스크 파브레가스. 5월 5일 * 대한민국의 가수 이샘 (나인뮤지스). * 대한민국의 배우 전보미 5월 6일 * 대한민국의 연기자 문근영. * 대한민국의 미스코리아 장윤희. 5월 7일 - 일본의 아나운서 콘노 아사미. 5월 9일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이상호 (수원 삼성 블루윙즈). 5월 11일 - 대한민국의 가수 임슬옹 (2AM). 5월 13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신정락. 5월 15일 * 영국의 테니스 선수 앤디 머레이. * 대한민국의 인라인스케이트 선수 궉채이. * 대한민국의 배우 김보미. * 스웨덴의 축구 선수 린다 셈브란트. 5월 16일 * 대한민국의 레이싱모델 한채이 5월 20일 * 대한민국의 농구 선수 오세근. * 대한민국의 배우 이하율. 5월 21일 - 대한민국의 배우 이슬아. 5월 22일 * 세르비아의 테니스 선수 노박 조코비치. * 대한민국의 치어리더 출신의 배우, 방송인 서효명. 5월 23일 - 미국의 프로레슬러 윈덤 로턴다. 5월 24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김혁민 (한화 이글스). 5월 27일 - 체코의 여자 스피드 스케이팅 선수 마르티나 사블리코바. 5월 28일 - 대한민국의 트로트가수 지혜 5월 29일 - 대한민국의 배우 임세미. 5월 31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차우찬 (삼성 라이온즈). 6월 3일 - 일본의 연기자 나가사와 마사미. 6월 4일 - 대한민국의 가수 선민. 6월 5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양의지 (두산 베어스). 6월 9일 - 대한민국의 배우 장세현. 6월 10일 - 바이올리니스트 클라라주미강 6월 12일 - 대한민국의 연기자 류덕환. 6월 15일 - 대한민국의 가수 성모 (초신성). 6월 17일 - * 일본의 전(前) 가수, 방송인 쯔지 노조미. * 미국의 힙합 가수 켄드릭 라마. 6월 20일 - 대한민국의 미스코리아 하현정. 6월 21일 * 대한민국의 가수 려욱 (슈퍼주니어). * 일본의 탤런트 요시마쓰 이쿠미. 6월 22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김문호 (롯데 자이언츠). * 대한민국의 배우 이민호. * 대한민국의 전(前) 가수, 배우 오연서. 6월 23일 - 대한민국의 배우 박혜원. 6월 24일 * 아르헨티나의 축구 선수 리오넬 메시.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박종진. * 일본의 축구 선수 모리타 신지. * 일본의 가수 LiSA. 6월 25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배장호 (롯데 자이언츠). * 네덜란드의 음악 그룹 W&W의 멤버 빌럼 판 하너헴. 6월 26일 * 프랑스의 축구 선수 사미르 나스리. * 대한민국의 배우 정하윤. 6월 29일 - 일본의 배우 사이토 야스카. 7월 1일 * 대한민국의 배우 연제욱. * 대한민국의 배우 안재현. 7월 2일 * 스페인의 축구 선수 에스테반 그라네로. * 일본의 배우 야마노우치 메이비. 7월 3일 - 독일의 자동차 경주 선수 제바스티안 페텔. 7월 5일 - 대한민국의 배우 지창욱. 7월 6일 - 대한민국의 축구선수 김진현. 7월 9일 - 대한민국의 배우 이해우. 7월 10일 - 러시아의 축구 선수 안나 코즈니코바. 7월 11일 - 일본의 가수, 배우 카토 시게아키 (NEWS). 7월 13일 - 대한민국의 가수, 배우 지혁 (초신성). 7월 14일 - 잉글랜드의 축구 선수 애덤 존슨. 7월 19일 * 미국의 격투기 선수 존 존스. * 한국계 미국인 모델,가수 김 디에나. 7월 23일 - 대한민국의 당구 선수 차유람. 7월 24일 - 대한민국의 개그맨 서태훈. 7월 27일 - 슬로바키아의 축구 선수 마레크 함시크. 7월 28일 * 대한민국 야구 선수 황재균 (롯데 자이언츠). *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김혜지. * 대한민국의 개그우먼 박소영. 8월 1일 - 잉글랜드의 축구 선수 캐런 카니. 8월 3일 - 대한민국의 가수 김형준 (SS501). 8월 6일 - 대한민국의 배우 하연주. 8월 13일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송진형. 8월 14일 -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박연경. 8월 16일 - 일본의 서웅 키타무라 에리. 8월 21일 - 미국의 배우, 래퍼 기범 (슈퍼주니어). 8월 24일 - 벨기에의 방송인 줄리안 퀸타르트. 8월 25일 * 중국의 배우 유역비 * 미국의 배우 블레이크 라이블리 8월 29일 - 대한민국의 배우 이시원. 8월 30일 - 대한민국의 가수 차오루 (피에스타). 8월 31일 - 대한민국의 가수 성유빈. 대한민국의 레이싱모델 박시현 9월 1일 - 대한민국의 여자 배구 선수 이소라 (성남 한국도로공사 하이패스 제니스). 9월 2일 - 대한민국의 희극 배우 최군 9월 3일 - 일본의 성우 카야노 아이. 9월 4일 - 대한민국의 쌍둥이 량현량하. 9월 5일 - 대한민국의 배구 선수 한상길 (천안 현대캐피탈 스카이워커스). 9월 9일 * 대한민국의 배우 정일우. * 카메룬의 축구 선수 알렉상드르 송. 9월 10일 - 대한민국의 가수 효니 (HAM). 9월 13일 * 대한민국의 가수 G.NA. * 잉글랜드의 축구 선수 프레이저 캠벨. 9월 18일 - 대한민국의 배우, 모델 유민규. 9월 19일 - 미국의 배우 대니엘 패너베이커. 9월 20일 - 대한민국의 가수 가인 (브라운 아이드 걸스). 9월 21일 - 스페인의 축구 선수 다니엘 가르시아 로드리게스. 9월 26일 - 대한민국의 배우 장근석. 9월 27일 - 대한민국의 배우 김주영. 9월 28일 * 미국의 배우, 가수 힐러리 더프. * 브라질의 축구선수 카를루스 아드리아누 지 소우사 크루스 (FC 서울) 9월 29일 - 대한민국의 배우 이수진. 9월 30일 * 대한민국의 배우 주원. * 대한민국의 희극인 이현정 10월 2일 - 대한민국의 모델 김새롬. 10월 3일 - 대한민국의 가수 세라 (나인뮤지스) 10월 5일 - 대한민국의 전 가수, 배우 소연. 10월 6일 - 대한민국의 배우 서은채. 10월 8일 - 일본의 성우 히라노 아야. 10월 15일 - 대한민국의 가수 은영 (브레이브 걸스). 10월 16일 * 대한민국의 가수 스테파니 (천상지희 더 그레이스). * 대한민국의 배우, 가수 양승호 (엠블랙). 10월 18일 - 미국의 배우, 가수 잭 에프론. 10월 20일 - 대한민국의 가수, 배우 썬 (록키스). 10월 22일 * 대한민국의 배우 박하선. *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김소영 10월 23일 - 대한민국의 가수 서인국 10월 25일 - 일본의 배우 와타나베 시호. 10월 27일 - 대한민국의 배우 남경민. 10월 28일 - 대한민국의 여자 골프 선수 최나연. 11월 2일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하태균 (수원 삼성 블루윙즈).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신현철 (SK 와이번스). * 대한민국의 기상캐스터 정주희 11월 4일 - 대한민국의 래퍼, 배우 T.O.P (빅뱅). 11월 5일 - 대한민국의 래퍼, 배우 건일 (초신성). 11월 6일 - 대한민국의 가수 지오 (엠블랙). 11월 8일 - 대한민국의 기상 캐스터 신소연 11월 11일 * 대한민국의 미스코리아 이성혜. * 대한민국의 배우 전지안. * 일본의 가수, 배우 테고시 유야 (NEWS). 11월 18일 * 미국의 배우 제이크 에이블. * 대한민국의 배우 윤박. * 대한민국의 배우 정은별. 11월 19일 * 대한민국의 영화 배우 김혜원.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백인식 (SK 와이번스). 11월 21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유재신. 11월 22일 * 벨기에의 축구 선수 마루안 펠라이니. * 대한민국의 배우 안용준. 11월 23일 * 대한민국의 여자 쇼트트랙 선수 변천사. * 대한민국의 프로게이머 마재윤. 11월 25일 - 대한민국의 방송인, 전 국악인, 전 아나운서 윤태진. 11월 28일 - 영국의 배우 캐런 길런 11월 30일 -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김민정. 12월 2일 - 대한민국의 가수 수진 (HAM). 12월 5일 - 대한민국의 배우 경수진. 12월 7일 - 대한민국의 프로게이머 박찬수, 박명수 형제 12월 10일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어경준 (FC 서울). * 아르헨티나의 축구 선수 곤살로 이과인. * 12월 11일 - 대한민국의 배우 김예원. 12월 16일 - 일본의 성우 카네모토 히사코. 12월 18일 * 일본의 가수 아야카. * 일본의 피겨 스케이팅 선수 안도 미키. 12월 19일 - 프랑스의 축구 선수 카림 벤제마. 12월 25일 - 대한민국의 모델, 배우 도상우 12월 27일 - 오스트리아의 축구 선수 니나 부르거. 12월 30일 - 대한민국의 쌍둥이 한기원, 한기웅 1월 14일 - 대한민국의 민주화운동 열사 박종철. 1월 22일 - 미국의 정치가 버드 드와이어 2월 22일 - 미국의 미술가 앤디 워홀. 5월 30일 - 미국의 고고학자 할렘 레너드 모비우스. 7월 5일 - 대한민국의 민주화운동 열사 이한열. 8월 7일 - 일본의 정치가·총리 대신 기시 노부스케. 8월 17일 - 나치 독일의 정치가 루돌프 헤스. 8월 22일 -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 8월 29일 - 미국의 영화배우 리 마빈. 9월 4일 - 영국의 영화 감독 리처드 마퀀드. 11월 1일 - 대한민국의 대중음악가수 유재하. 11월 19일 - 대한민국의 기업가 이병철. 11월 25일 - 미국의 정치가·시카고의 첫 흑인 시장 해럴드 워싱턴. 12월 1일 - 미국의 극작가 제임스 볼드윈. 경제학상 로버트 솔로 문학상 조지프 브로드스키 물리학상 J. 게오르그 베드노르츠, 칼 알렉산더 뮐러 생리학 및 의학상 도네가와 스스무 평화상 오스카 아리아스 산체스 화학상 도널드 크램, 장마리 렌, 찰스 페더슨 음력월 월건 대소 음력 1일의양력 월일 음력 1일간지 1월 임인 대 1월 29일 무인 2월 계묘 소 2월 28일 무신 3월 갑진 대 3월 29일 정축 4월 을사 대 4월 28일 정미 5월 병오 소 5월 28일 정축 6월 정미 대 6월 26일 병오 윤6월 소 7월 26일 병자 7월 무신 대 8월 24일 을사 8월 기유 대 9월 23일 을해 9월 경술 소 10월 23일 을사 10월 신해 대 11월 21일 갑술 11월 임자 소 12월 21일 갑진 12월 계축 대 1988년 1월 19일 계유
1980년 은 화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이다. 1월 23일 - 카터 독트린 선언 2월 4일 - 아볼하산 바니사드르의 이란 대통령 임기 시작 2월 14일 - 1980년 동계 올림픽 개막 2월 16일 - 서아시아와 북아프리카에서 일식 관찰 2월 23일 - 1980년 동계 올림픽 폐막 3월 24일 - 엘살바도르 대주교 오스카 로메로 암살됨 4월 21일 - 사북 사건 시작 4월 21일 - 경부선 부산 덕포동 화물열차 탈선 사고가 발생 5월 17일 -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 집권 시나리오에 따라 내각에 비상계엄 전국확대 강요. 대한민국 전국비상계엄선포 전국대학 휴교령 5월 18일 -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전남대 공수부대와 첫 충돌 가톨릭센터 전남대 집결 데모 경찰과 대치 최루탄발사하며 해산 5월 20일 -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신군부의 강압적인 계엄 확대 조치를 반대하면서 국무총리 신현확 사임 5월 24일 - 대한민국 중앙정보부장 김재규 사형 집행됨 5월 30일 -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설치 7월 30일 - 대한민국, 7·30 교육 개혁 조치를 발표하고 과외금지조치를 시행하였다. 7월 30일 - 바누아투 독립 8월 1일 - 대한민국,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약칭 "국보위"). 신원기록 일제정리와 연좌제 폐지 결정 발표 8월 4일 - 삼청계획 발표. 8월 13일 -대한민국, 김영삼 신민당 총재, 정계은퇴 발표 8월 14일 -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김대중 등 재야인사 24명의 내란음모혐의에 대한 첫 재판 열림. 8월 16일 - 최규하 대통령, 대규모 학생 소요와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책임을 지고 10대 대통령에서 하야. 8월 19일 * 대한민국, 국가보위비상대책회의, 사학 쇄신책 발표. * 사우디아라비아, 사우디아라비아항공 163편 사고가 발생, 탑승객 301명 전원이 사망하다. 8월 21일 - 대한민국 국군, 전군 주요지휘관회의에서 전두환을 국가원수로 추대키로 결의 8월 22일 - 대한민국, 신군부 실권자 전두환, 대장으로 전역 8월 25일 - 짐바브웨, 유엔 가입 8월 27일 - 전두환이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당선되다. 8월 28일 - 대한민국, 계엄사, 5월 17일 내렸던 전국 대학 휴교령을 107일만에 해제 8월 31일 - 폴란드 자유노조 `연대 (Solidarity), 레흐 바웬사 주도로 설립 9월 1일 - 전두환, 대한민국의 제 11대 대통령으로 취임. 9월 2일 - 전두환 대통령, 남덕우(南悳祐) 총리를 중심으로 한 새 내각 구성 9월 4일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휴전선 11개 지역에서 대남비방방송 재개 9월 16일 - 세인트빈센트 그레나딘, 유엔 가입 9월 17일 - 대한민국 제5공화국 계엄사 보통군법회의, 야당지도자 김대중에 내란음모 혐의로 사형선고. 9월 22일 - 이라크가 이란을 침공하여 이라크·이란 전쟁이 시작되었다. 국경지대 유전 장악을 둘러싼 전쟁이었다. 9월 29일 - 대한민국 정부, 제5공화국 헌법개정안(제8차개헌안) 공고 10월 10일 * 조선로동당 제6차당대회 * 알제리에 대지진이 발생하여 2만여 명 사망하다. 10월 17일 - 충북선 복선화로 인해 미호역, 정하역, 정봉역 폐역. 청주역~서청주역구간은 서청주선이라는 지선으로 남음 10월 14일 - 유엔 특별총회, 아프가니스탄 주둔 소련군 철수결의안 가결 10월 27일 * 대한민국 제8 차 개정 헌법(이른바 제5 공화국 헌법)이 공포되었다. * 10·27 법난 11월 6일 - 조치훈, 일본 바둑 명인위 획득 11월 14일 - 정부, 언론통폐합 조치 발표. 11월 19일 - 대한항공 015편 착륙 사고. 11월 30일 - 정부의 언론 통폐합 조치에 따라 신문,방송 통합. 12월 8일 - 미국 뉴욕 시에서 마크 채프먼이 존 레논을 암살하였다. 1월 30일 - 부산대교 개통. 2월 - 63빌딩 착공. 7월 - 이용태박사, 삼보 컴퓨터 설립. 7월 7일 - 미스 유니버스 서울 대회 개최. 8월 2일 - 컬러TV 대한민국 내 시판 개시. 8월 11일 - 조오련이 대한해협을 수영으로 건너는 데 성공하다. 9월 4일 - 대한민국 보건사회부, 전국의 호화묘지 모두 정리키로 결정 발표. 9월 5일 - 대한민국 문화교육부, 대학교육시안으로 졸업정원제 채택. 9월 11일 - 대한민국, 새마을지도자중앙협의회 창립. 9월 16일 - 금성사(현 LG전자), 대한민국 최초로 태국과 TV생산기술 수출계약 체결. 9월 19일 - 대한민국과 프랑스, 어업협정 체결. 9월 23일 - 노량진 육교가 준공되다. 10월 8일 - 번영로 (부산) 도시고속도로가 문현램프~구서분기점 15.7 km 개통하다. 10월 12일 - 대한민국 제주도의 하멜 기념비 제막. 10월 15일 - 경주시 ~ 포항시를 연결하는 국도의 4차선 확장 공사가 완료되다. 10월 31일 - 서울 지하철 2호선 신설동 ~종합운동장 구간을 개통하다. 11월 9일 - 한국방송공사 텔레비전(현 KBS 1TV)에서 전국노래자랑이 방송을 시작하다. 11월 12일 - 이홍우가 작가한 《나대로 선생》이 동아일보에 연재 시작하다. 12월 1일 - KBS 1TV가 컬러 방송을 개시. 12월 1일 - 0시에 KBS 2TV 탄생 TBC TV(채널 7)가 언론통폐합으로 KBS 2TV로 개칭하여, 새로운 방송을 시작하다. 상업광고 시작. 12월 19일 - 연합통신 창립. 12월 22일 - KBS 2TV와 MBC TV가 컬러 방송을 개시. 12월 30일 - 한국방송광고공사(현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 창립. 1월 1일 - 대한민국의 가수 김다현. 1월 3일 - 대한민국의 개그맨 윤형빈. 1월 4일 * 대한민국의 가수 육중완. * 미국의 배우, 성우 그레그 사이프스. 1월 5일 - 대한민국의 배우 신정선. 1월 6일 - 대한민국의 배우 박시은. 1월 9일 * 대한민국의 발레무용가 윤혜진. * 대한민국의 축구 심판 홍은아. 1월 10일 -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 현 야구 코치 조재호. 1월 11일 - 대한민국의 가수 이지혜. 1월 14일 - 대한민국의 프로게이머 김대기. 1월 15일 - 대한민국의 성우 박서진. 1월 17일 - 미국의 배우 조이 데이셔넬. 1월 20일 * 대한민국의 바둑 기사 목진석. * 대한민국의 탁구 선수 주세혁. * 대한민국의 가수, 배우 김정훈. 1월 21일 * 일본의 가수, 성우 미즈키 나나. * 대한민국의 배드민턴 선수 이경원. 1월 25일 * 대한민국의 모델, 탤런트 장자연. * 스페인의 축구 선수 사비 에르난데스. 1월 26일 - 일본의 성우 코바야시 사나에. 1월 28일 * 일본의 축구 선수 엔도 야스히토. * 대한민국의 배우 이유리. 1월 31일 - 대한민국의 배우 심이영. 2월 2일 - 대한민국의 가수 전인혁. 2월 6일 - 일본의 성우 노토 마미코. 2월 7일 * 대한민국의 가수, 배우 이정현. * 대한민국의 희극 배우 김인석. 2월 8일 - 대한민국의 배우 이재은. 2월 9일 - 대한민국의 전 쇼트트랙 선수 김동성. 2월 11일 - 오스트레일리아의 축구 선수 마크 브레시아노. 2월 12일 - 미국의 배우 크리스티나 리치. 2월 13일 - 대한민국의 배우 이상우. 2월 15일 - 대한민국의 방송인 오상진. 2월 16일 - 대한민국의 가수 장윤정. 2월 17일 * 일본의 성우 엔도 아야. * 대한민국의 배우 홍은희. 2월 20일 - 일본의 성우 나카무라 유이치.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이현곤. 2월 22일 - 대한민국의 가수 강성훈 (젝스키스). 2월 25일 * 대한민국의 가수 후니훈. * 대한민국 뮤지컬배우 겸 가수 리사. 2월 27일 * 대한민국의 가수 윤민수 (바이브). * 대한민국의 성우 사문영. 2월 28일 * 대한민국의 가수 바다 (S.E.S.). * 대한민국의 래퍼 비지. 2월 29일 * 대한민국의 배우 장희웅. * 대한민국의 배우, 모델, 레이서 이화선. 3월 3일 - 대한민국의 가수 전우성 (노을). 3월 4일 * 대한민국의 배우 정다빈. (→ 2007년) * 대한민국의 성우 김보영. 3월 7일 - 대한민국의 가수 모세. 3월 9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권오준. 3월 14일 - 대한민국의 가수 류재현 (바이브). 3월 15일 - 대한민국의 배우 강예원. 3월 16일 - 대한민국의 가수 김하나 (클레오). 3월 17일 - 대한민국의 래퍼 최자 (CB 매스, 다이나믹 듀오). 3월 18일 - 대한민국의 개그맨 송준근. 3월 20일 - 대한민국의 가수 옥주현 (핑클). 3월 21일 - 대한민국의 가수 이진 (핑클). 3월 26일 - 대한민국의 가수 손호영 (god). 3월 27일 - 일본의 배우 아베 카오루. 3월 28일 - 대한민국의 배우 조승우. 3월 29일 - 대한민국의 배우 김태희. 4월 1일 * 일본의 배우 다케우치 유코. * 대한민국의 트로트가수 하명지.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고동진. * 미국의 프로레슬러 랜디 오턴. 4월 4일 - 대한민국의 배우 공효진. 4월 5일 - 대한민국의 래퍼 이재원 (H.O.T., JTL). 4월 7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김태영. 4월 9일 - 대한민국의 배우 이요원. 4월 10일 - 대한민국의 배우 김정욱. 4월 11일 - 일본의 축구 선수 다마다 게이지. 4월 13일 - 대한민국의 배우 고호경. 4월 17일 - 대한민국의 가수 정동하. 4월 20일 - 대한민국의 희극인 이광섭. 4월 21일 - 일본의 성우 시모노 히로. 4월 22일 - 대한민국의 배우 오민석. 4월 25일 - 일본의 성우 모리나가 리카. 4월 27일 -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김나진. 4월 28일 - 대한민국의 기상 캐스터 김정윤. 4월 30일 * 대한민국의 트로트가수 조은새. * 일본의 가수 ATSUSHI (EXILE). 5월 1일 - 일본의 배우 이치카와 요스케. 5월 5일 - 대한민국의 배우 이승효. 5월 6일 * 한국계 미국인 가수 태빈 (원타임). * 대한민국의 배우 송유하. 5월 9일 - 대한민국의 배우 조현재. 5월 12일 -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이정민. 5월 13일 * 대한민국의 가수 우연석 (클릭비). * 대한민국의 가수 이재경 (넬). 5월 14일 - 체코의 축구 선수 즈데네크 그리게라. 5월 17일 - 네덜란드의 격투기 선수 알리스타이르 오버레임. 5월 21일 - 대한민국의 영화 배우 주영호. 5월 22일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정경호. 5월 24일 - 홍콩의 배우 장바이즈. 5월 25일 * 대한민국의 배우 김성균. * 대한민국의 배우 재희. 5월 30일 - 영국의 축구 선수 스티븐 제라드. 6월 3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한상훈. 6월 9일 * 일본의 가수 사에구사 유카. * 일본의 성우 우에다 카나. 6월 11일 - 대한민국의 배우 임예원. 6월 12일 - 대한민국의 희극 배우 유상무. 6월 13일 - 프랑스의 축구 선수 플로랑 말루다. 6월 15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이진영. 6월 18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이종욱. 6월 24일 * 대한민국의 배우 박재정. * 대한민국의 배우 박혜상. 6월 27일 - 대한민국의 개그맨 노우진. 6월 28일 - 대한민국의 가수 하동균. 6월 29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송승준. 6월 30일 - 대한민국의 배우 구성환. 7월 1일 - 대한민국의 전 가수 고지용. 7월 2일 - 대한민국의 개그맨 한민관. 7월 3일 - 대한민국의 배우 반민정. 7월 4일 * 일본의 성우 아라이 사토미. * 대한민국의 가수 진주. *7월 5일 - 프랑스의 여자 배우 에바 그레인. 7월 7일 - 대한민국의 배우 오주은. 7월 8일 - 아일랜드의 축구 선수 로비 킨. 7월 10일 * 미국의 연기자 제임스 롤프. * 대한민국의 배우 한다감. 7월 15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봉중근. 7월 16일 - 대한민국의 가수 장수원 (J-Walk). 7월 18일 - 일본의 가수, 배우 히로스에 료코. 7월 19일 - 대한민국의 희극인 정철규 7월 20일 - 대한민국의 배우 진구. 7월 22일 * 대한민국의 래퍼 타블로 (에픽하이). * 네덜란드의 축구 선수 디르크 카위트. 7월 23일 - 대한민국의 배우 박재현 7월 25일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차두리. 7월 26일 - 대한민국의 배우 이동건. 7월 27일 - 대한민국의 성우 정유미. 7월 28일 - 대한민국의 배우 기세형. 7월 30일 * 대한민국의 성우 김성연. * 대한민국의 영화배우 김꽃지. 7월 31일 - 일본의 가수 아이우치 리나. 8월 4일 * 대한민국의 배우 이규한. * 대한민국의 가수 정재원 (넬). 8월 5일 - 영국의 축구 선수 웨인 브리지. 8월 9일 - 대한민국의 배우 류승범. 8월 13일 - 대한민국의 배우 김연주. 8월 15일 - 대한민국의 전 가수이자 개그우먼 백보람 8월 16일 - 대한민국의 가수 황보 8월 18일 - 러시아의 종합격투기 선수 세르게이 하리토노프. 8월 19일 * 대한민국의 래퍼 전진 (신화). * 대한민국의 배우 손태영. 8월 21일 - 대한민국의 희극 배우 현병수. 8월 22일 - 대한민국의 배우 이나라. 8월 26일 - 미국의 배우 매콜리 컬킨. 8월 29일 - 대한민국의 배우 인교진. 8월 30일 * 대한민국의 미스코리아, 배우 김연주. * 대한민국의 배우 김동윤 8월 31일 - 대한민국 배우 이세은 9월 3일 - 대한민국의 개그우먼 정경미. 9월 4일 - 대한민국의 프로게이머 임요환. 9월 6일 - 나이지리아의 축구 선수 조지프 요보. 9월 7일 * 터키의 축구 선수 엠레 벨뢰졸루. * 이란의 축구 선수 자바드 네쿠남. * 아르헨티나의 축구 선수 가브리엘 밀리토. 9월 10일 - 대한민국의 인터넷 작가 이동훈. 9월 12일 * 대한민국의 희극 배우 유세윤. * 중국의 농구 선수 야오밍. 9월 13일 * 대한민국의 배우 한채영. * 일본의 야구 선수 마쓰자카 다이스케. 9월 16일 - 대한민국의 배우 허영란. 9월 22일 - 스웨덴의 골프 선수 미카엘라 파름리드. 9월 25일 * 미국의 래퍼 T.I.. * 대한민국의 SBS 아나운서 김환. 10월 1일 - 일본의 배우 오타니 료헤이. 10월 4일 - 체코의 축구 선수 토마시 로시츠키. 10월 6일 * 대한민국의 바둑 기사 김세영. * 대한민국의 개그우먼 신봉선. 10월 11일 - 일본의 성우 스기타 토모카즈. 10월 12일 - 대한민국의 가수 노유민 (NRG). 10월 14일 - 대한민국의 배우, 전 레이싱모델 오윤아. 10월 15일 - 대한민국의 래퍼 문성훈 (NRG). 10월 18일 * 대한민국의 개그맨 황현희. * 대한민국의 개그맨 류정남. *10월 19일 - 대한민국의 야구선수 손시헌 10월 28일 -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정찬우. 10월 30일 * 대한민국의 개그우먼 김미연. * 대한민국의 종합격투기 선수 최홍만. 11월 2일 * 대한민국의 성우 이호산. * 대한민국의 배우 김소연. 11월 7일 -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손정은. 11월 5일 - 독일의 축구 선수 크리스토프 메첼더. 11월 10일 - 대한민국의 성우 안영미. 11월 11일 - 대한민국의 가수 이정훈 (넬). 11월 12일 - 대한민국의 성우 류승곤. 11월 15일 - 대한민국의 가수 임윤택 (울랄라 세션). (→ 2013년) 11월 16일 * 대한민국의 개그맨 김준현. * 대한민국의 배우 최대훈. 11월 18일 - 일본의 가수, 배우 오카다 준이치 (V6). 11월 18일 - 일본의 성우 치하라 미노리. 11월 21일 - 대한민국의 트로트가수 장소라. 11월 25일 -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축구 선수 에런 모코에나. 11월 26일 - 일본의 가수 오노 사토시 (아라시). 11월 29일 - 대한민국의 배우 천정명. 12월 7일 - 대한민국의 가수 정인. 12월 10일 - 대한민국의 바이올리니스트 장영주. 12월 13일 - 대한민국의 가수 유미. 12월 16일 - 대한민국의 배우 백봉기. 12월 18일 - 대한민국의 래퍼 빌스택스. 12월 19일 - 대한민국의 래퍼 버벌 진트. 12월 20일 * 영국의 축구 선수 애슐리 콜. * 대한민국의 성우 최지훈 12월 21일 - 대한민국의 배우 윤정희. 12월 22일 - 대한민국의 배우 이은주. 12월 24일 - 대한민국의 가수 김종완 (넬). 12월 25일 - 대한민국의 가수 가희 (애프터스쿨). 12월 26일 - 대한민국의 배우 조정석. 12월 27일 - 대한민국의 성우 서원석. 1월 19일 - 대한민국의 전 정치인 곽상훈. (← 1896년) 2월 20일 -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딸 앨리스 루스벨트 롱워스. (← 1884년) 3월 1일 - 영국의 전 축구 선수 딕시 딘. (← 1907년) 3월 31일 - 미국의 육상 선수 제시 오언스. (← 1913년) 4월 15일 - 프랑스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 (← 1905년) 4월 21일 - 러시아의 생물학자, 생화학자 알렉산드르 오파린. (← 1894년) 4월 29일 - 미국의 영화감독 앨프리드 히치콕. (← 1899년) 5월 24일 - 대한민국의 정치가 김재규. (← 1926년) 5월 30일 - 대한민국의 민주운동가 김의기. (← 1959년) 6월 12일 - 일본의 정치가, 총리 대신 오히라 마사요시. (← 1910년) 7월 27일 - 이란의 국왕 모하마드 레자 팔레비. (← 1919년) 9월 15일 - 러시아의 과학자 미하일 라프렌티예프. (← 1900년) 9월 16일 - 스위스의 교육학자 장 피아제. (← 1896년) 10월 18일 - 대한민국의 군인 송요찬. (← 1918년) 10월 31일 - 체코의 소설가 얀 베리흐. (← 1905년) 12월 8일 - 영국의 대중음악가 (비틀즈의 멤버) 존 레논. (← 1940년) 12월 16일 - 미국의 KFC 창시자 커널 샌더스. (← 1890년) 12월 18일 - 소련의 정치가, 총리 알렉세이 코시긴. (← 1904년) 12월 24일 - 독일의 군인 카를 되니츠. (← 1891년) 경제학상 :로런스 클라인 문학상 :체스와프 미워시 물리학상 :제임스 왓슨 크로닌, 발 록스던 피치 생리학 및 의학상 :바루 베나세라프, 장 도세, 조지 데이비스 스넬 평화상 :아돌포 페레스 에스키벨 화학상 :폴 버그, 월터 길버트, 프레더릭 생어 음력월 월건 대소 음력 1일의양력 월일 음력 1일간지 1월 무인 대 2월 16일 기미 2월 기묘 소 3월 17일 기축 3월 경진 소 4월 15일 무오 4월 신사 대 5월 14일 정해 5월 임오 소 6월 13일 정사 6월 계미 대 7월 12일 병술 7월 갑신 소 8월 11일 병진 8월 을유 대 9월 9일 을유 9월 병술 대 10월 9일 을묘 10월 정해 소 11월 8일 을유 11월 무자 대 12월 7일 갑인 12월 기축 대 1981년 1월 6일 갑신
1964년 은 수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이다. 4월 26일 - 탄자니아, 유엔 가입. 5월 21일 - 대한민국, 무장 공수단 군인들의 법원 난입 사건 발생. 6월 3일 - 한일국교 협상에 반대하는 6·3 항쟁 발발하여 서울시 일원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다. 7월 6일 - 말라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 8월 2일 - 통킹 만 사건 북베트남의 어뢰정이 미국 구축함을 공격하다. 8월 4일 - 한국군의 월남 파병안 국회 통과. 8월 24일 - 중앙정보부, 통일혁명당 지하 간첩단 사건 수사 발표. 9월 21일 - 몰타 독립. 9월 22일 - 대한민국 군사원조단 140명 최초로 베트남 도착. 10월 16일 - 중화인민공화국, 최초의 핵실험 실시. 11월 19일 - 프랑스의 시사주간지 르 누벨 옵세르바퇴르 첫 발간. 11월 28일 - 매리너 4호, 화성으로 발사됨. 12월 1일 - 말라위, 몰타, 잠비아, 유엔 가입. 8월 17일 - 대한민국, 한국기자협회 창립. 8월 19일 - 대한민국, 국제의원연맹(IPU) 가입. 9월 27일 - 대한민국의 주간지 〈주간한국〉 창간. 10월 1일 - 일본 고속철도 도카이도 신칸센 개통. 10월 10일 - 제 18회 도쿄 올림픽 개막. 12월 7일 - 동양방송 텔레비전 개국. 국제 형사 경찰 기구에 대한민국 가입. 1월 7일 - 미국의 배우 니컬러스 케이지. 1월 12일 - 미국의 기업인 제프 베저스. 1월 15일 - 대한민국의 배우 박충선. 1월 20일 - 미국의 언론인 파리드 자카리아. 1월 22일 - 대한민국의 가수 김광석. 1월 27일 - 대한민국의 배우 이병준. 1월 28일 - * 대한민국의 전 야구 코치, 전 야구 선수 김태원. * 대한민국의 배우 박해미. 2월 11일 - * 미국의 정치가 세라 페일린. * 영국의 격투기 선수 켄 섐록. 2월 14일 - 대한민국의 정치가 원희룡. 2월 16일 - 브라질의 전 축구 선수 베베투. 2월 25일 -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 현 야구 코치 강기웅. 2월 29일 - 몰타의 전 축구 선수, 현 축구 감독 카르멜 부수틸. 3월 1일 - 스페인의 축구 심판 루이스 메디나 칸탈레호. 3월 4일 - 미국의 기업인 조너선 크래프트. 3월 5일 -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 김동기. 3월 9일 - 독일의 축구 심판 헤르베르트 판델. 3월 12일 - 대한민국의 방송인 손범수. 3월 13일 -대한민국의 배우 김경룡. 3월 18일 - 일본의 성우 가나이 미카. 3월 19일 - 일본의 작곡가 칸노 요코. 3월 21일 - * 이라크의 전 축구 선수 아메드 라디. * 일본의 소설가 에쿠니 가오리. 3월 30일 - * 미국의 배우 아이언 지어링. * 대한민국의 희극인 서승만. 4월 1일 - 대한민국의 민주열사 박종철. 4월 10일 - 대한민국의 정치가 신의진. 4월 14일 - 대한민국의 배우 허준호. 4월 15일 - 대한민국의 통일부 장관 홍용표. 5월 1일 -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 현 야구 코치 조계현. 5월 2일 - 대한민국의 가수 박상민. 5월 13일 - 대한민국의 배우 배종옥. 5월 14일 -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신용철. 5월 16일 - 대한민국의 농구 선수 정명희. 6월 7일 - 대한민국의 농구 선수 한기범. 6월 9일 - 미국의 기타리스트 겸 작곡가 닐 자자. 6월 15일 - 덴마크의 전 축구 선수, 현 축구 감독 미카엘 라우드루프. 6월 26일 - 핀란드의 자동차 경주 선수 톰미 매키넨. 6월 27일 - 대한민국의 배우 박준규 7월 3일 - * 프랑스 태생의 미국 배우 야들리 스미스. * 미국의 영화 감독 페이턴 리드. 7월 18일 - 대한민국의 성우 고성일. 7월 20일 - 사운드가든, 오디오슬레이브 리드보컬 크리스 코넬 7월 24일 - * 일본의 소설가 요시모토 바나나. * 미국의 야구 선수 배리 본즈. 7월 26일 - 미국의 배우 샌드라 불럭. 7월 30일 - 독일의 전 축구 선수, 현 축구 감독 위르겐 클린스만. 8월 5일 -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백지연. 8월 11일 - 대한민국 태생의 미국 만화가 겸 기업가 짐 리(한국 이름 이용철). 8월 15일 - 대한민국의 배우 유혜리. 8월 29일 - 대한민국의 성우 정미연. 9월 2일 - 미국의 배우 키아누 리브스. 9월 4일 - 독일의 베이스 가수 르네 파페. 9월 16일 - 미국의 배우 몰리 섀넌. 9월 19일 - 대한민국의 배우 견미리. 9월 24일 - 대한민국의 배우 이재룡. 9월 25일 - 일본의 성우 이노우에 기쿠코. 9월 30일 - 이탈리아의 배우 모니카 벨루치. 10월 3일 - 아랍에미리트의 전 축구 선수 아드난 알 탈리아니. 10월 5일 - 일본의 성우 후지와라 케이지. 10월 7일 - 현 11대 부산 사하구청장 조정화 (민선, 한나라당). 10월 9일 - 멕시코의 영화 감독 기예르모 델 토로 10월 13일 - 대한민국의 국회의원 김진태. 10월 31일 - 네덜란드의 전 축구 선수, 현 축구 감독 마르코 판 바스턴. 11월 3일 - 대한민국의 배우 한석규. 11월 12일 - * 대한민국의 성우 차명화. * 대한민국의 앵커, 방송기자 김성준. 11월 18일 - 대한민국의 배우 최재성. 11월 19일 - 대한민국의 배우 정진영. 11월 20일 - 대한민국의 시사평론가 이철희. 11월 26일 - 대한민국의 시사평론가이며 은퇴 정치가 황장수. 11월 27일 - 이탈리아의 전 축구 선수, 현 축구 감독 로베르토 만치니. 12월 3일 - 대한민국의 정치인 강기정. 12월 5일 - 대한민국의 배드민턴 선수 박주봉. 12월 6일 - 대한민국의 성우 홍성헌. 12월 10일 -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 여태구. 12월 11일 - 대한민국의 천문가 이태형. 12월 13일 - 일본의 음악가 히데. 12월 14일 - 대한민국의 가수 이선희. 12월 20일 - 미국의 격투기 선수 마크 콜먼. 12월 22일 - 대한민국의 정치가 이재명. 12월 25일 - *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 현 야구 코치 최해명. * 대한민국의 배우 안내상. 터키의 기업인 이을드름 데미뢰렌. 12월 30일 - 대한민국의 배우 윤다훈. 1월 13일 - 대한민국의 법조인, 정치인, 김병로. 3월 14일 - 한국의 독립운동가 김법린. 4월 5일 - 미국의 군인, UN군 총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 4월 23일 - 헝가리의 경제학자 칼 폴라니. 5월 17일 - 핀란드 및 구 소련의 정치인 오토 쿠시넨. 5월 27일 - 인도의 수상 자와할랄 네루. 6월 3일 - 핀란드의 작가 프란스 에밀 실란패. 8월 12일 - 영국의 소설가 이언 플레밍. 10월 20일 - 미국의 제31대 대통령 허버트 후버. 문학상 장 폴 사르트르(수상거부) 물리학상 찰스 H. 타운스,니콜라이 G. 바소프,알렉산드로 M. 프로호로프 생리학 및 의학상 콘래드 블로흐,페오도르 리넨 평화상 마틴 루터 킹 2세 화학상 도로시 M.C. 호지킨 음력월 월건 대소 음력 1일의양력 월일 음력 1일간지 1월 병인 대 2월 13일 임진 2월 정묘 소 3월 14일 임술 3월 무진 대 4월 12일 신묘 4월 기사 소 5월 12일 신유 5월 경오 소 6월 10일 경인 6월 신미 대 7월 9일 기미 7월 임신 소 8월 8일 기축 8월 계유 대 9월 6일 무오 9월 갑술 소 10월 6일 무자 10월 을해 대 11월 4일 정사 11월 병자 대 12월 4일 정해 12월 정축 대 1965년 1월 3일 정사
에페소 도서관 에페소스 (, , , 공동번역성서에서는 에페소, 한글 개역판에서는 에베소로 표기)는 서부 소아시아의 에게 해 연안에 (현재의 터키) 위치한,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에 의해 기원전 9세기에 건립된 식민도시다. 에페소스는 주변 도시 혹은 국가, 스파르타, 페르시아, 페르가몬, 로마 등의 흥망성쇠에 따라 식민지화 되는 역사로 얼룩져 있다. 하지만 이러한 식민지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에페소스는 상업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기원전 6세기에 건조된 웅대한 아르테미스 신전과 로마 제국 시대에 건조된 소아시아에서 가장 큰 로마식 건축물인 도미티아누스 신전 (기원후 1세기)으로도 유명하다. 특히 아르테미스는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까지 에페소스인들에게 풍요와 생명의 여신으로 숭배받던 대상이어서, 루가에 따르면 사도 바울로가 선교를 할 때 은으로 만든 신전모형을 팔던 상인들과 갈등을 겪기도 했다. 사도 바울로가 우상을 숭배하지 말자고 설교하여, 사람들이 신전모형을 더이상 사지 않았기 때문이다. 에페소스는 기독교 초기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도시이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바울로가 전도와 사목을 한 교회중 하나가 에페소 교회였다. 또한 요한묵시록에 등장하는 소아시아의 7개의 교회중 하나가 에페소교회일 정도로 1세기 기독교 역사에서 비중있는 곳이기도 하다. 영국 성공회의 폭스 신부가 쓴 《순교자》에 따르면 사도 성 바울로의 제자인 디모테오가 주교로 사목한 교회가 에페소 교회라고 한다. 네아에페소스 분류:소아시아 분류:고대 그리스의 도시 분류:이오니아 분류:리디아 분류:아르자와 분류:아테네인의 식민지 분류:터키의 세계유산
게오르크 시몬 옴 게오르크 시몬 옴 (Georg Simon Ohm, 1789년 3월 16일 ~ 1854년 7월 6일)은 독일 물리학자이다. 독일 에를랑겐에서 대장장이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일찍부터 아버지로부터 대장장이 기술을 배웠다. 만 16세인 1805년부터 에얼랑엔 대학교에서 수학, 물리, 철학을 전공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경제적인 문제로 1년 후에 학업을 쉬고 스위스의 사립학교에서 수학교사로 일한다. 22세에 에얼랑엔 대학으로 돌아와 1811년 빛과 색에 대한 주제로 박사학위를 따고, 교수자격도 통과한다. 이후 3학기 동안 모교에서 수학강사로 일한다. 1813년에는 밤베르크의 직업학교(Realschule)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1817년부턴 쾰른의 예수회 김나지움에서 수학과 물리학을 가르쳤고, 1826년에는 베를린의 사관학교(Kriegsschule)에서 교관을 지냈다. 당시부터 옴의 주된 관심사는 전기현상이었다. 1833년 뉜른베르크의 왕립 폴리테크닉 대학의 교수가 되었으며 1839년부터는 학장을 지냈다. 1849년엔 뮌헨대학교로 자리를 옮겨 실험물리학 교수가 되었으며, 1854년 7월 6일, 옴은 뮌헨에서 65세를 일기로 사망하여 뮌헨 구시가지 남부 공동묘지(Südfriedhof)에 묻혀있다. Die galvanische Kette mathematisch bearbeitet ( The Galvanic Circuit Investigated Mathematically ) :Berlin Riemann, 1827. - 245 S. graph. Darst. (PDF, 4.7 MB) 분류:1789년 태어남 분류:1854년 죽음 분류:독일의 물리학자 분류:코플리 메달 수상자 분류:독일의 개신교도 분류:에를랑겐 출신 분류:왕립학회 외국인 회원
피에르 드 페르마 (, , 1607년 ~1665년 1월 12일)는 프랑스의 변호사이자 수학자이다. 페르마는 미적분학에서 이용되는 여러 방법을 창안하는 등 많은 연구 성과를 남겼다. 또 현대 정수론의 창시자로 알려졌고, 좌표기하학을 확립하는데 크게 이바지했으며, 카테시안 좌표를 도입하였다. 그는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라는 정리를 증명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는 "보다 큰 정수 에 대하여 식 을 만족하는 이 아닌 정수해 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페르마가 증명했다는 증거가 없어서, 수학자들은 그가 증명했다는 소문에 대하여 의문을 갖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성품을 볼 때, 많은 사람들이 그가 증명했다고 믿고 있다. 1607년 프랑스 타른에가론주 보몽 드 로마뉴()에서 보몽의 부영사이며, 피혁상을 하던 도미니크 페르마()와 법의학자 가문의 딸이었던 클레르 드 롱() 사이에서 태어났다. 페르마의 가족은 2남 2녀를 두었다. 그의 어린 시절은 아무런 굴곡도 없는 평범한 시절이었다고 한다. 페르마는 1623년 오를레앙 대학교에 입학해서, 1626년 법학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페르마는 프랑스어뿐만 아니라, 라틴어·그리스어·이탈리아어·스페인어·오크어에 능통하였다. 이후 보르도로 이사하였고, 여기에서 아폴로니오스의 논문을 접한 뒤, 취미로 수학을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아무리 뛰어난 증명을 해도, "언론의 각광을 받으니까 피곤하다"라는 이유로 절대 증명을 발표하지 않는 성격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책을 읽으면서 떠오르는 모든 생각들을 책의 여백에다가 적어놓는 습관이 있었다고 한다. 1630년 툴루즈 지방의 청원위원으로 취임했으며, 그 해에 외사촌 누이인 루이제 드 롱과 결혼해서 3명의 아들과 2명의 딸을 낳았다. 그리고 귀족 지위의 표시로, 성에 "드"()를 추가하였다. 그는 생애의 34년을 국가를 위해서 봉사하다가, 1665년 1월 12일 타른주 카스트로()에서 한 사건을 처리한 이틀 뒤에 65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페르마의 수학에 대한 기여는 지인들과의 서신 교환(서로 내기 문제를 주고 받았던), 디오판토스의 산술을 읽으면서 써넣은 짧은 글 등으로 한정된다. 그럼에도 그는 르네 데카르트와 함께 17세기 전반기의 두 주요 수학자로 불리고 있다. 데카르트의 발견과 독립적으로 페르마도 해석기하학의 방법을 발견했다고 한다. 또한 확률론을 확립시킨 블레즈 파스칼과 서신 교환을 통해서 이 분야에도 기여했다고 한다. 페르마의 이름이 붙은 개념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페르마의 원리 (광학) 빛이 지나는 경로는 두 점을 잇는 경로 중, 지나는 시간을 가장 짧게 하는 경로를 택한다. 페르마의 소정리 (정수론) 가 소수일 때, {1, ..., p-1}의 원소인 모든 에 대해 를 만족한다. 스위스의 수학자 레온하르트 오일러에 의해 증명됐다.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 이 보다 큰 정수일 때, 방정식 을 만족하는 양의 정수 는 존재하지 않는다. 357년 동안이나 미해결 문제로 남아 있다가 1994년 앤드루 와일스에 의해서 증명됐다.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 앤드루 와일스 분류:1601년 태어남 분류:1665년 죽음 분류:17세기 수학자 분류:프랑스의 수학자 분류:프랑스의 변호사 분류:프랑스의 로마 가톨릭교도 분류:17세기 프랑스 사람 분류:타른에가론주 출신
선형대수학 및 함수해석학에서, 노름 공간 (norm空間은 원소들에 일종의 ‘길이’ 또는 ‘크기’가 부여된 벡터 공간이다. 이러한 크기는 노름 ()이라고 하며, 삼각 부등식을 따라 거리 함수를 정의한다. 노름 공간의 정의에서, 하우스도르프 조건을 생각하면 반노름 공간 (半norm空間의 개념을 얻는다. 즉, 노름이 0인 벡터는 영벡터 밖에 없지만, 반노름 (半norm이 0인 벡터는 영벡터가 아닐 수 있다. 가 실수체 또는 복소수체라고 하자. -벡터 공간 위의 반노름 은 다음 두 조건들을 만족시키는 함수 이다. (양의 동차성) 임의의 및 에 대하여, (삼각 부등식) 임의의 에 대하여, 반노름이 주어진 \mathbb K-벡터 공간 을 -반노름 공간 이라고 한다. 위의 노름 은 다음 조건을 추가로 만족시키는 반노름 이다. (양의 정부호성) 모든 에 대하여, 임은 임과 동치이다. 노름이 주어진 \mathbb K-벡터 공간 을 -노름 공간 이라고 한다. -노름 공간들의 (유한 또는 무한) 족 (V_i)_{i\in I}과 실수 가 주어졌다고 하자. 그렇다면, 직합 에 다음과 같은 노름을 부여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역시 노름 공간을 이룬다. -노름 공간 의 \mathbb K-부분 벡터 공간 가 주어졌다고 하자. 그렇다면, 에 의 노름을 제한한 것을 부여하면, 역시 -노름 공간을 이룬다. -노름 공간 의 닫힌 \mathbb K-부분 벡터 공간 가 주어졌다고 하자. 그렇다면, 몫공간 위에 다음과 같은 노름을 부여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역시 -노름 공간을 이룬다. -노름 공간 의 연속 쌍대 공간 V 위에는 쌍대 노름 을 부여할 수 있으며, 이에 따라 역시 -노름 공간을 이룬다. 임의의 -반노름 공간 (V,\|\|)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mathbb K-부분 벡터 공간을 정의하자. 그렇다면, 몫공간 V/N 위에는 반노름이 잘 정의되며, 이 경우 반노름은 노름이 된다. 이러한 구성은 예를 들어 르베그 공간의 정의에 등장한다. -노름 공간 의 (거리 공간으로서의) 완비화 \bar V 위에 다음과 같은 노름을 정의하자. 여기서 는 로 수렴하는 코시 열이다. 이를 부여하면 는 -바나흐 공간을 이룬다. 이 경우, 자연스러운 단사 -선형 등거리 변환 가 존재하여, 를 의 부분 공간으로 여길 수 있다. 만약 가 이미 -바나흐 공간이라면, 위 함수는 전단사 함수이다. -반노름 공간 위에는 다음과 같은 유사 거리 함수를 부여하여 유사 거리 공간으로 만들 수 있다. 만약 가 노름 공간이라면, 이는 거리 공간을 이룬다. 유사 거리 공간 구조에 의하여, -반노름 공간은 항상 -위상 벡터 공간을 이룬다. 두 -반노름 공간 사이의 -선형 변환의 경우, 유계 작용소인 것과 연속 함수인 것이 서로 동치이다. 다음과 같은 함의 관계가 성립한다. -노름 공간 ⇐ -내적 공간 ⇑ ⇑ -바나흐 공간 ⇐ -힐베르트 공간 즉, -노름 공간 가 주어졌을 때, 만약 가 -쌍선형 형식을 이루면, 는 \mathbb K-내적 공간을 이룬다. 만약 완비 거리 공간이라면, 는 \mathbb K-바나흐 공간을 이룬다. 만약 가 \mathbb K-내적 공간이자 \mathbb K-바나흐 공간이라면, 를 \mathbb K-힐베르트 공간이라고 한다. 모든 벡터 공간에서 자명 반노름 () 은 반노름을 이루지만, 이는 (가 0차원이 아니라면) 노름을 이루지 못한다. 체 는 스스로에 대한 1차원 벡터 공간을 이룬다. 이 경우 절댓값 은 노름을 이룬다. norms.svg|프레임|오른쪽|서로 다른 노름 공간에서 정의된 단위원. 임의의 에 대하여, 유클리드 공간 위에 다음과 같은 노름 을 정의할 수 있으며, 이를 ℓ p 노름 이라고 한다. 여기서 인 경우는 표준적인 유클리드 노름 이다. 만약 일 경우는 상한 노름 () 이 된다. 인 경우는 맨해튼 노름 이 된다. 노름 말고도 유클리드 공간 위에 수많은 노름들을 정의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위에는 다음과 같은 노름이 존재한다.
1761년 은 목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청(淸) 건륭(乾隆) 26년 일본(日本) 호레키() 11년 청(淸) 고종 건륭제(高宗 乾隆帝) 26년 조선(朝鮮) 영조(英祖) 37년 6월 6일 - 금성 일면통과가 일어남. 〈작은 별〉의 원곡 〈아! 말씀드릴게요, 어머니〉가 프랑스에서 출판. 11월 20일 - 교황 비오 8세, 253대 로마 교황. 4월 7일 - 영국의 수학자 토머스 베이즈. 일본 에도 막부 9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시게
1969년 은 수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3월 2일 - 중소 국경 분쟁 - 우수리강의 진보도(珍寶島, 다만스키도)에서 두 나라 무력 충돌. 3월 2일 - 콩코드의 첫 비행이 성공. 3월 17일 - 골다 메이어가 이스라엘의 총리에 취임. 3월 28일 - 교황 바오로 6세가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김수환(스테파노) 대주교를 추기경으로 임명하다. 4월 28일 - 바티칸에서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의 추기경 서임식이 거행되다. 4월 28일 - 드 골이 프랑스 대통령직에서 물러나다. 6월 28일 - 스톤월 항쟁 발생. 7월 20일 -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하여 닐 암스트롱과 버즈 올드린이 달 표면을 걸은 최초의 인간이 되다. 7월 25일 - 닉슨 독트린 발표. 9월 1일 - 리비아, 무아마르 알카다피 대위, 군사 쿠데타 일으켜 왕정 무너뜨리고 공화국 수립. 9월 7일 - 브라질, 정식 국호를 브라질에서 브라질연방공화국으로 개칭. 9월 12일 - 베트남 전쟁 미군,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명령으로 북베트남 폭격 재개. 9월 14일 - 민주공화당, 3선개헌안과 국민투표법안 국회서 변칙 통과시킴. 10월 11일 - 소비에트 연방, 우주선 소유즈 6호 발사. 10월 14일 - 미국 원자력 항공모함 CVN-65 엔터프라이즈에서 폭발사고가 발생하여, 25명이 사망하고 85명이 부상당함. 10월 15일 - 베트남 전쟁 수십만명의 사람들이 미국에서 반전 시위를 벌이다. 10월 17일 - 대한민국에서 삼선 개헌안에 대한 국민투표가 시행되었다. 12월 11일 - 대한항공 YS-11기 납북 사건 발생. 3월 1일 - 대한항공 창립. 3월 19일 - 코나미 창립. 4월 7일 - 인터넷의 상징적인 생일 RFC 1 발표. 5월 29일 - 천주교 안동교구 설립. 6월 3일 - 엘튼 존, 앨범 Empty Sky 로 솔로 데뷔. 6월 10일 - 경부선 동대구역 부산역 동시역사 준공 영업개시. 7월 25일 - 광주역사 준공 이전. 8월 8일 - MBC TV 개국. 8월 15일 - 미국 뉴욕주에서 3일간의 최대의 록 축제 우드스탁 페스티벌이 열리다. The Woodstock music and art fair 1969 . 9월 19일 - 21세의 한대수, 남산 드라마센터에서 자작곡 위주의 공연. 이 공연을 계기로 비로소 한국 대중음악에 팝송 번안곡이 아닌 진정한 자작곡 시대 가 열림. 9월 26일 - 대한민국의 스포츠 전문 일간지 일간스포츠 창간. 10월 1일 - 영국과 프랑스 공동개발 여객기 콩코드, 세계 최초로 초음속 비행 성공. 10월 5일 - 일본의 후지 TV에서 애니메이션 사자에상을 시작함. 10월 7일 - 대한민국 최초의 다목적댐인 진주 남강댐 준공. 10월 29일 -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이 대한민국에서 개봉 11월 - 도라에몽을 만화가 후지코 F. 후지오가 연재하기 시작함. 11월 10일 - 세서미 스트리트의 방송 시작. 12월 25일 - 제3한강교 개통. 12월 29일 - 울산고속도로 개통. 1월 3일 - 독일의 자동차 경주 선수 미하엘 슈마허. 1월 5일 - 미국의 가수 마릴린 맨슨. 1월 12일 - 크로아티아의 전 축구 선수, 현 축구 감독 로베르트 프로시네치키. 1월 14일 - 미국의 배우 제이슨 베이트먼. 1월 17일 - 대한민국의 배우 윤유선. 1월 17일 - 네덜란드의 음악 프로듀서 티에스토. 1월 19일 * 대한민국의 트로트가수 박상철. * 몬테네그로의 전 축구 선수 프레드라그 미야토비치. 1월 22일 - 대한민국의 앵커, 기자 편상욱. 1월 23일 - 대한민국의 배우 이진우. 1월 24일 - 대한민국의 배우 유호정. 1월 29일 - 일본의 가수 하이도. 2월 1일 - 아르헨티나의 전 축구 선수 가브리엘 바티스투타. 2월 2일 - 러시아의 전 축구 선수, 현 축구 감독 발레리 카르핀. 2월 3일 - 현 네덜란드 왕자, 콘스탄테인 왕자 2월 6일 - 스위스의 축구 심판 마시모 부사카. 2월 11일 - 미국의 여배우 제니퍼 애니스턴. 2월 12일 - 대한민국의 전 축구 선수, 현 축구 감독 홍명보. 2월 13일 - 미국의 메조소프라노 가수 조이스 디도나토. 2월 20일 * 세르비아의 전 축구 선수, 현 축구 감독 시니샤 미하일로비치. * 일본의 연기자 와타나베 아즈사. 2월 21일 - 한국계 독일 안과 의사 스벤 리 2월 22일 * 덴마크의 전 축구 선수 브리안 라우드루프. * 벨기에의 전 축구 선수, 현 축구 코치 마르크 빌모츠. 2월 24일 *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최승돈, * 대한민국의 방송인, 배우 김승우. * 대한민국의 성우 배주영. 2월 26일 * 일본의 게임 음악 작곡가 사키모토 히토시. * 중국의 반체제 인사, 인권 운동가 왕단. 2월 27일 - 대한민국의 가수 조장혁. 3월 5일 - 일본의 성우 나츠키 리오. 3월 7일 - 대한민국의 배우 신애라. 3월 8일 - 대한민국의 배우 김찬우. 3월 17일 - 대한민국의 배우 김예령. 3월 19일 -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 현 야구 코치 김민호. 3월 21일 - 이란의 전 축구 선수, 현 축구 감독 알리 다에이. 3월 26일 - 대한민국의 성우 강경아. 3월 31일 - 대한민국의 작곡가, 가수 곽영준. 4월 8일 - 대한민국의 배우 정호빈. 4월 6일 - 대한민국의 배우 김원해. 4월 10일 * 대한민국의 배우 이광기. * 대한민국의 전 축구 선수, 현 축구 코치 이상윤. * 대한민국의 배우 공형진. 4월 14일 - 일본의 전 야구 선수, 현 야구 코치 하세베 유타카. 4월 18일 - 일본의 구황족 구로다 사야코. 4월 19일 - 미국의 언어학자 앤드루 카니. 4월 20일 -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 현 야구 코치 차명석. 4월 21일 - 대한민국의 성우 박형욱. 4월 26일 - 대한민국의 성우 류다무현. 5월 8일 - 일본의 스모선수 아케보노 다로. 5월 10일 - 네덜란드의 전 축구 선수, 현 축구 코치 데니스 베르흐캄프. 5월 15일 -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 현 야구 코치 장원진. 5월 16일 - 대한민국의 가수 김완선. 5월 23일 - 대한민국의 연극 배우 황정민. 5월 23일 - 대한민국의 야구인 김기태. 5월 24일 - 대한민국의 배우 이연경. 5월 26일 - 대한민국의 축구인 신태용. 6월 6일 - 아르헨티나의 축구 선수 페르난도 레돈도. 6월 10일 - 대한민국의 성우 최준영. 6월 14일 - 대한민국의 가수 김현철. 6월 15일 - 독일의 전 축구 선수 올리버 칸. 6월 16일 -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 현 야구 코치 박재용. 6월 17일 -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 故 임수혁. 6월 28일 - 스위스의 전 축구 선수 스테판 샤퓌자. 7월 4일 - 일본의 프로레슬러 사쿠라바 가즈시. 7월 6일 - 대한민국의 가수, 작곡가 조규만. 7월 8일 - 대한민국의 탤런트, 전 아나운서 임성민. 7월 10일 * 독일의 테너 가수 요나스 카우프만. *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 야구 해설가 양준혁. 7월 13일 - 한국 계 미국인 배우, 켄 정. 7월 14일 - 미국의 포르노 전문배우 빌리 헤링턴. 7월 15일 - 대한민국의 앵커, 기자 박유한. 7월 16일 - 대한민국의 성우 시영준. 7월 20일 - 대한민국의 래퍼 박준형 (god). 7월 24일 - * 대한민국의 성우 안지환. * 미국의 영화배우, 가수, 디자이너 제니퍼 로페즈. 7월 28일 - 미국의 사업가 데이나 화이트. 8월 1일 - 대한민국의 가수 김명철. 8월 2일 * 대한민국의 야구 코치, 전 야구 선수(투수) 구대성. * 대한민국의 뮤지컬 배우 최정원. 8월 4일 - 대한민국의 앵커, 기자 호준석. 8월 6일 - 미국의 싱어송 라이터 엘리엇 스미스. 8월 8일 * 대한민국의 전 레슬링 선수 송성일. * 대한민국의 배우 이정용. 8월 14일 - 덴마크의 전 축구 선수 스티 퇴프팅. 8월 16일 - 대한민국의 만화가 김성모. 8월 17일 - 대한민국의 가수 겸 배우 엄정화. 8월 19일 - 미국의 힙합 가수 네이트 독 8월 21일 - 대한민국의 영화 감독 박광현. 8월 28일 - 미국의 배우, 에드워드 노턴. 8월 31일 - 볼리비아의 전 축구 선수 루이스 크리스탈도. 9월 5일 - 대한민국의 기자 박찬형. 9월 11일 * 대한민국의 가수 겸 배우 구준엽. * 대한민국의 성우 안현서. 9월 14일 - 대한민국의 영화감독 봉준호. 9월 15일 - 대한민국의 음악가 강현민. 9월 17일 - 대한민국의 영화감독 장항준. 9월 18일 - 프랑스의 축구 심판 스테판 라누아. 9월 19일 - 일본의 성우, 내레이터 오다 유세이. 9월 22일 - 터키의 정치인 얄츤 아크도안. 9월 25일 - 대한민국의 배우 이종원. 9월 28일 - 대한민국의 배우 김혜선. 9월 29일 - 오스트리아의 전 축구 선수, 현 축구 감독 이비차 바스티치. 10월 1일 -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 현 야구 코치 가득염. 10월 14일 - 러시아의 전 축구 선수, 현 축구 코치 빅토르 오놉코. 10월 15일 - 대한민국의 가수 겸 작곡가, 방송인 윤종신. 10월 16일 - * 미국의 트럼펫 연주자 로이 하그로브. * 대한민국의 배우 이범수. 10월 19일 - 미국의 애니메이터 트레이 파커. 10월 22일 -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 현 야구 코치 김태한. 10월 23일 - 중국의 천문학자 장다칭. 10월 24일 - 일본의 소설가 요시다 스나오. 10월 28일 -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 현 야구 코치 권명철. 10월 29일 - 대한민국의 트로트가수 진시몬. 10월 30일 - 대한민국의 배우 하희라. 11월 1일 - 콜롬비아의 축구 심판 오스카르 루이스. 11월 4일 - 미국의 힙합 가수 디디. 11월 6일 - 대한민국의 가수 주영훈. 11월 10일 - 독일의 축구 선수 옌스 레만. 11월 17일 - 일본의 성우 오키아유 료타로. 11월 20일 - 독일의 축구 심판 볼프강 슈타르크. 11월 23일 - 에콰도르의 축구 심판 비론 모레노. 11월 28일 - 대한민국의 배우 유준상. 12월 2일 * 대한민국의 가수, 프로듀서 양현석. * 대한민국의 배우 윤상호. 12월 9일 * 프랑스의 전 축구 선수 빅상트 리자라쥐. * 대한민국의 영화감독 김태용. 12월 14일 - 이탈리아의 베이스바리톤 가수 일데브란도 다르칸젤로. 12월 15일 - 대한민국의 배우 최재원. 12월 17일 - 대한민국의 전 축구 선수, 현 축구 감독 서정원. 12월 17일 - 미국의 종합격투기 선수 척 리델. 12월 18일 - 스페인의 전 축구 선수 산티아고 카니사레스. 12월 21일 * 프랑스 계 미국인 배우, 현 감독 줄리 델피. * 대한민국의 가수 강원래. *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김완태. 12월 22일 - 대한민국의 정치가 이정희. 12월 23일 - 대한민국의 배우 김혜리. 12월 27일 - 대한민국의 희극인 이창명. 12월 28일 * 대한민국의 가수 김정연. * 핀란드 SW 개발자 리누스 토르발스. 12월 29일 - 대한민국의 가수 이소라. 사우디아라비아의 기업인 알리 알 파라지. 1월 11일 - 독일의 사회학자 레오폴드 폰 비제. 3월 24일 - 콩고민주공화국의 초대 대통령 조제프 카사부부. 3월 28일 - 미국의 군인, 정치가, 제34대 대통령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4월 7일 - 대한민국의 시인 신동엽. 4월 25일 - 김용환, 5대 국회의원 등을 지낸 대한민국의 정치인. 6월 8일 - 미국의 영화배우 로버트 테일러. 6월 29일 - 콩고민주공화국의 정치가 모이스 촘베. 8월 22일 - 대한민국의 제2대 국회의원 김동성. 9월 2일 - 베트남의 혁명가 호찌민. 9월 6일 - 브라질의 전 축구 선수 아르투르 프리덴라이히. 9월 30일 - 영국의 심리학자 프레드릭 바틀렛. 12월 2일 - 구 소련군 군인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12월 31일 - 한국의 기업인이자 LG 그룹의 창설자 구인회. 경제학상 :랑나르 프리슈,얀 틴베르헨 문학상 :새뮤얼 베케트 물리학상 :머리 겔만 생리학 및 의학상 막스 델브뤽,앨프리드 허시,살바도르 루리아 평화상 국제노동기구 화학상 :디릭 바턴,오드 하셀 음력월 월건 대소 음력 1일의양력 월일 음력 1일간지 1월 병인 소 2월 17일 계해 2월 정묘 대 3월 18일 임진 3월 무진 소 4월 17일 임술 4월 기사 대 5월 16일 신묘 5월 경오 소 6월 15일 신유 6월 신미 대 7월 14일 경인 7월 임신 대 8월 13일 경신 8월 계유 소 9월 12일 경인 9월 갑술 대 10월 11일 기미 10월 을해 소 11월 10일 기축 11월 병자 대 12월 9일 무오 12월 정축 소 1970년 1월 8일 무자
1970년 은 목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3월 15일 - 핵 확산 금지 조약 인준. 3월 20일 - 프랑코포니 설립 3월 31일 - 요도 호 사건 발생 4월 8일 - 와우아파트가 무너져 33명의 사망자와 40명의 부상자가 발생하다. 4월 11일 ~ 4월 17일 - 아폴로 13호 4월 24일 - 중국 최초의 인공위성 발사. 5월 4일 - 켄트 주립대학교 발포 사건 6월 4일 - 통가 독립 8월 15일 - 대한민국 병무청 발족. 9월 4일 - 태풍 빌리 호 대한민국 강타. 인명피해 53명, 재산피해 60억 2,500만원 9월 6일 - 팔레스타인 인민 해방 전선, 유럽 상공에서 뉴욕행 민간 여객기 4대를 납치 9월 29일 - * 오적 필화 사건 발생. 대한민국 문화공보부가 김지하의 담시 `오적 (五賊) 게재를 문제삼아 월간지 `사상계 (思想界) 등록을 취소한 사건. * 대한민국,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김대중 대통령 후보 선출 10월 13일 - 핀란드, 유럽 연합 가입 10월 13일 - 피지, 유엔 가입 10월 14일 - 모산 수학여행 참사 발생 10월 15일 - 안와르 사다트가 이집트의 대통령으로 취임하다. 10월 17일 - 원주 삼광터널 열차 충돌 사고가 발생 11월 2일 - 조선로동당 제5차당대회 11월 6일 - 이탈리아와 중국, 국교 수립 11월 12일 - 방글라데시에 사이클론 볼라(Bhola) 상륙, 최소 300,000명 이상 사망. 11월 13일 - 전태일 열사 근로기준법 준수 외치며 분신 희생 12월 15일 - 대한민국 남해안에서 남영호 침몰 사고 발발로 326명이 사망함. 칠레 최초의 사회주의 정권이 인민연합의 살바도르 아옌데후보의 대통령 당선으로 수립. 3월 14일 ~ 9월 13일 일본 만국 박람회. 4월 10일 - 영국의 록 그룹 비틀즈, 마지막 앨범 발표 후 해체. 4월 22일 - 제1회 지구의 날. 5월 31일 - 1970년 FIFA 월드컵 개막 7월 7일 - 경부고속도로 전 구간이 개통되었다. 8월 15일 - 서울 남산1호터널 개통. 8월 28일 - 대한민국의 김민기가 〈 아침 이슬 〉을 발표하다. 10월 5일 - 대한민국, MBC의 메인 뉴스〈MBC 뉴스데스크〉첫 방영. 11월 30일 - 대한민국 100원주화가 처음으로 발행되다. (이후 1983년 1월에 디자인 변경됨) 영국의 록 그룹 퀸, 런던에서 결성. 1월 1일 - 대한민국의 미스코리아, 전 아나운서 장은영. 1월 3일 - 대한민국의 성우 박선영. 1월 5일 -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 현 야구 코치 강성우. 1월 7일 - 대한민국의 정치인 오승록. 1월 12일 - 대한민국의 가수, 작곡가 정재형. 1월 15일 - 대한민국의 성우 이주창. 1월 17일 - 미국의 영화 감독 겐디 타르타코브스키. 1월 18일 - 대한민국의 성우 양석정 1월 21일 - 크로아티아의 전 축구 선수 알렌 복시치. 1월 22일 - 중화인민공화국의 전 축구 선수, 현 축구 감독 판즈이. 1월 25일 - 대한민국의 전 가수 김태우. 2월 11일 - 대한민국의 성우 이장우. 2월 12일 - 네덜란드의 전 축구 선수, 현 축구 감독 브리얀 로이. 2월 13일 - *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 안경현. * 대한민국의 배우 박희순. 2월 19일 - 대한민국의 성우 우정신. 2월 21일 - 대한민국의 방송인 황현정. 2월 19일 - 일본의 성우 카사하라 히로코. 2월 25일 - 대한민국의 성우 윤성혜. 3월 1일 -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 현 야구 코치 정민태. 3월 2일 - 대한민국의 배우 최철호. 3월 9일 - 대한민국의 배우 윤제문. 3월 13일 - 미국의 영화 감독 팀 스토리. 3월 15일 -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 현 야구 코치 김정민. 3월 17일 - 루마니아의 전 축구 선수 플로린 러두치오이우. 3월 19일 - 스페인의 전 축구 선수, 현 축구 코치 아벨라르도 페르난데스. 3월 20일 - 대한민국의 가수 오하라. 3월 22일 - 대한민국의 육상 선수 황영조. 3월 25일 - 대한민국의 탤런트, 배우 오현경. 3월 27일 - 미국의 가수, 프로듀서 머라이어 캐리. 4월 9일 - 대한민국의 가수 홍원빈. 4월 11일 - 대한민국의 배드민턴선수 길영아. 4월 12일 - 대한민국의 개그맨, 가수 이동우. 4월 25일 - 일본의 성우 카와카미 토모코. (→ 2011년) 4월 28일 - 아르헨티나의 전 축구 선수, 현 축구 감독 디에고 시메오네. 4월 29일 - 미국의 배우 우마 서먼. 5월 5일 - 대한민국의 배우 김호진. 5월 6일 - *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 현 야구 코치 이용호. * 대한민국의 개그맨 심현섭. 5월 7일 - * 대한민국의 희극인 황봉알. * 대한민국의 영화배우 김수로. 5월 8일 - 스페인의 전 축구 선수, 현 축구 감독 루이스 엔리케. 5월 12일 - 대한민국의 축구인 김병지. 5월 15일 - * 네덜란드의 전 축구 선수, 현 축구 코치 프랑크 더 부르. * 네덜란드의 전 축구 선수, 현 축구 코치 로날트 더 부르. 5월 19일 - 대한민국의 골프인 최경주. 5월 23일 - 미국의 음악가, 마룬 5 멤버 맷 플린. 5월 24일 - 미국의 가수 토미 페이지. (→ 2017년) 5월 25일 - 일본의 성우 유키노 사츠키. 5월 29일 - 대한민국의 개그우먼, 가수 조혜련. *6월 5일 - 대한민국의 축구 해설자 한준희. 6월 6일 - 스페인의 전 축구 선수 알베르트 페레르. 6월 7일 - * 대한민국의 모델 출신 탤런트, 배우 차승원. * 브라질의 전 축구 선수 카푸. 6월 8일 - 대한민국의 성우 김장. 6월 12일 - 대한민국의 기자, 앵커 이주한. 6월 15일 - 대한민국의 배우 조민희. 6월 27일 - 대한민국의 종합격투기 선수 최무배. 6월 29일 - 대한민국의 배우, 무술감독 서범식. 7월 6일 -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 현 야구 코치 김현욱. 7월 12일 - 대한민국의 탤런트, 배우 이병헌. 7월 13일 - 대한민국의 트로트가수 서주경. 7월 14일 - 대한민국의 희극인 강호동. 7월 15일 - * 대한민국의 개그우먼 장미화. *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 현 야구 코치 조경택. 7월 17일 - 대한민국의 배우 장현성. 7월 21일 - 대한민국의 전 축구 선수, 현 축구 코치 김도훈. 7월 24일 - 대한민국의 배우 김상호. 8월 1일 - 영국의 축구 선수 데이비드 제임스. 8월 7일 - 대한민국의 배우 조은숙. 8월 8일 - 대한민국의 성우 최한. 8월 9일 - * 대한민국의 배우 전혜진. * 미국의 배우 토머스 레넌. 8월 11일 * 대한민국의 야구인 손차훈. * 영국의 가수 앤디 벨. 8월 13일 - 영국의 전 축구 선수, 현 축구 감독 앨런 시어러. 8월 14일 - 대한민국의 야구 해설가, 전 야구 선수 마해영. 8월 15일 -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 현 야구 코치 이종범. 8월 19일 *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 현 야구 코치 최태원. * 미국의 래퍼 팻 조. 8월 23일 - 대한민국의 배우 이성재. 8월 24일 - 터키의 전 축구 선수 투가이 케리몰루. 8월 25일 - 중화인민공화국의 전 축구 선수 하오하이둥. 8월 27일 - 대한민국의 성우 정명준. 8월 28일 - 대한민국의 트로트가수 박윤경/대한민국의 성우 조진숙. 8월 31일 - 대한민국의 배우 박형준. 9월 1일 - 대한민국의 배우 황정민. 9월 2일 - 사우디아라비아의 축구 심판 칼릴 알 감디. 9월 3일 - 대한민국의 가수 터틀맨 (거북이). 9월 3일 - 영국의 축구 선수 개러스 사우스게이트. 9월 5일 - 대한민국의 탤런트, 배우 김혜수. 9월 12일 - 대한민국의 성우 홍승표. 9월 16일 - 러시아의 전 축구 선수 유리 니키포로프. 9월 22일 * 프랑스의 전 축구 선수 에마뉘엘 프티. * 잉글랜드의 배우 루퍼트 펜리존스. 9월 27일 - * 대한민국의 개그맨 박명수. * 대한민국의 개그맨 김현철. 10월 1일 - 대한민국의 배우 감우성. 10월 3일 - 대한민국의 개그맨 김구라. 10월 8일 - 미국의 배우 맷 데이먼. 10월 10일 - 대한민국의 역사 강사 설민석 10월 11일 - * 대한민국의 배우 임원희. * 대한민국의 육상 선수 이봉주. *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 현 야구 코치 한혁수. 10월 12일 - 대한민국의 통역사 김선일. 10월 13일 - 대한민국의 배우 고창석. 10월 19일 - 대한민국의 배우 박상민. 10월 27일 - * 중화민국의 가수 소혜륜. * 대한민국의 개그맨 박수홍. 10월 29일 - * 네덜란드의 축구 선수 에드윈 판 데르 사르. * 네덜란드의 전 축구 선수, 현 축구 코치 필립 코퀴. 10월 31일 - 미국의 성우 놀런 노스. 11월 8일 - 대한민국의 전 축구 선수, 현 축구 코치 김태영. 11월 14일 -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한상권. 11월 17일 - 대한민국의 배우이자 가수 최진영. (→ 2010년) 11월 19일 - 대한민국의 성우 이소영. 11월 20일 * 대한민국의 범죄인 오원춘. * 대한민국의 성우 김정은. * 아랍에미리트의 정치인 만수르 빈 자이드 알 나하얀. 11월 21일 - 대한민국의 배우 정재영. 11월 23일 - 대한민국의 개그맨, 가수 김경식. 11월 27일 * 대한민국의 성우 양정화. * 대한민국의 소설가 한강. 11월 28일 - 프랑스의 정치인 에두아르 필리프. 11월 29일 - 대한민국의 배우 류승룡. 11월 30일 - 대한민국의 방송인 황수경. 12월 1일 - 미국의 싱어송라이터 조너선 콜턴. 12월 4일 - 대한민국의 배우 김희정. 12월 7일 - 대한민국의 배우 전미선. 12월 10일 - 대한민국의 뮤지컬 배우 권형준. 12월 21일 - 일본의 야구 선수 다니시게 모토노부. 12월 26일 - 대한민국의 개그맨 지상렬. 12월 28일 - 대한민국의 배우 박선우. 12월 31일 - 대한민국의 배우 남성진. 1월 30일 - 프리츠 바이에를라인,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의 군인. (← 1899년) 2월 2일 - 영국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 (← 1872년) 2월 10일 - 대한민국의 여성운동가 김활란. (← 1899년) 3월 31일 - 세묜 티모셴코, 소련의 군인. (← 1895년) 5월 1일 -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 의민태자. (← 1897년) 6월 11일 - 러시아의 혁명가, 총리였던 알렉산드르 표도로비치 케렌스키. (← 1881년) 7월 29일 - 영국의 지휘자 존 바비롤리. (← 1899년) 9월 18일 - 미국의 록 뮤지션 지미 헨드릭스. (← 1942년) 9월 25일 - 독일의 소설가 에리히 레마르크. (← 1898년) 9월 28일 - 이집트의 군인, 정치인 가말 압델 나세르. (← 1918년) 10월 19일 - 멕시코의 대통령, 혁명가 라사로 카르데나스. (← 1895년) 11월 9일 - 프랑스의 군인, 대통령 샤를 드 골. (← 1890년) 11월 13일 - 대한민국의 노동운동가 전태일. (← 1948년) 11월 19일 - 안드레이 예료멘코, 구 소련의 군인. (← 1892년) 11월 23일 - 노르웨이의 작가 알프 프뢰위센. (← 1914년) 11월 25일 - 일본의 작가 미시마 유키오. (← 1925년) 경제학상 :폴 새뮤얼슨 문학상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물리학상 :한네스 알벤,루이 네엘 생리학 및 의학상 :줄리어스 액설로드,버나드 카츠,울프 폰 오일러 평화상 :노먼 볼로그 화학상 :루이스 를루아르 음력월 월건 대소 음력 1일의양력 월일 음력 1일간지 1월 무인 대 2월 6일 정사 2월 기묘 소 3월 8일 정해 3월 경진 소 4월 6일 병진 4월 신사 대 5월 5일 을유 5월 임오 대 6월 4일 을묘 6월 계미 소 7월 4일 을유 7월 갑신 대 8월 2일 갑인 8월 을유 소 9월 1일 갑신 9월 병술 대 9월 30일 계축 10월 정해 대 10월 30일 계미 11월 무자 소 11월 29일 계축 12월 기축 대 12월 28일 임오
명(明) 홍무(洪武) 25년 일본(日本) 메이토쿠() 3년 / 겐추() 9년 명(明) 태조 홍무제(太祖 洪武帝) 25년 고려(高麗) 공양왕(恭讓王) 4년 조선(朝鮮) 태조(太祖) 원년 8월 5일(음력 7월 17일) - 태조(太祖)가 송경(松京) 수창궁(壽昌宮)에서 공양왕으로부터 선위(禪位) 받는 형식으로 왕위에 오름으로써 조선왕조가 개국하였다. 음력 10월 19일 - 일본 축주 태수(筑州太守) 장충가(藏忠佳)가 승려 장주(藏主)·종순(宗順) 등을 보내어 사로잡혀 갔던 조선의 인민들을 돌려보내고 또 수호(修好)하기를 청하였다. 12월 1일(음력 11월 17일) - 인재의 천거 등 시무책을 정함. 음력 11월 29일 - 예문관 학사(藝文館學士) 한상질(韓尙質)을 명나라 남경에 보내, 조선(朝鮮)과 화령(和寧) 중에서 국호(國號)를 고치기를 청하게 하였다. 음력 11월 - 조선이 승려 각추(覺鎚)를 무로마치 막부에 보내, 왜구의 금압(禁壓)과 피로인(被虜人)의 귀환을 요구함과 동시에 수호(修好)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대해 아시카가 요시미쓰는 답사(答使)를 보내 피로인 100명을 송환하면서 조선의 요구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4월 26일(음력 4월 4일) - 고려의 문신이자 유학자 정몽주. 9월 10일(음력 8월 23일) - 고려의 문신이자 유학자 이숭인. 12월 10일(음력 11월 26일) - 배극렴.
1960년 은 금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이다.4월3일생 아프리카의 해. 2월 11일 - 흐루쇼프 , 네루 수상 회담; 군축과 개발촉진에 합의. 2월 23일 - 미 해군 소속의 돈 윌시와 스위스의 탐험가이자 발명가 자크 피카르(Jacques Piccard)가 잠수정 트리에스테가2호를 타고 마리아나 해구 깊이까지 잠수하다. 2월 28일 - 2•28 대구 학생의거 발발. 3월 15일 - 3.15 부정선거 (4.19 혁명의 불씨가 된 사건) 4월 19일 - 4.19 혁명으로 부통령은 대한민국에서 폐지되었다. 4월 21일 - 브라질의 수도가 리우데자네이루에서 브라질리아로 이전됨. 4월 26일 - 제1·2·3대 대통령 이승만이 하야하였다. 5월 21일 - 대한민국, 내각책임제 개헌안 공고. (대한민국의 헌법 참조) 6월 15일 - 제2공화국 헌법안 가결. 8월 5일 - 부르키나파소 독립. 8월 7일 - 피델 카스트로, 쿠바 내 미국 자산 몰수 선언. 8월 8일 - 대한민국, 제2공화국 출범. 8월 11일 - 차드가 프랑스로부터 독립하다. 8월 12일 - 윤보선 대한민국의 제 4대 대통령으로 취임. 국무총리에 장면 선출. 8월 12일 - 첫 통신 위성인 에코 1호가 발사되다. 8월 14일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일성, 남북연방제 제의. 8월 17일 - 가봉이 프랑스로부터 독립하다. 8월 19일 - 대한민국, 장면 제2공화국 총리에 피선. 8월 23일 - 대한민국, 제2공화국 초대 총리 장면(張勉) 내각 출범. 8월 25일 - 제17회 로마 올림픽 개막. 9월 6일 - 일본 친선사절단 내한. 9월 10일 - 맨발의 왕자 로 불린 에티오피아 마라토너 비킬라 아베베, 제17회 로마 올림픽 마라톤서 2시간 15분 16초의 세계신기록으로 우승. 9월 14일 - 이란, 이라크, 쿠웨이트, 사우디아라비아, 베네수엘라 등 5개 산유국, 바그다드 회의서 석유수출국기구(OPEC) 결성. 9월 20일 - 가봉, 니제르, 마다가스카르, 베냉, 차드, 부르키나파소, 소말리아, 카메룬, 중앙아프리카 공화국, 콩고 공화국, 콩고 민주 공화국, 키프로스, 코트디부아르, 키프로스, 토고, 유엔 가입. 9월 22일 - 말리, 독립하다. 9월 24일 - 세계 최초 원자력 항공모함인 미국의 CVN-65 엔터프라이즈, 버지니아주 뉴포트항에서 진수. 9월 26일 - 미국에서 존 F. 케네디와 리처드 닉슨이 처음으로 대통령 후보 텔레비전 토론을 벌이다. 9월 28일 - 말리, 세네갈, 유엔 가입. 10월 1일 - 나이지리아가 독립하다. 10월 1일 - 키프로스가 독립하다. 10월 7일 - 나이지리아, 유엔 가입. 10월 12일 - 서울특별시 용산구 소재 효창 운동장 개장. 11월 1일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함흥시가 함경남도에서 분리되어 "함흥직할시"로 신설되다. 이후 이듬해 흥남시가 함흥시로 흡수. 11월 7일 - 미국 35대 대통령 존 F. 케네디 당선. 11월 28일 - 모리타니가 프랑스로부터 독립하였다. 12월 30일 - 윤보선 대한민국 대통령이 대통령의 관저 이름을 경무대에서 청와대로 개명하였다. 1월 1일 - 미국의 기업인 마이클 린턴. 1월 2일 -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 현 야구 코치 오대석. 1월 2일 - 일본의 만화가 우라사와 나오키. 1월 19일 - 대한민국의 야구인 양승호. 1월 22일 - 대한민국의 정치가 박영선. 1월 29일 - 미국의 다이빙 선수 그레그 루가니스. 2월 3일 - 독일의 전 축구 선수, 현 축구 감독 요아힘 뢰프. 2월 5일 - 대한민국의 요들러 서용율. 2월 8일 - 대한민국의 성우 문지현. 2월 11일 - 대한민국의 배우 전광렬. 2월 13일 - 이탈리아의 축구 심판 피에를루이지 콜리나. 2월 23일 - 일본의 황족 나루히토. 2월 24일 - 대한민국의 성우 임은정. 3월 6일 - 대한민국의 음악가 조동익. 3월 13일 - 대한민국의 시인 기형도. (→ 1989년) 3월 16일 - 대한민국의 희극 배우 이재포. 3월 21일 - 브라질의의 자동차 경주 선수 아이르통 세나. (→ 1994년) 3월 22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현 야구 감독 황병일. 3월 25일 - 대한민국의 가수 최성수. 4월 2일 - 대한민국의 배우 이미숙. 4월 6일 - 대한민국의 배우 김규철. 4월 8일 - 미국의 소프라노 가수 데버러 보이트. 4월 11일 - 대한민국의 가수 김종찬. 4월 13일 - 독일의 전 축구 선수, 현 축구 감독 루디 푈러. 4월 16일 - 스페인의 전 축구 선수, 현 축구 감독 라파엘 베니테스. 4월 20일 - 쿠바의 정치인 미겔 디아스카넬. 4월 24일 - 대한민국의 배우 원미경. 4월 24일 - 대한민국의 성우 윤소라. 5월 2일 - 대한민국의 야구인 김용수. 5월 3일 - 대한민국의 예술 경영인 김주호. (→ 2013년) 5월 5일 - 대한민국의 성우 이선호. 5월 8일 - 이탈리아의 전 축구 선수 프랑코 바레시. 5월 9일 - 미국의 야구 선수 토니 그윈. (→ 2014년) 5월 10일 - 아일랜드의 락 밴드 U2의 보컬리스트 보노. 5월 15일 - 일본의 음악가 이노우에 슌지. 5월 22일 - 일본의 영화 감독 안노 히데아키. 5월 23일 - 대한민국의 성우 이선주. 5월 30일 - 대한민국의 코메디언 김형곤. (→ 2006년) 6월 3일 - 대한민국의 농구코치 김현준. (→ 1999년) 6월 18일 - 대한민국의 정치인 김정호. 6월 20일 - 대한민국의 정치인 구논회. (→ 2006년) 6월 22일 - 대한민국의 배우 윤철형. 6월 26일 - 대한민국의 가수 김범룡. 7월 2일 - 대한민국의 정치가 정봉주. 7월 7일 - 대한민국의 노동운동가 김진숙. 7월 8일 -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 전 야구 감독, 현 야구 코치 한대화. 7월 20일 - 대한민국의 시사평론가 유창선. 7월 23일 - 대한민국의 성우 김민석. 8월 4일 - 스페인의 정치인 호세 루이스 로드리게스 사파테로. 8월 5일 -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 전 야구 감독 김진욱. 8월 8일 - 대한민국의 가수 임병수. 8월 11일 - 대한민국의 배우 정애리. 8월 14일 - 대한민국의 배우 송옥숙. 8월 17일 - 미국의 영화 배우 숀 펜. 8월 30일 - 대한민국의 정치인 김교흥. 9월 4일 - 대한민국의 정치인 정진석. 9월 9일 - 대한민국의 배우 천호진. 9월 11일 - 멕시코의 테너 가수 라몬 바르가스. 9월 21일 - * 캐나다의 배우 데이비드 제임스 엘리엇. * 대한민국의 희극인 이경규. 9월 26일 - 대한민국의 배우 정원중. 10월 1일 - 대한민국의 배우 이휘향. 10월 6일 - 미국의 기업인 엘리스 쇼트. 10월 18일 - 벨기에의 영화 배우 장 클로드 반담. 10월 24일 - 대한민국의 초록뱀미디어 소속의 연출자 김병욱. 10월 29일 - 대한민국의 배우 맹상훈. 10월 30일 - 아르헨티나의 전 축구 선수, 전 축구 감독 디에고 마라도나. 10월 31일 - 전 이란 황태자 레자 팔라비. 11월 3일 - 일본의 스트리트파이터 캐릭터 에드몬드 혼다. 11월 11일 - 미국의 영화배우 스탠리 투치. 11월 20일 - 대한민국의 방송인 최일구. 11월 25일 - 미국의 정치가 존 F. 케네디 주니어. (→ 1999년) 11월 26일 - 대한민국의 배우 강신일. 11월 27일 - 우크라이나의 정치가 율리야 티모셴코. 11월 30일 - 영국의 전 축구 선수 게리 리네커. 12월 1일 -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배기완. 12월 12일 - * 대한민국의 시각예술가 홍성석. * 대한민국의 성우 강희선. * 대한민국의 배우 이경영. 12월 18일 - 일본의 경제학자, 경제 평론가 우에쿠사 가즈히데. 12월 20일 - 대한민국의 영화감독 김기덕. 12월 22일 - 일본의 기업인 히라이 카즈오 12월 27일 - 대한민국의 배우 차화연. 12월 28일 - 대한민국의 배우 김형일. 1월 6일 - 알베르 카뮈. (← 1913년) 2월 15일 - 한국의 독립운동가 정치인 조병옥. (← 1894년) 4월 4일 - 알프레드 나우요크스, 나치 독일 SS장교, SD 간부로 글라이비츠 방송국 공격을 지휘. (← 1911년) 4월 21일 - 한국의 소설가 이무영. (← 1908년) 4월 28일 - 한국의 정치인 이기붕. (← 1897년) 7월 16일 - 알베르트 케셀링, 제2차 세계 대전 중 활약한 독일의 군인. (← 1885년) 9월 15일 - 우루과이의 축구 선수, 축구 감독 엑토르 카스트로. (← 1904년) 11월 16일 - 미국의 배우 클라크 게이블. (← 1901년) 12월 7일 - 루마니아의 피아노 연주자 클라라 하스킬. (← 1895년) 문학상 생 종 페르스 물리학상 도널드 글레이저 생리학 및 의학상 맥팔레인 버넷,피터 B. 메더워 평화상 앨버트 루툴리 화학상 월라드 리비 마라도나교의 교리상 1960년이 원년에 해당된다. 음력월 월건 대소 음력 1일의양력 월일 음력 1일간지 1월 무인 대 1월 28일 을묘 2월 기묘 소 2월 27일 을유 3월 경진 대 3월 27일 갑인 4월 신사 소 4월 26일 갑신 5월 임오 대 5월 25일 계축 6월 계미 대 6월 24일 계미 윤6월 소 7월 24일 계축 7월 갑신 대 8월 22일 임오 8월 을유 소 9월 21일 임자 9월 병술 대 10월 20일 신사 10월 정해 소 11월 19일 신해 11월 무자 대 12월 18일 경진 12월 기축 소 1961년 1월 17일 경술
1902년 은 수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대한제국(大韓帝國) 광무(光武) 6년 청(淸) 광서(光緖) 28년 일본(日本) 메이지() 35년 대한제국(大韓帝國) 고종(高宗) 39년 청(淸) 덕종 광서제(德宗 光緖帝) 28년 1월 30일 - 영일동맹이 런던에서 체결되다. 2월 1일 - 청나라, 만주족과 한족간 결혼금지령 해제. 3월 6일 - 스페인 축구 클럽 레알 마드리드 CF 창단. 4월 20일 - 피에르 퀴리와 마리 퀴리가 염화 라듐을 정제해 내다. 10월 16일 - 프랑스, 지문을 범죄자 식별법으로 이용하기 시작하다. 11월 17일 - 의학교장 지석영, 황성신문에 ‘양매창론’(楊梅瘡論)을 발표 서울과 인천 사이에 일반인들이 사용할 수 있는 공중전화가 개설되었다. 1월 8일 - 구 소련의 정치인 게오르기 말렌코프. 1월 19일 - 러시아 태생의 역사학자 게오르크 오스트로고르스키. 1월 29일 - 마카오 정치가 겸 외교관 루주즈. 2월 1일 - 미국의 시인 랭스턴 휴즈. 3월 12일 -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박열. 3월 30일 - 한국의 소설가 나도향. 6월 16일 - 미국의 세포유전학자 바버라 매클린톡. 6월 20일 - 한국의 시인 정지용. 7월 21일 - 한국의 소설가 채만식. 8월 8일 - 영국의 물리학자 폴 디랙. 9월 5일 - 한국의 독립운동가 고이허. 9월 7일 - 대한민국의 시인 김소월. 10월 13일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과학자 도상록. 11월 20일 - 독일의 법학자 볼프강 쿵켈. 12월 16일 - 한국의 독립 운동가 류관순. 아르헨티나의 축구인 안토니오 베스푸시오 리베르티. 9월 29일 - 프랑스 소설가 에밀 졸라 화학상 - 에밀 피셔 (독일). 생리학·의학상 - 로널드 로스 (영국). 물리학상 - 피터르 제이만, 헨드릭 안톤 로런츠 (네덜란드). 문학상 - 테오도어 몸젠 (독일). 평화상 - 엘리 뒤코묑, 샤를 알베르 고바 (스위스) 공동수상. 음력월 월건 대소 음력 1일의양력 월일 음력 1일간지 1월 임인 대 2월 8일 임술 2월 계묘 소 3월 10일 임진 3월 갑진 대 4월 8일 신유 4월 을사 소 5월 8일 신묘 5월 병오 소 6월 6일 경신 6월 정미 대 7월 5일 기축 7월 무신 소 8월 4일 기미 8월 기유 대 9월 2일 무자 9월 경술 소 10월 2일 무오 10월 신해 대 10월 31일 정해 11월 임자 대 11월 30일 정사 12월 계축 대 12월 30일 정해
1953년 은 목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1월 9일 - 다대포 앞바다에서 여객선 창경호 침몰 사고가 발생하다. 2월 1일 - 일본 NHK 도쿄 텔레비전이 본방송을 시작하다. 4월 25일 -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 DNA의 이중나선 구조에 관한 논문을 네이처誌에 발표하다. 5월 25일 - 세계 최초 전투기 노스아메리칸 F-100 슈퍼세이버탄생 5월 29일 - 에드문드 힐러리 卿과 쉐르파 텐징 노르가이, 세계 최초로 에베레스트 산 정상에 오르다. 6월 2일 - 엘리자베스 2세,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영국 국왕으로 즉위하는 대관식 거행. 7월 27일 - 한국 전쟁 휴전. 8월 3일 - 유엔 중립국 감시위원회, 판문점에 군사정전위원회 본부 설치. 8월 5일 - 판문점에서 남북 포로 교환 시작. 8월 6일 - 월북시인 임화(林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미국 스파이 로 몰려 처형. 8월 7일 - 평양방송, 박헌영 등 남로당 계인사 12명 숙청사실 발표. 8월 8일 - 변영태 외무장관과 존 포레스트 덜레스 미 국무장관, 청와대서 한미상호방위조약 가조인. 8월 15일 - 한국전쟁으로 부산으로 옮겼던 대한민국 정부가 서울로 돌아옴. 8월 20일 - 소련, 수소폭탄 첫 실험 성공. 8월 28일 - 일본 최초 민영 방송국인 닛폰 TV 방송망 개국과 동시에 세이코 사 제공으로 일본 최초의 TV 광고가 방영되다. 9월 21일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인민군 공군 노금석 대위, MIG-15를 몰고 대한민국으로 귀순. 9월 24일 - 할리우드에서 첫 시네마스코프 영화 《성의》 상영. 10월 1일 - 한미상호방위조약, 미국 워싱턴 D.C.서 조인. 10월 3일 - 대한민국 정부, 신형법 공포 시행. 10월 6일 - 제3차 한일회담 개막.(10일 결렬) 10월 11일 - 대한민국 최초의 자체 제작 항공기인 부활호가 만들어졌다. 10월 11일 - 라몬 막사이사이, 필리핀 대통령에 당선. 10월 14일 - 키비아 학살, 아리엘 샤론이 지휘하는 이스라엘 군이 요르단 강 서안 지구를 공격, 50명 이상이 살해되었다. 10월 14일 - 요시프 브로즈 티토,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대통령에 선출되다. 10월 15일 - 영국 핵실험이 오스트레일리아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주 에뮤 필드에서 실시되다. 대한민국이 원화에서 환화으로 화폐 단위를 바꾸다. 미국 시카고 대학에서 밀러 실험 실시. 스웨덴 알름훌트에 이케아의 첫 번째 매장이 열리다. 1월 5일 - 대한민국의 농구감독 및 해설위원 김동광 1월 6일 - 독일의 전 축구 선수 만프레트 칼츠. 1월 21일 - 미국의 기업가 폴 앨런. 1월 22일 - 대한민국의 지휘자·피아니스트 정명훈. 1월 24일 - * 대한민국의 성우 장정진. * 대한민국 제19대 대통령 문재인. 1월 28일 - 대한민국의 전 국회의원 김영덕. 1월 29일 - 중화민국의 가수 등려군. 2월 1일 - 대한민국의 바둑기사 서봉수. 2월 10일 -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 현 야구 코치 이홍범. 2월 11일 - 미국의 정치가 젭 부시. 2월 14일 - 오스트리아의 전 축구 선수, 현 축구 감독 한스 크랑클. 2월 18일 - 대한민국의 언어학자 김두식. 2월 19일 - 아르헨티나의 대통령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2월 21일 - 미국의 배우 윌리엄 루이스 피터슨. 2월 25일 - 대한민국의 배우 김영철. 3월 3일 - 브라질의 전 축구 선수, 현 축구 감독 지쿠. 3월 10일 - 대한민국의 바둑기사 조훈현. 3월 16일 - 미국의 프로그래머 리처드 스톨만. 4월 3일 -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 현 야구 코치 계형철. 4월 5일 - 대한민국의 가수 태진아. 4월 14일 - 홍콩의 영화 감독 쩡즈웨이. 5월 6일 - 영국의 정치가 토니 블레어. 5월 22일 - 대한민국의 전 축구 선수, 현 축구 감독 차범근. 5월 24일 - 아르헨티나의 전 축구 선수, 현 축구 감독 다니엘 파사레야. 5월 28일 - 대한민국의 배우 문성근. 5월 29일 - 미국의 작곡가 대니 엘프먼. 6월 6일 - 대한민국의 성우 한수경. 6월 15일 - 중국의 최고지도자, 공산당 총서기,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중화인민공화국의 주석 시진핑. 6월 21일 - 파키스탄의 정치인 베나지르 부토. 7월 13일 - 대한민국의 테니스 선수 이덕희. 7월 14일 - 일본의 정치인, 외무대신 오카다 가쓰야. 7월 19일 - * 일본 중의원 의원 나카가와 쇼이치. * 아르헨티나의 전 축구 선수 레네 오우세만. 7월 27일 - 대한민국의 국회의원 정동영. 8월 4일 - 일본의 전 야구 선수, 전 야구 감독 나시다 마사타카. 8월 18일 - 대한민국의 가수 배철수. 8월 19일 - 대한민국의 정치인 신경민. 9월 3일 - 말리의 전기공학자 아마둔 투레. 9월 4일 - 터키의 전 축구 선수, 현 축구 감독 파티흐 테림. 9월 9일 - 러시아의 기업인 알리셰르 우스마노프. 9월 15일 - 대한민국의 지휘자 임헌정. 9월 17일 - 대한민국의 소설가, 정치인 김한길. 9월 19일 - 인도의 언어학자 프로발 다슈굽토. 10월 3일 - 대한민국의 배우 오미연. 10월 17일 - 대한민국의 시인, 박남철. 10월 28일 - 대한민국의 배우 박영규. 11월 18일 - 영국의 만화가 앨런 무어. 11월 29일 -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 현 야구 감독 김무관. 12월 8일 - 미국의 배우 킴 베이싱어. 12월 9일 - 일본의 전 야구 선수, 현 야구 감독 오치아이 히로미쓰. 12월 13일 - 대한민국의 배우 독고영재. 12월 26일 - * 도미니카 공화국의 대통령 레오넬 페르난데스. * 에스토니아의 대통령 토마스 헨드릭 일베스. 2월 24일 - 2차 세계대전 독일의 군인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3월 5일 - * 소비에트 연방의 정치인 이오시프 스탈린. * 러시아의 작곡가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3월 14일 - 체코슬로바키아의 정치인 클레멘트 고트발트. 4월 4일 - 루마니아의 왕 루마니아의 카롤 2세. 4월 19일 -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정치인 이시영. 5월 21일 - 독일의 수학자·철학자 에른스트 체르멜로. 9월 7일 - 일본의 군인 아베 노부유키. 9월 28일 - 미국의 천문학자 에드윈 허블. 문학상 물리학상 프리츠 제르니커 생리학 및 의학상 평화상 화학상 음력월 월건 대소 음력 1일의양력 월일 음력 1일간지 1월 갑인 소 2월 14일 병신 2월 을묘 대 3월 15일 을축 3월 병진 소 4월 14일 을미 4월 정사 소 5월 13일 갑자 5월 무오 대 6월 11일 계사 6월 기미 대 7월 11일 계해 7월 경신 소 8월 10일 계사 8월 신유 대 9월 8일 임술 9월 임술 대 10월 8일 임진 10월 계해 소 11월 7일 임술 11월 갑자 대 12월 6일 신묘 12월 을축 대 1954년 1월 5일 신유
1994년 은 토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1월 7일 - 개인정보보호법(공공기관의 개인정보보호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다. 동학농민운동 100주년. 2월 18일 - 사이비 종교 문제를 폭로해오던 탁명환 국제종교문제연구소장이 당시 대성교회의 운전수이자 신학생이었던 임홍천에게 살해당하다. 3월 23일 - 러시아항공의 아에로플로트 593편 추락 사고가 발생, 75명이 사망했다. 4월 5일 - 미국의 록그룹 너바나의 커트 코베인 이 자택서 숨진채 발견됐다. 4월 26일 - 중화항공 140편 추락 사고가 일어나 승객 264명이 사망했다. 4월 27일 - 넬슨 만델라가 남아프리카 공화국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아파르트헤이트 완전 폐지를 선언하였다. 4월 30일 - 북한의 여만철과 그 가족 5명이 대한민국으로 귀순하다. 5월 10일 - 넬슨 만델라, 남아프리카 공화국 첫 흑인 대통령에 취임하다. 6월 ~ 8월 - 대한민국에 건국 이래 최초로 전국 최고 기온 38.4도라는 폭염이 기승을 부렸다. 6월 23일 - 철도파업, 서울 지하철과 부산 지하철 연대파업에 들어갔다. 6월 30일 - 일본 무라야마 도미이치 내각이 출범하다. 7월 2일 - 콜롬비아의 축구 선수 안드레스 에스코바르가 자책골을 넣었다는 이유로 괴한에게 총살당하다. 7월 8일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일성 주석이 심근경색으로 사망하다. 7월 16일 - 슈메이커-레비 9 혜성, 목성 충돌. 7월 27일 - 갑오개혁 100주년. 8월 1일 - 청일 전쟁 발발 100주년. 8월 10일 - 대한민국 제주도 제주국제공항에서 대한항공(KAL) 활주로 이탈사고가 발생하다. 8월 15일 - 대한민국의 김영삼 정부가 민족공동체통일방안을 제시하였다. 8월 25일 - 박홍 서강대학교 총장, 여의도클럽 토론회서 주사파 발언으로 논란을 일으키다. 9월 10일 - 대한민국 국가권력 감시와 시민권리 증진을 위한 시민단체인 "참여민주사회와 인권을 위한 시민연대"(현 참여연대) 발족 9월 21일 - 연쇄살인 사건을 일으켰던 지존파가 경찰에 체포되다. 9월 23일 - 북핵문제 제38차 국제원자력기구(IAEA) 연차총회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해 핵안전협정 전면이행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하다. 10월 1일 - 팔라우 독립. 10월 2일 - 일본 자위대 병력 470명이 르완다에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처음으로 해외에 파견. 10월 21일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에서 성수대교 붕괴 사고가 일어났다. 10월 24일 - 대한민국 충청북도 단양군에서 충주호 유람선 화재 사고가 일어나다. 11월 13일 - 스웨덴, 국민투표로 유럽 연합 가입을 결정하다. 12월 7일 - 대한민국 서울에서 아현동 도시가스 폭발 사고가 일어나다. 12월 15일 - 팔라우, 유엔 가입. 12월 16일 - 대한민국 국회 본회의 WTO 비준동의안이 찬성 1백 52, 반대 58, 기권 1로 표결, 찬성. 1월 7일 - 빨간 망토 차차의 방영 시작. 1월 8일 - 서울의 달 방영 시작. 1월 19일 - 서울특별시 마포구 상암동에 위치한 도로교통공단 서부운전면허시험장이 개장하다. 2월 1일 - 대우자동차(한국GM의 전신)에서 아카디아를 시판하다. 2월 6일 - 미국의 팝 록 밴드인 마룬 5가 결성되었다. 카라스 플라워스라는 이름으로 결성되었다. 2월 12일 - 1994년 동계올림픽 개막. 2월 17일 - 나사 연구원 앤 하치가 갈릴레오 호의 사진을 분석하던 중 다크틸을 발견하다. 2월 27일 - 1994년 동계올림픽 폐막. 2월 28일 - 미국에서 브래디 권총폭력 방지법이 시행되다. 3월 15일 - 대한민국의 서울도시철도공사(이후 서울교통공사로 통합)가 창립되다. 3월 20일 - 대한민국 이우혁, 판타지소설 《퇴마록》 출간. 3월 29일 - 기아자동차에서 아벨라를 시판하다. 4월 1일 - 과천선 전 구간이 완전개통하다. 4월 1일 - 현대자동차에서 엑센트를 시판하다. 5월 6일 - 영국과 프랑스를 잇는 채널 터널이 완공되다. 6월 6일 - MBC 미니시리즈 사랑을 그대 품안에의 방송이 시작되다. 5월 20일 * 잡지 영챔프가 창간되다. * 대우자동차(한국GM의 전신)에서 씨에로를 출시하다.(시판은 같은 달 23일) 6월 17일~7월 17일 제15회 월드컵 대회가 개최되었다. 6월 24일 - 영화 라이온 킹이 개봉되다. 7월 7일 - * 서해안고속도로의 능해 나들목에서 안산 분기점 구간이 개통됐다. * 제2경인고속도로 서창 분기점 ~ 광명 나들목 구간 개통. 7월 17일 - 제15회 월드컵 대회가 브라질의 통산 4번째 우승으로 폐막하다. 7월 25일 - 드라마 영웅일기의 방송이 시작되다. 8월 29일 - 삼성전자 256메가 D램을 세계 최초로 개발하다. 9월 1일 - 분당선 수서 - 오리 구간 개통. 9월 4일 * 태권도가 2000년 오스트레일리아시드니 올림픽에 정식종목으로 채택. * 간사이 국제공항이 개항했다. 9월 14일 - 프랑스에서 영화 레옹이 개봉하다 9월 21일 - 윈도 NT 3.5가 출시되다. 10월 1일 - 한국전력공사 수신료 징수제도 시행으로 인해 KBS 제1TV에서 상업광고가 폐지되었다. 10월 1일 - 일본 효고현 이타미 시에 아쿠아플러스 설립. 10월 2일~10월 16일 - 제12회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이 개최되었다. 10월 5일 - 45세 권투 선수 조지 포먼이 마이클 무어를 누르고 최고령 헤비급 챔피언이 되었다. 10월 8일 - 대한민국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완간. 10월 9일 - 황영조 선수, 일본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 마라톤에서 우승. 10월 11일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단군릉 복원공사 완료. 11월 22일 - 세가 새턴 발매. 11월 23일 - 대한민국, 1995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실시하다. 11월 29일 - 서울1000년 타임캡슐을 매설하다. 12월 3일 - 소니 컴퓨터 엔터테인먼트에서 플레이스테이션 발매. 12월 24일 - 부산 동서고가로 낙동대교~문현램프 전구간 개통. 12월 26일 - 온라인 게임 개발 회사 넥슨 설립. 날짜 미상 * 파리-다카르 랠리가 파리에서 개최되다. * 대한민국이 IC 칩 방식의 공중 전화를 도입하였다. 그러나 공중전화 사용자의 감소와 비싼 단가로 인해 KT(당시 한국통신)는 2002년에는 IC 일반 카드, 2003년에는 IC 광고 카드가 단종되고 기존의 마그네틱 방식의 공중 전화 카드만을 발행하게 된다. 1월 2일 - 대한민국의 가수 정민 (보이프렌드). 1월 3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김융.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최항. 1월 6일 * 대한민국의 가수 JB (GOT7). * 대한민국의 배우 최원명. * 대한민국의 배우 이선빈. 1월 9일 - 우즈베키스탄의 축구 선수 이크롬 알리바예프. 1월 13일 - 일본의 가수, 영화배우 나카야마 유마. 1월 14일 - 대한민국의 래퍼 카이 (EXO, EXO-K). 1월 15일 - 대한민국의 가수 형원 (몬스타엑스). 1월 17일 - 일본의 성우 우에다 레이나 1월 18일 * 대한민국의 전 가수 강지영. * 대한민국의 전 가수 공민지. 1월 20일 - 대한민국의 래퍼 키썸. 1월 21일 * 대한민국의 가수 강승윤( 위너). * 대한민국의 가수 김예림 (투개월). * 미국의 배우 가수 부부 스튜어트. 1월 23일 - 대한민국의 피겨 스케이팅 선수 곽민정. 1월 24일 - 대한민국의 가수 영재 (B.A.P). 1월 26일 - 오스트레일리아의 축구 선수 스테프 캐틀리. 1월 29일 * 일본의 성우 사쿠라 아야네. * 대한민국의 태권도 선수김소희 1월 31일 * 대한민국의 배우, 모델 신지수 * 대한민국의 야구선수 윤대영. 2월 1일 * 영국의 가수 해리 스타일스. * 일본의 가수 후지에 레이나. 2월 7일 - 대한민국의 가수 김진환 (iKON). 2월 8일 - 터키의 축구 선수 하칸 찰하노을루. 2월 10일 * 대한민국의 가수 손나은 (에이핑크). * 대한민국의 가수 슬기 (레드벨벳). 2월 11일 - 대한민국의 가수 서지수 (러블리즈). 2월 12일 * 대한민국의 가수 수빈 (달샤벳). * 일본의 가수 이치카와 미오리. 2월 13일 - 네덜란드의 축구 선수 멤피스 데파이. 2월 14일 - 대한민국의 프로게이머 김정훈. 2월 15일 * 대한민국의 배우 진세연. * 대한민국의 배우 이종화. 2월 16일 - 대한민국의 가수 김성주 (유니크). 2월 18일 - 대한민국의 래퍼 제이홉 (방탄소년단). 2월 20일 - 대한민국의 가수 송하예. 2월 21일 - 대한민국의 가수 웬디 (레드벨벳). 2월 22일 * 대한민국의 배우 고주연. * 대한민국의 배우 남주혁. * 대한민국의 가수 케인. 2월 23일 * 미국의 배우 다코타 패닝. * 대한민국의 가수 이정문 2월 25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하주석. 2월 28일 * 대한민국의 배우 윤수. * 대한민국의 가수 지수 (타히티). * 영국의 가수 제이크버그. 3월 1일 * 대한민국의 가수 박보람. * 캐나다의 가수 저스틴 비버. 3월 2일 * 대한민국의 배우 서은수. * 대한민국의 배우 최효은 3월 3일 * 대한민국의 배우 이다윗. * 대한민국의 배우 정민아. * 대한민국의 가수 수민 (소나무). 3월 4일 - 대한민국의 배우 한보배. 3월 5일 - 대한민국의 가수 MJ (아스트로). 3월 10일 - 일본의 가수 나가오 마리야. 3월 12일 - 미국의 가수 크리스티나 그리미. 3월 19일 - 대한민국의 전 래퍼 하이탑. 3월 22일 - 대한민국의 가수 하성운 (핫샷, 워너원). 3월 24일 - 대한민국의 프로게이머 조성호 (진에어 그린윙스). 3월 25일 - 대한민국의 여자 모델 겸 디자이너 손수아(수지 손). 3월 26일 - 일본의 가수 와타나베 마유 (AKB48 팀B). 3월 28일 - 중국의 래퍼 잭슨 (GOT7). 3월 29일 - 대한민국의 래퍼 원. 3월 30일 * 대한민국의 전 가수 다희. * 일본의 가수 시마자키 하루카. 4월 4일 - 일본의 가수 스가야 리사코 (Berryz코보). 4월 9일 - 스웨덴의 축구 선수 밈미 라르손. 4월 11일 - 일본의 가수 오가사와라 마유. 4월 12일 - 대한민국의 래퍼 세훈 (EXO, EXO-K). 4월 17일 - 대한민국의 가수 홍석 (펜타곤). 4월 19일 * 대한민국의 전 가수 한아름. * 대한민국의 전 가수 레이. 4월 21일 * 대한민국의 전 가수 강준. * 스웨덴의 축구 선수 루드비그 아우구스틴손. 4월 23일 - 대한민국의 배우 송강. 4월 27일 - 대한민국의 가수 김하람. 5월 4일 - 대한민국의 가수 소연 (라붐). 5월 6일 - 대한민국의 영화 감독 유석현. 5월 9일 - 대한민국의 배우 여회현. 5월 10일 - 대한민국의 전 가수 남태현 5월 14일 - 대한민국의 가수 오월. 5월 23일 * 대한민국의 가수 칸토 (트로이). * 대한민국의 스켈레톤 선수 윤성빈. 5월 25일 - 대한민국의 프로게이머 백동준 (삼성 갤럭시). 5월 26일 - 대한민국의 배우가수 공명(서프라이즈). 5월 28일 - 대한민국의 리듬체조 선수 손연재. 5월 30일 - 프랑스의 가수 마데온. 5월 31일 - 대한민국의 배우 심은경. 6월 1일 * 대한민국의 전 래퍼 이던.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정현. 6월 5일 - 대한민국의 가수 아미 (워너비). 6월 9일 * 대한민국의 가수 혜리 (걸스데이). * 대한민국의 가수 지엔 (라붐, 유니티). 6월 11일 - 스페인의 배우 이바나 바케로 6월 13일 * 일본의 가수 야가미 쿠미. * 대한민국의 배우 서하. 6월 14일 - 대한민국의 가수 태일 (NCT) 6월 15일 - 일본의 배우 히다카 리나. 6월 20일 - 대한민국의 배우 강태오 (서프라이즈). 6월 21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한승택. 6월 27일 - 대한민국의 가수 서영 (헬로비너스). 6월 29일 대한민국의 배우 동호. 6월 30일 - 대한민국의 배우 송세현. 7월 10일 - 대한민국의 배우 채수빈. 7월 12일 * 대한민국의 기수 차훈 (엔플라잉). * 일본의 가수 모모타 카나코. 7월 15일 * 대한민국의 가수 김재현 (엔플라잉).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윤형배. 7월 20일 - 대한민국의 가수 유경목. 7월 21일 - 대한민국의 배우 은원재. 7월 22일 - 중국의 가수 이문한 (유니크) 7월 26일 - 대한민국의 배우 지예은. 7월 28일 - 대한민국의 가수 효정 (오마이걸). 8월 1일 - 일본의 가수 와다 아야카. (스마이레지 리더) 8월 2일 - 스웨덴의 축구 선수 에밀 크라프트. 8월 4일 - 대한민국의 배우 박소정. 8월 5일 - 대한민국의 골프선수 권지람. 8월 9일 - 대한민국의 가수 재윤 (SF9) 8월 10일 - 대한민국의 골프선수 전인지. 8월 15일 - 대한민국의 프로게이머 김영일. 8월 16일 - 대한민국의 가수 니엘 (틴탑). 8월 19일 * 대한민국의 프로게이머 김도경. * 대한민국의 야구선수 심재윤. 8월 20일 - 대한민국의 전 가수 가은 8월 21일 - 미국의 배우 재클린 에머슨. 8월 23일 - 대한민국의 배구선수 전하늘. 8월 24일 * 대한민국의 프로게이머 원이삭. * 대한민국의 야구선수 이정호. 8월 25일 - 대한민국의 가수 연경 (더 씨야). 8월 26일 - 대한민국의 래퍼 예지 (피에스타). 8월 30일 * 대한민국의 배우 권소현. * 대한민국의 가수 허영지 (카라). 9월 4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조상우. 9월 7일 - 일본의 배우 야마자키 겐토. 9월 10일 - 대한민국의 배우 윤홍빈. 9월 12일 * 대한민국의 배우 고원희. * 대한민국의 래퍼 RM (방탄소년단). 9월 18일 - 대한민국의 프로게이머 전태양 (진에어 그린윙스). 9월 20일 - 필리핀의 축구 선수 다이스케 카우만다이 사토. 9월 22일 * 대한민국의 전 가수 홍유경. * 대한민국의 가수 진영 (GOT7). 9월 23일 - 대한민국의 가수 이미주 (러블리즈). 9월 24일 - 대한민국의 배우 박세완. 9월 25일 - 대한민국의 배우 도희. 9월 26일 - 대한민국의 가수 현욱 (IN2IT) 10월 4일 - 대한민국의 래퍼 정일훈 (비투비). 10월 5일 - 대한민국의 전 가수 수이. 10월 6일 - 대한민국의 래퍼 주헌 (몬스타엑스). 10월 7일 - 대한민국의 배우 윤지원. 10월 8일 - 일본의 가수 루이. 10월 10일 - 대한민국의 전 가수 수지 (미쓰에이). 10월 24일 - 대한민국의 가수 크리스탈 (f(x)). 11월 11일 - 대한민국의 전 가수 해령. 11월 16일 - 대한민국의 전 가수 허준. 11월 18일 - 대한민국의 가수 김수찬. 11월 20일 - 대한민국의 가수 제이민 (Tiny-G). 11월 24일 * 대한민국의 가수, 배우 박혜수. * 대한민국의 배우 김선아. 11월 25일 * 대한민국의 프로게이머 김도욱. * 대한민국의 가수 주드 (빅스타). 11월 26일 - 대한민국의 배우 한예린. 11월 30일 * 대한민국의 체조선수 박지연. * 대한민국의 피켜 스케이팅 선수 윤예지. 12월 1일 - 대한민국의 야구선수 조석환. 12월 7일 - 일본의 피겨스케이터 하뉴 유즈루. 12월 8일 * 대한민국의 가수 주니 (레이디스 코드). * 자메이카의 축구선수 라힘 스털링. 12월 9일 - 일본의 배우 히로세 아리스 12월 16일 * 잉글랜드의 축구 선수 엘리엇 리. * 이탈리아의 축구 선수 니콜라 무루. * 스페인의 축구 선수 호세 로드리게스 마르티네스. 12월 17일 - 대한민국의 가수 최시영. 12월 18일 - 대한민국의 가수 민재 (소나무). 12월 24일 * 대한민국의 가수 설아 (우주소녀). * 대한민국의 가수 한승우 (빅톤). * 프랑스의 축구 선수 에브 페리세. 12월 28일 * 대한민국의 모델 유리. * 대한민국의 이종격투기 선수 송가연. * 일본의 예능인 마에다 유카(스마이레지). 12월 31일 - 대한민국의 체조선수 허선미. 리처드 닉슨 에리히 호네커 김일성 딘 러스크 1월 17일 - 대한민국의 국무총리, 정일권. 1월 18일 - 대한민국의 목사, 재야운동가 문익환. 2월 7일 - 폴란드의 작곡가 비톨트 루토스와프스키. 2월 11일 - 오스트리아의 과학 철학자 파울 파이어아벤트. 2월 18일 - 대한민국의 신흥 종교 연구가 탁명환. 4월 5일 - 미국의 록그룹 너바나의 커트 코베인. 4월 16일 - 미국의 작가 랠프 엘리슨. 4월 22일 - 미국의 대통령 리처드 닉슨. 5월 1일 - 브라질의 자동차 경주 선수 아이르통 세나. 5월 19일 - 미국의 존 F. 케네디의 부인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 5월 25일 - 대한민국의 배우 조문정. 5월 29일 - 독일민주공화국의 지도자 에리히 호네커. 6월 15일 - 대한민국의 화가 박영선. 7월 2일 - 콜롬비아의 축구 선수 안드레스 에스코바르. 7월 8일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석 김일성. 8월 1일 - 대한민국의 영화배우 석광렬. 8월 19일 - 미국의 물리화학자 라이너스 폴링. 10월 24일 - 푸에르토리코의 배우 라울 훌리아. 11월 12일 - 미국의 육상 선수 윌마 루돌프. 11월 15일 - 구 소련의 정치인 블라디미르 이바시코. 11월 17일 - 대한민국의 만화가 신동우. 11월 28일 - 미국의 히피 운동가, 기업인 제리 루빈. 12월 20일 - 미국의 전 국무장관 딘 러스크. 경제학상 존 C. 하사니, 존 F. 내시, 라인하르트 젤텐. 문학상 오에 겐자부로. 물리학상 버트럼 N. 브록하우스, 클리퍼드 G. 셜. 생리학 및 의학상 앨프레드 G. 길먼, 마틴 로드벨. 평화상 야세르 아라파트, 시몬 페레스, 이츠하크 라빈. 화학상 조지 A. 올라. 음력월 월건 대소 음력 1일의양력 월일 음력 1일간지 1월 병인 대 2월 10일 정묘 2월 정묘 대 3월 12일 정유 3월 무진 대 4월 11일 정묘 4월 기사 소 5월 11일 정유 5월 경오 대 6월 9일 병인 6월 신미 소 7월 9일 병신 7월 임신 대 8월 7일 을축 8월 계유 소 9월 6일 을미 9월 갑술 소 10월 5일 갑자 10월 을해 대 11월 3일 계사 11월 병자 소 12월 3일 계해 12월 정축 대 1995년 1월 1일 임진
hanbit Daejeon EXPO.JPG|200px|섬네일|8월 7일 ~ 11월 7일 동안 열린 대전엑스포 를 기념하기 위해 건립된 상징 조형물인 한빛탑 . 1993년 은 금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1월 1일 - 체코슬로바키아가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분리, 독립하다. 1월 7일 - 충청북도 청주시에서 우암상가아파트 붕괴 사고가 일어나다. 1월 19일 - 슬로바키아와 체코, 유엔에 가입하다. 1월 20일 - 빌 클린턴, 미국 제42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다. 2월 25일 - 김영삼, 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다. 2월 26일 - 세계무역센터에서 폭탄 테러가 발생했다. 3월 19일 - 리인모가 북한으로 송환됐다. 3월 28일 - 부산, 구포역 열차 전복 사고로 인해 사망자 78명, 부상자 193명을 기록하였다. 4월 8일 - 마케도니아 공화국, 유엔에 가입하다. 4월 27일 - 1993년 잠비아 축구 국가대표팀 항공기 참사. 5월 21일 - 인도네시아 법원, 동티모르 독립투사 샤나나 구스망 유죄 인정해 종신형 선고했으나 그 후 20년으로 감형되다. 5월 28일 - 모나코와 에리트레아, 유엔에 가입하다. 6월 14일 - 서울특별시에서 한강 영화촬영 헬기 추락 사고 발생. 7월 26일 - 아시아나항공 보잉737 여객기가 목포공항 착륙 직전 해남군 야산에 추락하여 68명이 사망하다. 7월 28일 - 안도라, 유엔에 가입하다. 8월 5일 - 박은식, 신규식, 노백린, 김인전, 안태국 등 애국선열 5위의 유해, 상해에서 운구. 8월 9일 - 대한민국, 태풍 로빈이 상륙하다. 8월 28일 - 갈릴레오 호가 소행성 이다를 접근 통과하다. 9월 7일 - 대한민국, 국회, 행정부, 법원, 헌법재판소,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1급 이상 고위공직자와 국영기업체 상근 임원 등 1,166명의 재산을 일괄 공개하는 공직자 재산 공개를 단행하다. 9월 13일 - PLO의 야세르 아라파트 의장과 이스라엘의 이츠하크 라빈 총리가 오슬로 평화 협정에 서명하다. 9월 14일 * 대한민국 김영삼 대통령과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정상회담을 하다. *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 북미자유무역협정에 서명하다. 9월 23일 - 대한민국 김영삼 대통령, 새 대법원장에 윤관 대법관 겸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에 지명하다. 9월 26일 - 대한민국의 우리별 2호 위성, 남아메리카 프랑스령 기아나 쿠루 우주기지서 발사를 성공하다. 10월 3일 * 모가디슈 전투 소말리아 모가디슈에서 미국 특수부대원(레인저, 델타 포스로 구성된 특임대)와 모하메다 파라 아이디드 군벌 간에 전투가 벌어졌다. 이 전투로 미군 19명 사망, 76명 부상, 블랙호크 헬기 두 대가 격추당하여 추락하고, 소말리아인 사상자는 천여 명(추정)에 이르렀다. * 러시아 보리스 옐친 대통령, 반옐친 유혈시위와 관련 모스크바 일원에 국가비상사태 선포하다. 10월 4일 - 러시아 연방군이 러시아 최고의회 의사당에서 농성 중이던 보수파 세력을 무력 진압, 승리하였다. 러시아 보수세력은 교전 끝에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다. 10월 9일 - 내일신문 창간. 10월 10일 - 서해페리호 참사로 292명의 사망자가 발생하다. 12월 15일 -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이 타결되다. 4월 2일 - 기동전사 V 건담의 방영이 시작하다. 4월 10일- 삼성 라이온즈의 양준혁이 대구구장에서 쌍방울 레이더스와의 경기에 3번타자 1루수 로서 처음 출장하였다. 7월 9일 - 기아자동차에서 스포티지를 출시하다. 7월 27일 - 윈도우 NT 3.1이 출시되다. 8월 7일 - 대전직할시에서 대전엑스포가 개막하다. 8월 12일 - 대한민국,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긴급 재정명령 으로 금융 실명제를 실시하다. 8월 12일 - 쌍용자동차에서 무쏘를 출시하다. 8월 16일 - 퍼듀 대학의 학생이던 랜 머독에 의해 데비안 리눅스가 발표되다. 8월 20일 - 대한민국, 1994학년도 제1차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실시하다. 10월 7일 - 미국 소설가 토니 모리슨,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하다. 10월 30일 - 서울 지하철 3호선 양재~수서 구간이 개통되었다. 11월 7일 - 대전엑스포가 폐막하다. 11월 16일 - 대한민국, 1994학년도 제2차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실시하다. 12월 23일 - 백제금동대향로가 발굴되었다. 12월 31일 - 대한민국, 천연두를 예방접종에서 제외하다. 1월 1일 - 캐나다의 가수, 배우 아린 도일. 1월 2일 - 스웨덴의 축구 선수 욘나 안데르손. 1월 3일 - 대한민국의 전 가수 민희. 1월 4일 * 대한민국의 배우 윤서. * 미국의 배우 매디 해슨. 1월 5일 - 대한민국의 배우 박경혜. 1월 11일 - 대한민국의 바둑 기사 박정환 1월 12일 - 대한민국의 가수 디오 (EXO, EXO-K). 1월 15일 - 중국의 바둑 기사 탕웨이싱. 1월 16일 - 대한민국의 방송인 김혜인 1월 19일 - 대한민국의 래퍼 라임 (헬로비너스). 1월 24일 - 대한민국의 펜싱 선수 윤지수 1월 27일 - 프랑스의 축구 선수 야야 사노고. 1월 28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이태양. 1월 31일 - 대한민국의 양궁 선수 구본찬. 2월 1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심창민. 2월 2일 - 대한민국의 래퍼 피오 (블락비). 2월 4일 - 대한민국의 배우 배누리. 2월 9일 - 대한민국의 트로트가수 권민정. 2월 11일 - 대한민국의 가수 이대열 (골든차일드). 2월 12일 - 대한민국의 가수 우은미. 2월 13일 - 대한민국의 미스코리아 유지혜. 2월 15일 - 대한민국의 래퍼 라비 (빅스). 2월 16일 - 대한민국의 가수 김승아. 2월 19일 * 대한민국의 피겨스케이팅 선수 김민석. * 미국의 배우 밎 가수 빅토리아 저스티스. * 아르헨티나의 축구 선수 마우로 이카르디. * 오스트리아의 축구 선수 자라 차드라칠. 2월 23일 - 대한민국의 배우 정가람. 2월 27일 - 대한민국의 배우 공승연. 2월 28일 - 대한민국의 래퍼 씨잼. 3월 1일 - 대한민국의 가수 원호 (몬스타엑스). 3월 2일 - 대한민국의 가수 상도 (탑독). 3월 3일 - 대한민국의 전 가수 가온누리. 3월 5일 - 대한민국의 쇼트트랙 선수 신다운. 3월 9일 - 대한민국의 래퍼 슈가 (방탄소년단). 3월 10일 - 미국의 래퍼 프니엘 (비투비). 3월 11일 - 대한민국의 가수 백아연. 3월 15일 * 대한민국의 전 가수 유경. * 프랑스의 축구 선수 폴 포그바. 3월 16일 - 대한민국의 전 가수 효은. 3월 19일 - 벨기에의 축구 선수 테사 뷜라르트. 3월 23일 - 대한민국의 배우 이현우. 3월 27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이현동. 3월 30일 * 대한민국의 배우 지수. * 대한민국의 래퍼 송민호 (위너). 4월 1일 * 대한민국의 배우 노영학. * 일본의 가수 오카모토 게이토 (Hey! Say! JUMP).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변진수. * 대한민국의 프로게이머 장윤철. 4월 13일 - 대한민국의 배우 이설. 4월 16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임기영. * 미국의 피겨스케이터 미라이 나가스. 4월 17일 - 대한민국의 래퍼 캐스퍼. 4월 22일 * 대한민국의 쌍둥이 류효영, 류화영. * 스웨덴의 축구 선수 필리프 헬란데르. 4월 25일 - 프랑스의 축구 선수 라파엘 바란. 4월 27일 - 대한민국의 여자 축구 선수 여민지. 5월 2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이재율. * 중국의 전 래퍼 타오. 5월 5일 - 대한민국의 전 가수 시우. 5월 6일 - 대한민국의 배우 김다솜. 5월 7일 - 대한민국의 배우 윤소희. 5월 9일 * 대한민국의 가수 한동근. * 일본의 가수, 배우 야마다 료스케 (Hey! Say! JUMP). 5월 10일 - 일본의 배우 시다 미라이. 5월 13일 - 대한민국의 가수 민아 (걸스데이). 5월 16일 - 대한민국의 가수 아이유. 5월 19일 - 일본의 배우 카미키 류노스케. 5월 21일 * 미국의 가수 Aron (뉴이스트). * 대한민국의 가수 유지애 (러블리즈). 5월 28일 - 대한민국의 축구선수 연제민. 5월 30일 - 일본의 배우 후쿠시 소타. 6월 5일 - 노르웨이의 축구 선수 마리아 토리스도티르. 6월 6일 - 대한민국의 프로게이머 김기현 (삼성전자 칸). 6월 7일 - 대한민국의 전 가수 지연. 6월 9일 - 대한민국의 가수 현성 (보이프렌드). 6월 11일 - 일본의 성우 오오츠보 유카. 6월 12일 - 대한민국의 래퍼 다혜 (베스티). 6월 13일 - 카자흐스탄의 피겨스케이터 데니스 텐. 6월 15일 - 대한민국의 래퍼 비와이. 6월 16일 - 대한민국의 배우 박보검. 6월 20일 - 대한민국의 레이싱 모델 차정아. 6월 23일 - 대한민국의 배우 송지수. 6월 25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한현희. 6월 26일 * 미국의 가수 아리아나 그란데. * 스페인의 축구 선수 아만다 삼페드로. 6월 28일 * 대한민국의 배우 이태리. * 대한민국의 가수 대현 (B.A.P). 7월 3일 - 대한민국의 가수 로이 킴 7월 5일 - 대한민국의 배우 공다임. 7월 12일 - 대한민국의 가수 인성 (SF9). 7월 14일 * 스페인의 축구 선수 루벤 가르시아 산토스. * 아르헨티나의 축구 선수 플로렌시아 본세군도. 7월 18일 * 대한민국의 가수 태민 (샤이니). * 프랑스의 축구 선수 나빌 페키르. 7월 25일 - 대한민국의 프로게이머 이신형 (STX SouL). 7월 27일 - 대한민국의 배우 박규영. 8월 3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이성규. 8월 5일 * 대한민국의 농구 선수 허웅. * 일본의 배우 오고 스즈카. 8월 9일 - 대한민국의 래퍼 준Q (마이네임). 8월 10일 - 대한민국의 가수 혜정 (AOA). 8월 11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송우석.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이민호. 8월 12일 - 대한민국의 가수 루나 (f(x)). 8월 13일 * 대한민국의 가수 윤보미 (에이핑크).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임대한. * 일본의 축구 선수 요코야마 구미. 8월 14일 - 대한민국의 가수 공찬 (B1A4). 8월 17일 - 대한민국의 배우 유승호. 8월 18일 - 대한민국의 가수 정은지 (에이핑크). 8월 21일 - 대한민국의 레이싱 모델 연초아. 8월 23일 - 대한민국의 가수 혜린 (EXID). 8월 25일 - 대한민국의 레이싱 모델 연지은. 8월 30일 - 대한민국의 가수 오리. 9월 3일 * 대한민국의 가수 이성종 (인피니트). * 대한민국의 가수 주니엘. * 대한민국의 가수 소정 (레이디스 코드). 9월 4일 - 미국의 래퍼 마크 (GOT7). 9월 8일 * 대한민국의 가수 신종국 (남녀공학). * 스웨덴의 축구 선수 마그달레나 에릭손. 9월 10일 - 오스트레일리아의 축구 선수 서맨사 커. 9월 14일 - 대한민국계 미국의 모델 스테파니 리. 9월 15일 - 대한민국의 가수 손승연. 9월 19일 - 일본의 가수 와타나베 미유키. 9월 21일 * 대한민국의 가수 민아(AOA). * 대한민국의 골프 선수 박성현. * 크로아티아의 축구 선수 안테 레비치. 9월 29일 - 대한민국의 가수 홍빈 (빅스). 10월 3일 - 미국의 배우 타라 린 바. 10월 5일 * 대한민국의 가수 천지 (틴탑). * 대한민국의 가수 오혁 (혁오). 10월 8일 - 네덜란드의 축구 선수 리자 판 데르 모스트. 10월 12일 - 대한민국의 배우 서강준 (서프라이즈). 10월 15일 - 대한민국의 가수 노태현 (JBJ, 핫샷). 10월 16일 - 대한민국의 프로게이머 김유진 (웅진 스타즈). 11월 3일 - 대한민국의 가수 민혁 (몬스타엑스). 11월 11일 - 대한민국의 배우, 모델 장희령. 11월 15일 - 일본의 모델 이리에 사아야. 11월 16일 -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김민형. 11월 19일 - 네덜란드의 축구 선수 켈리 제이만. 11월 22일 - 대한민국의 가수 기현 (몬스타엑스). 11월 23일 * 대한민국의 배우 병헌. * 대한민국의 배우 강윤제. * 대한민국의 래퍼 영빈 (SF9). 11월 30일 - 일본의 가수, 배우 치넨 유리 (Hey! Say! JUMP). 12월 8일 - 미국의 배우 애나소피아 롭. 12월 10일 * 대한민국의 배우 박세준 . * 미국의 가수 케이티 김. 12월 17일 - 브라질의 축구 선수 베아트리스 자네라투 주앙. 12월 19일 - 대한민국의 가수 Young K (DAY6) 12월 20일 - 대한민국의 가수 혁진 (백퍼센트). 12월 25일 - 일본의 배우 타케이 에미. 오드리 헵번 보비 무어 보두앵 1월 20일 - 영국의 영화배우 오드리 헵번. 2월 5일 - 미국의 영화 감독, 각본가 조지프 L. 맹키위츠. 2월 24일 - 영국의 축구 선수, 축구 감독 보비 무어. 6월 23일 - 독일의 천문학자 빌헬름 글리제. 7월 31일 - 벨기에의 국왕 보두앵. 8월 11일 - 대한민국의 가수 김재기. 8월 28일 - 대한민국의 배우 변영훈. 10월 3일 - 미국 제 75연대 2군 소속 군인 게리 고든. 11월 4일 - 조계종 종정 성철. 11월 8일 - 러시아의 수학자 안드레이 니콜라예비치 티호노프. 11월 14일 - 대한민국의 사학자 김원룡. 11월 23일 - 대한민국의 시인 김광균. 12월 16일 - 일본의 정치가 다나카 가쿠에이. 경제학상 로버트 W. 포글, 더글러스 C. 노스 문학상 토니 모리슨 물리학상 러셀 A. 헐스, 조지프 H. 테일러 주니어 생리학 및 의학상 리처드 J. 로버트, 필립 A. 샤프 평화상 넬슨 만델라, F.W. 데클레르크 화학상 케리 B. 뮤리스, 마이클 스미스 음력월 월건 대소 음력 1일의양력 월일 음력 1일간지 1월 갑인 소 1월 23일 갑진 2월 을묘 대 2월 21일 계유 3월 병진 대 3월 23일 계묘 윤3월 소 4월 22일 계유 4월 정사 대 5월 21일 임인 5월 무오 소 6월 20일 임신 6월 기미 대 7월 19일 신축 7월 경신 소 8월 18일 신미 8월 신유 소 9월 16일 경자 9월 임술 대 10월 15일 기사 10월 계해 소 11월 14일 기해 11월 갑자 대 12월 13일 무진 12월 을축 소 1994년 1월 12일 무술
1930년 은 수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임시정부(臨時政府) 대한민국(大韓民國) 12년 1월 - 경성 충무로1가에 미쓰코시 경성지점 개업 1월 10일 - 부산 조선방직회사 노동자 2천여명이 대우개선을 요구하며 총파업 1월 16일 - 윤백남의 이 에 연재 개시 1월 17일 - 서울 시내 전 학생이 만세운동으로 인한 검거에 항거, 일제히 동맹휴학에 들어갔다. 1월 23일 - 평양 숭실전문학교, 숭실중학교 외 9개교가 만세 시위로 휴교 1월 24일 - 김좌진 장군이 북만주 산시에서 공산주의자에게 암살당함 2월 17일 - 대구 조선은행 폭탄사건의 장진홍이 사형 선고를 받음 2월 18일 - 미국 로웰 천문대의 클라이드 톰보, 명왕성 발견 3월 1일 * 이동녕, 김구 등이 한국독립당을 창립 * 경성방송국이 종래의 한국어, 일본어 혼영방송을 중단하고 한국어 방송을 오후 9시~11시로 단축 3월 12일 - 인도, 영국에 대한 저항운동으로 소금 사티아그라하 감행. 3월 30일 - 독일, 하인리히 브뤼닝, 수상에 임명. 1차 대통령 내각 출범 3월 31일 - 경성 단성사에서 최승희 창작무용발표회 공연 4월 -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의 이름을 카프 (KARF)로 약칭하기로 결정 4월 8일 - 근우회 전국대회 개최 금지령으로 불발 4월 16일 - 가 미국 지 편집장 기고문을 게재하였다는 이유로 제3차 무기정간을 당함 (~9월 1일) 4월 23일 - 홍난파 작곡집 간행 5월 - 한용운, 항일비밀결사단체 만당 조직 6월 9일 - 경성복심원에서 여운형에게 치안유지법 위반 명목으로 징역 3년 선고 7월 - 조선 전국에 폭우로 사망 766명, 실종 933명, 가옥유실 13,000호 등의 큰 피해 발생 (1930년 대폭우) 7월 13일 - 제 1회 FIFA 월드컵이 우루과이에서 열리다. (7월 30일까지) 7월 19일 - 중국 다롄 법원에서 신채호에게 징역 10년 선고 7월 21일 - 함경남도 단천군민 수천 명이 삼림조합에 반대하며 군청과 경찰서를 습격 7월 26일 - 만주 지린성에서 한국독립당 조직 (중앙위원장 홍진, 군사위원장 지청천) 8월 4일 -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 개편, 국무령에 김구 취임 8월 7일 - 평양고무 노동자 1,800여명이 임금인하 조치에 항의하여 동맹파업 9월 - 규장각 도서 15만 권이 경성제국대학으로 이관 9월 1일 - 이기영이 단편 를 에 발표 9월 2일 - 김동인이 역사소설 을 에 발표 9월 12일 - 부전강 수력발전소 저수지 완공 9월 14일 - 독일, 제5대 의회선거. 10월 1일 - 개성과 함흥이 부로 승격되어 개성부, 함흥부가 됨. 10월 5일 - 영국의 비행선 R101호 추락참사. 10월 14일 - 함흥공립상업학교 학생들이 격문을 살포하며 만세시위를 벌임 10월 18일 - 광주지법에서 광주 학생 항일운동에 관련된 독서회 김상환 외 25명에게 각각 징역 4-3년 선고 10월 22일 - 경성-강릉 간 시험비행 실시 10월 27일 - 일본 제국령 타이완 섬에서 우셔 사건이 발생 10월 29일 - 심훈이 을 에 연재 11월 2일 - 하일레 셀라시에 1세, 에티오피아의 황제가 됨 11월 9일 - 신간회 중앙집행위원회 소집, 김병로 위원장 선출 11월 12일 - 런던에서 제1회 영국-인도 원탁회의 11월 14일 * 중국 낙양 군관학교 한인특별반 설치. * 일본 하마구치 오사치 수상, 동경역에서 우익청년에 피격 부상. 11월 15일 - 일제에 의해 조선에 "조선미곡창고주식회사" (현 CJ대한통운) 설립. 11월 28일 - 당인리발전소 완공 12월 1일 **독일 브뤼닝 내각 비상조치령 발표, 디플레이션 경제 정책 채택. **지방제도 개정, 읍면제 및 도제 공포 12월 13일 - 조선어연구회가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을 결의 12월 20일 - 여수-시모노세키 간 정기연락선 취항 12월 25일 - 남선철도가 여수-광주 간 운행 개시 12월 31일 - 지린성고등법원에서 공산당 혐의로 체포된 재만교포 71명 중, 40여명에게는 사형 등 실형을 선고 1월 10일 - 대한민국의 만화가 길창덕. (→ 2010년) 1월 20일 - 체코의 시인 에곤 본디. (→ 2007년) 1월 23일 - 세인트루시아의 시인 데릭 월컷. (→ 2017년) 2월 19일 - 미국의 영화 감독 존 프랭컨하이머 (→ 2002년) 2월 28일 - 대한민국 정치인 노신영 3월 1일 - 프랑스의 작곡가 피에르 막스 뒤부아. (→ 1995년) 3월 6일 - 프랑스 출신의 미국 지휘자 로린 마젤. (→ 2014년) *3월 12일 - 남양알로에 창업자 방대룡. (→1983년) 3월 30일 - 호주의 가수 롤프 해리스. 4월 3일 - 독일의 연방수상 헬무트 콜. (→ 2017년) 4월 6일 - 지휘자이자 피아니스트 앙드레 프레빈. 4월 10일 - 클로드 볼링, 프랑스 배우. 4월 28일 - 미국의 정치인, 국무장관 제임스 베이커. 5월 11일 - 네덜란드의 컴퓨터 과학자 에츠허르 데이크스트라. (→ 2002년) 5월 31일 - 미국의 영화 배우, 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 7월 15일 -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 (→ 2004년) 7월 15일 - 미국의 수학자, 필즈상 수상자 스티븐 스메일. 8월 5일 - 미국의 우주인 닐 암스트롱. (→ 2012년) 8월 18일 - 한국의 시인 신동엽. (→ 1969년) 8월 25일 - 스코틀랜드의 영화 배우 숀 코네리. 8월 30일 - 미국의 투자가 워렌 버핏. 9월 5일 - 일본의 축구인 나가누마 겐. (→ 2008년) 9월 8일 - 베트남의 군인, 정치가 응우옌까오끼. (→ 2011년) 9월 12일 - 일본의 화학자 스즈키 아키라. 9월 19일 - 독일의 법학자 에른스트볼프강 뵈켄푀르데. 9월 23일 - 미국의 솔 가수 레이 찰스. (→ 2004년) 10월 10일 - 영국 극작가 해럴드 핀터. (→ 2008년) 11월 16일 - 나이지리아의 작가 치누아 아체베. (→ 2013년) 12월 3일 - 프랑스의 영화감독 장 뤽 고다르. 12월 9일 - 과테말라의 군인, 정치가 오스카르 움베르토 메히아 빅토레스. (→ 2016년) 1월 24일 - 한국 독립운동가 김좌진. (← 1889년) 3월 8일 - 미국 27대 대통령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 1857년) 3월 28일 - 일본의 기독교 사상가 우치무라 간조. (← 1861년) 5월 9일 - 한국의 독립운동가·교육자·사업가 이승훈(李昇薰) (← 1864년) 5월 13일 - 노르웨이의 탐험가, 과학자, 외교관, 프리티오프 난센. (← 1861년) 음력 6월 5일 - 한국의 독립운동가 장진홍. (← 1895년) 11월 2일 - 독일 지질학자 알프레트 베게너. (← 1880년) 문학상 :싱클레어 루이스 물리학상 찬드라세카 벵카타 라만 생리학 및 의학상 :카를 란트슈타이너 평화상 :나탄 셰데르블롬 화학상 :한스 피셔 음력월 월건 대소 음력 1일의양력 월일 음력 1일간지 1월 무인 소 1월 30일 경진 2월 기묘 대 2월 28일 기유 3월 경진 대 3월 30일 기묘 4월 신사 소 4월 29일 기유 5월 임오 소 5월 28일 무인 6월 계미 대 6월 26일 정미 윤6월 소 7월 26일 정축 7월 갑신 소 8월 24일 병오 8월 을유 대 9월 22일 을해 9월 병술 소 10월 22일 을사 10월 정해 대 11월 20일 갑술 11월 무자 대 12월 20일 갑진 12월 기축 소 1931년 1월 19일 갑술
1933년 은 일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임시정부(臨時政府) 대한민국(大韓民國) 15년 만주국(滿州國) 대동(大同) 2년 1월 10일 - 조선-일본 전화통화규칙 공포 1월 11일 - 일본 고베에서 독립운동가 조용하 검거 1월 12일 - 평양 평천리에서 고구려시대 대운하 유적 발굴 1월 13일 - 평안북도 중강진에서 혹한으로 영하 44도 기록 1월 30일 - 히틀러, 독일 수상에 취임. 2월 20일 - 조선총독부, 면화증산계획 발표 2월 27일 -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 3월 2일 - 영화 《킹콩》 개봉. 3월 4일 - 미국 32대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취임. 3월 5일 - 바이마르 공화국의 마지막 총선거. 3월 7일 **낙동강교 준공 **경성 주식시장이 경제공황으로 휴장 3월 8일 - 대구의학전문학교 창립 3월 11일 - 조선혁명당의 한중연합군, 싱징현성의 일본만주 연합군을 공격해 점령 3월 17일 - 중국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백정기, 이강훈, 이원훈이 주중일본공사 아라요시를 암살하려다 검거 3월 22일 - 나치 독일의 하인리히 히믈러, 다하우 강제수용소 설립. 3월 24일 - 독일에서 수권법이 가결. 3월 27일 - 일본이 국제 연맹 탈퇴. 4월 1일 **부산-봉천 간 특급열차 운행 개시 **동아일보, 조선중앙일보, 조선일보가 한글맞춤법통일안에 따른 철자법으로 발행 개시 4월 26일 - 독일에서 게슈타포 결성. 5월 10일 * 독일 노동전선 창립. 나치당이 조직한 단일 노동조합. * 조선 제1회 도의회의원 총선거 실시 6월 - 창간 6월 9일 - 영변농업학교 3학년생 46명이 학생본위 교육, 교내경찰 불허 등을 요구하며 동맹 휴학 6월 14일 - 경성부가 방공 연습을 위해 3일간 등화관제 실시 6월 18일 - 조선총독부가 압록강, 두만강 연안에 독립군의 출입을 감시하기 위해 국경감시단 설치 7월 7일 - 소록도 나환자촌 조성 7월 14일 - 독일에서 나치당을 제외한 정당 법으로 금지. 7월 15일 - 경성-도쿄 간 직통전화 개설 7월 22일 - 윌리 포스트가 최초로 세계 일주 비행에 성공 8월 - 이효석, 정지용 등 9명이 구인회 결성 8월 2일 - 평남중등학교장회의에서 약혼, 결혼자의 입학 불허 결정 8월 6일 - 수인선 철도 완공 8월 9일 - 조선고적,명승,보물,천연기념물보존령 공포 8월 17일 - 일본, 조선금융조합연합회령 공포. 8월 25일 **조선사방사업령 공포 * 창간 9월 1일 - 한국독립군, 왕칭과 닝안 일대의 삼림부대와 연합, 둥닝현의 일본군 공격 9월 19일 - 조선축구협회 창립. (초대회장 박승빈) 9월 27일 - 이광수가 장편 을 에 연재 10월 14일 - 독일이 국제 연맹을 탈퇴하다. 10월 29일 - 한글 학회가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제정하여 발표 11월 1일 - 경성 서대문에 최초의 양재학원인 김영애양재봉연구회 설립 11월 4일 - 조선어학회, 한글반포 487회 기념식에서 발표 11월 15일 - 중국 뤄양 군관학교에 한인특별반 설치 (책임자 지청천) 11월 25일 - 충남 공주 금강철교 준공 12월 6일 - 강원 춘천 소양교 준공 12월 26일 - 닛산 자동차 창립 12월 27일 - 신의주지법에서 조선 단일공산당사건의 조봉암에 징역 7년 선고 여운형이 조선중앙일보 사장으로 추대됨. 2월 18일 - 영국의 축구 선수, 축구 감독 보비 롭슨. 3월 5일 - 대한민국의 군인, 정치인 김복동. 3월 14일 - 영국의 배우 마이클 케인. 3월 22일 - 이란의 정치인 아볼하산 바니사드르. 4월 9일 - 프랑스의 배우 장폴 벨몽도. 5월 5일 - 스리랑카의 총리 라트나시리 위크레마나야케. 5월 24일 - 대한민국의 기업인 이창희. 7월 10일 - 미국의 정치인, 게리의 첫 흑인 시장 리처드 G. 해처. 7월 15일 - 대한민국의 외교관 홍숙자. 8월 1일 - 대한민국의 시인 고은. 8월 18일 - 프랑스의 전 축구 선수, 현 축구 감독 쥐스트 퐁텐. 9월 2일 - 베냉의 전 군인, 대통령 마티외 케레쿠 9월 6일 - 대한민국의 언론인 이규태. 9월 7일 - 대한민국의 코리아나화장품 대표이사 회장 유상옥. 10월 21일 - 스페인의 전 축구 선수, 현 축구 감독 프란시스코 헨토. 10월 28일 - 브라질의 전 축구 선수 가린샤. 11월 3일 - 영국의 영화음악 작곡가, 지휘자 존 배리. 11월 19일 - 미국의 앵커 래리 킹. 11월 23일 - 폴란드의 작곡가 크시슈토프 펜데레츠키. 12월 1일 - 일본의 만화가 후지코 F.후지오 12월 23일 - 일본 125대 천황 아키히토. 12월 31일 - 미국의 배우 에드워드 벙커. 1월 5일 - 미국의 제30대 대통령 캘빈 쿨리지. 8월 7일 - 한국 출신의 비행사 박경원. 문학상 물리학상 에르빈 슈뢰딩거, 폴 디랙 생리학 및 의학상 평화상 화학상 음력월 월건 대소 음력 1일의양력 월일 음력 1일간지 1월 갑인 소 1월 26일 임진 2월 을묘 대 2월 24일 신유 3월 병진 대 3월 26일 신묘 4월 정사 소 4월 25일 신유 5월 무오 대 5월 24일 경인 윤5월 대 6월 23일 경신 6월 기미 소 7월 23일 경인 7월 경신 대 8월 21일 기미 8월 신유 소 9월 20일 기축 9월 임술 대 10월 19일 무오 10월 계해 소 11월 18일 무자 11월 갑자 소 12월 17일 정사 12월 을축 대 1934년 1월 15일 병술
Bild 183-1990-1003-400, Berlin, deutsche Vereinigung, vor dem Reichstag.jpg|220px|섬네일|1990년 10월 3일. 동독의 다섯 주가 서독으로 편입되면서 41년간 분단되었던 독일 이 통일 되었다. 1990년 은 월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소련이 붕괴되는 냉전이 종식된 해이기도 하여 마침 독일과 예멘이 모두 통일된 해이다. 1월 22일 - 3당합당을 발표하다. 2월 9일 - 민주자유당을 창당하다. 3월 21일 - 나미비아 남아공으로부터 독립하다. 4월 23일 - 나미비아, 유엔에 가입하다. 4월 24일 - 미국 허블 우주 망원경을 발사하다. 5월 22일 - 예멘의 통일, 북예멘과 남예멘이 하나의 예멘으로 통일되다. 6월 23일 - 몰도바가 소련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다. 7월 1일 - 지난 1988년 10월 호송버스 탈주범에서 유일하게 붙잡히지 않았던 범인 김길호 가 1년9개월만에 서울 중랑구 면목동에서 마지막으로 검거됐다. 7월 18일 - 남아프리카 공화국 넬슨 만델라 출소. 7월 27일 - 벨라루스가 소련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다. 8월 2일 - 걸프 전쟁 이라크, 쿠웨이트 침공. 8월 13일 - 소련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 스탈린 치하 희생자 전원을 복권시키는 포고령을 발표하다. 8월 16일 - 걸프 전쟁 미국 해군, 및 이라크가 점령한 쿠웨이트 일대 해상 전면 봉쇄하다. 8월 22일 - 대한민국과 니카라과가 수교하다. 9월 10일 - 이란과 이라크, 이란-이라크 전쟁으로 단절됐던 양국 국교 재개 합의. 9월 14일 - 쿠웨이트 침공 이라크군, 쿠웨이트 주재 프랑스, 벨기에, 캐나다 대사관에 난입하다. 9월 18일 - 리히텐슈타인, 유엔에 가입하다. 9월 30일 - 대한민국과 소련 수교, 85년 만에 국교를 정상화하다. 10월 3일 * 독일의 재통일, 분단 41년 만에 서독과 동독이 하나의 독일로 통일되다. * 대한민국과 베냉, 수교. 10월 5일 - 윤석양 이병 양심선언 사건. 10월 13일 - 대한민국의 노태우 대통령,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다. 2월 15일 - 아시아자동차공업에서 록스타 출시. 2월 20일 - 현대자동차에서 스쿠프 출시. 3월 19일 - MBC FM4U 배철수의 음악캠프 첫 방송. 3월 31일 - 프로 야구팀 쌍방울 레이더스 창단되다. 4월 15일 - 가톨릭평화방송 라디오 개국. 5월 1일 - 불교방송 라디오 개국. 5월 8일 - 문화방송의 탐사보도 프로그램 PD수첩 첫방송. 5월 22일 - 윈도우 3.0이 출시되다. 6월 8일~7월 8일 - 1990년 FIFA 월드컵이 개최하다. 6월 11일 - 교통방송 라디오 개국. 9월 21일 - 고려대학교 이호왕 박사 팀과 녹십자사가 세계 최초로 유행성출혈열의 예방 백신을 개발하다. 9월 22일 - 제11회 베이징 아시안 게임 개막. 9월 25일 -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 제 1회 서울평화상을 수상하다. 9월 26일 - 대우자동차(한국GM의 전신)에서 에스페로 출시. 10월 7일 - 제11회 베이징 아시안 게임 폐막. 10월 15일 - 소비에트연방의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 냉전 종식을 위해 노력한 점이 인정되어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결정. 10월 25일 - 현대자동차에서 엘란트라 출시. 11월 1일 - 신승훈이 1집 《미소 속에 비친 그대》로 데뷔하다. 11월 10일 - 대한민국 최초의 축구 전용구장인 포항 축구 전용구장을 개장하다. 11월 14일 - 서울방송 설립. 11월 21일 - 닌텐도에서 가정용 게임기 슈퍼 패미컴을 발매하다. 12월 1일 - 영국과 프랑스를 잇는 채널 터널이 연결되다. 12월 18일 - 대한민국에서 1991학년도 학력고사 실시 12월 27일 - KBS 3TV 폐국 및 EBS TV(현 EBS 1TV), EBS FM 개국. 1월 1일 * 대한민국의 코메디언 안소미. * 대한민국의 레이싱 모델 은하영. 1월 3일 - 대한민국의 가수 소유찬 1월 4일 - 대한민국의 사회기관단체인 김동근 1월 5일 - 대한민국의 가수 양요섭 (비스트, 하이라이트). 1월 8일 - 스웨덴의 축구 선수 로빈 올센. 1월 9일 * 대한민국의 배우, 가수 남지현. * 대한민국의 프로게이머 이제동 (이블 지니어스).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박세혁. 1월 11일 - 대한민국의 배우 유일 (서프라이즈). 1월 12일 - 대한민국의 배우 유현지. 1월 13일 - 대한민국의 미스코리아 서설희. 1월 17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장성우. 1월 20일 * 대한민국의 가수 악동광행 (남녀공학). * 대한민국의 레이싱모델 오아희. 1월 24일 - 대한민국의 배우 김민석. 1월 25일 * 대한민국의 가수 준호 (2PM). * 대한민국의 가수 여은 (멜로디데이). 1월 26일 - 대한민국의 배우 김민영. 1월 28일 - 스웨덴의 축구 선수 칼요한 욘손. 1월 31일 - 일본의 가수 야부 코타 (Hey! Say! JUMP). 2월 2일 * 대한민국의 모델, 배우 홍종현. * 대한민국의 래퍼 정하나 (시크릿). 2월 4일 - 일본의 성우 토마츠 하루카. 2월 8일 * 대한민국의 배우 백진희. * 대한민국의 가수 세영 (크로스진). 2월 9일 - 대한민국의 프로게이머 신상호. 2월 10일 - 대한민국의 가수, 배우 수영 (소녀시대). 2월 11일 * 대한민국의 배우 고아라. * 대한민국의 가수 찬성 (2PM). 2월 12일 - 대한민국의 배우 박보영. 2월 13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홍상삼 (두산 베어스).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윤석영. * 프랑스의 축구 선수 마마두 사코. * 대한민국의 프로게이머 박지수. * 대한민국의 배우 정연주 2월 16일 미국의 싱어송라이터 위켄드. 2월 18일 * 대한민국의 배우 박신혜. * 대한민국의 배우 강소라. * 대한민국의 전(前) 프로게이머 김명운 . 2월 19일 - 대한민국의 배우 이엘리야. 2월 21일 - 대한민국의 배우 강하늘. 2월 23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조홍석. 2월 24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박해민.(삼성 라이온즈) 2월 27일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김영권 (광저우 에버그란데). * 대한민국의 프로게이머 이승석. * 대한민국의 농구 선수 김단비. * 스페인의 축구 선수 마르타 토레혼. 3월 2일 - 대한민국의 가수 이홍기 (F.T 아일랜드). 3월 4일 - 스페인의 축구 선수 프란 메리다. 3월 6일 - 대한민국의 가수 초아 (AOA). 3월 7일 - 대한민국의 가수 최종훈 (F.T 아일랜드). 3월 12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오지환. 3월 17일 - 일본의 가수, 배우 다마모리 유타. 3월 19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장민재. 3월 20일 - 대한민국의 가수 루민 (엠파이어). 3월 21일 - 대한민국의 가수 앨리스 (헬로비너스). 3월 23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김상수 (삼성 라이온즈). * 요크 공녀 유제니 3월 26일 * 대한민국의 전(前) 밴드 오원빈. * 대한민국의 배우 최우식. * 대한민국의 가수 시우민 (EXO, EXO-M). 3월 28일 - 대한민국의 래퍼 도끼. 3월 29일 - 대한민국의 프로게이머 염보성. 3월 30일 - 대한민국의 가수 이기광 (비스트, 하이라이트). 3월 31일 * 대한민국의 전 래퍼 방용국. * 대한민국의 배우 박연수. 4월 1일 - 대한민국의 가수 동림 (DMTN). 4월 2일 * 대한민국의 가수 소야. * 대한민국의 가수 재형. * 대한민국의 가수 엘린 (크레용팝). 4월 3일 - 네덜란드의 축구 선수 사리 판 페이넨달. 4월 5일 - 일본의 배우 미우라 하루마. 4월 6일 * 대한민국의 모델, 배우 서예지. * 대한민국의 개그맨 심문규 4월 7일 - 대한민국의 가수 한해 (팬텀). 4월 8일 - 대한민국의 가수 종현 (샤이니). (→ 2017년) 4월 9일 - 미국의 배우 크리스틴 스튜어트. 4월 14일 - 대한민국의 가수 정윤혜 (레인보우). 4월 15일 - 영국의 배우 엠마 왓슨. 4월 18일 - 대한민국의 가수, 배우 곽희성. 4월 19일 * 대한민국의 배우 임수향. * 대한민국의 가수 힘찬 (B.A.P). 4월 20일 - 중국의 가수 루한. 4월 23일 * 대한민국의 배우 태미. * 덴마크의 축구 선수 마티아스 예르겐센. * 이탈리아의 축구 선수 크리스티아나 지렐리. 4월 24일 - 대한민국의 배우 김태리. 4월 26일 - 대한민국의 미스코리아, 배우 김유미. 5월 5일 - 대한민국의 가수 송지은 (시크릿). 5월 7일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윤빛가람(제주 유나이티드). 5월 9일 * 대한민국의 가수 김정우 (남녀공학, 스피드). * 스페인의 축구 선수 헤니페르 에르모소. 5월 11일 - 대한민국의 래퍼 우태운 (남녀공학, 스피드). 5월 15일 - 대한민국의 가수 이종현 (씨엔블루). 5월 16일 * 영국의 배우 토머스 생스터. * 대한민국의 가수 김보경. 5월 17일 - 대한민국의 프로게이머 김영진 . 5월 18일 - 대한민국의 가수 허가윤 (포미닛). 5월 20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문선재. 5월 21일 - 대한민국의 배우 주새벽. 5월 22일 - 대한민국의 배우 장기범. 5월 25일 - 대한민국의 가수 치타. 대한민국의 레이싱모델 연다빈 5월 27일 - 대한민국의 프로게이머 손석희 (마이인새니티). 5월 29일 - 네덜란드의 축구 선수 셰리다 스피처. 5월 30일 - 대한민국의 가수 윤아 (소녀시대). 6월 5일 - 대한민국의 배우 차주영. 6월 11일 - 대한민국의 배우 고경표. 6월 12일 - 대한민국의 배우 곽정욱. 6월 13일 - 대한민국의 개그우먼 박소라. 6월 15일 - 대한민국의 배우 한유이. 6월 20일 - 대한민국의 레이싱 모델 서아란. 6월 21일 * 대한민국의 모델 유승옥. * 대한민국의 배우 고성희. 6월 22일 - 일본의 가수 이노오 케이 (Hey! Say! JUMP). 6월 23일 * 대한민국의 배우 임지연.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고원준. 6월 24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성영훈. 6월 27일 - 대한민국의 레이싱 모델 강하빈. 6월 29일 * 대한민국의 뮤지컬배우 손승원. * 대한민국의 레이싱 모델 조인영. 6월 30일 - 대한민국의 가수 엔 (빅스). 7월 2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안치홍 (KIA 타이거즈). *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의 미국 배우 마고 로비. 7월 4일 - 대한민국의 프로게이머 김윤중. 7월 5일 - 대한민국의 가수 경리 (나인뮤지스). 7월 10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강윤구 (넥센 히어로즈). * 대한민국의 배우 성준. * 대한민국의 배우 이시아. 7월 12일 * 대한민국의 가수 노지훈. **,대한민국의 쌍둥이 초아, 웨이 (크레용팝, 딸기우유). 7월 14일 - 대한민국의 SBS 아나운서 장예원. 7월 15일 - 대한민국의 프로게이머 신재욱. 7월 18일 * 대한민국의 가수 김지숙 (레인보우). * 프랑스의 방송인 로빈 데이아나. 7월 25일 -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이향. 7월 27일 * 대한민국의 배우 윤진이. * 대한민국의 래퍼 키디비. 7월 29일 * 대한민국의 배우 신세경. * 대한민국의 성우 김지율. 7월 31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최성민 (LG 트윈스). 8월 3일 - 대한민국의 가수, 뮤지컬 배우 강민경 (다비치). 8월 4일 - 크로아티아의 축구 선수 마야 요슈차크. 8월 5일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류원우. 8월 8일 - 체코의 축구 선수 블라디미르 다리다 8월 9일 - 대한민국의 배우 강별. 8월 10일 * 대한민국의 모델, 배우 이성경. * 대한민국의 가수 혜미 (피에스타). 8월 16일 - 일본의 성우 우치야마 코우키. 8월 17일 - 미국의 배우 레이철 허드우드. 8월 18일 -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남유식. 8월 21일 - 대한민국의 아프리카TV BJ 양띵. 8월 26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허경민. * 네덜란드의 축구 선수 만디 판 덴 베르흐. 8월 28일 * 스페인의 축구 선수 보얀 크르키치(FC 바르셀로나). * 대한민국의 레이싱모델 한소울. 8월 29일 - 대한민국의 가수 케빈 오. 8월 30일 - 대한민국의 프로게이머 진영화. 9월 3일 - 대한민국의 배우 이주우. 9월 5일 - 대한민국의 피겨 스케이팅 선수 김연아. 9월 6일 * 대한민국의 가수 하민우 (제국의 아이들). * 오스트레일리아의 래퍼 롬 (씨클라운). 9월 8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박건우. 9월 16일 - 대한민국의 가수 세리 (달샤벳). 9월 20일 - 대한민국의 배우 정혜인. 9월 24일 * 대한민국의 가수 태일 (블락비). * 대한민국의 배우 김다예. 9월 25일 - 일본의 피겨 스케이팅 선수 아사다 마오. 9월 29일 - 아이슬란드의 축구 선수 사라 비외르크 귄나르스도티르. 9월 30일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김승규. 10월 3일 - 스위스의 축구 선수 아나마리아 츠르노고르체비치. 10월 4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이재학 (NC 다이노스). 10월 5일 - 일본의 축구 선수 스가사와 유이카. 10월 6일 - 대한민국의 배우 한선화. 10월 7일 - 대한민국의 가수 천둥. 10월 8일 * 대한민국의 배우 박세미. * 대한민국의 래퍼 바람 (빅스타). 10월 9일 - 대한민국의 성우 임윤선. 10월 10일 * 대한민국의 배우 하연수. * 대한민국의 개그우먼 홍예슬. 10월 11일 - 대한민국의 가수 JOO. 10월 13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정주현 (LG 트윈스). * 대한민국의 배우, 모델 박환희. 10월 15일 * 대한민국의 가수 전지윤 (포미닛). * 대한민국의 배우 김소영. 10월 17일 - 일본의 축구 선수 구마가이 사키. 10월 18일 - 대한민국의 프로게이머 김구현 (프라임). 10월 20일 - 대한민국의 배우 이재준. 10월 23일 - 대한민국의 가수 김일도 (이천원). 10월 24일 - 독일의 축구 선수 일카이 귄도안. 10월 25일 - 대한민국의 배우 한가림. 11월 6일 - 중국의 배우 크리스. 11월 9일 -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석지연. 11월 10일 - 대한민국의 가수 레오 (빅스). 11월 12일 - 대한민국의 성우 손수호. 11월 14일 - 대한민국의 레이싱 모델 이봄이. 11월 15일 - 일본의 배우 혼고 카나타. 11월 22일 * 대한민국의 래퍼 장동우 (인피니트). * 대한민국의 배우 이유비. * 대한민국의 가수 서은광 (비투비). 11월 23일 - 대한민국의 가수 에디 킴. 11월 27일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임선주. 11월 29일 - 대한민국의 래퍼 이민혁 (비투비). 12월 5일 - 대한민국의 가수 강수빈. 12월 7일 - 네덜란드의 축구 선수 레나터 얀선. 12월 8일 - 대한민국의 가수 혜연 (베스티). 12월 10일 - 대한민국의 프로게이머 박수범. 12월 11일 - 중국의 래퍼 조이쉔 (유니크). 12월 12일 - 대한민국의 가수 승리 (빅뱅). 12월 14일 - 대한민국의 가수 비범 (블락비). 12월 18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정인욱 (삼성 라이온즈). * 대한민국의 골프 선수 안신애. 12월 19일 * 대한민국의 레이싱 모델 이지민. * 대한민국의 레이싱 모델 신세하. 12월 23일 - 대한민국의 가수 재효 (블락비). 12월 26일 - 웨일즈의 축구 선수 에런 램지. 12월 28일 - 대한민국의 희극인 이상은. 12월 29일 - 대한민국의 가수 알렌기범 (유키스). 12월 30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권희동. 12월 31일 - 캐나다의 피겨 스케이팅 선수 패트릭 챈. 산드로 페르티니 그레타 가르보 로알드 달 2월 4일 - 대한민국의 가수 장덕. (← 1961년) 2월 23일 - 이탈리아의 정치가 산드로 페르티니. (← 1896년) 3월 20일 - 소비에트 연방의 전 축구 선수 레프 야신. (← 1929년) 4월 15일 - 스웨덴의 영화 배우 그레타 가르보. (← 1905년) 4월 17일 - 미국의 인권 운동가 랠프 애버내시. (← 1926년) 4월 24일 - 대한민국의 기업인 정몽우. (← 1945년) 6월 27일 - 대한민국의 문학평론가, 불문학자 김현. (← 1942년) 7월 17일 - 오스트리아 소설가 돌레짤. (← 1922년) 7월 18일 -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 윤보선. (← 1897년) 8월 15일 - 러시아의 한국계 대중음악가 빅토르 초이. (← 1962년) 8월 16일 - 대한민국의 가수 장현. (← 1956년) 10월 3일 - 커티스 르메이, 미국 공군 군인. (← 1906년) 10월 14일 - 미국의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 (← 1918년) 10월 23일 - 프랑스의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 (← 1918년) 10월 27일 - 프랑스의 영화감독 자크 데미. (← 1931년) 11월 1일 - 대한민국의 가수 김현식. (← 1958년) 11월 23일 - 영국의 작가 로알드 달. (← 1916년) 12월 12일 - 대한민국의 변호사 조영래. (← 1947년) 경제학상 해리 마코위츠, 머턴 밀러, 윌리엄 샤프 문학상 옥타비오 파스 물리학상 제롬 I. 프리드먼, 헨리 W. 켄들, 리처드 E. 타일러 생리학 및 의학상 조지프 E. 머리, E. 도널 토머스 평화상 미하일 고르바초프 화학상 일라이어스 제임스 코리 음력월 월건 대소 음력 1일의양력 월일 음력 1일간지 1월 무인 소 1월 27일 임진 2월 기묘 대 2월 25일 신유 3월 경진 소 3월 27일 신묘 4월 신사 소 4월 25일 경신 5월 임오 대 5월 24일 기축 윤5월 소 6월 23일 기미 6월 계미 소 7월 22일 무자 7월 갑신 대 8월 20일 정사 8월 을유 대 9월 19일 정해 9월 병술 소 10월 19일 정사 10월 정해 대 11월 17일 병술 11월 무자 대 12월 17일 병진 12월 기축 대 1991년 1월 16일 병술
《 디자인 패턴 》(Design Patterns은 소프트웨어 설계에 있어 공통된 문제들에 대한 표준적인 해법과 작명법을 제안한 책이다. 이 분야의 사인방(Gang of Four, 줄여 GoF)으로 불리는 에리히 감마(Erich Gamma), 리처드 헬름(Richard Helm), 랄프 존슨(Ralph Johnson), 존 블리시데스(John Vlissides)가 같이 썼고, 한국어 판은 김정아의 번역으로 피어슨 에듀케이션 코리아를 통해 출판되었다. 책의 첫 번째 반절은 다양한 디자인 패턴의 정의에 할애하고 있고, 나머지 반절은 실제적으로 유용한 디자인 패턴들을 나열하고 있다. 책의 예제들은 객체지향적인 언어인 C++과 스몰토크로 제시되고 있다. 다음은 책에서 언급되고 있는 패턴의 리스트이다. 추상 팩토리 패턴 동일한 주제의 다른 팩토리를 묶어 준다. 빌더 패턴 생성(construction)과 표기(representation)를 분리해 복잡한 객체를 생성한다 팩토리 메서드 패턴 생성할 객체의 클래스를 국한하지 않고 객체를 생성한다. 프로토타입 패턴 기존 객체를 복제함으로써 객체를 생성한다. 싱글턴 패턴 한 클래스에 한 객체만 존재하도록 제한한다. 어댑터 패턴 인터페이스가 호환되지 않는 클래스들을 함께 이용할 수 있도록, 타 클래스의 인터페이스를 기존 인터페이스에 덧씌운다. 브리지 패턴 추상화와 구현을 분리해 둘을 각각 따로 발전시킬 수 있다. 합성 패턴 0개, 1개 혹은 그 이상의 객체를 묶어 하나의 객체로 이용할 수 있다. 데코레이터 패턴 기존 객체의 매서드에 새로운 행동을 추가하거나 오버라이드 할 수 있다. 파사드 패턴 많은 분량의 코드에 접근할 수 있는 단순한 인터페이스를 제공한다. 플라이웨이트 패턴 다수의 유사한 객체를 생성·조작하는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 프록시 패턴 접근 조절, 비용 절감, 복잡도 감소를 위해 접근이 힘든 객체에 대한 대역을 제공한다. 책임연쇄 패턴(Chain of responsibility) 책임들이 연결되어 있어 내가 책임을 못 질 것 같으면 다음 책임자에게 자동으로 넘어가는 구조 커맨드 패턴(Command Pattern 위의 명령어를 각각 구현하는 것보다는 위 그림처럼 하나의 추상 클래스에 메서드를 하나 만들고 각 명령이 들어오면 그에 맞는 서브 클래스가 선택되어 실행하는 것 해석자 패턴 (Interpreter Pattern) 문법 규칙을 클래스화한 구조를 갖는SQL 언어나 통신 프로토콜 같은 것을 개발할 때 사용 반복자 패턴 (Iterator Pattern) 반복이 필요한 자료구조를 모두 동일한 인터페이스를 통해 접근할 수 있도록 메서드를 이용해 자료구조를 활용할 수 있도록 해준다. 옵저버 패턴 어떤 클래스에 변화가 일어났을 때, 이를 감지하여 다른 클래스에 통보해주는 것 전략 패턴 (Strategy Pattern) 알고리즘 군을 정의하고 각각 하나의 클래스로 캡슐화한 다음, 필요할 때 서로 교환해서 사용할 수 있게 해준다. 템플릿 메서드 패턴 (Template method pattern) §상위 클래스에서는 추상적으로 표현하고 그 구체적인 내용은 하위 클래스에서 결정되는 디자인 패턴 방문자 패턴 (visitor Pattern) 각 클래스의 데이터 구조로부터 처리 기능을 분리하여 별도의 visitor 클래스로 만들어놓고 해당 클래스의 메서드가 각 클래스를 돌아다니며 특정 작업을 수행하도록 하는 것 중재자 패턴 (Mediator Pattern) 클래스간의 복잡한 상호작용을 캡슐화하여 한 클래스에 위임해서 처리 하는 디자인 패턴 상태 패턴 (State Pattern) 동일한 동작을 객체의 상태에 따라 다르게 처리해야 할 때 사용하는 디자인 패턴 기념품 패턴 (Memento Pattern) Ctrl + z 와 같은 undo 기능 개발할 때 유용한 디자인패턴. 클래스 설계 관점에서 객체의 정보를 저장 분류:컴퓨터 책 분류:소프트웨어 디자인 패턴 분류:1994년 책
1925년 은 목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임시정부(臨時政府) 대한민국(大韓民國) 7년 1월 * 만주에서 통의부를 기반으로 정의부 조직 * 김동인의 , 진영택의 이 에 발표 1월 13일 - 임시의정원, 헌법개정, 내정 정돈, 외교 실효화 등 새로운 방침 천명 1월 28일 - 서울에서 무산자동지회 발족 2월 21일 - 가 색채윤전기를 설치 2월 14일 - 김창제 등이 시사구락부 조직 3월 - 황신덕, 박순천 등이 도쿄에서 삼월회 조직 3월 10일 - 그리스의 축구 클럽 올림피아코스 FC 창단. 3월 15일 - 북만주 닝안 현에서 신민부 조직 3월 22일 - 황해남도 해주에서 민중예술 고취와 부르주아 예술지상주의 박멸을 목적으로 민예회 조직 3월 23일 - 대한민국 임시정부, 이승만 면직안 의결, 박은식을 임시 대통령으로 선출 3월 28일 - 윤백남프로덕션 작품 이 조선극장에서 상영 개시 3월 26일 - 북풍회와 화용회, 합동을 결의 3월 30일 * 임시정부가 임시헌법개정안을 결의해 대통령제에서 국무령 중심의 내각책임제로 전환, 헌법 적용범위를 국민 전체에서 광복운동자로 한정 * 일제의 고위 밀정 김달하, 중화민국 베이징에서 다물단원들에 의해 사살됨 4월 3일 - 서울에 중앙도서관 개관 4월 17일 - 조봉암, 김찬 등이 서울 아서원에서 조선공산당 창당 4월 18일 - 박헌영 등이 고려공산청년회 조직 5월 12일 - 치안유지법 우리나라에 확대 시행 5월 15일 - 백남훈, 안재홍 등이 역사연구를 목적으로 조선사정연구회 조직 5월 25일 - 러시아의 축구 클럽 FC 제니트 상트페테르부르크 창단. 6월 6일 - 조선총독부가 조선사편수회 설치 6월 11일 - 일본과 중국 간 미쓰야 협정 체결 6월 17일 - 제1회 전국중등학교야구연맹전 개최 6월 18일 - 아돌프 히틀러, 출간 6월 26일 - 찰리 채플린의 《황금광시대》 개봉 7월 1일 - 조선인변호사회가 한국인과 일본인의 차별 대우 철폐 결의 7월 4일 - 사천교와 수운교 합병 7월 5일 - 조선농구협회 창립 7월 21일 - 미국 테네시주에서 진화론 교육문제로 원숭이 재판이라고 불리는 재판이 열림. 7월 31일 - 을축년 대홍수로 697명이 사망 및 행방불명되고 10만 호의 주택피해가 발생 8월 1일 - 8월호 출간과 동시에 발행정지 8월 29일 - 한용운, 《님의 침묵》탈고 9월 * 나도향, 를 에 발표 * 홍난파, 창간 9월 24일 - 임시정부 신임 국무령에 이상룡 취임 9월 29일 - 김준연, 김현철, 유광열 등이 조선농민사 창립 10월 1일 - 간이국세조사 실시, 조선 총인구 1,952만 2,945명으로 집계 10월 13일 - 기독교계 학교 학생 전원이 신사 참배를 거부 10월 15일 * 서울역사 준공, 운수영업 개시 * 서울에 조선신궁 기공, 경성운동장 개장 11월 9일 - 나치 친위대 결성. 11월 16일 - 서울-봉천 간 전화선 개통 11월 22일 - 부산인쇄소 직공 200여명이 임금과 대우 문제로 파업 11월 26일 - 전남 나주에서 동양척식 소작인 1만여명이 일본 경찰과 충돌 12월 * 도쿄 한인유학생이 조선미술회 조직. * 박영희, 김기진 등이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KARF) 결성 12월 6일 - 경성부청사 상량식 거행 12월 16일 - 이영구가 이완용 암살을 시도했으나 미수에 그침 12월 31일 - 대한제국 화폐령 정지 1월 9일 - 미국의 배우 리 밴클리프. 1월 18일 - 프랑스의 철학자 질 들뢰즈 1월 26일 - 미국의 배우 폴 뉴먼. 1월 30일 - 노르웨이계 미국인 과학자 더글러스 엥겔바트. 3월 16일 - 멕시코의 화학자, 경구피임약 발명가 루이스 미라몬테스. 4월 3일 - 영국의 정치인 토니 벤. 5월 4일 - 헝가리의 전 축구 선수, 현 축구 감독 부잔스키 예뇌. 5월 16일 - 브라질의 축구 선수 니우통 산투스 5월 27일 - 우간다의 독재자 이디 아민. 6월 8일 - 미국 대통령 조지 H. W. 부시의 부인 바버라 부시. 6월 27일 - 대한민국의 성우 이춘사 7월 2일 - 대한민국의 영화감독 유현목. 7월 20일 - 프랑스 경제학자 정치인 자크 들로르. 7월 28일 - 아르헨티나의 축구 선수, 축구 감독 후안 알베르토 스치아피노. 8월 21일 - 아르헨티나의 군인, 정치인 호르헤 비델라. 8월 27일 - 영국의 축구 선수 - 냇 로프트하우스 9월 16일 - 미국의 음악인 B.B. 킹. 10월 3일 - 미국의 작가, 평론가, 영화인 고어 비달. 10월 11일 - 미국의 작가 엘모어 레너드. 10월 18일 - 대한민국의 영화감독 겸 미술가 신상옥(호적상 출생년월일은 1926년 9월 12일). 10월 29일 - 영국의 수학자, 필즈상 수상자 클라우스 로스. 11월 19일 - 폴란드 출신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 11월 28일 - 헝가리의 축구 선수, 축구 감독 보지크 요세프. 11월 29일 - 박정희 대한민국 전 대통령의 부인 육영수. 12월 6일 - 일본의 왕족 히가시쿠니 시게코. 3월 12일 - 중화민국의 혁명가 쑨원 7월 26일 - 독일의 수학자 고틀로프 프레게 11월 1일 - 한국의 학자, 독립운동가 박은식 문학상 물리학상 제임스 프랑크, 구스타프 헤르츠 생리학 및 의학상 평화상 화학상 음력월 월건 대소 음력 1일의양력 월일 음력 1일간지 1월 무인 대 1월 24일 무신 2월 기묘 소 2월 23일 무인 3월 경진 대 3월 24일 정미 4월 신사 대 4월 23일 정축 윤4월 소 5월 23일 정미 5월 임오 대 6월 21일 병자 6월 계미 소 7월 21일 병오 7월 갑신 대 8월 19일 을해 8월 을유 대 9월 18일 을사 9월 병술 소 10월 18일 을해 10월 정해 대 11월 16일 갑진 11월 무자 소 12월 16일 갑술 12월 기축 대 1926년 1월 14일 계묘
살만 루슈디 (2011년) 아흐메드 살만 루슈디 기사 (, 1947년 6월 19일 ~ )은 인도에서 태어난 영국의 소설가 · 수필가이다. 그는 봄베이(현재의 뭄바이)에서 태어나 자라났으며, 14살에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 케임브리지 대학교 킹스 칼리지에서 역사 전공으로 학사 학위를 받았다. 부커상을 세차례 수상한 《한밤의 아이들》과 1988년에 발표되어 격렬한 비판을 받은 《악마의 시》로 유명하다. 그의 서사 스타일은 신화와 환상과 현실이 혼합되어 나타나는 마술적 사실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기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의 작품 활동은 환상적인 이야기이자 과학 소설의 면모도 일부 보이는 《》로 시작한다. 이 작품은 발표 당시 독서 대중과 비평가들에게서는 외면을 받았다. 그러나 다음 소설인 《한밤의 아이들》은 그에게 문학적인 명예와 부를 가져다주었고, 현재까지 그의 최고의 작품으로 일컬어진다. 이 작품은 그 후로 지금까지도 인도 및 탈식민지 현실의 글쓰기 형태를 규정하는 중요한 작품이 되었다. 이 작품으로 그는 광고 카피라이터 일을 그만두고 전업 작가의 길로 들어섰으며, 소설은 이후 1993년에 부커 중의 부커상()을 수상했다. 또한 2008년에는 최고의 부커상()을 수상했다. 한밤의 아이들의 큰 성공 이후, 루슈디는 《수치》()라는 소설을 집필했다. 이 두 작품은 마술적 사실주의의 스타일을 차용하여, 이민자로서의 관점으로 쓰여진 것이다. 루슈디는 《아라비안 나이트》, 《마하바라타》, 《라마야나》 등의 동양 고전 문학뿐만 아니라 현대 문학으로부터도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한밤의 아이들》은 귄터 그라스의 《양철 북》과 같은 소설들에서 주제를 빌려 왔으며, 루슈디 자신도 그러한 소설에 영감을 얻어 글쓰기를 시작했다고 말한 바 있다. 《악마의 시》는 명백히 미하일 불가코프의 고전 러시아 소설인 《거장과 마르가리타》과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 〈Marriage of Heaven and Hell〉에 영향을 받았다고 작가 본인도 작품을 통해서 밝히고 있다. 《한밤의 아이들》과 《수치》()의 주제는 각각 인도와 파키스탄이다. 그의 후기작에서, 루슈디는 《무어의 마지막 한숨》()라는 작품을 가지고 스페인으로 작품의 무대를 확장했고, 인도와 이베리아 반도간의 상업/문화적인 연결을 탐구했으며, 《그녀 발아래 땅》()에서는 인도 사회와 미국 록앤롤의 상호 영향과 국경을 넘나드는 사랑에 대해 다루었다. 《한밤의 아이들은 루슈디의 작품으로 최고의 것이라는 찬사를 얻었다. 그러나 1989년 이후의 작품들은 《악마의 시》와 비슷한 관점에서 비판과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루슈디는 그의 작품들로 인해 부커상, 유럽 연합 문학상 등 수많은 다른 상들을 수상했다. 또한 그는 왕립문학협회와 의 회원이기도 하다. 1988년 《악마의 시》의 출판은 예언자 무함마드에 대한 불경스러운 묘사로 원리주의 이슬람 세계로부터 많은 비난을 불러 일으켰다. 1989년 2월 14일 이슬람 시아파 루홀라 호메이니가 그의 책을 "이슬람에 불손한" 것으로 규정하며 루슈디의 처형을 명령하는 격문인 파트와(fatwa)를 내걸었다. 더 나아가 호메이니는 그를 이슬람을 떠나길 시도하는 배교자로 선고하고 코란에 의해 죽음으로 처벌 받아 마땅하다고 비난했다. 이는 루슈디가 소설에서 이슬람교를 희화화하고 무함마드의 부인들을 창녀로 묘사한데서 기인한 것이었다. 호메이니는 모든 ‘독실한 무슬림’들에게 공개적으로 루슈디 뿐 아니라 책을 출판한 이도 처형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고 나서 2월 24일 호메이니는 루슈디의 목에 300만 달러의 현상금을 내걸었다. 루슈디는 그로부터 약 10년 가까이 영국의 보호 아래 숨어 살았다. 이 기간 동안, 인도와 파키스탄, 이집트에서의 폭동으로 인해 여러 명이 죽었다. 1990년 루슈디는 수필집인 《》를 내어 그에게 향한 비난을 진정시키고, 이슬람에 대한 존경을 표시하며 사과하고자 했다. 그러나 발의한 본인 이외에는 철회할 수 없는 파트와의 특성상, 이때는 이미 파트와를 내건 호메이니가 사망하였기 때문에 이란 성직자들은 기존의 선고를 철회하지 못했다. 1989년에 호메이니가 사망한 이후, 이란 정부는 공개적으로 루슈디에 대한 사형 선고를 "집행하지 않을 것"임을 공개적으로 천명했다. 이는 이란과 영국 간의 관계 정상화라는 더 큰 명분으로 동의가 가능했다. 그 후 루슈디는 숨어 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몇몇 이슬람 원리주의 그룹들은 그에 대한 응징 의지를 거두지 않고 있다. 그 예로 1999년 이란의 한 단체는 루슈디의 머리에 280만 달러의 현상금을 내걸었다. 《악마의 시》는 인도와 남아프리카 공화국 등에서 금서로 지정되었고, 영국의 몇몇 아시아인 거주지에서는 거리에서 불태워지기도 했다. 1991년에는 이를 일본어로 번역한 이가라시 히토시 교수가 살해당하는 일도 발생했다. 그리고 1993년에는 노르웨이 쪽 출판사 사장도 공격을 받아 부상당했다. 《》 《한밤의 아이들》() 《수치》()(1983) 《악마의 시》() 《》 《》 《》 《》 《분노》() 《광대 살리마르》() 《》 《》 《》 《》 《》 《》 — 세 번째 부인인 엘리자베스 웨스트와 공동 편집. 2007년 기사작위() 서임 루홀라 호메이니 악마의 시 표현의 자유 사상의 자유 이슬람 근본주의 작품 요약 및 인터뷰. 관련 링크 종합. http://www.kyobobook.co.kr/booklog/myBooklog.laf?memid 1&booklogId=452268 분류:1947년 태어남 분류:살아있는 사람 분류:이슬람교 관련 논쟁 분류:영국의 소설가 분류:영국의 작가 분류:영국의 수필가 분류:영국의 기사 분류:맨부커상 수상자 분류:인도계 잉글랜드인 분류:케임브리지 대학교 킹스 칼리지 동문 분류:에모리 대학교 교수 분류:영국의 무신론자 분류:테러 피해자 분류:미국에 거주한 영국인 분류:영국의 회고록 작가
벨라루스 공화국 (, 줄여서 벨라루스 (, 는 동유럽에 있는 내륙국이며, 수도는 민스크이며, 민족 구성은 동슬라브족에 속하는 벨라루스인이 다수를 차지하며, 우크라이나인, 러시아인도 있다. 이 나라는 러시아와 가장 유사한 민족이며, 러시아어도 사용한다. 동쪽으로는 러시아, 서쪽으로는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남쪽으로는 우크라이나, 북쪽으로는 라트비아와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수도는 민스크이다. 공용어는 벨라루스어와 러시아어이다. 1922년부터 1991년까지 벨로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었다. 벨라루스는 러시아 제국에 편입되었다가 1922년 소련에 편입됐다. 1990년 주권을 선언하고 1991년 독립을 선언했으며, 러시아·우크라이나와 함께 독립국가연합 창설을 주도했다. 빙하 작용을 받은 평원국으로 기후는 대서양의 영향으로 비교적 온화하다. 주민은 벨라루스인이 78%, 러시아인이 13%, 폴란드인 4%, 우크라이나인 3% 등이다. 산업이 특히 발달했으며 기계공업이 전체 공업생산의 30%를 차지하고 있다. 자동차, 트랙터, 농기계, 공작기계, 전기·무선기기 및 전자계산기 등이 유명하다. 반면에 석유, 가스 화학 공업은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다. 1992년 가격 자유화 조치를 단행했다. 벨라루스 사람들은 흰 옷을 즐겨입는 풍습이 있으며 전통 무늬가 새겨진 옷은 전통 의상이다. 또한, 가옥도 흰 색으로 칠하는 문화도 있다. 이 나라에서는 흰색은 상징색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벨라루스라는 국명은 하얀 루스 ()라는 표현에서 왔다. 러시아 제국 시절에는 러시아어로 벨로루시야 (Белоруссия, Belorussia)라고 불렀다. 또, 대한민국에서는 이로 인해 한때 백러시아 (白러시아)라고도 불렀다. 하지만, 실제 벨라루스는 White Ruthenia 를 의미한다. 1991년 9월 19일 당시 벨로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소비에트 최고회의는 러시아어 국명을 Республика Беларусь (Respublika Belarus ), 줄여서 Беларусь (Belarus )로 표기하며 다른 언어로 표기할 때에도 이 발음을 따르도록 한다는 내용의 법을 고시하였다. 이에 따라 영어 국명도 Belorussia에서 Belarus로 바뀌었다. 대한민국에서는 1991년 12월 10일 정부·언론 외래어 심의 공동위원회 제2차 회의에서 이 국명을 벨로루시 로 표기하기로 결정하였으나 벨라루스 정부의 요청에 따라 2008년 12월 11일 제82차 회의에서 표기를 벨라루스 로 수정하였다. 비슷하게 과거 러시아어를 따라 그루지야 로 불린 조지아 는 2010년 7월 해당국의 요청으로 국립국어원에서 조지아 로 바뀌었다. 러시아 제국과 소련 시절에는 현 벨라루스 지역을 가리키는 말로 하얀 러시아 라는 뜻으로 백러시아 라는 명칭을 쓰기도 했다. 벨라루스를 이를 때 하얀 러시아 라고 직역되는 명칭을 흔히 사용하는 경우로는 독일어의 바이스루슬란트(Weißrussland), 네덜란드어의 빗뤼슬란트(Wit-Rusland), 그리스어의 레프코로시아(Λευκορωσία) 등이 있다. 그러나 루스(Русь)와 러시아는 구별되는 개념이며 백러시아라는 명칭은 역사적으로 벨라루스 외에 다른 의미로도 사용된 적이 있어 오늘날에는 백러시아라는 명칭을 사실상 거의 잘 사용하지 않는다. 벨라루스는 국토의 거의 대부분이 평야 지대로 이루어져 있으며 인접국인 우크라이나와 다르게 바다가 없는 내륙국이며, 폴란드와는 비아워비에자 삼림을 공동으로 보호하고 있으며, 이 삼림은 유네스코 세계 자연 유산으로도 지정되었다. 드네프르 강이 국토 일부에서 조금 흐르고 있다. 대륙성기후이다. 단, 겨울에 대한민국보다 춥다. 6세기부터 슬라브족이 벨라루스 땅에 들어오면서 키예프 공국에 속하였다. 1240년 몽골의 침략으로 벨라루스 땅은 폴란드-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영토가 되었다. 그 후 폴란드 분할 때인 18세기 때 벨라루스 땅은 제정 러시아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제1차 세계 대전 때, 독일이 벨라루스 땅을 차지하게 된 후인 1918년 3월 25일 벨라루스 인민 공화국 이 선포되었다. 하지만 이는 실질적 국가의 모습을 갖추지 못한 채 1919년 1월 5일 붉은 군대가 민스크에 들어오면서 해체되었다. 벨라루스는 벨로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소비에트 연방(소련)의 일부가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때 나치 독일은 소련을 침략하면서 벨라루스 땅은 독일군의 점령하에 들어가고 벨라루스 중앙 라다라는 나치 독일의 괴뢰 정부가 세워졌다. 벨라루스인들의 게릴라식 저항은 많은 성과를 올렸지만 벨라루스 인구의 4분의 1이 희생되는 등 피해가 막심했다. 독일의 패전 후 벨라루스는 다시 소련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Lukashenko 2007.jpg|섬네일|벨라루스의 현 대통령 알략산드르 루카셴카 소련이 해체되면서 벨라루스는 1990년 7월 27일 독립을 선언하였다. 91년 12월 벨라루스는 독립국가연합의 회원국이 되었고 초대 대통령 알렉산드르 루카센카는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시키고 97년부터 러시아와 국가 연합을 결성하기로 하였다. 2001년에 루카셴카는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2004년에 루카셴카 대통령은 3선에 성공했다. 2007년에 러시아와 에너지 분쟁이 있었다. 2008년 9월 28일에 벨라루스는 총선을 시작했다. 하지만 총선에서 여당의 승리로 끝이 났다. 2010년 8월 3일에 루카셴카 대통령은 독립국가연합 정상들 앞에서 압하스 공화국과 남오세티야를 독립국으로 인정하겠다는 말을 했다. 2010년 12월 19일에 있었던 선거에서 루카셴코가 재선에 성공했다. 하지만 야당 지도자와 벨라루스 국민 수만명은 항의 시위를 하다 경찰에 체포되었고, 미국과 EU는 벨라루스에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2011년 1월 21일 벨라루스에서는 루카셴코의 4번째 대통령 취임식이 열렸지만, EU는 취임식을 보이콧하였다. 그리고 미국은 벨라루스에 대한 제재 조치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2012년 9월 23일에 하원의원을 뽑는 총선이 실시되었지만, 야당이 전면보이콧하면서 반쪽짜리 선거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그리고 선거에서 여당후보자들이 전부 당선되면서 야당후보는 한명도 당선되지 못했다. 하지만 러시아는 벨라루스의 총선을 지지했다. EU는 벨라루스에 대한 제재를 2013년 10월말까지 1년 더 연장하기로 했다. 1986년 4월 26일 인접국인 우크라이나의 프리피야티에 소재한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에서 폭발사고가 발생하였는데 당시 바람의 방향으로 인하여 낙진의 거의 대부분이 벨라루스로 떨어졌다. 이 때문에 벨라루스 전 국토의 4분의 1이 방사능 오염지역이 되었으며 수 많은 벨라루스 국민들이 피폭당했다. 2011년 4월 11일 벨라루스 민스크에서 2011년 민스크 지하철 폭탄 테러가 일어났다. 이 사고로 15명이 사망했고, 204명이 부상당했다. 벨라루스는 러시아, 우크라이나, 폴란드의 영향을 받았으며 전통 의상으로 햐안 바탕에 빨강색이 합쳐진 옷을 즐겨입는 문화가 있다. 그래서, 벨라루스 사람들은 가옥을 흰색으로 칠하기도 한다. 특히 전통 무늬가 들어간 옷은 벨라루스의 전통 적인 의상이다. 이 밖에도 러시아의 지배 영향을 받아서 국민이 러시아인과 비슷하기도 하다. 공용어는 벨라루스어와 러시아어이다. 1995년의 국민투표에 의해 러시아어가 정식으로 공용에서 추가되었다. 민스크에서는 대부분의 주민이 러시아어를 일상적으로 사용하며, 우크라이나어를 사용하는 주민도 있다. 2009년 조사에 따르면 인구의 60%가 벨라루스어가 모국어였지만, 주민의 대부분(70%)는 집에서 러시아어를 사용했다. 일부는 우크라이나어, 폴란드어 등 소수 민족어도 사용한다. 종교는 벨라루스 정교회가 거의 대부분이다. 하지만 구 소련의 영향으로 무종교인도 많다. 그 외 가톨릭교, 개신교, 유대교, 이슬람교 등을 믿고 있다(1997년 추계). 벨라루스 지도 정치체제는 대통령제이다. 1991년 당시에 스타니슬라프 슈시케비치가 벨라루스의 대통령으로 선출된 바 있으나, 3년 만에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슈시케비치는 알략산드르 루카셴카에게 자리를 넘겼다. 벨라루스는 이중 국적을 인정하는 국가이며, 벨라루스 국적자가 타 국적을 보유 할 경우 이중국적이 된다. 벨라루스 국적 획득 자격은 상대적으로 쉬운편이다. 벨라루스 헌법에 따르면, 징병제를 실시한다. 육군은 기갑 위주로 편성되어있다. 공군은 육군보다 전투력이 더 뛰어나다고 한다. 주민은 벨라루스인이 81.2%, 러시아인이 11.4%, 그 외 폴란드인, 우크라이나인이 7.4%, 유대인과 기타가 0.3%이다(1999년). 벨라루스는 서유럽과 러시아를 잇는 철도역이 있으며, 민스크 시는 교통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버스, 택시, 항공도 잘 정비되어 있다. 벨라루스 대통령 공식 사이트 벨라루스 정부 사이트 벨라루스 외무부 주 대한민국 벨라루스 대사관 주 벨라루스 대한민국 대사관 벨라루스 벨라루스 정보 분류:내륙국 분류:유엔 회원국 분류:러시아어권 분류:폴란드어권 분류:벨라루스어권 분류:슬라브어권 분류:독립국가연합 회원국
그랜드 피아노. 피아노 (piano)는 대표적인 건반악기로서 피아노포르테 (pianoforte)의 준말이다. 나무로 된 작은 망치가 강철 프레임에 고정된 피아노줄을 때려서 소리낸다. 18세기 초 이탈리아의 바르톨로메오 크리스토포리(Christofori, B.)가 고안하여 독일에서 완성하였다. 오늘날 널리 보급되고 있는 일반적인 유건타현(有鍵打絃)악기이다. 피아노가 발명되기 이전에는 쳄발로와 클라비코드가 가장 많이 보급된 건반악기였으나, 1709년에 이탈리아 사람인 쳄발로 제작가 바르톨로메오 크리스토포리(Bartolommeo Crist­ofori 1655-1731)가 쳄발로의 몸통(胴)을 써서 ‘피아노 포르테’라고 이름붙인 악기를 만들었다. 이것이 피아노의 효과적인 최초의 고안이어서, 그가 피아노의 발명자로 되어 있다. 쳄발로나 클라비코드는 음이 작아 실내연주용 외는 쓰이지 않던 것이었으나 이 발명은 현을 펠트로 된 해머로 쳐서 음을 내고, 댐퍼(펠트세로 음향을 정지시키는 것)를 붙인 것으로 거의 오늘날의 피아노와 다름이 없는 것이었다. 이로써 음은 힘차고 크게 되어 넓은 스테이지의 연주나 그 밖의 악기와 조화를 이루는 합주도 가능하게 되었다. 그간 독일이나 프랑스에서도 제조기술의 연구가 종종 있었고 18세기의 중엽(바흐나 헨델이 일생을 마칠 무렵)부터 각국에서 본격적으로 피아노를 제작하게 되었다. 그 뒤 많은 개량이 가해졌고 특히 현이 굵어졌으며 액션(손가락의 누른 키가 현을 칠 때까지의 장치)이나 댐퍼 등의 정교한 것 등이 나오게 되어 현재의 피아노에 이르기까지 진보하였다. 업라이트 피아노 피아노에는 그랜드형(Grand piano)과 업라이트형(Upright piano)의 두 가지 형태가 있고, 각각 소형에서 대형까지 여러 가지 크기가 있다. 그랜드형이 피아노 본래의 형태이며 이 형태는 쳄발로의 형태에서 생긴 것으로 음량도 크다. 피아노는 철골틀에 현을 매었고 그 틀의 뒷면에 울림판이 있어 해머로 친 현의 진동을 울림판으로 확대한다. 현은 피아노선이라고 하는 특수한 강철선으로서 낮은음부의 현은 그 선의 둘레를 구리선(銅線)으로 감아 낮은 음현일수록 굵고 높은 음현일수록 가늘다. 페달은 보통 3개가 있고 악기를 향해서 오른쪽은 보통 댐퍼 페달이라 하여 밟으면 전체 댐퍼가 일시에 현에서 떨어져서 두드린 음은 긴 여운을 가지게 된다. 왼쪽 페달은 그랜드와 업라이트와는 조금 구조가 다르나 음량을 약하게 하기 위하여 쓰인다. 피아노의 키의 수효는 52, 64, 76, 88 등 크기에 따라 여러 종류가 있으나 가장 일반적인 것은 88건이며 그 음역은 가2음에서 다5음까지로 7옥타브 이상이나 된다. 피아노의 주법은 19세기에 극도로 발달하여 황금시대를 맞이하였다. 베토벤 이후 카를 마리아 폰 베버, 슈베르트, 멘델스존 등을 거쳐서 쇼팽, 슈만, 리스트, 브람스 등의 대작곡가가 피아노 음악의 알차고 많은 작품을 남기고 있다. 베토벤의 음악은 작품구성엔 우수하나 피아노라는 악기의 독특한 장점을 완전히 살렸다고는 할 수 없다. 그에 비하여 쇼팽이나 리스트의 음악은 피아노의 특징적인 아름다움을 완전히 살리고 있으며 또 양손의 손가락의 운동이나 페달의 효과를 극한까지 발전시키고 있다. 재즈 피아노 오르간 분류:건반 악기 분류:현울림악기 분류:이탈리아의 발명품
C 는 1972년 켄 톰슨과 데니스 리치가 벨 연구소에서 일할 당시 새로 개발된 유닉스 운영 체제에서 사용하기 위해 개발한 프로그래밍 언어이다. 켄 톰슨은 BCPL언어를 필요에 맞추어 개조해서 "B"언어(언어를 개발한 벨 연구소의 B를 따서)라 명명했고, 데니스 리치가 이것을 개선하여 C 언어가 탄생했다. 유닉스 시스템의 바탕 프로그램은 모두 C로 작성되었고, 수많은 운영 체제의 커널 또한 C로 만들어졌다. 오늘날 많이 쓰이는 C++는 C에서 객체 지향형 언어로 발전된 것이다. 또 다른 다양한 최신 언어들도 그 뿌리를 C에 두고 있다. C는 실질적으로 모든 컴퓨터 시스템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설계된 프로그래밍 언어이다. 예를 들어 BASIC 등과는 달리 다양한 플랫폼에서 ANSI C의 정의에 따르는 비교적 동일한 구현이 가능하다. 모든 C 시스템에는 정규화된 표준 C 라이브러리가 존재한다. 이런 이유와 생성된 프로그램의 높은 성능이 아직까지도 C 언어가 사랑받는 이유 중 하나이다. 이는 반면 오늘날의 널리 쓰이는 거의 모든 운영 체제 커널이 C를 이용해 구현된 이유이기도 하다. 이처럼 C는 시스템 프로그램 개발에 매우 적합하지만, 응용 프로그램 개발에도 많이 쓰이기도 한다. 1963년 - ALGOL 60에서 CPL이 파생 1969년 - BCPL 개발 1970년 - B 언어 개발 1972년 - 벨 연구소 (Bell Laboratories) 에 있는 Dennis Ritchie가 B의 후속으로 C 개발 1983년 - 미국 국가 표준 협회(ANSI, American National Standards Institute) 에서 짐 브로디(Jim Brodie) 주축으로 X3J11 위원회 소집 1983년 12월 14일 - ANSI X3.159-1989 라는 공식명칭으로 C 언어 표준 지정 1999년 - C99 표준안이 ISO/IEC 9899:1999라는 명칭으로 출간됨 2000년 5월 - ANSI의 표준으로 C99가 채택됨 2011년 - 12월 8일 C11 표준안이 ISO/IEC 9899:2011라는 명칭으로 출간됨 C 언어의 개발자인 켄 톰슨과 데니스 리치. C 언어의 초기 개발은 1969년부터 1973년까지 4년에 걸쳐 AT&T 벨 연구소에서 이루어 졌으며, 데니스 리치의 말에 따르면, 가장 창의적인 작업이 이루어진 기간은 1972년이었다. 언어의 이름이 "C"인 이유는 그 특징이 "B" 언어에서 유래되었기 때문이며, 켄 톰슨에 의하면, B 언어는 BCPL 언어의 기본만 남긴 버전이다. 리치와 톰슨에 의해 초기에 PDP-7의 어셈블리 언어로 구현되었던 유닉스 운영체제의 개발과 C 언어의 기원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결국 그들은 유닉스 운영체제를 PDP-11로 포팅하기로 결정하였다. PDP-11의 기능의 일부, 특히 바이트 접근기능을 활용하지 못하는 B 언어의 부족함이 C 언어의 초기 버전의 개발을 이끌었다. 유닉스의 초기 PDP-11 버전은 어셈블리로 개발되었다. 1973년에 struct 자료형의 추가로, C 언어는 유닉스의 대부분을 C로 쓸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해 졌다. 유닉스는 어셈블리가 아닌 언어로 구현된 최초의 운영체제 커널 중의 하나였다.(더 빠른 사례는 PL/I로 쓰인 Multics 시스템, ALGOL로 쓰인 Burroughs B5000을 위한 MCP(Master Control Program)가 있다.) 1977년 경, 리치와 스티븐 C. 존슨이 유닉스 운영체제의 이식성을 향상시키기 위해, C 언어를 추가적으로 변경하였다. 존슨의 Portable C Compiler는 새로운 플랫폼에서의 C의 구현의 기초가 되었다. The C Programming Language 의 표지 1978년에 브라이언 커니핸과 데니스 리치가 The C Programming Language 라는 책의 초판을 출간했다. 커니핸과 리치의 앞 글자만 따서 C 프로그래머들에게는 "K&R"로 불리는 이 책은, 비공식적이지만 오랫동안 C의 규격과 같은 역할을 했다. 그리하여, 이 책에서 서술하는 C의 판이 "K&R C"란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고, 이 책의 2판에서는 후의 ANSI C 표준을 다루게 되었다. K&R에서 다음과 같은 기능이 등장한다. 표준 입출력 라이브러리 long int 자료형 unsigned int 자료형 형태로 변경 * i - 10 (i의 값을 10 차감)이 아닌, i = -10 (i의 값을 -10으로 설정)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에 중의성을 없애기 위해서 형태를 변경했다. C 언어 표준이 상대적으로 정적으로 남아 있었던 동안, C++는 표준화를 위하여 계속 진화하고 있었다. 1995년에 1990년의 C 표준에 대한 규약 수정안 1이 출판되었는데, 이는 약간의 세부 사항을 교정하고 국제적 문자 세트에 대한 보다 확장된 지원을 위한 것이었다. C 표준은 1990년대 후반에 더 개정되어, 1999년 ISO/IEC 9899:1999가 출간되었고, 여기서 명시한 규범을 흔히 C99라 부른다. 이는 기술적 교정에 의하여 현재까지 3번의 수정이 있었다. 국제 C 표준은 실무 그룹 ISO/IEC JTC1/SC22/WG14에 의해 관리되고 있다. 2011년 ISO/IEC 9899:2011이 출간되었고, 간단하게 C11라고 부른다. C11 나오기 전까지 개발 버전을C1X라고 부른다. 최종 개발 버전은 2011년도 4월 N1570이었다. C는 C 표준에 의해 규정되는 형식 문법을 갖고 있다. 포트란 77과 같은 언어와 달리, C 소스코드는 free-form 언어로써 형식 코드에 공백을 마음대로 넣을 수 있다. OS에서 응용 프로그램을 실행하거나, CPU의 프로그램을 실행하기 위해 여러가지 영역으로 나누어 메모리를 할당하고 이를 메모리에 올려 실행 한다. OS 주로 저장장치에서 실행 파일을 메모리에 올려 실행 한다. 따라서 프로그램에 필요한 메모리는 거의 RAM에 할당하고 실행 한다. CPU을 사용한 장치 OS가 없이 개발자가 설정한 메모리 배치에 따라 코드를 ROM/FLASH에 생산할 때 쓰고, 전원 공급시 실행 한다. C 언어로 개발된 프로그램은 메모리 입장에서 다음과 같은 할당 영역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정적 변수 static을 이용하여 정적 변수임을 명시하고, 단 한 번만 초기화되며 프로그램이 시작할 때 생성되어 종료될 때까지 유지된다. 동적 변수 힙(HEAP)영역을 이용하여 할당 함수를 호출하여 변수 영역을 할당 받아 사용하고, 해제 함수에 의해 반납한다. 자동변수 함수나 블록({ } 이용) 안에서 선언하는 지역변수를 사용하면 스택(STACK) 영역에서 자동 할당을 받는다. CPU을 사용하여 개발하여 장치에 넣어 코드를 실행할 때, 힙 영역을 많이 사용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필요 없다면 메모리 공간을 할당할 필요도 없고 힙관리 프로그램 코드(함수를 개발툴에서 라이브러리 형태로 제공)도 필요하지 않는다. 만약 malloc 등의 함수를 사용하면, 힙 영역을 사용하겠다는 의미 이기 때문에 힙 영역을 개발자가 선언하여 관리 해야 한다. 이 때 힙관리 프로그램 코드는 자동으로 링크 된다. 물론 저 사양의 CPU 경우, 이 함수를 제공하지 않을 수 있는 컴파일러도 있을 수 있다. C 언어 작성된 코드는 컴파일 과정과 링크 과정을 거치면 실행 파일이 만들어진다. 변수는 여러가지 특성이 있다. 초기치를 갖는 변수 초기치가 없는 변수 상수 데이터 #include #include #include #include int count = 4; char name50 = "홍길동"; char tel256; /////////////////////////////////// int getTel(char *pstr) { static char buff1024; gets(buff); strcpy(pstr, buff); return strlen(pstr); } int main(int argc, char **argv) { char *paddr; printf("이름= %s\n", name); getTel(tel); printf("전화 = %s\n", tel); paddr = (char*) malloc(1024); if (!paddr) return -1; { // 블록 시작 int scount; char *piaddr = paddr; for (scount = 1024;scount > count;scount--,piaddr++) { *piaddr = getch(); // getch 함수는 표준함수는 아니다. putchar(*piaddr); if (*piaddr == \r ) break; } *piaddr = 0; printf("주소 = %s\n", paddr); } // 블록 끝 free(paddr); return 0; } 이 프로그램 예에서 변수 별로 분리하면 다음과 같은 특성의 변수로 나눌 수 있다. 초기치 변수 int count = 4; char name50 = "홍길동"; 초기치 없는 변수 char tel256; static char buff1024; 상수 "이름 = %s\n" "전화 = %s\n" "주소 = %s\n" 스택 (또는 레지스터) char *paddr; char *pstr; int scount; char *piaddr; 힙 (heap) paddr(malloc()에서 할당된 공간) Notes 각 특성별로 나누어 그룹을 지어 메모리에 배치 하는데, 이것을 링커가 한다. 이렇게 그룹은 나누는 것을 세그먼트(SEGMENT) 또는 섹션(SECTION)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위의 그룹은 가장 기본적인 내용만을 표시 한것이다. CPU와 컴파일 마다 다르다. 어떤 컴파일러는 더욱 세밀히 하기도 한다. 그리고 각 세그먼트 이름도 다르다. Visual Studio의 맵 이름 예 변수형태 SEGMENT 초기치 변수 DATA 초기치 없는 변수 BSS 프로그램 코드 TEXT 상수 CONST 힙 HEAP 스택 STACK 컴파일마다 각 세그먼트 이름과 구조가 다르지만, 예를 들어 중요한 세그먼트 만 표시 하였다, TEXT와 CONST는 ROM/FLASH에 배치해도 되는 변하지 않는 세그먼트이므로 같은 부류이고, CPU를 설계하고 코드를 직접 쓰는 경우 ROM/FLASH을 이용한다. 거의 모든 툴에서 이 맵을 파일로 만들어 준다. 물론 옵션으로 설정을 해야하는 경우도 있지만 구조를 얻을 수 있다. 함수와 변수의 위치와 이름 등을 확인할 수 있고, 각각의 세그먼트 크기 등의 데이터를 알 수 있다. 실제 CPU을 다루는 C 언어에서 이런 정보는 중요하다. 내가 사용하는 MCU의 메모리는 얼마나 사용하는지 등을 확인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C 언어 함수는 표준함수가 있고, 개발 툴에서 제공하는 함수가 있다. 여러가지 부류가 있고 특성 별로 나누어 lib 파일로 코드를 제공하고 헤더파일로 선언을 알 수 있다. C 표준 라이브러리는 함수 형태와 기능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개발툴별 같다는 특징이 있다. 파일명 출처 설명 assert 매크로, 논리오류 및 디버깅 시 오류 형 등 지원한다. C99 복소수 처리용 세트. 초기의 대-소 문자 변환 함수 제공 함수에서 발생하는 오류 형태 변환등의 오류처리. C99 부동소수점 환경 제어. 부동소수점 특성 정의. 두 숫자 사이의 최소 차이(_EPSILON), 숫자의 최대 자리수(_DIG), 숫자의 범위의 표현(_MIN, C99 정수형 변수의 정확한 변환. NA1 ISO 646 문자열 처리. 정수형의 특성 정의, 정수 숫자 범위(_MIN, 로케일( 관련 상수. 국제어 처리를 위한 적용. 수학 함수. setjmp 와 longjmp 매크로 선언. 다양한 예외 처리 제어. 아규먼트 변수 처리. va_start, va_arg, va_end 함수 등. C99 논리 변수. C99 정수형 변수의 각종 정의/선언. 유용한 형과 매크로 정의/선언. C 언어의 입출력 제공. printf 등이 포함 되어 있다. 문자열 조작. C99 수학 함수에서 일반 형 변환 관련. 시간과 날짜 변환 함수. NA1 국제어 등의 처리를 위한 확장 문자(문자열 처리. NA1 확장 문자 처리. 유닉스 계열(리눅스)의 시스템에서 주로 사용하는 C/C++ 언어 개발 도구이다. 리눅스의 OS을 제 컴파일하거나, 각종 응용 프로그램 개발에 사용한다. 또한 X-Windows의 개발 도구로도 사용할 수 있다. 전자 장치의 개발 시 임베디드 OS 포팅에서, 리눅스 커널이나 리눅스 커널 기반으로 하는 OS 커널 자체를 개발하는 도구로 사용한다. 리눅스 커널 기반 임베디드에서 실행되는 응용 프로그램 역시 gcc을 많이 사용한다. 여러 파일들끼리의 의존성과 각 파일에 필요한 명령을 정의함으로써 프로그램을 컴파일할 수 있으며 최종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는 과정을 서술할 수 있는 표준적인 문법을 가지고 있고, 구조로 기술된 파일(주로 Makefile이라는 파일명)을 make가 해석하여 프로그램 빌드를 수행하게 된다. gcc을 윈도에서 실행 할 수 있도록 재 포팅한 것이다. Cygwin에서 분화 된 gcc 기반 개발 라이브러리 이다. 이클립스는 다양한 언어와 다양한 OS에서 실행되는 IDE이다. 따라서 여러가지 상황에서 다양하게 적용할 수 있다. Eclipse IDE for C/C++ Developers C/C++언어를 제공하는 IDE으로 리눅스의 경우 기존의 gcc을 사용할 수 있도록 연결 설정만 하면 된다. MinGW 윈도에서 gcc와 연결하여 C/C++ 언어를 사용하여 프로그램을 개발 할 수 있다. MinGW는 다양한 언어를 지원하므로 다른 언어로도 이클립스와 연결하여 개발 도구로 사용할 수 있다. 마이크로소프트에서 개발, 판매하는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 환경에서 작동하는 개발도구이다. 현재는 C 뿐만 아니라 C++, 자바, C# 등 다양한 언어를 지원하고 있지만 초기의 마이크로소프트 개발 도구는 C 언어로 부터 출발 하였다. 비주얼 스튜디오로는 윈도우 API를 이용한 GUI 프로그램, 명령 줄 인터페이스 환경으로 실행되는 Windows Console Application, 윈도우 서비스, 동적 링크 라이브러리 등의 형태로 소프트웨어를 개발할 수 있고, 최근 버전에서는 모바일 응용 소프트웨어 개발도 지원한다. 비주얼 스튜디오에서 사용 가능한 소프트웨어 개발 키트와 라이브러리는 다음과 같다. 표준 C에서 정의하는 라이브러리 함수를 거의 대부분 그대로 사용할 수 있다. 윈도우 운영체제의 API를 사용할 수 있게 해주는 툴킷이다. 응용프로그램에서 사용 가능한 윈도우 운영체제의 기능은 Windows SDK를 통해 제공된다. 초기에는 C가 기본 언어였으나, 최근에는 C#, C++ 등의 언어 툴킷도 제공한다. 예전에는 Win32 SDK라고 불리었다. 윈도우 개발에 필요한 Windows API를 클래스로 래핑한 C++ 라이브러리이다. 윈도우에서 주로 게임 등을 개발할 때 사용하는 툴킷 이다. 고속의 화면 제어, 음성지원, 3D 등을 지원한다. 보통 소프트웨어 개발에서 디버깅의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두가지 이다. # IDE를 통해 소스 수준에서 디버깅 한다. 일명 BREAK POINT 를 설정하면 그 위치에서 멈추고 해당 상황을 파악할 수 있다. 가장 중요한 파악 대상이 변수의 값으로 표시 화면에 해당 변수의 형과 맞게 변수의 값을 표시 한다. 또한 줄단위로 실행하기, 함수로 들어가기와 나오기 등 IDE에 따라 구성이 다양하다. # 내부 변수나 기타 상황을 printf 형태의 함수를 UART, 네트워크, USB 등과 연결하여 출력함으로써 프로그램 상황을 표시 할 수 있다. 보통 IDE 처럼 다양한 구성이 불가능 할 때 많이 사용한다. ## 리눅스 커널의 경우 printfk 함수로 출력하면 정해진 출력 메시지 파일태로 표시할 수 있다. ## MCU와 같은 전자장치의 개발에서 개인용 컴퓨터 처럼 성능이 좋은 IDE을 만들기 쉽지 않다. 따라서 저 성능의 IDE을 사용하거나 UART등으로 상황을 출력해서 디버깅 하는 방법을 사용할 수 있다. 구성이 간단해서 개발 소스에 printf 형의 메시지 출력을 추가하면 된다. 개발자가 직접 해야하는 것이 번거롭다. GCC을 기반으로 하는 디버깅 도구이다. 따라서 유닉스 계열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실행된다. GCC 옵션을 디버깅이 되도록 설정하면 디버깅 테이블을 만든다. gdb 실행 중에 이것을 사용한다. GDB을 실행하여 응용 프로그램을 실행하면서 break, 변수, 함수 등의 디버깅을 할 수 있다. GCC에서 gdb는 서버 구조를 사용할 수 있다. gdb-server을 설치하면 네트워크를 통해 디버깅 환경을 구성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임베디드 개발 시 리눅스 커널을 포팅하고, 해당 리눅스 시스템에 gdb-server를 설치하면 다른 환경에서 이를 통해 응용 프로그램을 디버깅 할 수 있다. 임베디드의 많은 경우 자신의 시스템에서는 디버깅이 만만치 않다. 따라서 원격으로 gdb의 실행 결과를 전송 할 수 있고 이 정보를 바탕으로 이클립스와 같은 IDE와 연동할 수 있다. 보통 리눅스 기반의 임베디드 개발 환경은 이클립스 C++를 사용할 수 있는데, 이것과 결합할 수 있다. 원격 디버깅 모드는 리눅스 커널에 사용되는 소스 수준의 디버거인 KGDB에서도 사용된다. KGDB를 사용하면 커널 개발자는 일반 응용 프로그램과 마찬가지로 커널을 디버깅할 수 있다. 비주얼 스튜디오나 이클립스 등의 도구 들은 기본적으로 디버깅 방법을 제시 한다. 이클립스 디버깅은 GDB와 연동해서 구성할 수 있다. #include // C 표준 라이브러리 stdio.h 를 include 한다. 이것으로 printf 함수등을 사용할 수 있다. int main(void) // 프로그램 호출시 가장 먼저 실행되는 함수 { printf("hello, world"); // 표준출력에 hello, world라는 문자열을 출력한다. return 0; // 0을 반환하고 main(void) 종료. } 이 프로그램은 표준출력(stdout)으로 hello, world를 출력한다. B (프로그래밍 언어) C99 C11 C 언어의 문법 * C 언어 변수 * C 언어 포인터 C++ 오브젝티브-C comp.lang.c FAQ 한국어 번역판 joinC C 언어 소개 Ritchie, Dennis M. The Development of the C Language. History of Programming Languages-II. Second History of Programming Languages conference, Cambridge, Massachusetts, April, 1993. . Richard M. Stallman Using and Porting the GNU Compiler Collection , Free Software Foundation, Richard M. Stallman Using Gcc The Gnu Compiler Collection Reference , Free Software Foundation, Brian J. Gough An Introduction to GCC , Network Theory Ltd., 분류:절차적 프로그래밍 언어 분류:ISO 표준 분류:미국의 발명품 분류:1972년 개발된 프로그래밍 언어 분류:C 프로그래밍 언어 계열 분류:시스템 프로그래밍 언어
김종필 (金鍾泌, 1926년 1월 7일 ~ 2018년 6월 23일)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그는 박정희가 5.16 군사 정변을 일으킬 당시 예비역 대한민국 육군 중령으로 정변에 참여했다. 1951년 2월 박상희의 장녀 박영옥과 결혼했으며 1963년 육군 준장으로 진급 후 예편했다. 9선 국회의원으로 최다선 국회의원 출신이며,1971년 박정희정권기 제11대, 김대중정부기 31대 DJP 연정 국무총리를 역임하였다. 김영삼, 김대중과 함께 3김 이라 불리며 대한민국의 정치를 이끌었다. 민주공화당 총재와 신민주공화당 총재를 거쳐 자유민주연합 총재를 지낸 그의 주요 거주지는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중구 신당동이었다. 육군사관학교를 8기로 졸업하고 1961년 5.16 군사 정변의 중심 인물로 초대 중앙정보부(현국정원)를 창설해 부장에 취임해 활약했지만, 공화당의 내분으로 정계를 은퇴했다. 1971년 공화당 부총재직을 맡고 제8대 국회의원에 당선됐으며, 같은 해 6월 국무총리에 취임함으로써 정계에 복귀후 5년6개월간 최장수 총리를 지내며, 대덕연구단지, 민속촌등을 기획했다. 1979년 공화당 총재를 맡았으나,1981년 신군부의 압력으로 정계 은퇴 후 미국으로 건너갔다. 1987년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하며 정계에 복귀하였다. 1990년 3당합당에 참여하여 민주자유당 최고위원으로 활동하였다. 하지만 1995년 탈당하고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하고 초대 총재가 되었다. 2004년에 제17대 총선에서 낙마하고 정계를 은퇴했다. 제3공화국과 제4공화국 당시 제2인자였으며 김영삼, 김대중, 이철승과 함께 박정희의 후계자 또는 잠재적 대안자로 거론되기도 했다. 1971년 6월 4일부터 1975년 12월 18일까지 대한민국의 제11대 국무총리를, 1998년 3월 3일부터 2000년 1월 12일까지 제31대 DJP 연정 국무총리를 역임했다. 2018년 6월 23일에 숙환으로 인해 향년 9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김종필은 1926년 1월 7일에 충청남도 부여에서 7남 중 5남으로 태어났다. 가야의 시조 김수로왕의 72대손이자 안경공파(安敬公派) 김영정의 22대손이었다. 그의 집안이 충남 갑부로 성장한 것은 그의 할아버지 김현택이 갑부로 성장하여 가세를 일으킨 것이며, 김현택은 부지런해 생전에 쌀 2000섬 지기가 됐다. 3대 독자였던 아버지 김상배는 토지측량사를 지냈다. 토지등록 분규 등을 잘 해결해 신망을 얻은 후 규암면장과 부여면장으로 지역사회의 유지가 됐으며, 어머니 이정훈은 전주 이씨로 아버지보다 12살 연하였다. 아버지 김상배는 일제 강점기 당시 부여군 규암면장을 지냈다. 아버지는 항일 독립운동가들을 집안에 숨겨주고 돌봐줬다. 의열단 단원인 유석현 등은 1921년 일본 경찰에 쫓기다가 김상배의 집에 피신했다. Jong-rak 1961.jpg|섬네일|right|160px|셋째 형 김종락, 그 역시 5.16 군사 정변에 참여하였다. 그의 부모는 모두 아들만 7명을 두었다. 위로 4명의 형과 아래로 2명의 동생이 있는데 큰형 종호는 40대의 나이에 공무원 시험을 거쳐 서울 종로구청 주사로 근무했고, 1970년에서 1980년까지 중앙곡물협회 회장직을 맡았다. 둘째 형 종익은 민주공화당 6·7·8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막내동생 종식은 중학생 무렵 한국 전쟁 중에 실종됐다. 그 뒤 김종필은 실종된 막내동생을 오랫동안 찾았으나 찾지 못했고, 그의 측근인 보좌관 김석야는 2000년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총리께서 수십년 동안 막내동생을 찾으려고 갖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끝내 아무런 단서를 찾지 못해 사망한 것으로 추정한다."고 했다. 근엄한 한학자이기도 했던 아버지 김상배는 그를 직접 야단치는 법이 없었고, 특히 그의 칭찬을 주변에 얘기해서 간접적으로 듣게 했다고 한다. 소년기에 그는 아버지로부터 붓글씨를 배웠다. 그러나 글을 쓰다 싫증이 나서 도망쳤다가 밤늦게 돌아오면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밥을 먹인 뒤 나머지 글쓰기를 마치게 했다 한다.1945년 3월에 공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그림을 잘 그렸는데, 정식 교육을 받지는 않았고 중학교 때 수채화를 그려본 기초 뿐이었다. 그러나 뒤에 40세가 넘어 유화를 배우기 시작하여 본격 화가의 경지에 오르기도 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주오대학교 예비과정에 입학했지만, 아버지의 권유로 곧 자퇴하고 귀국하여 대전사범학교에 입학했고 동년에 졸업하였다. 보령군의 소학교 교사로 발령받았으나 교편을 잡은 지 2개월 만인 8월 15일 광복을 맞고 아버지가 경성부에 사준 집을 팔아 자동차 회사를 운영하여 재력을 쌓았다. 1946년 경성사범학교 사회교육과에 입학하였다. 같은 해 8월 경성사범학교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으로 통합되어 격상되었다. 1948년 서울대 사범대학 3학년이었던 김종필은 부친이 작고한 후 집안이 어려워지자 내 힘으로 앞길을 열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파고다공원 앞 모병소에 원서를 내고 군에 입대하여 충청남도 온양에 주둔하는 육군 제13연대에 배속된다. 그러나 1주일 만에 구타와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여 탈영하였다. 이후 친구 집을 전전하던 중 극장에 영화관람을 갔다가 육사 교도대와 만나게 되어 자수하고 기간병으로 재입대하였다가 육사 제8기생으로 입학해 1949년 5월에 소위로 임관했다. 소위 임관과 동시에 육군 정보국에 배치되었다. 그 뒤 주로 참모직을 역임하고 1949년 12월 당시 육군본부 정보국에 중위로 있었다. 이후 한국 전쟁에 참전했고, 육군 정보국 전투정보과 북한반장에 임명, 갑작스런 남침으로 무너지는 전선을 시찰하고 전세를 정확히 보고했으며, 1계급 특별승진해 육군 대위가 됐다. 한국 전쟁 후반에는 6사단 19연대로 배속되어 수색중대장 등으로 북한군과 교전하였다. 1951년 1월에 박상희의 딸 박영옥과 결혼하였고 그해 육군 대위로 지내면서 제1차 도미 유학 장교단 150인 중 한 사람에 선발돼 조지아 포트베닝의 미국 육군보병학교에 입교하여 수료하였다. 1952년 다시 정보국 전투정보과 북한반 반장이 되었다. 김종필은 정보 계통에 근무하면서 야전부대에서 근무한 장교들과는 달리 시간과 활동에서 상대적으로 제약을 덜 받았기 때문에 동기생들과 언제든지 긴밀하게 접촉할 수 있었다. 이후 육본 정보국 정보과장으로 보직되었다. Jong-pil 1961.jpg|섬네일|right|160px|5·16 군사 정변 전후의 김종필 그는 군에서 주로 정보관계 업무에 종사하다가 소령을 거쳐 1958년 육군본부 정보참모부 기획과장으로 부임했다. 기획과장 재직 중 중령으로 진급했는데, 다른 기수보다 소령에서 중령으로 진급하는 것이 8년 정도 늦었던 그의 동기들은 군 운영체계에 불만을 품게 됐다. 어쨌건 그는 육군 중령으로 진급한지 몇달 지나면서 육군본부 정보참모부 기획과 과장에서 육군본부 정보참모부 정보처 처장이 되고, 이후 1960년 육군본부 정보국 행정처 처장에 임명되었다. 1960년 8월 24일 김종필과 석정선 중령은 성당에 미사 중이던 장면 국무총리를 찾아가 서면으로 정군을 요구하고 돌아왔다. 그러나 서면은 전달되지 않았고, 이는 후에 그가 항명파동에 연루되는 계기가 됐다. 장면 내각은 숙군을 단행하려 했고, 이때 그가 석정선과 함께 모든 책임을 지고 예편하는 것으로 파동을 마무리지었다. 예편 이후 별다른 직업이 없던 그는 정계 입문을 결심한다. 1961년 4월 19일 4.19 의거 1주년 기념 시위를 거사일로 정하고 박정희와 함께 군사 정변을 기도했지만 장면정권의 시국정화단에서 학생 시위대를 매수하여 4월 19일 당일은 조용했고 거사는 실패로 돌아갔다. 그해 5월 다시 거사일을 정한다. 5·16 군사정변 직후 군인들 1960년에 일어난 항명 파동으로 육군 중령에서 예편했다. 갑자기 일자리를 잃게 된 김종필은 한때 사상계 를 찾아가 이력서를 넣었으나 면접에서 탈락했다. 그러나 예비역 중령 신분으로 꾸준히 박정희 등과 교류했고, 1961년 5·16 군사 정변을 준비한다. 5·16 군사 정변에 참여했고 5·16 군사 정변이 성공하자 다시 현역으로 복귀, 육군 중령이 됐다. 이어 육군 대령으로 진급했고, 육군 준장으로 진급했다. 한편 박정희가 5·16을 거사했다는 비난을 받게 되자, 그는 "내가 박정희 장군을 모시고 5·16을 기획했다."라고 했다. Jong-pil, 1961.06.05.jpg|섬네일|160px|left|6월 5일 5·16 거사 목적을 발표한 언론과의 인터뷰 이후 군사혁명위원회(국가재건최고회의)가 구성되면서 중앙정보부가 신설, 그는 제1대 중앙정보부장에 임명된다. 6월 5일 오후 그는 공식 기자회견을 통해 5.16 군사 정변은 낡은 구세대의 정치 진출을 차단하기 위한 거사 라고 발표한다. 군사 정변 직후 그는 장인 박상희의 경력과 관련하여 사상 공세에 시달렸고, 황태성이 남하한 후에는 한일회담 직전까지 야당인사들로부터 수시로 의혹을 받게 된다. 5.16 군사 정변이 성공한 직후 그는 즉시 시국정화단 등을 개편하여 정보조직인 중앙정보부를 창설한다. 초대 중정부장이었던 김종필은 중정청사 터를 조선 20대 왕 경종과 계비 선의왕후 어씨의 릉을 모신 의릉 사적지 주변으로 정하였다. 이후 의릉 입구에 세워진 중앙정보부 건물은 속칭 안가 로 불렸다. 1961년 5월 20일부터 1963년 1월까지 초대 중앙정보부장이었고, 1961년 7월에는 잡지 《사상계》의 동인이었던 함석헌이 ‘5·16을 어떻게 볼까’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하자 사상계사 사장인 장준하를 불러 취조했다. 1961년 7월호의 함석헌의 5·16 군사정변 비판 칼럼을 문제삼아 장준하를 소환했다. 사상계 7월호가 나가고 4, 5일 뒤, 퇴근시간이 되어갈 무렵 사상계사에 군인 둘이 나타났다. 그들은 혁명군에서 나왔다면서 다음날 아침 7시까지 사장과 편집 책임자를 모시러 오겠으니 그 시각까지 나와 있어 달라는 용건을 전했다. 다음날 장준하는 편집 책임자인 취재부장 고성훈과 함께 지정한 시각인 아침 7시에 회사로 나갔다. 검정 지프차 하나가 먼저 와 기다리고 있고 다른 군인 2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지프차는 장준하와 고성훈을 싣고 가 남산 밑 회현동 어딘가에 있는 허름한 2층 집의 한 방에다 내려놓았다. 20분뒤 김종필 이 나타났고 김종필은 사상계 7월호에 실린 함석헌의 5·16 군사정변을 우회적으로 비판한 칼럼을 문제삼았다. 장준하는 말을 계속했다. 장준하의 말에 김종필은 앞으로 밀어놓았던 책을 급히 집어다 빨간 줄 투성이가 된 문제의 글과 권두언을 펴 여기저기 한 줄씩 읽어주며 장준하에게 들이댔다. 그는 이것은 무슨 소리이며 이것도 충고냐는 식으로 윽박질러 물었고, 이에 장준하는 항의했다. 그러나 김종필은 그가 장도영과 같은 고향이라는 점을 문제삼았다. 그러나 장준하는 장도영과의 관련을 부인했다. 장준하의 대답에 김종필은 흥미를 느껴 계속 꼬치꼬치 캐물었고, 장준하는 숨길 것이 없고 해서 자신이 평소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장도영에 대한 추억을 진술했다. 장준하에 의하면 장준하와 장도영은 중국 서주에서 같이 있었다. 그 곳에서 한인 탈영 사건이 자주 일어나자 학도병들에 대한 감시와 핍박이 심했다. 그때 장도영은 일본도를 빼들고 탈주하는 자는 자기가 먼저 처단하겠다고 설치다가 장준하와 충돌했다. 그리고 탈출이 어려운 쓰카다 부대로 같이 옮겨가서 둘은 장준하가 벌인 잔반 거부 운동 으로 반목한다. 성이 같고 고향이 이웃해 있다고 해서 서로 호흡이 맞는 것도 아니었다. 같은 서북인 출신이라 하지만 장준하로서는 장도영의 이름을 들어 그 당으로 모니 참을 수가 없었다. 김종필이 장준하와 장도영의 사이를 의심할 만한 이유는 또 하나 있었다. 이 무렵에 사상계사에서 사상문고 100권 출간 기념 리셉션을 창경궁(昌慶宮)의 수정궁(水晶宮)에서 열었던 것이었다. 당시 사상계의 국제적인 명성 때문에 그날이 7월 4일 미국 독립 기념일인데도 미국 대사가 직접 참석하고 내외 귀빈이 수도 없이 모였는데 쿠데타 군부에서도 장도영 최고회의 의장 이하 그 일파가 모두 왕림했다. 그때 박정희와 김종필 쪽에서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그리고 7월 5일 장도영 일파는 모두 체포됐다. 1962년 1월 김종필은 민주공화당의 사전 창당조직 연구팀과 사전 조직인 동양화학 주식회사의 창립을 주도하였다. 5.16이 일어난 지 3개월 만인 1961년 8월에 김종필은 민정인수 구상의 하나로 공화당을 사전조직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러한 공화당 사전조직은 박정희의 재가를 얻은 김종필의 새 정당 창당구상 연구팀으로, 책임자는 예비역 육군중장 최영두이고, 윤천계(고려대), 김성희(서울대), 강상운(중앙대) 교수와 이종극, 김운태, 윤태림, 정범모, 박종화, 유호선, 김정렴, 김학열, 최규하, 이필석, 홍승면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1962년 1월 이 연구실의 이름을 동양화학 주식회사 로 위장하고 종로 2가 뒷골목 제일전당포 2~3층에 사무실을 차렸다. 이어 김종필은 재건당을 조직하여, 민정에 군출신 인사들이 참여하기 위한 정식 정당 창당작업을 지속적으로 준비해 나갔다. Jong-pil and D. MacAthur.jpg|섬네일|right|150px|1962년 10월 31일 더글러스 맥아더를 방문한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으로 재직 중 육군 준장으로 진급하였다. 1962년 10월부터 11월까지 미국을 방문하고 귀국했다. 미국 방문 길에 그는 더글러스 맥아더 미국 육군 원수를 방문하기도 했다. 더글러스 맥아더와의 면담에서 맥아더는 김종필에게 "한국이 하루빨리 통일이 되기를 바란다. 나는 한국이 통일될 때까지 죽을 수 없다."는 의사를 피력한다. 또 맥아더는 김종필에게 "한국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하여 만주 폭격을 주장"했으며 "한국 전쟁의 휴전에 있어서 미국은 잘못을 저질렀으며, 한국에서의 북진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의 인도네시아 사태가 발전된 것"이라고 답하였다. 또한 맥아더는 김종필에게 "이승만 박사에 대한 감정을 완화하여 그를 고국 땅에 귀국시키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언급하였다. 1963년 1월에는 육군 준장에서 예편했고 중앙정보부장에서 사퇴했다. 이어 민주공화당의 사전조직인 재건당을 창당했고, 직접 윤일선, 임영신, 여운홍, 임병직, 윤치영, 정구영 등을 찾아다니며 설득, 신당 창당에 적극 도움을 줄 것을 요청하였다. 평소 장면 내각을 미워하던 윤치영, 여운홍 등은 그의 도움 요청을 적극 수용하였다. 같은 해 2월에는 정구영, 윤치영 등과 함께 민주공화당 창당 조직에 참여했다. 1971년 ~ 1975년, 1998년 ~ 2000년에 걸쳐 두 차례 국무총리를 역임했으며, 1963년 6대 국회 때부터 의정활동을 해 총 9번 임기를 채웠다. 이것은 김영삼, 박준규와 함께 최다선 국회의원 기록이다. 1961년 5·16 군사 정변 당시 박정희의 핵심 브레인으로 일명 혁명공약을 기초했으며, 5월 20일에는 중앙정보부를 조직하여 부장으로 취임하였다. 1962년 박정희가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있을 때부터 한일협정의 실질적인 교섭을 담당했다. 1963년 1월 민주공화당을 창당하기 위해 육군준장으로 예편(군번 13517)했고, 재건당이라는 가칭 조직을 창당했다가, 2월부터 정구영 등과 함께 민주공화당 창당준비위원회를 이끌었다. 이후 민주공화당을 창당하자 야당 인사들은 구정치인 정정법으로 묶어놓고 자신들만의 사전조직을 비밀리에 결성했다며 비난했다. 한편 꾸준히 육사 5기생, 6기생들의 견제를 받던 그는 그해 2월 25일, 민주공화당 창당 준비위원장을 사퇴하고 순회대사의 자격으로 동남아시아와 구라파(유럽) 여러 곳을 역방하고저 출국했다가 귀국하여 국회의원에 입후보하였다. 1963년 11월 제6대 국회의원에 당선됐고, 1963년 12월 민주공화당 당의장에 선출됐다. 1964년 8월에는 하버드대학교 정치경제학과를 수료하였다. 1965년 6월, 당시 일본 외무상인 오히라 마사요시와의 비밀 접촉으로 김종필·오히라 메모 에 합의해 협정 체결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으나 이 과정에서 식민지배에 대한 사과, 약탈 문화재 반환, 재일동포 지위, 동해어업권, 강제 동원 피해자 보상, 원폭피해자 문제 등 주요 현안은 모조리 무시한 채 경제적 보상과 차관을 대가로 모든 문제의 종결을 선언해버려 이 후 한일 관계에 계속되는 문제점과 야당 인사들의 반발을 초래했다. 1961년 11월 22일 박정희는 일본을 방문하여 이케다 하야토 총리를 만나 "맨주먹으로 황폐한 조국을 이끌어 보겠다는 의욕만은 왕성하다"며 협조를 요청했다. 박정희의 협조 요청에 따라 일본 외무장관 오히라 마사요시 등이 한국에 입국했다. 1962년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은 오히라 마사요시를 만나 협상의 내용을 합의하였다. 이 협상 내용은 "김-오히라 메모"로 불린다. 후일 김종필은 "내가 이완용이 소리를 들어도 그 길밖에는 없다고 생각했다. 조금 적은 액수이더라도 빨리 공장을 세우고 기술을 배웠기 때문에 우리 경제성장이 빠르지 않았느냐. 후회하지 않는다"고 회고했다. 김종필 오히라 마사요시 김종필과 오히라의 회동 이후에도 1962년 케네디와 요시다의 회담, 1963년 11월 존슨과 박정희의 회담 등을 통하여 한일간의 외교관계에 대한 내용이 정리되었다. 회담 타결이 막바지에 이른 1964년 미국은 러스크 국무장관과 극동문제담당차관 등이 한국에 방문하여 일본과 한국의 조속한 수교를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1964년 1월부터 한국에서는 한일협상을 반대하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3월에는 5·16 이후 없었던 학생 시위가 시작되었다. 굴욕적인 한일회담을 반대한다는 학생 시위는 6월 3일 절정을 이루어 6·3 한일협정 반대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박정희 정권은 비상 계엄을 선포하여 반대의 목소리를 탄압하고 회담을 지속하여 1965년 2월에는 기본조약이, 4월에는 어업협정이 가조인되었다. 1965년 6월 22일 한일기본조약이 정식으로 조인되었으며, 8월 14일 대한민국에서는 여당 단독으로 국회가 열려 한일기본조약을 비준하였다. 1965년 12월 18일 상오10시반 한국의 중앙청 제1회의실에서 두 나라의 국교정상화를 최종적으로 매듭짓는 기본조약 및 협정에 의한 비준서를 교환했다.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당선됐으나 극심한 부정·타락 선거라는 이유로 그 이듬해에 의원직을 사퇴했다. 1960년대 후반 박정희가 3선 후 물러난다는 선언을 하면서 그는 김영삼, 김대중, 이철승 등과 함께 차기 유력주자로 떠올랐다. 이는 박정희로 하여금 그를 경계하는 원인이 됐다. 박정희의 견제를 받자 그는 당원직을 사퇴하고 일시적으로 미국을 다녀오기도 했다. 한편 민주공화당 내에는 그를 지지하는 파벌이 나타났고 박정희가 3선에서 물러나고 그가 후임이 되기를 바라기도 했다. 이를 알게 된 박정희는 그를 경계하였다. 삼선 개헌안이 나오자 이를 지지하였다. 1970년 12월 민주공화당 총재 수석상임고문, 1971년 3월 민주공화당 부총재를 지냈다. 박정희의 견제와 반대 세력의 움직임으로 한때 공직에서 물러났으나, 이후 삼선개헌과 10월 유신에 협조하면서 다시 정계에 복귀했다. 1972년 5월엔 PTP 명예 총재에 선출되기도 했다. 1973년 6월에는 서독을 순방하고 귀국했다. 1974년 일요화가회 명예회장, 1974년 5월 5·16민족상 이사장, 대한올림픽위원회 명예위원장 등을 지냈다. 유신정권의 국무총리를 지내는 등 실권을 유지했다. 1976년 한일의원연맹 한국측 회장에 취임했고, 1977년 한일친선협회 중앙회장에 선출됐다. 1973년 1월 해리 트루먼의 추도식에 참석차 비행기편으로 미국 워싱턴을 방문하고 귀국하였다. 그해 5월 28일 다시 출국 스페인의 마드리드에 도착하여 심흥선(沈興善) 주스페인 대사를 만난 뒤 알프레도 산체스 공보, 관광부 장관, 루이스 카레로 블랑코 스페인 부총통을 면담하고 6월 5일에는 프랑스를 방문 하고 귀국했다. 국무총리 시절의 김종필 그러나 정권의 2인자로 끊임없이 박정희와 갈등했고, 1975년 12월 18일 국무총리직에서 전격 경질된다. 박정희는 그 대신 그의 둘째 형 종익을 대신 충남 부여 지역구 국회의원으로 내보냈다. 이후 김종익은 7, 8, 9대 의원을 지내게 됐다. 김종필이 박정희와의 갈등 때문에 파란을 겪고 있을 당시 정권측에서 부여지역 민심을 달래기 위해 동생 대신 억지로 부여지역구에 출마시킨 것이었다. 1977년 2월부터 3월까지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중남미를 순방한다. 그해 2월 10일부터 14일까지 중화민국을 방문하여 장징궈, 옌자진과 면담한 뒤 일본을 방문하여 후쿠다 수상, 오히라 자민당 간사장 등을 면담한 뒤 모로코 등을 방문했다. 그해 3월에는 브라질 등을 방문한 뒤 4월 11일 귀국하였다. 1979년 3월 제10대 국회의원에 재선하였다. 그해 6월에는 유럽 특사로 파견되어 독일과 프랑스 등을 순방하고 귀국했다. 1979년 10월 박정희가 사망한 후 1979년 11월 12일 민주공화당 당무회의에서 만장일치로 총재로 선출되고, 1979년 11월에는 5·16 민족상 재단 총재이 됐다. 박정희 사후 공화당계 정당의 유력자로 부상하면서 재야 운동가들은 그에게 민주적인 선거 절차에 의한 정권 교체에 협조하라는 편지를 보냈다. 김종필은 민주공화당 총재로서, 김영삼, 김대중 등과 함께 유력한 차기 대권 주자로 부각했다. 1980년 5월 18일 새벽 5·17 비상계엄 확대조치와 함께 보안사에 체포돼 감금당했다. 5월 18일 아침 신군부는 관제보도를 통해 김종필 등 10여 명을 유신 시대의 부정축재자로 발표했다. 신군부에 의해 모욕적인 대우와 감금을 당하면서, 그는 전두환을 증오하게 됐다. 수경사령관 노태우 소장은 김종필이 감금된 지하감옥을 방문하고, 존댓말을 쓰며 깍듯이 예우했다. 김종필은 신군부 인사 중 유일하게 노태우에 대한 분노를 누그러뜨리고, 노태우에게 처세술을 알려 주었다. 자신의 고사와 이승만, 박정희 시절의 2인자들의 몰락과 비참한 최후를 설명하며 절대 1인자(당시 1인자란 전두환을 지칭)에게 밉보이지 말 것, 전두환이 서운하게 하더라도 절대 서운한 표현을 해서는 안되며 서운함을 드러냈을 경우 아랫사람과 주변의 이간질하는 세력이 나타나 관계를 악화시킨다는 것 등 2인자로서의 처세술을 노태우에게 일러주었다. 1980년 9월 그는 신군부에 의해 재산을 헌납하도록 강요받고, 정계에서 은퇴한다는 각서를 썼다. 그가 정계에서 은퇴하면서 구 민주공화당, 유정회계 인사들은 한국국민당을 창당해 활동했다. 그러나 정치금지가 해제되면서 김종필이 정계에 복귀하자 구 공화당, 유정회 인사들은 그를 총재로 받들고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하였다. 신군부에 의해 정계를 강제 은퇴당한 그는 이후 운정재단을 운영하면서 사회사업에 종사하였다. 1980년 5·17 쿠데타 이후 정치활동이 정지당한 채 1987년까지 야인생활을 하며 지냈다. 그가 정계에서 축출되면서 그의 친인척에게도 불이익이 가해졌다. 그의 여섯째 동생 김종관은 육군중위로 제대, 1962년 건설부 산하 직원이 되어 주택공사 과장, 한남동 외인주택 관리소장 등으로 일했으나 제5공화국 정권이 들어서면서 일자리를 잃었다. 김종관의 부인이었던 초등학교 교사 출신인 부인 신홍자 역시 전두환이 대통령이 되면서 아무런 이유도 없이 학교에서 해직됐다. 1987년 정계에 복귀해 10월에는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하고 총재에 추대됐으며 신민주공화당의 출범 직후 구 민주공화당과 유정회의 후신인 국민당을 흡수했다. 87년 8월 신민주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1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다. 이어 그는 1980년 무렵 전두환 정권에 의해 해직된 공무원과 공직자들의 복직을 공약의 하나로 내세우기도 했다. 12월의 대통령 선거 결과 4위로 낙선했다. 그러나 노태우 정부의 5공 청산과 권위주의 철폐 등에 비호감을 느낀 군사 정권 출신 인사들의 지지에 힘입어 이듬해인 1988년 4월에는 13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민주정의당의 노태우로부터 3당합당의 제의가 오자 고려 끝에 노태우의 제안을 수용했다. 1990년 초 3당합당을 통해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노태우의 민주정의당과 통합하고, 민주자유당 출범에 참여해 다시 집권여당의 정치인이 되고, 1990년 2월 민주자유당 최고위원에 선출됐다. 1992년 3월 민주자유당 대표위원, 김영삼 정부 초기에 다시 집권 민주자유당의 대표가 됐으나, 내각제를 추진하려는 그의 견해와 대통령중심제를 고수하려는 김영삼 간의 정치적 견해 차이로 갈등하게 됐다. 한편 차기 대선유력주자로 거론됐으나 노태우는 박철언을 선택하려 했고, 이후 김영삼 계열이 집단 탈당조짐을 보이자 노태우는 김영삼을 후계자로 결정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대선 예비주자로서의 기회를 얻지도 못했다. 1992년 8월에 민자당 대표최고위원에 재선임되었다. 그는 내각 책임제 개헌을 주장했는데 김영삼과 13대 대권을 놓고 경쟁하게 됐다. 1993년 2월에 김영삼이 대통령에 당선, 문민정부 출범 이후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다가 신군부, 하나회 등 전두환 계열의 군부 숙청 이후 당내 군부세력을 제거하려던 김영삼과의 불화 끝에 민주계는 그의 퇴진을 이끌어낸다. 1995년 그는 민자당 총재직 사퇴와 동시에 탈당하고 자유민주연합이라는 독자정당을 다시 창당했다. 이후 일부 영남권 인사들을 포섭하고 박정희, 전두환 정권 출신 인사들과 지지층의 표심을 공략했으나 실패했다. 1995년 3월에 자민련의 총재에 추대되었고 1996년 4월 제15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념적 차이가 있는 김대중과 손을 잡아 DJP연합으로 김대중을 대통령으로 당선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고 1997년 11월에는 자유민주연합 명예총재로 정계일선에서 물러났다. 그가 김대중과 손을 잡자 보수주의 세력에서는 그의 연합을 놓고 비난을 퍼부었다. 이후 국민의 정부의 첫 국무총리 서리로 5개월간 지낸 후 총리로 임명되었다. 그는 DJP연합 정권의 한 축으로서 총리를 포함한 일부 각료의 인사권 등을 행사하였고 국민연금 등의 주요 정책에서도 그 권한을 드러내었다. 그러나 내각제 개헌, 대북 관계 등을 놓고 김대중과 갈등했고, 2001년 결국 DJP연합은 붕괴된다. 그가 총리직에서 사퇴한 뒤 박태준이 후임자가 되었다. 2000년에 실시된 대한민국 제16대 총선에서 그가 이끄는 자민련은 17석을 얻는 데 그쳐 원내교섭단체 구성에 실패했다. 2001년 9월 국회에서 임동원 통일부 장관 해임안을 가결한 것을 계기로 김대중 정부와 결별을 선언했다. 이후 김종필은 소수야당의 총재로 남게 됐다. 1999년 2월 10일부터 11일까지 인도를 방문했다. 김종필은 한국이 파트너 국가로 참가한 인도 엔지니어링 무역 박람회《IETF 99》의 개막식에 참석하고 돌아왔다. 1999년 6월 12일 제1회 자랑스런 미술인상(미술인 지원에 공로)을 받았고, 1998년 7월 한국미술협회 대한민국 50년을 만든 50대 인물 에 선정됐으며 1998년 5월의 홍콩 아시아위크지 앙케이트 조사에 아시아 유력인사 50인 35위에 선정됐다. 1999년 미국 마르퀴즈 후즈 후사의 1999년판 후즈 후 인 더 월드에 등재됐다. 2002년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선거에는 광폭행보 끝에 내각제를 공약으로 1월 31일 출마를 선언했으나 이후 지지율이 오르지 않자 관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2004년 민주당, 한나라당에서 대통령 노무현 탄핵소추안이 발의되자 그는 노무현 탄핵에 동의했다. 그러나 김종필은 탄핵 역풍을 이겨내지 못했다.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민련은 교섭단체도 구성하지 못했고, 비례대표 1번으로 출마한 자신도 낙선으로 10선에 실패하는 바람에 자민련에서 아무도 비례대표가 나오지 않았다. 이에 김종필은 총재직을 사퇴하고 정계 은퇴 선언을 하여, 사실상 그의 정치 생명은 종결되었다. 이후 충청권 지역 정당으로 국민중심당, 자유선진당 등이 만들어졌지만 자신은 이에 가담하지 않았으며, 2007년 대선에서도 한나라당 후보인 이명박을 지지했다. 2008년 3월 26일, 김종필은 김영삼 전 대통령과 함께 서울 강남에서 회동을 갖고 한나라당 공천 결과가 편파적으로 진행됐다는 데 의견을 같이하고 이명박을 강력히 성토했다. 2000년대 이후 한성디지털대학교의 명예 석좌교수에 위촉되기도 했다. 2008년 12월 15일 무렵 갑자기 뇌졸중으로 쓰러져 입원, 이후 초인적인 재활운동을 통해 2010년 무렵 거의 정상을 회복했다. 정계를 은퇴 한 뒤 2008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이후 치료와 재활을 반복해오던 김종필은 2018년 5월 무렵부터 음식을 제대로 삼키지 못할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었다. 2018년 6월 23일에 서울 신당동 자택에서 호흡곤란 증세를 일으켜 순천향대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결국 병원에 도착하기 전에 회복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향년 92세였으며, 사인은 노환으로 알려졌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되었고 장례는 5일 가족장으로 간소하게 치러졌다. 6월 27일 영결식 및 발인식이 거행되었고, 그의 유해는 충청남도 부여군 외산면에 있는 가족묘원에 안장되었다. 할아버지 김현택 (金顯澤) 아버지 김상배 (金相培, 1887년 ~ 1962년) 어머니 이정훈 (李貞薰, 1899년 ~ 1978년) * 형님 김종호 (金鍾浩, 1917년 ~ 1998년, 서울 종로구청 주사, 중앙곡물협회 회장 역임) * 형수 김복례 (金福禮, 1918년 ~ 2001년) ** 조카 김성태 (金星泰) *** 前 질부 김순란 (金順蘭, 1940년 ~ , 이대 졸업 후 1980년대 무렵 미국으로 건너가 상점 운영, 슬하 1남 1녀) ** 조카 김춘태 (金春泰, 1939년 ~ ) *** 조카사위 조병창 (趙炳昌, 1931년 ~ , 예비역 육군 소령 역임, 슬하 3남) ** 조카 김춘자 (金春子, 1942년 ~ ) ** 조카 김인태 (金仁泰, 금진상공 대표) ** 조카 김익태 (金益泰, 남양 콘테이너 사장) ** 조카 김지태 (金知泰, 중소기업 이사 로 재직) ** 조카 김승자 (金承子, 1957년 ~ , 숙명여대 졸업) ** 조카사위 박홍식 (朴洪植, 1953년 ~ , 전기통신연구소 연구 실장) * 형님 김종익 (金鍾翊, 1918년 6월 27일 ~ 2000년 12월 20일, 전 민주공화당 의원) * 형수 이의렴 (? ~ ?) ** 조카 김황태 (金皇泰, 삼성전자 차장) ** 조카 김일태 (金一泰, 프로방스대 문학 박사 학위 취득 후 동덕여대 교수 역임) * 형님 김종락 (金鍾珞, 1920년 5월 16일 ~ 2013년 8월 22일, 대한야구협회 상임고문 역임) * 형수 나카도가와 사나에 (1921년 ~ ) ** 조카 김숙자 (金淑子, 1945년 ~ ) *** 조카사위 신인수 (申仁洙, 1942년 ~ ) ** 조카 김정태 (金政泰, 1949년 ~ ) ** 조카 김민태 (金珉泰, 1950년 ~ ) ** 조카 김휘태 (金輝泰, 1952년 ~ ) ** 조카 김이태 (金利泰, 1956년 ~ ) ** 조카 김의태 (金義泰, 1962년 ~ ) * 형님 김종소 (金鍾韶, 1925년 ~ ) * 형수 박춘규 (朴春圭, 1931년 ~ ) ** 조카 김한태 (金漢泰, 1955년 ~ , 연세대 졸업 후 건설회사 전무 역임) ** 조카 김형준 (金亨準, 1961년 ~ , CSU 졸업) ** 조카 김우준 (金宇準, 1963년 ~ ) ** 조카 김범준 (金範準, 1965년 ~ , 연세대 졸업 후 행정고시에 합격 후 공무원 재직) * 동생 김종관 (金鍾寬, 1930년 ~ ) * 제수 신홍자 (申弘子, 1942년 ~ , 교사였으나 전두환 집권 후 강제 퇴직) ** 조카 김진태 (金眞泰, 1968년 ~ ) ** 조카 김혜진 (金惠珍, 1974년 ~ ) 배우자 박영옥 (朴榮玉, 1929년 10월 30일 ~ 2015년 2월 21일 , 박정희 前 대통령의 조카) * 딸 김예리 (金禮利, 1951년 12월 27일 ~ ) * 아들 김진 (金進, 1961년 9월 3일 ~ , 리디아와 결혼한 후 환경무역업 경영, 슬하 2남 1녀) * 며느리 리디아 (1962년 ~ , 미국 국적 과테말라 출신) 장인 박상희 (朴相熙, 박정희 前 대통령의 셋째형, 1905년 9월 10일 ~ 1946년 10월 6일) 장모 조귀분 (趙貴紛, 1908년 12월 16일 ~ 1992년 11월 14일) * 처제 박계옥 (朴契玉) * 처제 박민정 (朴珉政) * 처제 박금자 (朴金子) * 동서 박기언 (朴基彦, 1942년 ~ , 공무원,- 국무총리실 행정조정실 근무) ** 처이질 박승재 (朴承宰, 1967년 ~ ) ** 처이질 박정하 (朴政河, 1970년 ~ ) ** 처이질녀 박정현 (朴政賢, 1975년 ~ ) * 처제 박설자 (朴雪子, 1944년 ~ , 숙명여대 졸업) * 동서 김희용 (金熙龍, 1942년 ~ , 벽산그룹 부회장, 벽산그룹 김인득 회장의 차남) ** 처이질 김태식 (金泰植, 1973년 ~ ) ** 처이질 김소원 (金小源, 1978년 ~ ) ** 처이질 김식 (金植, 1979년 ~ ) 1954년 9월 동성 훈장(미국). 1955년 1월 은성 충무무공 훈장 1961년 10월 대수보정 훈장 (중화민국) 1963년 1월 일등 보국 훈장 통일장 1966년 10월 공로 대훈장(파라과이) 1966년 7월 로훈장(이탈리아) 1966년 10월 보국 일등 훈장(베트남) 1971년 12월 청조 근정 훈장 1971년 6월 수교훈장 광화장 1973년 6월 훈일등욱일대훈장(일본) 1974년 11월 수교훈장 광화대장 1975년 10월 아프리카 가봉 대훈장 1975년 10월 적십자대장 태극장 1975년 10월 칠레 대훈장 1977년 10월 아르헨티나 대십자훈장 1977년 10월 중화민국 대수보훈장 1978년 2월 대훈장(아르헨티나) 1998년 10월 압둘아지르왕 훈장 (사우디아라비아) 1999년 6월 한국미술협회 제1회 자랑스런 미술인상(미술인 지원에 공로) 2000년 1월 17일 ~ 1월 25일 서울경제신문 주최 명사미술전 출품-휘호 (백상기념관) 2018년 6월 국민훈장 무궁화장 (추서) 1940년 부여공립보통학교 졸업 1945년 공주고등보통학교 졸업 1945년 주오 대학교 예비과정 중퇴 (1967년 주오 대학교에서 명예 졸업장 수여) 1945년 대전사범학교 졸업 (1967년 충청남도 대전 충남고와 충청남도 공주교대(이 두 학교는 각각 모두 대전사범학교의 후신 가운데 하나)에서도 충남고·공주교대 명예 졸업장 수여) 1948년 서울대학교 교육학과 수료 (1967년 서울대학교에서 명예 졸업장 수여) 1949년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 8기 졸업 1952년 미국 육군보병학교 졸업 1956년 대한민국 육군보병학교 졸업 1958년 대한민국 국방대학교 행정학사 3기 1963년 페얼레이 디킨슨 대학교 명예 법학박사 1964년 롱아일랜드 대학교 명예 법학박사 1966년 중앙대학교 명예 법학박사 1966년 웨스트민스터대학교 명예 문학박사 1974년 홍익대학교 명예 철학박사 1992년 유타대학교 명예 정치학 박사 1995년 OSU 명예 이학박사 1998년 동의대학교 명예 경제학 박사 1998년 명지대학교 명예 법학박사 1998년 공주대학교 명예 교육학 박사 1998년 규슈 대학교 명예 철학박사 2002년 광주대학교 명예 행정학 박사 2007년 아오야마가쿠인 대학 명예 정치학 박사 김종필은 3김 중 하나인 대한민국의 2인자로써 막대한 정치적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5.16군사정변의 시스템을 설계하여 비록 헌정을 붕괴시킨 사건이지만 안정적으로 관리하였고 훗날 국가정보원이 되는 중앙정보부를 설립하여 공안정보기관에 기여를 하기도 했다. 그리고 제1차 경제개발계획수립에도 도움을 주었고, 이런 김종필의 시스템으로 독재정권이기는 하지만 박정희 정권을 안정시켜 안정적 경제발전을 기여하기도 하였으며 박정희정권 이후에도 국무총리를 역임하는 막대한 권력을 행사한 사람이기도 하다. 군사 정권 출신이며 5.16 군사 정변의 주동자의 한 사람이라는 점과 박정희 정권에 부역하였다는 점은 부정적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반대로 보수 진영에서는 그가 1998년 DJP연합으로 정권교체에 기여한 점을 부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그 밖에 김영삼, 김대중과 함께 3김으로 불리며 충청권의 맹주로 자임하며 지역갈등, 지역정치를 조장했다는 점에서도 부정적인 시각이 일부 존재하고 있다. 아들 김진은 고려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한 후 미국 유타 대학교에 유학을 하던 중 그곳에서 만난 과테말라 여성 리디아와 결혼했다. 당시 그의 반응에 대한 측근의 진술로는 "김 총리가 미처 말리고 어쩌고 할 틈도 없이 김진씨가 이미 모든 것을 결정한 다음이라 김 총리도 속수무책으로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다."라고 하였다 《JP칼럼》 《JP화첩》 《새 역사의 고동》 1992년 12월 한국소설가협회 명예회원 1993년 6월 한국 펜클럽 평생회원 일일신 우일신(日日新 又日新) 상선여수(上善如水) MBC 1989년 《제2공화국》 이정길 MBC 1993년 《제3공화국》 이정길 SBS 1995년 《코리아게이트》 이정길 MBC 1995년 《제4공화국》 한인수 SBS 1998년 《삼김시대》 정동환 SBS 2003년 《야인시대》 한창호 MBC 2004년 《영웅시대》 정재곤 MBC 2005년 《제5공화국》 이정길 김종필, 《JP 칼럼》 (프로젝트409, 1997)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60년대편 1》 (인물과사상사, 2006)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60년대편 2》 (인물과사상사, 2006)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70년대편 1》 (인물과사상사, 2006)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70년대편 2》 (인물과사상사, 2006)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90년대편 1》 (인물과사상사, 2006) 선거명 직책명 대수 정당 득표율 득표수 결과 당락 제6대 총선 국회의원(충남 부여군) 6대 민주공화당 68.2% 45,999표 1위 부여군 국회의원 당선 제7대 총선 국회의원(충남 부여군) 7대 민주공화당 91.2% 58,156표 1위 부여군 국회의원 당선 제8대 총선 국회의원(전국구 1번) 8대 민주공화당 48.8% 6,254,921표 27석 전국구 국회의원 당선 제9대 총선 틀:제9대 국회의원 유신정우회 9대 유신정우회| 지명 전국구 국회의원 당선 제10대 총선 국회의원(충남 부여군·서천군·보령군) 10대 민주공화당 66.6% 42,946표 1위 부여군 국회의원 당선 제13대 대선 대통령 13대 신민주공화당 8.1% 1,823,067표 4위 낙선 제13대 총선 국회의원(충남 부여군) 13대 신민주공화당 81.9% 53,967표 1위 부여군 국회의원 당선 제14대 총선 국회의원(충남 부여군) 14대 민주자유당 72.5% 42,358표 1위 부여군 국회의원 당선 제15대 총선 국회의원(충남 부여군) 15대 자유민주연합 66.4% 35,292표 1위 부여군 국회의원 당선 제16대 총선 국회의원(비례대표 1번) 16대 자유민주연합 9.8% 1,859,331표 5석 전국구 국회의원 당선 제17대 총선 국회의원(비례대표 1번) 17대 자유민주연합 2.8% 569,083표 0석 낙선 유신정우회 소속으로 9대 국회의원을 지냈기 때문에 총 9선 국회의원으로 불린다. 김종필 홈페이지 분류:1926년 태어남 분류:2018년 죽음 분류:부여군 출신 분류:김해 김씨 분류:대한민국의 한국 전쟁 참전 군인 분류:대한민국 육군 준장 분류:5·16 군사 정변 관련자 분류:대한민국의 중앙정보부장 분류:대한민국의 국무총리 분류:불교 이탈자 분류:보스정치인 분류:민주자유당의 정치인 분류:자유민주연합의 정치인 분류:신민주공화당 분류: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 후보 분류:대한민국 제2공화국 분류:대한민국 제3공화국 분류:대한민국 제4공화국 분류:대한민국 제5공화국 분류:노태우 정부 분류:김영삼 정부 분류:김대중 정부 분류:대한민국의 화가 분류:대한민국의 서예가 분류:대한민국의 저술가 분류:대한민국의 자서전 작가 분류:대한민국의 개신교도 분류:뇌졸중을 겪은 사람 분류:부여초등학교 동문 분류:공주고등학교 동문 분류:육군사관학교 동문 분류:육군보병학교 동문 분류:미국 육군보병학교 동문 분류:충남고등학교 동문 분류:주오 대학 동문 분류: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동문 분류:공주교육대학교 동문 분류:국방대학교 동문
1926년 은 금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임시정부(臨時政府) 대한민국(大韓民國) 8년 1월 - 프로문학 경향지 발간 1월 2일 - 일본 미에현에서 한인 교포 학살, 1,000여명 한인이 일본인들과 충돌 1월 3일 - 임송흡, 현애라 등이 프로여성동맹 창립 1월 6일 - 조선총독부가 경복궁 내 조선총독부청사로 이전 2월 14일 - 서울에서 경성전기 폭리 반대운동 시위 발생 2월 18일 -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 이상룡 사퇴 2월 26일 - 일본 도쿄 대심원에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특별공판이 진행 2월 27일 - 공포로 미터법 전용 도입 3월 7일 - 가 모스크바 국제농민조합이 보낸 삼일절 기념축전을 지면에 게재하여 무기 정간, 주필 송진우, 발행인 김철중 검거 3월 15일 - 조선청년회연합회가 기관지 창간 3월 21일 - 이시이 고나미가 경성공회당에서 무용 공연 3월 25일 - 경성도서관이 경성부로 매각되었다. 4월 - 엠엘파 결성. 4월 1일 **조선총독부, 산미증식계획 변경 실시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법문학부로 개설 **경성부립도서관 종로분관 개관 4월 5일 - 양기탁 등이 만주에서 고려혁명당 조직 4월 14일 - 화용회, 북풍회, 무산자동맹회, 조선노동당이 정우회로 통합 4월 22일 - 조선 전국의 은행이 모라토리엄으로 일제 휴업 4월 26일 * 순종 황제, 창덕궁에서 승하 * 미국-프랑스 채무협정 체결. 미국에 대한 프랑스의 제1차 세계 대전 채무를 40억 달러로 확정하다. 4월 27일 - 영친왕 이은이 순종 황제의 왕위 계승 5월 3일 - 임시정부 국무령에 안창호가 선출되었으나 자진사퇴 5월 20일 - 한용운, 간행 6월 - 양주동 , 이상화 발표 6월 10일 - 순종 국장, 6·10 만세운동 6월 19일 - 6·10 만세운동 혐의로 중앙고보 교사 조철호와 학생 70여명이 형무소에 수감 6월 20일 - 조선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 개관 6월 29일 - 여운형 등이 중국 광둥에서 한인혁명군 조직 7월 - 전주고등보통학교생 맹휴가 일본인 교장을 축출, 54명 퇴학 처분 7월 3일 - 조선총독부 학무국, 시내 사립학교장 소환하여 6·10 만세운동 연루 학생 처벌 명령 7월 5일 - 활동사진 필름검열규칙 공포 7월 7일 - 임시정부 국무령에 홍진 선출 7월 8일 - 경성여자미술학교 설립 8월 1일 - 72호가 안녕질서문란 혐의로 정간 8월 4일 - 극작가 김우진과 성악가 윤심덕이 현해탄에 투신 자살 8월 26일 - 이탈리아 축구 클럽 ACF 피오렌티나 창단. 9월 - 일본에서 조선노동동흥회 결성 9월 8일 - 독일, 국제연맹에 가입. 9월 13일 - 경성지방법원, 제1,2차 공산당사건 공판 9월 19일 -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에 송병조, 부의장에 최석순 선출 10월 - 민립극단을 중심으로 조선극우회 조직 10월 1일 - 나운규 감독,각본,주연의 이 단성사에서 상영 10월 10일 - 임시정부 국무원에 이탁, 김동삼, 오동진, 이유필, 윤세용, 현천묵, 윤병용, 김좌진 등을 임명 10월 12일 - 임시정부 국무원에 조성환 임명 10월 25일 - 서울-오사카 무전국 간 전보 취급 개시 11월 4일 - 조선어연구회가 훈민정음 반포 480년을 기념해 가갸날 제정 11월 9일 - 훈민정음반포기념회가 기념일 명칭을 정음날 , 한국어 명칭을 우리글 로 결정 11월 15일 - 이상협, 창간 12월 6일 - 안광천, 김준연 등이 조선공산당을 재조직 (일명 ML당) 12월 10일 - 유일한, 유한양행 설립 12월 14일 - 임시정부 국무령에 김구 취임 12월 17일 -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부의장에 김창숙 임명 12월 28일 - 의열단 소속 나석주 열사가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 투척, 일경과 교전하다 자결 1월 1일 - 대한민국의 정치인 서인석. 1월 3일 - 영국의 음반 프로듀서 조지 마틴. 1월 6일 - 일본의 소설가 김윤규. 1월 7일 - 대한민국의 정치인 김종필. 1월 9일 * 대한민국의 기업가 최종건. * 대한민국의 군인 출신 정치인 황인성. 1월 17일 - 대한민국의 정치인 정래혁. 1월 29일 - 파키스탄의 물리학자 압두스 살람. 2월 2일 - 프랑스의 정치인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 2월 9일 - 대한민국의 관료 이한빈. 2월 10일 - 북아일랜드의 축구 선수 대니 블란치플라워. 2월 16일 - 안네의 일기의 저자 안네 프랑크의 언니 마르고트 프랑크 2월 20일 - 스페인의 극작가 알폰소 사스트레. 2월 26일 - 대한민국의 무용가 김진걸. 3월 3일 - 스위스의 가수 리스 아시아. 3월 6일 * 대한민국 중앙정보부장 김재규. * 미국의 경제학자, 관료 앨런 그린스펀. * 대한민국의 국무총리 이영덕. 3월 7일 - 오스트리아의 축구 선수 에른스트 오크비르크. 3월 11일 - 미국의 인권운동가 랠프 애버내시. 3월 30일 - 이케아(IKEA)의 창립자인 스웨덴의 기업인 잉그바르 캄프라드. 4월 2일 - 대한민국의 비전향 장기수 리두균. 4월 9일 - 미국의 기업가 휴 헤프너. 4월 14일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전 축구 선수, 현 축구 감독 명래현. 4월 21일 - 영국의 국왕 엘리자베스 2세. 4월 24일 - 대한민국의 인권운동가 김복동. 4월 26일 - 영국의 한국문학 교수 윌리엄 스킬렌드. 4월 28일 - 미국의 작가 하퍼 리. 5월 5일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감독 홍덕영. 5월 15일 * 영국의 극작가 피터 섀퍼. * 독일의 극작가 리하르트 하이. 5월 18일 - 대한민국의 정치인 우희창. 5월 26일 - 미국의 재즈 음악가 마일스 데이비스. 5월 29일 - 세네갈의 대통령 압둘라예 와데. 5월 31일 - 미국의 수학자 존 조지 케메니. 6월 1일 - 미국의 배우 메릴린 먼로. 6월 5일 - 대한민국의 군인 겸 외교관 김성룡. 6월 6일 - 독일의 지휘자 클라우스 텐슈테트. 6월 15일 - 일본의 아이누 문화 연구가 가야노 시게루. 6월 19일 - 대한민국의 관료 이규호. 6월 20일 - 미국의 군인 오디 머피. 7월 1일 - 독일의 작곡가 한스 베르너 헨체. 7월 4일 - 아르헨티나의 전 축구 선수, 현 축구 감독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7월 15일 - 아르헨티나의 군인 출신 정치인 레오폴도 갈티에리. 7월 16일 * 미국의 생물학자 어윈 로즈. * 이스라엘의 기업가, 정치인 스테프 베르트하이머. 8월 13일 - 쿠바의 혁명 지도자 피델 카스트로. 8월 14일 - 미국의 유머 작가 르네 고시니. 8월 15일 - 한국의 시인 박인환. 8월 17일 - 중국의 정치가, 전 국가 주석 장쩌민. 8월 28일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 김기남. 9월 4일 * 오스트리아의 신학자 이반 일리치. * 대한민국의 정치인 정일영. 9월 6일 * 일본의 소설가 호시 신이치. * 네덜란드의 클라우스 왕자. 9월 8일 - 대한민국의 관료 이동원. 9월 15일 * 프랑스의 수학자 장피에르 세르. * 일본의 영화감독 이마무라 쇼헤이. 9월 21일 - 미국의 물리학자 도널드 글레이저. 9월 23일 * 미국의 재즈 색소폰 연주자 존 콜트레인. * 대한민국의 국문학자 서정범. 9월 26일 * 일본의 물리학자 고시바 마사토시. * 미국의 가수, 배우 줄리 런던. 9월 27일 - 대한민국의 의사 백낙환. 10월 10일 - 대한민국의 영화배우 주일몽. 10월 12일 - 아르헨티나의 건축가 시저 펠리. 10월 15일 *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 * 대한민국의 군인 윤성민. 10월 18일 - 미국의 가수 척 베리. 11월 3일 - 리투아니아의 대통령 발다스 아담쿠스. 11월 5일 * 대한민국의 희극인 구봉서. * 영국의 작가 존 버거. 11월 6일 - 대한민국의 군인 황영시. 11월 18일 - 일본의 정치인 무토 가분. 11월 20일 - 대한민국의 영화배우 최은희(호적상 출생년월일은 1928년 11월 20일). 11월 24일 * 중국 출신의 미국 물리학자 리정다오. * 이탈리아의 화가 비토리오 미엘레. 11월 25일 - 미국의 극작가 머레이 시스게일. 11월 27일 - 대한민국의 군인 출신 외교관 채명신. 12월 2일 - 대한민국의 소설가 박경리. 12월 27일 - 대한민국의 희극배우 배삼룡. 1월 28일 - 일본의 정치가, 총리 대신 가토 다카아키. 2월 12일 - 대한제국의 정치가, 관료 이완용. 4월 25일 -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 4월 30일 - 미국의 비행사 베시 콜먼. 5월 3일 - 스웨덴의 경제학자 크누트 빅셀 6월 10일 - 스페인의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 7월 23일 - 독립운동가 박열의 배우자가네코 후미코 8월 26일 - 한국의 문학가 나도향. 12월 5일 - 프랑스의 화가 클로드 모네. 12월 25일 - 일본의 123대 천황 다이쇼. 12월 28일 - 한국 독립운동가 나석주. 문학상 물리학상 장 바티스트 페랭 생리학 및 의학상 평화상 화학상 음력월 월건 대소 음력 1일의양력 월일 음력 1일간지 1월 경인 소 2월 13일 계유 2월 신묘 소 3월 14일 임인 3월 임진 대 4월 12일 신미 4월 계사 소 5월 12일 신축 5월 갑오 대 6월 10일 경오 6월 을미 소 7월 10일 경자 7월 병신 대 8월 8일 기사 8월 정유 대 9월 7일 기해 9월 무술 소 10월 7일 기사 10월 기해 대 11월 5일 무술 11월 경자 대 12월 5일 무진 12월 신축 소 1927년 1월 4일 무술
1963년 은 화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1월 1일 - 경상남도 부산시와 동래군 구포읍, 사상면, 북면, 기장면 송정리를 관할로 부산직할시가 설치되었다. 2월 10일 - 규슈 북부 5개시(고쿠라 시,모지 시,도바타 시,야하타 시,와카마쓰 시)통합.이로 인해 기타큐슈 시가 발족된다. 4월 1일 - 기타큐슈 시가 정령지정도시로 지정되다. 5월 14일 - 쿠웨이트, 유엔 가입. 6월 21일 - 교황 바오로 6세, 262대 교황 임기 시작. 6월 26일 -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이 서독 서베를린에서 "나는 베를린 사람입니다"(Ich bin ein Berliner)라는 연설을 하다. 8월 5일 -김활란 이화여대 총장, 막사이사이상 수상. 8월 28일 - 워싱턴 대행진에서, 마틴 루서 킹의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연설을 하다. 8월 30일 -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예편해 민주공화당에 입당. 9월 16일 - 말라야 연방, 사라왁, 북보르네오, 싱가포르가 뭉쳐 말레이시아를 만들다. 9월 30일 - 이준(李儁)의 유해, 56년 만에 네덜란드서 귀환해 서울 수유리에 안장. 10월 14일 - 대한민국과 캐나다가 국교를 수립하다. 10월 15일 - 대한민국,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 후보가 윤보선 후보를 누르고 당선. 11월 22일 - 존 F. 케네디 암살 사건이 일어나다. 12월 11일 - 대한민국과 성좌가 국교를 수립하다. 12월 12일 - 케냐, 영국으로부터 독립. 12월 16일 - 케냐, 유엔 가입 12월 17일 - 대한민국 제3공화국 출범 1월 1일 - 일본 최초의 TV 애니메이션 시리즈인 우주소년 아톰 첫 방영. 3월 22일 - 비틀즈의 첫 정규 음반인 《Please Please Me》가 영국에서 발매되고, 앨범 차트 7위에 오름. 8월 20일 - 대한민국, 서울 교외선 개통. 8월 30일 - 미국과 소비에트 연방, 워싱턴 D.C. 및 모스크바 사이에 핫라인 개통. 9월 1일 - 대한민국 철도청 발족. 9월 10일 - 미국 흑인학생들, 버밍햄 등의 백인학교에 최초로 입학. 9월 15일 - 대한민국에서 최초의 라면인 삼양라면이 판매되다. 9월 21일 - 제5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서울에서 열림(∼29). 10월 3일 - 전라북도 정읍시에 동학 혁명 기념탑 준공. 10월 7일 - 천주교 수원교구 설립. 10월 10일 - 대한민국, 서울 가정 법원 개원. 10월 20일 - 철인 28호 첫 방영. 11월 23일 - 영국, 최장수 드라마이자, 최초의 SF드라마인 닥터후 방영시작. 영화 앨프리드 히치콕의 새 개봉. 1월 2일 - 미국의 전 야구 선수 데이비드 콘 1월 4일 - 독일의 가수 틸 린데만. 1월 10일 -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 전 야구 감독 선동열. 1월 12일 - 대한민국의 소설가 신경숙. 1월 14일 - 미국의 영화 감독 스티븐 소더버그. 1월 25일 - 이탈리아의 테너 가수 마르첼로 조르다니. 1월 26일 - 포르투갈의 축구 감독 조제 모리뉴. 1월 31일 - 대한민국의 소설가 공지영. 2월 11일 - 스페인의 전 축구 선수, 현 축구 감독 호세 마리 바케로. 2월 14일 - 미국의 겁쟁이 강아지 커리지의 애니메이션 감독 존 다이워스. 2월 17일 - 미국의 농구 선수 마이클 조던. 2월 18일 - 스웨덴의 축구 심판 안데르스 프리스크. 3월 10일 - 미국의 음악 프로듀서 릭 루빈 3월 18일 - 대한민국의 음악프로듀서 김창환 3월 21일 * 네덜란드의 전 축구 선수, 현 축구 감독 로날트 쿠만. * 전 인천광역시장 송영길. 3월 23일 - 스페인의 전 축구 선수, 현 축구 감독 미첼. 3월 28일 - 일본의 성우 혼다 지에코. 4월 17일 - 미국의 배우 조엘 머레이. 4월 25일 - 대한민국의 배우 한경선. 4월 26일 - 중국의 배우 이연걸. 4월 27일 - 대한민국의 문화평론가 진중권. 4월 28일 - 대한민국의 야구인 류중일. 4월 30일 - 영국의 영화 감독 제임스 마시. 5월 5일 - 일본의 야구 선수 구도 기미야스. 5월 9일 - 영국의 배우 게리 대니얼스. 5월 11일 - 스웨덴의 소프라노 가수 니나 슈템메. 5월 19일 -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 현 야구 코치 백인호. 5월 22일 - 대한민국의 싱어송라이터 장필순. 6월 7일 - 프랑스의 테너 가수 로베르토 알라냐. 6월 8일 - 일본의 축구 심판 가미카와 도루. 6월 9일 - 미국의 각본가, 영화 감독 데이비드 켑. 6월 11일 - 미국의 영화 제작자 그레그 호프먼. 6월 12일 - 대한민국의 트로트 가수 박진도 6월 17일 - 대한민국의 정치인 민경욱. 6월 21일 - 일본의 만화작가, 명탐정 코난의 작가인 아오야마 고쇼. 본명 아오야마 요시마사. 6월 22일 - 미국의 종합 격투기 선수 랜디 커투어. 6월 25일 - 영국의 가수 조지 마이클 (Wham!) 7월 18일 - 대한민국의 기자 황상무. 7월 22일 - 스페인의 전 축구 선수 에밀리오 부트라게뇨. 7월 27일 - 중국의 배우 견자단. 7월 29일 - 대한민국의 씨름 해설 위원 이만기. 7월 30일 - 미국의 배우 리사 쿠드로. 8월 3일 - 미국의 가수 제임스 헷필드.(메탈리카) 8월 6일 - 미국의 해커 케빈 미트닉. 8월 8일 * 일본의 성우 후카미 리카. * 일본의 성우 시노하라 에미. 8월 9일 - 미국의 가수 휘트니 휴스턴. 8월 14일 - 대한민국의 가수 김장훈. 8월 21일 -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 현 야구 코치 김성현. 8월 25일 - 대한민국의 가수 이상우. 8월 28일 -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 현 야구 감독 이정훈. 9월 5일 - 대한민국의 정치인 장성민. 9월 10일 * 미국의 야구 선수 랜디 존슨. * 일본의 성우 우란 사키코. 9월 11일 - 대한민국의 축구 심판 권종철. 9월 19일 - 영국의 전 축구 선수 데이비드 시먼. 10월 7일 - 대한민국의 경제학자 장하준. 10월 12일 - 대한민국의 가수 김창기. 10월 14일 - 대한민국의 배우 김미경. 10월 27일 * 대한민국의 전 축구 선수, 현 축구 감독 이영진. * 일본의 성우 가네마루 준이치. 10월 31일 - 브라질의 전 축구 선수, 현 축구 감독 둥가. 11월 3일 - 대한민국의 가수 강산에. 11월 4일 - 아르헨티나의 축구 심판 오라시오 엘리손도. 11월 9일 - 중화인민공화국의 전 축구 선수, 현 축구 감독 자슈취안. 11월 19일 - 대한민국의 정치인 최재천. 11월 20일 - 미국의 배우 밍나 원. 12월 3일 - 대한민국의 소설가 김소진. 12월 4일 - 대한민국의 법조인 김재호. 12월 6일 - 대한민국의 정치인 나경원. 12월 9일 - 러시아의 정치인 세르게이 다르킨. 12월 11일 - 대한민국의 정치인 이만희. 12월 15일 - 대한민국의 배우 황신혜. 12월 17일 - 대한민국의 희극인 황기순. 12월 22일 - 이탈리아의 전 축구 선수 주세페 베르고미. 12월 23일 -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 김평호. 12월 29일 - 대한민국의 전 배드민턴 국가대표선수 김문수. 3월 14일 - 한국의 소설가 염상섭. 5월 6일 - 대한민국의 아동문학가 강소천. 6월 3일 * 교황 요한 23세. * 한국의 시인 오상순. 6월 11일 - 베트남의 승려 틱꽝득. 7월 14일 - 일본의 불교학자 우이 하쿠주. 8월 31일 - 프랑스의 미술가 조르주 브라크. 10월 11일 - 프랑스의 가수 에디트 피아프. 10월 17일 - 프랑스의 수학자 자크 아다마르. 11월 2일 - 남베트남의 대통령 응오딘지엠. 11월 12일 - 미국의 군인 존 하지. 11월 22일 * 영국의 소설가 클라이브 스테이플스 루이스. * 영국의 작가 올더스 헉슬리 * 미국의 35대 대통령 존 F. 케네디 11월 24일 -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범 리 하비 오스월드. 문학상 요르기오스 세페리스 물리학상 요하네스 옌젠, 마리아 괴페르트 메이어, 유진 폴 위그너 생리학 및 의학상 존 에클스, 앨런 로이드 호지킨, 앤드루 헉슬리 평화상 국제적십자위원회, 적십자사 화학상 줄리오 나타, 카를 치글러 1963년은 계묘(癸卯)년 이며, 각각의 음력 월은 아래 도표를 참조 한다. 음력월 월건 대소 음력 1일의양력 월일 음력 1일간지 1월 갑인 대 1월 25일 무진 2월 을묘 소 2월 24일 무술 3월 병진 대 3월 25일 정묘 4월 정사 소 4월 24일 정유 윤4월 소 5월 23일 병인 5월 무오 대 6월 21일 을미 6월 기미 소 7월 21일 을축 7월 경신 대 8월 19일 갑오 8월 신유 소 9월 18일 갑자 9월 임술 대 10월 17일 계사 10월 계해 대 11월 16일 계해 11월 갑자 대 12월 16일 계사 12월 을축 소 1964년 1월 15일 계해
전쟁 중 아주머니와 아이가 땔깜용 파편을 구하는 모습. 1950년 은 일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1월 12일 - 미국의 국무장관 애치슨, 애치슨라인 발표. 2월 14일 - 중소 우호 동맹 상호 원조 조약 체결. 3월 3일 - 난아오 전투 발생 3월 10일 - 대한민국 국회에서 유상매입 유상분배 원칙의 농지개혁법안이 통과되었다. 5월 6일 - 프랑스의 로베르 쉬망이 유럽 석탄 철강 공동체 계획을 수립. 6월 10일 - 토요타 자동차 생산인원 감축 저지를 위한 토요타 자동차 노동조합 총파업. 6월 25일 * 한국전쟁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공산군, 38線 전역에서 남침 개시. 6·25 전쟁 발발. * 1950년 FIFA 월드컵 브라질에서 개막.(7월 16일까지 개최함.) ** 이 두 사건은 똑같은 시간(서울 기준시 새벽 4시 정각)에 동시에 발생했다. 6월 28일 - 한국전쟁 조선인민군이 서울을 점령. 6월 28일 - 한강 다리 폭파 사건 약 500-800명 사망 7월 20일 - 한국전쟁 대한민국 정부, 대구에 임시수도를 둠. 8월 3일 - 한국전쟁 다부동 전투 발생. 8월 3일 - 프랑스의 축구 클럽 올랭피크 리옹 창단. 8월 9일 - 난펑 전투 발생 8월 18일 - 한국 전쟁 대한민국의 임시 수도를 대구에서 부산으로 옮기다. 8월 28일 - 대한민국 한국은행, 1차 화폐개혁(조선은행권 원:한국은행권 원 1:1) 단행. 9월 6일 - 대한민국 국군, 여군 창설. 9월 15일 - 한국 전쟁 06시를 기해 인천 월미도로 인천 상륙 작전을 개시하다. 9월 16일 - 한국 전쟁 대한민국 국군과 유엔군, 낙동강 전선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인민군에 총반격 시작. 9월 28일 - 한국전쟁 국군과 유엔군, 서울 탈환. 이날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군에 38선 이북 진격명령. 9월 28일 - 인도네시아 유엔 가입. 10월 1일 - 한국전쟁 대한민국 국군 3 사단 26연대, 강원도 양양군서 한국전쟁 발발후 최초로 38선 넘어 북진. 10월 4일 - 주한 미군방송(AFKN) 라디오, 서울서 첫 전파 발사. 10월 7일 * 테레사 수녀, 사랑의 선교회 설립. * 유엔 총회, 유엔군의 38선 이북 진격과 한국통일부흥위원단(UNCURK) 설치 결의. 10월 9일 - 한국전쟁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주요 기관과 단체 등을 평양에서 철수하면서 임시 수도를 강계로 정함. 10월 11일 - 중국 인민해방군, 티베트 침공. 10월 12일 - 한국전쟁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김일성의 평양철수. 10월 19일 - 한국전쟁 대한민국 국군이 평양을 점령. 10월 29일 - 구스타프 6세, 스웨덴 국왕으로 즉위. 11월 17일 – 텐진 갸초, 15세의 나이로 제14대 달라이 라마가 됨. 11월 6일 - 한국전쟁 맥아더 , 중국 월경(越境) 성명. 11월 24일 - "인권 및 기본 자유권 협정"이 유럽 평의회에서 채택. 11월 26일 -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회(UNCURK) 일행 12명, 서울 도착. 12월 4일 - 한국전쟁 대한민국 국군이 맨 마지막으로 평양을 철수하다. 12월 10일 - 노벨상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수상식이 열렸고, 화학상 2명, 문학상 1명, 평화상 1명, 물리학상 1명, 생리학ㆍ의학상 3명, 총 8명이 수상했다. 12월 14일 - 한국전쟁 흥남 철수작전 개시.(~ 24일까지) 1월 1일 - 대한민국의 가수 겸 기업가 허경영. 1월 2일 - 미국의 클라리넷 연주가 데이비드 시프린. 1월 17일 - 대한민국의 배우 이영하. 1월 19일 - 대한민국의 가수 겸 뮤지컬배우 이승규(탐 리). 1월 25일 - 대한민국의 대학 총장, 교육인 정영선. 1월 27일 - 대한민국의 배우 최종원. 2월 11일 - 대한민국의 가수 나훈아. 2월 16일 - 대한민국의 배우 이효춘. 2월 23일 - 대한민국의 성우 이종구. 2월 25일 - 아르헨티나의 대통령 네스토르 키르치네르. (→ 2010년) 2월 28일 - 홍콩 출신의 영화 배우 윤발. 3월 12일 - 스페인의 전 축구 선수, 현 축구 감독 하비에르 클레멘테. 3월 21일 - 대한민국의 가수 조용필. 3월 24일 - 홍콩 출신의 영화 배우 조사리 4월 20일 - * 러시아의 군인, 정치인 알렉산드르 레베디. (→ 2002년) * 포르투갈의 전 축구 선수, 현 축구 감독 움베르투 코엘류. 5월 3일 - 미국의 영화 감독 조 존스턴. 5월 13일 - 미국의 가수 스티비 원더. 5월 13일 - 대한민국의 성우 엄주환. (→ 2005년) 5월 20일 - 중국의 반체제 인사, 인권 운동가 웨이징성. 6월 3일 - 미국의 여성 싱어송라이터 겸 록 베이스 연주가 수지 쿼트로. 6월 10일 - 대한민국의 배우 김동현. 6월 25일 - 대한민국의 성우 기연호. 7월 3일 - 대한민국의 정치인 정동채. 7월 16일 - 대한민국의 국회의원 이완구. 7월 21일 - 아르헨티나의 전 축구 선수 우발도 피욜. 7월 27일 - 대한민국의 성우 이인성. 7월 28일 - 대한민국의 방송인 임성훈. 7월 31일 - 대한민국의 만화가 김수정. 8월 11일 - 미국의 프로그래머, 해커 스티브 워즈니악. 8월 14일 - 아일랜드의 기업인 더멋 데즈먼드. 8월 19일 - 파키스탄의 정치인 무하마드 미안 숨로. 9월 16일 - 대한민국의 성우 손정아. 9월 18일 - 홍콩 출신의 영화 배우 풍극안 (→ 2016년) 9월 20일 - 대한민국의 가수 이정선. 10월 8일 - 대한민국의 성우 홍승옥. 10월 9일 - 미국의 사회운동가 겸 교사 조디 윌리엄스. 10월 13일 - 일본의 배우 이소베 츠토무. 10월 21일 - 미국의 물리학자 겸 우주비행사 로널드 맥네어. (→ 1986년) 10월 21일 - 홍콩 출신의 영화 배우 태보. 10월 31일 - 이라크 출신의 영국 건축가 자하 하디드. (→ 2016년) 11월 5일 - 대한민국의 국회의원, 국회의장 정세균. 11월 16일 - 아르헨티나의 전 축구 선수 엑토르 발레이. 12월 1일 - 대한민국의 작곡가 박현진 12월 11일 - 대한민국의 성우 나수란. (→ 2012년) 12월 13일 -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 현 야구 감독 송일수. 12월 23일 - 스페인의 전 축구 선수, 현 축구 감독 비센테 델 보스케. 12월 27일 -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 장명부. (→ 2005년) 조지 오웰 구스타프 5세 1월 21일- 영국의 소설가 조지 오웰. (← 1903년) 4월 8일 - 러시아의 무용수 바슬라프 니진스키. (← 1890년) 6월 11일 - 한국의 소설가 채만식. (← 1902년) 7월 22일 - 캐나다의 총리 윌리엄 라이언 매켄지 킹. (← 1874년) 7월 27일 - 대한민국의 군인(초대 육군참모총장) 채병덕. (← 1916년) 9월 - 김병조, 한국의 독립운동가. (← 1877년) 9월 29일 - 대한민국의 시인 김영랑. (← 1903년) 10월 15일 - 한국의 독립운동가 조만식. (← 1883년) 10월 25일 - 한국의 소설가 이광수. (← 1892년) 10월 29일 - 스웨덴의 국왕 구스타프 5세. (← 1858년) 11월 3일 - 조선 총독을 지낸 일본의 군인, 정치인 고이소 구니아키. (← 1880년) 11월 25일 - 중화인민공화국의 군인 마오안잉. (← 1922년) 12월 10일 - 대한제국의 독립운동가 김규식. (← 1881년) 12월 20일 - 대한민국의 기업가 박승직. (← 1864년) 문학상 버트런드 러셀. 물리학상 세실 프랭크 파월 생리학 및 의학상 에드워드 캘빈 켄들, 타데우시 라이히슈타인, 필립 쇼월터 헨치 평화상 랠프 번치 화학상 오토 딜스, 쿠르트 알더 음력월 월건 대소 음력 1일의양력 월일 음력 1일간지 1월 무인 대 2월 17일 계미 2월 기묘 소 3월 19일 계축 3월 경진 대 4월 17일 임오 4월 신사 대 5월 17일 임자 5월 임오 소 6월 16일 임오 6월 계미 대 7월 15일 신해 7월 갑신 소 8월 14일 신사 8월 을유 소 9월 12일 경술 9월 병술 대 10월 11일 기묘 10월 정해 소 11월 10일 기유 11월 무자 대 12월 9일 무인 12월 기축 소 1951년 1월 8일 무신
1998년 은 목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UN이 지정한 바다의 해기도 하다. 1월 2일 - 대한민국 정부, 제일은행과 서울은행을 2월중에 공개매각하기로 결정. 1월 10일 - 대한민국 최초의 사이버 가수 류시아가 탄생되었다. 1월 12일 - 아파트 분양가 자율화 조치. 1월 14일 - 나산그룹, 최종 부도처리. 1월 19일 - 재계 순위 31위, 극동건설 화의 신청. 1월 23일 - 일본, 한일 어업협정 일방적 파기 선언. 2월 2일 - 경향신문, 한화그룹에서 분리. 2월 20일 - MBC 특별취재팀, 충주댐 암반 균열 보도. 2월 25일 - * 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 김영삼 임기가 종료됨. *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김대중 임기가 시작됨. 2월 26일 - 정부, 대동과 동남, 동화, 강원, 평화, 충북은행에 경영개선 조치를 조흥과 경기, 외환, 한일, 충청, 상업은행에 경영개선 권고 명령과 함께, 한솔종합금융과 대구종합금융에는 인가취소를 결정. 3월 2일 - 미국 NASA가 목성의 위성인 유로파에서 물을 발견했다고 발표하다. 3월 3일 - 국내 최대 책 도매업체 보문당 부도. 3월 10일 - 인도네시아 수하르토 대통령, 7번째 연임. 3월 13일 - 사상 최대 2300여명 대사면, 복권 단행. 3월 17일 -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 주룽지를 국무원 총리로 선출. 3월 18일 - 대농그룹, 미도파백화점 부도. 4월 7일 - 92년 총선 당시 김영삼 前 대통령의 대선 자금 3,176억원의 내역이 공개되다. 4월 8일 - 뉴코아그룹의 화의신청을 법원이 기각하다. 4월 21일 - 독일의 테러단체 독일 적군파가 자진 해산하다. 5월 21일 -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 대통령이 32년 만에 퇴진하고, 후임에 하비비 대통령 선출. 5월 28일 - 파키스탄의 핵실험. 5월 30일 -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정진석(니콜라오) 주교를 제13대 서울대교구장에 임명하였다. * 파키스탄의 핵실험. 6월 3일 - 독일 열차 ICE 사고 참사. 6월 4일 - 대한민국 제2회 지방선거 실시. 8월 4일 - 현대그룹,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금강산 유람선 관광사업을 위한 합영회사 설립 계약 체결. 8월 5일 - 대한항공 8702편 활주로 이탈 사고가 일어남. 8월 7일 - 탄자니아 수도 다르에스살람과 케냐 수도 나이로비의 미국 대사관서 대규모 폭탄 테러 발생. 8월 15일 - 대한민국, 김대중 대통령, 당면한 국난극복과 민족 재도약을 위한 “제2건국” 제창. 8월 17일 -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 모니카 르윈스키와 섹스 스캔들 관련해 대국민 사과성명 발표. 8월 18일 - 대한민국, 자유민주연합 김종필(金鍾泌) 총재, 국무총리에 취임. 8월 29일 - 대한민국, 새정치국민회의와 국민신당 합당 공식 선언. 8월 31일 -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대포동 미사일을 발사하였다. * 대한민국 한나라당, 이회창 명예총재를 새 총재로 선출. 9월 2일 - 스위스 항공 여객기가 대서양에 추락, 승객 등 229명 사망. 9월 11일 - 부천 LPG 충전소 폭발 사고 발생. 9월 25일 - 대한민국과 일본, 한일어업협정 개정 교섭 타결. 9월 27일 - 독일 총선서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 후보가 이끄는 독일 사회민주당이 헬무트 콜 총리의 기독민주연합(CDU)/기독사회연합(CSU) 연합을 누르고 승리. 10월 1일 - 미국 뉴욕에서 제3차 북미미사일회담 열림. 10월 6일 - 익산 충전소 가스 폭발 사고 발생. 10월 7일 - 대한민국 김대중 대통령 일본 방문(∼10일). 10월 17일 - 대한민국 인천광역시에서 아시아 여자 보디빌딩 선수권 대회 개최. 10월 19일 - 기아자동차 제 3차 국제 경쟁입찰에서 현대자동차에 낙찰. 11월 14일 - 정보통신운동단체 진보네트워크센터 정식 출범. 11월 15일 - 강원도 원주 중앙선 창교신호장에서 화물열차 8량이 탈선하는 사고가 발생. 11월 24일 - 이슬라마바드에서 중국, 파키스탄,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등 4국이 국경통과운송협정 조인. 11월 25일 - 중국 장쩌민 국가주석, 중국 국가주석으로는 처음으로 일본을 공식 방문. 11월 26일 - 대도 조세형 16년 만에 석방. 12월 4일 - 전라남도 순천시에서 열렸던 《소년소녀가장돕기 콘서트》 현장에서 여학생 관객이 몰리면서 2명 실신, 10여 명 부상. 12월 18일 - 대한민국 해군이 거제도 남쪽 해상에서 북한 반잠수정 격침. 12월 31일 - 제일은행, 미국 뉴 브리지 GE 캐피탈 컨소시엄에 매각. 1월 - 대한민국의 교육부, 7차 교육과정 실시. 1월 7일 - 기아자동차에서 카니발이 시판되었다. 2월 2일 - 대한민국 광주광역시 및 전라남도 일대에서 KBC My FM 개국. 2월 7일~2월 22일 - 나가노 동계 올림픽 대회 개최. 2월 17일 - 삼성자동차(르노삼성자동차의 전신)에서 SM5가 출시되었다.(시판은 3월 5일) 2월 28일 - 정부조직개편 재정경제원 폐지, 재정경제부 출범. 3월 2일 - 대한민국 대전광역시·충청남도 일원(현 세종특별자치시 포함)에서 TJB Power FM 개국. 3월 24일 - 대한민국의 최장수 아이돌 그룹 신화가 데뷔했다. 3월 27일 - 대우자동차(한국GM의 전신)에서 마티즈가 출시되었다.(시판은 4월 1일) 5월 2일 - 대구 도시철도 1호선 중앙로 ~ 안심 구간이 개통되면서 완전 개통되었다. 5월 12일 - 대한민국의 걸그룹 핑클이 데뷔하였다. 6월 1일 - 유럽 중앙 은행 출범. 6월 10일~7월 12일 - 에서 제 16회 프랑스 월드컵 대회 개최. 6월 25일 - 윈도우 98이 출시되었다. 6월 27일 -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 개항. 7월 6일 - 홍콩 국제공항 개항. 7월 12일 - 제 16회 1998년 FIFA 월드컵 대회 결승전에서 프랑스가 브라질을 3:0으로 이겨 처음으로 FIFA 월드컵에서 우승하고, 다섯 번째 우승을 노리던 브라질은 프랑스에 0:3으로 패배하며 준우승을 차지했다. 9월 11일~11월 10일 - 경주세계문화엑스포 개막. 9월 18일 - 인터넷 도메인 이름과 IP 주소를 할당하는 비영리 단체인 ICANN이 설립되다. 9월 26일 - 제1회 방콕국제영화제에서 장선우 감독 《꽃잎》 최고상 수상. 9월 27일 - 구글이 공식적으로 창립되다. 11월 18일 - 대한민국, 1999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실시하다. 11월 18일 - 금강산 관광시작(금강호 출항). 1월 1일 - 오스트레일리아의 배우 라라 로빈슨 1월 6일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이승우. 1월 12일 - 미국의 배우 네이선 갬블. 1월 16일 - 대한민국의 가수 승관 (세븐틴). 1월 23일 - 일본의 래퍼 유토 (펜타곤). 1월 26일 * 대한민국의 가수 정찬우 (iKON). * 대한민국의 가수 문빈 (아스트로). 1월 27일 - 대한민국의 가수 키노 (펜타곤). 1월 28일 - 미국의 배우 애리얼 윈터. 1월 31일 - 대한민국의 래퍼 우석 (펜타곤). 2월 3일 - 대한민국의 가수 유설. 2월 4일 - 대한민국의 가수 신준섭 (마이틴). 2월 5일 - 대한민국의 배우 이현주. 2월 8일 - 대한민국의 배우 노태엽. 2월 15일 - 미국의 배우 재커리 고든. 2월 16일 - 대한민국의 배우 서영주. 2월 18일 - 미국의 래퍼 버논 (세븐틴). 2월 19일 * 대한민국의 가수 정우 (NCT). * 미국의 가수 샘 김. 2월 23일 - 캐나다의 가수 케빈 (더 보이즈). 2월 25일 - 대한민국의 배우 이한나. 3월 11일 - 중화민국의 배우 비비안. 3월 19일 - 일본의 가수 미야와키 사쿠라 (HKT48&AKB48). 3월 26일 - 대한민국의 가수 미래 (체리블렛). 4월 1일 - 대한민국의 배우 이준혁. 4월 4일 - 대한민국의 배우 서지희. 4월 6일 - 미국의 배우 페이턴 리스트. 4월 13일 - 대한민국의 래퍼 TAG (골든차일드). 4월 26일 - 대한민국의 가수 뉴 (더 보이즈). 4월 28일 - 대한민국의 가수 송유빈 (마이틴). 5월 6일 * 대한민국의 가수 환희 (업텐션). * 대한민국의 가수 시현. 5월 27일 - 대한민국의 가수 은서 (우주소녀). 5월 28일 - 대한민국의 래퍼 다현 (트와이스). 5월 29일 - 대한민국의 배우 전유림. 6월 3일 * 대한민국의 가수 신비 (여자친구). * 대한민국의 가수 태하 (모모랜드). 6월 4일 - 대한민국의 가수 정예인 (러블리즈). 6월 5일 - 러시아의 피겨스케이터 율리야 리프니츠카야. 6월 23일 - 대한민국의 가수 신지훈. 7월 1일 - 대한민국의 가수 은우 (프리스틴). 7월 3일 - 대한민국의 가수 김동한 (JBJ). 7월 8일 - 미국의 배우 제이든 스미스. 7월 10일 - 대한민국의 배우 이영유. 7월 15일 - 대한민국의 가수 성소 (우주소녀). 7월 18일 - 대한민국의 배우 정지인. 7월 24일 - 마카오 와 홍콩 의 기독교 목사 양군배. 7월 31일 - 대한민국의 가수 나윤 (모모랜드). 8월 5일 * 일본의 가수 스즈키 카논 (모닝구무스메). * 대한민국의 야구선수 이병휘. 8월 10일 - 대한민국의 가수 장예은 (CLC). 8월 19일 - 대한민국의 가수 엄지 (여자친구). 8월 20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이정후 (넥센 히어로즈) 9월 9일 - 대한민국의 쇼트트랙 선수 최민정 9월 17일 - 대한민국의 가수 김동현 (MXM). 10월 19일 - 대한민국의 래퍼 레나 (프리스틴). 10월 20일 - 대한민국의 배우 서신애. 11월 2일 - 중국의 가수 엘키 (CLC). 11월 5일 - 대한민국의 가수 큐 (더 보이즈). 11월 10일 - 대한민국의 가수, 배우 MC그리. 11월 11일 * 대한민국의 배우 오재무. * 대한민국의 배우 강이석. 11월 25일 - 대한민국의 배우 신동우. 12월 13일 - 대한민국의 가수 샤오 (업텐션). 12월 14일 - 대한민국의 가수 제이니 (지피 베이직). 12월 16일 - 중국의 가수 결경 (프리스틴). 12월 20일 - 미국의 가수 크리샤 츄. 12월 22일 - 미국의 배우 G. 해널리우스. 태미 와이넷 폴 포트 프랭크 시나트라 1월 7일 - 미국 수학자 리처드 해밍. 2월 10일 - 프랑스의 정치가, 언론인 모리스 쉬망. 2월 24일 - 미국의 사회운동가, 여성운동가 클라라 프레이저. 4월 6일 - 미국의 가수 태미 와이넷. 4월 15일 - 캄보디아의 독재자 폴 포트. 4월 23일 - 마틴 루서 킹의 암살범 제임스 얼 레이. 5월 2일 - 일본의 음악가 히데. 5월 14일 - 미국의 가수 프랭크 시나트라. 6월 10일 - 일본의 작곡가 요시다 다다시. 6월 18일 - 대한민국의 영화배우 김진규. 8월 3일 - 러시아의 작곡가 알프레트 시닛케. 8월 6일 - 프랑스 수학자 앙드레 베유. 8월 26일 - 대한민국의 기업가 최종현. 8월 29일 - 미국의 정치인, 로스앤젤레스의 첫 흑인 시장 토머스 브래들리. 9월 6일 - 일본의 영화감독 구로사와 아키라. 9월 16일 - 대한민국의 시인 박두진. 11월 7일 - 영국의 산악인 존 헌트. 12월 17일 - 대한민국의 변호사 이태영. 경제학상 아마르티아 센 문학상 조제 사라마구 물리학상 로버트 러플린, 호르스트 슈퇴르머, 대니얼 추이 생리학 및 의학상 페리드 뮤라드, 루이스 이그나로, 로버트 퍼치고트 평화상 데이비드 트림블, 존 흄 화학상 존 포플, 월터 콘 작품상 타이타닉 감독상 제임스 카메론(타이타닉) 남우주연상 잭 니콜슨(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여우주연상 헬렌 헌트(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남우조연상 로빈 윌리엄스(굿 윌 헌팅) 여우조연상 킴 베이싱어(LA 컨피덴셜) 음력월 월건 대소 음력 1일의양력 월일 음력 1일간지 1월 갑인 대 1월 28일 을해 2월 을묘 소 2월 27일 을사 3월 병진 소 3월 28일 갑술 4월 정사 대 4월 26일 계묘 5월 무오 소 5월 26일 계유 윤5월 소 6월 24일 임인 6월 기미 대 7월 23일 신미 7월 경신 대 8월 22일 신축 8월 신유 소 9월 21일 신미 9월 임술 대 10월 20일 경자 10월 계해 대 11월 19일 경오 11월 갑자 대 12월 19일 경자 12월 을축 소 1999년 1월 18일 경오
1946년 은 화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임시정부(臨時政府) 대한민국(大韓民國) 28년 1월 2일 - 공산당, 모스크바 삼상(三相)회의 결정에 대해 찬성을 결의. 1월 15일 - 남조선국방경비대 창설. 1월 16일 - 서울 덕수궁에서 1차 미소(美蘇)공동위원회 개최. 2월 - 북조선 임시위원회 결성. 2월 3일 - 통화 사건 3월 2일 - 호치민이 북베트남의 대통령으로 선출되다. 5월 9일 -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이탈리아 왕국 국왕 퇴위. 5월 15일 - 부산대학교 개교 6월 3일 - 정읍 발언 6월 9일 - 라마 9세가 태국의 국왕으로 취임. 6월 18일 - 이탈리아 공화국 선포. 6월 - 존 F. 케네디가 하원의원에 당선되다. 7월 4일 - 필리핀 독립. 8월 22일 - 유럽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 팔레스타인으로 이주 시작 9월 17일 - 한국 군정기 수도경찰청 발족(청장 장택상) 9월 20일 - 제1회 칸 영화제가 개막했다. 9월 24일 - 군정기 남한 철도종업원들 총파업. 9월 총파업의 시작. 9월 30일 - 제2차 세계 대전 전범 처벌을 위한 뉘른베르크 전범(戰犯)재판에서 12명의 나치 지도자에게 사형 선고 10월 1일 - 미군정 지역에서 대구 10·1 사건 발생. 10월 1일 - 제2차 세계 대전 전범 처벌을 위한 뉘른베르크 재판 종료 10월 6일 - 경향신문 창간 10월 13일 - 군정기 청년 민족운동 단체인 조선 민족청년단(약칭:족청), 이범석을 단장으로 결성 10월 15일 - 나치 공군 총사령관 헤르만 괴링,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전범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수감중에 자살하다. 11월 11일 - 강릉원주대학교 설립 10월 16일 -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소, 나치 핵심전범 9명 교수형 집행 11월 19일 - 스웨덴, 아이슬란드, 아프가니스탄 유엔 가입 12월 16일 - 타이 유엔 가입 1월 1일 - 브라질의 축구 선수 호베르투 히벨리누 1월 6일 - * 영국의 뮤지션 시드 배릿. * 독일의 전 축구 선수 베른트 횔첸바인. 1월 30일 - 대한민국의 성우 조동희. 2월 9일 - 대한민국의 정치가 안상수. 2월 14일 - 미국의 무용가 그레고리 하인스. 2월 21일 - 영국의 배우 알란 릭맨. 2월 24일 - 러시아의 수학자, 필즈상 수상자 그리고리 마르굴리스. 2월 25일 - 대한민국의 기업인 최길선. 3월 9일 - 대한민국의 배우 윤복희. 4월 23일 - 우크라이나의 전 축구 선수, 현 축구 감독 아나톨리 비쇼베츠. 4월 25일 - 러시아의 정치가 블라디미르 지리놉스키. 4월 30일 - 칼 16세 구스타프, 스웨덴 국왕. 5월 1일 - 대한민국의 성우 김태훈. 5월 8일 - 대한민국의 배우 김용건. 5월 10일 - 대한민국의 피아노 연주자 백건우. 5월 22일 - 영국의 전 축구 선수 조지 베스트. 5월 28일 - 대한민국의 정치가 안상수. 5월 30일 * 세르비아의 전 축구 선수 드라간 자이치. * 타이의 정치가 수파차이 파닛차팍. 6월 2일 - 대한민국의 가수 송대관. 6월 2일 - 일본의 성우 니시무라 토모미치. 6월 14일 - 미국 제45대 대통령, 전 부동산업자 도널드 트럼프. 6월 15일 - 네덜란드의 전 축구 선수, 현 축구 감독 요하네스 본프레러. 6월 18일 - 이탈리아의 전 축구 선수, 현 축구 감독 파비오 카펠로. 7월 6일 - * 미국의 제43대 대통령 조지 W. 부시. * 미국의 영화 배우 실베스터 스탤론. 7월 8일 - 대한민국의 배우 김흥기. 7월 27일 - 크로아티아의 배우 라데 셰르베지야. 8월 9일 - 대한민국의 정치인 맹형규. 8월 19일 - * 대한민국의 배우 노주현. * 미국의 제42대 대통령 빌 클린턴. 9월 1일 - * 대한민국의 제16대 대통령 노무현. * 영국의 가수 배리 깁. 9월 5일 - 영국의 록 가수 프레디 머큐리. 9월 10일 - 대한민국의 소설가 이외수. 9월 20일 - 대한민국의 목사 하용조. 10월 3일 - 대한민국의 성우 배한성. 10월 8일 - 대한민국의 성우 박영남. 10월 11일 - 대한민국의 전 축구 선수, 현 축구 감독 이회택. 10월 16일 - 대한민국의 시인 김남주. 10월 20일 - 오스트리아의 소설가 엘프리데 옐리네크. 10월 25일 - 일본의 야구 선수, 야구 감독 야마모토 고지. 10월 30일 - 미국의 수학자, 필즈상 수상자 윌리엄 서스턴. 11월 8일 - 네덜란드의 전 축구 선수, 전 축구 감독 거스 히딩크. 11월 13일 - 대한민국의 작가 한수산. 11월 23일 - 대한민국의 방송인 이계진. 12월 2일 - 영국의 디자이너 데이비드 매콜리. 12월 5일 - 에스파냐의 테너 가수 호세 카레라스. 12월 10일 - 대한민국의 배우 남능미. 12월 18일 - 미국의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 12월 24일 - 중국의 전산학자 앤드루 야오. 12월 26일 - 대한민국의 배우 박용식. 12월 28일 - 대한민국의 성우 김정호. 12월 30일 - * 미국의 가수 패티 스미스. * 독일의 전 축구 선수, 현 축구 감독 베르티 포크츠. 미국의 기업인 톰 힉스. 2월 2일 - 체코 소설가 에두아르트 바스 3월 23일 * 미국의 물리화학자 길버트 뉴턴 루이스. * 스페인의 총리, 사회운동가 프란시스코 라르고 카바예로. 4월 21일 - 영국의 경제학자 존 케인즈(John Maynard Keynes) 6월 3일 - 미하일 칼리닌, 러시아 혁명가. 6월 10일 - 미국의 권투 선수 잭 존슨. 10월 15일 - 나치 독일의 정치가 헤르만 괴링. 10월 16일 - 나치 독일의 정치가 알프레트 로젠베르크. 10월 23일 - 미국의 동물학자 어니스트 톰프슨 시턴. 11월 22일 - 오토 게오르크 티라크, 독일의 법학자. 문학상 헤르만 헤세 물리학상 퍼시 윌리엄스 브리지먼 생리학 및 의학상 평화상 화학상 음력월 월건 대소 음력 1일의양력 월일 음력 1일간지 1월 경인 대 2월 2일 정미 2월 신묘 소 3월 4일 정축 3월 임진 소 4월 2일 병오 4월 계사 대 5월 1일 을해 5월 갑오 소 5월 31일 을사 6월 을미 소 6월 29일 갑술 7월 병신 대 7월 28일 계묘 8월 정유 소 8월 27일 계유 9월 무술 대 9월 25일 임인 10월 기해 대 10월 25일 임신 11월 경자 소 11월 24일 임인 12월 신축 대 12월 23일 신미
1997년 은 수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2월 12일 - 황장엽 조선노동당 국제담당 서기가 대한민국으로 망명했다. 2월 21일 - 대한민국 프로 농구가 출범하다. 2월 25일 - 김정일의 전처인 성혜림의 조카이자 방송PD인 이한영이 피습당하여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4월 1일 - 우주피스 공화국의 건국일. 우주피스 공화국은 1년에 단 하루만 열리는 나라다. 4월 17일 - 대한민국 대법원이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는 무기징역과 2,205억 원의 추징금을,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는 징역 17년과 추징금 2,628억 원을 선고하다. 4월 22일 - * 진로그룹 부도. * 투팍 아마루 반군에 의한 페루 리마 주재 일본 대사관 점거사건이 종료되다. 5월 1일 - 영국에서 총선이 실시되어 다음날 토니 블레어가 총리에 취임하다. 5월 15일 - 채널 터널이 전체 복구되다. 5월 17일 - 자이르의 반군이 수도 킨샤샤에 입성. 자이르 정부군의 무조건 항복 요구. 5월 18일 - 자이르 반군이 국정 전반을 장악. 콩고 민주 공화국으로 개칭. 6월 2일 - 한신공영그룹 부도. 7월 1일 - 홍콩이 영국에서 중국으로 반환되다. 7월 4일 - 패스파인더 화성 탐사선이 화성 에 착륙하여 1997년 9월 27일까지 지구로 사진과 정보를 전송하다. 7월 15일 - 경상남도 울산시가 울산광역시로 승격되다. 8월 6일 - 대한항공 801편이 괌에서 추락하여 228명이 사망하고 26명이 부상을 입었다. 8월 15일 - 대한민국, 김영삼 대통령, 광복절 기념사서 한반도 평화정착 위한 4대 원칙 발표. 8월 19일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경수로 착공. * 유엔 통계국, 세계인구 57억 5천 100만 명이라고 발표. 8월 31일 - 다이애나 스펜서 당시 전 영국 왕세자비가 프랑스 파리에서 연인으로 추정되는 도디 알파에드와 교통사고로 사망. 9월 3일 - * 원자력 발전소 월성 2호기 준공. * 베트남 항공 여객기 프놈펜 인근 추락, 한국인 21명 포함 65명 사망. 9월 12일 - * 박초롱초롱빛나리(박나리)양 유괴사건의 피해자인 박나리양, 13일 만에 숨진 채 발견. 용의자는 20대 여성으로 몸값을 노리고 여아를 살해했다고 자백. *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 스티븐 보스워스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 사무총장을 주한 미국 대사로 임명. 9월 13일 - * 이인제 경기지사, 신한국당 탈당 대통령선거 출마 공식 선언. * 테레사 수녀가 향년 86세로 사망. 9월 19일 - 대한민국 법무부, 양계혈통주의를 골자로 한 국적법 개정안 마련. 10월 1일 - 한국통신, 정부출자기관으로 전환. 10월 3일 - 국제원자력기구(IAEA),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핵시설물 사찰과 관련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에 전면적 협조 촉구 결의안 채택. 10월 8일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중앙방송, 김정일의 당총비서직 공식추대 발표. 10월 12일 - 대한제국 수립 100주년. 10월 15일 - * 쌍방울 그룹 화의 신청. * 카시니-하위헌스 호가 토성을 향해 발사되다. 11월 7일 - 김영삼 대통령이 신한국당 탈당을 하고 무소속 전향하여 대한민국 무여당 체제 돌입. 11월 10일 - 미국, 월드컴과 MCI 통신사가 370억달러 규모의 대규모 합병을 선언하다. 미국 역사에서 최대 규모 합병이었다. 11월 17일 - 이집트 룩소르에서 관광객 62명이 이슬람교 근본주의자들에게 살해되다. 존 덴버는 조종하다 비행기 추락해 사망하였다. 11월 21일 - 대한민국 정부가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하다(IMF 위기), 신한국당이 한나라당으로 개명하였다. 11월 26일 - 재미 한국인들, 모국에 달러 보내기 운동 시작. 12월 3일 - IMF 자금지원 협상이 정부종합청사에서 5시간의 마라톤 회의 끝에 타결. 12월 8일 - 대우그룹, 쌍용자동차 지분 53.5%와 경영권 인수 합의. 12월 16일 - * 환율 제한폭이 철폐되다. 한화그룹, 한화에너지와 한화에너지 플라자 매각 결정. * 일본에서 포켓몬스터 38화인 전뇌전사 폴리곤을 시청하던 600명 이상의 어린이들이 발작을 일으켜 1998년 4월 15일까지 119일 동안 방영되지 않는 사건이 일어나다. 12월 19일 - 대한민국의 15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金大中)이 당선되다. 12월 22일 -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특별사면복권으로 석방되다. 2월 18일 - 대우자동차(한국GM의 전신)에서 누비라를 출시하다. 3월 2일 - 초등학교 교과목에 3~6학년 영어가 추가되었다. 3월 3일 - 현대자동차에서 스타렉스를 출시하다. 3월 27일 - 기아자동차에서 엔터프라이즈를 출시하다. 2월 18일 - 대우자동차(한국GM의 전신)에서 레간자를 출시하다. 4월 15일 - 대한민국의 아이돌 그룹 젝스키스가 데뷔하다. 4월 25일 - 청주불교방송 5번째 개국. 4월 28일 - 청주국제공항 개항. 5월 11일 - IBM 사의 컴퓨터 딥 블루가 처음으로 체스 세계 챔피언 게리 카스파로프를 이기다. 8월 28일 - 현대자동차에서 아토스를 출시하다. 8월 29일 - 대한민국, 제1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개막. 9월 1일 - 울산방송 ubc TV 개국. 9월 9일 - 대한민국 부산광역시에서 PSB Blue Wave 라디오(현 KNN 파워 FM) 개국. 9월 27일 - 전주방송 JTV TV 개국. 9월 28일 - 대한민국, 98 프랑스월드컵 아시아 예선전서 일본을 꺾어 월드컵 본선 4회연속 진출 성공. 10월 1일 - :: 대한민국, 개인휴대통신(PCS) 상용서비스 개시. :: 훈민정음, 조선왕조실록 유네스코가 정한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록. 10월 6일 - 제주도에서 제 42회 아시아 태평양 영화제 개막식. 10월 11일 - 대한민국 인천광역시일원,경기도일부지역 에서 iTV 인천방송 텔레비전 개국. 10월 14일 - 쌍용자동차에서 체어맨을 출시하다. 10월 18일 - 청주방송 CJB TV 개국. 11월 19일 - 대한민국, 1998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실시하다. 11월 26일 - 대구 도시철도 1호선 진천 ~ 중앙로 구간 개통. 12월 1일 - 대한민국 대구광역시 및 경상북도 일원에서 TBC 드림FM 개국. 12월 2일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경기도 및 인천광역시 일원에서 경기방송 개국. 12월 20일 - 대한민국 광주광역시 및 전라남도 일원에서 TBN 광주교통방송 개국. 12월 23일 - 대한민국 부산광역시 일원에서 TBN 부산교통방송 개국. 1월 1일 - 대한민국의 사격 선수 김청용. 1월 3일 - 대한민국의 가수 김동혁 (iKON). 1월 7일 * 대한민국의 가수 유현 (드림캐쳐) * 대한민국의 가수 지니 (굿데이). 1월 11일 - 대한민국의 프로게이머 이승현. 1월 21일 - 미국의 성우, 배우 제러미 세이더. 1월 22일 - 대한민국의 가수 준 (유키스, 유앤비). 1월 30일 - 대한민국의 쇼트트랙 선수 심석희. 1월 31일 - 대한민국의 가수 미연 ((여자)아이들). 2월 1일 - 대한민국의 가수 지효 (트와이스). 2월 10일 - 미국의 배우 클로이 그레이스 머레츠. 2월 11일 - 대한민국의 가수 로제 (블랙핑크). 2월 12일 - 대한민국의 래퍼 은수 (마이틴). 2월 14일 - 대한민국의 가수 재현 (NCT). 2월 17일 - 대한민국의 배우 이서원. 2월 18일 - 대한민국의 가수 도겸 (세븐틴). 2월 26일 - 대한민국의 가수 유승우. 2월 28일 - 대한민국의 가수 태양 (SF9). 3월 3일 - 대한민국의 래퍼 이장준 (골든차일드). 3월 4일 - 대한민국의 전 래퍼 권현빈. 3월 5일 - 대한민국의 가수 유주 (체리블렛). 3월 6일 - 대한민국의 가수 루다 (우주소녀). 3월 7일 - 대한민국의 래퍼 다미 (드림캐쳐). 3월 8일 - 일본의 가수 마쓰이 주리나. 3월 10일 - 대한민국의 래퍼 육지담. 3월 15일 * 미국의 방송인 티아. * 대한민국의 배우 정승원. 3월 17일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백승호. 3월 19일 - 대한민국의 배우 곽동연. 3월 20일 - 대한민국의 배우 강민아. 3월 24일 - 일본의 가수 미나 (트와이스). 3월 27일 - 태국의 가수 리사 (블랙핑크). 3월 30일 - 대한민국의 가수 차은우 (아스트로). 3월 31일 - 대한민국의 가수 구준회 (iKON). 4월 4일 - 대한민국의 가수 지호 (오마이걸). 4월 6일 - 대한민국의 래퍼 민규 (세븐틴). 4월 8일 - 대한민국의 가수 우진 (스트레이 키즈). 4월 15일 - 대한민국의 가수 김국헌 (마이틴). 4월 16일 - 대한민국의 가수 다원 (우주소녀). 4월 20일 - 대한민국의 가수 지수연 (위키미키). 4월 22일 - 네덜란드의 축구 선수 질 로르트. 4월 23일 - 대한민국의 피겨 스케이팅 선수 김해진. 4월 25일 - 대한민국의 배우 서지훈. 4월 28일 - 대한민국의 야구선수 최성영. 5월 2일 - 태국의 래퍼 뱀뱀 (GOT7). 5월 4일 - 대한민국의 배우 최우혁. 5월 30일 - 대한민국의 가수 은하 (여자친구). 5월 31일 - 대한민국의 가수 정세운 6월 3일 - 대한민국의 배우 신세휘. 6월 13일 - 대한민국의 가수 진솔 (이달의 소녀). 6월 19일 - 대한민국의 래퍼 뉴썬 (소나무). 6월 26일 - 대한민국의 가수 백예린 (15&). 6월 27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박세진. 7월 5일 * 대한민국의 가수 박지민 (15&). * 대한민국의 가수 체리 (굿데이). 7월 7일 - 일본의 가수 이쿠타 에리나 (모닝구무스메). 7월 12일 - 파키스탄의 여성인권운동가 말랄라 유사프자이. 7월 13일 - 대한민국의 가수 예빈 (다이아). 7월 28일 - 대한민국의 프로게이머 조성주. 7월 29일 - 대한민국의 가수 로아 (프리스틴). 8월 4일 - 대한민국의 아역배우 심혜원. 8월 5일 * 중국의 배우 쉬자오. * 중국의 래퍼 왕이보 (유니크). 8월 6일 - 대한민국의 가수 키세스. 8월 7일 - 대한민국의 컬링 선수 장혜지. 8월 13일 - 대한민국의 배우 여진구. 8월 19일 - 대한민국의 가수 솔빈 (라붐). 8월 22일 - 대한민국의 배우 김채빈. 8월 28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황선도. 9월 1일 - 대한민국의 가수 정국 (방탄소년단). 9월 7일 - 잉글랜드의 배우 딘찰스 채프먼. 9월 9일 - 대한민국의 가수 비니 (오마이걸). 9월 25일 * 대한민국의 가수 마루. * 대한민국의 래퍼 도한세 (빅톤). 10월 3일 - 대한민국의 가수 방찬 (스트레이 키즈). 10월 4일 - 대한민국의 가수 유주 (여자친구). 10월 20일 - 대한민국의 국악인 송소희. 10월 23일 - 태국의 가수 민니 ((여자)아이들). 10월 24일 - 대한민국의 피겨 스케이팅 선수 박소연. 10월 28일 * 대한민국의 배우 강산. * 중국의 가수 윈윈 (NCT,WayV). 11월 5일 - 대한민국의 가수 유하 (프리스틴). 11월 7일 - 중국의 가수 디에잇 (세븐틴). 11월 8일 * 대한민국의 가수 김채원 (에이프릴). * 대한민국의 배우 류원. 11월 12일 - 대한민국의 가수 최병찬 (빅톤). 11월 17일 - 대한민국의 가수 유겸 (GOT7). 11월 19일 - 대한민국의 가수 류수정 (러블리즈). 11월 21일 - 대한민국의 가수 규진 (업텐션). 11월 25일 - 대한민국의 배우 지우. 11월 27일 - 대한민국의 전 가수 율희. 12월 1일 - 대한민국의 가수 정채연 (다이아, 아이오아이) 12월 20일 - 대한민국의 가수 제인 (모모랜드). 12월 23일 - 대한민국의 배우 박유나. 12월 26일 - 대한민국의 배우 차다영. 멜빈 캘빈 클라이드 톰보 덩샤오핑 제임스 스튜어트 웨일스 공비 다이애나 테레사 수녀 모부투 세세 세코 존 덴버8월1일 일본의 연쇄살인범 나가야마 노리오 1월 8일 - 미국의 화학자 멜빈 캘빈 1월 17일 - 미국의 천문학자 클라이드 톰보. 2월 3일 - 체코 작가 보후밀 흐라발. 2월 19일 - 중화인민공화국의 지도자 덩샤오핑. 2월 25일 - 방송국 PD 이한영 5월 29일 - 미국의 가수 제프 버클리. 6월 2일 - 미국의 경제학자 마틴 브론펜브레너. 7월 2일 - 미국의 영화 배우 제임스 스튜어트 7월 10일 - 대한민국 기업가 김인득. 7월 26일 - 일본의 수학자 고다이라 구니히코. 8월 1일 - 러시아의 피아니스트 스뱌토슬라프 리흐테르. *일본의 연쇄살인범 나가야마 노리오 8월 4일 - 잔 칼망, 프랑스인으로 세계 최장수 인물. 8월 6일 - * 박용철, 대한항공 조종사. * 송경호, 대한항공 조종사. * 신기하, 대한민국의 정치인. * 장세준, 대한민국의 성우. * 정경애, 대한민국의 성우. 8월 31일 - 웨일스 공비 다이애나, 영국 찰스 왕세자의 전 부인. 9월 5일 - 테레사 수녀. 9월 7일 - 자이르 (현 콩고민주공화국)의 독재자 모부투 세세 세코. 10월 12일 - 미국의 가수 존 덴버. 11월 29일 - 미국의 정치인·디트로이트의 첫 흑인 시장 콜먼 영. 12월 30일 - * 일본 소설가 호시 신이치. * 대한민국의 범죄자 김용제. 경제학상 로버트 머턴, 마이런 숄즈 문학상 다리오 포 물리학상 스티븐 추, 클로드 코엔-타누지, 윌리엄 다니엘 필립스 생리학 및 의학상 스탠리 프루지너 평화상 조디 윌리엄스, 지뢰 금지 국제 운동 화학상 폴 보이어, 존 E. 워커, 옌스 스코우 작품상 잉글리쉬 페이션트 감독상 앤소니 밍겔라(잉글리쉬 페이션트) 남우주연상 제프리 러시(샤인) 여우주연상 프랜시스 맥도먼드(파고) 남우조연상 쿠바 구딩 주니어(제리 맥과이어) 여우조연상 쥴리엣 비노쉬(잉글리쉬 페이션트) 음력월 월건 대소 음력 1일의양력 월일 음력 1일간지 1월 임인 소 2월 8일 신사 2월 계묘 소 3월 9일 경술 3월 갑진 대 4월 7일 기묘 4월 을사 소 5월 7일 기유 5월 병오 대 6월 5일 무인 6월 정미 소 7월 5일 무신 7월 무신 대 8월 3일 정축 8월 기유 대 9월 2일 정미 9월 경술 소 10월 2일 정축 10월 신해 대 10월 31일 병오 11월 임자 대 11월 30일 병자 12월 계축 소 12월 30일 병오
1941년 은 수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임시정부(臨時政府) 대한민국(大韓民國) 23년 만주국(滿州國) 강덕(康德) 8년 1월 1일 - 중국 시안의 한국청년공작대가 대한광복군 제5지대로 편입 1월 25일 - 조선총독부가 사상통제 목적으로 조선음악가협회 조직 2월 12일 - 일제가 조선사상범예방구금령 공포 2월 22일 - 조선미술가협회 조직 3월 2일 - 제2차 세계 대전 불가리아가 추축국에 합류한 이후, 첫 번째 독일군 부대가 불가리아로 진주하다. 3월 8일 - 일제, 농업노무자 임금 전면 통제 3월 11일 - 제2차 세계 대전 미국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이 무기대여법에 서명. 3월 15일 - 조선총독부, 학도정신대 조직 및 근로동원 실시 3월 25일 - 일제, 조선교육령 개정, 소학교를 국민학교로 개칭 3월 31일 - 일제, 국민학교규정 공포로 조선어 학습 폐지 4월 1일 - 평원선 개통, 일제가 생활필수물자통제령 공포시행 4월 5일 - 조선만화인협회 결성 4월 20일 -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미주 각 한인단체 대표가 한족연합위원회 조직 4월 23일 - 조선불교 총본산으로 태고사 (조계사) 결정 5월 10일 - 조선 전역에서 도의원선거 실시 5월 20일 - 한국독립당 제1차 전당대회 개최 5월 21일 - 일제가 무역통제령 공포 6월 22일 - 나치 독일이 소련에게 선전포고, 작전명 바르바로사 를 실행해 소련으로 치고 들어간다. 6월 23일 - 리투아니아 행동전선(Lithuanian Activist Front)이 소비에트 연방로부터 독립을 선포하다. 그러나 이 독립은 몇 주 후 독일군이 점령하면서 짧은 시간만 지속되었다. 6월 30일 - 한반도 남부 일대 호우로 경부선, 호남선 마비 7월 1일 - 한글 전보 폐지 7월 2일 - 조선영화협회 창립 7월 20일 - 조선잡곡배급통제규칙 공포 8월 - 보천교 사건 관련자 6명 사형 선고 8월 14일 - 제2차 세계 대전 윈스턴 처칠과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이 뉴펀들랜드의 알겐티아 근처의 안전한 은둔처의 군함에 타서 비밀 회의 후, 대서양 헌장을 내다. 8월 26일 - 일제, 외국인의 조선 입국 제한 9월 3일 - 제2차 세계 대전 독일, 아우슈비츠 수용소서 유대인 독가스 학살 시작 9월 8일 - 제2차 세계 대전 독일이 소련의 레닌그라드에 대해 포위공격 을 시작하다. 이 포위는 900여일간 계속되었다. 9월 14일 - 제2차 세계 대전 나치 독일군, 소련 레닌그라드 교외로 진격(레닌그라드 공방전) 9월 16일 - 일제 강점기 조선 총독부, 중등이상의 학교 남녀학생들에게 학교총결대 결성 지시 9월 21일 - 일제, 국민개로운동을 조선 전역에 일제히 실시 10월 2일 - 제2차 세계 대전 독일군, 모스크바 총공격 개시(모스크바 공방전) 10월 16일 - 일제, 전화통화 도수 및 통화시간 제한 10월 18일 - 도조 히데키가 일본의 총리에 취임. 11월 -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미국 워싱턴에 구미외교위원회 설치 11월 15일 - 조선언론보국회 조직 11월 25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회의, 중국군사위원회가 제시한 한국광복군 행동준승 승인, 중국의 원조를 받는 대신 작전지휘권은 중국군이 장악토록 함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한민국 건국강령 발표, 정치이념과 독립전쟁 준비를 천명 11월 26일 - 제2차 세계 대전 미국 국무장관, 일본에 대륙침략에서 손을 떼도록 최후통첩을 내림. 11월 26일 - 제2차 세계 대전 야마모토 이소로쿠 대장 휘하의 일본 해군 연합함대가 진주만 공격을 위해 일본에서 출발. 12월 7일 - 제2차 세계 대전 진주만 기습. 12월 8일 * 제2차 세계 대전 미국과 영국 대일본 선전포고 * 조선 내 미국 및 외국인 신부와 교구장 67명, 일본 경찰에 검거 12월 10일 - 대한민국 임시 정부, 대일 선전포고. 12월 23일 - 조선연극협회 결성 12월 25일 - 제2차 세계 대전 일본군, 영국령 홍콩 점령 이란의 샤 레자 팔레비가 퇴위하고 모하마드 레자 팔레비가 왕위를 계승하다. 1월 1일 - 브라질의 축구 선수 제르송 1월 5일 - 일본의 애니메이션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 1월 14일 - 에스파냐의 테너 플라시도 도밍고 1월 30일 - 미국 정치가 딕 체니. 2월 4일 - 대한민국의 시인 김지하. 2월 8일 - 대한민국의 배우 강부자. 2월 11일 - 대한민국의 종교인, 기업인 유병언. 2월 16일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방위원장 김정일. 3월 1일 - 대한민국의 배우 주현. 3월 9일 - 대한민국 정치인 김덕규. 3월 26일 - 영국의 동물행동학자 리처드 도킨스. 4월 12일 - 영국의 축구 선수, 축구 감독 보비 무어. 5월 12일 - 대한민국의 방송프로듀서 박정란. 5월 13일 - 대한민국의 배우 김성겸. 5월 24일 - 미국의 포크 가수, 기타리스트 밥 딜런 6월 5일 - 미국의 기업인 로버트 크래프트. 7월 15일 - 중국의 정치가,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 우방궈. 7월 19일 - 미국의 여가수 겸 뮤지컬배우 비키 카. 8월 20일 - 세르비아의 정치인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8월 23일 - 영국의 기업인 필 거트사이드. 9월 8일 - 미국의 정치인, 사회주의자 버니 샌더스. 9월 9일 - 컴퓨터 과학자 데니스 리치. 9월 10일 - 미국의 고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 9월 15일 - 헝가리의 전 축구 선수 얼베르트 플로리안. 9월 18일 - 영국의 전 축구 선수, 축구 감독 보비 탬블링. 10월 8일 - 미국의 정치인, 목사 제시 잭슨. 10월 25일 - 대한민국의 배우 김혜자. 10월 30일- 대한민국 가수 이미자. 11월 2일 - 대한민국의 탤런트 김진해. 11월 5일 - 대한민국의 정치인 권영길. 11월 11일 - 대한민국의 배우 태현실. 11월 30일 - 대한민국의 배우 나문희. 12월 8일 - 영국의 전 축구 선수, 현 축구 감독 제프 허스트. 12월 19일 -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 이명박. 12월 31일 - 영국의 전 축구 선수, 현 축구 감독 알렉스 퍼거슨. 1월 13일 - 제임스 조이스, 아일랜드 문학가. 3월 17일 - 요아힘 쉐프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잠수함 함장. 3월 28일 - 버지니아 울프, 잉글랜드 문학가. 6월 2일 - 루 게릭, 미국 뉴욕 양키스 선수 6월 4일 - 빌헬름 2세, 독일 제2제국의 황제. 7월 26일 - 앙리 르베그, 프랑스의 수학자. 8월 7일 -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인도 시인. 8월 30일 - 한국의 음악가 홍난파. 9월 1일 - 이르지 오르텐, 체코 소설가. 9월 9일 - 카를 프리드리히 폰 지멘스, 독일의 정치인, 기업인. 9월 20일 - 미하일 키르포노스, 우크라이나 출신 소비에트 연방 군인 11월 6일 - 모리스 르블랑, 프랑스의 소설가 11월 22일 - 독일의 심리학자 쿠르트 코프카. 11월 29일 - 알리 쇼겐추코프, 러시아 시인. 음력월 월건 대소 음력 1일의양력 월일 음력 1일간지 1월 경인 대 1월 27일 을해 2월 신묘 대 2월 26일 을사 3월 임진 소 3월 28일 을해 4월 계사 대 4월 26일 갑진 5월 갑오 대 5월 26일 갑술 6월 을미 소 6월 25일 갑진 윤6월 대 7월 24일 계유 7월 병신 소 8월 23일 계묘 8월 정유 소 9월 21일 임신 9월 무술 대 10월 20일 신축 10월 기해 소 11월 19일 신미 11월 경자 대 12월 18일 경자 12월 신축 소 1942년 1월 17일 경오
1996년 은 월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이다. 1월 8일 - 1996년 에어아프리카 충돌 사고 발생. 1월 28일 - * 서울지방검찰청, 전 프로권투 동양챔피언 포함된 무허가 슬롯머신 업소 소유주 10명 구속. * 노르웨이 유조선 토리노호, 탱크 파손으로 경상남도 통영 앞바다에 기름 유출. 2월 11일 - 아관파천 100주년. 2월 14일 -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창정 3호 참사가 발생하다. 공식 발표에 따르면 6명 사망, 57명 부상. 2월 29일 - 페루의 포셋 항공(Faucett Airlines) 플라이트 251편이 안데스 산맥에 충돌, 123 명의 승객과 승무원이 사망하다. 4월 11일 - 대한민국 15대 총선이 실시되다. 5월 29일 - 대한민국 제14대 국회 임기 종료. 5월 30일 - 대한민국 제15대 국회 임기 시작. 7월 5일 - 최초의 복제 포유류인 양 돌리가 태어나다. 7월 17일 - 트랜스월드 항공 800편 추락 사고로 탑승객 230명 전원 사망. 8월 13일 - 한총련이 연세대학교를 점거하여 시위를 벌이다. 8월 23일 - 대한민국과 엘살바도르, 비자면제협정 체결. 8월 24일 - 윈도 NT 4.0 영어판이 최초로 출시되다. 8월 26일 - 서울지방법원이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대통령에게 반란·내란수괴죄 등으로 사형과 무기징역을 선고하다. 8월 28일 - 영국 왕세자 찰스와 웨일스 공작 부인 다이애나 이혼. 9월 1일 - 일본 해상자위대 소속 군함 2척,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처음으로 부산에 입항. 9월 10일 - 유엔 총회에서 모든 형태의 핵실험 금지를 목표로 한 포괄적 핵 실험 금지 조약(CTBT)안 가결. 9월 11일 - 서울 평화상 문화재단 , 제3회 서울평화상 수상자로 국경없는 의사회를 선정. 9월 18일 - 강원도 강릉지역 무장공비 침투사건이 일어나다(소탕작전은 11월 7일까지 계속). 9월 21일 - 국제원자력기구(IAEA), 연례총회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IAEA의 전면 핵사찰 수용 촉구 결의문 채택. 9월 24일 - 미국 연방 수사국(FBI), 한국계 미 해군정보장교 로버트 김 기밀유출혐의로 체포. 10월 1일 -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최덕근 영사, 괴한에 피습 사망. 10월 2일 - 페루항공 603편 추락 사고 발생. 10월 4일 - 대한민국 헌법재판소가 사전심의제를 규정한 영화법 조항에 대해 헌법이 금지한 검열에 해당하여 위헌이라고 결정하였다. 10월 23일 - 대한민국, 백범 김구 선생을 암살한 용의자 안두희를 박기서가 살해한 사건이 발생하다. 10월 29일 - 단란주점 여주인 김경숙(당시 43세)을 납치한 후 경기도 화성에 위치해있는 화염전 창고에 생매장한 혐의로 두목인 최정수(당시 21세)와 정진영, 박지원 등 막가파 일당 9명 전원이 검거되었다. 11월 5일 - 미국 대선이 치러져 빌 클린턴이 재선하다. 11월 12일 - 차르키다드리 상공 공중 충돌로 탑승객 349명 전원 사망. 11월 18일 - 채널 터널 내에서 화재가 발생하다. 11월 29일 - 대한민국 남성그룹 터보가 2집발매후 급작스런 인기를 이용한 기획사의 횡포로 잠적한 사건이 발생해 검찰이 나서서 연예기획사 횡포를 조사하는 사건이 일어나다. 12월 - 노동법 개정으로 인한 반발로 노개투 파업 발생. 병원 노조들과 서울특별시지하철공사노동조합(이하 서울지하철노동조합), 현대자동차 노조 등 양대노총 연대파업 발생으로 전체 산업이 마비되는 사건이 발생하다. 12월 16일 - 대구 우방랜드에서 대구문화방송 별이 빛나는 밤에 공개방송을 보러 갔던 여고생 2명이 압사 사고로 사망했다. 12월 31일 - 당산철교 철거가 시작되다. 12월 31일 - 디아블로가 출시 되었다. 1월 8일 - 명탐정 코난의 방영이 시작되다. 1월 14일 - 대한민국의 통신위성 무궁화 2호가 미국 케이프커네버럴 공군 기지에서 발사되다. 1월 30일 - 서울 지하철 3호선 일산선 연장 구간(지축 ~ 대화)이 개통되었다. 1월 31일 - 서태지와 아이들이 해체를 선언하다. 2월 29일 - 서울 지하철 2호선 신정지선 양천구청역 ~ 신정네거리역 구간 개통. 3월 1일 - 용인시, 양산시, 파주시 등이 신설되다. 3월 1일 - 일제 강점기 1941년부터 사용되었던 국민학교란 명칭이 초등학교로 바뀌다. 3월 2일 - 안도현의 『연어』 출간되다. 3월 16일 - 창원극동방송이 개국하였다.(주파수 FM 98.1MHz) (호출부호 및 출력 HLDD 3KW) 3월 20일 - * 서울 지하철 5호선 강서구간(방화 ~ 까치산, 마곡역 제외)이 개통되다. * 서울 지하철 2호선 신정지선 신정네거리역 ~ 까치산역 개통. 3월 29일 - 철권 3가 발매되다. 3월 30일 - 서울 지하철 5호선 마천지선(강동 ~ 마천) 구간이 개통되다. 4월 6일 - 메이저 리그 사커의 첫 시즌이 시작되었다. 4월 6일 - 하계올림픽 100주년 4월 7일 - 대한민국 최초의 메이저리거 박찬호가 미국 프로 야구 시카고 커브스 와의 경기에서 4이닝 무실점으로 한국인 최초의 메이저 리그 승리 투수가 되다. 4월 26일 - 현대자동차에서 티뷰론을 출시하다. 5월 4일 - 경기도 고양시 일산 호수공원 개장. 5월 6일 - 현대자동차에서 다이너스티를 출시하다. 5월 31일 - 2002년 FIFA 월드컵을 과 이 공동개최하게 되다. 6월 2일 - 광주가톨릭평화방송 FM 라디오 방송 개국. 7월 1일 - KBS위성 1TV와 KBS위성 2TV 개국. 7월 19일~8월 4일 - 1996년 하계 올림픽이 애틀랜타에서 개막하다. 8월 4일 - 애틀랜타 올림픽 폐막. 대한민국 종합 10위 기록. 8월 12일 - 서울 지하철 5호선 영등포구간(까치산~여의도)이 개통되다. 9월 7일 - 대한민국의 아이돌그룹 H.O.T.가 데뷔를 했다. 9월 9일 - 대구가톨릭평화방송 FM 라디오 방송 개국. 9월 13일 - 제1회 부산국제영화제(PIFF)가 개막되다. 10월 11일 - 대한민국,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29번째 회원국으로 가입. 10월 11일 - 서울 지하철 7호선 장암 ~ 건대입구 구간 개통. 11월 8일 - MBC TV에서 엄기영 앵커, MBC 뉴스데스크 마지막 방송. (첫번째) 11월 11일 - 대구불교방송 4번째 개국. 11월 13일 - 대한민국, 1997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실시하다. 11월 14일 - SBS 파워FM 개국. 11월 16일 - 대우자동차(한국GM의 전신)에서 라노스를 출시하다. 11월 22일 - 대한민국의 남자프로농구를 운영하게 될 KBL 한국농구연맹이 설립되다. 11월 23일 - * 서울 지하철 8호선 잠실 ~ 모란 구간 개통. * 분당선 복정역이 환승역으로 개통. 12월 24일 - 마리오 카트 64가 출시되다. 12월 30일 - 서울 지하철 5호선 도심구간(여의도 ~ 왕십리)이 개통됨에 따라 완전 개통되다. 1월 1일 - 중국의 가수 쿤 (NCT). 1월 3일 * 대한민국의 배우 설인아. * 대한민국의 가수 지헤라. 1월 12일 - 대한민국의 가수 혜빈 (모모랜드). 1월 16일 - 대한민국의 래퍼 제니 (블랙핑크). 1월 22일 - 대한민국의 가수 이태빈 (마이틴). 1월 25일 - 대한민국의 가수 승희 (오마이걸). 1월 26일 - 대한민국의 래퍼 아이엠 (몬스타엑스). 1월 31일 - 미국의 배우 조엘 코트니. 2월 1일 - 대한민국의 가수 도영 (NCT). 2월 5일 * 대한민국의 배우 박건태. * 스웨덴의 축구 선수 스티나 블락스테니우스. 2월 7일 - 일본의 배우 하기와라 마이. 2월 9일 * 대한민국의 가수 김청하. * 미국의 배우 지미 베넷. 2월 16일 - 대한민국의 배우 이열음. 2월 17일 - 미국의 배우 사샤 피에터스. 2월 27일 - 태국의 가수 텐 (NCT). 3월 2일 - 중국의 가수 용국. 3월 10일 - 대한민국의 배우 조정은. 3월 15일 - 대한민국의 래퍼 진진 (아스트로). 3월 17일 - 이라크의 축구 선수 마흐디 압둘자흐라. 3월 24일 - 대한민국의 가수 차희 (멜로디데이). 3월 27일 - 대한민국의 가수 여원 (펜타곤). 4월 2일 - 대한민국의 동양화가 김지영. 4월 12일 - 폴란드의 축구 선수 얀 베드나레크. 5월 2일 - 독일의 축구 선수 율리안 브란트. 5월 7일 - 대한민국의 프로게이머 이상혁. 5월 19일 - 대한민국의 가수 고결 (업텐션). 5월 27일 - 대한민국의 가수 김재환. 6월 4일 - 대한민국의 가수 여름 (헬로비너스). 6월 8일 - 대한민국의 래퍼 웨이 (업텐션). 6월 10일 - 중국의 가수 준 (세븐틴). 6월 12일 - 대한민국의 가수 JIN (러블리즈). 6월 15일 - 대한민국의 가수 호시 (세븐틴). 6월 19일 - 대한민국의 가수 찬미 (AOA). 6월 22일 - 대한민국의 쇼트트랙 선수 공상정. 7월 1일 - 러시아의 피겨스케이터 아델리나 소트니코바. * 대한민국의 양궁선수 최미선 7월 4일 - 대한민국의 래퍼 주호 (SF9). 7월 10일 - 대한민국의 배우 문가영. 7월 17일 - 대한민국의 래퍼 원우 (세븐틴). 7월 19일 - 대한민국의 가수 오하영 (에이핑크). 7월 24일 - 대한민국의 뮤지컬 배우 이수빈. 8월 1일 - 대한민국의 가수 연우 (모모랜드). 8월 5일 - 대한민국의 래퍼 조승연 (유니크). 8월 7일 - 대한민국의 가수 로운 (SF9). 8월 9일 - 대한민국의 배우 원덕현. 8월 12일 - 대한민국의 가수 최유진 (CLC). 8월 19일 - 대한민국의 가수 예린 (여자친구). 8월 22일 - 대한민국의 가수 소민. 8월 24일 - 대한민국의 래퍼 비토 (업텐션). 8월 25일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장윤호 (전북 현대 모터스). 8월 28일 - 대한민국의 가수 세정 (구구단). 9월 2일 - 대한민국의 가수 정성하. 9월 3일 - 대한민국의 가수 조이 (레드벨벳). 9월 12일 - 대한민국의 가수 이찬혁 (악동뮤지션). 9월 14일 * 대한민국의 가수 제니 (다이아). * 대한민국의 가수 수빈 (우주소녀). 9월 17일 - 대한민국의 가수 영재 (GOT7). 9월 23일 * 대한민국의 가수 이하이. * 대한민국의 배우 한종영. 10월 4일 - 대한민국의 가수 전지우 (카드). 10월 7일 - 대한민국의 가수 앤씨아. 10월 8일 - 대한민국의 가수 의진 (소나무). 10월 11일 - 네덜란드의 축구 선수 리넛 베이렌스테인. 10월 15일 - 대한민국의 전 래퍼 젤로. 10월 22일 - 대한민국의 래퍼 B.I (IKON). 10월 27일 - 대한민국의 가수 우신 (업텐션). 10월 30일 - 대한민국의 배우 김지성. 11월 1일 * 대한민국의 배우 김민재. * 대한민국의 가수 정연 (트와이스). 11월 6일 * 대한민국의 가수 장승연 (CLC). * 대한민국의 가수 선율 (업텐션). 11월 9일 - 일본의 가수 모모 (트와이스). 11월 10일 - 대한민국의 배우 김혜윤. 11월 18일 - 태국의 가수 SORN (CLC). 11월 22일 - 대한민국의 가수 우지 (세븐틴). 11월 25일 - 대한민국의 배우 은서우. 11월 26일 - 대한민국의 배우 윤찬. 12월 2일 - 대한민국의 가수 아이. 12월 10일 - 대한민국의 래퍼 강다니엘. 12월 12일 - 일본의 배우 미야마 카렌. 12월 21일 - 대한민국의 가수 하이디 (소나무). 12월 22일 - 대한민국의 가수 천진 (마이틴). 12월 24일 - 대한민국의 가수 J.K. 12월 29일 - 일본의 가수 사나 (트와이스). 프랑수아 미테랑 에드먼드 머스키 엘라 피츠제럴드 스피로 애그뉴 장베델 보카사 칼 세이건 1월 1일 - 대한민국의 가수 서지원. 1월 6일 - 대한민국의 가수 김광석. 1월 8일 - 프랑스의 정치인, 전 대통령 프랑수아 미테랑. 3월 26일 - 미국의 정치인 에드먼드 머스키. 4월 3일 - 미국의 정치인, 클리블랜드의 첫 흑인 시장 칼 스토크스. 4월 20일- 곰돌이 푸의 실제 모델 크리스토퍼 로빈. 6월 14일 - 미국의 재즈 가수 엘라 피츠제럴드. 6월 25일 - 대한민국의 승려 서경보. 9월 13일 - 미국의 랩퍼 투팍. 9월 17일 - 미국 정치가 스피로 애그뉴. 9월 20일 - 헝가리의 수학자 에르되시 팔. 9월 23일 - 일본의 만화가 후지코 F. 후지오. 9월 28일 - 아프가니스탄 정치인 모하마드 나지불라. 10월 4일 - 이탈리아의 축구 선수, 축구 감독 실비오 피올라. 10월 11일 - 핀란드의 수학자, 필즈상 수상자 라르스 알포르스. 10월 23일 - 대한민국의 군인, 사업가 안두희. 11월 2일 -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의 독재자 장베델 보카사 12월 13일 - 이탈리아의 아랍학자 프란체스코 가브리엘리 12월 20일 - 미국의 천문학자 칼 세이건. 12월 25일 - 미국의 존베넷 패트리샤 램지 경제학상 제임스 A. 멀리스, 윌리엄 비크리 문학상 비스와바 심보르스카 물리학상 데이비드 M. 리, 더글러스 D. 오셔로프, 로버트 D. 리처드슨 생리학 및 의학상 피터 C. 도어티, 롤프 M. 칭커나겔 평화상 카를루스 필리프 시메느스 벨루, 주제 라모스 오르타 화학상 로버트 F. 컬, 해럴드 W. 크로토, 리처드 E. 스몰리 음력월 월건 대소 음력 1일의양력 월일 음력 1일간지 1월 경인 소 2월 19일 병술 2월 신묘 대 3월 19일 을묘 3월 임진 소 4월 18일 을유 4월 계사 대 5월 17일 갑인 5월 갑오 대 6월 16일 갑신 6월 을미 소 7월 16일 갑인 7월 병신 대 8월 14일 계미 8월 정유 소 9월 13일 계축 9월 무술 대 10월 12일 임오 10월 기해 대 11월 11일 임자 11월 경자 소 12월 11일 임오 12월 신축 대 1997년 1월 9일 신해
내전으로 파괴된 도서관에서 한 첼리스트가 연주를 하고 있다. 1992년 은 수요일로 시작하는 윤년이다. 1월 1일 대한민국, 자본시장 개방. 외국인의 주식 매수가 허용되다. (실제 매수는 개장일인 1월 3일부터 가능) 1월 8일 -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일본 정부의 사죄와 법적 배상을 촉구하는 수요 집회가 시작되다. 1월 21일 - 서울신학대학교에서 입시 문제지 도난 사건이 발생되어, 후기 대학 입시시험 날짜를 2월 10일로 연기했다. 2월 1일 대한민국, 경기도 고양군이 일산 신도시 개발로 고양시로 승격되었다. 군 지역의 전부가 하나의 시로 승격된 최 1992 1996 및 1998과 비슷합니다. 초의 사례다. 2월 7일 - 마스트리흐트 조약이 체결되다. 2월 17일 - 서울특별시 송파구 올림픽체조경기장에서 열렸던 뉴 키즈 온 더 블록 내한 공연 도중 여고생 1명이 압사했다. 3월 2일 - 카자흐스탄, 몰도바, 키르기스스탄, 산마리노,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이 유엔에 가입하다. 3월 24일 - 대한민국 제14대 총선이 실시되다. 4월 7일 - 보스니아 내전이 발발하다. 4월 27일 -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이 붕괴되다. 4월 29일 - 미국에서 LA 폭동이 일어나다. 5월 22일 -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가 유엔에 가입하다. 6월 14일 - 리우 회의가 종료됨으로써 기후변화협약에 체결하다. 6월 21일 - 체코슬로바키아 해체,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분리되다. 7월 31일 * 조지아, 유엔에 가입하다. * 대한민국 서울에서 신행주대교 붕괴 사건이 일어나다. * 타이항공 311편 추락 사고 발생. 8월 24일 - 대한민국,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중화민국과 단교)하다. 9월 - 대한민국에서 마광수교수가 즐거운 사라 라는 소설에 대해 외설이라는 이유로 구속되다. 9월 6일 -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일본 여성 대표, 위안부 문제 공동대처 결의하다. 9월 23일 - 대한민국과 중화민국, 8월 24일 외교 관계 단절 이후 대사관 완전히 철수하다. 9월 28일 - * 대한민국 노태우 대통령, 중국 방문해 양상쿤(楊尙昆) 주석과 사상 첫 한중정상회담 * 파키스탄 국제항공 268편 추락 사고 발생. 10월 4일 - * 강원도 원주 여호와의 증인 원주 왕국회관 화재 사고 발생. * 엘알 이스라엘 항공 1862편 추락 사고 발생. 10월 12일 - 미국, 캐나다를 연결하는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체결. 10월 15일 - 러시아에서 안드레이 치카틸로의 연쇄 살인 52건에 대해 유죄가 확정되다. 10월 28일 - 대한민국 서울에서 다미선교회가 시한부종말론을 내세웠으나 그것은 정확히 불발했다. 11월 3일 -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다. 11월 24일 - 중국남방항공 3943편 추락 사고로 탑승객 141명 전원 사망. 12월 18일 - 14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자유당의 김영삼이 당선되다. 12월 22일 - 대한민국과 베트남의 공식 수교를 재개하다. 1월 - 일본의 록 밴드 엑스, 엑스 재팬으로 그룹명 개명. 3월 - 대한민국의 음악 그룹 N.EX.T데뷔 4월 6일 - 윈도우 3.1이 출시되다. 4월 11일- 가수 서태지와 아이들 데뷔. 4월 28일 - 기아자동차에서 포텐샤 출시. 5월 1일 - 아시아자동차공업에서 타우너 출시. 5월 10일 - 일본의 음악 그룹 Mr.Children 데뷔. 5월 22일 - 서울 지하철 2호선 신정지선 신도림역 ~ 양천구청역 구간 개통. 7월 25일~8월 9일 - 바르셀로나에서 1992년 하계 올림픽이 개최하다. 8월 9일 - 황영조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다. 8월 11일 - 대한민국 최초의 인공위성인 우리별 1호 발사. 8월 25일 - 합동결혼식 기네스 기록 3만쌍 2000쌍 결혼이 서울 잠실종합운동장 주경기장에서 진행됨 9월 22일 - 기아자동차에서 세피아 출시. 10월 * 대한민국의 교육부, 6차 교육과정으로 교육과정을 개정하다. * 대한민국의 음악 그룹, 철이와 미애 데뷔. 10월 1일 - 안양시 만안출장소와 동안출장소가 각각 만안구와 동안구로 승격. 10월 4일 - 정지영 감독의 《하얀 전쟁》이 일본의 제 5회 도쿄국제영화제서 최우수 작품ㆍ감독상 수상. 12월 3일 - 세마그룹 소프트웨어 설계자 닐 팹워스(Neil Papworth)에 의해 세계 최초의 휴대전화 문자메시지 서비스(SMS)가 탄생하다. 12월 22일 - 대한민국에서 1993학년도 학력고사 실시 1992프로야구 롯데자이언츠 우승 1월 2일 - 스웨덴의 축구 선수 빅토르 클라에손. 1월 3일 -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박소현. 1월 8일 - 대한민국의 가수 아이언. 1월 10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강민국. * 대한민국의 개그맨 홍현호. 1월 11일 - 대한민국의 래퍼 이승훈 (위너). 1월 14일 * 대한민국의 배우 김형규. * 대한민국 배우 윤다영. 1월 15일 - 대한민국의 프로게이머 이경민. 케이온!- 아키야마 미오 1월 16일 - 대한민국의 개그맨 윤승현. 1월 20일 - 대한민국의 탁구 선수정영식. 1월 23일 * 아일랜드의 배우 잭 레이너. * 대한민국의 래퍼 박지연 (글램). 1월 25일 *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오효주. * 크로아티아-독일 축구 선수 이바나 루델리치. 1월 31일 - 중국의 배우 주동우. 2월 3일 - 대한민국의 배우 표예진. 2월 4일 - 대한민국의 모델 황현주. 2월 5일 * 브라질의 축구 선수 네이마르. * 대한민국의 태권도 선수 이대훈 * 대한민국의 배우 김지안 2월 7일 - 일본의 가수 야지마 마이미 (℃-ute). 2월 11일 - 대한민국의 가수 김동준 (제국의 아이들). 2월 12일 - 대한민국의 가수 소유 (씨스타) 2월 14일 * 대한민국의 배우 이주영. * 대한민국의 가수 유정 (라붐). 2월 15일 - 대한민국의 가수 래환 (빅스타). 2월 23일 - 브라질의 축구 선수 카제미루. 2월 24일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이종호. 2월 25일 - 대한민국의 탁구 선수 김민석. 2월 26일 - 대한민국의 래퍼 필독 (빅스타, 유앤비). 2월 27일 -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김종현. 2월 28일 * 대한민국의 가수 건지 (가비엔제이). * 멕시코의 축구 선수 나옐리 랑헬. 3월 1일 - 대한민국의 배우 김소혜. 3월 4일 * 독일의 축구 선수 베른트 레노 (바이어 04 레버쿠젠). * 대한민국의 가수 오태하 (스피드). 3월 6일 * 일본의 가수 츠구나가 모모코 (Berryz코보). * 대한민국의 성우 곽규미. 3월 7일 - 대한민국의 가수 임현식 (비투비). 3월 11일 - 일본의 성우 토야마 나오. 3월 13일 - 대한민국의 가수 엘 (인피니트). 3월 17일 - 대한민국의 가수 대원 (매드타운, 유앤비). 3월 18일 - 일본의 가수 테라다 타쿠야 (크로스진). 3월 20일 - 대한민국의 가수 산들 (B1A4). 3월 21일 - 대한민국의 가수 허영주 (더 씨야, 리얼걸프로젝트). 3월 27일 - 일본의 배우 유키 아오이. 3월 28일 - 대한민국의 쇼트트랙 선수 박승희. 3월 29일 - 대한민국의 배우 조우리. 4월 6일 * 대한민국의 가수 허찬미. * 대한민국의 가수 켄 (빅스). 4월 9일 - 대한민국의 가수 유권 (블락비). 4월 11일 - 대한민국의 배우, MC 서민지. 4월 15일 * 대한민국의 모델, 배우 이철우. * 스웨덴의 축구 선수 욘 구이데티. 4월 16일 - 대한민국의 배우 김희정. 4월 18일 - 독일의 축구 선수 제니페르 머로잔. 4월 21일 - 스페인의 축구 선수 이스코. 4월 28일 - 대한민국의 모델, 배우 김지향. 4월 30일 - 독일의 축구 선수 마르크안드레 테어 슈테겐. 5월 1일 - 대한민국의 가수 하니 (EXID). 5월 2일 * 대한민국의 가수 선미 * 대한민국의 SBS 아나운서 김선재. 5월 3일 - 대한민국의 가수 크러쉬. 5월 4일 * 대한민국의 배우 김지선. * 대한민국의 가수 이건 (매드타운). 5월 6일 - 대한민국의 가수 백현 (EXO, EXO-K). 5월 11일 - 벨기에의 축구 선수 티보 쿠르투아. 5월 15일 * 대한민국의 프로게이머 김대엽(KT 롤스터).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유창식 (한화 이글스). 5월 19일 - 대한민국의 미스코리아 김서연. 5월 29일 - 대한민국의 가수, 배우 한그루. 6월 3일 - 대한민국의 가수 혜이니. 6월 6일 * 대한민국의 래퍼 현아. * 일본의 전(前) 가수 무라카미 메구미 (℃-ute). 6월 12일 - 대한민국의 성우 김현욱 6월 18일 - 대한민국의 가수 셔누 (몬스타엑스). 6월 20일 - 대한민국의 양궁 선수김우진 6월 24일 - 오스트리아의 축구 선수 데이비드 알라바. 6월 26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박준표. 6월 27일 - 대한민국의 배우 안소희. 6월 28일 - 스웨덴의 축구 선수 오스카르 힐리에마르크. 7월 5일 - 대한민국의 프로게이머 이영호 (KT 롤스터). 7월 6일 * 대한민국의 트로트가수 소유미. * 대한민국의 가수 베이비 소울 (러블리즈). * 대한민국의 배우 김민석. 7월 7일 - 대한민국의 래퍼 상민 (크로스진). 7월 8일 * 대한민국의 래퍼 박경 (블락비).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손흥민. * 코스타리카의 축구 선수 프란시스코 칼보. 7월 10일 - 대한민국의 배우, 모델 안지현. 7월 12일 - 대한민국의 배우 장동윤. 7월 15일 - 일본의 전(前)가수, 모델 쿠스미 코하루. 7월 16일 - 대한민국의 가수 설하윤. 7월 20일 - 대한민국의 쇼트트랙 선수 노진규. 7월 24일 - 대한민국의 성우 윤은서. 7월 31일 - 대한민국의 가수, 배우 박수아 (애프터스쿨). 8월 5일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이종성. 8월 10일 - 대한민국의 배우 고아성. 8월 11일 - * 대한민국의 가수 연분홍. * 대한민국의 야구선수 강경학. 8월 12일 - 대한민국의 베이시스트 권광진 (엔플라잉). 8월 13일 - 대한민국의 프로게이머 이호종(CJ 엔투스). 8월 14일 - 대한민국의 프로게이머 정윤종(SK텔레콤 T1). 8월 16일 * 대한민국의 가수 이영 (애프터스쿨). * 네덜란드의 축구 선수 스테파니 판 데르 흐라흐트. 8월 18일 * 일본의 배우 나루미 리코. * 대한민국의 프로게이머 김준호(CJ 엔투스). 8월 21일 - 대한민국의 가수 송승현 (F.T 아일랜드). 8월 25일 - 일본의 가수 나츠야키 미야비 (Berryz코보). 8월 26일 - 일본의 가수, 배우 시게오카 다이키. 8월 29일 - 대한민국의 배우 우도임. 8월 31일 - 대한민국의 배우 이일민. 9월 1일 - 대한민국의 가수 혜림 (원더걸스). 9월 4일 - 대한민국의 배우 박은빈. 9월 5일 - 대한민국의 래퍼, 배우 바로 (B1A4). 9월 8일 - 대한민국의 프로게이머 정우용. 9월 11일 - 대한민국의 성우 송하림. 9월 14일 - 대한민국의 래퍼 지코 (블락비). 9월 15일 - 미국의 가수 Jae (DAY6) 9월 18일 - 미국의 래퍼 엠버 (f(x)). 9월 21일 - 대한민국의 가수 첸 (EXO, EXO-M). 9월 24일 - 대한민국의 프로게이머 어윤수(SK텔레콤 T1). 9월 25일 - 대한민국의 프로게이머 노준규(웅진 스타즈). 9월 26일 - 대한민국의 가수 유아라 (헬로비너스). 9월 29일 - 독일의 축구 선수 레오니 마이어. 10월 2일 - 네덜란드의 축구 선수 샤니서 판 더 산던. 10월 5일 -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이지수. 10월 19일 - 대한민국의 배우 김지원 10월 23일 - 스페인의 축구 선수 알바로 모라타. 10월 27일 - 대한민국의 가수 성유진 (더 씨야). 10월 31일 - 대한민국의 래퍼 이승협 (엔플라잉). 11월 4일 - 대한민국의 래퍼 캡 (틴탑). 11월 5일 - 대한민국의 배우 이다인. 11월 6일 - 대한민국의 가수, 배우 유라 (걸스데이). 11월 11일 - 대한민국의 가수 최민환 (F.T 아일랜드). 11월 15일 * 일본의 가수, 배우 미네기시 미나미 (AKB48). * 덴마크의 축구 선수 페르닐레 하르데르. 11월 16일 - 크로아티아의 축구 선수 마르첼로 브로조비치. 11월 20일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임찬규 (LG트윈스). 11월 21일 - 대한민국의 배우 김혜지. 11월 23일 * 미국의 가수 마일리 사이러스. * 대한민국의 가수 은비 (레이디스 코드). 11월 25일 - 대한민국의 트로트 가수 이현주. 11월 27일 - 대한민국의 래퍼, 배우 찬열 (EXO, EXO-K). 12월 4일 - 대한민국의 가수 진 (방탄소년단). 12월 6일 - 대한민국의 기계 체조 선수 양학선. 12월 14일 - 대한민국의 가수 윤조 (헬로비너스, 유니티). 12월 16일 * 오스트레일리아의 축구 선수 톰 로기치. * 네덜란드의 축구 선수 리커 마르턴스. 12월 17일 - 대한민국의 가수 금조 (나인뮤지스). 12월 18일 - 대한민국의 야구선수 강동연. 12월 20일 - 대한민국의 배우 이세영. 12월 22일 - 대한민국의 래퍼 문별 (마마무) 12월 23일 - 대한민국의 배우 양세종. 12월 25일 - 대한민국의 프로게이머 김성현(STX SouL). 12월 30일 * 대한민국의 가수 유나 (AOA). * 네덜란드의 축구 선수 데시레이 판 륀테런. 메나헴 베긴 베니 힐 빌리 브란트 3월 9일 - 이스라엘의 총리 메나헴 베긴. 3월 19일 - 대한민국의 첫 번째 영부인 프란체스카 도너. 3월 23일 - 오스트리아의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4월 19일 - 영국의 배우 베니 힐. 4월 25일 - 일본의 가수 오자키 유타카. 4월 27일 - 프랑스의 작곡가 올리비에 메시앙. 5월 19일 - 대한민국의 한의사 김일훈. 8월 3일 -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가 왕훙원. 8월 4일 - 일본의 작가 마쓰모토 세이초. 8월 5일 - 뉴질랜드의 총리 로버트 멀둔. 8월 12일 - 미국의 작곡가 존 케이지. 9월 23일 - 대한민국의 가수 백난아. 10월 8일 - 독일의 정치가, 총리 빌리 브란트. 경제학상 :개리 베커 문학상 데릭 월컷 물리학상 조르주 샤르파크 생리학 및 의학상 에드먼드 H. 피셔,에드윈 G. 크렙스 평화상 리고베르타 멘추 화학상 루도프 A. 마커스 음력월 월건 대소 음력 1일의양력 월일 음력 1일간지 1월 임인 소 2월 4일 경술 2월 계묘 대 3월 4일 기묘 3월 갑진 대 4월 3일 기유 4월 을사 소 5월 3일 기묘 5월 병오 소 6월 1일 무신 6월 정미 대 6월 30일 정축 7월 무신 소 7월 30일 정미 8월 기유 소 8월 28일 병자 9월 경술 대 9월 26일 을사 10월 신해 소 10월 26일 을해 11월 임자 대 11월 24일 갑진 12월 계축 대 12월 24일 갑술
1862년 은 수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다. 청(淸) 동치(同治) 원년 일본(日本) 분큐() 2년 청(淸) 목종 동치제(穆宗 同治帝) 원년 조선(朝鮮) 철종(哲宗) 13년 베트남 응우옌 왕조의 사덕제가 프랑스에 항복하였다. 이에 따라 사이공 조약이 체결되었고, 베트남과 프랑스 간의 전쟁이 종결되었다. 3월 14일(음력 2월 14일) - 류계춘 등의 주도로 진주에서 민란(진주민란)이 일어났다. 3월 8일 - 미국 남북전쟁 남부연맹의 철갑선 메리맥 호가 햄프턴 정박지의 북군 해군함대 기습. 북군 해군 프리깃 3척 침몰, 250명 사살. 3월 9일 - 미국 남북전쟁 북군 해군도 철갑선 모니터 호를 동원하여 메리멕 호와 격전. 그러나 승부는 나지 않았음. 이 전투 후 세계는 목조 군함 대신 철갑선 건조에 나서게 됨 3월 11일 - 미국 남북전쟁 쉐넌도어계곡 전역 남군의 스톤월 잭슨, 북군의 압력으로 세넌도오 계곡의 전초기지인 윈체스터에서 철수하여 45마일 남쪽의 마운트 잭슨으로 이동. 당시 병력은 보병 3,600명, 포병 600명 3월 12일 - 미국 남북전쟁 쉐넌도어계곡 전역 북군 뱅크스 휘하의 쉴즈 사단이 윈체스터 점령. 뱅크스는 잭슨 장군과 남군이 완전히 철수하였다고 오판. 3월 23일(음력 2월 23일) * 진주민란의 주동자 류계춘 등이 효수되었다. * 미국 남북전쟁 쉐넌도어계곡 전역 스톤월 잭슨이 지휘하는 남군이 다시 북상하여 윈체스트 남쪽의 컨스타운을 공격. 그러나 압도적 병력 차이로 공격 실패. 그러나 북군은 잭슨의 공격에 놀라 맥클랜란에 보내려던 증원군 일부를 쉐넌도어 계곡으로 보내고, 맥도웰 장군의 군단은 워싱턴에 잔류시키는 결과를 초래. 잭슨은 전투에서 패하고 전략적 승리를 쟁취. 4월 1일 - 미국 남북전쟁 북군 포토맥군 사령관 매클랙란이 알렉산드리아를 출발. 목표는 리치먼드. 소위 "반도 전역(Peninsula Campaign)". 매클렌란의 작전 지역이 요크 강과 제임스 강 사이의 반도였기 때문. 포트 먼로에 상륙 후 요크타운을 향해 진격, 이들 북군을 상대한 남군은 총사령관 조지프 존스턴이 지휘하였으며, 북군과 가장 먼저 대치한 것은 매그루더 사단이었다. 4월 17일 - 미국 남북전쟁 쉐넌도어계곡 전역 뱅크스, 계곡 남쪽으로 잭슨을 추적하기 시작하여 해리슨버그까지 진출. 5월 3일 - 미국 남북전쟁 한달에 걸친 맥클렉란의 공격준비를 알고 있는 존스턴은 기만 포격 후 전군 철수 5월 5일 - 미국 남북전쟁 요크타운 북방 8마일 지점, 윌리암스버그에서 남북군 전투. 북군 패배 5월 24일 - 미국 남북전쟁 쉐넌도어계곡 전역 잭슨, 뱅크스의 후위 부대 기습. 뱅크스는 잭슨의 의도를 직감적으로 파악하고 덫을 빠져나와 후퇴하던 중. 잭슨은 이 전투로 프랭크 로얄 점령. 5월 27일 - 미국 남북전쟁 반도전역 휘하의 포터 장군이 지휘하는 1사단을 하노버 코트 하우스 공격. 이 전투에서 북군이 승리. 5월 30일 * 미국 남북전쟁 쉐넌도어계곡 전역 잭슨군, 하퍼스페리 근처까지 진격. 그러나 이 순간 잭슨은 후퇴를 시작. 목표는 포트 리퍼블릭(Port Republic) * 미국 남북전쟁 반도전역 남군의 존스턴 사령관, 세븐 파이즌의 북군 4군단 공격 개시. 북군 4군단은 섬너가 지휘 중. 혼전 중 남군 사령관 존스턴이 중상을 입음 5월 8일 - 미국 남북전쟁 쉐넌도어계곡 전역 리치먼드로 이동하는 것처럼 기만한 잭슨이 맥도웰군단을 격파 6월 1일 - 미국 남북전쟁 남부연맹의 제프 데이비스 대통령, 중상을 입은 존스턴의 후임으로 로버트 리 장군을 남군 최고 사령관에 임명. 6월 8일 - 미국 남북전쟁 쉐넌도어계곡 전역 북군의 프레몬트군이 크로스키스(Corss Keys)의 남군 이월 사단 공격 6월 9일 - 미국 남북전쟁 쉐넌도어계곡 전역 북군 쉴즈 사단, 포트 리퍼블릭의 잭슨군 공격 개시. 북군 패배로 후퇴. 잭슨은 전투 후 리치먼드로 급행. 리치먼드 상황 악화. 6월 12일 - 미국 남북전쟁 반도전역 남군 기병여단장 젭 스튜어트가 이끄는 남군 기병대가 북군의 후방으로 침투. (~6월 14일) 6월 25일 - 미국 남북전쟁 반도전역 북군3군단(군단장 하인첼만) 소속 후커 사단이 남북군 중간지대의 남군을 공격하여 숲 지역 점령 6월 26일 - 미국 남북전쟁 반도전역 남군, 북군에 대해 반격 개시. 남군은 치카호미니 강을 도하, 미케닉스빌로 진격. 제일 먼저 전투를 개시한 부대는 남군의 앰브로스 파월 힐 6월 27일 - 미국 남북전쟁 반도전역 게인즈 밀에서 남북군 전투. 북군 패배. 북군 철수 시작. 6월 29일 - 미국 남북전쟁 반도전역 남군의 매그루더 장군, 새비지에서 북군의 섬너와 교전. 남군 패배. 6월 30일 - 미국 남북전쟁 반도전역 북군의 맥클렉란, 화이트오크스스웜프 강 남쪽에 도착. 글렌데일에서 남북군 교전. 북군의 최종 집결지는 제임스강 7월 1일 - 미국 남북전쟁 반도전역 제임스강의 멜번 힐에서 최후 교전. 남군은 격퇴당했고, 북군은 다음 날 제임스 강변의 버클리로 철수. 8월 - 2차 불런전투. 9월 22일 - 에이브러햄 링컨 미국 대통령, 노예해방 예비선언’ 발표. 10월 5일 * 미국 남북전쟁 에이브러햄 링컨, 북군 사령관 조지 B. 맥클렐란을 두 번째로 해임하다. * 인디언 전쟁 미국 미네소타주에서 300명 이상의 수우 족이 백인 정착자들을 상대로 강간과 살인을 저지른 것으로 결론지어져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11월 9일 - 미국 남북전쟁 북군의 앰브로스 번사이드(Ambrose Burnside)가 해임된 조지 맥클랠란을 대신하여 포토맥군 사령관으로 취임하다. 1월 23일 - 독일 수학자 다비트 힐베르트 4월 14일 - 러시아의 정치인 표트르 스톨리핀 오마르 무크타르, 리비아의 저항운동가 8월 22일 - 프랑스 작곡가 클로드 드뷔시 1월 18일 - 미국 10대 대통령 존 타일러 1월 21일 - 체코 소설가 보제나 넴초바 7월 24일 - 미국 8대 대통령 마틴 밴 뷰런 음력월 월건 대소 음력 1일의양력 월일 음력 1일간지 1월 임인 대 1월 30일 갑신 2월 계묘 소 3월 1일 갑인 3월 갑진 대 3월 30일 계미 4월 을사 소 4월 29일 계축 5월 병오 대 5월 28일 임오 6월 정미 대 6월 27일 임자 7월 무신 소 7월 27일 임오 8월 기유 대 8월 25일 신해 윤8월 소 9월 24일 신사 9월 경술 대 10월 23일 경술 10월 신해 소 11월 22일 경진 11월 임자 소 12월 21일 기유 12월 계축 대 1863년 1월 19일 무인
루이 파스퇴르 (Louis Pasteur, 1822년 12월 27일 - 1895년 9월 28일)는 프랑스의 생화학자이며 로베르트 코흐와 함께 세균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분자의 광학 이성질체를 발견했으며, 저온 살균법, 광견병, 닭 콜레라의 백신을 발명했다. 파스퇴르는 1822년 12월 27일, 가죽 가공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는 미술에 소질을 보였지만 1843년에 파리 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해 1846년에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화학을 전공했지만 처음은 재능을 보이지 못하고 지도한 교수의 한 명은 그를 "평범하다"라고 평가했다. 초기 화학자 시절의 업적으로는 주석산의 성질을 해명(1849년)한 것이 있다. 천연물, 특히 포도주의 침전물로부터 취할 수 있는 이 화합물의 용액은 통과하는 빛의 편광면을 회전시킨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인공적으로 합성된 주석산은 화학반응이나 분자식은 같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효과를 갖지 않는다. 파스퇴르는 주석산의 미세한 결정을 조사하고서 결정에는 비대칭인 2 종류가 있어, 각각이 서로의 거울상이란 사실을 알아냈다. 끈질기게 분류 작업을 한 결과 2 종류의 주석산을 얻을 수 있었다. 한 종류의 용액은 편광면을 시계 방향으로 회전시키는 데 반해, 한편은 반시계회전으로 회전시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2 종류를 반반씩 혼합한 것은 편광에 대해서 어떤 효과도 미치지 않았다. 이것으로부터 파스퇴르는 주석산의 분자는 비대칭인 형태를 하고 있고 왼손용 장갑과 오른손용 장갑과 같이 서로 거울상 관계에 있는 2종류의 형태가 있는 것이라고 올바르게 추론했다. 처음으로 키랄 분자를 실증한 것도 큰 실적이었지만, 이후 파스퇴르는 한층 더 유명한 실적을 완수하는 생물학·의학의 분야로 나아가고 있었다. 파스퇴르는 결정학에 관한 박사 논문에 힘입어 스트라스부르 대학교의 화학의 교수의 지위를 얻었다. 1854년엔 릴의 새로운 이과 대학의 학장으로 지명되고, 1857년에는 고등사범학교의 사무국장 겸 이학부장이 되었다. 1861년의 저작 《자연발생설 비판》에서 발효가 미생물의 증식 때문이란 사실을 보였고, 동시에 영양분을 포함한 고깃국물에서 미생물이 증식하는 것은 자연발생에 의한 것이라는 종래의 설을 뒤집어 보였다. 먼지가 통과하지 못하도록 하는 필터를 통해 바깥 공기를 접촉할 수 있는 용기에 새로 끓인 고깃국물을 놔 두거나, 필터는 없지만 S 자 모양으로 구부러진 플라스크를 사용해 티끌이 들어가지 않도록 하여 공기를 접촉하게 하면, 고깃국물에서는 아무것도 자라지 못했다. 따라서, 고깃국물에 발생하는 미생물은 외부로부터 들어온 티끌에 붙은 포자 등 미생물에 의한 것이며, 고깃국물중에서 자연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이 하여 파스퇴르는 자연발생설을 비판했다. 루이 파스퇴르가 세균설을 처음 주장한 것은 아니다. 세균설은 벌써 지롤라모 프라카스토로, 프리드리히 헨레 등에 의해서 주장되고 있었다. 파스퇴르가 한 것은 세균설(생물 속생설)의 올바름을 실험으로 명백하게 보여줘서, 유럽 사람에게 납득시킨 것이다. 파스퇴르의 연구는 발효 음료를 오염하는 미생물이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었다. 이로부터 파스퇴르는 우유 등의 액체를 가열해 그중에 포함되어 있는 박테리아나 곰팡이를 모두 죽이는 방법을 발명했다. 파스퇴르와 클로드 베르나르는 1862년 4월 20일에 최초의 실험을 실시했다. 이 방법은 곧바로 가열살균법 (파스퇴라이제이션)으로서 알려지게 되었다. 음료 오염으로부터 미생물이 동물이나 인간에게 감염된다는 결론을 내린 파스퇴르는 미생물이 인체에의 들어오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는 스코틀랜드의 외과의사 죠제프 리스터가 외과 수술 소독법을 개발하는 데에 이르렀다. 1865년 파스퇴르는 양잠업의 구제에 착수했다. 그 무렵 미립자병으로 불리는 병에 의해 많은 누에가 죽고 있었다. 이 도중인 1867년에는 뇌졸중으로 쓰러져 왼쪽 반신불수가 되었지만 수년에 걸치는 조사의 결과 병의 원인은 누에의 알에 세균의 감염인 것을 증명해 치잠사육소로부터 이 세균을 구제하는 것으로 미립자병을 막을 수 있는 것을 나타냈다. 파스퇴르는 혐기성균, 즉 공기 없이 증식 하는 미생물을 발견했다. 1895년 미생물학으로 최고의 영예인 레이웬훅크메달(Leeuwenhoek medal)을 수상했다. 1895년, 1868년부터 일련의 발작에 의한 합병증이 원인이 되어, 파리 근교에서 7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장례는 프랑스 정부의 주도로 국장으로 치러졌다. 노트르담 대성당에 매장되었지만, 곧 유해는 파스퇴르 연구소의 지하 성당으로 이장되었다. 일부 유사과학을 주장하는 집단에서는 파스퇴르가 진화 혹은 화학진화를 반대했다는 주장을 하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파스퇴르가 부정한 것은 자연발생설이며, 이는 현재와 같은 환경에서 계속 새로운 생명체가 형성될 수 있다는 주장으로서, 현재와 같지 않은 환경에서의 원시 생명체 형성을 연구하는 화학진화와는 전혀 다른 것이며, 생물이 변이와 선택을 통해 다양성을 증가시키는 현상(진화)과도 큰 관련이 없다. 오히려 자연 발생설의 부정은 생명의 변이와 선택에 의한 다양성을 지지한 것이며, 이것을 통해 파스퇴르는 사실상 진화를 지지했음이 알려진 상황이며, 파스퇴르는 무작위적인 발생을 부정한 적이 단 한번도 없다. 광견병 자연발생설 분류:1822년 태어남 분류:1895년 죽음 분류:프랑스의 생화학자 분류:프랑스의 미생물학자 분류:에콜 노르말 쉬페리외르 동문 분류:미국 발명가 명예의 전당 헌액자 분류: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 분류:미국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 분류:러시아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 분류:코플리 메달 수상자 분류:아카데미 프랑세즈의 회원 분류:프랑스의 생물학자 분류:왕립학회 외국인 회원
마리아 스크워도프스카 퀴리 (, 1867년 11월 7일 ~ 1934년 7월 4일)는 폴란드 출신의 프랑스 과학자이다. 본명은 마리아 살로메아 스크워도프스카 ()이고, 프랑스식 이름은 마리 퀴리 ()이다. 방사능 분야의 선구자이며 노벨상 수상자이다. 여성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로, 물리학상과 화학상을 동시에 받은 유일한 인물이다. 라이너스 폴링과 함께 노벨상 2관왕에 등극한 인물로 유명하다. 왼쪽부터 마리아, 아버지 브와디스와프, 브로니스와바, 헬레나 가족 마리 퀴리는 1867년 바르샤바에서 가난한 교육자의 딸로 태어났다. 어머니 브로니스와바는 중학교 교사, 아버지 브와디스와프 스크워프도프스키(Władysław Skłodowski)는 바르샤바 교육청 장학사였다. 형제로는 오빠 유제프(Józef, 1863년생)와 조피아(Zofia, 1862년생), 브로니스와바(Bronisława, 1865년생), 헬레나(Helena, 1866년생) 언니 셋이 있었다. 10세 때 폐결핵을 앓던 어머니와 사별하였고, 장학사로 일하던 아버지가 실직하기도 했으며, 큰 언니 조피아가 요절하기도 하여 혼란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힘들었던 청소년시절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폴란드의 전통인 폴란드어, 역사를 공부하는 것조차 억압받았다. 둘째 딸인 이브 퀴리가 쓴 전기가 1990년대 중학교 국어교과서에서 인용되었는데, 전기에 따르면 퀴리부인은 여학교에서 폴란드어와 역사를 공부하다가 장학사가 오면 실과수업을 받는 것처럼 숨겨야 했다. 러시아 장학사들은 폴란드 학생들이 러시아어 주기도문을 외우도록 함으로써 많은 폴란드 사람들이 가톨릭 신자라는 사실을 민족말살에 악용했다. 심지어는 "너희를 다스리는 분은 누구냐?"라고 물어서 식민지배에 순응하도록 했으니 퀴리부인의 청소년 시절은 억압이었다. 여학교를 졸업한 마리는 남학생만 뽑는 바르샤바 대학교와는 달리, 성 차별이 없는 프랑스에서 공부하고 싶어했으나 학비가 없었기 때문에, 3년간 시골의 부유한 농가의 가정교사로 직접고용되어 사용자의 딸과 아들을 가르쳤으며, 나중에는 러시아의 식민지배를 받는 폴란드 민족문제를 고민하던 사용자의 허락을 받아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야학을 운영했다. 17세 무렵부터 가정교사 등을 할 때, 폴란드와 독일에서는 여자가 대학교에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에 프랑스 파리로 유학갈 결심을 하였다. 다행히 아버지가 소년감화원 사감으로 취직하여 경제적 여유가 생기자, 마리는 둘째 언니 브로니스와바와 형부 카지미에시 드우스키(Kazimierz Dłuski) 부부가 의사로 일하고 있던 프랑스 파리에서 언니 부부의 돌봄을 받으며 유학하였다. 브로니스와바와 마리가 교육을 강조함으로써 폴란드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려는 계몽주의자였다면, 형부 카지미에시는 자본의 지배로부터의 해방없이는 민중 해방이 없다는 냉철한 현실 이해를 주장한 사회주의자였다. 1891년 파리의 소르본 대학교에 입학하여 J. H. 푸앵카레, G. 리프만 등의 강의를 들었다. 수학과 물리학을 전공하며 가장 뛰어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소르본 대학교에서 물리학과 수학 학위를 취득한 후 1895년 과학자 피에르 퀴리와 결혼하였고 피에르 퀴리와의 사이에 두 딸을 두었다. 피에르 퀴리는 자신의 실험실에서 연구를 도왔던 마리가 뛰어난 과학자의 자질을 지니고 있음을 알고 마리의 학업을 적극 지원해온 지지자였다. 마리 퀴리와 피에르 퀴리는 1898년 우라늄 광석인 피치블렌드( pitchblende, 역청우라늄석 )에서 염화바륨에 소량 섞여있는 형태로 염화라듐을 처음 분리∙발견하였고 1902년 8톤의 폐우라늄 광석을 처리하여 0.1g의 순수한 염화라듐을 얻었다. 1910년에는 마리 퀴리가 염화라듐을 전기분해시켜 금속 라듐을 얻었다. 마리 퀴리가 살던 시대에는 방사능의 위험성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방사능 물질 라듐은 미용은 물론 정신장애 치료에까지 효과가 있다는 위험한 선전이 아무런 근거없이 주장되었음 방사능에 노출된 사람들이 죽어갔다. 어느 화장품에 라듐이 들어간다고 쓰어져 있기만 했다면 모두 팔렸고 있던 제품이었다. 1906년 남편 피에르 퀴리가 교통사고로 사망하자 마리 퀴리는 피에르 퀴리가 근무하던 소르본 대학교에서 1906년 11월 5일부터 학생들을 가르쳤는데, 마리 퀴리는 미리 강의 내용을 확인하는 준비를 하여 남편이 가르친 내용을 이어서 강의하는 꼼꼼함을 보여주었다. 이 일로 소르본 대학교에서 강의를 한 최초의 여성 교수가 되었다. 당시 프랑스 정부에서는 연금을 제공하겠다고 했으나 거부했다. 라듐의 위험성이 제기된 것은, 영화관에서 영화 상영작 포스터에 페인트칠(페인트 안에 라듐 성분이 들어가 있음)을 하던 여성 노동자들이 죽어가면서였다. 마리 퀴리도 1934년에 스위스에 있는 요양소에 입원하여 그 해 7월 4일 과도한 방사선 노출로 인한 골수암, 백혈병, 재생불량성빈혈이 겹쳐 6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and Marie Curie.jpg|섬네일|225px|피에르 퀴리와 마리 퀴리, 파리의 연구실에서, 1907년 이전 여성으로서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이며, 물리학상과 화학상을 동시에 받은 유일한 인물이다. 노벨상을 2회 수상한 기록은 라이너스 폴링과 함께 인물로서는 최다 기록이다. 결혼 직후 1896년 마리는 박사학위 논문주제를 찾고 있었는데, 당시 베크렐이 발견한 우라늄염에서 일어나는 베크렐선 현상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리고 자연계에 베크렐선 현상을 보이는 물질이 우라늄 외에도 더 존재할 것이라고 믿고, 그 물질들을 찾아 연구하기로 한다. 마리는 피치블렌드(역청우라늄광) 라는 광물이 순수한 우라늄보다 강한 방사능을 배출한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이러한 광물을 효과적으로 분석하는 방법에 관해 피치블렌드의 성분을 분리하는 실험을 시작했다. 이후 퀴리 부부는 아예 공동으로 연구하기로 하고, 지루하고 긴 실험을 반복하며 피치블렌드의 성분을 분리하여 1898년 마침내 베크렐이 연구했던 우라늄보다 감광작용이 4배나 강한 새로운 물질을 찾아내게 된다. 그리고 이 미지의 물질이 두 가지 원소의 혼합물이라는 사실을 밝혀냈으며, 그중 하나를 분리해내는 데 성공하였다. 새로운 원소는 우라늄염보다 400배나 감광작용이 강했다. 퀴리 부부는 새로운 원소의 이름을 마리의 조국 폴란드를 기리는 의미에서 ‘폴로늄’이라고 명명했다. 마리는 우라늄이나 폴로늄처럼 자연계에서 감광작용과 전리작용 및 형광작용을 나타내는 물질들에 대해 처음으로 방사능(또는 방사성물질)이라고 불렀고, 이들 물질에서 나오는 빛을 방사선이라고 명명했다. 그리고 또 다른 새로운 원소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여, 감광작용 능력이 우라늄보다 무려 250만 배나 강한 원소를 발견하고, 강력한 빛을 ‘방사’한다는 뜻으로 원소의 이름을 ‘라듐’이라고 지었다. 퀴리 부부가 라듐의 성질을 자세히 조사한 결과, 그 방사능은 어떤 화학작용에도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라듐의 양에 비례해 방출되는 방사선이 강해지고, 감광작용과 전리작용도 강해진다는 것을 확인했으며, 방사선 방출과정에서 상당한 열이 나온다는 점도 알아냈다. 이러한 사실은 과학계가 그때까지 알고 있던 화학반응 이론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마리는 이러한 현상이 물질의 기본적인 구성단위인 분자 수준에서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라, 그보다 더 작은 단위인 원자 수준에서 연구해야 하는 현상임을 밝혀냄으로써 과학 연구의 새로운 발전방향을 제시하였다. 1903년 라듐 연구로 마리 퀴리와 남편 피에르 퀴리가 공동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였고, 1907년에는 라듐 원자량의 정밀한 측정에 성공하였다. 1910년에는 금속 라듐을 분리하여, 1911년에는 라듐 및 폴로늄의 발견과 라듐의 성질 및 그 화합물 연구로 마리 퀴리 단독으로 노벨 화학상을 수상하였다. 그 공적을 기려 방사능 단위에 퀴리라는 이름이, 화학 원소 퀴륨에 이름이 사용되었다. 마리 퀴리의 딸 부부인 이렌 졸리오퀴리와 프레데리크 졸리오퀴리도 노벨 화학상 수상자들이다. 프랑스의 보수성, 가십을 좋아하는 언론의 공세, 폴란드 출신이라는 점, 그리고 여성이라는 성차별적 문제로 결국 화학 아카데미 회원이 되지 못했다. 노벨 물리학상 (1903) 데이비 메달 (1903) 마테우치 메달 (1904) 노벨 화학상 (1911) 피에르 퀴리 이렌 졸리오퀴리 프레데리크 졸리오퀴리 이브 퀴리 네이버 캐스트 오늘의 인물 - 마리 퀴리 Marie Curie – Biography 노벨재단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마리 퀴리 전기. 1903년 노벨상 수상자 Obituary, New York Times, 5 July 1934 Mme. Curie Is Dead; Martyr to Science Some places and memories related to Marie Curie Marie Curie on the 500 French Franc and 20000 old Polish zloty banknotes. American Institute of Physics 마리 퀴리의 삶에 관하여. AIP에서 마리 퀴리의 사진을 찾을 수 있음 - 마리 퀴리에 관한 전기 애니메이션, world and American history - Animated Hero Classics distributed by Nest Learning. - Live Action portrayal of Marie Curie on DVD from the Inventors Series produced by Devine Entertainment. - BBC가 만든 텔레비전 시리즈 중의 한편 - 마리 퀴리 전기 분류:1867년 태어남 분류:1934년 죽음 분류:퀴리 가 분류:노벨 화학상 수상자 분류: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분류:프랑스의 노벨상 수상자 분류:폴란드의 노벨상 수상자 분류:여자 노벨상 수상자 분류:프랑스의 화학자 분류:프랑스의 물리학자 분류:프랑스의 여자 과학자 분류:프랑스의 불가지론자 분류:폴란드의 화학자 분류:폴란드의 물리학자 분류:폴란드의 여자 과학자 분류:폴란드의 불가지론자 분류:폴란드계 프랑스인 분류:실험물리학자 분류:파리 대학교 동문 분류:지폐의 인물 분류:화학 원소를 발견한 사람 분류:핵화학자 분류:원자력 사고의 피폭자 분류:바르샤바 출신 분류:러시아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 분류:로마 가톨릭교회 이탈자 분류:프랑스로 귀화한 사람 분류:19세기 물리학자 분류:20세기 물리학자 분류:19세기 화학자 분류:20세기 화학자 분류:방사능 분류:폴란드의 무신론자
피에르 퀴리 (Pierre Curie, 1859년 5월 15일 ~ 1906년 4월 19일) 는 프랑스의 물리학자로, 결정학, 자기, 압전효과, 방사선 분야의 선구자이다. 독학으로 공부하였다. 마리 퀴리와 결혼, 두 명의 딸을 두었다. 1903년 부인 마리와 함께 노벨 물리학상을 공동 수상하는 영광을 누렸지만, 1906년 직장인 소르본대학교에 가던 중 마차에 치이는 교통사고로 숨을 거두었다. 그의 나이는 47세였다. 노벨 물리학상 (1903) Davy Medal (1903) Matteucci Medal (1904) 퀴리 온도 NOBELPRIZE.ORG History of Pierre and Marie 1903년 노벨상 수상자 노벨재단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전기 American Institute of Physics의 전기 Annotated bibliography for Pierre Curie from the Alsos Digital Library for Nuclear Issues 피에르 퀴리의 논문 French Academy of Sciences papers Prof. Curie killed in a Paris street 뉴욕 타임즈의 사망에 관한 기사 분류:1859년 태어남 분류:1906년 죽음 분류:교통 사고로 죽은 사람 분류:퀴리 가 분류:프랑스의 물리학자 분류:프랑스의 화학자 분류: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분류:프랑스의 노벨상 수상자 분류:파리 대학교 동문 분류:화학 원소를 발견한 사람 분류:지폐의 인물 분류:파리 대학교 동문 분류:파리 출신 분류:19세기 물리학자 분류:20세기 물리학자 분류:19세기 화학자 분류:20세기 화학자 분류:방사능 분류:프랑스의 무신론자
유닉스 ()는 교육 및 연구 기관에서 즐겨 사용되는 범용 다중 사용자 방식의 시분할 운영 체제이다. 1970년대 초반 벨 연구소 직원인 켄 톰슨, 데니스 리치 등이 처음 개발하였다. 오늘날의 유닉스 시스템은 여러 회사들과 비영리 단체들이 이 커널로 활용하여 다양한 운영체제을 개발하고 있다. 유닉스는 처음부터 다양한 시스템 사이에서 서로 이식할 수 있고, 멀티 태스킹과 다중 사용자를 지원하도록 설계되었다. 유닉스 시스템은 다음과 같은 개념을 가지고 있다. 일반 텍스트 파일, 명령행 인터프리터, 계층적인 파일 시스템, 장치 및 특정한 형식의 프로세스 간 통신을 파일로 취급 등. 소프트웨어 공학 측면에서, 유닉스는 C의 사용과 유닉스 철학이라는 부분이 특징이다. 유닉스(UNIX) 상표권은 오픈 그룹이 갖고 있으며, 유닉스 소스 코드에 대한 저작권은 노벨이 소유하고 있다. SCO 그룹은 SCOsource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유닉스 시스템 V Release 4 (및 자체 릴리즈인 UNIX 시스템 V, Release 5)에 기반한 코드로 된 운영 체제를 사용하고자 하는 모든 기업 및 개인들에게 라이선스를 제공하고 있다. 한편, 닷컴 버블로 유닉스 사업자들에게도 합병의 바람이 불게 되었다. 1980년대에 태어난 많은 상업 유닉스 업체들 중에서 휴렛 패커드의 HP-UX, IBM의 IBM AIX, NeXT의 NEXTSTEP (나중에 오픈스텝이 되었다가 이제 맥 OS X가 됨) 및 썬 마이크로시스템즈 솔라리스 운영 체제들만이 아직도 시장에서 판매되고 있다. 디지털 이큅먼트 코퍼레이션(DEC), 데이터 센트럴(Data General), 산타 쿠르즈 오퍼레이션 (현재는 Tarantella) 등은 다른 업체에 합병되거나 사업을 접었다. 또한, 리눅스와 오픈 소스 BSD의 사용이 증가됨에 따라 기존의 상업 유닉스 시장이 침식되어 갔다. 유닉스의 기원은 1960년대 중순 메사추세츠 공과대학교, 벨 연구소, 제네럴 일렉트릭이 GE-645 메인프레임 컴퓨터를 위해 시분할 운영 체제의 하나인 멀틱스를 개발하고 있던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플랜 9 유닉스 계열 오픈 그룹의 유닉스 홈페이지 분류:운영 체제 분류:1969년 소프트웨어 분류:시분할 운영 체제
모차르트의 친필 사인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 1756년 1월 27일 ~ 1791년 12월 5일)는 오스트리아의 서양 고전 음악 작곡가이다. 궁정 음악가였던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에게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배웠고, 그 후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아들인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에게서 작곡하는 법 및 지휘를 배웠다. 35년의 생애 동안 그는 수많은 교향곡, 오페라, 협주곡, 소나타를 작곡했으며, 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곡가 중 한 명으로 여겨지고 있다. 오늘날 모차르트는 “음악의 신동” 이란 별칭으로 불리며 널리 존경받고 있다. 1756년 1월 27일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났다. 출생 직후에 가톨릭의 성당에서 받은 세례명은 요하네스 크리소스토무스 우올프강구스 테오필루스 모차르트 ()였다. 흔히 알려진 중간성명인 아마데우스 ()는 세례명에 있는 중간성명인 라틴어 테오필루스()를 같은 뜻의 독일어로 바꾼 것이다. 그의 아버지인 레오폴트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 궁정 관현악단의 음악 감독이었는데, 볼프강의 누나인 난네를을 어려서부터 가르쳤고, 이를 볼프강은 지켜보았다. 세 살 때부터 볼프강은 누나를 보고, 스스로 건반을 다루고 연주하는 법을 터득했다.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는 어린 아들의 재주를 보았고, 아들의 음악적 재능이 뚜렷이 빛을 발하게 되면서 작곡을 그만 두었고, 볼프강에게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가르쳤다. 그는 피아노와 바이올린에 매우 뛰어났다. 난네를의 뮤직북에 쓰여진 레오폴트 모차르트의 기록에 따르면 어린 볼프강은 네 살 때 여러 곡을 배웠다고 한다. 모차르트의 음악적 능력은 빠르게 발달하여, 다섯 살 때 이미 작곡을 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모차르트를 믿지 못하여 일부러 모차르트의 집에 찾아와서 모차르트를 시험해 보았다. 사람들은 모차르트의 아버지인 레오폴트 모차르트가 모차르트의 곡을 써주었다고 의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차르트는 그 사람들에게 뛰어난 작곡 실력과 재능을 보였고, 사람들은 그제서야 모차르트를 믿기 시작하였다. 그 후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아들인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에게 아들을 보내 작곡하는 법에 대한 기예를 더 배우게 했다. 1777년 모차르트는 어머니 안나 마리아 모차르트와 함께 독일 뮌헨, 만하임, 프랑스 파리를 여행하면서 많은 음악가를 만났는데, 그 가운데 1764년에서 1765년 사이 영국 런던에서 만난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는 바흐에게서 처음으로 교향곡을 작곡하는 법을 배웠으며 이러한 토대로 모차르트는 사후까지 수많은 걸작의 교향곡을 남기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또한 모차르트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생활하던 1784년에 루트비히 판 베토벤과도 만났다. 그는 어려운 집안사정에도 자신을 찾아온 베토벤을 반갑게 맞이하였는데, 이 때 베토벤의 나이는 불과 14세였다. 모차르트는 베토벤이 자신의 곡을 즉흥적으로 또 다른 작품으로 훌륭히 소화하자 칭찬을 아끼지 않았으며, 교육비를 일절 거절하고, 베토벤을 가르치는데 전념했다. 그러나 베토벤은 어머니가 사망하였다는 소식을 듣자 모차르트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오스트리아 빈을 갑작스럽게 떠났다. 만난 지 불과 1달만의 일로 이것이 두 거장의 마지막 만남이었다.(베토벤이 다시 빈에 찾아온 건 1792년으로 그 때는 모차르트가 죽은지 1년이 지난 후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전거는 오토 얀이 저술한 모차르트의 전기가 유일하다. 따라서 오늘날은 베토벤과 모차르트가 만났다는 일화에 대한 신뢰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모차르트의 초상화. Johann Nepomuk della Croce의 1780년 경 작품. 모차르트의 죽음과 그 원인에 대해서는 수많은 전설을 비롯하여 학설이 많다. 낭만적인 주장으로는 모차르트의 건강이 점점 약해지면서 그의 모습과 작품 역시 다가오는 죽음과 함께 쇠퇴하였다는 것이 있다. 반면에 다른 학자들은 모차르트의 마지막 해가 그에게 성공적이었으며, 그의 죽음이 가족들에게 충격이었다는 점을 들어 그의 죽음이 급작스러웠다고 주장한다. 그의 죽음의 원인 또한 추측이 무성하다. 기록에는 그가 "무수히 난 좁쌀만한 발열"("hitziges Frieselfieber")로 죽었다고 되어 있는데, 현대의학으로 진단할 수 있는 것에 비해서는 충분한 정보가 되지 못하고 있다. 사인에 대한 학설 중에는 선모충병, 중독, 류머티스열, 덜 익힌 돼지고기에 의한 식중독 등이 있다. 환자의 피를 뽑았던 당시의 의술도 모차르트의 죽음을 앞당기는 데에 이바지했다고 본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는 1791년 12월 5일 오전 0시 55분경에 죽었다. 콘스탄체는 모차르트가 완성하지 못한 작품 레퀴엠의 완성을 여러 제자에게 맡겼으나 끝내 완성하지 못하다가 결국 프란츠 크사버 쥐스마이어(Franz Xaver Süssmayr)가 완성했다. 모차르트가 가난과 무관심 속에서 죽었다는 이야기와 다르게 그는 나름 만족할 만한 수입이 있었고, 체코 프라하 같이 멀리 떨어진 곳에서 꾸준한 작곡 의뢰를 받았다. 그가 말년에 전성기 때만큼의 명성을 누리지는 못했으며 돈을 꿔 달라고 쓴 편지가 있지만, 이는 그가 가난해서가 아니라 번 돈보다 더 많이 썼기 때문이었다. 그 실례로 모차르트가 입은 옷은 보석으로 장식된 화려한 의상이었다. 모차르트는 빈 외곽의 성, 마르크스 묘지에 묻혔다. New Groove에 따르면 그가 여러 사람과 함께 묻힌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가난해서가 아니라 당시 오스트리아 빈 중산층의 장례 풍습대로였다. 그것은 잘 정비된 묘지였으며 나무로 된 것이었으나 묘비도 있었다. 묘비가 나무였던 것 또한 당시 오스트리아 빈 중산층의 장례 풍습에 따른 것이었다. 실제 당시 오스트리아 빈에서는 화려한 장례가 엄격히 금지되었다. 전설에 따르면 장례식 날 비가 오고, 천둥이 쳤다고 하나 New Groove에 따르면 사실은 구름 한 점 없는 쾌청한 날이었다고 한다. 현재 모차르트의 무덤의 위치를 알 수 없는 것은 성 마르크스 묘지가 더 많은 묘지를 수용하기 위해 이장을 거듭하였기 때문이지 아무렇게나 묻었기 때문은 아니다. 콘스탄체 모차르트는 남편이 죽은 후 추모 음악회, 미발표 작품의 출판 등으로 경제적으로 성공하였다. 1809년 그녀는 덴마크 출신 외교관이었던 게오르크 니콜라우스 폰 니센(Georg Nikolaus von Nissen)과 재혼했다. 그들은 덴마크로 이주했다가 다시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로 돌아와 여생을 마감했다. 콘스탄체와 새 남편은 모두 모차르트에 대한 전기를 남겼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1756년~1791년)는 여러 장르의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의 많은 작품 가운데 특히 오페라, 피아노 협주곡, 교향곡, 그리고 현악 사중주와 현악 오중주 작품들이 유명하다. 모차르트는 또 피아노 솔로와, 여러 형태의 실내악, 미사곡 및 여러 종교 음악, 무곡들, 디베르티멘토 등도 작곡했다. "K." 쾨헬 번호/교향곡(1번-41번), 피아노 협주곡(1번-27번, 일부 초기 작품은 제외 모차르트는 1764년부터 1788년까지 24년의 기간 동안 여러 교향곡을 작곡했다. 가장 최근의 조사에 따르면, 모차르트는 전통적으로 알려진 41개보다 훨씬 많은 총 68곡의 완전한 교향곡을 작곡했다. 그러나 관습적으로 마지막 세 교향곡이라고 하면 교향곡 번호 39번, 40번과 41번을 지칭한다. 일부 교향곡(K. 297, 385, 550)은 초판 이후 모차르트에 의해 수정되기도 했다. 이탈리아 서곡 형식(세악장:알레그로-안단테-알레그로) 일부만 미뉴에트 포함 교향곡 1번 E flat 장조, K. 16 교향곡 2번 B flat 장조, K. 17 교향곡 3번 E flat 장조, K. 18 교향곡 4번 D 장조, K. 19 교향곡 5번 B flat 장조, K. 22 교향곡 6번 F 장조, K. 43 교향곡 7번 D 장조, K. 45 교향곡 8번 D 장조, K. 48 교향곡 9번 C 장조, K. 73 (1773) 교향곡 10번 G 장조, K. 74 교향곡 11번 D 장조, K. 95 교향곡 12번 G 장조, K. 110 교향곡 13번 F 장조, K. 112 교향곡 14번 A 장조, K. 114 이 교향곡들은 보통 "초기"(1772년-1773년)나 "후기"(1773년-1775년)교향곡으로 나뉘거나, 가끔은 "독일식"(미뉴에트를 포함) 또는 "이탈리아식"(미뉴에트 없음)으로 나뉜다. 이 곡들은 모차르트의 생전에 출판된 적이 없다. 이탈리아 서곡 형식의 세 개의 악장으로 되어 있는 디베르티멘토 세 작품(K. 136-138)들은 비록 "교향곡"은 아니지만 "잘츠부르크 교향곡"으로 불리기도 한다. 교향곡 15번 G 장조, K. 124 (1772년) 교향곡 16번 C 장조, K. 128 (1772년) 교향곡 17번 G 장조, K. 129 (1772년) 교향곡 18번 F 장조, K. 130 (1772년) 교향곡 19번 E flat 장조, K. 132 (1772년) 교향곡 20번 D 장조, K. 133 (1772년) 교향곡 21번 A 장조, K. 134 (1772년) 교향곡 22번 C 장조, K. 162 (1773년) 교향곡 23번 D 장조, K. 181 (1773년) 교향곡 24번 B flat 장조, K. 182 (1773년) 교향곡 25번 g 단조, K. 183 (173d B) (1773년) 같은 g 단조인 40번 교향곡에 비교해서 "작은 g 단조 교향곡"으로도 불린다. 교향곡 26번 E flat 장조, K. 184 (1773년) 교향곡 27번 G 장조, K. 199 (1773년) 교향곡 28번 C 장조, K. 200 (1774년) 교향곡 29번 A 장조, K. 201 (1774년) 교향곡 30번 D 장조, K. 202 (1774년) 교향곡 31번 D 장조 "파리", K. 297 (1778년) 모차르트는 그의 능력에 어울리는 일자리를 찾기 위해 1778년에 파리에 도착한다. 비록 그 목적을 이루지는 못하지만, 그는 소위 "파리 교향곡"을 작곡하게 된다. 교향곡 32번 "이탈리아 형식의 서곡" G 장조, K. 318 (1779년) 교향곡 33번 B flat 장조, K. 319 (1779년) 교향곡 34번 C 장조, K. 338 (1780년) 교향곡 35번 "하프너" D 장조, K. 385 (1782년) :모차르트가 결국 빈으로 이사한 후에 작곡한 곡이다. 원래는 하프너 家("하프너 세레나데, K.249"를 의뢰했었음)를 위한 세레나데로 쓰여진 곡이었다. 미뉴에트와 마치 한 악장을 뺌으로서 교향곡 형식으로 만들었다. 교향곡 36번 "린츠" C 장조, K. 425 (1783년) :모차르트가 린츠에 방문했을 때 작곡한 곡이다. 교향곡 37번 G 장조, K. 444 (1784년) 오랫동안 모차르트 교향곡으로 분류되어 왔으나, 후대의 학자들은 이 곡이 실제로는 미하엘 하이든이 작곡했고, 모차르트는 서주부만 작곡한 사실을 밝혀냈다. 현재 이 곡은 미하엘 하이든 교향곡 25번으로 분류된다. 교향곡 38번 "프라하" D 장조, K. 504 (1786년) :프라하에서의 행복한 시절을 보낸 후 빈에서 작곡한 곡이다. 이전의 모차르트 교향곡보다 개념적으로 진보했으며, 연주하기 어려운 곡이다. 교향곡 39번 E flat 장조, K. 543 (1788년) 40번과 41번 교향곡과 더불어 "후기 3대 교향곡"으로 불린다. 이 세 교향곡은 모차르트의 생전에 출판되지는 못했었지만, 하나의 작품(opus)으로 출판하려고 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 가운데 한 곡 또는 그 이상이 1789년 라이프치크에서 연주되었을 것이다. 세 곡 가운데 이 39번 교향곡이 가장 덜 알려졌고, 덜 연주된다. 교향곡 40번 g 단조, K. 550 (1788년) 같은 g 단조인 25번 교향곡에 비교해서 "큰 g 단조 교향곡"으로도 불린다. 모차르트의 교향곡 가운데 가장 널리 연주되는 곡이다. 두 번째 개정판에서 클라리넷이 추가되는 등, 관악기의 우아한 편성이 주목된다. 모차르트가 10살 때 작곡했다고 하지만 가짜일 수 있는 교향곡 a 단조 "Odense"(K.16a)를 제외하면 25번 교향곡과 이 40번 교향곡만이 모차르트가 작곡한 단조 교향곡의 전부이다. 교향곡 41번 "쥬피터" C 장조, K. 551 (1788년) :첫 번째 악장에서의 트럼펫과 팀파니의 두드러진 사용이 특징이다. 마지막 악장의 네 음표로 이뤄진 동기는 모차르트에 의해 자주 사용되었다. 마지막 악장은 소나타 형식을 따라 다섯개의 기본적인 주제가 대위법으로 전개되는 "코다"로 마무리된다. "쥬피터"라는 별칭은 모차르트가 붙인 것이 아니며 영국의 요한 페터 살로몬이 붙인 것으로 전해진다. 모차르트는 여러 악기들을 위한 많은 협주곡들을 작곡했다. 피아노 협주곡 1번 F 장조, K. 37 피아노 협주곡 2번 B flat 장조, K. 39 피아노 협주곡 3번 D 장조, K. 40 피아노 협주곡 4번 G 장조, K. 41 피아노 협주곡 5번 D 장조, K. 175 피아노 협주곡 6번 B flat 장조, K. 238 세 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 7번 "로드론" F 장조, K. 242 피아노 협주곡 8번 "뤼초우" C 장조, K. 246 피아노 협주곡 9번 "주놈" E flat 장조, K. 271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 10번 E flat 장조, K.365 피아노 협주곡 11번 F 장조, K. 413/387a 피아노 협주곡 12번 A 장조, K. 414/385p 피아노 협주곡 13번 C 장조, K. 415/387b 피아노 협주곡 14번 E flat 장조, K. 449 피아노 협주곡 15번 B flat 장조, K. 450 피아노 협주곡 16번 D 장조, K. 451 피아노 협주곡 17번 G 장조, K. 453 피아노 협주곡 18번 B flat 장조, K. 456 피아노 협주곡 19번 F 장조, K. 459 피아노 협주곡 20번 d 단조, K. 466 피아노 협주곡 21번 C 장조, K. 467 피아노 협주곡 22번 E flat 장조, K. 482 피아노 협주곡 23번 A 장조, K. 488 피아노 협주곡 24번 c 단조, K. 491 피아노 협주곡 25번 C 장조, K. 503 피아노 협주곡 26번 "대관식" D 장조, K. 537 피아노 협주곡 27번 B flat 장조, K. 595 멜로디의 아름다움과, 비록 모차르트가 후대의 다른 음악가들(베토벤이나 브람스 등)만큼 바이올린의 가능성을 모두 이용한 것은 아니지만, 악기의 표현적이고 기교적인 특성을 기술적으로 잘 사용한 점이 모차르트 바이올린 협주곡들의 특징이다. 다섯 곡 모두 모차르트가 아버지를 따라서 유럽을 여행하던 십대 후반 시절에 작곡한 것들이다. (알프레드 아인스타인은 바이올린 협주곡이라고 이름붙은 작품들보다도 세레나데의 바이올린 협주곡같은 부분들이 더 뛰어나다고 이야기한다.) 바이올린 협주곡 1번 B flat 장조, K. 207 (1775년) 바이올린 협주곡 2번 D 장조, K. 211 (1775년) 바이올린 협주곡 3번 G 장조, K. 216 (1775년) 바이올린 협주곡 4번 D 장조, K. 218 (1775년) 바이올린 협주곡 5번 A 장조, K. 219 (1775년) 호른 협주곡은 호른 주자와 오케스트라간의 세련되고 유머스러운 대화가 특징이다. 많은 호른 협주곡의 서명에는 헌정 대상에 대한 농담이 들어 있다. 호른 협주곡 1번 D 장조, K. 412 (1792년) 두 번째 악장은 모차르트의 사후에 그의 제자인 프란츠 크사버 쥐스마이어(Franz Xaver Süssmayr)에 의해 완성되었다. 호른 협주곡 2번 E flat 장조, K. 417 호른 협주곡 3번 E flat 장조, K. 447 호른 협주곡 4번 E flat 장조, K. 495 (1786년) 바순 협주곡 B flat 장조, K. 191 (1774년) 플룻, 하프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 C 장조, K. 299 (1778년) 사뭇 다른 두 악기의 조화는 매우 독창적이다. 오보에 협주곡 C 장조, K. 314 플룻 협주곡으로 알려져 왔지만, 원래는 거의 확실하게 오보에 협주곡이다. 바이올린, 비올라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신포니아 콘체르탄테 E flat 장조, K. 364 (1779년) 비올라 부분이 특히 뛰어나다. 오보에, 클라리넷, 호른과 바순을 위한 신포니아 콘체르탄테 E flat 장조, K. 297b, Anh.9 (후에는 Anh. C 14.01) (1791년) 모차르트의 곡인지 아직까지 불분명(그의 서명이 없음)하다. 클라리넷 협주곡 A 장조, K. 622 (1791년) 모차르트 말년의 작품 중의 하나로, 모짜르트가 클라리넷을 위해 작곡한 3곡중 하나이다. 특히 2악장은 모짜르트 작품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곡으로 꼽히는 명곡이다. 플룻 협주곡 1번 G 장조, K. 313 (1778년) 플룻 협주곡 2번 D 장조, K. 314 (1778년) 플룻 안단테 C 장조, K. 315 (1778년) 바이올린, 비올라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신포니아 콘체르탄테 E flat 장조, K. 364 (1779년) 오보에, 클라리넷, 호른과 바순을 위한 신포니아 콘체르탄테 E flat 장조, K. 297b, Anh.9 (후에는 Anh. C 14.01) (1791년) 모차르트의 초년 시기의 작곡 시도는 피아노 소나타와 그 밖의 피아노 곡들로 시작되는데, 이는 그가 음악을 배우면서 사용한 악기가 피아노였기 때문이다. 거의 대부분의 피아노 곡들은 모차르트 스스로(또는 능숙한 피아노 연주자였던 그의 누나)가 연주하기 위해 작곡하였다. 1782년부터 1786년까지 그는 소나타, 변주곡, 환상곡, 모음곡, 푸가, 론도 등을 포함해 20곡의 솔로 및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곡을 작곡했다. 난네를의 뮤직 북 # 안단테 C 장조, K. 1a # 알레그로 C 장조, K. 1b # 알레그로 F 장조, K. 1c # 미뉴에트 F 장조, K. 1d # 미뉴에트 G 장조, K. 1e # 미뉴에트 C 장조, K. 1f # 미뉴에트 F 장조, K. 2 # 알레그로 B flat 장조, K. 3 # 미뉴에트 F 장조, K. 4 # 미뉴에트 F 장조, K. 5 # 알레그로 C 장조, K. 5a # 안단테 B flat 장조, K. 5b 피아노 소나타 1번 C 장조, K. 279 (뮌헨, 1774년 여름) 피아노 소나타 2번 F 장조, K. 280 (뮌헨, 1774년 여름) 피아노 소나타 3번 B-flat 장조, K. 281 (뮌헨, 1774년 여름) 피아노 소나타 4번 E-flat 장조, K. 282 (뮌헨, 1774년 여름) 피아노 소나타 5번 G 장조, K. 283 (뮌헨, 1774년 여름) 피아노 소나타 6번 D 장조, K. 284 (뮌헨, 1775년 2월-3월) 피아노 소나타 7번 C 장조, K. 309 (만하임, 1777년 11월 8일) 피아노 소나타 8번 a 단조, K. 310 (파리, 1778년 여름. 일부 목록에는 8번과 9번이 바뀌어 있음.) 피아노 소나타 9번 D 장조, K. 311 (만하임, 1777년 11월. 일부 목록에는 8번과 9번이 바뀌어 있음.) 피아노 소나타 10번 C 장조, K. 330 (1778년 여름) 피아노 소나타 11번 "터키행진곡" A 장조, K. 331 (1778년 여름) 피아노 소나타 12번 F 장조, K. 332 (1778년 여름) 피아노 소나타 13번 B flat 장조, K. 333 (1778년 여름) 피아노 소나타 14번 C 단조, K. 457 (빈, 1784년 10월 14일) 피아노 소나타 15번 F 장조, K. 533 (빈, 1788년 1월 3일) 피아노 소나타 16번 C 장조, K. 545 (소위 "쉽거나" 혹은 "단순한" 소나타, 빈, 1788년 6월 26일) 피아노 소나타 17번 F 장조, K. 547a (빈, 1788년 여름) 피아노 소나타 18번 B flat 장조, K. 570 (빈, 1789년 2월) 피아노 소나타 19번 D 장조, K. 576 (빈, 1789년 7월) 환상곡과 푸가 1번 C 장조, K. 394 (빈, 1782년) 환상곡 2번 C 단조, K. 396 (빈, 1782년) 환상곡 3번 D 단조, K. 397 (빈, 1782년) 환상곡 4번 C 단조, K. 475 (빈, 1785년 5월 20일) 모차르트는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위한 곡들(16곡의 소나타와 여러 단편곡, 그리고 두 개의 변주곡모음)도 작곡했는데, 특히 성년 시기에 작곡한 곡들에서 피아노는 그저 다른 독주 악기의 보조에 머무르지 않고 대화를 만들어 간다. 두 대의 바이올린이나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위한 현악 이중주 현악 사중주 "밀라노, K. 80 과 K. 155-160 (1770년-1773년) 이 시기의 작품(세 악장으로 구성)들은 이후의 보다 완전한 사중주 작품들의 전조격에 해당한다. : 현악 사중주 1번 G 장조, K. 80/73f (1770년) : 현악 사중주 2번 D 장조, K. 155/134a (1772년) : 현악 사중주 3번 G 장조, K. 156/134b (1772년) : 현악 사중주 4번 C 장조, K. 157 (1772년-1773년) : 현악 사중주 5번 F 장조, K. 158 (1772년-1773년) : 현악 사중주 6번 B-flat 장조, K. 159 (1773년) : 현악 사중주 7번 E-flat 장조, K. 160/159a (1773년) 빈 사중주, K. 168-173 (1773년) 더 발전된 양식의 작품들이 만들어진 시기이다. 빈에서 모차르트는 요제프 하이든의 사중주 작품 Op. 17과 Op. 20을 듣고 깊은 영감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모차르트는 아래의 작품들에서 그를 따라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아직은 하이든에는 미치지 못한다. : 현악 사중주 8번 F 장조, K. 168 (1773년) : 현악 사중주 9번 A 장조, K. 169 (1773년) : 현악 사중주 10번 C 장조, K. 170 (1773년) : 현악 사중주 11번 E-flat 장조, K. 171 (1773년) : 현악 사중주 12번 B-flat 장조, K. 172 (1773년) : 현악 사중주 13번 d 단조, K. 173 (1773년) 하이든 사중주 K. 387, 421, 428, 458, 464, 465, Op. 10 (1782년-1785년) 모차르트는 빈으로 돌아오고 하이든을 개인적으로 만나 그와 친분을 맺은 뒤인 1780년대 초기에 다시 사중주를 작곡하기 시작했다. 하이든이 당시 작곡했던 여섯 개의 사중주 곡들(Op. 33)은 모차르트가 다시 사중주 곡들을 쓰도록 자극하는 역할을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아래의 사중주 곡들은 종종 사중주 장르의 정점에 놓여 있다고 여겨진다. : 현악 사중주 14번 G 장조, K. 387 (1782년) : 현악 사중주 15번 d 단조, K. 421/417b (1783년) : 현악 사중주 16번 E-flat 장조, K. 428/421b (1783년) : 현악 사중주 17번 B-flat 장조 ("사냥"), K. 458 (1784년) : 현악 사중주 18번 A 장조, K. 464 (1785년) : 현악 사중주 19번 C 장조 ("불협화음"), K. 465 (1785년) 현악 사중주 20번 D 장조 ("호프마이스터"), K. 499 (1786년) 이 작품은 프로이센 사중주와 더불어 프란츠 안톤 호프마이스터에 의해 출판되었다. 모차르트가 작곡한 마지막 세 사중주 곡들은 프로이센의 왕인 프리드리히 2세에게 헌정되었으며, (왕이 직접 연주한 악기인) 첼로 파트의 칸타빌레적인 특징과 부드러운 선율, 여러 악기들간의 조화로 주목받는다. 프로이센 사중주 K. 575, 589, 590 (1789년-1790년) : 현악 사중주 21번 D 장조, K. 575 (1789년) : 현악 사중주 22번 B-flat 장조, K. 589 (1790년) : 현악 사중주 23번 F 장조, K. 590 (1790년) 두 대의 바이올린, 두 대의 비올라 그리고 첼로를 위한 모차르트의 현악 오중주 곡들(K. 174, 406, 515, 516, 593, 614)은 그 수는 비록 사중주보다 적지만 그 가운데에는 사중주곡보다 더욱 뛰어난 평가를 받는 곡들도 있다. 현악 오중주 B-flat 장조, K. 174 현악 오중주 C 장조, K. 515 이 작품으로부터 교향곡 41번("쥬피터")의 웅장함이 유래하게 된다. 이 곡의 첫 번째 악장은 모차르트의 모든 작품 가운데서 가장 긴 악장 중의 하나이며, 극한의 아름다움과 복잡성을 띠는 발전부를 갖고 있다. 현악 오중주 g 단조, K. 516 모차트르의 대표곡 중의 하나로 여겨진다. 같은 조성의 교향곡 40번과 비슷한 격정적이고 비극적인 감성을 떠올리게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 곡의 마지막 악장이 환희에 찬 G 장조로 끝나는 것이 곡 전체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현악 오중주 c 단조, K. 406 (516b) 이 작품은 이전에 작곡된 관악 세레나데 "나흐트 무지크"(밤의 음악, K. 388)을 현악 오중주로 편곡한 것이다. 현악 오중주 D 장조, K. 593 현악 오중주 E-flat 장조, K. 614 플룻을 위한 사중주 (플룻,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K. 285, 285a, 285b, 298 (1777년-1787년) 피아노와 관악기를 위한 사중주 (오보에, 클라리넷, 호른, 바순) K. 452 (1784년) 클라리넷 오중주 K. 581 (1789년) 기악 앙상블을 위한 작품에는 "디베르티멘토", "노투르나", "세레나데", "카사치오네", "행진곡", "무곡"과 "교향곡" 등이 포함된다. 모차르트의 오케스트라를 위한 작품에는 현악 앙상블을 위한 것들(초기의 디베르티멘토 K.136-138 등)과 관악 앙상블을 위한 것들, 그리고 현악과 관악의 여러 조합을 위한 것들이 있다. "그랑 파르티타 (세레나타) K.361"는 가장 대표적인 관악기를 위한 모차르트의 곡이다. 두 대의 오보에, 두 대의 클라리넷, 두 대의 바셋 호른, 네 대의 헌팅 호른, 두 대의 바순과 더블 베이스로 연주된다. 모차르트는 "미뉴에토", "콩트르당스"와 "알망드" 등 오케스트라를 위한 많은 무곡을 작곡했다.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무지크 (현악 사중주와 베이스를 위한 세레나데 K. 525) 12대의 관악기와 콘트라베이스를 위한 세레나데 (관악 세레나데 10번 B flat 장조 K. 361) 디베르티멘토들 (예를 들어 디베르티멘토 C 장조 K. 188 등) 디베르티멘토들, K. 136-138 (1772년) 현악 오중주로 분류되지만, 실제로는 이탈리아의 "서곡" 형식으로 되어 있다. 두 대의 호른과 현악을 위한 디베르티멘토들, 음악의 유희(Ein Musikalischer Spaß,) K. 522 대관식 미사(Krönungsmesse) C 장조, K.317 대 미사(Große Messe) c 단조, K.427 레퀴엠(Requiem) d 단조, K.626 :이 곡은 모차르트의 유작이며, 그의 조수였던 프란츠 크사버 쥐스마이어가 완성했다. 환호하라, 기뻐하라(Exsultate, Jubilate), K.165 Ave verum Corpus, K.618 모차르트의 성악곡 모차르트의 성악곡인 미사, 오라토리오, 칸타타, 레퀴엠, 아리아, 아리에타 등을 모은 명단 K1 K6 작품 작품(한글명) 날짜 장소 21 19c Aria for Tenor, "Va, dal furor portata" 테너를 위한 아리아 "분노로 나타내라" 1765년 런던 35 35 Die Schuldigkeit des ersten Gebots 제 1계율의 책무 1767년 초 잘츠부르크 42 35a Cantata for soloists, choir & orchestra Grabmusik 칸타타 장례음악 1767년 잘츠부르크 49 47b Missa brevis in G 짧은 미사 G 장조 1768년 10월 ~ 11월 빈 65 61a Missa brevis in D minor 짧은 미사 d 단조 1769년 1월 14일 잘츠부르크 66 66 Missa in C, "Dominicus" 미사곡 C 장조 "Dominicus" 1769년 10월 잘츠부르크 77 73e Recitative and Aria for Soprano, "Misero me!...Misero pargoletto" 소프라노를 위한 레차타티보와 아리아 "불행한 나!...가엾은 아기" 1770년 3월 밀라노 83 73p Aria for Soprano, "Se tutti i mali miei" 소프라노를 위한 아리아 "모든 악이 나때문이라면" 1770년 4월 ~ 5월 로마 119 382h Aria for Soprano, "Der Liebe himmlisches Gefuhl" 소프라노를 위한 아리아 "사랑스런 봄이 벌써 활짝 웃네" 1782년 이전 빈? 139 47a Missa solemnis in C minor, "Waisenhaus" 장엄미사 c 단조 "Waisenhaus" 1768년 가을 빈 140 Anh. C1.12 Missa brevis in G 짧은 미사 G 장조 1773년 이전 잘츠부르크? 152 210a Song for voice & piano (spurious, by Myslivecek) "Ridente la calma" 성악과 피아노를 위한 노래 "고요함은 미소짓고" 1775년 165 158a Motet in F for Soprano, "Exsultate, jubilate" 소프라노를 위한 모테트 F 장조 "환호하라, 기뻐하라" 1773년 1월 밀라노 167 167 Missa in C, "Trinitatis" 미사 C 장조 "Trinitatis" 1773년 6월 잘츠부르크 192 186f Missa brevis in F 짧은 미사 B 장조 1774년 6월 24일 잘츠부르크 194 186h Missa brevis in D 짧은 미사 D 장조 1774년 8월 8일 잘츠부르크 209 209 Aria for Tenor, "Si mostra la sorte" 테너를 위한 아리아 "운명이 보여주도다" 1775년 5월 19일 잘츠부르크 217 217 Aria for Soprano, "Voi avete un cor fedele" 소프라노를 위한 아리아 "당신은 충실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요." 1775년 10월 26일 잘츠부르크 220 196b Missa brevis in C, "Spatzen" 짧은 미사 C 장조 "Spatzen" 1775년 ~ 1776년 255 255 Recitative and Aria for Alto, "Ombra felice" 알토를 위한 레차타티보와 아리아 "평화의 그림자" 1776년 9월 잘츠부르크 257 257 Missa in C, "Credo" 미사 C 장조 "Credo" 1776년 11월 잘츠부르크 258 258 Missa brevis in C, "Spaur" 짧은 미사 C 장조 "Spaur" 1775년 12월 잘츠부르크 259 259 Missa brevis in C, "Organ Solo" 짧은 미사 C 장조 "Organ Solo" 1775년 12월 또는 1776년 잘츠부르크 262 246a Missa longa in C 롱가 미사 C 장조 1775년 6월 또는 7월 잘츠부르크 272 272 Recitative and Aria for Soprano, "Ah, lo previdi, Ah! T invola agl occhi miei" 소프라노를 위한 레차타티보와 아리아 "제 예상대로군요. 내 눈 앞에서 사라지세요" 1777년 8월 잘츠부르크 275 272b Missa brevis in B flat 짧은 미사 B flat 장조 1777년 말 잘츠부르크 276 321b Regina Coeli in C 천국의 여왕 C 장조 1779년 이전 잘츠부르크? 294 294 Recitative and Aria for Soprano, "Alcandro, lo confesso" 소프라노를 위한 레차타티보와 아리아 "나는 모르네 이 따뜻한 애정이 어디서 오는지" 1778년 2월 24일 만하임 295 295 Aria for Tenor, "Se al labbro mio non credi" 테너를 위한 아리아 "그대 만약 나의 입술을 믿지 못한다면" 1778년 2월 27일 만하임 295a Recitative and Aria for Soprano, "Basta, vincesti ... Ah, non lasciarmi" 소프라노를 위한 레차타티보와 아리아 "그만, 당신이 이겼어요...아, 저를 떠나지 마세요" 1778년 2월 27일 만하임 307 284d Arietta in C, "Oiseaux, si tous les ans" 아리에타 C 장조 "새들아, 만약 해마다" 1777년 겨울 ~ 1778년 만하임 308 295b Arietta, "Dans un bois solitaire" 아리에타 "숲 속에서" 1777년 겨울 ~ 1778년 만하임 316 300b Recitative and Aria for Soprano, "Popoli di Tessaglia" 소프라노를 위한 레차타티보와 아리아 "테살리아의 사람들이여! 나는 영원의 신에게 요청하지 않으리" 1778년 7월 파리 317 317 Missa in C, "Coronation" 미사 C 장조 "대관식" 1779년 3월 23일 잘츠부르크 321 321 Vesperae de Dominica in C 주일의 저녁기도 C 장조 1779년 잘츠부르크 337 337 Missa solemnis in C 장엄미사 C 장조 1780년 3월 잘츠부르크 339 339 "Laudate Dominum" from Vesperae solennes de confessore in C "주님을 찬미하라", 구도자를 위한 기도 中 5번 1780년 잘츠부르크 341 368a Kyrie in D minor 기도 음악 d 단조 1780년 11월 이전 ~ 1781년 3월 뮌헨? 349 367a Song, Die Zufriedenheit 노래 만족 1780년 겨울 ~ 1781년 뮌헨 351 367b Song, "Komm, liebe Zither" 노래 "오라, 사랑하는 지터" 1780년 겨울 ~ 1781년 뮌헨 368 368 Recitative and Aria for Soprano, "Ma che vi fece...Sperai vicino il lido" 소프라노를 위한 레차타티보와 아리아 "별들아, 가엾은 데르체아 사람들에게 무엇을 했느냐...근처 바닷가에서 빌었다" 1779년 ~ 1780년 잘츠부르크 374 374 Recitative and Aria for Soprano, "A questo seno deh vieni" 소프라노를 위한 레차타티보와 아리아 "사랑하는 이여, 이 가슴으로 오세요" 1781년 4월 빈 383 383 Aria for Soprano, "Nehmt meinen Dank, ihr holden Gonner!" 소프라노를 위한 아리아 "친절한 은인이여, 나의 감사를 받아주오" 1782년 4월 10일 빈 391 340b Song, An die Einsamkeit (Sei du mein Trost) 노래 고독 (당신은 나의 위로) 1781년 ~ 1782년 빈 416 416 Scena and Rondo for Soprano, "Mia speranza adorata...Ah, non sai qual pena" 소프라노를 위한 독창곡과 론도 "나의 사랑스런 희망..아, 당신은 그 고통을 몰라요" 1783년 1월 8일 빈 418 418 Aria for Soprano, "Vorrei spiegarvi, oh Dio" 소프라노를 위한 아리아 "오 신이여, 제 얘기를 들어 보소서" 1783년 6월 20일 빈 419 419 Aria for Soprano, "No, no, che non sei capace" 소프라노를 위한 아리아 "아니오, 당신은 아무것도 몰라요" 1783년 6월 빈 420 420 Aria for Tenor, "Per pieta, non ricercate" 테너를 위한 아리아 "자비의 이름으로 나를 찾지마오" 1783년 6월 21일 빈 427 417a Missa in C minor "Great Missa" 미사 C 단조 "대미사" 1782년 6월 ~ 1783년 10월 빈 431 425b Recitative and Aria for Tenor, "Misero! O Sogno...aura Che Intorni Spiri" 테너를 위한 레차타티보와 아리아 "불행한 나! 꿈인가, 생시 이런가" 1783년 12월 빈? 433 416c Aria for bass & orchestra "Warnung Männer suchen stets zu naschen" 베이스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아리아 "경고 남자들은 한눈팔기를 좋아해" 1783 빈? 436 436 Notturno for Two Sopranos and Bass, "Ecco quel fiero" 두 명의 소프라노와 베이스를 위한 노투르노 "작별" 1783년 이전 ~ 1786년 빈? 469 469 Oratorio Davidde penitente 오라토리오 다윗의 회개 1785년 3월 빈 472 472 Song, Der Zauberer 노래 마법사 1785년 5월 7일 빈 473 473 Song, Die Zufriedenheit 노래 만족 1785년 5월 7일 빈 476 476 Song, Das Veilchen 노래 제비꽃 1785년 6월 8일 빈 505 505 Scena and Rondo for Soprano, "Ch io mi scordi di te?...Non temer, amato bene," 소프라노를 위한 독창곡과 론도 "어찌 그대를 잊으리... 두려워 말아요, 사랑하는 이여" 1786년 12월 26일 빈 517 517 Song, Die Alte 노래 노파 1787년 5월 18일 빈 519 519 Song, Das Lied der Trennung 노래 이별의 노래 1787년 5월 23일 빈 520 520 Song, Als Luise die Briefe 노래 루이제가 불성실한 애인의 편지를 태웠을 때 1787년 5월 25일 빈 523 523 Song, Abendempfindung an Laura 노래 라우라에게 부치는 저녁의 추억 1787년 6월 24일 빈 528 528 Scena for Soprano, "Bella mia fiamma" 소프라노를 위한 독창곡 "내 사랑이여, 안녕!" 1787년 11월 3일 프라하 530 530 Song, Das Traumbild 노래 꿈 1787년 11월 6일 프라하 539 539 Song, Ein deutsches Kriegslied 노래 나도 황제가 되면 좋겠네 1788년 3월 5일 빈 549 549 Canzonetta for two Sopranos and Bass, "Piu non si trovano" 두 명의 소프라노와 베이스를 위한 칸초네타 "누구 한 사람 찾아 볼 수 없다네" 1788년 7월 16일 빈? 577 577 Rondo for Soprano, "Al desio di chi ch adora" 소프라노를 위한 론도 "Al desio di chi ch adora" 1789년 7월 빈 578 578 Aria for Soprano, "Alma grande e nobil core" 소프라노를 위한 아리아 "위대한 혼과 고상한 마음은" 1789년 8월 빈 579 579 Aria for Soprano, "Un moto di gioia mi sento" 소프라노를 위한 아리아 "내 마음에 춤출듯한 환희감이" 1789년 8월 빈 582 582 Aria for Soprano, "Chi sa, chi sa, qual sia" 소프라노를 위한 아리아 "누가 내 연인의 괴로움을 아는가?" 1789년 10월 빈 583 583 Aria for Soprano, "Vado, ma dove? -- oh Dei!" 소프라노를 위한 아리아 "신이여, 저는 갑니다. 하지만 어디로?" 1789년 10월 빈 596 596 Song, Sehnsucht nach dem Fruhling 노래 봄을 기다리며 1791년 1월 14일 빈 597 597 Song, Im Frulingsanfang 노래 봄 1791년 1월 14일 빈 598 598 Song, Das Kinderspiel 노래 어린이 놀이 1791년 1월 14일 빈 618 618 Motet in D, "Ave verum Corpus" 모테트 D 장조 "오, 거룩한 성체여" 1791년 6월 17일 바덴 Anh. 245 621a Aria for Bass, "Io ti lascio, o cara, addio" 베이스를 위한 아리아 "당신, 혹은 내 사랑을 떠나며, 안녕" 1791년 9월 이전 프라하? 626 626 Requiem in D minor 레퀴엠 d 단조 1791년 말 빈 《 제 1 계율의 책무 》( Die Schuldigkeit des ersten Gebotes ), K. 35 (1767년) :모차르트가 처음 작곡한 오페라, 또는 종교 악극이다. 《아폴로와 히야킨투스》( Apollo et Hyacinthus ), K. 38 (1767년) 《바스티앙과 바스티엔느》( Bastien et Bastienne ), K. 50 (1768년) 《보아라 바보 아가씨》( La finta semplice ), K. 51 (1768년) :비록 완전하지는 않지만 모차르트가 오페라 부파 요소를 처음으로 도입한 작품이다. 《폰토 왕 미트리다테》( Mitridate re del Ponto ), K. 87 (1770년) :최초의 이탈리아어 오페라 네 작품 《폰토의 왕 미트리다테》, 《알바의 아스카니오》, 《시피오네의 꿈》, 《루치오 실라》 가운데 하나이다. 이 작품들에서 기본적으로 기존의 오페라 세리아의 틀 속에서 작곡되었다. 《루지에로》( Ruggiero ), (1771년) 《알바의 아스카니오》( Ascanio in Alba ), K. 111 (1771년) 《베툴리아 리베라타》( Betulia Liberata ), 오라토리오, K. 118 (1771년)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의 주제로 작곡되었다. 《시피오네의 꿈》( Il sogno di Scipione ), K. 126 (1772년) 《루치오 실라》( Lucio Silla ), K. 135 (1772년) 《 이집트 왕 타모스 》( Thamos, König in Ägypten ), (1773년, 1775년) 《가짜 여자 정원사》( La finta giardiniera ), K. 196 (1774년 - 1775년) :이 작품으로 모차르트는 다시 오페라 부파 장르로 돌아온다. 대본에는 조악함이 남아 있지만, 등장 인물들은 더 이상 도식적이지 않고, 더욱 현실적인 인물로 나오며, 음악은 그들의 성격을 명확하게 해 준다. 《양치기 왕》( Il rè pastore ), K. 208 (1775년) 《차이데》( Zaide ), K. 344 (1779년) 《이도메네오》( Idomeneo ), K. 366 (1780년) 《후궁으로부터의 유괴》( Die Entführung aus dem Serail ), K.384 (1782년) :징슈필 장르의 작품을 처음 쓴 지 몇 년 만에 이 작품을 통해 다시 징슈필 장르로 돌아왔으며 , 나중에는 마술피리도 작곡한다. 《카이로의 거위》( L oca del Cairo ), K. 422 (1783년) 《속은 신랑》( Lo spose deluso ), K. 430 《극장 지배인》( Der Schauspieldirektor ), K. 486 (1786년) 《피가로의 결혼》( Le Nozze di Figaro ), K. 492 (1786년) :모차르트의 유명 3대 오페라 (돈 죠반니의 경우 비극적인 요소도 존재하지만, 기본적으로 모두 오페라 부파임) 중의 첫 작품이다. 피에르 보마르셰의 희극인 《피가로의 결혼》에 기초한 로렌초 다 폰테의 대본을 기반으로 작곡되었다. 《돈 죠반니》( Don Giovanni ), K. 527 (1787년) 피가로의 결혼, 코지 판 투테와 함께 다 폰테의 대본을 기반으로 한 세 작품에 속한다. 《코지 판 투테》( Così fan tutte ), K.588 (1789년) 《마술피리》(또는 마적(魔笛), Die Zauberflöte ), K. 620 (1791년) :엠마뉴엘 슈카데너의 대본을 기본으로 해 작곡된 이 작품은 처음의 공연에서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징슈필 장르를 확고히 하는 등 큰 역할을 했다. 이 작품은 프리메이슨의 영향을 받았다. 《티토 황제의 자비》( La Clemenza di Tito ), K. 621 (1791년) 모차르트의 유년기는 궁정 바이올리니스트인 아버지 레오폴트의 교육으로 클라비어에 숙달하여 유럽 각지를 일찍부터 순회연주하였다. 당시 유럽의 각지에서는 여러 가지 새로운 양식적 시도가 있었으므로 모차르트의 여행은 그러한 새로운 예술적 동향에 직접 접할 기회를 부여받고 그의 창작능력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이처럼 그가 일찍부터 부친의 천재교육과 유럽의 연주여행에서 직접 체험하고 또한 받은 중요한 영향을 살펴보면 대강 아래와 같다. 잘츠부르크 음악 - 어린 모차르트가 출생지에서 받은 영향은 그의 예술적 소질을 형성하였다. 잘츠부르크의 음악은 결코 깊이가 있다고는 할 수 없으나 우아함이 감도는 경쾌감이 특징으로서, 이 지방의 작곡가 에이베를린이나 요제프 하이든의 동생 미하엘 하이든의 음악에 기조를 이룩하기도 했다. 파리의 음악 - 1763년에서 1764년, 파리에서 알게 된 요제프 슈베르트, 에카르트(Eccard), 르그랑(Legrand)의 영향을 받아 당시 파리를 휩쓸던 우아하고 경쾌한 클라브생 음악에서 감명을 받았다.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 - 1764-5년의 영국 체재 중, 대 바흐의 막내아들 크리스티안의 교향곡에서 배운 바가 많았다. 이시기 쳄발로 소나타로 곡을 편곡한 쳄발로 협주곡 3곡을 작곡하였다. 이탈리아 음악 - 1770년의 이탈리아 여행 중, 마르티니 신부로부터 직접 지도를 받아 엄격한 대위법 음악에 대한 흥미를 더하였다. 전(前)고전파의 작곡가들 - 1773년 여름의 빈 여행에서 하이든, 바겐자일, 몬 등의 견고한 구성미의 음악에 결정적인 자극을 받아 독일 음악을 재인식하였다. 갤런트 양식 - 미하엘 하이든의 우아한 작풍에 감명을 받고 모차르트의 선천적인 음악적 기질과도 어울려 우아한 표현이 개화하였다. 미하엘곡의 작품 중에는 쾨헬목록에 잘못 포함되어있는 곡도 있다. 요제프 하이든 - 모차르트가 1781년 빈에 정착한 뒤부터 직접적인 교류에 의하여 한층 그 유대가 강해졌으며 그는 1782-1785년에 걸쳐 작곡한 6곡의 현악 4중주곡 을 하이든에게 바쳐 감사를 표하였다. 그는 감정과 감각이 극도로 예민하여 당시의 각종 음악 양식을 부드러운 태도로 흡수, 여기에 개성의 심오한 특성을 반영하여 독일 고전주의 음악의 정수를 표현함으로써 후세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의 교향곡은 그 개성적인 창작이 베토벤에게 이어졌고, 가극은 베버에 의하여 계승되었다. 조아키노 로시니는 모차르트가 "천재성만큼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지식만큼 천재성을 가지고 있는 유일한 음악가"라고 말했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은 그의 제자 페르디난드 리스에게 자신이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4번 의 1악장의 주제만큼 대단한 선율을 생각해낼 수 없다고 말했다. 베토벤이 모차르트에게 보내는 경의로 쓴 작품이 있는데, 마술 피리의 주제에 의한,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두 개의 곡과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을 위해 쓴 카덴자 등이 그것이다. 모차르트는 베토벤을 만나고 나서 그를 칭찬한 적이 있었다.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는 모차르트를 위해 《모차르티아나》를 썼으며, 구스타프 말러는 모차르트의 이름을 부르다 죽었다. 막스 레거의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인 《모차르트의 주제에 의한 변주곡과 푸가》는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11번 에 의한 것이다. 모차르트의 작품을 정리하려는 시도는 있었지만, 처음으로 성공한 것은 1862년 루트비히 폰 쾨헬에 의해서였다. 쾨헬은 쾨헬 번호에 따라 모차르트의 작품들을 정리했다. 모차르트는 전설을 많이 가지고 있는 작곡가이다. 예를 들어 모차르트가 남긴 레퀴엠이 스스로를 위한 것이라는 것인데, 많은 작가들이 이 이야기에 영감을 받아 글을 썼지만, 진실을 밝히기 위한 학자들의 연구에는 방해가 되는 것이다. 유명한 것은 모차르트가 안토니오 살리에리와 경쟁 관계에 있었으며 살리에리가 모차르트에게 독을 먹여 죽였다는 이야기인데, 이것은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연극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오페라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피터 섀퍼의 연극 《아마데우스》의 주제로 다뤄졌다. 《아마데우스》는 영화로 만들어져 여덟 개의 아카데미상을 받았다. 많은 사람들이 섀퍼의 연극에서 모차르트가 천박하고 촌스럽게 그려졌다 하여 이를 거짓 과장이라 비난하였다. 다른 전설은 모차르트의 음악적 천재성에 대한 것이다. 또한 영화《아마데우스》에서 그려진 것처럼 모차르트가 영감을 받아 머릿속에서 음악을 완성한 다음 한 번도 고치지 않고 써내려갔다는 것인데, 실제로는 한번에 거침없이 작곡하는 것이 아닌 신중하고 노력하는 작곡가였으며, 그의 음악적 지식과 기법은 오랜 시간 동안 이전 시대의 음악을 연구함으로써 나온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실제 그는 젊은 시절에 당대 내려오던 작품들을 분석하지 않은 게 거의 없었다 할 정도로 엄청난 노력을 했으며, 한 편에서는 표절의 천재 라는 비아냥과 오명에 대해 평생을 싸워야 했다고 한다. 모차르트는 프리메이슨의 회원으로 가입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1784년에 12월 14일에 프리메이슨 자선 지회에 가입하였고, 후에는 장인, 마스터 메이슨까지 되었다. 다만, 당시에는 프리메이슨에 가입한다는 것이 가입자 자신의 사회적 영향력에 대한 과시의 의미가 컸으므로, 친목 단체인 프리메이슨의 특성상 그리 문제될 일은 아니었다. 뮤지컬 모차르트 영화 아마데우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작품 목록 Classical Music DB Mozart Scores + audio & MIDI Mozarteum Classic Cat - Mozart mp3 진혼곡(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스페인어 TV 심포니 오케스트라. 분류: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분류:1756년 태어남 분류:1791년 죽음 분류:오스트리아의 작곡가 분류:오스트리아의 서양 고전 작곡가 분류:오스트리아의 고전 피아노 연주자 분류:오스트리아의 고전 바이올린 연주자 분류:오스트리아의 오르간 연주자 분류:오스트리아의 오페라 작곡가 분류:오스트리아의 어린이 음악가 분류:국가 작곡가 분류:고전주의 작곡가 분류:1761년 데뷔 분류:지폐의 인물 분류:잘츠부르크 출신 분류:오스트리아의 로마 가톨릭교도 분류:18세기 서양고전음악 작곡가 분류:18세기 오스트리아 사람
exoplanet20100414-a-full.jpg|250px|섬네일|HR 8799을 도는 행성 셋을 헤일 망원경이 찍은 사진. 별에서 나오는 빛은 벡터 소용돌이 코로나그래프를 사용해서 가렸다. dwarf 2M J044144 and planet.jpg|섬네일|250px|right|2MASS J044144은 갈색 왜성으로 목성 질량 5~10배의 동반 천체를 거느리고 있다. 동반 천체가 준갈색왜성인지 행성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Star AB Pictoris and its Companion - Phot-14d-05-normal.jpg|섬네일|250px|right|화가자리 AB와 동반천체(좌하단). 동반천체는 갈색 왜성이거나 무거운 행성일 것이다. 2003년 3월 16일 VLT로 촬영. 항성 위에 1.4초각 크기의 오컬팅 마스크를 위치시켰다. 외계 행성 (外界行星) 또는 계외 행성 (系外行星)은 태양계 밖의 행성으로, 태양이 아닌 다른 항성 주위를 공전하고 있는 행성이다. 지금까지 3800여 개의 외계 행성이 발견되었으며(2018년 6월 23일 기준 행성계 2840개에서 행성 3796개. 이 중 다중행성계는 632개) 모두 우리 은하 내에 있다. 우리 은하에만 수십억 개의 행성이 존재하는 것으로 추측되며 대부분 항성을 돌고 있으나 일부는 홀로 우주 공간을 움직이는 떠돌이 행성이기도 하다. 발견된 외계 행성들 중 지구와 가장 비슷한 것은 프록시마 b이다. 수 세기에 걸쳐 많은 철학자와 과학자들은 외계 행성이 있으리라고 추측해 왔으나 이들이 얼마나 흔하게 있는지 또는 우리 태양계와 외계 행성계가 얼마나 비슷한지 알 방법이 없었다. 19세기부터 외계 행성을 찾았다는 발표가 여러 번 있었으나 천문학자들의 검증 결과 이 모든 주장들은 기각되었다. 1992년 펄서 PSR B1257+12 주위를 도는 암석 행성들의 존재가 최초로 검증, 발표되었다. 주계열성을 도는 행성 중 최초로 확인된 행성은 페가수스자리 51을 4일에 한 바퀴 도는 가스 행성 페가수스자리 51 b이다. 관측 기술의 향상 덕분에 이후 외계 행성의 발견 속도는 상승했다. 몇몇 외계 행성은 망원경으로 직접 사진을 찍었으나 대다수는 시선 속도와 같은 간접적인 방법으로 발견되었다. 확인된 외계 행성 대부분은 목성 또는 해왕성 정도 덩치의 가스 행성으로 추측되나 가스 행성이 외계 행성들 중 대부분을 차지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단지 무거운 행성들은 쉽게 눈에 띄기 때문이며 선택 편향의 결과이다. 상대적으로 가벼운 지구질량 수 배 정도의 외계 행성들도 많이 발견되었으며 통계적 연구결과 이들 암석형 외계 행성의 수는 가스 행성보다 많은 것으로 보인다. 최근 지구와 비슷하거나 작은 질량의 행성들도 발견되고 있으며 이들 중 일부는 질량 외의 여러 속성이 지구와 비슷한 것도 있다. 갈색 왜성을 도는 외계 행성들도 있으며 어떤 항성에도 속박되지 않고 우주를 떠도는 행성도 있다. 그러나 이런 특수한 상황에서 천체들에 행성 명칭이 항상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일부 행성은 생명체 거주가능 영역 내를 돌고 있어 표면에 액체 물(또는 생명체)이 존재 가능할 것으로 보이며, 이런 행성들의 발견으로 외계 생명체의 존재 여부에 대한 관심은 증폭되고 있다. 외계 행성이 생명체를 품기에 적합한지의 폭넓은 요소들을 고려하는 것을 행성 거주 가능성 연구라고 하며 이는 외계 행성 탐사에 포함된다. 16세기 이탈리아의 신학자인 조르다노 부르노(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을 옹호했음)는 붙박이별들은 태양과 비슷하며 그 주위는 우리 태양계처럼 행성들이 돌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1600년 종교 재판소의 결정에 따라 말뚝에 묶여 화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그의 천문학적 관점이 유죄판결의 주된 이유는 아니었다. 18세기에 영국의 물리학자인 아이작 뉴턴은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에 부르노와 비슷한 주장을 적어 놓았다. 태양계 행성들과의 비교를 통해 뉴턴은 이렇게 기록했다. “...그리고 만약 붙박이별들이 각각 태양처럼 계(系)의 중심이라면 이들은 모두 비슷한 형태로 구성되어 있을 것이며 ‘절대자’의 다스림 아래 있을 것이다.” planet NASA2.jpg|섬네일|300px|우리 태양계를 게자리 55 계와 비교한 그림. 외계 행성을 발견했다는 주장은 19세기부터 있었다. 대표적으로 쌍성 뱀주인자리 70에 행성이 있다는 주장을 꼽을 수 있다. 1855년에 영국 동인도 회사의 마드라스 천문대에 근무하던 제이콥은 쌍성 궤도의 불규칙함이 행성 존재로부터 나오는 결과라고 주장했다. 1890년대에는 시카고 대학교 및 미국 해군 천문대 소속인 토머스 시는 뱀주인자리 70의 공전궤도의 변칙성은 항성을 36년 주기로 도는, 눈에 보이지 않는 천체가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포레스트 레이 몰턴은 세 개 천체로 이루어진 계는 매우 불안정하다는, 토머스 시의 주장을 공격하는 논문을 발표했다. 1950년대에서 1960년대에 걸쳐 스와스모어 대학교의 페터 반 데 캄프는 바너드 별 주위에 행성이 존재한다는 주장을 여러 차례에 걸쳐 내놓았다. 현재 천문학자들은 초기 외계 행성을 발견했다는 주장 모두를 관측자들의 착오로 간주하고 있다. 1991년에 앤드루 린, 베일스, 셰머는 펄서 타이밍 기법을 사용하여 PSR 1829-10 주위를 도는 펄서 행성을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학계의 지대한 관심을 받았는데, 펄서의 주기를 계산하는 프로그램이 지구 공전궤도의 이심률을 반영하지 않아 생긴 착오로 판명되었으며 린 및 동료들은 곧장 자신들의 주장을 철회했다. 우리 은하 내 별들 주위에 얼마나 행성들이 흔하게 있는지를 보여주는 상상화. 1988년에 캐나다의 천문학자인 브루스 캠벨과 G. A. H. 워커, 스티븐슨 양은 항성 세페우스자리 감마 주위를 도는 행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들의 발견은 추가 검증을 통해 그 존재가 논문으로 출판된 최초 사례였다. 캠벨 일행은 행성을 발견했다는 사실을 조심스럽게 발표했으나 이들의 시선속도 관측자료는 감마별을 행성 한 개가 돌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다만 캠벨의 관측 자료 일부는 당시 관측장비 성능의 한계점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천문학자들은 이후 수 년 동안 이 발견 및 다른 비슷한 관측들에 대하여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행성이 분명한 천체 몇몇도 갈색 왜성(항성과 행성 중간 정도 질량을 지닌 천체)으로 여겨졌다. 1990년 세페우스자리 감마를 도는 행성이 존재함을 입증하는 추가 논문들이 발표되었으나 1992년 추가로 발표된 논문은 다시금 심각한 논란을 불러왔다. 결국 2003년 개선된 관측 장비의 성능 및 기술에 힘입어 세페우스자리 감마를 도는 행성의 존재는 검증되었다. 1992년 4월 21일에 전파천문학자인 알렉산데르 볼시찬과 데일 프레일은 펄서 PSR 1257+12을 도는 행성 두 개를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이 발견은 추가연구를 통해 검증되었고, 외계 행성의 존재가 입증된 최초의 발견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들의 탄생 과정에 대해 두 가지 학설이 있다. 첫째, 초신성 폭발로 펄서가 태어났으며 폭발 잔해로부터 제2의 행성 생성 과정이 진행되었다는 학설과 둘째, 폭발로 가스 행성의 가스층이 쓸려나간 뒤 남은 암석핵이 어찌하여 살아남아 지금의 궤도를 돌고 있다는 학설이다. 1995년 10월 6일에 제네바 대학교의 미헬 마이어, 디디에 클로는 태양과 비슷한 G형 주계열성 페가수스자리 51을 도는 외계 행성 하나를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프랑스 프로방스 주 천문대에서 관측된 이 발견은 행성 탐사 역사에 새로운 전환기를 마련했다. 기술적 진보(고해상도 분광기의 기여가 대부분임)로 이후 외계 행성들의 발견 속도는 크게 빨라졌다. 천문학자들은 외계 행성이 어머니 별을 중력적으로 흔드는 효과를 관찰하여 간접적으로 행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일부 항성들이 거느린 행성들은 우리 시선과 항성 사이를 지나가면서 별의 밝기를 감소시키며, 이러한 방법으로 발견된 행성도 많다. 초창기 발견된 외계 행성들은 어머니 별 바로 옆을 도는 매우 무거운 행성들이 대부분이었다. 천문학자들은 이러한 뜨거운 목성의 존재에 놀랐는데 그 이유는 기존의 행성 탄생 이론은 우리 태양계의 목성, 토성처럼 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무거운 천체가 태어난다고 설명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비슷한 뜨거운 목성들이 계속 발견되었으며 지금 이런 뜨거운 목성들은 외계 행성 중 적은 수가 아님이 확실해졌다. 1999년에 안드로메다자리 웁실론은 두 개 이상의 행성을 거느린 항성에 그 이름을 최초로 올렸다. 다른 다행성계가 이후 계속 발견되었다. 2012년 12월 1일 기준으로 외계행성 백과사전에 등재된 태양계 이외 행성의 수는 853개이다. 이 중 일부는 1980년대 후반 그 존재에 대한 논란이 일었던 행성들도 있다. 이들 외계 행성은 672개의 항성계 구성원이며 항성계 중 126개는 다중행성계이다. 케플러-16은 쌍성계를 도는 행성을 거느리고 있다. 2012년 2월에 실시된 NASA의 케플러 계획(현재 작동 중지)에서는 우주선에 부착된 망원경으로부터 발사 후 16주간 우주를 관측하여 2,321개의 외계행성 후보를 발견했다(이들은 아직 검증되지 않았다). 이들은 1,790개 항성계의 구성원이다. 2012년 10월 17일에 지구에서 가장 가까운 항성계인 센타우루스자리 알파를 도는 센타우루스자리 알파 Bb의 발견이 공표되었다. 이 행성의 질량은 지구와 비슷하나 생물권 내에 있지 않아 액체 물이 표면에 존재할 수 없다. 어머니 항성에 비하면 행성들은 너무 어둡다. 가시광선 파장에서 이들이 내는 빛은 항성의 백만 분의 일 이하이다. 이렇게 흐릿한 빛을 잡아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며 어머니 별에서 나오는 빛이 이를 가려버린다. 따라서 어머니 별의 강한 빛을 가리지만 행성에서 나오는 빛은 남겨놓아야 하는데, 이는 현재 기술적으로 큰 도전거리이다. 앞에서 설명한 이유 때문에, 현재 기술 수준에서 망원경을 이용하여 외계 행성의 상을 찍는 것은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상을 찍을 수 있는 경우라도, 행성의 질량이 크고(목성보다 훨씬 더 커야 함), 어머니 항성에서 제법 떨어져 있으며, 적외선 영역에서 많은 빛을 낼 정도로 내부열을 갖고 있어야 한다. 지금까지 발견된 외계 행성들 중 대부분은 간접적인 방법을 통해 발견했다. reflex 200.gif|섬네일|right|200px|도플러 효과의 원리. 외계 행성과 어머니 항성이 질량 중심을 돌고 있다. 외계 행성은 항성을 돌면서 항성을 좌우로 흔든다. 통과법의 원리. 행성은 어머니 항성을 가리면서 일정량 빛을 차단한다. 위치천문학 위치천문학은 하늘에서 항성의 위치를 정확하게 측정하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항성이 원래 있던 위치에서 어떻게 이동하는지를 다룬다. 만약 항성이 행성을 거느리고 있다면 행성이 항성에 미치는 중력으로 인해 항성의 위치는 변하게 되며, 이 변하는 위치는 행성과의 질량 중심을 기준으로 작은 원 또는 타원 궤도를 그리게 된다.(우측 그림) 도플러 효과 시선속도법 이라고도 부른다. 시선 속도를 통해 항성이 지구에서 가까워지거나 멀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시선 속도는 분광선을 통해 알아낸 것이며, 분광선은 도플러 효과를 통해 알아낸 것이다. 지금까지 외계 행성을 발견하는 데 가장 많이 이용된 방법이다. 펄서 타이밍 펄서(초신성이 폭발하고 남은, 막대한 밀도를 지닌 작은 천체)는 자전하면서 극도로 규칙적인 전파를 뿜는다. 이 전파의 발산 주기에 약간의 변화가 있을 경우 이는 펄서가 흔들리고 있다는 뜻이 되며 주위에 행성을 거느리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횡단법 통과법 , 트랜싯법 이라고도 한다. 만약 어떤 행성이 우리 지구 관측자의 눈과 항성 사이를 지나갈 경우 항성 표면에 검은 원반이 지나가는 것처럼 보일 것이며, 항성의 밝기는 원반이 항성을 가리는만큼 어두워질 것이다. 여기서 감소된 밝기를 통해 행성의 크기를 알 수 있게 된다. 미세중력렌즈 효과 중력 렌즈법에 의하면 어떤 별의 중력장을 렌즈처럼 이용할 경우 배경별의 빛을 증폭시킬 수 있다. 여기서, 앞쪽에 있는 항성에 행성이 있을 경우 뒷쪽 별에서 오는 빛의 광도곡선에 불규칙성이 발생하게 된다. 별주위 원반 많은 별 주위에 우주 먼지가 둘려 있으며 이들은 항성의 빛을 흡수하여 적외선 형태로 재발산한다. 적외선 발산이 관측된 항성 주위에는 별주위 원반이 있으며, 별주위 원반이 있는 항성계에는 행성이 존재할 가능성도 크다. 식쌍성법 한 쪽 별이 다른 별을 가리는 쌍성계에서 밝기의 미묘한 변화를 통해 행성이 항성의 앞으로 왔다가 뒤로 사라진다는 증거를 얻을 수 있다. 이 방법은 쌍성계에 존재하는 행성을 찾는 데 있어 가장 믿을 만한 수단이다. 공전 위상법 달이나 금성은 태양을 돌면서 원반 모양이 차거나 이지러지는 등 상에 변화가 생긴다. 외계 행성 역시 항성을 공전하면서 차거나 이지러진다. 궤도경사각에 따라 위상에 차이가 생긴다. 위상을 연구함으로써 과학자들은 행성 대기 내 입자 크기를 계산할 수 있다. 편광계류법 별빛은 대기 분자와 상호 작용하여 편광 현상을 일으키며 이는 편광계를 이용하여 감지할 수 있다. 이 방법을 사용하여 행성을 발견할 수 있다. 몇몇을 빼고 거의 대부분의 외계 행성은 지상에서 관측하여 찾아낸 것이다. 그러나 지구 대기의 떨림에 영향받지 않는 관측 기구를 우주로 쏘아 보내는 계획들이 진행되고 있다. COROT은 2006년 12월 발사되었으며 현재 우주 공간에서 외계 행성 탐사 임무를 맡고 있는 유일한 우주 탐사 계획이다. 허블 우주 망원경도 여러 개의 행성을 찾아냈다. 앞으로 실행 예정에 있는 외계 행성 탐사 계획으로 케플러 계획, 뉴 월드 계획, 다윈, 우주 간섭계 계획, PEGASE 등이 있다. 알려진 대부분의 외계 행성들은 우리 태양과 비슷한 별(분광형으로는 F, G, K형 주계열성)을 돌고 있다. 이처럼 태양과 비슷한 별들 주위에서 행성들이 많이 발견된 이유는, 행성 탐사 계획들이 이런 별들을 집중적으로 관측하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점을 고려하더라도, 통계적 분석에 따르면 질량이 작은 별들(적색 왜성이 대표적이다)은 행성을 가질 확률이 작거나, 거느리고 있더라도 질량이 작기 때문에 발견하기 힘든 것으로 밝혀졌다. 최근 스피처 우주 망원경의 관측 결과에 따르면 태양보다 훨씬 더 뜨거운 분광형 O 항성은 광증발효과를 발생시켜 행성이 생겨나는 것을 막는다고 한다. 항성들은 대부분 수소나 헬륨 같은 가벼운 원소들로 이루어져 있으나, 적은 양이기는 하나 철과 같이 무거운 물질도 갖고 있다. 이처럼 무거운 물질이 얼만큼 있느냐를 중원소 함량으로 표시한다. 중원소 함량이 큰 별들은 행성을 거느릴 확률이 높으며, 중원소 함량이 작은 별들보다 행성들의 질량이 보다 커지는 경향을 보인다. 발견된 외계 행성 후보 대부분은 간접적 방법을 이용하여 발견되었기 때문에 특정한 물리적 수치 및 궤도요소만을 알 수 있다. 발견 방법 중 가장 많이 쓰인 것은 도플러 분광법인데, 이 방법을 쓸 경우 공전 주기, 궤도 평균 거리, 궤도 이심률, 각거리, 근일점, 반진폭 등을 알 수 있다. 다만 궤도경사각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없기 때문에 해당 천체의 최소 질량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경사각이 실제 어느 정도이냐에 따라 행성으로 알고 있었던 천체가 실제는 갈색 왜성이나 적색 왜성 등 훨씬 더 무거운 천체로 밝혀진 경우도 있다. 다만 흔치 않게 행성의 궤도경사각이 밤하늘에 대해 거의 수직(90도에 가까움)일 경우 행성은 별 앞을 지나가며 이 경우 행성의 실제 질량과 반지름을 알 수 있다. 여기에, 행성 여러 개가 있는 계(系)의 경우 위치천문학적 관측과 동역학적 연구를 통해 한 행성의 질량 오차값을 줄여나갈 수 있다. 항성 앞을 행성이 지나갈 때 분광기를 이용하여 관측, 행성 대기의 조성물을 분석할 수 있다. 2차 통과(행성이 항성 뒤로 돌아갈 때 일어남)를 통해 행성에서 방출되는 적외선 복사를 감지할 수 있다. 적외선 관측으로 항성에 매우 가깝게 붙어 있는 행성의 표면 온도가 어떻게 형성되어 있는지를 연구할 수 있다. 이 그림은 2004년 8월 31일까지 발견된 모든 외계 행성들을 표시하고 있다. 발견 방법에 따라 시선 속도법(파랑), 트랜싯법(빨강), 미시중력렌즈법(노랑)으로 다르게 표시했다. 이 그림에는 지상 관측 및 우주 관측시 민감도(발견 가능한 천체 질량 하한선)도 함께 표시되어 있다. 지금까지 발견된 외계 행성 대부분은 목성 또는 그 이상으로 매우 무거운 질량을 지녔다. 2008년 8월 기준으로 지구 질량 10배 미만 행성의 숫자는 12개에 불과하다. 적지 않은 행성들은 목성보다도 훨씬 무겁다. 그러나 이는 선택 편향적인 결과에 불과하다. 지금까지 개발된 발견 방법으로는 작고 가벼운 행성보다는 무겁고 덩치 큰 행성들을 발견하기가 훨씬 쉽다. 이처럼 쏠린 결과는 통계적 분석을 어렵게 만드나 실제 지구처럼 가벼운 행성들은 무거운 가스 행성들보다 흔하게 존재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관측 기술이 아직 정교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지구질량 수 배 수준 행성들이 여럿 발견되었음을 고려하면, 작은 행성들은 매우 흔하게 우주에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칠레 소재 라 실라 천문대 HARPS 스펙트럼 사진기 2008년 자료에 따르면 항성 14개 중 하나 꼴로 가스 행성이 있으며, 다시 가스 행성이 있는 별 셋 중 하나 꼴로 지구질량 30배 이하의 암석 행성을 거느리고 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밝혀졌다. 많은 외계 행성들은 어머니 항성을 우리 태양계 수성보다 훨씬 더 가까운 곳에서 돌고 있다. 이 사실은 관측적인 선택편향으로 해석 가능하다. 시선속도법은 작은 궤도를 도는 행성들을 보다 잘 찾아낸다. 천문학자들은 처음에는 이런 “뜨거운 목성”의 존재에 충격을 받았으나 현 시점에서 대부분의 외계 행성들은(혹은 적어도 대부분의 무거운 외계 가스 행성들은) 항성에서 보다 멀리 떨어져 있음이 확실하다. 그 중 일부는 물이 액체 상태로 존재 가능한 생물권 내를 도는 경우도 있다. 대부분의 외계 행성계에는 목성이나 토성과 비슷한 덩치의 가스 행성이 적어도 한 개 또는 두 개씩은 있을 가능성이 높다. 공전 이심률은 행성이 어머니 항성을 얼마나 찌그러진 궤도를 그리면서 도는지를 보여준다. 발견된 행성들 대부분의 궤도는 크게 찌그러져 있다. 이는 관측적 선택편향이 ‘아닌’, 외계 행성들이 보여주는 보편적 모습이다. 그 이유로 궤도 이심률은 행성 발견 감지도에 영향을 끼치는 요소가 아니기 때문이다. 타원 궤도가 흔하다는 사실은 과학자들에게 있어 중대한 수수께끼인데, 현재 행성 탄생 이론에 따르면 행성의 궤도는 원에 가깝게 형성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문을 설명할 수 있는 이론 중 하나로 T 왜성(메탄이 포함된 갈색 왜성)과 같은 작은 동반 천체가 행성계에 숨겨져 있어 행성의 궤도를 뒤틀리게 만든다는 주장이 있다. 이는 우리 태양계가 흔치 않은 사례일 것임을 암시해 주는데, 그 이유는 수성을 뺀 모든 행성들이 원에 가까운 궤도를 돌고 있기 때문이다. 2015년 현재 1800개가 넘는 외계 행성들이 발견되었으며 꾸준히 계속 발견되고 있다. 카네기 과학 재단의 앨런 보스 박사는 우리 은하 안에만 수천억 개의 암석 행성이 있을 것으로 추측했다. 그는 이들 중 많은 곳에 간단한 형태의 생명체가 존재하며 수천 개의 문명이 존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태양과 비슷한 항성 주위에는 평균 지구와 비슷한 행성이 하나씩은 있다고 추측했다. 최근 에든버러 대학교 천문학 연구팀은 외계 지적문명의 수가 최소 361개, 최대 37,964개에 이른다는 연구 발표를 내놓았다. 외계 행성이 한 개만 있는 행성계의 시선 속도 곡선은 대부분 궤도이심률이 0.1 이상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모의 실험 결과 행성이 2개 있을 경우 궤도가 원형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항성 주위 1개만 있다고 보고된, 이심률이 비교적 작은 행성들 중 약 15퍼센트가 숨겨진 형제 행성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 외계 행성의 여러 속성에 대해 밝혀지지 않은 의문점들 - 구체적인 행성 조성물이나 위성이 있는지의 여부 등 - 이 남아 있다. 최근 여러 외계 행성 대기를 조사한 결과 물이 없었다는 점은 우리가 외계 행성들의 속성에 대해 아직 모르는 것이 많음을 시사해 주었다. 또다른 의문점으로 외계 행성에 생명체가 존재할 수 있는가의 여부가 있다. 여러 개의 행성들은 어머니 항성의 생물권 내를 공전하고 있다. 이들 대부분은 지구보다는 목성과 비슷한 가스 덩어리이다. 만약 이들 주위에 거대한 위성들이 있다면 이 위성 표면은 생명체가 살기에 적당한 환경일 것이다. 그러나 별과 별 사이 거리를 뛰어넘어 외계 행성에서 생명체의 존재(혹은 문명의 존재)를 감지하는 것은, 비록 외계 생명이 흔한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기술적으로 매우 힘든 도전 과제가 될 것이다. 국제천문연맹(IAU)이 제정한 행성의 정의에 따르면, 행성은 일단 항성 주위를 돌아야 한다. 그러나 현 IAU의 행성에 대한 정의는 우리 태양계 내에만 적용될 뿐 외계 행성들까지 고려한 것은 아니다. 실효성 있는 외계 행성에 대한 정의는 2001년 제정되었고 2003년 마지막으로 개정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와 같다. 자유롭게 떠돌아다니는 행성급 천체들(별을 돌지 않으며, 떠돌이 행성 또는 성간 행성으로 불릴 때도 있음)의 존재가 보고되어 있다. 이런 천체들은 외계 행성의 범주에 해당되지 않기 때문에 본 문서에서 다루지 않을 것이다. 이들 중 일부는 항성 주위에서 태어났을 것으로 추측되나(즉 외계 행성 으로 부를 수 있었으나), 이후 어떤 이유 때문에 항성의 중력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을 것이다. s concept shows four of the five planets that orbit 55 Cancri, a star much like our own.jpg|left|섬네일|250px|게자리 55 f의 상상화. 2009년 7월 시점에서 게자리 55는 태양 다음으로 많은 자식 행성을 거느린 것으로 확인된 천체이다. 외계 행성의 이름을 짓는 방법은 쌍성계의 항성 구성원들 이름을 붙이는 것과 다르지 않다. 다만 차이점이라면 항성의 경우 대문자를 붙이지만 행성은 소문자를 붙인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보통 처음으로 행성이 발견될 경우 그 행성의 어머니 항성 이름 바로 뒤에 소문자 b 를 붙인다(예 페가수스자리 51 b). 어머니 항성이 A이기 때문에 a 는 쓰지 않는다. 같은 행성계 내에서 첫 번째 행성이 발견된 뒤 추가로 형제 행성들이 발견될 경우, b 다음의 c, d, e... 순서대로 이름을 얻는다. 동시에 두 개의 행성이 함께 발견될 때도 있는데, 이 경우 항성에 가까운 쪽이 빠른 기호를 받는다. 행성들은 반드시 항성으로부터 가까운 순서대로 발견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항성으로부터의 순서대로 늘어놓을 경우 뒤죽박죽처럼 보이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글리제 876 행성계의 경우 글리제 876 d는 이전에 발견되었던 글리제 876 b, c보다 항성에 가깝기 때문에 거리 순서로 정렬하면 d, c, b가 된다. 2009년 6월 기준으로 가장 뒤쪽 기호를 받은 행성은 게자리 55 f로, 게자리 55의 다섯 번째 행성이다. 때로는 쌍성계 구성원들 중 어디에 속해 있는지를 명확히 하기 위해 어머니 항성 기호와 함께 표기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백조자리 16은 A와 B 두 개의 별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중 B 주위에서 첫 번째 행성이 발견되었고, 이 행성은 A가 아닌 B 옆에 있기 때문에 백조자리 Bb 라는 이름을 받았다. 마찬가지로 센타우루스자리 알파 Bb도 같은 방식으로 이름을 받은 것이다. 다만 위 법칙을 따르지 않는 경우도 있다. 1995년 페가수스자리 51 b가 발견되기 전 펄서 타이밍법을 이용 펄서 주위를 도는 행성 두 개(PSR B1257+12 B, PSR B1257+12 C)가 발견되어 있었다. 당시 외계 행성 이름을 붙이는 방법이 정립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두 행성은 "B" 와 "C"로 불렸다(이는 현재 외계 행성들이 알파벳 순서대로 이름을 받는 것과 같다). 그러나 소문자 대신 당시에는 대문자를 사용했는데 이는 항성급 천체들을 부르는 방법이었다. 이후 발견된 세 번째 행성은 PSR B1257+12 A라는 이름을 얻었고, 이는 단순히 셋째 행성이 나머지 둘보다 항성에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과학 소설 등 일부 명명법은 항성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순서에 따라 로마 숫자를 사용하여 표기하기도 한다. 이는 태양계 외행성의 위성들을 표기하는 옛날 방법(예를 들면 칼리스토를 목성 IV 로 쓰는 것)에 따른 것인데, 보편적으로 쓰이는 방법은 아니다. 이를 우리 태양계의 경우에 대입하면, 외계 문명이 우리 태양 주위 행성을 찾으려 할 경우 목성과 토성을 가장 먼저 발견할 것이고 그 이름은 각각 태양 I 과 태양 II 가 될 것이다. 이후 관측 기술이 더욱 발달하여 태양에 가까운 작은 행성 네 개를 다 발견하면 목성과 토성의 이름은 최종적으로 태양 V 와 태양 VI 가 될 것이다. 그러나 현재 외계 행성 명명법에 따르면 목성과 토성은 처음 발견되었을 때 태양 b 와 태양 c 라는 이름을 받을 것이며, 이후 나머지 행성들이 발견된다고 하더라도 이름이 고쳐질 일은 없다. 만약 어떤 행성이 쌍성계 내에 있더라도 어머니 항성 둘이 붙어 있지 않고 멀리 떨어져 있는 경우라면, 어머니 항성 대문자 기호가 행성 소문자 앞에 붙는다. 그 행성이 주성(主星)을 돌고 있으며 짝별은 주성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거나 혹은 행성이 발견된 뒤 짝별의 존재가 확인될 경우, 어머니 항성의 대문자 기호는 생략된다. 예를 들어 목동자리 타우 b는 목동자리 타우 항성계의 주성 A 주위를 돌고 있으며 따라서 정확한 이름은 목동자리 타우 Ab가 되어야 하나, 목동자리 타우의 짝별은 행성 존재가 확인된 뒤 발견되었으며 주성으로부터도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대문자를 생략하여 간단히 표기하는 것이다. 다만 백조자리 16 Bb나 사자자리 83 Bb처럼 행성이 주성이 아닌 짝별 주위를 돌 경우 항상 짝별 대문자를 앞에 붙여줘야 한다. 몇몇 행성들은 태양계 행성들처럼 별도의 애칭을 얻은 경우도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오시리스 로 불리는 HD 209458 b, 벨레로폰 으로 불리는 페가수스자리 51 b, 므두셀라 로 불리는 PSR B1620-26 b이다. 국제천문연맹은 현재 외계 행성 이름을 붙이는 공식적 지침을 마련하지 않은 상태이다. 외계 행성 발견사에 있어 첫 번째 중대한 사건은 1992년에 있었다. 볼시찬과 프레일은 네이처에 기고한 저널에서, PSR B1257+12 주위를 행성이 공전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들 행성은 존재가 최초로 확인된 외계 행성들이었으며, 펄서 주위를 돌고 있다는 점에서 아직까지도 매우 특이한 사례로 꼽히고 있다. 그러나 평범한 항성 주위를 도는 사례 중 최초는 페가수스자리 51 b였다. 이 행성은 메이어와 퀠로즈가 1995년 10월 6일자 네이처 지에 발견 사실을 기고했다. 천문학자들은 당시 이 행성이 뜨거운 목성 이라는 사실에 당혹해 했지만, 이후 비슷한 사례가 추가로 계속 발견되면서, 어머니 항성 바로 옆을 붙어 도는 사례는 흔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1996년 - 큰곰자리 47 b 목성급 질량으로, 긴 공전 주기를 갖는 최초의 발견 사례. 항성에서 2.11 천문단위 떨어져 있으며 이심율은 0.049이다. 동반 행성도 발견되었는데, 3.39 천문단위 거리에 이심율은 0.220 ± 0.028, 공전주기는 2190 ± 460일이다. 1998년 - 글리제 876 b 적색 왜성(글리제 876) 주위에서 최초로 발견된 행성. 항성과의 거리는 태양-수성 간격보다 좁다. 이후 항성에 보다 가까이 붙어 있는 행성들이 추가로 발견된다. 1999년 - 안드로메다자리 웁실론 행성계 한 항성 주위를 도는 행성이 두 개 이상 발견된 최초의 사례. 행성들은 모두 목성급 질량을 갖고 있으며 총 3개가 발견되었다. 이름은 안드로메다자리 웁실론 b, c, d로 각각 1996, 1999, 1999년 발견되었다. 질량은 각각 목성의 0.687, 1.97, 3.93배이며, 항성과 떨어진 거리는 0.0595, 0.830, 2.54 천문단위이다. 1999년 - HD 209458 b 시선속도법을 이용하여 발견되었으며, 이후 항성 앞을 통과하는 최초의 외계 행성이 되었다. 2001년 - HD 209458 b 허블 우주 망원경을 이용, 대기의 존재를 입증했다. 과학자들은 이 행성의 대기에 나트륨이 있음을 알아냈다(그러나 생각보다 그 양은 적었다). 대기 상층부의 구름이 하층 대기를 가리고 있음을 밝혀냈다. 2008년 구름의 반사율를 측정했다. 2001년 - 용자리 요타 b 거성 주위에서 발견된 최초의 사례. 항성 용자리 요타는 오렌지색 거성이다. 요타 b의 발견으로, 거성으로 진화할 때까지 행성이 살아남을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거성들은 활동량의 변화가 크기 때문에 마치 행성이 있는 것처럼 착각을 하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요타 b의 질량이 충분히 컸기 때문에 존재를 알아낼 수 있었다. 궤도는 이심률이 매우 크며, 공전궤도 긴반지름은 1.275 천문단위이다. 2008년 용자리 요타는 황소자리 엡실론과 함께 히아데스 성단에서 태어났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s impression of pulsar planet B1620-26c.jpg|섬네일|right|250px|천체 예술가가 펄서 행성 PSR B1620-26 b을 상상하여 그린 것. 2003년 발견되었고 지구에서 12500 광년 떨어져 있으며, 지금까지 발견된 외계 행성들 중 가장 나이가 많다. 2003년 - PSR B1620-26 b 7월 10일 허블 우주 망원경의 관측 자료를 통해 펄서 주위에 알려진 행성들 중 가장 나이 많은 존재가 공전하고 있음을 알아냈다. 이 행성은 전갈자리 방향으로 지구에서 5,600광년 떨어진 곳에 있는, 구상 성단 메시에 4 내에 자리잡고 있다. 이 행성은 쌍성을 공전하는 유일한 존재로, 가운데 쌍성 중 하나는 백색 왜성, 다른 하나는 펄서이다. 질량은 목성의 두 배 정도이며 나이는 약 130억 살 정도로 추정된다. 2004년 - 제단자리 뮤 c 유럽 남방 천문대에서 HARPS 스펙트럼 사진기를 이용하여 발견했다. 질량은 지구의 14배 정도로 천왕성과 거의 비슷하기 때문에, 뜨거운 해왕성 또는 슈퍼지구 라는 별칭도 붙었다. 2004년 - 2M1207 b 갈색 왜성 주위를 도는 것으로 확인된 최초의 행성. 적외선 영역을 통해 직접 행성의 상을 얻을 수 있었다(이는 행성을 직접 촬영한 최초의 사례이다). 질량 최솟값은 목성의 5배 정도에, 갈색 왜성에서 약 55 천문단위 떨어진 거리를 돌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 행성은 매우 뜨거운데(1250 켈빈), 주로 중력 수축 때문이다. 갈색 왜성의 질량은 목성의 25배 정도에 불과하다. 2005년 후반기 갈색 왜성과 행성 사이 거리는 41 천문단위에 행성질량은 목성의 3.3배로 수정되었는데, 이는 갈색 왜성과 지구 사이 거리가 예상보다 가까웠기 때문이다. 2006년 갈색 왜성 주위에 원시행성계 원반이 있음이 확인되었으며, 갈색 왜성 주변에서도 행성이 생겨날 수 있음이 입증되었다. 2005년 - 글리제 876 d 6월 글리제 876의 세 번째 행성 존재 사실이 공표되었다. 질량은 지구의 7.5배로, 현재 이 행성은 주계열성을 도는 모든 발견된 외계 행성들 중 두 번째로 가볍다. 암석 행성일 가능성이 크다. 어머니 항성으로부터의 거리는 0.021 천문단위, 공전 주기는 1.94일이다. 2005년 - HD 149026 b 7월 어떤 외계 행성보다도 큰 중심핵을 지니고 있는 천체가 발견되었다. 해당 천체 HD 149026 b는 항성 HD 149026을 돌고 있으며 핵의 질량은 지구 질량의 70배 수준(2008년 기준 자료에 의하면 80 ~ 110배이다)으로, 행성 전체 질량의 3분의 2를 차지하고 있다. planet.jpg|섬네일|right|250px|OGLE-2005-BLG-390Lb의 상상도. 표면 온도는 섭씨 영하 220도에 달한다. 지구에서 2만 광년 떨어져 있으며, 중력 렌즈법을 이용하여 발견했다. 2006년 - OGLE-2005-BLG-390Lb 1월 25일 OGLE-2005-BLG-390Lb의 발견 사실이 공표되었다. 이 행성은 직전까지 발견된 행성들 중 지구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동시에 표면 온도가 가장 낮은 천체였다. 지구에서 약 21,500광년 떨어져 있으며 우리 은하 중심 방향에 자리잡고 있다. 중력 렌즈법을 이용하여 발견했으며 질량은 지구의 5.5배 수준으로 지금까지 주계열성 주위를 도는 외계 행성들 중 질량이 가장 작다. 이 행성 이전 발견되었던 질량 작은 행성들은 전부 어머니 항성 바로 옆에 붙어 있었지만, OGLE-2005-BLG-390Lb는 항성에서 2.6 천문단위 떨어진 곳을 돌고 있다. 2006년 - HD 69830 해왕성급 질량 행성 세 개를 거느리고 있는 행성계. 이 행성계는 행성이 3개 있는 것들 중 목성급이 한 개도 없는 유일한 사례이다. 5월 18일 로비스가 발견 사실을 공표했다(3개를 동시에 발견했음). 세 행성 모두 1 천문단위 이내를 공전하고 있다. 구성원 b, c, d의 질량은 각각 지구의 10, 12, 18배이다. 가장 바깥쪽 행성 d는 소행성대를 이끌고 있는 것으로 추측되며, 생물권 내에 자리잡고 있다. 2007년 - HD 209458 b, HD 189733 b 2007년 2월 21일 미국 항공우주국과 네이처지는 HD 209458 b와 HD 189733 b 두 행성을 발견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이들은 스펙트럼 관측을 통해 직접 그 존재를 밝혀낸 최초의 사례이다. 행성 대기 스펙트럼을 통해 과학자들은 지성체의 존재 여부까지는 모르더라도, 해당 천체에 생명체가 있는지 없는지를 간접적으로 추측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어 왔다. 나사 고다드 우주비행센터의 제레미 리차드슨 박사 연구진은 여기에 대한 연구 결과를 2월 22일 네이처지에 기고했다. 이들은 HD 209458 b의 스펙트럼을 7.5 ~ 13.2 마이크로미터 영역에서 측정했다. 그 결과 여러가지로 실망스러운 답이 나왔다. 10마이크로미터 영역에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던 피크(이는 대기에 수증기가 있다는 뜻이다)는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9.65 마이크로미터에 예상치 못했던 피크가 관측되었는데, 과학자들은 이를 대기에 규산염으로 이루어진 구름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고 주장했다. 이들과는 별개로 제트 추진 연구소의 마크 스웨인 연구진은 리차드슨 연구진의 자료를 분석한 뒤, 자신들의 연구 결과도 그리 다르지 않게 나왔다고 발표했다. 스웨인 연구진은 천체물리학 저널에 자신들의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나사 스피처 과학 센터의 칼 그릴마이르 연구진은 HD 189733 b를 연구했으며 연구 결과는 천체물리학 저널에 게재되었다. 7월 11일 이들의 연구 결과는 네이처에도 실렸는데, 주요 내용은 HD 189733 b의 대기 스펙트럼에서 물의 존재가 처음으로 증명되었다는 것이다. 2007년 - 글리제 581 c 2007년 4월 24일 스페이스닷컴에 발표된 바에 따르면, 이 행성은 표면에 액체 형태의 물이 있을 가능성이 있고, 따라서 생명체가 존재할지도 모른다고 했다. 액체 물의 가능성을 언급한 이유는, 특별한 증거가 발견되어서가 아니라 단순히 이 행성의 거리가 항성으로부터 물이 있을만한 위치에 놓여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행성을 계속 연구한 결과 글리제 581 c는 금성과 같은 엄청난 온실 효과 상태에 놓여 있으며 따라서 표면의 물은 열기 때문에 액체 상태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결론을 얻었다. 오히려 c보다 항성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글리제 581 d가 생명체가 살기에 더 좋은 환경으로 밝혀졌다. SETI 연구소의 수석 천문학자 세스 쇼스탁은 "글리제 581이 생명체를 품기에 적합한 후보로 생각되어 왔으나 지금까지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생명이 존재한다는 증거는 확보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글리제 581 c와 d는 시선 속도법을 이용하여 발견되었으며 항성으로부터의 거리는 HARP 관측기구를 통해 계산했다. 2007년 - 글리제 436 b 2004년 8월에 발견되었으며, 질량은 해왕성 수준인데 이는 당시 발견된 외계 행성들은 주로 목성 질량급의 거대한 천체들이 많았음에 비교할 때 특이한 사례였다. 2007년 5월 이 행성이 어머니 항성 앞을 통과하는 것이 발견되었는데, 여기서 밝혀진 행성의 질량은 지구의 22배 수준으로 통과 현상을 보이는 외계 행성들 중 가장 질량이 작은 사례였다. 행성의 밀도를 통해 글리제 436 b의 속은 뜨거운 얼음 의 거대한 핵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예측하게 되었다. 항성에서 가까워서 매우 뜨거운 환경임에도 불구하고 행성의 자체 중력 때문에 물은 증발하지 않고 압축되어 밀도 높은 상태로 존재할 것으로 보인다. 2007년 - XO-3b 어머니 항성 XO-3 앞을 통과하는 것이 관측되었는데, 여기서 나온 XO-3b의 질량은 목성의 13.24배로 갈색 왜성과 행성의 질량 경계선이라고 여겨지는 13배에 걸쳐 있었다. 이는 당시 발견되었던 외계 행성들 중 가장 무거운 값이었고, 통과 현상을 보이는 행성들 중에서도 당연히 가장 큰 값이었다. 행성의 반지름은 목성의 1.92배 정도일 것이며 이는 발견된 외계 행성들 중에서도 가장 큰 값이다. 1 공전주기는 3.19일에 불과하다. 공전궤도 이심률은 이처럼 항성에 가까이 붙어 도는 행성 치고는 비정상적으로 높다(0.22). 2007년 - TrES-4 발견 당시 가장 큰 반지름(목성의 1.7배)과 가장 낮은 밀도(이 행성의 질량은 목성의 0.84배로, 여기서 나온 밀도는 목성 밀도의 7분의 1에 지나지 않는다)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행성이다. 항성에서 매우 가까운 위치에 있으나, 크게 부풀어 오른 이유가 단순히 항성에서 많은 열을 받기 때문만은 아닌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8년 - OGLE-2006-BLG-109Lb, OGLE-2006-BLG-109Lc 2008년 2월 14일 발견되었으며, 현 시점까지 우리 태양계의 목성, 토성과 흡사한 구조를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둘은 우리의 목성, 토성과 흡사한 질량비를 갖고 있으며, 항성으로부터의 거리도 비슷하다. 가스 행성이 이 정도 위치에 있는 것은, 보다 가까운 곳에 있을 법한 지구형 행성에 생명체가 안정적으로 진화할 시간을 마련해 준다는 의미가 있다. 그 이유는 이처럼 질량 큰 가스 행성은 소행성 등을 중력으로 끌어당겨 제거해 주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처럼 적당히 멀리 떨어져 있는 가스 행성을 선량한 목성 으로 부르기도 한다.(반대로 항성에 가까이 붙어 돌고 있는 행성들을 사악한 목성 으로 부른다) HD 189733b.jpg|섬네일|오른쪽|HD 189733 b의 상상화. 2008년 - HD 189733 b 3월 20일 네이처 지에 외계 행성 중 최초로 대기에 유기 분자가 발견되었다는 내용이 실렸다. 이 행성의 대기에서 물이 검출된 적은 있으나, 이 추가적인 발견을 통해 물뿐 아니라 메테인도 가스 행성 대기에 존재함을 입증했다. b의 환경은 생명체가 살기에는 너무 가혹하지만, 위 발견은 외계 행성에도 유기 생명체가 존재할 가능성을 열어주었다는 데 의미가 있다. 2008년 - HD 40307 6월 16일 마이클 메이어는 분광형 K의 오렌지색 주계열성 HD 40307을 도는 슈퍼지구 3개를 한번에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이들의 질량은 지구질량의 4 ~ 9배였으며, 공전 주기는 4 ~ 20일 사이였다. 이 발견은 가스 행성 없이 암석 행성만으로 이루어진 외계 태양계도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칠레 라 실라 천문대에 있는 HARPS 분광사진기를 통해 발견했다. 이 세 행성은 HARPS 분광사진기를 통해 발견한 45개 외계 행성 후보 중 2008년 5월 28일 발견된 7개 내에 포함된 것들이었다. 이 발견으로 외계 슈퍼지구의 숫자는 크게 늘었다. 여기에 터잡아, 천문학자들은 이런 질량 작은 행성들의 수는 목성과 같은 가스 행성의 세 배 규모로 존재할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2008년 - 포말하우트 b 11월 13일 미국 항공우주국과 로렌스 리버모어 국립천문대는 잘 알려져 있는 A 분광형의 주계열성 포말하우트 주위에 있는 먼지 원반을 관측한 결과 외계 행성 한 개를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이는 그 모습을 광학 망원경을 통해 직접 사진으로 담은 최초의 사례이다. 포말하우트 b의 질량은 목성의 3배 정도일 것으로 예측된다. 2008년 - HR 8799 역시 같은 11월 13일, HR 8799 주위를 도는 외계 행성 세 개가 한꺼번에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들 역시 사진을 찍어 발견했으며, 여러 개의 행성을 동시에 사진에 담은 것으로는 최초였다. 캐나다 허즈버그 천체물리학재단 소속 크리스찬 매로이스 연구진이 하와이 소재 제미니 망원경과 켁 망원경을 통해 발견했다. 2007년 10월 17일 이들은 항성 근처에서 제미니 망원경을 이용하여 행성 두 개의 존재를 확인했다. 이후 2007년 10월 25일 및 2008년 여름 이들은 먼저 발견된 행성 두 개의 존재를 검증했으며, 켁 망원경의 화상을 통해 추가로 항성에 보다 가까이 붙어 있는 세 번째 행성의 존재도 확인했다. 2004년 켁 망원경으로 얻은 자료를 통해 사진에 나타난 천체 셋은 행성이 맞음을 검증했다. 이들의 질량 및 항성으로부터의 거리는 각각 10 MJ - 24 AU, 10 MJ - 38 AU, 7 MJ - 68 AU이었다. 2008년 - 처녀자리 HW b, 처녀자리 HW c 11월 24일에 쌍성 주위를 도는 두 개의 외계 행성이 발견되었다. 한국천문연구원(원장 박석재)은 광학적외선천문연구부 이재우, 김승리 박사와 충북대학교 김천휘 교수 등 국내외 학자 7명으로 이루어진 연구팀이 두 별로 이뤄진 쌍성(서로의 중력에 묶여 회전하는 두 개의 별) 주위에서 공전하고 있는 2개의 외계행성을 세계 최초로 발견했다고 5일 발표했다. 이 두 개의 행성은 9.1년과 15.8년의 주기로 쌍성계의 질량중심 주위를 공전하고 있다. 행성들의 질량은 각각 목성의 8.5배와 19.2배이고, 표면온도는 각각 영하 3도와 영하 43도로 추정된다. 2009년 - 글리제 581 e 4월 21일 유럽 우주국은 적색 왜성 글리제 581 주위를 도는 네 번째 행성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이 행성의 최소 질량은 지구의 1.94배에 불과했으며 항성에서는 수성~태양의 10분의 1도 안 되는 거리인 0.03 천문단위 거리만큼 떨어져 있었다. 질량과 어머니 항성과의 거리로 볼 때 이 행성의 표면은 건조하게 말라 있을 것으로 추측되며, 따라서 생명체가 존재할 환경은 아닐 것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이 행성의 존재는 지구와 유사한 행성이 우주에 흔할 것이라는 판단을 가능하게 한다. 2013년 - 케플러 70 b B형 준왜성인 케플러 70의 주위를 0.006AU 떨어져 돌고 있는 외계 행성이다. 지나칠 정도로 가까운 거리 때문에 행성은 극단적으로 작열하며, 표면온도가 7178K에 육박한다. 2017년 - NGTS-1b:NGT-1을 공전하는 외계 행성이다. 4561만km 떨어진 상태로 모항성을 공전하고 있으며, 모항성의 질량이 행성의 50% 정도로, 목성형행성이 자신의 절반 정도 되는 작은 항성을 공전하는 것은 이번 발견 사례가 처음이다. 주제 행성 항성 발견년도 주석 최초로 발견된 행성 PSR B1257+12 BPSR B1257+12 C PSR B1257+12 1992 최초로 발견된 펄서 행성이자 슈퍼지구 1988년 이미 세페우스자리 감마를 도는 행성이 발견되었다. 1989년 HD 114762 b가 이미 발견되었으나 1996년 전까지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발견 방법별 최초 사례 펄서 타이밍으로 발견된 최초 행성 PSR B1257+12 BPSR B1257+12 C PSR B1257+12 1992 최초로 발견된 행성이자 최초의 슈퍼지구 시선속도법으로 발견된 최초 행성 페가수스자리 51 b 페가수스자리 51 1995 횡단방법을 이용하여 발견된 최초 행성 OGLE-TR-56 b OGLE-TR-56 2002 2002년 이전 HD 209458 b가 이미 발견된 바 있으나, 공식적으로 검증된 것은 OGLE-TR-56 b보다 늦었다. 미시중력렌즈법을 이용하여 발견된 최초 행성 OGLE-2003-BLG-235L b OGLE-2003-BLG-235L/MOA-2003-BLG-53L 2004 사진을 찍어 발견된 최초 행성(적외선) 2M1207 b 2M1207 2004 갈색 왜성을 도는 것으로는 최초로 확인된 행성 평범한 별 주위를 도는 것으로 최초로 사진이 촬영된 행성(적외선) 1RXS J160929.1-210524 2008 태양과 비슷한 항성 주위를 도는 것으로 밝혀진 최초의 항성 사진을 찍어 발견된 최초 행성(가시광선) 포말하우트 b 포말하우트 2008 A형 주계열성을 도는 것으로 밝혀진 최초 행성 계(系) 형태별 최초 발견 사례 단독성계(單獨星系)에서 발견된 최초 행성 PSR B1257+12 BPSR B1257+12 C PSR B1257+12 1992 최초로 발견된 외계 행성 1989년 HD 114762 b가 발견된 바 있으나 1996년이 되어서야 정식으로 인정받았음. 최초로 발견된 자유롭게 떠다니는 행성 오리온자리 S J053810.1-023626(오리온자리 S 70) 2004 목성질량의 3배. 아직 검증되지 않았음. 일명 이러한 떠돌이 행성들은 아직 행성으로 인정되고 있지 않다. 다중성계(多重星系)에서 발견된 최초 행성 게자리 55 b 게자리 55 1996 게자리 55는 짝별로 적색 왜성을 먼 거리에 두고 있다. 세페우스자리 감마도 쌍성계이다(1988년 행성 존재가 예측되었음). 세페우스자리 감마 Ab는 주성과 반성이 비교적 가까이 있는 항성계에서 발견된 최초의 행성이다. 쌍성주위 궤도상에서 발견된 최초 행성 PSR B1620-26 b PSR B1620-26 1993 이 행성의 어머니 항성들은 펄서와 백색 왜성이다. 행성이 두 개 이상 발견된 첫 사례 PSR B1257+12 APSR B1257+12 BPSR B1257+12 C PSR B1257+12 1992 펄서 행성 여러 개로 이루어진 행성계. 성단에서 발견된 최초 행성 PSR B1620-26 b PSR B1620-26 1993 M4에 자리잡고 있음 항성 종류별 첫 번째 발견 사례 최초 펄서 행성 PSR B1257+12 BPSR B1257+12 C PSR B1257+12 1992 주계열성 주위에서 발견된 최초 사례 페가수스자리 51 b 페가수스자리 51 1995 처음 발견된 뜨거운 목성 ABO(백색~청색의 뜨거운 항성)별 주위에서 발견된 최초 행성 포말하우트 b 포말하우트 2008 가시광선 영역으로 영상을 잡아낸 최초 행성 적색 왜성 주위에서 발견된 최초 행성 글리제 876 b 글리제 876 1998 거성 주위에서 발견된 최초 행성 용자리 요타 b 용자리 요타 2002 1997년 알데바란 b를 발견하였다는 주장이 있으나, 아직 검증되지는 않았다. 백색 왜성 주위에서 발견된 최초 행성 PSR B1620-26 b PSR B1620-26 1993 2007년 GD 66 b가 발견되었으나, 아직 검증되지는 않았다. 갈색 왜성 주위에서 발견된 최초 행성 2M1207 b 2M1207 2004 최초로 영상을 통해 발견한 외계 행성(적외선 영역). 최초로 발견된 떠돌이 행성 오리온자리 S J053810.1-023626(오리온자리 S 70) 2004 질량은 목성의 약 3배로 추정되나, 검증되지 않았다. 떠돌이 행성은 아직 학계에서 행성으로 인정받고 있지 않다. 행성 종류별 최초 사례 최초로 발견된 뜨거운 목성 페가수스자리 51 b 페가수스자리 51 1995 주계열성을 도는 것으로는 처음 발견된 행성 최초로 발견된, 주계열성을 도는 지구형 행성 제단자리 뮤 c 제단자리 뮤 2004 행성 4개가 존재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최초로 발견된, 주계열성을 도는 슈퍼지구 글리제 876 d 글리제 876 2005 적색 왜성을 돌고 있다. 최초로 발견된, 주계열성을 도는 얼음 행성 OGLE-2005-BLG-390Lb OGLE-2005-BLG-390L 2006 적색 왜성을 돌고 있다. 기타 최초 사례 최초로 발견된 통과 행성 HD 209458 b HD 209458 1999 횡단방법을 써서 발견한 행성으로는 OGLE-TR-56 b가 처음이다. 직접 사진을 찍어 발견한, 다중 행성계 HR 8799 bHR 8799 cHR 8799 d HR 8799 2008 외계행성에 대한 연구가 심화될수록, 어떤 조건의 행성에서 외계 생명체들이 존재할지에 대한 의문도 커져 왔다. 관측 기술이 정교해지면서 가스행성 뿐 아니라 보다 작은 질량의 행성들을 탐지할 수 있게 되었다. 현재 보통의 별 주위를 도는 행성들 중 지구의 수 배 질량 정도의 행성까지 찾아내는 수준에 이르렀다. 이는 지구와 같이 생명체가 존재하는 행성이 있을 것이라는 논리를 가능하게 해 준다. 2007년 발견된 글리제 581 d의 경우 항성과의 거리가 너무 멀어 바다가 존재할 수 없을것으로 생각했으나, 2009년 프랑스 그르노블 천문대의 과학자들에 의해 생물권 범위 내에서 공전하고 있는 것으로 새롭게 밝혀졌다. 외계 행성이 확인된 항성 목록 확인되지 않은 외계 행성 목록 외계행성의 겉모습 타원궤도 가스행성 외계 위성 The Extrasolar Planets Encyclopaedia 외계 행성 백과사전. 지금까지 발견된 모든 외계 행성들이 실려 있다. 파리 천문대 제공.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 1685년 3월 21일 ~ 1750년 7월 28일)는 독일의 작곡가이자 오르가니스트이다. 교회 성기사와 오케스트라, 듀오 악기를 위한 종교적이거나 세속적인 음악을 창작했고, 그의 작품은 바로크 시대의 종말과 궁극적인 성숙을 동시에 가져왔다. 그는 바로크 시대의 최후에 위치하는 대가로서, 일반적인 작품은 독일음악의 전통에 깊이 뿌리박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위에 이탈리아나 프랑스의 양식을 채택하고 그것들을 융합하여 독자적 개성적인 음악을 창조하였다. 종교적 작품은 기존 구교 음악과 차별화하여 새로운 음악을 통해 개신교회 예배에 기여하고자 노력하였다. 바흐의 집안은 200년에 걸쳐서 50명 이상의 음악가를 배출한 일대 음악가계였다. 바흐 집안의 음악가들은 대대로 개신교회인 루터교회의 경건한 신자들이었고, 교회음악가로도 활동하였다. 또한 그들의 일에 강한 장인(匠人)적인 긍지를 품고 있었다. 이 신앙 과 장인기질(匠人氣質) 은 요한 제바스티안에게도 계승되어서, 마치 2개의 정선율(定旋律)과 같이 그의 일생을 관통하게 된다. 제바스티안 이전에도 17세기 초엽 이래 많은 유명한 작곡가를 배출했고, 일족의 중심지이었던 중부독일의 튀링겐 지방에서는 바흐 가 거리의 악사 를 가리키는 용어로 쓰였을 정도였다. 그중에서도 제바스티안의 큰할아버지 하인리히 바흐(1615-1692), 그 아들 요한 크리스토프 바흐(1642-1703)와 요한 미하엘 바흐(1648-94)는 음악사(史)에도 이름을 남긴 뛰어난 작곡가들이었다. 바흐는 사후 고전주의 음악사의 흐름에 밀려 완전히 잊혔으나 1802년 독일의 음악사학자인 포르켈이 바흐에 대한 최초의 연구서인 "바흐의 생애와 예술, 그리고 작품Über Johann Sebastian Bachs Leben, Kunst und Kunstwerke"(1802)를 발표함으로써 전 유럽적 바흐 광풍을 몰고 오게 하였으며 또한 사후 바흐에 대한 재평가에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하였다. 오늘날에는 일반적으로 온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작곡가 중 한 사람으로 여겨지고 있다. 바흐를 최초로 재발굴하고 최초의 연구서를 펴낸 독일의 음악사학자 요한 포르켈(1749-1818) 요한 암브로지우스 바흐, 바흐의 아버지 1685년 거리의 악사(바이올린 주자) 요한 암브로지우스(1645~1695)의 막내아들로서 튀링겐 지방의 아이제나흐에서 태어나, 3월 23일에 그 곳의 성(聖) 게오르크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출생한 것은 3월 21일이라고 전해지고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에게서 바이올린을, 사촌 큰아버지한테서 오르간을 배우고, 한편으로는 교회 부속학교에도 다니면서 성가대원으로서도 활약하였다. 9세에 양친을 잃은 바흐는 큰형 요한 크리스토프 바흐(1671-1721)와 함께 살게 되어 오르돌프 시로 옮겨가 형으로부터 본격적으로 작곡 기초를 배웠다. 그러다 형이 부양할 가족이 늘어나 생활이 어려워지자, 15세 때 북부독일의 뤼네부르크의 고등학교에 장학생으로 들어가, 유명한 오르가니스트 겸 작곡가인 게오르크 뵘(Georg Bhm, 1661~1733)과 얀 아담스 라인켄(Jan Adams Reinken, 1623-1722)을 알게 되어 큰 영향을 받았다. 18세로 학교를 졸업한 바흐는 곧 자활할 필요에 쫓겨, 1703년 4월부터 한때 바이마르 궁정의 악단에서 바이올린 주자로 일하고, 그해 8월에는 아른시타트의 교회에 오르가니스트로 채용되었다. 이 시대에는 북독일의 뤼베크를 찾아가 대작곡가 디트리히 북스테후데(1637-1707)의 작품과 오르간 연주에 커다란 감명을 받았으며, 그 영향은 이 시기의 화려한 오르간곡에 명확한 자취를 남기고 있다. 아른시타트 시대는 오르간의 연주와 작곡에서 바흐가 개성적인 양식의 기초를 굳힌 중요한 시대인데, 그를 감독하는 입장에 있었던 성직회의(聖職會議)와 자주 충돌하여, 1707년 6월 새로운 직장을 찾아 같은 중부독일의 도시 뮐하우젠으로 갔다. 뮐하우젠에서는 교회 오르가니스트로서 활약하는 한편 교회 칸타타의 작곡에도 힘을 들여 제71번, 제131번, 제106번 등 초기 칸타타의 명작을 작곡하였다. 그러나 루터파 내부의 정통파와 경건파 사이의 분쟁에 말려들어 겨우 1년 만에 이 곳을 떠나게 되었다. 다음으로 바흐를 맞이한 것은 바이마르 궁정이었다. 한때는 한낱 악사로서 취직하였던 추억의 고장으로, 이제 젊은 대가가 된 그는 궁정 예배당의 오르가니스트로서 돌아온 것이다. 1708년 7월 23세 때의 일이다. 이 바이마르 시대(1708-1717)는 바흐의 오르간곡의 시대 라고도 불리며, 현존하는 오르간곡의 태반이 여기서 작곡되었으며, 비할 데 없을 만큼 훌륭한 오르간 연주자로서 그의 이름은 독일에 알려지게 되었다. 또한 1714년에는 궁정악단의 콘서트마스터에 임명되어, 매달 1곡씩 뛰어난 교회 칸타타를 작곡하였다. 바이마르 궁정에서는 당시의 가장 새로운 음악이었던 비발디 등의 협주곡이 즐겨 연주되었는데, 바흐는 그것들을 열심히 연구하여 이탈리아 협주곡의 형식과 기법(技法)이 바흐의 그 후의 작품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1717년 8월, 바흐는 쾨텐 궁정에 악장으로서 취임하였다. 궁정악장은 당시의 독일에서 음악가가 바랄 수 있는 최고의 사회적 지위이며, 음악을 사랑한 젊은 영주도 바흐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이례적(異例的)인 후대를 베풀었다. 쾨텐의 궁정은 깔뱅주의여서 교회음악을 그다지 중요시하지 않았으므로 바흐의 중요한 직무는 영주나 귀족들을 위하여 세속적인 합주곡이라든가 실내악을 작곡하는 일이었다. 이리하여 6곡의 (BWV1046-1051), (BWV1001-1006), (BWV1007-1012)을 비롯하여 그의 세속적 기악곡의 대다수가 이 시대에 작곡되었다. 정신적으로도 물질적으로도 풍성한 생활을 반영하는 것처럼 그것들은 밝고 즐거운 표현으로 넘쳐 있었다. 뮐하우젠 시대인 1707년, 바흐는 먼 친척의 딸 마리아 바르바라와 결혼하여 두 사람 사이에 7명의 자녀가 태어났는데, 쾨텐 시대인 1720년에 이 부인이 병사했다. 다음해인 1721년, 그는 16세 손아래인 소프라노 가수 안나 막달레나와 재혼하고, 13명의 아이를 얻었다. 합계 20명의 자녀 가운데서 약 반수는 어렸을 때에 사망하였는데, 나머지 아이들은 모두 선천적으로 뛰어난 음악적 재질을 지니고 있었으며, 특히 장남인 빌헬름 프리데만 바흐(1710-1784), 차남인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바흐, 막내아들 요한 크리스티안(1735-1782)은 음악사(史)에 이름을 남기는 뛰어난 작곡가로 성장하였다. 쾨텐 시대에는 이들 아이들이나 또는 바흐의 명성을 흠모하여 모여든 제자들을 위하여 제1권(BWV846-869), (BWV772-801)을 비롯한 수많은 클라비어곡도 작곡하였다. 좋은 환경 속에서 쾨텐 영구거주를 한때 결심했었으나 1723년 여러 사정때문에 라이프치히로 옮겼다. 독일 바로크의 중요한 작곡가 요한 쿠나우(Johann Kuhnau 1660-1722)의 후임으로 토마스 교회의 칸토르(합창장)에 선출되었다. 1750년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의 27년간, 이 곳에 머무르며 교회음악의 최고 책임자로서, 또 사실상의 라이프치히 음악감독으로서 정력적인 활동을 계속하였다. 이 시대의 창작중심은 (BWV244), (BWV232), (BWV248), 약 160곡의 교회 칸타타 등의 교회성악곡이지만,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그 대부분은 라이프치히 시대의 최초의 수년간에 작곡된 것이라 한다. 자기의 이상을 끝까지 관철코자 했던 바흐는, 시의 당국자나 교회의 책임자들과 자주 충돌하였으며, 교회음악의 일에 점점 열의를 잃어간 것같이 생각된다. 1724년 이후, 교회음악의 창작은 급격히 수요가 줄고, 그 대신에 세속 칸타타나 세속적 기악곡이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또한 1736년경부터는 새로운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하여, 이전에 작곡한 것을 고치기도 하고 몇 편의 작품을 곡집 형태로 정리하기도 하였으며, 혹은 그것들을 적극적으로 출판하기도 하였다. 클라비어를 위한 (BWV825-830), (BWV971), (BWV988) 등이 그 예이다. 1747년 5월, 바흐는 포츠담의 궁정으로 프리드리히 대왕을 방문하고, 왕이 제출한 주제를 바탕으로 즉흥연주의 묘기를 보였다. 이것이 동기가 되어 작곡한 것이 대왕에게 헌정한 (BWV1079)이다. 그리고 1748년부터 다음해에 걸쳐 최후의 대작 (BWV 1080)의 작곡이 진행되었으나, 1749년 5월 뇌일혈로 졸도하여 시력도 잃어 의 완성을 보지 못한채, 1750년 7월 28일, 사망한다. 바로크 음악에 있어서 바흐는 대위법 기술의 정수를 다한 사람이나, 그것에만 만족하지 않고 당시에 이미 궁정문화에 침투했던 프랑스나 이탈리아의 양식을 스스로 받아들여 칸타타에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도 했다. 거기에는 그가 직접적 또는 간접적으로 배운 여러 나라의 온갖 요소가 모두 투입되어 그만이 지닐 수 있는 최고로 천재적이게 융화되어 일치미를 이루고 있다. 콘티누오(통주저음)만으로 반주되거나 또는 여러 개의 악기로 반주되는 독창이나 중창에 의한 이탈리아식 다 카포 아리아, 오페라적인 아리오소와 레치타티보, 가장 초기의 가브리엘 형태에서 바흐 시대의 프랑스식 서곡에 이르기까지의 관현악 신포니아, 협주곡, 트럼펫의 팡파르, 풍요한 장식성을 지니고 성악성부에 얽혀드는 기악의 오블리가토 성부, 복합창형식, 때로는 성악에까지 적용되는 프랑스의 리드미컬한 춤곡, 이러한 것이 독일의 오랜 전통인 코랄과 결부되고 있다. 대체로 바흐만큼 코랄을 훌륭하게 활용하고 또 코랄을 창작의 중심으로 삼기에 정당함을 느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여러 나라 양식의 혼합은 기악 분야에서도 볼 수 있다. 프로베르거의 전통, 쿠프랭의 프랑스 모음곡형식, 쿠나우에 의하여 전해진 이탈리아의 소나타 다 카메라양식, 도메니코 스카를라티의 건반 텍스처(鍵盤書法), 푸가에 있어서도 클라비어 푸가는 이탈리아 협주양식의 영향을 나타내나 오르간 푸가는 북독일 오르간 악파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 협주곡 분야에서는 끊임없이 비발디가 모범으로 숭앙되며, 가장 이탈리아의 특징을 나타낸다. 이와 같이 바흐의 작품은 매우 많은 여러 가지 양식을 포함하고, 또한 작곡한 분야도 넓으며 바흐 개인으로서도 시대에 따라 기술적, 내용적으로 현저하게 발전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개인양식을 간단히 종합하기란 곤란하다고 하겠다. 바흐는 생전에도 동시대의 음악가였던 비발디나 텔레만과 같이 국제적 지명도를 가진 음악가는 아니었다. 사후에는 당시 음악가들이 대부분 그랬듯이 작곡가로서는 완전히 잊혀진다. 바흐 생애 후반부에 이미 고전파 음악의 전조가 시작되었고 바흐 음악은 낡은 것으로 취급되었다. 바흐는 비발디나 헨델과 같이 음악가의 프리랜서화를 선도하는 인물도 아니었고 끝까지 교회 음악가로 남았다. 고전파 시대에 바흐는 고전파의 문을 연 아들들의 아버지로서 오히려 유명하였다. 유명인 중에는 모차르트가 바흐의 악보를 찾아서 탐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모차르트 음악에 가끔 훌륭한 푸가가 보이는 것이 바흐의 영향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베토벤 또한 바흐를 연구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그 영향에 대해서는 불분명하다. 모차르트와 베토벤이 바흐를 극찬하는 말을 남겼다고하나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가 아닌 아들 바흐에 대한 찬사였다는 것이 일반적인 설이다. 독일의 음악사학자 요한 포르켈의 저서 "바흐의 생애와 예술, 그리고 작품Über Johann Sebastian Bachs Leben, Kunst und Kunstwerke"(1802). 이 작품은 사후 완전히 잊혔던 바흐를 최초로 발굴한 연구서로 바흐 사후 재평가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그러나 1802년 독일의 음악사학자인 포르켈이 사후 완전히 잊혔던 바흐에 대한 최초의 연구서인 "바흐의 생애와 예술, 그리고 작품Über Johann Sebastian Bachs Leben, Kunst und Kunstwerke"(1802)를 발표함으로써 바흐에 대한 인식의 전환점을 제공하였다. 근대 인문학으로서의 음악사학의 발전은 낭만주의 시대에 이전 시대의 음악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키고 이들의 작품을 출판, 연주하기 시작하면서 바흐는 그 핵심 레파토리로 떠오른다. 바흐 생존 시기나 고전파 시대의 지명도와는 달리 낭만주의 시대에 바흐는 이전 시기 어떠한 음악가보다 높이 평가되기 시작하여 멘델스존 이후 음악가들 중 바흐를 연구하지 않은 작곡가가 없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이다. 바흐에 대한 관심은 바흐가 많이 참고하고 편곡을 했던 다른 음악가들, 특히 비발디에 대한 관심을 촉발시켜서 19세기 말부터 시작된 바로크 음악의 부활을 이끌기도 하였다. 오늘 날에도 바흐는-그의 음악이 바로크 음악을 대표한다고 말할 수도 없고, 바로크 시대 가장 유명한 음악가도 아니었지만-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가장 위대한 음악가로 추앙받고 있다. 서양 음악의 아버지라고 일컫는 바흐의 가문에서는 약 200년 동안에 걸쳐 저명한 음악가가 많이 나왔다. Friedemann Bach.jpg|빌헬름 프리데만 바흐 (1710–84) Carl Philipp Emanuel 1.jpg|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바흐 (1714–88) Christoph Friedrich Bach.jpg|요한 크리스토프 프리드리히 바흐 (1732–95) Christian Bach.jpeg|요한 크리스티안 바흐(1735–82) 《미사곡》(예배곡) 《마태 수난곡》 《요한 수난곡》 《나단조 미사》 《무반주 첼로 모음곡》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와 파르티타》 《BWV992》 《토카타와 푸가》 《전주곡과 푸가》 《바이올린협주곡》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막달레나를 위한 클라비어곡집》 《골드베르크 변주곡》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푸가 기법》 프랑스 모음곡 《음악의 헌정 (BWV 1079)》 Great Bach 바흐 곡 모음집 헬무트 릴링 마태오 수난곡 바흐 작품 번호 244 분류:1685년 태어남 분류:1750년 죽음 분류:18세기 독일 사람 분류:18세기 서양고전음악 작곡가 분류:독일의 작곡가 분류:독일의 서양 고전 작곡가 분류:독일의 오르간 연주자 분류:바로크 시대 작곡가 분류:아이제나흐 출신 분류:독일의 루터교도 분류:바흐 가 분류:성공회 성인 분류:18세기 서양고전음악 작곡가
국방 (國防) 또는 안전보장 (安全保障), 안보 (安保)는 국가가 국민과 국제적으로 인정된 자국의 영역(영토, 영해, 영공)을 외부 또는 내부에서 발생되는 위협으로부터 사전에 예방하고 지키며, 경우에 따라서 이들의 보존과 안정을 위하여 국가가 지닌 모든 권력과 수단을 동원하는 행위 및 제도를 일컫는다. 국방을 위해서 국가보안법이 있다. 군사를 모집하기 위해 모병제, 징병제등이 실시된다. 전쟁 무기 국가 안전 보장 한국 국방과학연구소 미국 국제 관계 연구소 명단 카토 (Cato) 국방연구소 국제 안전보장에 관한 연구기관( Global security ) 제인 연감
Overview2.png|섬네일|DNA의 모식도 유전학 (遺傳學은 생물의 유전과 유전자 다양성 등을 연구하는 생물학의 한 분야이다. 선사 시대부터 인간은 생물의 특징이 부모로부터 자식에게 유전되는 것을 이용한 품종 개량을 해왔다. 그러나 최초로 과학적인 방법으로 유전을 연구한 것은 그레고어 멘델이 유전 법칙을 발견한 19세기 중반부터이다. 그는 오늘날 유전자라 부르는 물질을 유전 대립쌍이라 불렀다. 현대 유전학의 핵심 개념은 유전자이다. 유전자는 전체 게놈 서열 가운데 DNA의 일정 구간을 이루는 염기서열의 배열이다. DNA는 뉴클레오타이드들이 이중 나선의 형태로 결합되어 있는 것으로 DNA 복제를 통하여 유전형질을 다음 세대로 전달한다. 또한 세포에서 DNA의 역할은 단백질을 형성하여 생물이 생장하고 활동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DNA에서 전사된 전령 RNA의 코돈은 각각 하나의 아미노산과 대응하며, 이렇게 전사된 RNA에 의해 결합된 아미노산에 의해 단백질이 형성된다. 단백질은 효소, 근육, 세포질 등 생물을 이루고 있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개괄하면, 현대의 유전학은 생물의 발생과 생장, 그리고 진화에서 차지하는 유전자의 역할을 규명하고 DNA의 재조합 실험을 통해 유전체와 생물 정보를 탐구하는 폭넓은 영역의 과학이다. 매우 넓은 연구분야를 이루고 있기때문에 현대의 유전학은 집단유전학, 유전체학, 진화유전학 등의 하위 학문으로 세분화되어 있다. 또한 유전학의 지식은 여러 학문에 파급되어 의학, 농업 등에서 유전학은 필수적인 기반 지식이 되었다. 유전학 지식을 바탕으로 하는 유전공학은 유전자의 조작을 통한 약품의 개발과 품종개량 등의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inheritance white.jpg|섬네일|왼쪽|220px|토머스 헌트 모건의 초파리 연구모건은 돌연변이된 초파리의 유전을 연구하면서 유전자 재조합을 발견하였다. 19세기 중반 발표된 멘델의 유전 법칙은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다. 당시 사람들의 유전에 대한 개념은 부모 양쪽의 특징이 자식에게 섞여 나타난다는 혼합 유전이었다. 예를 들면 붉은 꽃과 흰 꽃의 자식은 분홍 꽃이 된다는 것이다. 물론 실제 흰 꽃과 붉은 꽃 사이에 수정된 자식 세대가 분홍 꽃으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자식 세대가 흰 꽃 또는 붉은 꽃만으로 나타나는 경우에 혼합 유전 이론은 답을 줄 수 없었다. 멘델은 우성 인자와 열성 인자의 조합이라는 설명을 통해 자식 세대가 한 가지 색으로만 나타나는 이유를 밝혔고 이를 실험으로 증명하였다. 한편, 라마르크는 자신의 용불용설에 따른 진화 이론을 설명하면서 생물이 살아가는 동안 겪는 형질 변화가 유전되는 것으로 보았다. 유명한 일례로는 기린의 목이 길어진 원인에 대한 용불용설의 설명이 있다. 기린이 살아가는 동안 높은 가지에 있는 잎을 따먹기 위해 목을 뽑아 늘리기를 계속한 결과, 기린의 자식은 더 긴 목을 가지고 태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멘델의 유전 법칙이 발견되기 전까지 라마르크의 이론은 가장 적합한 진화 이론의 하나로 받아들여졌다. 다윈 역시 진화가 일어나는 유전적 기제로 라마르크의 이론 이상의 것을 알 수는 없었으며 라마르크와 마찬가지로 종에 나타나는 새로운 특성은 개체가 살아있는 동안에 후천적으로 획득되는 것이라 생각했다. Mendel Monk.jpg|140px|오른쪽|섬네일|220px|멘델의 유전법칙을 발견한 그레고어 멘델 1905년 베이트슨은 멘델의 유전법칙을 재발견하면서 유전학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썼다. 베이트슨은 1906년 런던에서 열린〈제3차 국제 식물 잡종 연구 컨퍼런스〉에서 자신이 재발견한 멘델의 유전법칙을 발표하였고 이와 관련한 학문에 유전학이란 이름을 붙여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멘델의 유전법칙이 재발견된 후 과학자들은 유전에 영향을 미치는 물질이 세포 내에 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1910년 모건은 눈이 흰 돌연변이가 발현한 초파리를 이용한 실험에서 생물의 유전 물질이 염색체에 있음을 증명하였다. 1913년 스터티번트는 멘델의 유전법칙의 제3법칙인 독립의 법칙이 실제에서 들어맞지 않는 경우가 있는 원인을 밝혀내고 이를 유전자 연관이라 하였다. 유전자 연관이란 하나의 유전형질이 발현되는 데 다수의 유전자가 관여하는 현상이다. experiment.svg|섬네일|220px|그리피스 실험 염색체는 DNA와 단백질이 엉켜 있는 구조다. 유전과 관련한 물질이 염색체에 있다는 것을 발견한 이후에도 과학자들은 정확히 염색체의 어떤 성분이 유전에 관여하는지 밝혀내지 못하고 있었다. 1928년 그리피스는 그리피스 실험을 통해 박테리아의 형질전환을 발견하였다. 그의 실험은 유독한 폐렴쌍구균(S형)에 열을 가하여 파괴하면 독성이 사라지지만, 무해한 폐렴쌍구균(R형)에 이미 열처리하여 독성이 사라진 S형 균을 넣자 모두 독성을 지니게 되는 것을 관찰하였다. 그리피스는 S형 균의 어떤 성분이 R형에 영향을 주어 형질전환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았으나 무엇이 그러한 변환을 일으키는지는 밝혀내지 못했다. 1944년 에이버리는 그리피스의 실험을 훨씬 정교하게 통제하여 열처리한 S형 균을 탄수화물, 단백질, DNA로 구분하여 R형 균에 투입하였고, 그 결과 DNA가 형질변환의 원인임을 밝혀내었다. 1952년 허시와 체이스는 박테리오파지를 이용한 허시-체이스 실험을 통해 DNA가 유전물질임을 밝혔다.허시는 이 실험의 공로로 1969년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수상하였다. 1953년 왓슨과 크릭은 X선 회절로 DNA의 구조를 밝혔다. 이들이 밝힌 DNA의 구조는 두 개의 뉴클레오타이드 사슬이 이중 나선의 형태로 꼬여 있는 모습이었다. DNA의 이러한 구조는 뉴클레오타이드의 서열이 유전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과 DNA의 복제가 유전형질의 전달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왓슨과 크릭은 이 공로로 1962년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수상하였다. 생어는 분자생물학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그 덕에 생애에 두 번의 노벨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받았다. 생어는 1955년 인슐린의 아미노산 배열을 완벽하게 분석하였다. 이 공로로 1958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하였다. 이후 생어는 그의 연구 기술을 발전시켜 DNA의 염기서열을 밝힐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고, 이로써 게놈의 염기서열을 밝힐 수 있었다. 생어는 이 공로로 1980년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생어는 이 과정에서 DNA의 세 염기쌍이 코돈을 이루며 이 코돈이 전령 RNA를 전사하고 이를 통해 아미노산이 만들어진다는 것을 규명하였다. 1983년 미국의 생화학자 멀리스는 폴리메라아제 연쇄 반응을 개발하여 DNA의 염기서열의 확인 속도를 획기적으로 개선하였다. 이 방법은 DNA의 특정 구간을 신속하게 복제하여 동일한 DNA의 양을 실험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도록 증폭시키는 것이다. 이 방법으로 DNA의 염기서열 확인이 쉽게 되자 곧바로 범죄 용의자의 DNA 인식과 같은 분야에 사용되게 되었다. 멀리스는 이 공로로 1993년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이러한 DNA 염기서열 확인 기술의 발달로 2003년 인간 게놈 프로젝트가 완료되어 인간의 전체 게놈지도가 완성되었다. square mendel flowers.svg|섬네일|220px|멘델의 유전법칙을 따르는 완두콩의 꽃 색. 붉은 색이 우성이다. 사람의 가계도와 멘델의 유전법칙 멘델은 완두콩의 독립적인 유전자가 갖는 대립 형질이 우성과 열성으로 나뉘어 발현하는 유전 법칙을 발견하였다. 오른쪽의 그림과 같이 열성인 흰색 꽃은 부모로부터 열성인자만을 유전하였을 때 발현하며, 두 부모가 우성인자와 열성인자를 보유하고 있는 잡종일 경우 우성과 열성의 발현 비율은 3:1이 된다. 멘델은 수 년간을 실험하여 이것이 실제 통계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입증하였다. 멘델이 완두콩의 교배 시험을 최초로 한 사람은 아니었다. 이미 200여년 전인 1790여년 무렵 영국의 농부 T. A. 나이트는 멘델과 동일한 실험을 하여 같은 결과를 얻었다. 그러나 그는 그 결과를 제대로 기록하지 않았고 그 까닭도 밝히지 못했다. 멘델은 나이트의 실험에 과학적 방법을 도입하여 유전의 법칙을 발견한 것이다. 멘델의 유전법칙은 오른쪽 그림의 예에서 보이는 꽃의 색의 경우 실제 나타난 "표현형"과 이것이 나타나게 하는 "유전자형"을 구분함으로써 과학적인 유전학의 기초를 놓았다. 멘델은 수 세대 동안 완두콩을 자가 수분하여 단일한 유전형질을 가진 순종(P 세대)을 얻었다. 이를 바탕으로 붉은 꽃의 순종과 흰 꽃의 순종을 교배하여 잡종 1세대(F1)를 얻었다. 잡종 1세대의 발현 형질을 조사한 멘델은 이를 바탕으로 다시 잡종 1세대를 교배하여 잡종 2세대(F2)와 3세대(F3)를 얻고 발현 형질을 기록하였다. F1은 모두 붉은 꽃이었다. 그러나 F2에서 붉은 꽃과 흰 꽃은 3:1의 비율을 보였고, F3에서는 열성 순종인 흰 꽃만이 다시 흰 꽃이 되었고 나머지는 붉은 꽃이었다. 그 결과 그는 다음의 세 법칙을 확인하였다. 붉은 꽃의 유전인자를 B, 흰 꽃의 유전인자를 b라 하면, 우열의 법칙 - 두 순종을 교배하면 대립 형질 가운데 우성만이 발현한다. (Bb) 분리의 법칙 - F1을 자가 수분하면 우성과 열성이 3:1의 비율로 나타난다. 이를 유전인자의 비율로 나타내면 BB:Bb:bb = 1:2:1 이 된다. 독립의 법칙 - 멘델은 꽃의 색, 콩 껍질의 주름 등 유전인자 7가지를 선정하여 관찰하였고 이들은 서로 독립적으로 발현하는 것을 발견하였다. 위에서 예를 든 완두콩의 우성과 열성의 발현은 "멘델의 제1법칙"으로 알려져 있다. 멘델의 실험이 알려지자 과학자들은 그 원인을 밝히기 위해 노력하여 DNA의 서열인 유전자가 이에 관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멘델의 유전 법칙은 모든 생물에서 발견되며 사람의 가계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특이한 유전질환을 앓고 있는 가계도의 경우 우성 유전 또는 열성 유전을 판별할 수 있다. 인류유전학자들은 종교적인 이유로 미국 펜실베이니아주의 특정 지역에 모여사는 아만파 신도들과 같이 고립 생활을 하는 집단을 대상으로 열성 유전을 연구한다. 한편, 어떤 꽃은 흰색과 붉은 색을 교배할 경우 F1은 분홍색으로 F2는 붉은 색, 분홍색, 흰 색의 비율이 1:2:1로 나타나기도 한다. 어느 한 쪽도 완전한 우성을 보이지 못하는 이러한 경우를 불완전 우성이라 한다. 불완전 우성 역시 멘델의 유전법칙을 따른다. |섬네일|220px| 인간의 키는 복잡한 유전자 간 상호 작용의 산물이다.프랜시스 골턴이 1889년 작성한 이 표에서 부모의 키와 상관없이 자식의 키가 일정 범위에 집중되고 있음을 알 수있다. 멘델의 유전법칙에서 완두콩 꽃의 색과 열매의 색은 서로 독립적인 유전자에 의해 결정된다. 즉, 꽃의 색과 열매의 색 사이에는 아무런 관련이 없어서 서로 별도의 우열 관계가 있다. 생물은 수천 개가 넘는 유전자가 있고, 이들 대부분은 이와 같은 "독립의 법칙"을 따른다. 그러나, 어떤 유전형질은 독립의 법칙을 따르지 않는다. 이러한 예가 최초로 관찰된 것은 지치과의 옴파로데스 베르나의 꽃 색이다. 이 꽃의 색을 결정하는 유전자는 셋인데 그중 열성인 흰색과 서로 대립하는 우성인 파랑, 마젠타의 인자가 조합하여 꽃의 색이 만들어진다. 마젠타 또는 파란 색의 인자가 흰색인자와 짝을 이룰 경우 꽃은 우성인자인 이 둘 중 하나의 색을 띄고 열성인 흰색 인자로만 짝지워질 때 흰색 꽃이 된다. 이와 같이 우성 인자가 다수인 경우 나타나는 발현형질을 상위성이라 한다. 오늘날 독립의 법칙을 따르는 대립형질만큼이나 많은 유전 형질이 상호 연관되어 있음이 밝혀졌다. 사람의 키, 피부색과 같은 유전형질은 많은 유전자들이 상호 작용한 결과다. 이와 같은 현상을 양적 형질 위치라 한다. 현대의 분자생물학에 기반을 둔 유전학은 DNA부터 개체의 발생에 이르는 유전 기제를 설명하고 있다. 앞서 유전학의 역사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그리피스의 실험과 에이버리의 확인으로 생물의 유전 정보는 DNA에 있음이 밝혀졌다. 유전의 과정은 결국 DNA 복제에서 출발하여 새로운 개체의 출현에 이르는 기제로서 설명된다. DNA는 뉴클레오타이드가 사슬처럼 연결된 중합체이다. 유전 정보의 전달은 이 DNA가 복제됨으로써 일어난다. DNA의 이중 나선 구조는 수소 결합에 의지하고 있어 분리와 결합에 비교적 적은 에너지가 투입된다. 특정 효소가 DNA 사슬의 분리를 담당하며, 이렇게 분리된 DNA 사슬은 각자 상대되는 DNA 사슬을 만드는 주형이 된다. 자유롭게 존재하는 네 종류의 디옥시뉴클레오타이드 삼인산, 즉 dATP, dGTP, dCTP, dTTP 가 주형이 되는 DNA사슬에 다가가 상보적인 결합을 이루게 되면 새로운 이중나선이 형성된다.(그림 참조) DNA의 복제는 매우 안정적인 반응이지만 완전하진 않다. DNA 복제에 이상이 생겨 이전의 DNA와 다른 DNA가 생성되는 것을 돌연변이라 한다. 자연발생적 변이는 100만 번의 DNA복제 중에서 한 번 정도로 일어나며, 방사선이나 약품을 처리하면 이보다 높은 빈도로 일어난다. 노랑초파리를 이용한 인위적인 돌연변이 실험의 결과 돌연변이의 약 70 %는 개체에게 해로운 방향으로 진행되며, 나머지 돌연변이는 중립적이거나 유리한 성향을 보인다. 생물이 부모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재생산되는 것을 생식이라 한다. 개체의 분열과 같은 무성생식에서는 DNA 복제만으로 유전 기제가 완성된다. 그러나 암·수가 구분되는 유성생식에서는 더 복잡한 기제를 거친다. 유성생식에서는 먼저 암·수의 부모 각자가 감수분열을 통해 난자와 정자를 만들고 이를 수정하여 자식 세대가 발생하게 된다. 감수 분열의 과정에서 유전자 재조합이 일어난다. 이는 한 쌍의 유전자가 여러 구간에 걸쳐 서로 뒤섞이는 현상이다. 이를 통해 생물은 유전자 다양성을 확보한다. 또 앞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한 유전형질에 여러 유전자가 관여할 수 있는데 이 때에는 멘델의 유전법칙 중 독립의 법칙이 지켜지지 않는다. 이는 유전자 재조합 과정에서 교체된 유전자가 유전형질을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을 유전자 연관이라 한다. 유전자의 대립형질의 발현은 순전히 통계적인 것으로, 실제 대립형질 발현빈도는 무작위 행보를 보인다. 이를 유전자부동이라 한다. 유전자부동은 자연선택과 함께 진화의 원인으로 작용한다. 유전자의 발현은 분자생물학적인 관점에서 볼때 유전자의 정보에 의해 단백질이 형성되는 과정이다. 유전자의 정보는 전령 RNA의 코돈에 의해 전사된 후 운반 RNA의 안티코돈에 의해 번역되어 아미노산을 지정하며 리보솜에서 이를 연결하여 단백질을 형성하게 된다. 한편, 발생생물학에서 유전자의 발현은 배아의 발생 결과 새로운 개체가 형성되는 것이며, 개체의 발생에는 유전형질뿐만 아니라 자연환경의 영향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미생물에서 일어나는 유전자의 발현에는 오페론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특정 기능에 관련된 유전자들이 나란히 염색체에 일렬로 배열되어 있는 오페론은 염색체에서 하나의 군집을 이루어 유전자 섬을 형성한다. 병원미생물학에서는 질병의 특징을 파악하고 치료제를 개발하기 위해 병원성 세균의 유전자 섬을 연구하고 있다. 유전자는 일반적으로 단백질을 생산함으로써 형질이 발현된다. 단백질은 20종의 아미노산이 복잡하게 얽힌 고분자이다. 유전자는 각각의 아미노산의 연결 순서를 지정함으로써 단백질의 생성을 관할한다. + 유전자의 단백질 생성 220px DNA의 유전자 전사 전령 RNA의 코돈 번역 지정된 순서대로 아미노산이 연결되어 단백질을 이룬다. DNA에서 단백질 형성까지를 단계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DNA의 일부 구간이 열려 전사가 시작된다. 전사된 유전 정보는 코돈이라 하며 RNA의 일종인 전령 RNA를 이룬다. 전사된 코돈의 사슬인 전령 RNA는 효소에 의해 해당 코돈의 상보적 조합인 안티코돈을 갖고 있는 운반 RNA와 짝을 이룬다. 운반 RNA의 끝에는 해당 아미노산이 연결되어 있다. 아미노산을 단 운반 RNA와 함께 사슬을 이룬 전령 RNA는 리보솜으로 이동한다. 리보솜에서는 아미노산을 연결하고 전령 RNA와 운반 RNA를 내보낸다. 작업을 종결하라는 코돈이 들어올 때까지 리보솜은 계속하여 아미노산을 연결하고 이렇게 하여 단백질이 형성된다. 세포에는 많은 리보솜이 있어 전령 RNA는 여러 차례에 걸쳐 리보솜에 들어가 단백질 형성을 지시한다. 샴고양이에 나타난 온도 민감성 돌연변이 생물의 유전자에는 모든 유전 형질이 들어있어 자식 세대로 전달된다. 그러나, 실제 생물 개체의 발생과 생장에서 나타나는 발현형질은 유전형질과 함께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 일례로 오른쪽 사진에서 보이는 샴 고양이의 온도 민감성 돌연변이와 같은 것이 있다. 발생과정에서 높은 온도에 노출된 샴고양이의 배아는 털색 유전자에 변이를 일으켜 일반적인 샴 고양이의 흰색이 아닌 어두운 색 털이 만들어진다. 성 유전자에 따라 성별이 결정되는 포유류와는 달리 많은 파충류는 별도의 성 유전자가 없어 발생시의 환경에 따라 결정된다. 대부분의 거북은 따뜻한 곳의 알은 암컷이 되고 응달의 알은 수컷이 된다. 반면 미국산 악어는 응달의 알이 암컷이 된다. 이와 같이 유전자가 생물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며 환경이 생물체의 발생과 생장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finger DNA complex.png|섬네일|왼쪽|220px|전사인자가 DNA 나선구조를 열고 전사를 준비하고 있다 생물의 게놈에는 수천 개의 유전자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유전자가 생물체의 발생과 생장에 작용하지는 않는다. 오직 전령 RNA를 통해 단백질을 형성할 수 있는 유전자만 이러한 생명 활동에 관여하며 나머지 유전자는 비활성인 채로 남아 있게 된다. 특정한 단백질을 생성하려면 DNA의 일부 구간만 활성화하여야 한다. 전사의 시작점과 끝점을 정하는 것은 전사인자와 같은 효소들이다. 전사인자는 부적 되먹임에 따라 작동한다. 즉, 전사인자에는 특정한 단백질의 농도를 감지할 수 있는 수용기가 달려있는데, 특정 단백질의 농도가 낮아져 이 수용기에 감지되지 않으면 전사인자는 DNA를 열고 전사를 시작한다. 유전자에는 구조부위와 조절부위가 있다. 구조부위는 생물체를 형성하는 단백질의 생산을 지시하기 위한 정보가 들어있고, 조절부위에는 위에서 설명한 전사인자와 효소들과 같은 조절작용을 담당하는 단백질의 생산을 위한 정보가 들어있다. 실제 생물의 단백질 생성 조절은 단백질이 생산되는 양 자체를 조절하는 것이 아니라 단백질의 생산을 지시하는 RNA의 조절을 통해 간접적으로 이루어진다. inversion.jpg|섬네일|220px|돌연변이의 일종인 염색체 역위 염색체 교차 DNA의 복제는 매우 안정적인 반응이나 간혹 오류가 일어날 수 있다. 이와 같이 DNA 복제의 과정에서 일어난 오류로 인하여 유전형질이 변한 것을 돌연변이라 한다. DNA 중합효소에 의해 복제에 오류가 발생할 확률은 약 100만 회 당 1번 꼴이다. 외부의 돌연변이원의 자극을 받으면 돌연변이가 발생하는 비율이 크게 증가한다. 일상적인 자외선도 돌연변이원의 일종으로 과도한 자외선 노출은 DNA 구조를 붕괴시킬 수 있다. 일례로 강한 자외선에 노출된 피부가 피부암을 일으키는 것을 들 수 있다. 유성생식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유전자 재조합 가운데 염색체 교차의 과정에서도 돌연변이가 발생할 수 있다. 염색체 교차 과정중에 일부 염색체가 덧붙거나 잘려나가는 등의 오류가 발생할 수 있으며 이러한 돌연변이는 DNA의 일부가 누락되는 것과 같은 단순한 돌연변이에 비해 생물체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예를 들면 유전자 중복, 유전자 결실, 염색체 역위와 같은 염색체 단위의 돌연변이들이 있다. 간략히 표현한 진화 계통도 돌연변이로 인한 유전자 변화는 유전형질의 변화로 나타나며 자손에게 유전된다. 자연환경에서 일어나는 돌연변이는 대부분 전체 게놈에서 극히 작은 부분만을 변화시킬 뿐이다. 노랑초파리를 대상으로 한 인위적인 돌연변이 실험에서 나타난 돌연변이의 70%는 개체에 해롭게 작용하였고 나머지 돌연변이는 중립적이거나 유리하였다. 집단유전학에서는 집단에서 나타나는 대립형질 발현빈도가 세대가 지남에 따라 변화하여 일정 세대가 되면 하나의 형질만이 살아남는 고착현상을 보인다는 것을 관찰하였다. 집단유전학은 이러한 고착의 원인을 찰스 다윈의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 압력으로 설명하고 있다. 즉, 다양한 대립 형질 가운데 보다 환경에 적응하기 유리한 형질을 가진 개체가 더 많은 자손을 남길 것이고 이것이 반복되면 결국 어느 시점에서는 집단 내에서 하나의 형질만이 남게 될 것이다. 물론 이 외에도 유전자 부동, 유전자 이동, 인위적 선택 등이 생물 집단의 대립형질 빈도 변화에 영향을 준다. 자연선택이 일어나는 가운데 세대가 거듭되어 많은 시간이 흐르면 결국 환경에 가장 적합한 형질을 갖는 집단으로 변화하는 적응이 이루어진다. 처음에는 같은 생물종이었다 하더라도 서로 다른 환경에 격리되어 다른 방식으로 적응된다면 결국 다른 종으로 분화될 것이다. 진화는 이와 같이 생물이 환경에 적응하여 분화하는 현상이다. 최근에는 서로 다른 종들 사이의 유전형질 전달로 인해 유전자가 변화하는 수평적 유전자 이동역시 중요한 개념으로 자리 잡고 있다. melanogaster - side (aka).jpg|섬네일|유전학 연구에 모델 생물로 흔히 쓰이는 노랑초파리 colonies.png|섬네일|우뭇가사리 배지 위에 균주를 형성한 대장균 유전학은 매우 다양한 생물을 다룬다. 새로운 연구를 진행하는 연구자들은 자신의 실험 목적에 알맞은 모델 생물을 주로 활용한다. 모델 생물은 과학계가 집중적인 연구를 위하여 선정한 종으로, 이러한 모델 생물을 선정한 이유는 이를 자세히 연구하면 다수의 종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생명의 기본 과정을 밝힐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비롯되었다. 세포성 점균인 딕티오스텔리움 디스코이데움 등이 널리 사용되는 모델 생물이다. 딕티라는 애칭을 갖고 있는 이 점균에 대한 연구 결과는 딕티베이스에 정리되어 있다. 이 외에도 노랑초파리는 20세기 초부터 모델 생물로 활용되었고 유전공학에서는 대장균이 모델 생물로 널리 활용된다. 실험실에서 직접 DNA를 조작할 수 있게 되면서 다양한 실험 기술들이 사용되고 있다. 인위적인 DNA의 제작, 표적 유전자의 부착, 제한효소를 사용한 DNA의 절단과 접합 및 복제와 같은 기술들이 있다. 이러한 기술들은 의학 등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현대 유전학에서는 실험을 위해 다양한 유전자 조작 기술을 개발하였다. DNA와 RNA는 실험실에서 인위적으로 합성될 수 있다. 최초의 인위적인 유전자 합성은 마샬 니렌버그와 하인리히 마타헤이가 1961년 코돈과 아미노산의 관계를 규명하기 위해 실시하였다. 이들은 인위적인 코돈배열인 우라실연속체(U-U-U-U-……)와 같은 인위적인 유전자를 리보솜에 집어 넣어 그 결과를 확인함으로써 코돈과 아미노산의 관계를 증명하였다. 특정 유전자의 표적 형질을 추적하는 방법은 유전자의 발현과정을 이해하는데 기여하였다. 해파리와 말미잘에게서 얻은 형광 유전자가 대표적인 경우인데 이 유전자를 다른 생물의 유전자들 사이에 끼워넣음으로써 유전자가 발현되는 기관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이 형광유전자를 이용하여 수백종의 DNA를 하나의 칩 위에 올려놓은 DNA 칩은 암 진단에 유용하게 쓰인다. 겔 전기 영동법을 이용한 DNA 분석 제한효소를 사용하여 DNA의 특정 부분을 잘라낼 수 있게 되면서 실험실에서 DNA를 조작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겔 전기 영동법을 사용하면 잘라진 DNA의 조각들을 그 길이에 따라 구분하여 관찰할 수 있다. DNA 연결효소는 잘라진 DNA를 다시 접합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이렇게 접합된 DNA 조각은 대장균과 같은 박테리아에 심어져 대량으로 복제될 수도 있다. 유전공학은 이러한 복제 기술을 사용하여 유전자 조작을 진행한다. 예를 들어 인슐린의 대량 복제를 위해 대장균을 이용한다. 다운증후군이 있는 사람의 염색체의 모습. 21번 염색체가 세개 있다. 의학 유전학은 유전자와 인간의 질병관계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암과 같은 유전적 변형에 의한 질병의 연구가 대표적이다. 혈우병, 다운 증후군과 같은 유전성 질환은 19세기에 이미 보고되었으나 질병의 원인이 염색체 이상에 있다는 것은 유전학이 발달한 20세기에 들어서야 밝혀졌다. 다운 증후군은 1862년 영국의 의사 존 랭던 다운이 최초로 발견하여 1866년 학계에 보고하였으며 1956년 감수 분열과정에서 염색체가 제대로 분리되지 않아 정상적인 경우와 다르게 인간 염색체 21번이 3개 존재하는 것이 원인으로 밝혀졌다. 이후 다양한 유전성 질환에 대한 연구가 계속되어 유전학의 성과와 연구 방법을 의학에 접목시킨 의학 유전학이 성립되게 되었다. 최근에는 유전자 중복, 유전자 결실, 염색체 역위와 같은 돌연변이에 의한 유전성 질환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데, 유전자 중복이 원인인 샤르코 마리 투스 질환에 대한 연구를 예로 들 수 있다. 샤르코 마리 투스 질환은 중요 신경 질환의 하나로 100,000명당 발병률은 36명이다. 오늘날의 유전학은 많은 하위 학문으로 나뉘어 있으며, 다양한 학문과 학제간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분자의 3차원 구조2000년 이후 각광을 받고 있는 연구 분야는 인간 게놈 프로젝트와 관련한 유전체 연구와 후성유전학이다. 2003년 인간 게놈 프로젝트에 의해 완성된 인간 유전체 지도는 사람의 모든 유전자 서열을 밝혀 내었다. 또한, 유전형질에 의한 발생 과정이 끝난 이후에도 일어나는 유전체의 변동과 유전자 발현의 조절을 연구하는 후성유전학이 활발히 연구되고 있다. 후성유전학에서는 암의 발현과 같은 후생적 유전자에 의한 유전자 발현을 연구하고 있다. 발생유전학을 비롯한 여러 하위 학문의 학제간 연구인 줄기 세포연구는 다양한 유전성 질환의 치료 방법을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2010년에 발표된 예일 대학교의 연구 논문에서는 자궁 내막을 이용한 성체 줄기 세포로 파킨슨병을 치료할 수 있을 것이란 전망을 내놓았다. 노화에 대한 연구도 최근 유전학 연구의 주요 동향이다. 2009년 노벨상위원회는 노화의 진행과 관련된 세포의 수명 시계인 텔로미어를 발견한 엘리자베스 블랙번 등에게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수여하였다. 진화와 관련된 연구는 유전학과 조합되어 일어나는 경우가 일반적이며, 이를 진화유전학이라고 한다. 진화 현상 자체가 직접 관찰되었기에, 명백한 사실로 밝혀진 진화를, 각 유전체와 유전자에서 어떤 속도로 다르게 이루어지는 것을 연구하는 학문으로서, 21세기 들어 가장 활발히 연구되는 연구과제인 진화의 속도와 방향 연구가 있다. 유전 염색체 유전체 유전자 유전자 다양성 유전자 이동 유전자 부동 수평적 유전자 이동 DNA RNA 행동유전학 고전유전학 발생유전학 보전유전학 환경유전학 진화유전학 유전공학 유전체학 인류유전학 * 인류 진화 유전학 * 인류 미토콘드리아 유전학 미생물 유전학 분자유전학 집단유전학 정신유전학 양적 유전학 후성유전학 진화인류학 Alberts B, Johnson A, Lewis J, Raff M, Roberts K, and Walter P (2002). Molecular Biology of the Cell (4th ed.). New York Garland Science. . Griffiths, Anthony J. F.; Miller, Jeffrey H.; Suzuki, David T. et al., eds (2000). An Introduction to Genetic Analysis (7th ed.). New York W. H. Freeman. . Hartl D, Jones E (2005). Genetics Analysis of Genes and Genomes (6th ed.). Jones & Bartlett. . Lodish H, Berk A, Zipursky LS, Matsudaira P, Baltimore D, and Darnell J (2000). Molecular Cell Biology (4th ed.). New York Scientific American Books. . Witzany, Guenther, ed (2009). Natural Genetic Engineering and Natural Genome Editing. New York Annals of the New York Academy of Sciences. ISBN 978-57331-765-8 조지 B 존슨, 전병학 역, 생명 과학, 동화기술, 2007, Pulves 외, 이광웅 외 역, 생명 생물의 과학, 2006, 교보문고, SNUSTAD, SIMMONS, 김상구, 서동상, 서봉보 역, 유전학원론, 월드사이언스, 2008, 학술잡지 * Nature 웹사이트 * Science 웹사이트 * PNAS 웹사이트 * 유전공학 관련 웹사이트 학회 * 한국유전학회
가수분해 (Hydrolysis) 개체군 겸상 적혈구 빈혈 (sickle cell anemia) 광합성 광호흡 그람 염색 기생충 (parasite) 내분비 체계 네프론 뉴런 (neuron) 뉴클레오타이드 (Nucleotide) 능동수송 (active transport) 단백질 (Protein) 단수분자 (Monomer) 단일 클론 항체 (monoclonal antibody) 당뇨병 (diabetis melitus) 대장균 (Escherichia coli) 도약 유전자 (transposon} 돌연변이 (mutation) DNA (deoxyribonucleic acid) 리보솜 (ribosome) 리소좀 (lysosome) RNA ribonucleic acid) 멘델의 유전법칙 면역 무성생식 미토콘드리아 (mitochondria) 바이러스 발효 백신 (vaccine) 번역 (translation) 베타 구조 (beta-sheet) 복제 (replication) 분화 (differenciation) 비타민 (vitamine) B세포 (B cell) 생태계 세포 세포막 (cell membrane) 세포질 (Cytoplasm) 세포핵 (Nucleus) 세포분열 물질대사 (Metabolism) 아미노산 (Aminoacid) 원핵세포 (prokaryote) 열성 (recessiveness) 염색체 (Chromosome) 엽록소 (chlorophyl) 엑손 (Exon) 오페론 (operon) 우성 (dominance) 원형질막 (plasma membrane) 유전자 (Gene) 유전자 연관 (linkage) 유전체 (Genome) 유전형 (Genetype) 인트론 (Intron) ATP (adenosine triphosphate) 리보핵산 (ribonecleic acid) 중심원리 (central dogma) 중합분자 (polymer) 적혈구 (a red blood cell) 전사 (transcription) 진핵세포 (eukaryote) 탄수화물 펩타이드 (Peptide) 표현형 (Phenotype) 프로테옴 (proteome) 항상성 (homeostasis) 항원 (antigen) 항체 (antibody) 핵산 (Nucleic acid) 헤모글로빈 혈액 혈액형 호르몬 (Hormone) 효소 (Enzyme)
현대 쏘나타 (Hyundai Sonata)는 1985년에 출시되어 현재까지 판매되고 있는 현대자동차의 중형차이자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중형차이다. 현재 대한민국의 승용차 중, 대표적인 차종이기도 하다. 차명인 쏘나타는 고도의 연주 기술이 요구되는 4악장 형식의 악곡인 소나타에서 따온 것으로, 혁신적인 성능, 기술, 가격을 지닌 종합 예술 승용차라는 의미이다. 본 항목에서의 판매 기간은 자가용 기준이다. 현대 쏘나타 정측면 현대 쏘나타 후측면 1985년 11월 4일에 출시되었다. 큰 인기를 모은 대우 로얄 시리즈에 대항하기 위하여 기존의 스텔라에 미쓰비시자동차공업제 1.8ℓ 시리우스 가솔린 엔진과 2.0ℓ 시리우스 가솔린 엔진을 얹었다. 여기에 크루즈 컨트롤, 파워 시트, 헤드 램프 워셔, 크롬 범퍼, 전동 조절식 아웃 사이드 미러 등 고급 사양을 적용하여 판매한 것이 쏘나타의 시초이다. VIP를 위한 고급 승용차라는 캐치프레이즈로 수요층에게 어필하려고 하였으며, 인기 배우 故 신성일이 첫 번째로 계약하여 화제를 낳기도 하였다. 하지만 경제적인 중형차라는 이미지의 스텔라와의 큰 차별화가 없어 인기를 끌지 못하였다. 이에 경쟁 회사인 대우자동차(한국GM의 전신)로부터 소나 타는 차 라는 비아냥을 듣기도 하여 1986년 2월부터 신문 광고 등을 통하여 이미지 쇄신과 고급화를 위하여 소나타에서 쏘나타로 개명하였다. 1987년 2월 2일에 투톤 외장 색상과 트립 컴퓨터 등을 달았으나, 별다른 효과를 못 봐 같은 해 12월에 단종되었다. 1988년 6월 1일에 전륜구동 방식의 수출 전략형으로 탈바꿈한 2세대 쏘나타가 출시되어 한동안 현대자동차는 1세대 쏘나타를 쏘나타의 계보에서 제외하였다. 하지만 2003년 3월에 쏘나타 250만 대 생산 돌파 시점부터 1세대로 포함하기 시작하였다. 현재 대한민국에 정식으로 등록된 1세대 쏘나타는 극소수이다. 2014년에는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 B2홀에 개최되었던 쏘나타 모터쇼와 2015년 8월부터 9월까지 열린 전국 순회형 쏘나타 모터쇼, 2015년 11월부터 12월까지 서울특별시 강남구 논현동 현대모터스튜디오 서울에서 열린 쏘나타 헤리티지 전시회에서 현대자동차가 전라북도 전주시에 거주하는 오너로부터 빌려서 복원한 1세대 쏘나타를 전시하여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현재 1세대 쏘나타는 노후화로 인해 보기가 상당히 힘들다. 구분 1.8ℓ 가솔린 2.0ℓ 가솔린 쏘나타 DLX(이후 고급형으로 변경 → 1.8ℓ로 변경) 고급형/슈퍼형(이후 2.0ℓ로 통합) 구분 1.8ℓ 시리우스 SOHC 2.0ℓ 시리우스 SOHC 전장(mm) 4,578 전폭(mm) 1,755 전고(mm) 1,381 축거(mm) 2,579 윤거(전, mm) 1,445 윤거(후, mm) 1,425 승차 정원 5명 변속기 수동 5단자동 4단 구동 형식 후륜 구동 엔진 형식 G4BM G4BT 연료 가솔린 배기량(cc) 1,795 1,997 최고 출력(ps/rpm) 100/5,500 110/5,500 최대 토크(kg*m/rpm) 15.0/3,500 16.7/3,500 공차 중량(kg) 연비(km/ℓ) 현대 쏘나타 정측면 현대 쏘나타 후측면 1988년 6월 1일에 출시되었다. 스텔라와는 성격이 다른 전륜구동 방식의 수출 전략형 중형차로 개발되어 대한민국에서 이미 실패한 차종임에도 여러 최종 차명 후보 중에서 제일 부르기 쉽다는 미국 딜러들의 의견에 따라 결국 차명이 쏘나타로 결정되었다. 1세대 그랜저(L)의 전륜구동 메커니즘을 채용하였고, 에어로 다이내믹 디자인이 적용되어 공기 저항 계수(Cd)가 0.32를 기록하는 등 스텔라 베이스의 1세대와는 달리,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2.0ℓ 시리우스 가솔린 엔진은 최고 출력 120마력과 최고 시속 174.5km의 성능을 내었다. 8인치와 9인치 부스터 2개를 조합해 제동 성능을 높인 탠덤 부스터를 대한민국산 자동차 최초로 선보이기도 하였다. 서스펜션은 앞 맥퍼슨 스트럿, 뒤 3 링크를 사용해 북아메리카 시장에 맞게 세팅된 부드러운 승차감이 특징이었고, 파워&틸트 스티어링 휠과 크루즈 컨트롤 등 각종 편의 사양도 적용되었다. 출시 당시 가격은 1.8i 트림이 906만 원(5단 수동변속기 기준), 2.0i 트림이 1,206만 원(4단 자동변속기 기준)이었다. 대우 로얄 프린스와 기아 콩코드 등 경쟁 차종에 비해 높은 판매량을 기록하여 1989년에는 대한민국 전 차종 연간 판매 3위를 기록하였다. 1989년 7월 24일에는 새 라디에이터 그릴 형상, 범퍼 몰딩과 사이드 몰딩의 색상 변경, 시트 벨트 착용 차임 벨, 키 홀 조명, 계기판 조명 조절 장치 등이 적용된 1990년형이 나왔다. 1990년 7월 12일에는 수출용에만 적용되던 2.4ℓ 시리우스 가솔린 엔진과 LCD 계기판, 가죽 시트 등으로 고급스럽게 꾸민 최고급 트림인 2.4i가 나오기도 하였지만, 대한민국에서의 판매 대수는 미미하였다. 수출용에는 V6 3.0ℓ 사이클론 가솔린 엔진도 있었다. 현대자동차가 1989년에 현지 공장을 세워 캐나다 퀘벡주 브로몽에서도 생산되었으며, 대한민국에서 개발된 승용차로는 처음으로 대한민국 이외의 국가에서 생산되는 승용차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북아메리카 자동차 시장의 과잉 공급으로 인해 판매량이 저조하여 1993년을 기점으로 가동을 무기한 중단하였고, 결국 현대자동차의 캐나다 현지 법인인 현대 모터 캐나다가 청산되어 이 현지 공장은 폐쇄되었다. 현재 2세대 쏘나타와 뉴 쏘나타는 노후화로 인해 보기가 상당히 힘들다. 구분 1.8ℓ 가솔린 2.0ℓ 가솔린 2.4ℓ 가솔린 쏘나타 1.8i(이후 GLi로 변경) 2.0i(이후 GLSi로 변경) 2.4i 구분 1.8ℓ 시리우스 SOHC 2.0ℓ 시리우스 SOHC 2.4ℓ 시리우스 SOHC 전장(mm) 4,680 전폭(mm) 1,750 전고(mm) 1,410 축거(mm) 2,650 윤거(전, mm) 1,455 윤거(후, mm) 1,440 승차 정원 5명 변속기 수동 5단자동 4단 구동 형식 전륜 구동 엔진 형식 G4CM G4CP G4CS 연료 가솔린 배기량(cc) 1,796 1,997 2,351 최고 출력(ps/rpm) 105/5,000 120/5,000(이후 111/5,000으로 변경) 123/5,000 최대 토크(kg*m/rpm) 15.4/4,000 16.2/4,000(이후 17.3/4,000으로 변경) 19.9/4,000 연료 탱크 용량(ℓ) 60 요소수 탱크 용량(ℓ) 공차 중량(kg) 1,240(수동 5단)/1,260(자동 4단) 1,250(수동 5단)/1,275(자동 4단) 1,333(수동 5단)/1,348(자동 4단) 연비(km/ℓ) 11.57(수동 5단)/9.41(자동 4단) 12.14(수동 5단)/10.86(자동 4단) 9.83(수동 5단)/9.82(자동 4단) 현대 뉴 쏘나타 정측면 현대 뉴 쏘나타 후측면 1991년 2월 20일에 출시되었다. 페이스 리프트를 거쳐 기존 쏘나타의 디자인에 둥근 요소가 가미된 디자인으로 변경되었고, 윤거를 앞은 25mm, 뒤는 20mm 더 넓혀 주행 안정성을 높였다. 최소 회전 반경을 줄여 기동성을 높였고, 이 시점부터 현대자동차 CI가 변경되어 새로운 엠블럼이 적용되었다. 중형 택시 시장의 확대에 발맞추어 뉴 쏘나타부터는 LPG 택시도 판매되었다. 같은 해 5월에는 최초로 월간 판매 1위를 기록하였고, 6월 24일에는 2.0ℓ 시리우스 DOHC 엔진을 얹어 대한민국산 중형차 최초로 DOHC 엔진의 시대를 열었으며, 최고 시속 185km와 제로백(0→100km) 가속 10.6초의 성능을 보였다. 역대 쏘나타 중에서 ABS가 최초로 적용되었다. 이후 선보인 최고급 트림인 골드는 가죽 시트와 LCD 계기판, 7밴드 그래픽 이퀄라이저 2단 오디오(CD 플레이어는 옵션), 전동식 선루프가 적용되었다. 구분 2.0ℓ LPG(택시) 1.8ℓ 가솔린 2.0ℓ 가솔린 뉴 쏘나타 택시모범 택시 GLi GLSiDOHC(이후 골드로 대체) 구분 1.8ℓ 시리우스 SOHC 2.0ℓ 시리우스 SOHC 2.0ℓ 시리우스 DOHC 전장(mm) 4,680 전폭(mm) 1,750 전고(mm) 1,410 축거(mm) 2,650 윤거(전, mm) 1,480 윤거(후, mm) 1,460 승차 정원 5명 변속기 수동 5단자동 4단 구동 형식 전륜 구동 엔진 형식 G4CM G4CP G4CP 연료 가솔린 배기량(cc) 1,796 1,997 1,997 최고 출력(ps/rpm) 105/5,000 111/5,000 137/6,000 최대 토크(kg*m/rpm) 15.4/4,000 17.3/4,000 17.7/4,000 연료 탱크 용량(ℓ) 60 요소수 탱크 용량(ℓ) 연비(km/ℓ) 1,240(수동 5단)/1,260(자동 4단) 1,245(수동 5단)/1,275(자동 4단) 1,299(수동 5단) 연비(km/ℓ) 11.57(수동 5단)/9.41(자동 4단) 12.14(수동 5단)/10.86(자동 4단) 11.41(수동 5단) 현대 쏘나타 Ⅱ 정측면 현대 쏘나타 Ⅱ 후측면 1993년 5월 14일에 출시되었다. 뛰어난 디자인으로 큰 인기를 모아 3년이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60만 대 가까이 판매되었다. 출시 당시 파격적인 디자인이 큰 인기를 끌어 오래된 차종임에도 최고의 디자인으로 손에 꼽히는 차종이다. 역대 쏘나타 중에서 접이식 사이드 미러와 운전석 에어백이(이후 조수석 에어백도 적용) 최초로 적용되어 편의성과 안전성을 높였다. 그 외에도 전자 제어 서스펜션과 전자식 EQ 내장 오디오(골드 트림은 CD 플레이어 기본) 등이 적용되었고, 오디오 도난 방지를 위하여 오디오에 비밀 번호 입력 기능이 있었다. 환경 보호 차원에서 신냉매 에어컨을 장착하는 한편 자원 재활용을 위한 리사이클링 시스템도 채용되었다. 1995년 8월 22일에는 출시 초기에 있다가 사라진 골든 팩 트림이 금장 엠블럼, 세련된 디자인의 15인치 알루미늄 휠, 205mm 광폭 타이어, ABS 등을 적용하여 새롭게 추가되었다. 현재 쏘나타 II는 노후화로 인해 보기 상당히 힘든 차량이다. 구분 1.8ℓ LPG(택시) 2.0ℓ LPG(택시) 1.8ℓ 가솔린 2.0ℓ 가솔린 쏘나타 Ⅱ TX TXTXL모범 GLGL DLX GLS골든 팩골드 대우정밀의 제품으로, 수출형에 옵션으로 제공되었다. 트립 컴퓨터가 적용되어 주행 가능 거리, 평균 연비, 실시간 연비 등을 볼 수 있다. 구분 1.8ℓ 시리우스 SOHC 1.8ℓ 시리우스 DOHC 2.0ℓ 시리우스 SOHC 2.0ℓ 시리우스 DOHC 전장(mm) 4,700 전폭(mm) 1,770 전고(mm) 1,405 축거(mm) 2,700 윤거(전, mm) 1,515 윤거(후, mm) 1,505 승차 정원 5명 변속기 수동 5단자동 4단 구동 형식 전륜 구동 엔진 형식 G4CM G4CN G4CP G4CP 연료 가솔린 배기량(cc) 1,796 1,836 1,997 1,997 최고 출력(ps/rpm) 110/5,500 135/6,000 115/5,000 146/6,000 최대 토크(kg*m/rpm) 16.5/4,500 17.5/4,500 18.1/4,500 19.2/4,000 연료 탱크 용량(ℓ) 65 요소수 탱크 용량(ℓ) 공차 중량(kg) 1,236(수동 5단)/1,280(자동 4단) 1,265(수동 5단)/1,305(자동 4단) 1,246(수동 5단)/1,285(자동 4단) 1,275(수동 5단)/1,310(자동 4단) 연비(km/ℓ) 13.2(수동 5단)/11.4(자동 4단) 12.8(수동 5단)/11.5(자동 4단) 12.0(수동 5단)/10.9(자동 4단) 12.6(수동 5단)/10.3(자동 4단) 현대 쏘나타 Ⅲ 정측면 현대 쏘나타 Ⅲ 후측면 1996년 2월 6일에 출시되었다. 쏘나타 Ⅱ의 페이스 리프트 차종으로, 역대 쏘나타 중에서 TCS가 최초로 적용되었다. 쏘나타 Ⅲ의 경우 출시 되고 나서 한동안 헤드 램프 디자인에 대한 논란이 많았다. 미쓰비시자동차공업에서 공급 받는 4단 자동변속기(KM175-5)는 3세대 쏘나타까지 장착되었다. 쏘나타 Ⅲ가 출시되어 판매 중이던 1996년에 쏘나타의 누적 판매량이 대한민국에서만 100만 대를 돌파하였고, 같은 해 8월에 개최된 모스크바 모터쇼에서는 최우수 자동차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현대자동차 아산 공장이 1996년에 완공되어 같은 해 11월 11일부터는 아산 공장에서 생산하기 시작하였다. 1997년 4월 9일에는 투톤 외장 색상과 베이지 내장 색상, 현대그룹 창립 50주년 기념 스페셜 에디션 트림의 추가, 가로 방향의 라디에이터 그릴 등의 변화를 갖춘 1998년형이 출시되었다. 한때 S자 엠블럼을 갖고 있으면 명문대(서울대학교)에 갈 수 있고, Ⅲ자를 갖고 있으면 수능 점수 300점을 받을 수 있다는 루머 때문에 당시 수험생들이 몰래 쏘나타 Ⅲ의 엠블럼을 떼는 오나타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래서 엠블럼에서 S자와 Ⅲ자가 떨어진 쏘나타 Ⅲ가 많았고, 이 때문에 현대자동차는 엠블럼 무상 교체 서비스를 시행하기도 하였다. 자가용은 1998년 7월에 단종되었으나, 영업용은 2000년 12월에 단종되었다. 현재 쏘나타 III는 노후화로 인해 보기 힘든 차량이다. 쏘나타 3는 랜서 에볼루션 4기 달마다 구분 1.8ℓ LPG(택시) 2.0ℓ LPG(택시) 1.8ℓ 가솔린 2.0ℓ 가솔린 쏘나타 Ⅲ TX TXTX DLXTXL모범 GL DLXDOHC스페셜 에디션 GLSDOHC스페셜 에디션골드 구분 1.8ℓ 시리우스 SOHC 1.8ℓ 시리우스 DOHC 2.0ℓ 시리우스 SOHC 2.0ℓ 시리우스 DOHC 전장(mm) 4,700 전폭(mm) 1,770 전고(mm) 1,405 축거(mm) 2,700 윤거(전, mm) 1,515 윤거(후, mm) 1,505 승차 정원 5명 변속기 수동 5단자동 4단 구동 형식 전륜 구동 엔진 형식 G4CM G4CN G4CP G4CP 연료 가솔린 배기량(cc) 1,796 1,836 1,997 1,997 최고 출력(ps/rpm) 110/5,500(이후 103/5,500으로 변경) 135/6,000(이후 128/6,000으로 변경) 115/5,000(이후 109/5,000으로 변경) 146/6,000(이후 139/6,000으로 변경) 최대 토크(kg*m/rpm) 16.5/4,500(이후 15.1/4,500으로 변경) 17.5/4,500(이후 16.3/4,500으로 변경) 18.1/4,500(이후 17.0/4,500으로 변경) 19.2/4,000(이후 18.1/4,500으로 변경) 연료 탱크 용량(ℓ) 65 요소수 탱크 용량(ℓ) 공차 중량(kg) 1,236(수동 5단)/1,280(자동 4단) 1,265(수동 5단)/1,305(자동 4단) 1,246(수동 5단)/1,285(자동 4단) 1,275(수동 5단)/1,310(자동 4단) 연비(km/ℓ) 13.2(수동 5단)/11.4(자동 4단) 12.8(수동 5단)/11.5(자동 4단) 12.0(수동 5단)/10.9(자동 4단) 12.6(수동 5단)/10.3(자동 4단) 현대 EF 쏘나타(전기형) 정측면 현대 EF 쏘나타(전기형) 후측면 1998년 3월 17일에 출시되었다. 서브 네임인 EF는 단지 프로젝트명이었으나, 마케팅 차원에서 Elegant Feeling(우아한 느낌)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기도 하였다. 파격적인 유선형 디자인이 눈길을 끌었고, 뒷 번호판의 위치가 역대 쏘나타 중에서 처음으로 테일 게이트가 아닌 범퍼에 있었다. CD 체인저 오디오 외에 AV 시스템, 전동 접이식 사이드 미러, 운전석 파워 시트, 시트 내장형 유아 안전 시트, 앞좌석 사이드 에어백, 진주색 외장 색상 등 최신 편의 사양이 적용되었다. 1.8ℓ 시리우스 Ⅱ 가솔린 엔진과 2.0ℓ 시리우스 Ⅱ 가솔린 엔진은 미쓰비시자동차공업제 그대로였으나, 엔진의 위치를 바꿔 무게 균형과 동력 성능을 개선시켰다. 이 외에 새로 장착된 V6 2.5ℓ 델타 가솔린 엔진은 현대자동차가 자체 개발하였다. 여기에 현대자동차만의 독자적인 트랜스미션인 HIVEC(Hyundai Intelligent Vehicle Electronic Control) 4단 자동변속기(1.8ℓ 시리우스 Ⅱ 가솔린 엔진과 2.0ℓ 시리우스 Ⅱ 가솔린 엔진은 F4A42-1, V6 2.5ℓ 델타 가솔린 엔진은 F4A42-2)도 적용되었는데, TCU(Transmission Control Unit) 칩도 함께 적용되었다. 프론트 서스펜션은 더블 위시본 식 서스펜션이 적용되어 승차감을 향상시켰다. 출시 초기에는 IMF 구제금융 요청으로 인한 경제 여파 때문에 판매 대수가 많지 않았으나, 훗날 인기를 되찾아 베스트 셀링 카의 명성을 이어갔다. 2000년 9월 25일부터 무단변속기가 추가되었다. 이와 동시에 옵티마와 같은 대시보드를 적용한 2001년형이 선보였으나, 4개월 만에 단종되어 개체 수는 흔치 않다. 현재 EF 쏘나타는 시판된지 20년 가까이 된 요즘 보기 힘들다. hyundai ef sonata 01.jpg|현대 EF 쏘나타(후기형) 정측면 hyundai ef sonata 02.jpg|현대 EF 쏘나타(후기형) 후측면 구분 2.0ℓ LPG(택시) 1.8ℓ 가솔린 2.0ℓ 가솔린 V6 2.5ℓ 가솔린 EF 쏘나타 DLXTXL모범 DOHCDLX GVDLX(이후 GVS로 변경)GVS 월드컵골드골드 월드컵 골드 현대자동차가 월드컵 공식 스폰서로 선정된 것을 기념하여 2000년에 기념 트림을 만들었다. 2.0ℓ GVS, 2.0ℓ 골드 트림에 월드컵 엠블럼과 새로운 디자인의 라디에이터 그릴, 가죽 시트 등이 적용되었다. 기존 EF 쏘나타에 CVT(무단변속기)가 적용되었다. 당시 판매 중이던 기아 옵티마의 센터페시아, 전용 알루미늄 휠이 적용되었다. 판매량이 적었고, 3개월 후에 부분변경을 거쳤기 때문에 보기 드물다. 구분 1.8ℓ 시리우스 Ⅱ 2.0ℓ 시리우스 Ⅱ 2.5ℓ V6 델타 전장(mm) 4,710 전폭(mm) 1,815 전고(mm) 1,410 축거(mm) 2,700 윤거(전, mm) 1,540 윤거(후, mm) 1,520 승차 정원 5명 변속기 수동 5단자동 4단 수동 5단자동 4단CVT 수동 5단자동 4단 구동 형식 전륜 구동 엔진 형식 G4JN G4JP G6BV 연료 가솔린 배기량(cc) 1,836 1,997 2,493 최고 출력(ps/rpm) 133/6,000 147/6,000 175/6,000 최대 토크(kg*m/rpm) 17.2/4,500 19.4/4,500 23.4/4,000 연료 탱크 용량(ℓ) 65 요소수 탱크 용량(ℓ) 공차 중량(kg) 1,315(수동 5단)/1,330(자동 4단) 1,325(수동 5단)/1,340(자동 4단)/1,395(CVT) 1,330(수동 5단)/1,350(자동 4단) 연비(km/ℓ) 13.7(수동 5단)/12.0(자동 4단) 14.1(수동 5단)/12.3(자동 4단)/13.9(CVT) 11.0(수동 5단)/10.6(자동 4단) 현대 뉴 EF 쏘나타(전기형) 정측면 현대 뉴 EF 쏘나타(전기형) 후측면 2001년 1월 9일에 출시되었다. 페이스 리프트를 거쳐 전장을 35mm 늘렸고, 윈도 바깥 부분에 크롬 몰딩을 둘러 고급스러운 느낌이 가미되었다. 운전석 에어백과 ABS가 모든 트림에 기본 적용되었다. 전동식 테일 게이트 및 연료 주입구 열림 장치가 적용되어 버튼의 위치가 운전석 시트 밑에서 도어 트림으로 옮겨졌다. 1.8ℓ 시리우스 Ⅱ 가솔린 엔진은 1.8ℓ 베타 가솔린 엔진으로 대체되었다. 미쓰비시자동차공업제 기반의 2.0ℓ 시리우스 Ⅱ 가솔린 엔진도 4세대 쏘나타까지 장착되었다. 2.0ℓ 시리우스 LPG 엔진은 같은 해 6월 21일에 2.0ℓ 베타 LPG 엔진으로 대체 되었다. 2002년 9월 2일에는 리어 스포일러와 새로운 형상의 알루미늄 휠 등이 적용된 2003년형이 출시되었다. 이 외에도 라디에이터 그릴이 세로 방향에서 가로 방향으로 바뀌고, 후드 엠블럼이 적용되어 고급화를 꾀하였다. 또한 조수석 에어백이 자가용에 한하여 모든 트림에 기본 적용되어 안전성을 높였다. 같은 해 12월 23일에는 중국 베이징 시의 공장에서 현지 생산되었다. 2003년 3월 6일에는 쏘나타의 누적 생산량이 250만 대를 돌파한 것을 기념하기 위한 엘레강스 스페셜 트림이 라인업에 추가되었다. 엘레강스 스페셜 트림은 앞좌석 사이드 에어백이 기본 적용되었고, 내장 색상으로는 퀸즈 베이지가 적용되는 등 여성 고객을 타겟으로 하였다. 자가용은 2004년 8월에 단종되었지만, 영업용은 꾸준히 이어져 2006년 3월까지 생산되었다. 중국에서는 2009년 8월 10일에 현지 취향에 맞게 페이스 리프트를 거쳐 현재까지 생산 중이다. 뉴 EF 쏘나타는 노후화 등으로 인해 보기 조금씩 힘들어지고 있다. hyundai new ef sonata taxi 01.jpg|현대 뉴 EF 쏘나타 택시(후기형) 정측면 hyundai new ef sonata taxi 02.jpg|현대 뉴 EF 쏘나타 택시(후기형) 후측면 Moinca China 2013-03-04.jpg|현대 모인카 밍위(중국 현지 차종) 정측면 구분 2.0ℓ LPG(장애인용) 2.0ℓ LPG(렌터카) 2.0ℓ LPG(택시) 1.8ℓ 가솔린 2.0ℓ 가솔린 V6 2.5ℓ 가솔린 뉴 EF 쏘나타 GV GXGXLTXLVXL GXGXLTXL(개인형)VXL(모범형) DOHCDLX GVGVSGVS 월드컵엘레강스 스페셜골드골드 월드컵 골드 EF 쏘나타에 이어 뉴 EF 쏘나타에도 월드컵 트림이 추가되었으며, 월드컵 마크가 새겨진 알루미늄 휠과 블랙 가죽 시트 등이 적용되었다. 구분 1.8ℓ 베타 2.0ℓ 시리우스 Ⅱ 2.5ℓ V6 델타 전장(mm) 4,745 전폭(mm) 1,820 전고(mm) 1,420 축거(mm) 2,700 윤거(전, mm) 1,540 윤거(후, mm) 1,530 승차 정원 5명 변속기 수동 5단자동 4단 수동 5단자동 4단CVT 자동 4단 구동 형식 전륜 구동 엔진 형식 G4GB G4JP G6BV 연료 가솔린 배기량(cc) 1,795 1,997 2,493 최고 출력(ps/rpm) 131/6,000 133/6,000(이후 138/6,000, 137/6,000으로 변경) 170/6,000 최대 토크(kg*m/rpm) 16.5/4,500(이후 16.7/4,500으로 변경) 18.1/4,500(이후 18.4/4,500으로 변경) 23.0/4,000 연료 탱크 용량(ℓ) 65 요소수 탱크 용량(ℓ) 공차 중량(kg) 1,416(수동 5단)/1,429(자동 4단)(이후 1,427(수동 5단)/1,445(자동 4단)으로 변경) 1,325(수동 5단)/1,340(자동 4단)/1,402(CVT)(이후 1,445(수동 5단)/1,458(자동 4단)/1,470(CVT)으로 변경) 1,350(자동 4단)(이후 1,487(자동 4단)으로 변경) 연비(km/ℓ) 14.0(수동 5단)/12.3(자동 4단)(이후 11.8(수동 5단)/10.0(자동 4단)으로 변경) 14.1(수동 5단)/12.3(자동 4단)/13.9(CVT)(이후 11.1(수동 5단)/9.4(자동 4단)/10.1(CVT)으로 변경) 10.6(자동 4단)(이후 8.5(자동 4단)으로 변경) 현대 쏘나타 정측면 현대 쏘나타 후측면 2004년 9월 1일에 출시되었다. 프로젝트명인 NF는 마케팅 차원에서 Neverending Fame/Faith(영원 불멸의 명성)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기도 하였으나, 서브 네임 없이 원래의 본 차명인 쏘나타로 출시되었다. 하지만 다른 세대의 쏘나타와 혼동할 수 있어 NF 쏘나타로 불리기도 한다. 토요타 캠리, 닛산 알티마, 혼다 어코드와의 본격적인 경쟁을 위하여 개발되었으며, 품질과 성능 등 여러 면에서 크게 발전하였다. 당시 대한민국에 공식 수입된지 얼마 되지 않은 혼다 어코드(7세대 북아메리카 사양)와 테일 램프가 비슷하여 논란이 되기도 하였다. 새롭게 장착된 2.0ℓ 세타 가솔린 엔진, 2.0ℓ 세타 LPI 엔진, 2.4ℓ 세타 가솔린 엔진은 현대자동차가 독자 개발한 것이다. 앞좌석 사이드 에어백을 비롯하여 역대 쏘나타 중에서 최초로 커튼 에어백과 차량 자세 제어 장치가 적용되어 안전성을 높였다. MP3를 직접 재생시킬 수 있는 오디오가 장착되었다. 미국에 앨라배마 공장이 준공됨에 따라 2005년 5월부터 현지에서 생산되었다. 같은 해 6월 1일에는 V6 3.3ℓ 람다 가솔린 엔진이 추가되었으나, 대한민국 시장 특성상 판매 대수는 미미하였다. 9월에는 일본에도 판매가 시작되었고, 광고 모델로는 배용준이 발탁되었다. 또한 일본에서 산업 디자인 진흥회로부터 수입 승용차 부문 굿 디자인상을 받았다. 2006년 1월 5일에는 2.0ℓ D 디젤 엔진이 적용되어 역대 쏘나타 중에서 최초로 디젤 엔진의 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마케팅 실패로 판매 대수는 신통치 않았다. 같은 해 8월 7일에 선보인 2007년형은 라디에이터 그릴의 형상이 가로 한 줄에서 두 줄로 바뀌고, 헤드 램프는 블랙 베젤에서 실버 베젤로 바뀌었다. 2007년 5월 10일에는 F24S 트림에만 적용되던 블랙 내장 색상, 레드 스티치 적용 가죽시트, 스마트 키, 17인치 알루미늄 휠 등 고객 선호 사양이 적용된 N20 블랙 프리미엄 트림이 추가되었다. 동시에 차량 내부의 컴퓨터가 차량의 속도와 스티어링 휠 조향 각도를 판단하여 급선회 시의 위험 발생을 방지해주는 주행 안전성 제어 시스템이 일부 트림에 옵션으로 적용되었다. NF 쏘나타와 쏘나타 트랜스폼은 현재 도로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차량이다. 구분 2.0ℓ LPG(장애인용) 2.0ℓ LPG(렌터카) 2.0ℓ LPG(택시) 2.0ℓ 디젤 2.0ℓ 가솔린 2.4ℓ 가솔린 V6 3.3ℓ 가솔린 쏘나타 N20 기본형N20 고급형N20 최고급형 N20 개인형(이후 N20 밸류, N20 디럭스로 나뉨)N20 모범형(이후 N20 럭셔리로 변경) N20 일반형N20 개인형N20 모범형 N20 디럭스N20 럭셔리N20 엘레강스 스페셜 N20 기본형N20 디럭스N20 럭셔리N20 엘레강스 스페셜N20 블랙 프리미엄N20 프리미어 F24 럭셔리F24 엘레강스 스페셜F24 프리미어F24S 럭셔리F24S 프리미어 V33 프리미어 2.4ℓ 세타 가솔린 엔진이 장착된 F24 트림과 별도의 새로운 스포티 트림인 F24S 트림이 추가되었다. 블랙 색상의 내장과 가죽 시트의 레드 스티치가 특징이었다. F24 트림과 더불어 F24S 트림은 N20 트림에는 없는 듀얼 머플러가 적용되었다. 북아메리카 시장에서 판매되던 사양에 달리던 V6 3.3ℓ 람다 가솔린 엔진이 장착되었다. 라디에이터 그릴을 외장 색상과 동일하게 하여 기존 트림과 차별화하였다. 판매 대수가 적어 대한민국에서는 쏘나타 트랜스폼부터 라인업에서 제외되었다. 구분 2.0ℓ 세타 MPI 2.0ℓ D VGT 2.4ℓ 세타 MPI 3.3ℓ V6 람다 MPI 전장(mm) 4,800 전폭(mm) 1,830 전고(mm) 1,475 축거(mm) 2,730 윤거(전, mm) 1,575(R15)1,565(R16, R17) 1,565(R16) 1,565(R16, R17) 1,565(R17) 윤거(후, mm) 1,560(R15)1,550(R16, R17) 1,550(R16) 1,550(R16, R17) 1,550(R17) 승차 정원 5명 변속기 수동 5단자동 4단 수동 6단자동 4단 자동 4단(이후 자동 5단으로 변경) 자동 5단 구동 형식 전륜 구동 엔진 형식 G4KA D4EA G4KC G6DB 연료 가솔린 디젤 가솔린 배기량(cc) 1,998 1,991 2,359 3,342 최고 출력(ps/rpm) 144/6,000 143/4,000(이후 146/4,000으로 변경) 166/5,800(이후 164/5,800으로 변경) 233/6,000 최대 토크(kg*m/rpm) 19.1/4,250(이후 19.2/4,250으로 변경) 32.0/1,800~2,500(이후 32.0/2,000으로 변경) 23.0/4,250(이후 22.7/4,250으로 변경) 31.0/3,500 연료 탱크 용량(ℓ) 70 62 70 요소수 탱크 용량(ℓ) 공차 중량(kg) 1,443(수동 5단)/1,450(자동 4단)(이후 1,460(수동 5단)/1,465(자동 4단)으로 변경) 1,581(수동 6단)/1,601(자동 4단) 1,496(자동 4단)(이후 1,515(자동 5단)으로 변경) 1,612(자동 5단) 연비(km/ℓ) 12.1(수동 5단)/10.7(자동 4단)(이후 12.3(수동 5단)/10.8(자동 4단)으로 변경) 17.1(수동 6단)/13.4(자동 4단) 10.9(자동 4단)(이후 11.1(자동 5단)으로 변경) 9.2(자동 5단) 현대 쏘나타 트랜스폼 정측면 현대 쏘나타 트랜스폼 후측면 2007년 11월 6일에 출시되었다. 페이스 리프트를 거쳐 헤드 램프가 13mm 두꺼워졌고, 인테리어가 크게 개선돼 호평을 받아 미국의 자동차 전문지인 워즈 오토 월드가 뽑은 올해의 인테리어 베스트 리디자인 차종으로 선정되었다. 2008년 10월 1일부터는 블루투스 핸즈프리, USB&i-Pod 단자, 사이드 리피터 내장 아웃사이드 미러, 버튼 시동 스마트 키 등이 적용된 2009년형이 선보였다. 2009년 4월 1일에는 소비자 선호도가 높은 4단 자동변속기, 블랙 내장 색상 및 가죽 시트, 버튼 시동 장치 및 스마트 키가 적용된 N20 스마트 블랙 팩 트림이 추가되었다. 자가용은 2009년 9월에 단종되었으나, 영업용은 꾸준한 수요가 이어져 2013년 11월까지 생산되었다. 중국에서는 2008년 12월에 현지 취향에 맞게 페이스 리프트를 거쳤으나, 2011년에 단종되었다. Sonata NFC China 2012-07-29.JPG|현대 쏘나타 링샹(중국 현지 차종) 정측면 구분 2.0ℓ LPG(장애인용) 2.0ℓ LPG(렌터카) 2.0ℓ LPG(택시) 2.0ℓ 디젤 2.0ℓ 가솔린 2.4ℓ 가솔린 쏘나타 트랜스폼 N20 디럭스N20 럭셔리 N20 일반형N20 고급형N20 디럭스N20 럭셔리N20 프리미어 N20 GTXN20 GTX 개인형 팩N20 VTXN20 LTXN20 STX N20 럭셔리N20 트랜스폼N20 엘레강스 스페셜 N20 디럭스N20 럭셔리N20 트랜스폼N20 스마트 블랙 팩N20 엘레강스 스페셜N20 프리미어 블랙 F24 엘레강스 스페셜F24S 프리미어 블랙 구분 2.0ℓ 세타 Ⅱ MPI 2.0ℓ D VGT 2.4ℓ 세타 Ⅱ MPI 전장(mm) 4,800 전폭(mm) 1,830 전고(mm) 1,475 축거(mm) 2,730 윤거(전, mm) 1,575(R15)1,565(R16, R17) 1,565(R16) 1,565(R16, R17) 윤거(후, mm) 1,560(R15)1,550(R16, R17) 1,550(R16) 1,550(R16, R17) 승차 정원 5명 변속기 수동 5단자동 4단 수동 6단자동 4단 자동 5단 구동 형식 전륜 구동 엔진 형식 G4KD D4EA G4KE 연료 가솔린 디젤 가솔린 배기량(cc) 1,998 1,991 2,359 최고 출력(ps/rpm) 163/6,200 151/3,800 179/6,000 최대 토크(kg*m/rpm) 20.1/4,500 32.0/2,000 23.5/4,000 연료 탱크 용량(ℓ) 70 요소수 탱크 용량(ℓ) 공차 중량(kg) 1,465(수동 5단)/1,470(자동 4단) 1,581(수동 6단)/1,601(자동 4단) 1,515(자동 5단) 연비(km/ℓ) 12.8(수동 5단)/11.5(자동 4단) 17.1(수동 6단)/13.4(자동 4단) 11.5(자동 5단) Co2 배출량(g/km) 183(수동 5단)/204(자동 4단) 152(수동 6단)/194(자동 4단) 204(자동 5단) 현대 쏘나타(전기형) 정측면 현대 쏘나타(전기형) 후측면 2009년 9월 17일에 출시되었다. 현대자동차와 기아자동차 미국 디자인 센터의 안드레 허드슨 선임 디자이너가 주도하였으며, 현대자동차의 디자인 철학인 플루이딕 스컬프처가 적용되어 과감함과 스포티함이 느껴지는 디자인으로 완성되었다. 본넷까지 이어지는 크롬 벨트 라인 등 독특한 디자인 요소가 돋보였다. 3 피스 타입 파노라마 선루프, 가솔린 직접 분사 방식 엔진, 후석 에어 벤트, 풋 파킹 브레이크 등이 적용되었고, 자가용 모든 트림에는 차체 자세 제어 장치가 기본 적용되었다. 2010년 1월 18일에 2.4ℓ 세타 Ⅱ 가솔린 직분사 엔진이 추가되었고, 같은 해 4월 1일부터 자가용 모든 트림에 앞좌석 사이드 에어백과 커튼 에어백이 기본 적용되었다. 이어 6월 15일에는 NVH와 연비가 개선되고, 통풍 시트와 컴포트 헤드 레스트 등이 적용된 2011년형이 출시되었다. 또한 전 세계 누적 판매량이 500만 대를 돌파하였다. 2011년 5월에는 동일본 대지진 여파로 인하여 토요타와 혼다의 생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는 등의 이유로 미국 중형차 시장에서 월간 판매 1위를 차지하였다. 같은 해 7월 11일에는 2.0ℓ 세타 Ⅱ 가솔린 직분사 터보 엔진이 추가되어 기존의 2.4ℓ 세타 Ⅱ 가솔린 직분사 엔진을 대체하였다. 이어 7월 13일에는 2.0ℓ 세타 Ⅱ LPI 엔진을 대체하는 2.0ℓ 누우 LPI 엔진, 글로브 박스 쿨링 기능, 사이드 미러 퍼들 램프, 자외선 차단 전면 유리, 천연 항균 시트, 크롬을 줄여 간결해진 라디에이터 그릴 및 부츠 타입의 변속기 레버 등이 적용된 2012년형이 출시되었다. 미국 앨라배마주 현지 공장에서 쏘나타의 누적 생산량이 100만 대를 돌파한 것도 이 시기였다. 오랫동안 쭉 효자 차종으로 기록되었던 쏘나타이나, 6세대 쏘나타는 과한 크롬이 적용된 라디에이터 그릴에 호불호가 뚜렷히 나뉘었고, 같은 플랫폼을 사용하는 기아 K5의 높은 판매량로 인하여 2011년에 대한민국 전 차종 연간 판매 4위로 추락하였다. 2012년 2월 6일에는 2.0ℓ 누우 가솔린 엔진이 기존의 2.0ℓ 세타 Ⅱ 가솔린 엔진을 대체함과 동시에 ISG 시스템이 적용된 블루 세이버 트림이 추가되었다. hyundai sonata taxi 1.jpg|현대 쏘나타 택시(후기형) 정측면 hyundai sonata taxi 2.jpg|현대 쏘나타 택시(후기형) 후측면 구분 2.0ℓ LPG(장애인용) 2.0ℓ LPG(렌터카) 2.0ℓ LPG(택시) 2.0ℓ 가솔린 2.0ℓ 가솔린 터보 2.4ℓ 가솔린 쏘나타 Y20 럭셔리Y20 프리미어 Y20 디럭스Y20 럭셔리Y20 프리미어Y20 탑 Y20 DTXY20 LTXY20 PTX Y20 그랜드(이후 CVVL 그랜드로 변경)CVVL 블루 세이버Y20 프라임 고급형(이후 Y20 프라임으로 변경 → CVVL 프라임으로 변경)Y20 프라임 최고급형(이후 Y20 프라임 블랙으로 변경 → Y20 럭셔리로 대체 → CVVL 럭셔리로 변경)Y20 프리미어 고급형/최고급형(이후 Y20 프리미어로 통합 → Y20 월드컵 스페셜 에디션으로 변경 → Y20 프리미어로 변경 → CVVL 프리미어로 변경)Y20 프리미어 베이지Y20 탑 고급형/최고급형(이후 Y20 탑으로 통합 → CVVL 탑으로 변경)Y20 탑 와인 스페셜Y20 스포츠(이후 Y20 로얄로 대체 → CVVL 로얄로 변경) F20 터보 고급형/최고급형(이후 터보 고급형/최고급형으로 변경) F24 GDI 고급형/최고급형 구분 2.0ℓ 세타 Ⅱ MPI 2.0ℓ 누우 MPI 2.0ℓ 세타 Ⅱ GDI 터보 2.4ℓ 세타 Ⅱ GDI 전장(mm) 4,820 전폭(mm) 1,835 전고(mm) 1,470 축거(mm) 2,795 윤거(전, mm) 1,597(R16)1,591(R17)1,587(R18) 1,591(R17)1,587(R18) 윤거(후, mm) 1,597(R16)1,591(R17)1,587(R18) 1,591(R17)1,587(R18) 승차 정원 5명 변속기 수동 6단자동 6단 자동 6단 구동 형식 전륜 구동 엔진 형식 G4KD G4ND G4KH G4KJ 연료 가솔린 배기량(cc) 1,998 1,999 1,998 2,359 최고 출력(ps/rpm) 165/6,200 172/6,700 271/6,000 201/6,300 최대 토크(kg*m/rpm) 20.2/4,600 20.5/4.800 37.2/1,750~4,500 25.5/4,250 연료 탱크 용량(ℓ) 70 요소수 탱크 용량(ℓ) 공차 중량(kg) 1,395(수동 6단)/1,410(자동 6단)(이후 1,400(수동 6단)/1,415(자동 6단)으로 변경) 1,400(수동 6단)/1,415(자동 6단)/1,415(자동 6단 ISG 장착시) 1,520(자동 6단) 1,465(자동 6단) 연비(km/ℓ) 13.6(수동 6단)/12.8(자동 6단)(이후 13.8(수동 6단)/13.0(자동 6단)으로 변경) 14.7(수동 6단)/14.0(자동 6단)/14.8(자동 6단 ISG 장착시) 12.8(자동 6단) 13.0(자동 6단) Co2 배출량(g/km) 172(수동 6단)/182(자동 6단)(이후 170(수동 6단)/180(자동 6단)으로 변경) 159(수동 6단)/167(자동 6단)/159(자동 6단 ISG 장착시) 183(자동 6단) 180(자동 6단) === 쏘나타 더 브릴리언트(2012년 7월~2014년 3월) === 현대 쏘나타 더 브릴리언트 정측면 현대 쏘나타 더 브릴리언트 후측면 2012년 7월 5일에는 2013년형이 출시되며, 더 브릴리언트라는 서브 네임이 더해졌다. 페이스 리프트가 아닌 이어 모델이지만, 새로운 형상의 라디에이터 그릴과 LED 포지셔닝 램프가 적용되어 고급화를 꾀하였다. 이 외에도 급제동 경보 시스템, 오토 크루즈 컨트롤, 전방 주차 보조 시스템, 열선 스티어링 휠, 뒷좌석 센터 3점식 시트 벨트, 현대자동차의 텔레매틱스 서비스인 블루 링크 등이 적용되어 상품성을 높였다. 2013년 6월 9일에는 어트랙션 트림이 추가되고, 2.0ℓ 세타 Ⅱ 가솔린 터보 엔진에 가격을 낮춘 스마트 트림이 추가되는 등의 변화가 생긴 2014년형이 선보였다. 자가용은 2014년 3월에 단종되었으나, 영업용은 2016년 1월에 단종되었다. 구분 2.0ℓ LPG(장애인용) 2.0ℓ LPG(렌터카) 2.0ℓ LPG(택시) 2.0ℓ 가솔린 2.0ℓ 가솔린 터보 쏘나타 더 브릴리언트 LPI 스마트LPI 모던 LPI 스타일LPI 스마트LPI 모던LPI 프리미엄LPI 프리미엄 스페셜 LPI 스타일LPI 모던LPI 프리미엄 CVVL 스타일CVVL 블루 세이버CVVL 스마트CVVL 어트랙션CVVL 모던CVVL 프리미엄 터보 스마트터보 모던터보 프리미엄 구분 2.0ℓ 누우 MPI 2.0ℓ 세타 Ⅱ GDI 터보 전장(mm) 4,820 전폭(mm) 1,835 전고(mm) 1,470 축거(mm) 2,795 윤거(전, mm) 1,597(R16)1,591(R17)1,587(R18) 1,591(R17)1,587(R18) 윤거(후, mm) 1,597(R16)1,591(R17)1,587(R18) 1,591(R17)1,587(R18) 승차 정원 5명 변속기 수동 6단자동 6단 자동 6단 구동 형식 전륜 구동 엔진 형식 G4ND G4KH 연료 가솔린 배기량(cc) 1,999 1,998 최고 출력(ps/rpm) 172/6,700 271/6,000 최대 토크(kg*m/rpm) 20.5/4.800 37.2/1,750~4,500 연료 탱크 용량(ℓ) 70 요소수 탱크 용량(ℓ) 공차 중량(kg) 1,400(수동 6단)/1,415(자동 6단)/1,415(자동 6단 ISG 장착시) 1,520(자동 6단) 연비(km/ℓ) 14.7(수동 6단)/14.0(자동 6단)/14.8(자동 6단 ISG 장착시)(이후 도심 10.9/고속 14.5/복합 12.3(수동 6단)/도심 10.2/고속 15.1/복합 11.9(자동 6단)/도심 10.5/고속 15.0/복합 12.1(자동 6단 ISG 장착시)로 변경) 12.8(자동 6단)(이후 도심 8.8/고속 13.0/복합 10.3(자동 6단)으로 변경) Co2 배출량(g/km) 159(수동 6단)/167(자동 6단)/159(자동 6단 ISG 장착시)(이후 142(수동 6단)/147(자동 6단)/144(자동 6단 ISG 장착시)로 변경) 183(자동 6단)(이후 171(자동 6단)로 변경) === 쏘나타 하이브리드(2011년 5월~2014년 12월) === 현대 쏘나타 하이브리드(전기형) 정측면 현대 쏘나타 하이브리드(전기형) 후측면 2011년 5월 2일에 출시되었다. 2009년 7월에 출시된 아반떼 LPi 하이브리드는 대한민국에서만 판매되는 LPG 하이브리드 차량이기에 쏘나타 하이브리드는 대한민국산 최초의 가솔린 하이브리드 차량이며, 최초로 수출되는 하이브리드 차량이다. 2010년 4월에 개최된 뉴욕 국제 오토쇼에서 세계 최초로 공개되었고, 대한민국에서는 2011년 4월에 개최된 서울 모터쇼에서 처음 공개되었다. 에어 스커트 및 에어댐, 헥사고날 타입의 라디에이터 그릴, 세계 최초로 리플렉션 발광 기술이 적용된 LED 테일 램프 등을 적용되어 기존 쏘나타와 디자인이 차별화되었다. 전기차 모드 주행 시에 엔진 소리가 들리지 않아 보행자가 차량의 접근을 인지하지 못하는 상황에 대비해 가상 엔진 사운드 시스템을 적용하여 보행자 안전성을 향상시켰다. 대한민국에서 팔리는 쏘나타 하이브리드는 2.0ℓ 누우 가솔린 엔진이 장착되었다. 미국과 캐나다에서 팔리는 쏘나타 하이브리드는 2.4ℓ 세타 Ⅱ 가솔린 엔진이 장착되었으며, 대한민국에서 5세대 그랜저 하이브리드(HG)와 기아 K7 하이브리드 700h에 장착된다. 2012년 2월 1일부터 가격을 낮추어 부담을 줄인 스마트 트림이 추가됨과 동시에 광고 모델로 원빈, 이적, 이정아가 선정되었다. 2013년 1월 30일에는 8인치 내비게이션(블루 링크)과 뒷좌석 센터 3점식 시트 벨트 적용, 40ℓ 늘어난 총 344ℓ의 트렁크 공간 확보, 아웃 사이드 미러 사이즈 확대, 레밍턴 레드 외장 색상 추가 등의 변화를 갖춘 2013년형이 선보였다. 같은 해 12월 4일에는 신규 LED 테일 램프, 퍼들 램프 내장 아웃사이드 미러, LED 독서등 및 룸 램프가 신규 적용된 2014년형이 선보였다. Hyundai Sonata Hybrid 1.jpg|현대 쏘나타 하이브리드(후기형) 정측면 Hyundai Sonata Hybrid 2.jpg|현대 쏘나타 하이브리드(후기형) 후측면 구분 2.0ℓ 가솔린+전기 쏘나타 하이브리드 스마트프리미어(이후 모던으로 변경)로얄(이후 프리미엄으로 변경) 구분 2.0ℓ 누우 MPI 전장(mm) 4,820 전폭(mm) 1,835 전고(mm) 1,470 축거(mm) 2,795 윤거(전, mm) 1,591(R17) 윤거(후, mm) 1,591(R17) 승차 정원 5명 변속기 자동 6단 구동 형식 전륜 구동 엔진 형식 G4NE 연료 가솔린+전기 배기량(cc) 1,999 최고 출력(ps/rpm) 150/6,000 최대 토크(kg*m/rpm) 18.3/5,000 모터 최고 출력(kw/rpm) 30(이후 35로 변경) 모터 최대 토크(nm/rpm) 205 연료 탱크 용량(ℓ) 65 요소수 탱크 용량(ℓ) 공차 중량(kg) 1,560(자동 6단) 연비(km/ℓ) 21.0(자동 6단)(이후 도심 16.3/고속 17.5/복합 16.8(자동 6단)로 변경) Co2 배출량(g/km) 111(자동 6단)(이후 100(자동 6단)로 변경) 현대 쏘나타 정측면 현대 쏘나타 후측면 2014년 3월 24일에 출시되었다. 출시에 앞서 미디어 사전 설명회를 가졌고, 렌더링이 공개되었다. 2세대 제네시스(DH)에 이어 현대자동차의 디자인 철학인 플루이딕 스컬프처 2.0이 두 번째로 반영된 디자인은 한층 절제된 선과 조형을 지녔고, 여기에 7세대를 거치는 동안 축척된 완성도와 자신감을 뜻하는 이너 포스로 명명된 디자인 미학을 더하였다. 당초 복합 연비가 12.6km/ℓ(2.0ℓ 누우 가솔린 엔진, 6단 자동변속기 기준)로 알려졌으나, 정부 인증 절차를 거쳐 12.1km/ℓ로 하향 조정되었다. 실내 공간은 안전성, 직관성, 간결성 등 3대 원칙 기반의 인체 공학적 설계를 통해 운전자가 각종 기능을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구현하였다. 초고장력 강판 비율을 51%로, 차체 구조용 접착제를 119m로 확대하여 안전성과 차체 강성을 향상시켰다. 아울러 운전석 무릎 에어백과 타이어 공기압 경보 장치가 기본으로 적용되었다. 차간 거리 자동 조절과 자동 정지 및 재출발 기능을 지원하는 어드밴스드 스마트 크루즈 컨트롤과 차량 충돌 예상시 운전자에게 경보해 긴급 상황에서 피해를 최소화시키는 전방 추돌 경보 시스템이 대한민국산 중형차 최초로 적용되었다. 2015년 2월 11일에는 2.4ℓ 세타 Ⅱ 가솔린 직분사 엔진보다 최고 출력은 27%, 최대 토크는 43% 높은 2.0ℓ 세타 Ⅱ 가솔린 직분사 터보 엔진이 추가되었다. 최대 토크 영역은 1350rpm으로 낮추었으며, 복합 연비는 이전보다 5% 향상된 10.8km/ℓ이다. 전용 라디에이터 그릴과 하단 매쉬 타입 범퍼, 리어 스포일러, 듀얼 머플러, D컷 스티어링 휠, 패들 쉬프트 등으로 차별화를 꾀하였다. 같은 해 7월 2일에 선보인 2016년형은 1.6ℓ 감마 가솔린 직분사 터보 엔진과 유로 6 기준을 충족시키는 1.7ℓ U Ⅱ 디젤 엔진이 더해지고, LED 주간 주행등 신규 적용, 서스펜션에 알루미늄 재질 적용, 패키지 옵션 최소화, 편의 사양 개선 등의 변화를 이뤘다. 아울러 2.4ℓ 세타 Ⅱ 가솔린 직분사 엔진은 삭제되었고, 앞좌석 어드밴스드 에어백이 모든 트림에 신규 적용되었다. 같은 해 8월 23일에는 해외 판매용과 내수 판매용의 안전성에 차이가 있다는 편견을 불식시키기 위하여 미국 판매 사양(앨라배마 공장 생산분)과 대한민국 판매 사양(아산 공장 생산분)의 정면 충돌 테스트가 이루어졌다. 2016년 4월 20일에 선보인 2017년형은 영 패밀리 고객이 선호하는 편의 사양이 적용된 케어 플러스 트림이 신설되었고, 1.6ℓ 감마 가솔린 직분사 터보 엔진 장착 사양에는 튜닝 서스펜션과 듀얼 머플러 등으로 구성된 스포츠 패키지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하였다. 같은 해 7월 1일에는 앞좌석 통풍 시트, 듀얼 풀 오토 에어컨, 오토 디포깅 시스템, 클러스터 이오나이저, 전면 자외선 차단 유리 등이 적용된 썸머 스페셜 트림이 선보였다. 썸머 스페셜 트림은 1.6ℓ 감마 가솔린 직분사 터보 엔진이 장착되었으며, 7월부터 10월까지 4개월 동안만 판매된다. 11월 1일에는 열선 스티어링 휠과 뒷좌석 열선 시트, 김 서림을 자동으로 제거해주는 오토 디포깅 시스템 등이 적용된 윈터 스페셜 트림이 추가되었다. 택시는 2019년 1월에 단종되었다. Hyundai Sonata Turbo 01.jpg|현대 쏘나타 터보(2.0ℓ) 정측면 Hyundai Sonata Turbo 02.jpg|현대 쏘나타 터보(2.0ℓ) 후측면 Eco 1600cc Turbo Front Side.png|현대 쏘나타 터보(1.6ℓ) 정측면 Eco 1600cc Turbo Rear Side.png|현대 쏘나타 터보(1.6ℓ) 후측면 구분 2.0ℓ LPG(장애인용) 2.0ℓ LPG(렌터카) 2.0ℓ LPG(택시) 1.7ℓ 디젤 1.6ℓ 가솔린 터보 2.0ℓ 가솔린 2.0ℓ 가솔린 터보 2.4ℓ 가솔린 쏘나타 LPI 스마트LPI 모던 LPI 스마트LPI 모던LPI 프리미엄LPI 프리미엄 스페셜 LPI 스타일LPI 모던LPI 프리미엄 e-VGT 스타일e-VGT 케어 플러스e-VGT 스마트e-VGT 스마트 스페셜 T-GDI 스타일T-GDI 썸머 스페셜T-GDI 윈터 스페셜T-GDI 스마트T-GDI 스마트 스페셜T-GDI 와일드 버건디(300대 한정) CVVL 스타일CVVL 스타일 스페셜CVVL 케어 플러스CVVL 스마트CVVL 스마트 스페셜CVVL 프리미엄CVVL 프리미엄 스페셜 T-GDI 스마트T-GDI 익스클루시브 GDI 스타일GDI 익스클루시브 2015년 11월 4일에는 출시 30주년을 기념해 선보인 와일드 버건디 트림이 300대 한정 판매에 들어갔다. 와일드 버건디 트림은 1.6ℓ 감마 가솔린 직분사 터보 엔진을 달고, 30주년 엠블럼과 전용 18인치 알루미늄 휠, 도어 스커프에 각인된 일렬 번호 등으로 특별함을 더했다. 외장 색상은 아이스 화이트, 내장 색상은 버건디와 코퍼로 판매된다. 구분 1.6ℓ 감마 GDI 터보 1.7ℓ U Ⅱ VGT 2.0ℓ 누우 MPI(16/17인치 휠) 2.0ℓ 누우 MPI(18인치 휠) 2.0ℓ 누우 LPI 2.0ℓ 세타 Ⅱ GDI 터보 2.4ℓ 세타 Ⅱ GDI 전장(mm) 4,855 전폭(mm) 1,865 전고(mm) 1,475 1,4751,485(렌터카, 택시) 1,475 축거(mm) 2,805 윤거(전, mm) 1,614(R16)1,602(R17)1,597(R18) 1,614(R16)1,602(R17) 1,597(R18) 1,614(R16)1,602(R17) 1,597(R18) 1,614(R16)1,602(R17)1,597(R18) 윤거(후, mm) 1,621(R16)1,609(R17)1,604(R18) 1,621(R16)1,609(R17) 1,604(R18) 1,621(R16)1,609(R17) 1,604(R18) 1,621(R16)1,609(R17)1,604(R18) 승차 정원 5명 변속기 듀얼 클러치 자동 7단 자동 6단 수동 6단자동 6단 자동 6단 구동 형식 전륜 구동 엔진 형식 G4FJ D4FD G4ND L4NA G4KH G4KJ 연료 가솔린 디젤 가솔린 LPG 가솔린 배기량(cc) 1,591 1,685 1,999 1,998 2,359 최고 출력(ps/rpm) 180/5,500 141/4,000 168/6,500 153/6,200(수동 6단)/151/6,200(자동 6단) 245/6,000 193/6,000 최대 토크(kg*m/rpm) 27.0/1,500~4,500 34.7/1,750~2,500 20.5/4,800 20.0/4,200(수동 6단)/19.8/4,200(자동 6단) 36.0/1,350~4,000 25.2/4,000 연료 탱크 용량(ℓ) 70 72 70 요소수 탱크 용량(ℓ) 공차 중량(kg) 1,455(16인치 휠)/1,465(17인치 휠)/1,475(18인치 휠)/1,530(18인치 휠 와일드 버건디) 1,510(16인치 휠)/1,520(17인치 휠)/1,530(18인치 휠) 1,460(이후 1,470으로 변경) 1,479(이후 1,470, 1,479로 변경) 1,450(수동 6단)/1,465(자동 6단)/1,465(자동 6단 ISG 장착시) 1,570 1,575 연비(km/ℓ) 도심 11.9/고속 15.9/복합 13.4(16인치 휠)/도심 11.6/고속 15.6/복합 13.1(17인치 휠)/도심 11.3/고속 14.9/복합 12.7(18인치 휠)/도심 10.8/고속 13.8/복합 12.0(18인치 휠 와일드 버건디) 도심 15.5/고속 18.7/복합 16.8(16인치 휠)/도심 15.3/고속 18.3/복합 16.5(17인치 휠)/도심 14.8/고속 17.8/복합 16.0(18인치 휠) 도심 10.5/고속 14.8/복합 12.1(이후 도심 11.0/고속 15.2/복합 12.6으로 변경) 도심 10.0/고속 14.4/복합 11.6(이후 도심 10.7/고속 14.1/복합 12.0, 도심 10.5/고속 14.5/복합 12.0으로 변경) 도심 9.2/고속 11.5/복합 10.1(수동 6단)/도심 8.3/고속 11.7/복합 9.6(자동 6단)/도심 8.6/고속 11.6/복합 9.8(자동 6단 ISG 장착시) 도심 9.3/고속 13.2/복합 10.8 도심 10.0/고속 14.0/복합 11.5 Co2 배출량(g/km) 129(16인치 휠)/132(17인치 휠)/137(18인치 휠)/146(18인치 휠 와일드 버건디) 115(16인치 휠)/117(17인치 휠)/121(18인치 휠) 145(이후 138으로 변경) 151(이후 145, 146으로 변경) 132(수동 6단)/140(자동 6단)/137(자동 6단 ISG 장착시) 164 152 === 쏘나타 하이브리드(2014년 12월~2017년 5월) === 현대 쏘나타 하이브리드 정측면 현대 쏘나타 하이브리드 후측면 2014년 12월 16일에 출시되었다. 2.0ℓ 누우 가솔린 직분사 엔진에 38kw급 하드 타입 전기 모터가 결합되었고, 실용 영역 rpm대에서 출력과 토크가 개선되었다. 스포츠 주행 모드가 추가되었고, 동력 배분과 회생 제돔 시스템의 효율 개선을 통해 복합 연비 18.2km/ℓ(16인치 타이어 기준)를 달성하였다. 변속기에 고전압 단독 구동형 전동식 오일 펌프가 적용되어 기존 기계식 오일 펌프 사용으로 발생된 기계적 동력 손실을 최소화하였다. 플루이딕 스컬프처 2.0이 적용된 디자인에 새로운 형상의 헤드 램프와 입체감 넘치는 테일 램프, 휠 아치에 있는 에어 커튼과 지능형 공기 유입 제어 장치 등이 적용되어 기존 쏘나타와 차별화함과 동시에 공력 성능과 연비 효율을 높였다. 아울러 공기 저항 계수(Cd)는 0.24를 기록하여 공기 저항을 대폭 낮추었다. 배터리 위치를 기존의 스페어 타이어 공간으로 옮겨 트렁크 공간을 넓혔다. 2016년 4월 20일에 선보인 2017년형은 HID 헤드 램프와 스마트 후측방 경보 시스템이 적용된 모던 스페셜 트림과 프리미엄 스페셜 트림이 신설되었고, 앞좌석 어드밴스드 에어백이 모든 트림에 신규 적용되었다. 구분 2.0ℓ 가솔린+전기 쏘나타 하이브리드 스마트모던모던 스페셜프리미엄프리미엄 스페셜 구분 2.0ℓ 누우 GDI(16인치 타이어) 2.0ℓ 누우 GDI(17인치 타이어) 전장(mm) 4,855 전폭(mm) 1,865 전고(mm) 1,475 축거(mm) 2,805 윤거(전, mm) 1,614(R16) 1,602(R17) 윤거(후, mm) 1,621(R16) 1,609(R17) 승차 정원 5명 변속기 자동 6단 구동 형식 전륜 구동 엔진 형식 G4NG 연료 가솔린+전기 배기량(cc) 1,999 최고 출력(ps/rpm) 156/6,000 최대 토크(kg*m/rpm) 19.3/5,000 모터 최고 출력(kw/rpm) 38(51ps)/1,770~2,000 모터 최대 토크(nm/rpm) 205(20.9kg*m)/1,770 연료 탱크 용량(ℓ) 60 요소수 탱크 용량(ℓ) 공차 중량(kg) 1,585 1,595 연비(km/ℓ) 도심 17.7/고속 19.0/복합 18.2 도심 17.2/고속 18.4/복합 17.7 Co2 배출량(g/km) 91 94 === 쏘나타 플러그인 하이브리드(2015년 7월~2017년 7월) === 현대 쏘나타 플러그인 하이브리드 정측면 현대 쏘나타 플러그인 하이브리드 후측면 2015년 7월 2일에 출시되었다. 대한민국산 자동차 최초의 플러그인 하이브리드 차량으로, 하이브리드 시스템에 전기차 기능을 더한 점이 특징이다. 가정용 전기 콘센트로 부족한 전기를 충전할 수 있고, 1회 충전을 통해 최대 44km의 거리를 전기로만 주행할 수 있다. 스마트폰 전용 애플리케이션을 통하여 원격으로 예약 및 즉시 충전이 가능하고, 충전이 완료되면 통보하는 등 특화 서비스도 제공된다. 구분 2.0ℓ 가솔린+전기 쏘나타 플러그인 하이브리드 프리미엄익스클루시브 구분 2.0ℓ 누우 GDI 전장(mm) 4,855 전폭(mm) 1,865 전고(mm) 1,475 축거(mm) 2,805 윤거(전, mm) 1,602(R17) 윤거(후, mm) 1,609(R17) 승차 정원 5명 변속기 자동 6단 구동 형식 전륜 구동 엔진 형식 G4NG 연료 가솔린+전기 배기량(cc) 1,999 최고 출력(ps/rpm) 156/6,000 최대 토크(kg*m/rpm) 19.3/5,000 모터 최고 출력(kw/rpm) 50(68ps)/2,330~3,300 모터 최대 토크(nm/rpm) 205(20.9kg*m)/0~2,330 연료 탱크 용량(ℓ) 55 요소수 탱크 용량(ℓ) 공차 중량(kg) 1,725(17인치 휠) 연비(km/ℓ) 도심 16.5/고속 18.2/복합 17.2(17인치 휠) 연비(km/kWh) 도심 4.5/고속 4.7/복합 4.6(17인치 휠) Co2 배출량(g/km) 29(17인치 휠) 현대 쏘나타 뉴 라이즈 정측면 현대 쏘나타 뉴 라이즈 후측면 2017년 3월 8일에 출시되었다. 출시에 앞서 렌더링이 공개되었고, 뉴 라이즈라는 서브 네임이 더해졌다. 단조롭다는 기존 디자인에 대한 평가와 르노삼성 SM6 등 새로운 경쟁 차종의 출시에 따라 상품성 강화를 위하여 페이스 리프트를 단행하였다. 현대자동차의 패밀리 룩인 대형 캐스캐이딩 라디에이터 그릴이 적용되었고, 공력 성능 향상을 위한 에어 커튼을 세로로 배치된 주간 주행등 옆에 달았다. 뒷 번호판의 위치가 테일 게이트에서 범퍼로 옮겨졌다. 주행 조향 보조 시스템, 부주의 운전 경보 시스템, 다이나믹 벤딩 라이트, 어드밴스드 스마트 크루즈 컨트롤, 자동 긴급 제동 시스템 등을 하나로 묶은 현대 스마트 센스가 새로 적용되었다. 이 외에도 주행 중 후방 영상 디스플레이와 공기 청정 모드도 새로 적용되어 편의성을 높였다. 같은 해 12월 1일에는 12월에만 한정 판매되는 커스텀 핏이 선보였는데, 현대자동차의 대표 고객 참여형 소통 프로그램인 H-옴부즈맨을 통하여 오픈 이노베이션 방식으로 개발되었다. 대한민국에서 고객이 직접 차량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시하고, 해당 아이디어가 채택되어 실제로 판매되기까지의 과정으로는 첫 시도이다. 2018년 8월에 판매 부진과 각종 환경 규제로 인하여 1.7ℓ U Ⅱ 디젤 엔진이 단종되었다. 역대 쏘나타 중 마지막으로 택시 모델이자 수동변속기도 선보였던 차종이다. hyundai sonata new rise turbo rear-side.jpg|현대 쏘나타 터보(2.0ℓ) 정측면 hyundai sonata new rise turbo front-side.jpg|현대 쏘나타 터보(2.0ℓ) 후측면 구분 2.0ℓ LPG(장애인용) 2.0ℓ LPG(렌터카) 2.0ℓ LPG(택시) 1.7ℓ 디젤 1.6ℓ 가솔린 터보 2.0ℓ 가솔린 2.0ℓ 가솔린 터보 쏘나타 뉴 라이즈 스마트모던 스타일모던프리미엄 스타일스마트모던프리미엄 스타일마이 시티 에디션마이 트립 에디션스마트모던프리미엄 스타일스마트모던프리미엄 스페셜 스마트익스클루시브 구분 1.6ℓ 감마 GDI 터보 1.7ℓ U Ⅱ VGT 2.0ℓ 누우 MPI 2.0ℓ 누우 LPI 2.0ℓ 세타 Ⅱ GDI 터보 전장(mm) 4,855 전폭(mm) 1,865 전고(mm) 1,4751,485(렌터카, 택시) 1,4751,485(렌터카, 택시) 1,475 축거(mm) 2,805 윤거(전, mm) 1,614(R16)1,602(R17)1,597(R18) 1,614(R16)1,602(R17) 1,597(R18) 윤거(후, mm) 1,621(R16)1,609(R17)1,604(R18) 1,621(R16)1,609(R17) 1,604(R18) 승차 정원 5명 변속기 듀얼 클러치 자동 7단 자동 6단 수동 6단자동 6단 자동 8단 구동 형식 전륜 구동 엔진 형식 G4FJ D4FD G4ND L4NA G4KH 연료 가솔린 디젤 가솔린 LPG 가솔린 배기량(cc) 1,591 1,685 1,999 1,998 최고 출력(ps/rpm) 180/5,500 141/4,000 163/6,500 153/6,200(수동 6단)/151/6,200(자동 6단) 245/6,000 최대 토크(kg*m/rpm) 27.0/1,500~4,500 34.7/1,750~2,500 20.0/4,800 20.0/4,200(수동 6단)/19.8/4,200(자동 6단) 36.0/1,350~4,000 연료 탱크 용량(ℓ) 70 72 70 요소수 탱크 용량(ℓ) 공차 중량(kg) 1,465(16인치 휠)/1,475(17인치 휠)/1,495(18인치 휠) 1,515(16인치 휠)/1,525(17인치 휠)/1,535(18인치 휠) 1,450(16인치 휠)/1,460(17인치 휠)/1,470(18인치 휠) 1,445(수동 6단)/1,465(자동 6단) 1,565(18인치 휠) 연비(km/ℓ) 도심 11.5/고속 15.2/복합 13.0(16인치 휠)/도심 11.3/고속 15.0/복합 12.8(17인치 휠)/도심 11.0/고속 14.3/복합 12.3(18인치 휠) 도심 15.0/고속 17.8/복합 16.1(16인치 휠)/도심 14.7/고속 17.7/복합 15.9(17인치 휠)/도심 14.5/고속 17.2/복합 15.6(18인치 휠) 도심 10.7/고속 15.0/복합 12.3(16인치 휠)/도심 10.5/고속 14.6/복합 12.0(17인치 휠)/도심 10.2/고속 14.0/복합 11.6(18인치 휠) 도심 8.7/고속 10.8/복합 9.5(수동 6단)/도심 8.3/고속 11.4/복합 9.5(자동 6단) 도심 9.2/고속 13.1/복합 10.7(18인치 휠) Co2 배출량(g/km) 126(16인치 휠)/128(17인치 휠)/134(18인치 휠) 116(16인치 휠)/118(17인치 휠)/120(18인치 휠) 136(16인치 휠)/138(17인치 휠)/143(18인치 휠) 136(수동 6단)/138(자동 6단) 156(18인치 휠) === 쏘나타 뉴 라이즈 하이브리드(2017년 5월~2019년 6월) === 2017년 5월 18일에 출시되었다. 기존과 비교하여 디자인 차별화 요소가 줄어들었으나, 블루 베젤 헤드 램프와 클리어 렌즈 타입 LED 테일 램프 등이 적용되어 친환경 이미지를 강조하였다. 리튬 이온 폴리머 배터리 용량이 기존 1.62kWh에서 1.76kWh로 늘어나 연료 소비 없이 전기로만 운행이 가능한 전기차 모드의 효율이 개선되었고, 운전석만 부분적으로 냉난방을 실시하는 운전석 개별 공조 시스템이 적용되어 불필요한 에너지 소모를 줄였다. 구분 2.0ℓ 가솔린+전기 쏘나타 뉴 라이즈 하이브리드 스마트모던프리미엄프리미엄 스페셜 구분 2.0ℓ 누우 GDI(16인치 타이어) 2.0ℓ 누우 GDI(17인치 타이어) 전장(mm) 4,855 전폭(mm) 1,865 전고(mm) 1,475 축거(mm) 2,805 윤거(전, mm) 1,614(R16) 1,602(R17) 윤거(후, mm) 1,621(R16) 1,609(R17) 승차 정원 5명 변속기 자동 6단 구동 형식 전륜 구동 엔진 형식 G4NG 연료 가솔린+전기 배기량(cc) 1,999 최고 출력(ps/rpm) 156/6,000 최대 토크(kg*m/rpm) 19.3/5,000 모터 최고 출력(kw/rpm) 38(51ps)/1,770~2,000 모터 최대 토크(nm/rpm) 205(20.9kg*m)/1,770 연료 탱크 용량(ℓ) 60 요소수 탱크 용량(ℓ) 공차 중량(kg) 1,585 1,595 연비(km/ℓ) 도심 17.7/고속 18.3/복합 18.0 도심 17.0/고속 17.9/복합 17.4 Co2 배출량(g/km) 88 91 === 쏘나타 뉴 라이즈 플러그인 하이브리드(2017년 7월~2019년 4월) === 고효율의 리튬 이온 폴리머 배터리가 장착되어 1회 충전 시 전기 모드만으로 최대 45km를 주행할 수 있고, 하이브리드 모드 주행 약 940km를 포함하여 총 985km의 장거리 주행이 가능하다. 여기에 고효율 영구 자석형 모터 시스템이 적용된다. 지능형 안전 기술인 현대 스마트 센스를 비롯하여 원터치 공기 청정 모드, 스마트폰 미러링크, 애플 카플레이 등이 적용되어 상품성을 높였다. 구분 2.0ℓ 가솔린+전기 쏘나타 뉴 라이즈 플러그인 하이브리드 프리미엄익스클루시브 구분 2.0ℓ 누우 GDI 전장(mm) 4,855 전폭(mm) 1,865 전고(mm) 1,475 축거(mm) 2,805 윤거(전, mm) 1,602(R17) 윤거(후, mm) 1,609(R17) 승차 정원 5명 변속기 자동 6단 구동 형식 전륜 구동 엔진 형식 G4NG 연료 가솔린+전기 배기량(cc) 1,999 최고 출력(ps/rpm) 156/6,000 최대 토크(kg*m/rpm) 19.3/5,000 모터 최고 출력(kw/rpm) 50(68ps)/2,330~3,300 모터 최대 토크(nm/rpm) 205(20.9kg*m)/0~2,330 연료 탱크 용량(ℓ) 55 요소수 탱크 용량(ℓ) 공차 중량(kg) 1,725(17인치 휠) 연비(km/ℓ) 도심 16.7/고속 17.6/복합 17.1(17인치 휠) 연비(km/kWh) 도심 4.8/고속 4.8/복합 4.8(17인치 휠) Co2 배출량(g/km) 25(17인치 휠) 2019년 3월 21일 출시되었다. 출고는 지연되어 4월 8일에 본격 출고가 개시되었다. 역대 쏘나타 중 최초로 전 사양 버튼식자동변속기로만 나오며 LPG 봄베는 도넛형태로 나온다. 하이패스 선택 시 내장단말기가 룸미러가 아닌 천장 위에 장착되며 최초로 순정형 블랙박스가 적용되었다. 스마트 키로 원격 주차가 가능하고, 네비게이션에서는 최초로 카카오i 기반의 음성 인식이 가능해진 것이 특징이다. 구분 2.0ℓ 스마트스트림 LPG 2.0ℓ 스마트스트림 LPG(장애인용) 2.0ℓ 스마트스트림 LPG(렌터카) 2.0ℓ 스마트스트림 가솔린 헬로 쏘나타 스마트모던프리미엄인스퍼레이션 모던프리미엄인스퍼레이션 스타일스마트 스마트프리미엄프리미엄 패밀리인스퍼레이션 구분 2.0ℓ 스마트스트림 G MPI 2.0ℓ 스마트스트림 G LPI 전장(mm) 4,900 전폭(mm) 1,860 전고(mm) 1,445 축거(mm) 2,840 윤거(전, mm) 1,633(R16)1,623(R17)1,618(R18) 윤거(후, mm) 1,640(R16)1,630(R17)1,625(R18) 승차 정원 5명 변속기 자동 6단(버튼식) 구동 형식 전륜 구동 엔진 형식 G4NM L4NB 연료 가솔린 LPG 배기량(cc) 1,999 최고 출력(ps/rpm) 160/6,500 146/6,000 최대 토크(kg*m/rpm) 20.0/4,800 19.5/4,200 연료 탱크 용량(ℓ) 60 64 요소수 탱크 용량(ℓ) 공차 중량(kg) 1,405(16인치 휠)/1,415(17인치 휠)/1,470(18인치 휠) 1,410(16/17인치 휠)/1,475(18인치 휠) 연비(km/ℓ) 도심 11.7/고속 15.1/복합 13.1(16인치 휠)/도심 11.9/고속 15.5/복합 13.3(17인치 휠)/도심 11.6/고속 15.0/복합 13.0(18인치 휠) 도심 9.1/고속 12.1/복합 10.3(16/17인치 휠)/도심 8.7/고속 11.5/복합 9.8(18인치 휠) Co2 배출량(g/km) 128(16인치 휠)/126(17인치 휠)/129(18인치 휠) 126(16/17인치 휠)/133(18인치 휠) 쏘나타와 함께라면 당신이 곧 VIP입니다.(쏘나타) 21세기 하이 테크 세단(쏘나타) 명차의 감동을 더해주는 쏘나타 골드(뉴 쏘나타) 중형 세단의 새 얼굴(쏘나타 Ⅱ) 중형 세단의 걸작(쏘나타 Ⅱ) 명품의 완성(쏘나타 Ⅲ) 한국차의 대명사(쏘나타 Ⅲ) Dream Technology(EF 쏘나타) 꿈을 현실로(EF 쏘나타) 쏘나타 최고의 작품(뉴 EF 쏘나타) 차는 차로 말합니다.(뉴 EF 쏘나타) 아름다운 동행(뉴 EF 쏘나타) 명차의 새로운 경험(쏘나타) 명차의 감동(쏘나타) Envy U(쏘나타) 변화를 넘어선 진화(쏘나타 트랜스폼) Art of Technology(쏘나타) Unexpected(쏘나타, 쏘나타 하이브리드) 자동차에 감성을 더하다.(쏘나타 더 브릴리언트) 두 개의 심장으로 앞서 가다.(쏘나타 하이브리드) 자동차는 진보한다.(쏘나타 하이브리드) 본질로부터(쏘나타) 시작, 일곱 가지 쏘나타(쏘나타, 쏘나타 하이브리드, 쏘나타 플러그인 하이브리드) 포스트 쏘나타의 시작(쏘나타 뉴 라이즈) 일상을 바꾸는 경험(헬로 쏘나타) 투캅스에서는 조형사(안성기 분)와 강형사(박중훈 분)의 차량으로 2세대 쏘나타(회색 GLi)가 등장하였다. 투캅스 3에서는 이형사(김보성 분)와 최형사(권민중 분)의 차량으로 2세대 쏘나타(흰색 GLi)가 등장하였다. 돈을 갖고 튀어라에서는 장 하사(명계남 분)의 차량으로 2세대 쏘나타(회색 GLi)가 등장하였다. 돈을 갖고 튀어라에서는 뱁새(김승우 분)의 차량으로 2세대 뉴 쏘나타(흑색 2.0ℓ LPG 모범택시)가 등장하였다. 잔혹한 출근에서는 오동철(김수로 분)이 폐차장에서 구입하여 탄 차량으로 2세대 쏘나타(회색 GLSi)가 등장하였다. 넘버 3에서는 태주(한석규 분)가 탄 택시로 2세대 쏘나타 Ⅱ(회색 TXL 택시)가 등장하였다.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에서 최익현(최민식 분)이 최형배(하정우 분)을 배신하는 장면에서 2세대 쏘나타(검은색 GLi)가 등장하였다. 주유소 습격사건에서는 경찰 1(이원종 분)과 경찰 2(김응수 분)가 주유를 받기 위해 타고 온 차량으로, 주유 후 외상으로 그냥 가다가 노마크(이성재 분)와 추격전 끝에 걸려서 62,000원의 기름값을 내는 장면에 등장한다. 해당 차량은 3세대 쏘나타 Ⅱ(경찰 도색 TXL)이다. 공공의 적 2에서 강철중(설경구 분)이 3세대 쏘나타 Ⅱ(은비색 GL)을 타는데, 공공의 적 2 중반부에 부하 직원인 강석신(박상욱 분)이 이 차량으로 오토바이 폭주족과 추격전을 벌이다 지하차도로 추락하여 지하차도를 주행하던 덤프 트럭과의 충돌로 인하여 반파됨에 따라 그 자리에서 사망한다. 사고 이후에 강철중은 5세대 쏘나타(은색 F24S 프리미어)로 차랑을 바꾸었다. 아울러 공공의 적에서 조규환(이성재 분)의 차량에 받혀 합의를 보다가 후에 살해된 택시 기사의 차량으로 3세대 쏘나타 Ⅲ(은비색 TXL)가 등장한다. 여기에 교통 순경으로 좌천된 강철중(설경구 분)이 신호 위반 단속을 할 때 걸린 차량은 4세대 뉴 EF 쏘나타(은색 DLX)였다. 여러 영화 중 쏘나타 시리즈가 많이 나온 영화로 알려져 있다. 강철중 공공의 적 1-1에서는 3세대 쏘나타 Ⅱ(녹색 GLS)와 3세대 쏘나타 Ⅲ(녹색 GLS) 역시 등장한다. 스파이에서는 김철수(설경구 분)의 타고 나온 차량으로 6세대 쏘나타 (검은색 Y20 그랜드)이 등장한다. 텔 미 썸딩에서 조형사(한석규 분)의 차량으로 3세대 쏘나타 II(진녹색, GL DLX)가 등장한다. 조폭 마누라 3에서는 국가정보원 요원인 한기철(이범수 분)의 차량으로 3세대 쏘나타 Ⅲ(금색 GLS)가 등장하며, 홍콩의 흑룡회 조폭들과 추격전에서 서기와 함께 타고 도망쳤던 차량이다. 그 뒤를 쫓다가 막다른 길로 간 택시는 도미(조희봉 분)와 꽁치(오지호 분)가 훔친 차량으로, 4세대 EF 쏘나타(은색)이다. 본 슈프리머시 초반부에 인도에서 벌어지는 추격전에서 주인공 제이슨 본(맷 데이먼 분)을 암살하려는 스파이가 운전하는 차량으로 4세대 뉴 EF 쏘나타(은색)가 등장하였다. 우주 전쟁 초반부에 미국 뉴욕시에 재앙이 일어날 때 4세대 뉴 EF 쏘나타(녹색 GLS)가 잠시 등장하였다. 세이프에서는 루크 라이트(제이슨 스테이섬 분)가 타고 나온 차량이 4세대 뉴 EF 쏘나타(은색 GLS)이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에는 지하 주차장 씬에서 2세대 쏘나타(은색 GLi)와 3세대 쏘나타 Ⅱ(흰색 GLS)가 나란히 등장했다. 디워에서는 로스앤젤레스 한복판에서 이무기의 습격을 받아 불타는 차량으로 3세대 쏘나타 Ⅱ(녹색 GLS)가 등장했다. 일단 뛰어에서는 성환(송승헌 분)이 우섭(권상우 분) 앞에서 교각에 차를 충돌시키는 장면이 나오는데, 해당 차량은 4세대 EF쏘나타(진주색 GVS)이다. 공동경비구역 JSA에서는 미군 소속 소피 E. 장 소령(이영애 분)을 태우고 부대로 들어가는 장면에서 차량이 등장하는데, 해당 차량은 3세대 쏘나타 Ⅲ(남색 골드)이다. 태풍에서는 국가정보원 요원인 강세종(이정재 분)이 타고 나온 차량은 4세대 뉴 EF 쏘나타(은색 DLX)였다. 야수에서는 경찰 형사인 장도영(권상우 분)이 타고 나온 차량은 3세대 쏘나타 Ⅱ(남색 GL)이고, 검찰 검사인 오진우(유지태 분)가 타고 나온 차량으로 5세대 쏘나타(검은색 N20 디럭스)가 등장하였다. 택시운전사 후반부에 2003년 배경에서 택시 기사인 김만섭(송강호 분)이 타고 나온 차량은 4세대 뉴 EF 쏘나타(은색 TXL 택시)이다. 헬로 카봇에서는 카봇 아티의 차량으로 7세대 쏘나타가 등장한다. 터닝메카드 W에서는 메카니멀 로봇인 피코의 차량으로 7세대 쏘나타(파란색)가 등장한다. tvN 드라마인 응답하라 1997에서 윤윤제(서인국 분)의 형인 윤태웅(송종호 분)의 차로 3세대 쏘나타 Ⅲ(녹색 GLS)가 등장한다. 시대 배경 상 S O N A T A Ⅲ 엠블럼에서 S자와 Ⅲ자가 실종된다. tvN 드라마인 응답하라 1994에서 성나정(고아라 분)이 운전을 배우기 위해 탄 차로 4세대 EF쏘나타(흰색 GV)가 등장한다. KBS2 주말연속극 세상에서 제일 예쁜 내 딸에서 한태주(홍종현 분)의 차로 8세대 쏘나타가 등장한다. 현대자동차 대한민국 홈페이지 - 쏘나타 네이버캐스트 매일의 디자인 - 쏘나타, 1985 보배드림 컬렉션/자동차 - 현대 쏘나타 1세대 쏘나타 쏘나타 쏘나타 쏘나타 쏘나타 쏘나타 쏘나타 쏘나타 쏘나타 쏘나타 쏘나타 쏘나타
서예 (書藝란 붓으로 글씨를 쓰는 예술을 말한다. 중국에서 발생한 예술형식의 하나로서 한국 및 일본에 전래되어 한자뿐만 아니라 해당 나라의 글씨체 (한글, 가나)를 예술적으로 종이 위에 표현하는 기술적 측면을 넘어서, 정신수양의 수단으로 (예컨대 문인화) 인정받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서도 (書道)라고도 한다. 표의문자인 한자를 문자와 글씨로 일단 구별한다면 문자는 언어의 부호로서 그 목적이 어느 사건을 기록하는 것이고, 서(書)는 그 문자의 표현에 있어서 미의식의 활동을 보기 위한 글씨로서 아름다운 면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서는 어디까지나 문자를 떠나 또는 붓을 떠나서 존재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글씨를 쓰는 용구로서 붓의 성격은 변화하여도 아름답게 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펜으로 쓴 글씨, 또는 등사·인쇄로 된 문자는 서예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사람의 손에 의해서 쓰여진 것이 아니면 안 된다. 서예가가 쓴 글씨가 타인에게는 읽지 못하는 제멋대로의 자의적인 자태일지 모르나 그 서예가에게는 읽는 문자로서 미의식 표현의 서사인 것이다. 서의 조형적 요소로서 형태와 선질(線質) 따위는 별개의 것이 아니고 표현에 있어서 깊은 관련이 있다. 그 형태는 서체(書體) 또는 서풍(書風)에 의한 정도로서 제약을 받는 것이고, 서의 선질은 서예가의 주관을 어느 정도 자유로이 표현할 수 있다. 그런 뜻에서 서예는 선의 예술이다. 그래서 서의 선은 회화의 선과 같이 어느 물체의 형상을 표현하는 윤곽선이 아니고 비구상적인 선이다. 물론 사출(寫出)된 선에 의해서 문자의 자형(字形)이 표시되나 그것이 서선(書線)의 본질은 아니다. 서선은 부호로서 읽는 형(形)의 선이 아니고 내용 있는 선, 미의 선, 인간의 생명이 통하는 선이다. 이는 구상성을 떠난 선으로 붓의 압력과 속도로서 사출된 서예가를 상징하는 선이다. 즉 물체의 형태 또는 대상의 연관성을 그리는 선이 아니고, 인간성과 연관성이 깊은 선이다. 옛날부터 현재까지 서를 심화(心畵, 마음을 나타내는 그림)라고 한 것은 이 특질 있는 선질 표현의 기초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서의 형태미 이상으로 서의 본질을 형성하고 있다. 서예의 심오한 뜻은 기법의 연습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기법과 병행해서 정신수련을 중요시한다. 중국에서 서는 육예(六藝), 즉 예(禮)·악(樂)·사(射)·어(御)·서(書)·수(數) 중의 일부분으로 인간의 선행 수련이다. 고상한 사군자 수업의 도(道)로서 많은 위인들이 생애를 바쳐서 서로 이어서 발전시켜 왔다. 서예는 실용적인 요구와 서예적 만족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참다운 인간의 영원성을 추구하는 도(道)로서 철학적으로 종교적으로 열렬히 요구되어 있다. 그래서 서예의 근본정신이 동양 일반의 예도(藝道)에 통하는 자연관을 기조로 한 것이다. 서의 표현 내용은 그 서의 소재·어구(語句) 시문(詩文)·문학적인 요소를 의미하고 있으나 독립된 시각성 예술로 향상되는 한, 서의 내용은 소재로서 문자보다 그 작품에 포함된 서미(書美)의 문제점이 생긴다. 즉 하나의 완성된 작품에는 전체를 구성하는 문자의 대소(크고 작음)·포치(布置, 넓게 늘어놓음), 먹의 윤갈(潤渴, 윤택하고 마름), 낙관(落款)의 위치 즉 장법(章法, 經營位置, 화면을 살리기 위한 배치법)이 중요하다. 그 작품에 구성된 문자의 형태미로서 동양문자는 회화문자에서 발달된 상형문자며 표의문자다. 한글은 표음문자로서 한 자 한 구를 형태미로 응물상형(應物象形, 물체의 모양이나 특성을 잘 알아 표현하는 것) 결합체로 표현한다. 유럽인도 상형문자로서 인간 본질을 순화시키는 서예정신을 배울 수 있다. 고려시대의 서예는 신라시대와같이 구양순(歐陽詢)의 이른바 구법(歐法)이 주류를 이루어 규각(圭角)이 있으면서 정제준경(整齊遵勁)한 서체이며 이러한 특색있는 서체가 비문, 사경에 사용하면서 한편 판각에서는 변화된 서체를 이루어 대장경(大藏經)에서 볼 수 있는 독특한 고려체(高麗體)를 이룬다. 말기의 사경에는 당사경체(唐寫經體)의 여운을 가진 예도 있고 후에 조선시대의 서체가 되는 원(元)의 조맹부체도 있다. 조선시대의 서체(書體)는 안진경체(顔眞卿體)의 고려와는 달리 왕희지(王羲之)에서 출발하는 원나라 말기의 조맹부의 서체로서 시종하였는데 조맹부의 규각(圭角)이 없는 세련된 서체는 명나라 초기의 문인 학자들 사이에 유행하여 이른바, 한림원체(翰林院體)라 하여 판본(板本)에도 널리 사용되었다. 이것은 조선에도 자극을 주어 세종 때에 간행된 훈민정음, 삼강행실도 등의 서적은 명초의 서체와 사경(寫經)에서 느낄 수 있듯이 힘이 들어 있었는데, 초기의 서예를 대표하는 서예가는 안평대군(安平大君)으로서 그의 서풍은 조법(趙法)을 잘 체득하여 그 연미(軟美)하고 넉넉한 품(品)이 당시에 따를 이가 없어 조정에서도 높이 평가하자 전국에 성행하게 되었다. 이러한 초기의 서체는 시대가 내려감에 따라 새로운 자극과 범본(範本)이 중국으로부터 끊어짐에 따라 그저 외형(外形)만 정비하고 균형미만을 찾는 무기력한 서체로 정형화(定型化)되어 갔다. 중종 때에는 김구(金絿)가 종왕(鍾王)의 서체를 배워 인수체(仁壽體)를 개창(開創)했고 명종 때의 양사언(楊士彦)은 큰 글씨(大字)와 초서(草書)에 뛰어났다. 선조 때의 한호(韓濩)는 진체(晉體)의 대가로서 뛰어났고, 또 이광사(李匡師) 같은 우수한 서예가도 있었으나 한결같이 이들의 서체는 그저 말쑥하고 미끈한 전형적인 조선서체의 범주를 벗어날 수 없었다. 19세기에 가서 김정희(金正喜)의 독창적인 서체가 등장하여 일대 혁신을 일으켰으나 그의 추사체(秋史體)는 더 발전이나 계승을 보지 못하고 그 한 사람대(代)로서 끝났다. 한편 한글 서체로 궁체(宮體)라는 서체가 있어서 의식적(儀式的)인 등서체(謄書體)와 장식적인 서간체(書翰體)로 구별되는데 이 서체도 사각상의 미 이상의 글씨로서의 골(骨)을 갖지 못한 역시 전형적인 조선시대의 서체임을 면치 못했다. 청조(淸朝)로 들어서면 진첩(晋帖)이나 당비(唐碑)의 연구가 성하게 되고, 건륭(乾隆) 가경기(嘉慶期)가 되자 교묘한 구조와 풍부한 정신을 가진 고전주의가 성립되었다. 이른바 첩합(帖學)의 개화로 유용(劉鏞)·양동서(梁同書)·왕문치(王文治)·성친왕(成親王) 등은 법첩을 본으로 삼은 첩학파(帖學派)의 사람들이다. 한편 금석학(金石學)의 연구가 진전되자 종래의 첩학과 같이 몇 번이나 번각(飜刻)을 거듭한 법첩보다도 진적(眞跡)에 가까운 비(碑)의 탁본(拓本)을 배워야 된다는 비학(碑學)이 생겼다. 등석여(鄧石如)·이병수(伊秉綏)·진홍수(陳鴻壽)·오양지(吳讓之)·조지겸(趙之謙) 등이 비학파에 속하는 사람으로 그들은 진한(秦漢)의 고비(古碑)를 연구하여 전서·예서(隸書)에 새로운 업적을 세웠다. 아울러 학서(學書)의 방법을 주장한 것이다. 첩학파는 행서(行書)·초서(草書), 비학파는 전서·예서·해서를 주제로 한 표현이 많다. 조선이 대한제국(大韓帝國)으로 개칭한 후, 시기적으로 보아 청(淸)의 영향력이 컸을 뿐만 아니라 청나라와의 빈번한 교류로 중국에서 유행했던 고증학(考證學)이나 금석학(金石學)에서 유래된 서풍(書風)을 받아들여 이것을 주류로 삼았으며 한편 재래(在來)의 서(書)를 답습하는 경향도 보인다. 청나라에서 유행하던 서풍(書風)을 좇으려는 경향은 옹동화와 오대징(吳大徵) 등의 내한(來韓)을 계기로 표면화되었으며 여기에 전기(前期)의 김정희(金正喜)를 중심으로 한 옹방강(翁方綱), 성친왕(成親王), 철보(鐵保), 하소기(何紹基) 등의 서풍을 들 수 있으며, 한편 동기창(董其昌), 미불, 소식(蘇軾) 등의 송(宋). 명(明)의 서풍과 구양순(歐陽詢), 안진경(顔眞卿)을 배우는 경향도 보인다. 특히 안법(顔法)의 유행은 전대에 볼 수 없던 현상이며 이것은 모두 청의 영향으로 이루어진 한말 서예의 한 경향이다. 재래 서풍을 답습하는 것은 한말 서예의 한 경향, 주로 지방을 중심으로 한 현상이다. 특히 사색당쟁(四色黨爭)의 여파는 서체에까지 영향을 미쳐 노론(老論)을 주축으로 하는 일부에서는 추사체와 청(淸)의 서풍에 관심을 두었고 소론(小論)측에서는 주로 신위(申緯)의 체를 숭상하여 신위가 시서화(詩書畵) 삼절(三絶)로 송(宋)의 소식(蘇軾)과 통한다 하여 소체(蘇體)를 숭상하기까지 하였으며 이러한 현상은 후대에도 여세를 미쳤다. *‘서법’(書法)은 문자를 쓰는 데에 필요한 점화(點畵), 문자를 쓰는 방법, 붓을 쥐는 방법, 운필법(運筆法)을 말한다. 방법은 일정불변한 것은 아니고 학문의 발달, 서가(書家)의 성격에 따라 저마다 독특한 서법이 나타나고 있다. *‘법첩’(法帖)은 습자(習字)의 자습서로서 또한 감상용으로서 고인의 우품(優品)을 돌이나 나무에 파서 새기고, 이것을 인쇄하여 책으로 만든 것을 말한다. 한 사람의 글씨를 모은 것은 ‘단첩(單帖)’, 많은 사람의 글씨를 모은 것은 ‘집첩(集帖)’이라 한다. *‘임서’(臨書)는 자습서를 곁에 놓고 보면서 쓰는 것, 그리고 그렇게 쓴 글씨를 말한다. 임서에는 형림(形臨)과 의림(意臨)이 있다. 형림은 자형(字形)을 충실하게 보고서 쓰는 것이며, 의림은 그 글씨의 뜻(마음)을 파악해서 표현함에 중점을 둔 방법이다. 이 밖에 배림(背臨)이라는 방법이 있는데, 이는 자습서를 잘 관찰하고서 충분히 그 뜻을 배우고 난 다음, 붓을 내릴 때에는 자습서를 보지 않고서 쓰는 것을 말한다. *‘자운’(自運)은 임서에 대응되는데, 타인의 글씨를 참고로 하지 않고 자기의 힘으로 공부하고 연구하여 제작하는 것과 그 작품을 말한다. 전체를 잘 마무리하는 것을 ‘장법(章法)’이라 한다. *‘낙관’(落款)은 낙성관지(落成款識)를 줄인 말로, 서화의 일단에 서명·압인하고 완성이 뜻을 표시하는 것을 말한다. *‘전각’(篆刻)은 서화 등의 낙관에 쓰이는 도장에 전서(篆書)를 새기는 것을 말한다. 문자가 붉게 바탕이 희게 압인되는 것을 주문(朱文)이라 하고, 그 반대를 백문(白文)이라 한다. 주문으로 새기는 것을 양각(陽刻), 백문으로 새기는 것을 음각(陰刻)이라고도 한다. 또한 각자(刻字)를 전각가(篆刻家), 새긴 것을 인장(印章)이라 하고, 역대의 고인(古印), 각 가각인(家刻印)의 인영(印影)을 모은 것을 인보(印譜)·인집(印集)·인존(印存)이라 부르고 있다. *‘묵적’(墨蹟)은 중국에서는 단순히 필적(筆蹟)을 말하는데, 한국이나 일본에서는 임제(臨濟)를 주로 한 선종승려의 필적을 특히 묵적이라 부르고 있다. 그 내용은 중국 및 한국의 선승이 쓴 인가장(印可狀)·게송·법어(法語)·자호(字號)·진도어(進道語)·시(詩), 액자(額子)·서장(書狀) 등 전부를 말한다. *‘감정’(鑑定)은 미술품 등의 진위(眞僞)·양부(良否)를 감별판정(鑑別判定)하는 것을 말한다. *‘탁본’(拓本)은 금속·기와·돌·나무 등에 새겨진 그림이나 문자를 베껴내는 것으로서 그 방법에는 사물에 직접 종이를 대고서 물을 칠한 다음 밀착시켜 솜뭉치 먹칠을 해서 두들기는 습탁(濕拓)과 석화묵(石花墨)으로 종이 위에서 문질러 베끼는 건탁(乾拓)의 두 가지가 있다. *‘쌍구진묵’(雙鉤塡墨)은 필적 위에 얇은 종이를 얹어 놓고 문자의 윤곽을 사서(寫書)해서 그 속에 먹칠을 하는 방법이다. *‘우필’은 주인을 대신하여 서장(書狀)이나 각종 문서를 대필하는 직명을 말한다. 고문(古文)은, 전서가 성립된 이전의 서체로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문자인 귀갑수골문(龜甲獸骨文)을 위시하여 은·주 고동기(古銅器)의 명문(銘文) 등을 총칭하여 부르고 있다. 허진(許塡)의 서(序)의 설면에서는 공자의 벽중(壁中)에서 나온 문자를 가리키고 있다. 신(新)나라 왕망(王莽) 때에는 대전(大篆)까지도 고문이라 하였다.전서 篆書 고문의 자체와 서풍이 정리된 것으로서 전·소전의 2종이 있다. 대전은 주문이라고도 불리고 주의 사주가 만들었다고도 전해진다. 소전은 대전의 체세(體勢)를 길게, 점획(點劃)을 방정하게 하여 서사(書寫)를 편리하게 한 것으로서 진시황제의 문자통일 때에 승상 이사(李斯)가 창시하였다고 전해진다. 소전을 직선적으로 간략화한 것으로서 하급관리인 도례(徒隷) 사이에서 사용되었기 때문에 예서(隸書)라 부르고 있다. 이것이 모체가 되어 해행초(楷行草)의 삼체(三體)가 전개된다. 초서(草書)는 문자를 흘려서 쓴 서체이다. 서역(西域)에서 출토된 전한(前漢)의 목간(木簡)에 팔부의 파세와 리듬을 가진 속필의 문자(章草라고도 한다)가 있으며, 이로부터 지금의 초서로 진전되었다고 알려진다. 읽는 게 곤란하므로 일반화 되지 않았지만 변화가 풍부하기 때문에 예술작품에 많이 쓰이고 있다. 행서(行書)는 행압서(行押書)라고도 하고 해서와 초서의 중간 서체이다. 한대의 목간에는 오랜 예가 있고 역시 예서의 속필로서 발생한 것이다. 행압서란 교환하는 문서란 의미인데 행서는 빨리 써지고 읽기 쉽다는 잇점이 있다. 해서(楷書)는 예서에서 변이(變移)된 것으로서 필획(筆劃)에 생략이 없는 서체이다. 다른 서체보다 발생단계로서는 가장 뒤늦게 성립되었다. 실용이라기보다는 의식적인 정제(整齊)함을 요구해서 생긴 것이라 하겠다. 정서(正書) 진서(眞書)라고도 하여 현재 일반적으로 쓰고 있어 활자체에도 활용되고 있다. 비백(飛白)은 후한(後漢)의 채옹(蔡邕)이, 좌관(左官)이 솔로 글자를 쓰고 있는 것을 보고 고안했다고 한다. 따라서 본래 예서에서 필획속에 스치듯이 비치는 수법을 많이 내쓰는 기교를 특색으로 한다. 당시는 궁전의 액자에 사용되고 있었다. 예서체는 아니지만 당비(唐碑)나 공해(空海)의 글씨에 비백의 유례(遺例)가 있다. 집필법(執筆法)은 붓을 쥐는 방법을 말한다. 붓의 크기, 쓰는 문자의 대소에 따라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단구법(單鉤法) 집게손가락 하나를 붓에 걸고서 쓰는 방법이다. 세자(細字)를 쓰는 데 알맞다. *쌍구법(雙鉤法) 집게손가락·가운데 손가락의 두 개를 건다. 대자(大字)·중자(中字)에 알맞다. 그 밖에 촬관법(撮管法)·족관법(鏃管法)·염관법(捻管法)·악관법(握管法) 등이 있는데 요컨대 저마다 쓰기 쉬운 집필법을 연구하면 된다. 완법(腕法)은 문자를 쓸 때의 팔을 놓은 방법으로서 기호에 따라 또는 목적에 따라 몇몇 형이 있다. *침완법(沈腕法) 왼쪽 손바닥을 책상 위에 펴집고, 바른쪽 손목을 얹고서 쓰는 방법을 말한다. 세자에 알맞다. *제완법(提腕法) 오른쪽 팔꿈치를 책상에 가볍게 대고 쓰는 방법으로, 중간 글씨나 작은 글씨를 쓰기에 알맞다. *착완법(着腕法) 팔꿈치를 겨드랑에 붙이고 쓰는 방법이다. 중자·세자에 알맞다. *현완법(懸腕法) 팔을 들고 팔꿈치를 겨드랑에서 벌려서 쓰는 방법이다. 팔이 자유로워 대자·중자에 알맞다. *완법(腕法) 엄지손가락과 다른 네 손가락 끝으로 붓을 쥐고 팔꿈치를 전방으로 내펴고 붓을 수직으로 겨누고서 쓰는 방법이다. 회완집필법이라고도 하여 특수한 것이다. 문자를 쓸 때에 필요한 8종의 용필법(用筆法)으로서 그것이 영(永)자의 8개의 점획에 맞기 때문에 영자팔법(永字八法)이라 부르고 있다. 에 "팔법은 예자(隸字)로부터 생긴다……"하였으며, 오래전부터 그렇게 말해진 듯한데 당시대에 해서의 전형이 확립된 것에 곁들여 영자팔법을 습득하면 모든 문자에 응용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림과 같이 첫째 점을 측(側), 둘째의 횡획(橫劃)을 늑(勒), 셋째의 종획(縱劃)을 노(努), 그 날개를 적, 다섯째의 바른쪽 위로 긋는 선을 책(策), 왼쪽 밑으로 긋는 선을 약(掠), 일곱째의 바른쪽에서 왼쪽으로의 선을 탁(啄), 바른쪽 밑으로 터는 선을 책이라 한다. 초학자를 상대로 하나 그다지 가치있는 기법은 아니다. 간가결구법(間架結構法)은 점획 사이의 띠는 방법(間架), 짜맞추는 방법(結構)을 생각해서 밸런스 있게 문자를 조형(造型)함을 말한다. 건축적인 아름다움을 갖는 해서를 주체로 한 조형이론이다. 장봉(藏鋒)이란 붓의 수(穗) 끝을 필획 속에서 감싸고 밖으로 나타내지 않는 것으로서 직필(直筆)이라고도 한다. 이에 대하여 붓수 끝을 획의 외측에 대어 외면에 봉(鋒)이 드러나는 것을 노봉(露鋒) 또는 측필(側筆)이라 한다. 부앙법(俯仰法)은 문자를 쓸 때 선의 방향에 거슬리지 않고 붓을 쥔 손이 위를 보게 하거나 밑을 보게 하거나 하여 심하게 움직여서 쓰는 방법이다. 즉 왼쪽으로 운필(運筆)할 경우에는 손바닥은 밑을 보게 되고 오른쪽으로 움직일 때에는 위를 보게 된다. 역입평출(逆入平出)은 청시대의 포세신(包世臣)이 제창한 운필법의 일종으로서 글자를 쓸 경우 붓의 봉(鋒:끝)을 역으로 눌러서 운필해 나가는 방법이다. 기(氣)가 넘치는 글씨를 쓰자면 역입평출의 방법이어야 된다고 한다. 문방구(文房具)는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릴 때, 책을 읽을 때 사용하는 물건이다. 줄여서 문구라고도 한다. 좁은 의미로는 문방사우 라고 해서, 종이, 붓, 먹, 벼루를 가리키기도 하나, 넓은 의미로는 글자의 뜻 그대로 여러가지 용구를 포함하여 말한다. 붓 붓에는 양, 이리, 족제비, 말, 고양이 들의 털이 쓰인다. 모질에 의하여 유모·강모·겸호가 있으며, 그 형태에 따라 장봉·중봉·단봉·작두필·면상필·유엽필의 이름이 있다. 또한 털을 풀로 굳히지 않는 풀어진 붓도 있다. 먹 송지를 태운 그을음을 아교 용액으로 다져서 굳힌 것이다. 흑색 외에 파랑·주홍빛 다색의 먹도 있다. 중국의 고묵은 명의 정군방제가 유명하다. 벼루(硯) 묵색을 발하는 좋은 벼루는 예부터 문인 사이에서 애완 진중되었다. 단계연·음주연·조하록석이 최상품으로 알려져 있다. 종이(紙) 닥나무나 삼아의 수피를 원료로 한다. 현재 일반적으로는 반지·아선지가 사용되며 수옥지·안피지·서봉지·마지 등은 고급 서화용으로서 진중된다. 표구(表具) 작품의 형식이기도 하다. 종이·비단·세면등에 쓰인 서화는 보존하기 위하여 안감이 대어지고(얇고 질긴 종이를 밀착), 감상용으로 여러 가지 형식으로 만들어진다. 진표구·명조표구·대표구 따위의 형이 있으며, 서화의 내용·용도에 따라 다음과 같은 형식으로 표장된다. 족자·두루마리·책·액자·병풍·횡피 등이 있다. 한호의 증류여장서첩 추사 김정희의 계산무진. 추사체로 쓰여 있다. *안평대군 이용(安平大君 李瑢, 1418년~1453년) 훈민정음 혜례본의 서체는 그의 작품이다. *한호(韓濩, 1543년~1605년)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서예가이다. *헌경왕후 홍씨(獻敬王后 洪氏, 1735년~1815년) 조선 후기의 한글 서예가이다. 한중록(閑中錄 또는 恨中錄)을 썼다. *김정희(金正喜, 1786년~1856년)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서예가이다. 추사체를 만들었다. *안중근(安重根, 1879년~1910년) 독립 운동 중에도 200여개의 유묵을 남겨 그중 20개가 보물 569호로 지정됐다. *이완용(李完用, 1856년~1926년) 유명 작품으로 독립문 현판이 있다. *소전 손재형(素筌 孫在馨, 1903년~1981년) 한글서법을 전획 필법으로 전개시켜 놓은 점이 높이 평가되고 있다. *청남 오제봉(菁南 吳濟峰, 1908년~1991년) 해인사에 승문에 있었는데 그곳에서 글을 익힌 유명 서예인이다. *원곡 김기승(原谷 金基昇, 1909년~2000년) 원곡체라는 독특한 서체를 창조하였고, 한국서예사를 저술하고, 원곡서예상을 제정하였다. *검여 유희강(劍如 柳熙綱, 1911년~1976년) 육서에 모두 능통하였다.고혈압으로 오른손에 마비가 왔지만 집념으로 왼팔로 서예에 정진해 독특한 경지를 이뤘다. *어천 최중길(箊泉 崔重吉, 1914년~1979년) 초서법에 있어서 탁월한 작가로 꼽힌다. 전각목각 또한 능하다. *시암 배길기(時菴 裵吉基, 1917년~1999년) 전서, 그중에서도 소전에 매우 능한 작가다. *철농 이기우(鐵農 李基雨, 1921년~1993년) 근대 최고의 전각가로 꼽힌다.역대 대통령들의 사인(도장)을 각인했다. *서체 **한글 글꼴 **한자 글씨체 *서예와 관련된 기술 **금석학 **탁본학 한국의 서예가 분류:동아시아의 문화
유럽 연합 () 약칭 EU 는 유럽에 위치한 29개의 회원국 간의 정치 및 경제 통합체이다. 유럽 연합의 인구수는 5억 1,300만 명으로, 영토는 4,475,757 km2이다. 유럽 연합은 회원국 전체에 적용되는 표준화된 법을 통해 유럽 단일 시장을 발전시키고 있다. 유럽 연합의 정책은 사람, 상품, 자본, 그리고 서비스가 국내 시장에서 자유롭게 이동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국내 문제와 정의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고, 농업, 어업 그리고 지역 개발에서 공동 정책을 채택한다. 솅겐 지역에서의 여행에서, 유럽 연합은 출입국관리를 폐지했다. 1999년 유로존이 설립되어 2002년 발효되었으며, 유로를 통화로 사용하는 19개의 회원국으로 구성되어 있다. 유럽 연합과 유럽 시민권은 1993년 마스트리흐트 조약이 발효되었을 때 설립되었다. 유럽 연합의 기원은 1951년 파리 조약으로 창설된 유럽 석탄 철강 공동체와 1957년 로마 조약으로 창설된 유럽 경제 공동체이다. 유럽의 공동체를 창립한 것으로 알려진 회원국은 벨기에, 프랑스, 이탈리아,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서독 6개국으로, 이들을 합쳐 이너 식스라고 부른다. 위원회와 그들의 계승자들은 새로운 회원국이 가입하면서 확장되었다. 유럽 연합의 헌법적 기초에 대한 마지막 주요 합의사항은 2009년 리스본 조약에서 체결되었다. 아직 유럽 연합에서 탈퇴한 국가는 없지만, 영국이 2016년 6월 유럽 연합에서 탈퇴하는 것을 결정했고, 2019년 3월 29일을 목표로 브렉시트 협상을 개시 중이다. 전 세계 인구의 7.3%을 차지하는 유럽 연합의 2017년 기준 국내총생산은 19조 6700억 달러로, 전세계 GDP의 24.6%를 차지한다. 또한 유럽 연합 회원국 모두는 인간 개발 지수에서 높은 수치를 보유하고 있다. 2012년 유럽 연합은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공동 외교 및 보안 정책을 통해 유럽 연합은 외국과의 무역 및 영토 방어의 역할을 발전시켰다. 유럽 연합은 세계 곳곳에 정치 사절단을 파견했으며, 유엔, 세계 무역 기구, G7, G20 등에 대표단을 보내기도 한다. 유럽 연합의 세계적 영향력 때문에, 유럽 연합은 종종 신흥 강대국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유럽 연합의 언어는 가입국 각각의 공용어로 정해져 있어서 2013년 7월 1일 이후에는 총 공용어 수가 24개나 된다. 따라서 유럽 연합 이사회의 정식 명칭도 공용어와 같은 수만큼 있다. 시간 순서에 따라 바뀌는 EU의 범위 유럽 연합의 기원은 1946년 9월 19일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이 스위스의 취리히에서 한 유명한 유럽에 관한 연설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 연설에서 윈스턴 처칠은 유럽에 유엔과 유사한 기구의 필요성을 언급하였다. 1950년 5월 9일 장 모네가 구상한 석탄 및 철광석 채굴을 위한 프랑스-서독 간의 공동 사무소 설치에 관한 계획을 당시 프랑스의 외무부 장관을 역임하고 있던 로베르 쉬망이 쉬망 선언(Déclaration Schuman)을 통해 공식적으로 건의함으로써 최초로 유럽 공동체에 대한 생각이 중앙 유럽 국가 간에 토론되기 시작하였다 (이 역사적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5월 9일은 유럽의 날로 지정되어 있다). 1951년 4월 18일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6개국은 석탄 및 철광석 채굴에 관한 조약을 (유럽 석탄 철강 공동체, ECSC) 체결함으로써 유럽 내의 시장권을 거의 장악하였다. 2000년대에 들어 기존 회원국인 서유럽 국가들보다 상대적으로 낙후된 중앙유럽 국가들이 가입하면서 여러 문제점들이 발생하고 있다. 저렴한 중앙유럽의 노동력이 서유럽으로 몰려오면서 서유럽 국가들은 실업난을 겪고 있으며, 중앙유럽 국가들은 자국의 우수한 인재들이 서유럽으로 빠져나가 국가 발전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유럽 연합은 경제 통합을 넘어 정치적 통합을 이루는 과정으로서, 2009년 12월 1일 발효된 리스본 조약에 의해, 순번의장 제도가 폐지되고 상임의장인 유럽 이사회 의장 자리가 신설되어, 2009년 11월 19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특별정상회의에서 27개국 정상이 만장일치로 헤르만 반 롬푀이 총리를 초대 상임의장에 선출되어, 2009년 12월 1일부터 헤르만 반 롬푀이가 의장을 맡고 있다. 2012년에 독일과 프랑스 등 EU의 주요국들이 유럽연방의 직전 단계에 해당되는 새로운 EU 통합안의 골격을 내놓았다. 하지만 권고안이 되었고 EU 통합에 부정적인 영국은 처음부터 논의에서 빠졌다. 유럽​​ 연합(EU)은 유럽 연합 회원국 내에서 사용되는 많은 언어와 방언 중에서 24개의 언어를 공식 언어 및 실무 언어로 정하고 있다. 이에 해당하는 언어는 그리스어, 네덜란드어, 덴마크어, 독일어, 라트비아어, 루마니아어, 리투아니아어, 몰타어, 불가리아어, 스웨덴어, 스페인어, 슬로바키아어, 슬로베니아어, 아일랜드어, 에스토니아어, 영어, 이탈리아어, 체코어, 크로아티아어, 포르투갈어, 폴란드어, 프랑스어, 핀란드어, 헝가리어이다. 유럽 의회는 문서와 본회의 관련 자료등을 모든 언어로 번역한다. 일부 기관 내부 실무 언어와 같은 경우 소수 언어(갈리시아어, 게일어, 바스크어, 웨일스어, 카탈루냐어)를 사용하지만 이들 언어는 공식 언어가 아니다. 유럽 연합(EU)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외국어 비율을 계산하면 영어가 인구의 38%로 가장 많고 독일어가 12% 프랑스어가 11% 순으로 나타나고 있다. 유로 바로미터(Eurobarometer)에 의해 실시된 2012년 유럽 연합의 종교성에 대한 새로운 여론 조사에 따르면, 기독교는 유럽 연합 시민의 72%를 차지하는 유럽 연합에서 가장 큰 종교이다. 개신교는 12%를 차지하는 반면 천주교는 48%의 EU 시민을 차지, 유럽 연합에서 가장 큰 기독교 교파였다. 그리고 동방 정교회는 8%를 구성하고, 다른 기독교인들은 유럽 연합 인구의 4%를 차지한다. 비 신자로는 불가지론 16%, 무신론자 7%, 이슬람교 2%이다. 1957년 창립 회원국은 네덜란드, 서독(현재의 독일), 룩셈부르크, 벨기에, 이탈리아, 프랑스 총 여섯 국가이다. 이후 1973년에는 그린란드를 제외한 덴마크, 아일랜드, 영국이, 1981년에는 그리스가, 1986년에는 스페인, 포르투갈이 가입했다. 1990년에는 동서독 통일로 인해 옛 동독이 서독에 합병되면서 유럽 연합의 회원국이 되었다. 1995년에는 스웨덴, 오스트리아, 핀란드가, 2004년 5월 1일에는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몰타,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에스토니아, 체코, 키프로스, 폴란드, 헝가리가 가입했으며, 2007년 1월 1일에는 루마니아, 불가리아가 가입했다. 2013년에는 크로아티아가 28번째 회원국이 되었다. 2016년 6월 23일 영국이 탈퇴를 신청하였다. 또한 유럽은 아니지만 몇몇 유럽 연합 회원국의 속령도 유럽 연합의 일부이다. 스페인의 카나리아 제도, 세우타와 멜리야 (아프리카) 포르투갈의 아조레스 제도와 마데이라 제도(아프리카) 프랑스의 과들루프(서인도 제도 - 소앤틸리스 제도), 레위니옹(아프리카), 마요트(남아프리카), 마르티니크(서인도 제도 - 소앤틸리스 제도), 프랑스령 기아나(남아메리카) 2016년 2월 20일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는 영국의 유럽 연합 회원국 지위를 두고 2016년 6월 23일 투표에 부치기로 결정했다. 이 날 영국은 유럽 연합에서 탈퇴하기로 결정했다. 유럽 연합의 탈퇴는 영국 독립당에 의해 적극 추진되었다. 국민투표 결과, 2016년 6월 24일에 4%p 차로 영국의 유럽 연합 탈퇴가 결정되었다. 이 사건을 브렉시트(Brexit)라고 한다. 이후 유럽 연합은 영국의 회원국 자격을 심사하게 된다. 유럽 이사회(European Council) 또는 EU 정상 회의는 유럽 연합 회원국의 국가 원수 또는 정부 장관(각료)과 유럽 이사회 의장, 유럽 위원회 위원장으로 구성되고 마스트리흐트 조약에 규정이 있는 기관이다. 이사회 회의에는 EU 외교·안보 정책 대표도 참석하며, 이사회 의장이 의사 진행을 한다. 입법 권한은 주어지지 않지만 유럽 이사회는 중요한 문제를 다루는 기관이며, 또한 여기서 이루어진 결정은 EU의 일반적인 정치 지침을 정하는 기본이 된다. 이사회는 반년 동안 적어도 2회 정도 회의를 가지며, 주 회의 장소는 브뤼셀의 유스투스 립시우스 빌딩이다. 유럽 연합 이사회(Council of the European Union) 또는 EU 각료 회의는 유럽 연합의 입법·정책 결정 기관이다. 이사회 회원국들의 각료 1명씩으로 구성된 집단체로서, 회원 각국의 국익을 직접적으로 표현하고 대변하는 정부간 기구이다. 그 구성은 다루는 주제(외무,농무,재무 등)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나 일반적 사항을 다룰 때는 보통 각국의 외무 장관으로 구성되고, 전문적 사항을 다룰 때만 소관업무의 담당 장관들로 구성된다. 유럽 연합본부는 벨기에의 브뤼셀에 있다. 하지만 4월, 6월 및 11월에 개최되는 각료급 회담은 룩셈부르크의 수도인 룩셈부르크시에서 열린다. 유럽 의회(European Parliament)는 유럽 연합의 입법 기관이다. 27개 유럽 연합 회원국의 시민들에 의해 5년에 한 번씩 직접선거로 선출된다. 본부는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에 있다. 주요한 입법기능은 각료 이사회가 주로 행사하지만, 마스트리흐트 조약 이후로는 입법기능과 정치적 영향력이 점차 강화되고 있다. 유럽 의회는 주도적으로 입법을 할 수는 없지만 많은 정책 영역에서 수정 요구나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 특정 정책에 대해서 조언만 할 수 있는 경우도 있다. 유럽 의회는 또한 유럽 집행 위원회를 감독하며 집행 위원 임명 동의를 하며 불신임 투표를 통해 해임할 수 있다. 또한 유럽 연합의 예산 감독권을 가진다. 이전의 유럽 안보 협력 기구나 유럽 평의회, 서유럽 연합 등도 의회를 가지고 있었지만 모두 회원국의 의회에 의해 임명되었다. 하지만 유럽 의회는 1979년 이래 유일하게 시민들에 의해 직접 선출되고 있다. 국가별 연합 의회 의원 수 회원국 2007년 (니스 조약) 2009년 (니스 조약) 2014년 (리스본 조약) 2015년 (현재) 99 99 96 96 78 72 74 74 78 72 73 73 78 72 73 73 54 50 54 54 54 50 51 51 35 33 33 32 27 25 26 26 24 22 22 21 24 22 22 21 24 22 22 21 24 22 22 21 24 22 22 21 19 18 20 20 18 17 19 18 18 17 18 17 14 13 13 13 14 13 13 13 14 13 13 13 13 12 12 11 13 12 12 11 - - - 11 9 8 9 8 7 7 8 8 6 6 6 6 6 6 6 6 6 6 6 6 5 5 6 6 EU-28 785 736 751 751 유럽 사법재판소 *유럽 중앙은행(ECB) 로마 조약 마스트리히트 조약 니스 조약 리스본 조약 유럽 평의회 유럽 헌법 유럽 통합화 유엔 브렉시트 유럽 연합 웹사이트 주한 유럽연합 대표부 사이트 유럽 연합 의회 웹사이트 주벨기에 대한민국 대사관 겸 주유럽 연합 대한민국 대표부 분류:1993년 설립 분류:유엔 총회 옵서버 분류:노벨 평화상 수상 단체 분류:G20 회원국
(1905년) 메이지 시대 ()는 메이지 유신 이후의 메이지 천황의 통치를 가리키는 이름으로, 1868년 1월 3일 왕정복고의 대호령에 의해 메이지 정부가 수립된 후 1912년 7월 30일 메이지 천황이 죽을 때까지 44년간이다. (메이지 천황의 즉위는 메이지 유신 1년 전인 1867년 2월이다.) 일본 제국의 전반기에 해당되는 시기이며, 메이지 유신부터 신해 혁명 종결까지의 시기하고 일치한다. 메이지(明治)는 《역경》(易經) (說卦傳 4장)의 성인남면이청천하, 향명이치(聖人南面而聽天下, 嚮 明 而 治 , 성인은 남쪽을 향해 천하의 의견을 듣고, 밝은 것을 향하여 다스린다.)에서 따온 글자이다. 메이지 년간의 정치 체제는 크게 2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메이지 정부 의 시기 (1868년 ~ 1890년), 두개는 일본제국 헌법 시행 이후 (1890년 ~ 1912년)이다. 메이지 정부는 일본 제국의 초기 정부이다. 메이지 시대의 대외 관계에서 특징적인 요소는 불평등 조약의 철폐 에 집념을 불태우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의 제국주의 외교의 시작은 메이지 유신의 일본제국의 성립이다. 1868년부터 1911년까지 (즉 메이지 시대)은 도쿠가와 막부가 체결한 불평등 조약을 상속했다. 또한 불평등 조약이 전폐되었다. 1911년 중국에서 신해 혁명이 발발한 해이기도했지만, 쑨원과 장제스 등 대륙시기 중화민국의 지도자들은 메이지 년간의 일본제국에 유학 하고 있었다. 불평등 조약의 철폐를 지향하는 정부의 활동은 1880년대의 "녹명관을 외교"가 상징적이다. 또, 메이지 정부는 국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외국인 초빙사"을 초청하였고, 그들은 서양 문명의 보급에 의한 일본의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일본의 산업 혁명 이 메이지 시대에 일어났다. "외국인 초빙사"의 초빙을 비롯해 서양식 산업이 대량 신속하게 수입되어 일본화되어 갔다. 산업 혁명 시대의 일본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일본 최초의 철도 개업 (1872년), 토미오카 제사장, 국내 권업 박람회 (1877년), 일본에서 전화 개통 (1900년), 야하타 제철소 (1901년 개관) 등이 대표적이다. 1년 (1868년) - 에도 막부 붕괴. 2년 (1869년) - 보신 전쟁 종료. 판적봉환. 4년 (1871년) - 폐번치현, 청일수호조약, 단발령으로 일본식 상투인 촘마게가 폐지됨. 5년 (1872년) - 그레고리력을 도입. 6년 (1873년) - 징병제 실시. 메이지 6년 정변(사이고 다카모리, 이타가키 다이스케등이 하야) 9년 (1876년) - 강화도 조약, 폐도령으로 무사계급이 칼을 차고 다니지 않게 됨. 10년 (1877년) - 세이난 전쟁. (~ 1878년) 12년 (1879년) - 오키나와현을 설치 (류큐 처분) 22년 (1889년) - 일본제국 헌법 공포. 27년 (1894년) - 청일전쟁 발발. ( ~1895년) 28년 (1895년) - 시모노세키 조약. 37년 (1904년) - 러일전쟁 발발. ( ~1905년) 42년 (1909년) -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함. 43년 (1910년) - 한일 병합 조약으로 대한제국을 병합함. 45년 (1912년) - 메이지 천황 사망. 가쓰 가이슈 구로다 기요타카 고무라 주타로 기도 다카요시 나쓰메 소세키 나카에 조민 노기 마레스케 다카스기 신사쿠 도고 헤이하치로 마사오카 시키 메이지 천황 사이고 다카모리 쓰다 우메코 야마가타 아리토모 에토 신페이 오쿠마 시게노부 오쿠보 도시미치 요사노 아키코 이노우에 가오루 이와쿠라 도모미 이타가키 다이스케 이토 히로부미 김옥균 이완용 후쿠자와 유키치 (주의) 메이지 5년까지는 구력()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서력(그레고리력)의 연도와 정확하게 일치하지는 않는다. 메이지 원년 2년 3년 4년 5년 6년 7년 8년 9년 10년 11년 12년 13년 14년 15년 서기 1868년 1869년 1870년 1871년 1872년 1873년 1874년 1875년 1876년 1877년 1878년 1879년 1880년 1881년 1882년 육십간지 무진 기사 경오 신미 임신 계유 갑술 을해 병자 정축 무인 기묘 경진 신사 임오 메이지 16년 17년 18년 19년 20년 21년 22년 23년 24년 25년 26년 27년 28년 29년 30년 서기 1883년 1884년 1885년 1886년 1887년 1888년 1889년 1890년 1891년 1892년 1893년 1894년 1895년 1896년 1897년 육십간지 계미 갑신 을유 병술 정해 무자 기축 경인 신묘 임진 계사 갑오 을미 병신 정유 메이지 31년 32년 33년 34년 35년 36년 37년 38년 39년 40년 41년 42년 43년 44년 45년 서기 1898년 1899년 1900년 1901년 1902년 1903년 1904년 1905년 1906년 1907년 1908년 1909년 1910년 1911년 1912년 육십간지 무술 기해 경자 신축 임인 계묘 갑진 을사 병오 정미 무신 기유 경술 신해 임자 부국강병 식산흥업 폐불훼석 문명개화 서양 문명 전임 - 일본 제국 메이지 시대 1868년 ~ 1912년 후임 다이쇼 시대 1912년 ~ 1926년 분류:일본의 연호
법 (法)은 산스크리트어 다르마 (Dharma)의 번역으로서, "지키는 것지지하는 것"이 원뜻이다. 불교에서 법은 그 뜻이 매우 다양하며, 교법, 최고의 진리, 법칙, 도리, 존재, 실체, 또는 모든 존재(일체법) 등의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불교의 불법승(佛法僧) 3보(三寶) 가운데 법보(法寶)라고 할 때의 법은 교법(敎法)이법(理法)행법(行法)과법(果法)의 4법을 뜻한다. 이 중에서 교법(敎法)은 좁은 뜻으로는 고타마 붓다의 가르침을 뜻하고, 넓은 뜻으로는 3세제불(三世諸佛)의 가르침 즉 모든 부처 즉 깨달은 자의 가르침 또는 불교 경전들에 나타난 가르침 전체를 뜻한다. 이법(理法)은 교법이 가리키고 해설하고 있는 진리를 뜻하며, 행법(行法)은 이법 즉 진리를 성취하게 하는 계(戒)정(定)혜(慧) 등의 방편 또는 수행을 뜻하며, 과법(果法)은 행법이 원만해졌을 때 증득되는 이법 즉 진리 즉 열반을 뜻한다. 따라서, 법보(法寶)의 법은 불교의 교의(가르침)수행(도리, 방편)진리를 모두 뜻한다. 부파불교의 아비달마와 대승불교의 유식학과 불교 일반에서 일체법(一切法), 법상(法相) 또는 제법분별(諸法分別)이라고 할 때의 법은 존재 또는 실체 를 뜻하며, 주로 현상 세계의 존재 즉 유위법을 뜻한다. 그리고 이러한 존재 또는 실체 즉 법의 본질적 성질을 자성(自性) 또는 자상(自相)이라 한다. 이에 비해 법성(法性)이라고 할 때의 법은 진리 즉 무위법의 진여(眞如)를 뜻하며 법성을 다른 말로는 진성(眞性)이라고도 한다. 법의 인도에 있어서의 기원은 오래된 것으로서 베다에서는 신적 의지(神的意志)에 대해 인간 편에 서서 인간생활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일반적으로 최고의 진리, 혹은 종교적 규범, 사회 규범(법률제도관습), 행위적 규범(윤리도덕) 등 넓은 범위에 걸친 규범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불교에서도 법은 그 뜻이 매우 복잡하며 다음과 같이 여러 가지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 교법 교설(敎說)이나 성전(聖典) # 최고의 진리 깨달음의 내용 # 법칙 일체의 현실 존재로 하여금 현재의 상태로 존재케 하고 있는 법칙과 기준 # 도리 인간이 실천하여 생활해야 할 도리도(道) 또는 규정 # 존재, 실체 객관적으로 독립된 실체 또는 존재 # 모든 존재(일체법) 법(법칙)에 의해서 지탱되고 있는 유형무형, 심적물적의 일체 존재(存在 현상), 즉 의식의 대상이 되는 모든 것 일체법 (一切法) 만법 (萬法) 또는 제법 (諸法)은 모든 법 즉 일체(一切)의 존재法 즉 모든 존재法 를 뜻하는 낱말이다. 줄여서 일체 (一切)라고도 한다. 법(法)이라는 낱말은 모든 존재(일체법)를 뜻하는 경우로도 사용되는데, 이와 같이 법을 일체의 존재 또는 모든 존재라고 보는 견해는 인도사상(印度思想) 일반에서는 볼 수 없는 불교 독자의 것이며 법에 관한 다방면의 연구가 불교의 중요한 과제로 되어 있다. 특히, 원시불교에 이은 부파불교의 시대에서는 모든 존재(일체법)를 분석하여 고집멸도의 사성제를 뚜렷히 밝히는 작업이 크게 일어났으며, 이러한 분석법은 후대의 대승불교의 유가유식파의 유식론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법(法)에는 객관적으로 독립된 실체 또는 존재라는 의미가 있는데, 임지자성 궤생물해 (任持自性 軌生物解)는 이러한 의미의 법을 정의할 때 흔히 사용되는 문구이다. 중국 법상종의 규기(窺基)는 《성유식론술기(成唯識論述記)》에서 법(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는데, 이 진술을 더 간단히 요약하여 "임지자성 궤생물해(任持自性 軌生物解)"라고 한다. 이 정의는 대승불교의 유식유가행파의 법(法)에 대한 정의라고 할 수 있다. 즉, 임지자성 (任持自性)은 자신만의 자성(自性) 또는 자상(自相), 즉 본질적 성질 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고, 궤생물해 (軌生物解)는 해당 사물에 대한 앎解, 인식, 요해, 요별, 지식을 낳게 하는 궤범이라는 뜻이다. 궤범은 사물과 사물 사이에 작용하는 규범, 즉 법칙적 관계를 뜻하는데, 궤생물해 는 해당 사물(법)이 다른 사물(법)들에 대해 가지는 법칙적 관계, 즉 본질적 작용 이 해당 사물(법)을 앎解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5온 중의 하나인 수온, 즉 마음작용 중의 하나인 수(受)는 고수(苦受)낙수(樂受)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의 3수(三受)로 나뉘는데, 3수는 다음과 같이 다른 마음작용인 촉(觸)과 욕(欲)과의 관계에서 파악할 때 아주 명료하게 이해된다. 즉, 법을 임지자성 궤생물해(任持自性 軌生物解) 라고 정의하는 것은, 법은 자기만의 자성 또는 자상을 지니고 있어서 그 자성 또는 자상은 해당 법에 대한 앎解, 인식, 요해, 요별, 지식의 궤범이 되어 해당 법을 종합적으로 인식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며, 또한 이러한 사물 또는 존재를 법(法)이라 한다는 것이다. 초기불교 이래 불교에서는 모든 존재(諸法 또는 一切)를 분석함에 있어 일반적으로 5온(五蘊), 12처(十二處) 또는 18계(十八界)의 세 분류법으로 분석하였다. 아비달마에 의하면, 모든 존재를 분석함에 있어 이러한 세 가지 분류법이 있는 이유는 가르침을 듣는 사람들의 근기에 상근기중근기하근기의 세 가지 유형이 있기 때문이다. 상근기에게는 5온을, 중근기에게는 12처를, 하근기에게는 18계를 설하였다. 부파불교의 설일체유부에서는 이러한 5온12처18계의 분류방식을 더욱 발전시켜 모든 존재를 색법(色法, 11가지), 심법(心法, 1가지), 심소법(心所法, 46가지), 불상응행법(不相應行法, 14가지), 무위법(無爲法, 3가지)의 5그룹의 75가지 법으로 분류하였는데, 이를 5위 75법(五位七十五法)이라 한다. 대승불교의 유식유가행파와 중국의 법상종에서는, 마찬가지로 5온12처18계의 분류방식을 더욱 발전시켜, 모든 존재를 심법(心法, 8가지)심소법(心所法, 51가지)색법(色法, 11가지)심불상응행법(心不相應行法, 24가지)무위법(無爲法, 6가지)의 5그룹의 100가지 법으로 분류하였는데, 이를 5위 100법(五位百法)이라 한다. 삼귀의 불보 승보 5온 12처 18계 5위 75법 5위 100법 22문 제문분별 분류:불교 용어 분류:힌두교 용어 분류:불교 교의
쇼팽의 야상곡중 대표작인 Op.9 no.2 녹턴 (,), 또는 야상곡 (夜想曲)은 주로 밤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그리고 밤의 성질을 띄는 악곡의 장르이다. 역사적으로, 녹턴은 중세시대 아침예배나 정시과 (결혼식을 거행하는 시간)때 쓰여왔던 오래된 단어이다. 녹턴이라는 명칭은 18세기때 저녁파티에 주로 연주되던 곡을 일컫는 것이었다. 가끔은 모짜르트의 quadraphonic Notturno in D, K.286에서 볼 수 있듯 이태리어 Notturno 를 일컫기도 했다. 당시에는 밤과의 연관성은 크게 없었지만, 굳이 연관성을 찾자면 주로 밤에 연주되었던 세레나데같은 곡이였다. 녹턴은 19세기때 주로 피아노 독주용 음악으로 번창하였다. 아일랜드 출신의 작곡가 존 필드가 최초로 야상곡을 작곡했다. 존 필드는 주로 아르페지오와 칸타빌레식의 멜로디, 그리고 기타같은 반주 스타일을 반영한 야상곡을 작곡하였고, 최초의 야상곡 작곡가이기 때문에 녹턴의 아버지’ 라고 불리기도 한다. 야상곡 작곡의 선구자는 존 필드이지만, 가장 유명하고 널리알려진 야상곡 작곡가는 21개의 야상곡을 작성한 프레데리크 쇼팽이다. 이그나 레이바흐는 “다섯번째 녹턴” 이라는 19세기때 제일 유명했었던 야상곡을 작곡했지만, 지금은 거의 잊혀진 작곡가이다. 훗날에 야상곡 작곡가들중에서 이름이 알려진 작곡가들은 가브리엘 포레, 알렉산더 스크리아빈, 에릭 사티 (1919), 프랜시스 풀랑크 (1989), 피터 스쿨트롭 등이다. 벨라 바르토크는 밤의 악장 이라는 피아노 야상곡에서 자연의 소리를 흉내내었다. 예를들자면, 새의 지저귀는 소리나 다른 숲의 곤충들의 소리 외에도, 전체적으로 조용하고 고독한 느낌까지 드는 멜로디로 곡을 형성하였다. 미국 작곡가인 로웰 리버만은 11개의 야상곡을 작곡하였다. 20세기에 작곡된 야상곡 중 대표적인 것들을 더 꼽자면 마이클 글렌 윌리엄스, 새뮤얼 바버, 그리고 로버트 헬프스가 작곡한 야상곡들이 있다. 또 다른 야상곡의 예문은 펠릭스 멘델슨이 작곡한 오케스트라용 한여름 밤의 꿈 (1848) 의 연주음악, 클라데 데부시가 작곡한 오케스트라와 합창용 야상곡과 디미트리 쇼스타코비치가 작곡한 바이올린용 야상곡 (Violin Concerto No.1, 1948) 이 있다. 여기서 알수있듯이, 야상곡은 피아노 독주용 외에도 다양하게 작곡이 되었다. 하지만, 이들의 야상곡을 들어보면 쇼팽과 존 필드가 작곡한 야상곡과의 느낌이 아예 다르다는것을 알수있다. 야상곡은 종종 평온하고, 표현력이 풍부하고 서정적이고, 간혹 우울하거나 음침한 느낌이라는 인상을 주로 주지만, 많은 야상곡들을 보자면 이 외에도 다양한 감정의 표현이 있다. 데부시의 두번째 오케스트라용 야상곡 "페테스" 와 카롤 시마노우스키의 "Nocturne and Tarantella" (1915), 그리고 카이코스루 사푸르지 소랍지의 "Symphonic Nocturne for Piano Alone" (1977-78)같은 경우는 매우 활기차고 흥이 돋는 느낌을 준다. 녹턴이라는 단어는 후에 미술분야에서도 쓰이기도했다. 제임스 아봇 맥닐 휘슬러는 자신의 화려하고 아름다운 스타일의 그림을 "녹턴 페인팅 painting" 이라고 불렀다. 실제로 드뷔시의 야상곡들은 휘슬러의 그림에 영감을 받은것이라고 한다. *샤를 발랑탱 알캉 5개의 피아노용 야상곡 조르주 비제 프리미엄 바장조 녹턴 Op. 2 와 라장조 야상곡 프레데리크 쇼팽 21개의 피아노용 야상곡 칼 체르니 17개의 피아노용 야상곡 클로드 드뷔시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용 야상곡 3개, 그리고 피아노용 야상곡 1개를 작곡함 가브리엘 포레 13개의 피아노용 야상곡 존 필드 야상곡의 선구자 미하일 글린카 총 3곡의 야상곡 내림마장조, 바장조, "후회" 케빈 켈러 총 10개의 피아노용 야상곡 이그나 레이바흐 그의 다섯번째 야상곡 (나머지 야상곡들은 다 잘 알려지지 않음) 로웰 리버만 11개의 피아노용 야상곡 프란츠 리스트 "En Reve",사랑의 꿈, 세 종류의 노투르노가 있다. 펠릭스 멘델스존 한여름 밤의 꿈 음악 프랑시스 풀랑크:8개의 피아노용 독주곡 (1929) 에릭 사티 5개의 피아노용 야상곡 (1919) 클라라 슈만 (클라라 비크) 바장자 야상곡 Op.6 No.2 (1819-1896) 알렉산드르 스크랴빈:총 4개의 야상곡을 작곡함. 그 중 한곡은 왼손용 야상곡. 카이코스루 샤푸르지 소랍지 30개가 넘는 피아노용 야상곡 Harrison Slater|Wignall, Harrison James, "Mozart and the Duetto Notturno Tradition", Mozart-Jahrbuch , 1993. Harrison Slater|Wignall, Harrison James, "Duetto notturno", The New Grove Dictionary of Music and Musicians , (ed. Sadie), London, MacMillan, 2000. Mozart s Notturno in D, K.286 Chicago Symphony Orchestra program notes "Nocturne (music)." Encyclopedia Britannica. Encyclopedia Britannica, n.d. Web. 10 Apr. 2014. (이 글의 원본) 분류:악곡의 형식
프레데리크 프랑수아 쇼팽 (, , 1810년 3월 1일~1849년 10월 17일)은 폴란드의 피아니스트·작곡가이다. “피아노의 시인” 이란 별칭을 가진 쇼팽은 가장 위대한 폴란드의 작곡가이자 가장 위대한 피아노곡 작곡가 중의 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프레데리크 프랑수아는 그가 20세 때 폴란드를 떠나고 프랑스에서 살게 되었을 때 쓰던 프랑스어 이름이다. 원래 이름은 프리데리크 프란치셰크 호핀 (이다. 바르샤바 근교에서 프랑스인 아버지 니콜라 쇼팽과 폴란드인 어머니 유스티나 크자노프스카 사이에서 태어났다. 쇼팽 자신과 가족은 쇼팽이 1810년 3월 1일에 태어났다고 말하지만 로마 가톨릭교회 세례 기록을 보면 2월 22일에 출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것을 근거로 쇼팽을 연구하는 사람의 3분의 2는 그의 생일이 2월 22일이 맞다고 보고 있다. 쇼팽의 재능은 일찍부터 두각을 나타내어 그것이 모차르트에 비견될 정도였다. 6세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고, 8세 때에 공연을 가졌다. 그의 천재성이 바르샤바에 보도되면서 귀족들에게 관심을 끌게 되었고 자선공연도 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첫 피아노 레슨은 1816년에 바이올리니스트 보이치에흐 지브니에게 받게 되었는데, 1822년 스승은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다고 하여 스스로 그만두었다. 이후 쇼팽은 바르샤바 콘소바토리의 교수이자 피아니스트인 빌헬름 뷔르펠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14세 때 바르샤바 중학교에 입학하여 작곡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며, 연극에도 흥미를 가지고 희곡을 써서 공연하기도 하였다. 1826년 바르샤바 음악원에 입학하였으며, 1829년 을 발표하고 빈에서 연주회를 열어 이름을 떨치자, 유럽 여러 나라로 연주 여행을 떠났다. 그가 빈에 도착하였을 때 바르샤바에 혁명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아버지에게 조국을 위하여 싸우겠다는 편지를 보냈으나, 아버지로부터 조국을 위해 음악을 열심히 하는 길도 애국이라는 답장을 받고, 열심히 노력한 결과 폴란드가 낳은 최초의 세계적인 음악가가 되었다. 1831년 파리에 도착하여 바르샤바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혁명이라는 격정적인 연습곡을 작곡하였다. 1832년 파리에서 최초의 연주회를 열어 성공함으로써, 그 후 파리 사교계의 유명한 인물이 되었으나 그는 늘 조국과 친구와 가족을 걱정하며 고독한 생활을 하였다. 그는 즉흥 연주에도 뛰어났으며, 침착한 성품으로 그의 전주곡이나 연습곡은 예술적 수준이 높은 곡들로 이루어져 있다. 1830년대 초중반의 파리는 작곡가를 위한 시기였다. 쇼팽이 유명한 작품들을 남긴 것이 이 때이다. 1838년경에 그는 파리 시민들에게 유명해졌다. 그의 친구로 프란츠 리스트, 빈첸초 벨리니, 외젠 들라크루아가 있었다. 쇼팽은 헥토르 베를리오즈와 로베르트 슈만과도 친했는데, 그들의 음악을 비판하기도 했지만 그들에게 작품을 헌정하기도 했다. 1836년에 쇼팽은 17살의 폴란드 소녀인 마리아 보진스카와 비밀 약혼을 했고 나중에 취소했다. 같은 해에, 마리 다굴 백작 부인이 연 파티에서 쇼팽은 소설가이자 애인인 조르주 상드를 만났다. 쇼팽과 상드의 연애관계는 1830년대 후반에 시작되었다. 그들의 애정 관계는 9년간 지속되었고, 쇼팽의 건강 악화와 상드의 자녀들 문제로 헤어졌다. 쇼팽과 조르주 상드는 스페인 마요르카의 버려진 로마 가톨릭교회 수도원인 발데모사수도원 근처의 오두막에서 지낸 적이 있는데, 1838년 ~ 1839년 겨울에는 혹독한 추위가 닥쳤다. 쇼팽은 파리에서 먼 길을 거쳐 피아노를 가져와서 언덕에 있는 수도원으로 옮겨야만 했다. 쇼팽은 그 절박한 시간의 기분을 스물 네 개의 전주곡(작품번호 28)에 담았다. 그 작품의 대부분은 마요르카에서 쓰여진 것이다. 추위는 쇼팽의 건강과 폐병에 큰 타격을 주었고, 그와 조르주 상드의 관계가 불륜으로 의심받아 비난과 푸대접을 받았다. 결국 파리로 돌아가야만 했다. 쇼팽은 그 일 이후로 건강을 회복하지 못했다. 1840년대에 쇼팽의 건강은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그와 상드는 노앙을 포함한 많은 곳으로 여행을 다녔지만 소용이 없었다. 1849년 쇼팽은 모든 작품을 완성하고 마주르카와 녹턴에만 전념했으며, 건강이 좋지 않았음에도 러시아의 폴란드 혁명진압으로 발생한 난민들을 위한 연주회에 참여하였다. 그의 마지막 곡은 마주르카 바 단조로 러시아의 지배를 받는 폴란드를 생각하면서 지은 민족주의적인 곡이다. 1849년 10월 17일 쇼팽은 사망했다. 공식적인 사인은 폐결핵이지만 그의 친지가 부검한 결과가 이전 검진결과와 다르다는 점 때문에 낭포성 섬유증이나 폐기종 같은 다른 질병을 앓지 않았느냐는 주장도 있다. 로마 가톨릭 성 마들렌 교회에서 열리게 된 그의 장례식에는 그의 유언에 따라 모차르트의 레퀴엠 을 연주하기로 했다. 레퀴엠에는 여자 성악가의 역할이 크지만 마들렌 교회에서는 합창단에 여자 가수를 허용하지 않았다. 이에 대한 마찰 때문에 장례식이 2주 동안 연기되었고, 결국 교회 측에서 쇼팽의 마지막 소원을 위해 양보했다. 쇼팽의 시신은 파리 Père Lachaise에 안장되었고 그의 심장은 바르샤바의 십자가 교회에 있는 기념비에 묻혔다. 쇼팽은 살롱음악인 녹턴을 깊고 세련된 장르로 승화시켰으며, 일반적인 춤곡인 폴란드의 마주르카나 빈의 왈츠의 선율과 표현의 폭을 넓혔다. 또한 전주곡을 독립적인 장르로 만든 장본인이다. 쇼팽의 곡은 독특한 선율로 많은 대중들에게 공감을 만들어낸다. 그중에는 《혁명 연습곡》과 《강아지 왈츠》가 있다. 《장송 행진곡,전주곡 제 4번》은 지금까지도 슬픔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곡으로 쓰이고 있다. 《환상 즉흥곡》 은 쇼팽 시절의 오페라 선율을 모방하면서 그만의 독특한 반음계를 구사한 곡이다. 쇼팽은 노래하는 목소리의 아름다움을 재현하기 위해 피아노를 쓴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리고 종종 자신이 도니제티와 빈첸초 벨리니로부터 가장 큰 영향을 받는다고 말했다. 쇼팽의 작품과 재능은 다른 작곡가에게 영향을 많이 주었다. 슈만은 쇼팽의 선율을 따서 작곡한 그의 《사육제》를 쇼팽에게 헌정했다. 프란츠 리스트는 그의 《Harmonies Poétiques et Religieuses》 가운데 한 악장인 〈Funérailles〉를 쇼팽에게 헌정했고 그 때가 의미심장하게도 1849년 10월이었다. 그 곡의 중간 부분은 쇼팽의 유명한 폴로네이즈 53번의 옥타브 트리오를 연상케 한다. 전주곡과 연습곡을 포함한 많은 쇼팽의 곡들이 그만의 고유한 기교를 띠고 있다. 리스트의 《초절기교 연습곡》과 슈만의 《교향적 연습곡》은 이 점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서양 고전음악에서 쇼팽의 음악은 낭만주의 시대에 속한다. 하지만 쇼팽 자신은 낭만주의 조류에 관심이 없었거나 싫어했고 자기 자신이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쇼팽의 작품을 전형적인 낭만주의 음악으로 보고있다. 그의 거의 모든 작품들은 피아노로 작곡되었고 피아노와 다른 악기를 위한 몇몇 곡도 존재한다. 21개의 녹턴 (작품번호 9에 속하는 3곡, 작품번호 15에 속하는 3곡, 작품번호 27에 속하는 2곡, 작품번호 32에 속하는 2곡, 작품번호 37에 속하는 2곡, 작품번호 48에 속하는 2곡, 작품번호 55에 속하는 2곡, 작품번호 62에 속하는 2곡, 작품번호 72에 속하는 1곡, 작품번호 없는 2곡) 58개의 마주르카 4개의 발라드 (순서대로 작품번호 23의 사단조, 작품번호 38의 바장조, 작품번호 47의 내림 가장조, 작품번호 52의 바단조) 1개의 뱃노래(barcarolle) 작품번호 60의 올림 바장조 1개의 자장가(berceuse) 작품번호 57의 내림 라장조 1개의 볼레로 2개의 부레 3개의 소나타 (순서대로 작품번호 4의 다단조, 작품번호 35의 내림 나단조, 작품번호 58의 나단조) 4개의 스케르초 (순서대로 작품번호 20의 나단조, 작품번호 31의 내림 나단조, 작품번호 39의 올림 다단조, 작품번호 54의 마장조) 3개의 에코세즈 27개의 연습곡 (작품번호 10에 속하는 12곡, 작품번호 25에 속하는 12곡, 작품번호가 없는 3곡) 20개의 왈츠 26개의 전주곡 (작품번호 28에 속하는 24곡과 작품번호 45의 올림 다단조 한곡과 작품번호 없는 내림 가장조 한곡) 4개의 즉흥곡 (순서대로 작품번호 29의 내림 가장조, 작품번호 36의 올림 바장조, 작품번호 51의 내림 사장조, 작품번호 66의 올림 다단조. 이 중 4번째 곡인 작품번호 66은 이라는 부제로 매우 유명하다.) 18개의 폴로네이즈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와 환상 폴로네이즈를 제외한다면 16개) 1개의 푸가 1개의 환상곡 (작품 49, 바단조) 2개의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 - 피아노 협주곡 1번, 피아노 협주곡 2번 4개의 다른 작품 - 《Là ci darem la mano》에 의한 변주곡, 《Krakowiak》, 《Grande Fantaisie on Polish Airs》, 《Andante spianato and Grande Polonaise brillante》(폴로네이즈로 분류된다면 제외) 17개의 피아노와 성악을 위한 폴란드 노래 1개의 피아노 트리오 (바이올린, 첼로, 피아노) 1개의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2개의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2중주 프레데리크 쇼팽을 기념하기 위해서 5년마다 국제 피아노 콩쿠르가 바르샤바에서 열린다. 다음은 작곡가를 기념해 이름이 붙은 것들이다. 소행성 3784 쇼팽 바르샤바 쇼팽 공항 조르주 상드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 Gazebo-I like Chopin http://www.armoredpenguin.com/crossword/Data/2017.06/0719/07190733.889.html Internet Chopin Information Centre (쇼팽 정보 센터) Classic Cat - Chopin mp3s 분류:1810년 태어남 분류:1849년 죽음 분류:19세기 서양고전음악 작곡가 분류:프레데리크 쇼팽 분류:폴란드의 고전 피아노 연주자 분류:폴란드의 서양 고전 작곡가 분류:낭만주의 작곡가 분류:프랑스계 폴란드인 분류:바르샤바 출신 분류:바르샤바 대학교 동문 분류:지폐의 인물 분류:결핵으로 죽은 사람 분류:폴란드의 로마 가톨릭교도 분류:19세기 프랑스 사람 분류:19세기 폴란드 사람
대위법 (對位法)은 두 개 이상의 독립적인 선율을 조화롭게 배치하는 작곡 기술이다. 흔히 서양음악사에서 바로크 시대 이후에 한해 쓰이며 그 전 시대 음악을 논할 때는 다성음악(polyphony)이라 부른다. 작곡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는 대위법의 대가였다. 대위법을 사용하는 작곡 방식으로 가장 고난도 기법은 푸가이며 이외에도 카논, 돌림노래 등이 대위법을 사용한다. 대위법은 교회음악을 중심으로 발달하였으며 적당한 악기가 없던 시대에 단선율만 낼 수 있는 사람의 목소리를 독립적으로 배치하기 위해서 발달하였다. 음악적 특성상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지루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각각의 성부는 독립적인 선율을 노래하게 되었으며, 독립적인 선율을 배치하는 과정에서 화음의 발전에 기여했다. 대위법이란 단어는 영어의 Counterpoint, 독일어의 Kontra-punkt, 프랑스어의 Contrepoint 등을 한글로 번역한 것으로서, 모두 라틴어의 Punctus contra punctum이 어원이다. 이 말을 직역하면 점 대 점 이라는 뜻이지만, 점 즉 음표에서 음표에 대한 음표 , 나아가서 멜로디에 대한 멜로디 라고 해석하는 것이 보다 정확한 해석이라 하겠다. 즉, 2개 이상의 각 독립한 생명을 가지는 가락이 동시에 어울려 있는 것 같은 음악은 대위법적인 음악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대위법이라는 말은 복수(複數)이며 서로 다른 가락을 모아 꾸미는 작곡상의 한 기법임을 의미하며, 한 작품이 대위법적으로 씌어졌을 경우에는 작품의 스타일을 표현하는 데도 쓰인다. 따라서 그레고리오 성가나 무반주로 노래되는 민요와 같이 다만 하나의 가락으로 된 음악, 즉 단선음악(單旋音樂) 에는 물론 대위법적인 요소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복수인 다른 성부(聲部)로 된 음악에서는 각 성부의 수직(세로)의 관계와 수평(가로)의 관계가 마치 천의 날실과 씨실 같은 관계를 가지면서 음악을 구성한다. 이와 같은 음악의 구성을 영어로는 텍스처(Texture, 織物·組織)라 하며, 한글로는 쓰기(書法)라고 하는데, 천의 씨실에 상당하는 것이 대위법이고, 날실에 상당하는 것이 화성법(和聲法)이다. 따라서 음이 옆으로 흐르는 것이 우위를 차지하는 음악은 폴리포닉(polyphonic, 多聲的)한 음악이며 대위법적 음악이고, 가령 성부의 수는 많을지라도 세로의 관계에 중점이 있는 음악은 호모포닉(homophonic, 화성적)한 음악이라고 불리는 것이 관습이다. 음악사를 보면 대위법의 역사는 양식상의 특징에 따라 대략 다음 네 시기로 크게 구분된다. # 9세기-12세기 말의 전대위법(前對位法)시대 # 13세기-16세기 말의 선적 대위법(線的對位法)시대 # 17세기-19세기 말의 화성적 대위법(和聲的對位法)시대 # 20세기의 선적 대위법(線的對位法)시대 물론 이 구분은 대체적인 것이며, 각 시기의 경계는 서로 얽혀 있다. 일반적으로 예술의 양식상의 변화는 극히 서서히 일어나고, 결정적인 전기(轉機)를 거친 뒤에도 그 이전의 양식적 특징은 잔존해서 차차로 새로운 양식과 바뀌어 결국에 가서는 소멸한다. 이 네 시기의 주된 특징을 간단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2개 이상의 성부가 서로 다른 가락을 동시에 노래하거나 켜는 시도가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다성음악(多聲音樂, Polyphony)의 실례가 처음으로 기록에 나오는 것은 9세기 후반 이후부터이다. 9세기 중엽부터 말기까지의 사이에 쓴 것으로 믿어지는 음악이론서 에는 오르가눔이라 불리는 다성음악의 가장 오래된 형태의 실례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오늘날 우리가 아는 한 다성음악에 관한 가장 오래된 보표의 예이다. 오르가눔이라 함은 그레고리오 성가에 1 또는 그 이상의 대성부(對聲部)를 부가한 다성음악이다. 이 시기를 통하여 대위법은 실제면에서도 이론면에서도 차례로 정리되어 양식적 통일을 얻고, 결국은 소위 팔레스트리나 양식(Palestrina style) 이라 불리는 양식에서 유례가 없는 발전을 하였다. 이 시기의 가장 큰 특징으로서 3화음의 체계가 점차 확립되어 대위법도 그 영향을 크게 받게 된 과정과, 각 성부의 독립성을 크게 보아야 한다. 12-13세기 노트르담 악파의 모테토에서는 3도는 안어울림음정(불협화음정)으로 생각하여 3화음의 형태가 나타나는 일은 아주 희박하였다. 그러나 다음 14세기 알스 노바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3도는 어울림음으로 처리되었고, 따라서 3화음도 극히 자주 나타났다. 이와 같은 음감각의 변천은 매우 흥미 깊은 것이어서 사회적 환경, 기후 풍토 등의 조건 여하에 따라서 인간의 감각이 어떻게 변할 수 있는가에 대한 한 실례이다. 대체로 북쪽지방에서는 논리적이며 대위법적 구성에 중점을 두었고, 남쪽지방에서는 세로의 울림에 중점을 둔 화성적 양식을 애용하였음이 일반적 경향으로 인정되는 것을 생각해 보면 흥미깊다. 15-16세기의 이른바 플랑드르 악파, 부르고뉴 악파의 시대를 통하여 대위법적 기법은 점차로 세련되고 3화음 체계가 확립됨에 따라 화성음과 화음 밖의음(비화성음)의 관념도 명료하게 인식되었다. 그 결과 걸림음(괘류음)이나 지남음(경과음) 등과 같은 이른바 화음밖의음이 일으키는 안어울림음정과 그 해결이라는 화성상의 흥미가 울림에 있어서도 표현력을 증가한 가락의 움직임에 있어서도 듣는 사람의 귀를 즐겁게 하였으며, 거기에다 모방의 기법이 대위법적인 흥미마저 곁들여서 만족시키게 되었다. 즉, 성부의 대위법적 독립성과 화음적 융화성이라고 하는 상반되는 두 가지 면이 훌륭한 조화를 지니면서 융합되고 보다 높은 차원으로 지향되어, 대위법의 역사는 이로써 황금기를 맞이한다. 다만 이 3화음 체계는 장·단 두 조(調)의 기능화성과는 전적으로 다른 것이다. 기능화성에서는 화음이 각기 일정한 기능을 가지며, 각 화음은 그 자신의 가치로 독립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각개의 기능에 따라 연결된 마침꼴 안에서 비로소 완전한 존재가치를 가지게 된다. 이에 반하여 15-16세기의 교회선법에 따른 3화음 체계에서는 화음 상호간의 기능관계는 존재하지 않든가, 있다 하더라도 극히 약하여 겨우 악구(樂句)의 단락점(段落點)에 Ⅵ-Ⅴ-Ⅰ과 같은 마침꼴(終止形)이 인정되는 정도이다. 여기서는 화음은 가로의 흐름인 멜로디선이 집적(集積)한 결과 생긴 것이며, 앞뒤 화음과의 기능관계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자신의 울림으로 존재하며, 화음끼리는 가락의 흐름에 따라 어떻게든 자유로이 연결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대위법의 양식을 다음 시대의 화성적 대위법 과 대비시켜서 선적 대위법 이라고도 한다. 이 시기는 장·단 두 조(調)에 따른 기능화성이 음악을 지배한 시대이다. 악식·화성·멜로디·리듬 등 음악의 모든 요소가 기능화음의 영향을 받아 그 지배하에 있었다. 대위법도 물론 예외는 아니다. 이 시기까지의 교회선법에 의한 선적(線的) 대위법에 있어서는 현상(現象)으로서 3화음 체계가 인정되기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멜로디선이 집적한 결과로서 이해하여야 할 것이며, 텍스처상으로는 가로의 흐름이 우위를 차지한다는 것은 이미 말한 바 있다. 이에 반하여 이 시기의 대위법에서는 우선 각개의 기능에 따라 화음의 연결이 상정되어 멜로디는 그 화음의 도식 속에서 움직이게 된다. 따라서 대위법은 항상 화음의 굴레를 쓰고 있게 된다. 이 화성적 대위법시대 최대 거장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이다. 그를 정점으로 그 후 음악은 점차 화성적 양식으로 기울게 되고, 낭만파의 음악에서 그 경향이 더욱 강한 것으로 되었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음악이 많든 적든 간에 무조화(無調和)하는 경향에 따라 다시 선적 대위법이 부활하게 되었다. 즉, 조성(調性)에서 해방된 음악은 기능화성의 틀에서 벗어났으며, 멜로디는 그 자신의 조형적 욕구에 따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교회선법에 따른 선적 대위법에서는 멜로디나 화성은 어느 한 선법(旋法)에 포함되는 음만으로 되는 것이지만, 무조음악(無調音樂)에서는 반음계의 12음이 모두 자유롭게 쓰인다. 따라서 멜로디나 그 멜로디가 몇 개 겹쳐서 우발적으로 생기는 화음은 지금까지 존재한 어떠한 체계에도 속하지 않으며, 긴장과 이완의 교묘한 교체에 의한 독자적인 원리에 따라 구성된다. 쇤베르크가 창안한 12음기법 은 이와 같은 방향의 한 궁극점이며 12음으로 되는 세리 의 철저한 대위법적 변주로 음악 전체가 구성된다. 오늘날까지 이론적으로 정비되고 실제의 학습에 제공되고 있는 대위법의 교과서는 크게 대략 2개의 범주로 나뉜다. 하나는 이른바 팔레스트리나 양식 을 규범으로 하는 선적 대위법에 따른 순수 대위법 이라고 하는 것과, 다른 하나는 바흐를 최고의 규범으로 하여 장·단 양조에 따라 주로 기악양식의 습득을 목적으로 하는 대위법이다. 이 밖에도 양자를 절충한 것 같은 것이나, 무조음악 또는 12음기법의 영역에 이론적 정리를 시도하는 대위법 이론도 있다. 그것은 어느 것이나 일정한 원칙에 따르면서 단순한 것에서부터 고도의 것으로 학습을 거듭하도록 배려되어 있다. 대위법 학습의 역사에는 기묘한 에피소드도 있다. 작곡가 케루비니의 스승이며 18세기에 오페라 작곡가로 명성을 날렸던 사르티는, 제자에게 대위법의 비결을 전수할 때 방을 캄캄하게 한 다음 장미빛 등불을 밝혀 박명(薄明) 속에서 전수했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마치 마술을 가르치듯이 일견(一見) 신비적인 분위기 속의 이 교수 풍경도 사실은 어리석은 것으로서, 오늘날의 합리적 방법에 따르면 보통의 능력을 갖춘 근면한 학생이면 누구나 대위법 이론을 깨우치는 건 가능하다. 대위법 이론의 자세한 부분은 생략하지만, 대위법의 중요 기법의 하나인 모방 에 대하여 말한다. 모방 이라 함은 어떤 성부의 멜로디를 다른 성부가 뒤에서 그대로 따라하게 하는 기법이다. 모방에는 선행성부(先行聲部)를 충실히 모방하는 것에서부터 선행성부의 주요 특징만을 모방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여러 형태의 단계가 있다. 선행하는 성부와 같은 음에서 후속의 모방성부가 시작되는 것 외에도 다른 음에서 모방이 시작되는 경우도 있다. 일반적으로 성부간의 모방은 인간의 청각에 지적 기쁨을 준다. 따라서 모방이라는 기법은 모든 시대에 여러 방법으로 쓰여 왔다. 카논 , 푸가 는 모방을 철저하게 응용한 곡종이다. 분류:음악 기법
화성 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화성 (火星)은 태양계의 네 번째 행성이다. 화성 (火星)은 대화(大火) 라고도 하며 이십팔수 중 심수에 속하는 별로 안타레스 를 가리킨다. 화성 (和聲)은 음악의 구성요소 중 하나이다. 화성 (華城)은 경기도 서남부 일대의 지명으로, 수원의 별호(別號)였다. * 화성시 (華城市)는 경기도에 위치한 시이다. * 수원군(화성군) (水原郡)은 경기도에 위치했던 옛 군이었다. * 화성 (華城)은 경기도 수원시에 위치한 조선 시대의 성곽이다. 화성군 (化城郡)은 함경북도에 위치한 군이다. 화성 은 한국의 쌀 품종이다.
주한 미군 (駐韓美軍은 대한민국에 주둔하는 미국의 군대이다. 한미상호방위조약과 주한미군지위협정에 의해 대한민국 내에서 합법적 지위를 확보하고 있다. 주한미군을 통솔하는 조직은 한미연합사령부로, 사령관은 미군 대장이며, 부사령관은 대한민국 육군 대장이다. 2016년 2월 19일에 주한 미해군 사령부가 서울특별시 용산구에서 부산광역시 부산 해군기지로 옮겼고, 대한민국 전역에 분포하는 50여 개 미군 부대의 90% 이상이 2018년 말까지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에 위치한 미군의 세계 최대 해외기지 캠프 험프리스로 이전할 계획이다. 이에 따라 2017년 7월에 미국 제8군사령부가 이전하였고, 2018년 6월에 주한미군사령부가 이전하였다. 한편, 주한 미군 전역 군인이 베트남 전쟁에서 사용하고 남은 다량의 고엽제를 1978년 칠곡군 왜관읍 석전리의 캐럴 기지에 매립하였다고 폭로하는 등 주한 미군 기지는 각종 정치적, 사회적, 환경적 문제가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주한미군이 행사하는 대한민국의 전시작전권은 2012년 4월 17일부터 대한민국 국군이 환수해 행사하기로 합의되었으나, 2010년 6월 27일 이명박 대통령과 미국 오바마 대통령이 2015년 12월로 연기하였고, 2014년 10월 23일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안보협의회(SCM)에서 대한민국과 미국 국방부 장관은 전작권 전환 시기를 정하지 않고 2020년대 중반에 전환 여부를 검토한다고 합의하여 사실상 무기한 연기되었다. 주일미군은 사령관이 중장인데 비해, 주한미군 사령관은 대장이다. 전시작전통제권이 미국에 있기 때문이다. 2010년에는 대한민국 국군이 전작권을 환수하면 현재 4성 장군인 주한미군 사령관이 주일미군과 같은 3성 장군으로 바뀌고 주한미군 사령관이 주일미군 사령관의 통제를 받아 독도문제 등 한일관계에서 대한민국이 어려움을 겪게 될 수 있다는 일방적인 주장이 근거 없이 유포되기도 하였다. 당시 한미 양국은 전작권 전환에 따라 한미연합사가 폐지될 경우, 그와 함께 미군의 한국전투사령부(KORCOM)를 창설하도록 합의했었다. 즉, 대한민국의 전시작전권 환수는 한미연합사의 기능이 각각 대한민국 국군과 미국의 한국전투사령부(KORCOM)로 나뉘어 이관되는 것 뿐이다. 또한, 전작권이 전환되더라도 대한민국 해군과 대한민국 공군의 전시작전통제권은 계속 미군이 갖게 된다. 주한미군은 단지 유사시에 빨리 병력을 투입할 수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주일미군은 해군의 비중이 크지만, 주한 미군은 상대적으로 미국 육군의 비중이 훨씬 크다. 유사시 대한민국 방위를 지원하기 위해 투입되는 미군 증원전력은 육·해·공군과 해병대를 포함하여 병력 약 69만명, 함정 약 160 척, 항공기 약 2,000 대의 규모이다. 전시에 미국 육군은 미국 8군예하의 현 미국 2 보병사단 외에도 4개 사단이 추가로 증원되며, 미국 제7함대와 미국 7 공군이 지원된다. 미국 육군인 미국 8군 미국 2 보병사단은 여단전투단 5개가 사단 1개, 사단 5개가 미국 8군을 구성하는 5각 편제를 따르고 있다. 현재 한반도 내에 주둔하고 있는 주한미군 육군은 미국 2 보병사단 뿐이지만, 평택 육해공 통합기지가 완공되면 유사시에 증원되는 4개 사단이 이곳으로 전개하게 된다. 주한미군 사령부는 대한민국에 있는 미국 육군(미국 8군 미국 2 보병사단) · 미국 해군(미국 제7함대) · 미국 7 공군 제51전투비행단 및 미국 해병대를 이끄는 합동 군사 본부이다. 한미연합사 예하 주한국제연합군(UN군. 중립국 감시단)이 있다. 1978년 이전 1975년 12월 31일까지 한미연합사 대신 이 UN군 사령부가 주한미군을 지휘했다. 한국휴전협정에는 외국군이 한반도에 주둔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령관 대장 로버트 에이브럼스 주한 미군/유엔사 부사령관 중장 토머스 W. 베르그슨() 주한 미군/유엔사 참모장 소장 마이클 미니한() 주임원사 스티브 L. 패이톤 () Eighth_United_States_Army_CSIB.svg |link=제8군 (미국) |제8군 Official_CNFK_Command_Crest_2010.jpg |link=주한 미국 해군 |주한 미국 해군 Seventh Air Force - Emblem.png |link=제7공군 |제7공군 Special Operations Command Korea.png |link=주한 미군 특수작전사령부 |주한 미군 특수작전사령부 2009년 10월 27,114 명 2011년 * 1월 28,500 명 * 10월 26,000 명 2017년 기준 23,000 명 추가로 주한 미국 8군에 있는 대한민국 육군 소속인 카투사 2,609명과 군무원은 제외한 것이다. 2011년 4월 19일, 대한민국 국방부는 "언론이 보도한 미측 보고서에 나오는 병력 규모는 실제 병력이 아니라 시설 수용 규모를 기준으로 집계한 것일 뿐 실제 병력 규모와는 무관하다."라고 밝혔다. 유사시 대한민국 방위를 지원하기 위해 투입되는 미군 증원전력은 육·해·공군과 해병대를 포함하여 병력 약 69만 명, 함정 약 160 척, 항공기 약 2,000 대의 규모이다. 평택기지의 인원 * 미군 14491명 * 미군가족 11075명 * 미군 군무원 5420명 * 한국군 카투사 1600명 * 한미연합사 한국군 800명 * 기타 1145명 * 총 44531명 항공기 90대 헬기 104대 전차 180대 장갑차 100여대 화포 60대 미사일 지대지미사일 40발, 지대공미사일 60대 Area I USAG Red Cloud (캠프 레드 클라우드) Area II USAG Yongsan (용산 기지) Area III USAG Humphreys Area IV USAG Daegu (캐럴 기지, 헨리 기지 등) Area V Osan (오산공군기지) 미 공군의 전자전기(電子戰機)인 EC-130H 컴퍼스 콜이 한국에 전개했다고 미국의 항공전문 매체인 애비에이셔니스트가 년01월15일보도했다. 컴퍼스 콜은 C-130 허큘리스 수송기에 각종 전자장비를 달아 전자전 전문기로 개조한 것이다. 미 공군의 설명에 따르면 미군과 동맹군의 항공ㆍ해상ㆍ특수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공세적 역정보전과 전자공격(EA) 능력을 갖춘 기종이라고 돼 있다. 미 본토의 애리조나주 투손의 데이비스-몬선 기지에 주둔한 제55 전자전 전대(ECG) 소속 14대가 전부일 정도로 미 공군에서도 소중한 전력이다. 이 중 한 대가 지난 14일 일본 요코타를 거쳐 한국 오산의 미 공군기지로 이동했다. 미군은 이미 계획한 훈련 일정에 따른 조치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평창 겨울올림픽과 패럴림픽 기간 중 북한의 도발에 대비한 움직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Area VI Kunsan (군산공군기지) 유사시 국가지휘소로 쓰이는 지하벙커는 알려진 것만 6개다. * 한미 양국군은 2017년까지 들어서는 경기도 평택시의 주한미군 기지 내에 한국전투사령부(KORCOM) 지휘소를 만들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의 B-1 * B-1 벙커는 수도방위사령부가 관리하는 대한민국 정부의 전쟁 지휘소다. 지금까지 대한민국의 역대 대통령들이 주요 국가훈련 때 이 벙커를 찾았다. 마찬가지로 수도방위사령부의 또 하나의 B-1 서울특별시 용산구 국방부에 있는 B-2 충청남도 계룡시 계룡대에 있는 U-3 한미연합사령부 지휘통제소(CP 탱고. 암호명 탱고 Tango) * CP 탱고는 1970년대에 만들었다. 탱고는 군 작전상 암호명이다. 한강 이남의 경기도에 위치한다. 민간인출입통제구역의 단단한 화강암 터널 속에 몇 개 층이 있다. 외부와 단절된 채 2개월 이상 생활할 수 있다. 스키프(SCIP)라는 최첨단 정보시설이 있는데,첩보위성과 주한미군 U-2 정찰기의 대북감시 정보 등을 실시간으로 받아본다. 미국 중앙정보부(CIA) 및 미국 국방부 정보국(DIA)과 핫라인이 설치돼 있다. 존재 자체가 비밀에 쌓였다가 2005년 3월 방한한 콘돌리자 라이스 당시 미국 국무장관이 이곳을 전격 방문하면서 외부에 이름이 알려졌다. 라이스 장관은 한 · 미 연례 연합훈련에 따라 워 게임(War Game) 을 하고 있던 100여명의 군인들을 격려했다. 용산 미군기지 내에 있는 CC서울(Command Center) * CC서울 은 흔히 미8군 벙커 로 부른다. 한미연합사가 운영한다. 1979년 12·12사태 당시 노재현 국방부 장관이 피신했던 곳이다. 한 · 미 지휘부들이 평상시에 이용한다. 전쟁 발발 땐 지휘부가 CP 탱고 로 자리를 옮긴다. 오스카 벙커 * 오스카는 지금까지 정확한 장소가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다. UFG연습(을지프리덤가디언) 시 지휘와 통제는 이들 벙커의 유기적인 연결로 이뤄진다. * UFG는 한미연합사령부 주관으로 실시되는 방어 중심의 컴퓨터 시뮬레이션 연습이다. 올해도 예년과 비슷한 대한민국 국군 56,000여명과 미군 30,000여명과 참가한다. 모든 벙커는 하루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는다. 청와대 벙커는 대형 모니터 10개로 이뤄진 스크린이 있고 국가정보원과 충청남도 계룡시에 있는 대한민국 육군 · 해군 · 공군 작전사령부,경찰청·산림청·한국전력 상황실의 정보가 실시간으로 뜬다. 전국에서 발생하는 안보·재난 관련 비상상황을 가장 먼저 파악할 수 있다. 인공위성을 통해 북한의 주요 군시설 상황 파악도 거의 실시간으로 이뤄진다. 2010년 천안함 침몰 사건, 연평도 포격이 발생했을 때 이명박 대통령은 이곳에서 현장 상황을 점검하며 참모들과 대응책을 논의했다. 철제문 두께가 2m여서 핵공격을 받더라도 끄떡없다. ※ 2009년 2월 미 극동공병단 회의록 원문에는 12~17+ 로 표기하였다. 한미 양국군은 2015년까지 들어서는 경기도 평택시의 주한미군 기지 내에 한국전투사령부(KORCOM) 지휘소를 만들 것으로 알려졌다. 평택 육군 기지 * USAG 험프리스 기지 * 철수할 용산기지 외 나머지 잔여 시설. 실제 주한미군은 주둔하지 않을 것. * K-16 * CP 탱고 (TANGO 지휘 센터) 경기도 과천. 현재 대한민국에 매각하는 것을 추진 중이다. * 용인 우편 시설 미국 7 공군 오산공군기지 기지 외 * 오산공군기지 * 수원 CAB * 청주 CAB 대구 미국 8군(미국 육군), 미국 7 공군, 미국 제7함대, 미국 해병대 통합 기지 * 캠프 워커 ** 캠프 캐롤 ** 캠프 헨리 ** 캠프 조지 ** 캠프 무적 (포항, 미국 해병대) * 대구 COB (미국 7 공군) * 김해 COB (미국 7 공군) * DRMO A PO * 8번 부두 () * 부산 자재 창고시설 (Storage Facility) * 포항비행장 (미국 제7함대) 군산 미국 7 공군 외 * 군산 미국 7 공군 기지 * 군산 POL 터미널 (미국 제7함대 소속) * 광주광역시 COB 진해 미국 제7함대 기지 전투시설과 마찬가지로 2009년 2월 미국 극동공병대 회의록 원문에는 12~17+ 로 표기하였다. 모두 대한민국 영토이다. 또한 미군이나 미 군무원이 주둔해 있지 않는다. Northern Presence 한·미 합동 훈련장(Joint Training Area. 경기도 북부 문산, 연천 소재) * 강원도 평창군 용평면 * Warrior Base * Bull s Eye Traing Area (완전 폐쇄가 아닌, 반으로 축소) * Gun Training Area * Watkins Range Alamo ASA (Det L) 까막산(Kamaksan) ASA (Det M) 파평(Papyungsan. 경기도 파주) ATC(항공 훈련단) 신북(Shinbuk) Relay 콩코드 (Concord) 화악산 이븐 리치 (경기도 가평군 북면. Hwaaksan Evenreach) South West Hub 고려산 ASA (인천광역시 강화도 Koryosan) 대구 자재 시설 (Storage Area) 마산 탄약 보급 창고 (Ammunition Depot) South East Hub 경상북도 예천 항공기지 (Yechon AB. 미국 7 공군) 리치먼드 (Richmond) 다트 보드 (Dart Board) 브루클린 (Brooklyn) 창산 (Chang San) 비슨 (Beason) 하이 포인트 (High Point) 메디슨 (Madison)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은 2011년 기준 8,125억원 이었다. * 2004년에는 6,601억원, 2005년과 2006년에는 6,804억 원, 2007년 7,255억 원, 2008년 7,415억 원, 2009년 7,600억 원, 2010년 7,904억 원이었다. * 환율은 2000년 1,200원, 2001년 1,100원, 2002년 1,300원, 2003년 1,200원, 2004년 1,200원 * 2005년부터 국방부 참여하에 외교통상부가 주관하고 있다. 방위비 분담금은 2004년까지 달러와 원화를 함께 지불하다가 2005년 이후 전액 원화로 지불하여 환율 변동의 영향 없이 안정적인 예산 운용이 가능하게 되었다. * 매년 대한민국의 분담 비율이 증가되고 있다. * 한미 양국은 2008년 12월 2009년 이후 방위비 분담금 결정에 적용할 새로운 협정에 합의하였고, 이 협정은 2009년 3월 국회 비준 동의를 받아 발효되었다. 2009년부터 2013년까지 5년을 유효기간으로 하는 이 협정은 연도별 방위비 분담금을 전전년도 소비자 물가지수를 반영하여 인상하되 최대 4%를 넘지 않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2009년 7,600억 원(2007년 물가 상승률 2.5% 적용), 2010년 7,904억 원(2008년 물가 상승률이 4.7%이나 상한선인 4% 적용)을 부담하게 되었다. * 2000년도 기준 18억 9,500만 달러로, 42%이다. 독일의 경우 57억 6,700만 달러(21%), 일본의 경우 63억 3,200만 달러(79%)이다. 방위비 분담금 지원 항목 (2010년 기준) * 인건비 (46%) 주한미군이 고용한 한국인 고용원에 대한 인건비 * 군사건설 (28%) 주한미군용 시설 건설 * 군수지원 (15%) 주한미군 탄약저장, 항공기 정비 등 용역 및 물자지원 * 연합방위력 증강사업(CDIP) (11%) Cato Institute의 Doug Bandow씨의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정부가 주한미군에 쓰는 비용은 일 년마다 약 150억 달러라고한다 (1998년 기준). 150억 달러는 1998년 환율기준으로 약 21조원이다. 그와 비교해 대한민국 국방부의 1998년 국방예산은 약 14조 원이었다. 대한민국 국군의 국방비는 2010년 기준 29조 5,627억 원이다. GDP 대비 2.62%, 정부재정대비 14.7%이다. 주변 국가 중 미국은 병력 142만여 명, 6,610억 달러, 일본은 병력 22만 9천여 명, 510억 달러, 중국은 병력 228만 5천여 명, 1,000억 달러(추정), 러시아는 병력 103만여 명, 533억 달러(추정)를 지출하고 있다. *2019년 한국이 부담해야 할 주한미군 주둔비가 작년보다 8.2% 인상된 1조380억 원대로 정해졌다. 한미 주둔군 지위협정(SOFA)은 1968년 체결되어 1991년과 2001년 2차례 개정되었다. * 협정 22조 5항에는 주한미군이 국내에서 살인, 강간 등 12대 중대 범죄를 저질러도 현장 체포가 아니면 구속수사를 못하도록 규정되어있다. 동두천시에서 여학생을 성폭행한 미군도 범행 후 소속 부대로 돌아갔기 때문에 기소 시점까지 불구속 상태로 놔둘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Prostitution Warning.jpg|섬네일|인신매매와 매춘을 금지하는 주한미군에 의한 경고 1971년 7월 9일에 흑인병사들이 폭동하고 안정리 사건을 일으킨다. 흑인병사들이 클럽을 습격했지만 한국 경찰과 미군 헌병이 진압했다. 미군 범죄는 2008년 234건 283명에서 2010년 316건 380명으로 크게 늘어났다. 미군 범죄 급증에는 2001년 9 11테러 이후 유지해온 통행금지를 2008년부터 완화하고 2010년 7월부터 전면해제한 것이 큰 원인으로 꼽힌다. 1992년의 윤금이 피살 사건이후는 미군 위안부에 대한 대처를 바꾸었다. 2014년 6월 25일에 미군 위안부 122명은 배상을 요구하는 소장을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제출했다. 한반도의 평시상태에서 미합중국 군 당국은 미합중국 군대의 군속에 대하여 형사재판권을 가지지 않으므로, 미합중국 군대의 군속이 범한 범죄에 대하여 대한민국의 형사재판권과 미합중국 군 당국의 형사재판권이 경합하는 문제는 발생할 여지가 없고, 대한민국은 대한민국과 아메리카합중국 간의 상호방위조약 제4조에 의한 시설과 구역 및 대한민국에서의 합중국 군대의 지위에 관한 협정(1967. 2. 9. 조약 제232호로 발효되고, 2001. 3. 29. 조약 제553호로 최종 개정된 것) 제22조 제1항 (나)에 따라 미합중국 군대의 군속이 대한민국 영역 안에서 저지른 범죄로서 대한민국 법령에 의하여 처벌할 수 있는 범죄에 대한 형사재판권을 바로 행사할 수 있다. 2006년 대한민국 국적자인 미국 시민권자(이중국적자)와 영주권자가 대한민국의 징집을 기피하고 미군에 입대해 논란이 있었다. 당시 주독일 미군으로 배치된 이중국적자는 휴가 차 한국을 방문하면서 병역법 위반이 들통나 출국금지 조치되었으며, 미국 영주권자인 다른 한 명은 병무청 블랙리스트 에 올랐으나 미군으로 입대한 후 주한 미군으로 배치되었다. 이들에 대해 국방부와 병무청은 미군 복무는 개인적 취업활동으로 의무로서의 병역과는 다르다 면서 법과 원칙대로 반드시 병역의무를 이행토록 하겠다 는 입장을 밝혔으나, 실제로는 주한 미군 지위 협정(SOFA) 등을 핑계대다가 결국 수 개월 만에 이들의 한국국적 포기신청을 법무부가 받아들여 대한민국 병적에서 제적시키는 형식으로 병역 이행 없이 마무리됐다. 이와 관련해 주한미군 지휘부는 자국 당국에 대한민국 국적을 가지고 입대한 미군을 주한미군으로 배치하지 말 것을 요청하였다. 미군은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항복함에 따라, 미군은 한반도의 중앙을 가로지르는 위도 38도선 이남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의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 1945년 9월 8일 남한 땅에 발을 내디뎠다. 1945년 9월 8일, 처음으로 존 하지 중장이 이끄는 미국 제 24군단 소속 미군 제 7 보병사단이 인천에 도착하였다. 이들을 환영하기 위해 인천보안대원과 조선노동조합원 등이 연합국기를 들고 행진하던 중 일본인 경관들이 아무 이유없이 발포하여 노조위원장 권평근과 보안대원 이석우가 배와 가슴에 총탄을 맞아 현장에서 숨지고 14명의 중경상자를 낸 불상사가 일어났다. 그 외에, 9월 29일에는 미국 제 40사단이 부산에, 10월 8일에는 미국 제 16사단이 목포에 도착하였다. 11월말 당시 38선 이남에 주둔한 미국 제24군단 병력수는 약 7만 명이었다. * 이미 1945년 5월 이후 태평양 전쟁에 뒤늦게 뛰어든 소비에트 연방은 이미 미국에 앞서 38선 이북 지역의 일본군을 무장해제시키기 위해 한반도에 병력을 파견한 상태였다. 연합국은 1943년 카이로회담에서 조선의 독립을 결정하였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38도선의 경계는 봉쇄되고 남북간의 교류가 중단되었다. 남한 지역에는 국제 연합(UN)의 감시하에 치러진 총선을 통하여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 반면 북한 지역에서는 같은 해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1948년 소련 정부는 자국 병력을 북한에서 철수시켰고, 미군도 역시 이듬해 1949년 남한의 신생 방위군 훈련을 위한 KMAG라는 자문단 예하 500명만 남겨둔 채 전 병력을 철수시켰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은 남한 지역을 적화 통일하기 위해 전면 남침을 감행하였다. * 당시 미군은 유엔이 지정한 남한 지역 방위 책임을 맡고 있긴 했다. * 그러나 그 전까지 어느 미국인도 한반도 지역에 관심을 두지 않고 있어서 미군의 방위선에 남한을 제외시키는 애치슨 선언이 발표되기도 했다. 3년 간의 한국 전쟁에서 500만 명이 넘는 유엔 참전국 군인과 군무원들이 한국 전쟁에 참전하였으며, 1953년 7월 27일 남한이 배제되고, 북한을 포함한 중공과 미국이 휴전협정 이 이루어질 때까지 33,000명의 미군 전사자를 포함하여 총 14만 명에 달하는 유엔 참전국 군인이 전사하였다. * 전투의 중단과 함께 휴전협정은 오늘날까지도 유지되고 있다. 이는 현대 전쟁사상 최장기에 걸친 휴전으로 기록되고 있다. UN 안전보장이사회의 1950년 결의안에 따라 미국은 유엔 사령부 지휘 등 합법적 임무를 부여 받았으며, 1954년 한미상호방위조약을 통해 양국은 외국의 침략 시 상호 협력할 것을 약정하였다. 또한, 미국은 1978년 한-미 양국 정부에 의해 설립된 통합 군사 본부인 한미연합군사령부(한미연합사)의 파트너로서 대한민국 방위 계획과 유사시 양국 군대를 통제할 책임을 지고 있다. 미군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마자 9월 15일부터 철수하기 시작했다. * 1948년 11월 여수·순천 사건이 발발하자 잠시 철군이 중단되었다가, 다시 철수하여 이듬해 6월 29일 500여명의 군사 고문단만 남겨두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주한미군 철수가 전쟁을 의미한다고 보아 총력 저지하였다. 국제 연합(UN) 한국임시위원단은 대한민국 정부 요청에 따라 보고서를 작성하여 1948년 10월 30일 유엔 총회에 제출했으나, 철군 저지에 실패했다. 또한 대한민국 정부는 미국에 한미상호방위조약 외, 군사원조, 경제원조를 요청했으나 모두 거부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49년 6월 진해 해군기지를 극동 미해군 기지로 제의했으며, 반공 태평양 동맹체 구성도 제의했지만, 모두 거부되었다. 1950년 1월 12일 애치슨 미국 국무부 장관의 기자회견에서 대한민국이 미국 태평양 방위선에서 제외되었다. 1950년 1월 26일 당시 댈러스 미 국무부 고문이 방한했을 때, 대한민국을 포함시켜 달라고 요청했으나 역시 거부되었다. * 그리고 5개월이 지난 1950년 6월 25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한국 전쟁을 일으켰다. 6.25전쟁 휴전이후 1954년에는 5개 사단, 1956년에는 1개 사단이 철수하였다. 이후 약 7만 명 정도가 일정기간 유지되었다. 이후 1966년 7월, 한국 전쟁 당시 체결된 주한미국군대의 형사재판권에 관한 대한민국과 미합중국 정부간의 협정 (이른바 대전 협정 )을 개정, 보완한 주한미군지위협정 을 체결하였다. 마지막으로 개정된 때는 2002년 12월 28일 이었다. 닉슨 대통령 당시 주한미군 2차 철수가 있었다. * 닉슨이 대통령 이 되기 2년 전인 1967년 10월, 외교·안보 격월 잡지인 Foreign Affairs 에 기고한 "베트남 후의 아시아"라는 논문에서, 그는 3가지 주장을 했다. (닉슨 독트린과 괌 독트린) 닉슨 독트린과 괌 독트린의 주요 내용 # 미국은 더 이상 세계경찰 이 아니다. # 베트남에서 철군해야 한다. # 미군의 아시아 개입은 축소하고, 아시아 국가들 스스로 방위하여야 한다. 한국 전쟁 이후 4개 사단이 있었으나, 베트남 전쟁으로 1960년대부터 1971년에 걸쳐 2개 사단은 철수하였다. 그리하여 1971년 이전 까지 미국 7보병사단과 미국 2 보병사단의 2개 사단만 남아 있었다. 1971년 2월 6일, 최규하 외무장관과 포터 주한 미국 대사의 공동성명을 발표한 후 3월 미국7보병사단 20,000여 명을 철수했다. 이는 1973년 박정희 대통령이 유신 헌법을 강행한 이유가 컸다. 미국 정부는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촉구하며 주한미군을 철수할 것을 보였고, 대한민국 국군의 월남 파병은 주한미군이 베트남 전쟁으로 배치되는 것을 막기 위한 것도 중요한 이유였다. =>이부분이 사실과 다릅니다 편집자는 수정하길 닉슨독트린이 유신헌법보다 먼저발표 닉슨은 유신 비난한적이 없습니다 카터가 비난함 # 미국7보병사단을 철수하고 미국 2 보병사단은 후방으로 배치하며 전방은 대한민국 국군이 담당한다. # 대한민국 국군의 현대화를 지원한다. # 연례안보협의회를 개최한다. 1974년 9월 주한 국제연합군(UN군 사령부. 중립국 감시단 운영), 주한미군사령부, 미군 제8군 사령부가 통합되었다. 1976년 1월 1일에 UN군 사령부는 해체되었고, 1978년 한미연합사령부가 창설되었다. === 1971년 ~ 1979년 3차 철수, 한미연합사 창설 === 박정희 대통령은 전시작전권 환수를 처음으로 추진하였다. * 1968년 김신조 간첩일당 청와대 피습사건때는 미국 국민의 피해가 없어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과 달리, 1976년 판문점 도끼 살인 사건때 미군 보니파스 대위 등이 순직한 것에 대해 미국이 준 전시태세(데프콘 2)를 선포했기 때문이다. 이와 더불어 1978년 이후 부마 사태 등으로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둘러싼 대한민국과 미국의 갈등은 심해졌고, 그 때마다 미국은 대한민국 정부에게 주한미군 철수를 내세웠다. 지미 카터 대통령은 주한미군 철수를 대선공약으로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1977년 1월 20일 부터 1981년 1월 20일까지 재임했다. 이에 따라 1977년 9월 1,000명, 1978년 11월에는 500명을 철수시켰다. 또한 1978년 한미연합사령부(한미연합사)가 창설되었다. 그러나 제3땅굴 발견으로 미국 국방부는 한반도 내의 군사적 긴장감을 고려하여 주한미군 철수를 무기한 연기하는 문제를 검토중이라고 발표했다. * 1979년 6월 카터 대통령이 서울을 방문할 때 주한미군의 철군 계획이 완전히 백지화 되었다. 3개월 뒤인 1979년 10월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하였다. * 10·26 사건 1심 최종 변론에서(당시 군법회의. 현재에도 군사재판은 단심이다), 김재규는 당시 1948년 정부 수립 이래 최악이었던 한미관계를 완전히 복원시키며,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위해 시해했다고 말했다.( 부마민주항쟁 참조) # 미국 제7함대·미국 7 공군과 군수지원만 있으면 대한민국 국군은 단독방어가 가능하다. # 주변 4대 강대국 (중공, 일본, 소련, 미국)들이 한반도에서 전쟁이 재발하는 것을 싫어하며, 미국7보병사단이 일부 철수해도 충분히 북한을 억제할 수 있다. # 대한민국 경제가 북한을 앞질렀다. # 철군하면서 대한민국 국군을 현대화시키면 된다. # 미국 7 공군은 가장 강력한 억지력이다. === 1979년 ~ 1994년 추가 감축, 전술핵무기 철수, 평시작전권 반환 === 주한미군은 냉전 시대 동북아시아 지역의 세력균형을 유지하는데 기여했으며, 대한민국의 정권 격변기 때마다 민주화를 지지하는 태도를 취했으나, 내정간섭이라는 항의에 밀려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 못했다. * 1979년 12.12사태 당시 주한미군 사령관 위컴 장군은 당시 전두환 소장의 신군부에 강력한 항의를 했으나 항의에 그쳤다. *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대한민국 국군 20사단 등 신군부측의 병력이동과 관련, 주한미군의 작전 지휘하에 있는 부대의 이동이라는 측면에서 주한미군이 간접적으로 신군부를 지원했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 미국정부는 1980년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동원한 특전사 부대나 20사단 부대는 광주에 투입될 당시나 광주에서 작전을 수행하던 중에는 한미연합사 작전통제권하에 있지 않았으며, 그 기간 동안 광주에 투입되었던 대한민국 국군의 어느 부대도 미국의 통제하에 있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1987년 노태우 대통령 후보자도 전시작전권 전환을 대선 공약으로 제시했다. 1989년, 소련과 동구권 붕괴가 현실로 다가올 때, 이미 미국은 지금부터 주한미군 방위비를 대한민국이 부담하지 않으면, 미군을 7,000명 가량 감축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때부터 대한민국은 방위비를 50%가량 부담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에 들어 소련의 해체, 독일의 재통일, 동유럽의 민주화 등으로 냉전 시대의 논리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되었다. 또한 1970년대 이래 중미 관계의 꾸준한 개선과 한소 수교, 한중 수교로 한반도 주변 강대국 간의 군사적 적대관계도 완화되었다. * 이런 상황에서 한반도의 군사적 충돌은 남북한 간의 지역분쟁일 뿐, 세계적인 전략에 영향을 주는 분쟁이 아니기 때문에 주한미군이 대한민국에 주둔할 필요가 없으므로 철수가 바람직하다는 철수론이 제기되었다. * 반면 북한이 공산권 맹방의 도움 없이도 대한민국에 대해 기습공격을 감행할 수 있는 능력을 이미 갖추고 있다는 북한 위협론 을 들어 주한미군의 주둔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이런 논란 속에 미국은 1990년 당시 43,000명의 주한미군을 3단계에 걸쳐 20,000명 수준까지 줄이기로 하고, 1단계 철수를 실행해 37,000명으로 병력을 감축했다. * 그러나 1994년 북한 핵 문제의 대두로 한반도에 전쟁위기가 고조되자 이 계획은 중단되었다. 당시 대한민국에 전시작전통제권이 없었기 때문에 김영삼 정부는 미국 7 공군이 평안남도 영변 원자력 연구소를 폭격할 것을 거의 직전에 알았다. 1991년, 주한미군은 그전까지 있던 모든 전술핵무기를 철수시켰다. 1992년 7월 한미연례안보회의(SCM)에서는 한미연합사 예하에 있는 야전사령부를 해체하고, 그해 12월 1일 해병사령부를 창설하였다. 1993년 군사 정권 이후 처음으로 김영삼 정부 당시 한국국방연구원에 비공개로 연구하였는데, 대한민국 국군을 충분히 현대화시킨다면 남북 분단이 지속되어도, 군 복무기간을 최소 1년 3개월으로 단축할 수 있다는 결과가 나왔다. * 즉, 그때 이미 주한미군의 방향을 비공식적으로 합의하였다는 것이다. 1994년 12월 1일, 대한민국은 평시작전권을 미국으로부터 환수받았다. 앞으로 주한미군은 당시 규모 28,500명을 유지하기로 하였으나, 2011년 10월 11일 당시 정확한 인원은 총 26,000명이다. === 2015년 12월 대한민국의 전시작전권 전환 관련 사항 === 2009년에 이미 아파치 대전차 헬리콥터 2개 대대를 철수하고 1개 대대만 잔류해 있다. 즉 1개 대대는 대한민국에서 철수 후 이라크에 재배치 아파치 헬리콥터는 서해5도와 강화도 인천 등에 북한 호버크래프트와 상륙정을 이용한 기습공격 시 이를 제압할 임무를 가지고 있다. 지금은 이 지역에 대한 방어임무가 주한미군 아파치 대대에서 대한민국 국군으로 이관 되었다. 현재는 대한민국 공군 KA-1 전술 통제기가 맞고 있다. 2015년 12월 전시작전권이 대한민국의 전시작전권 전환과 동시에 한미연합사령부대신 미군 고유의 한국전투사령부(KORCOM)가 탄생하며, 미국 2 보병사단은 서울 남쪽 경기도 평택 험프리스 기지로 축소되어 재배치된다. 2015년 12월 대한민국의 전시작전권 전환이나 차후 맺게 될 평화 협정에 따라 UN군 사령부 (중립국 감시단) 자체를 철수하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 이 또한 한미연합사 소속이다. * 이에 따라 앞으로 JSA를 포함한 모든 비무장지대와 한강 이북에는 대한민국 국군만 있게 된다. 2004년 이후 공동경비구역의 경비 임무는 대한민국 국군이 단독적으로 수행하며, 지휘통제권은 계속 UN군사령부(한미연합사 소속)가 가지고 있으므로, 주한미군 일부 요원들과 중립국 감시단이 주둔해 왔다. * 현재 남한에는 스위스, 스웨덴 대표 주재. 반면 북한은 과거 1993년 체코슬로바키아, 1994년 폴란드가 철수하였다. 체코슬로바키아는 국가가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나뉜 이래 더 이상 중립국 감시단의 임무를 이어받지 않았으나 폴란드는 자국 영토에서 여전히 중립국 감시단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한편 주한미군은 정전협정이 체결된 1953년 이후 판문점 일대의 경비임무를 맡아오다 1991년 이를 대한민국 국군에 인계하고 대성동 주변 지역과 오울렛 초소(Ouellette, 일명 241초소)만을 관할하다 2004년 11월 1일 이들의 경비 임무를 대한민국 국군에 반환하였다. * 그 후 40여 명의 병력을 캠프 보니파스 에 남겨두고, 앞으로 3∼4년간 군사정전위 연락업무 등을 담당하도록 했던 이래 정년에 대한민국의 전시작전권 환수됨과 함께 이들 역시 대한민국 국군에 모두 인계하게 된다. 대한민국의 미 대사관을 포함한 전국 모든 미군 시설은 의무경찰 상설 경비 중대 대원들이 경비하고 있다. 아래 명기한 모든 사항은 2010년 부로 공개되었습니다 2009년 2월 미 극동공병단 회의록 원문에는 12~17+ 로 표기하였다. 별도로, 2003년부터 경기도 북부 문산과 연천에 한·미 합동 훈련장을 운영하고 있다. 이 곳은 물론 대한민국 영토이다. * 주요 미군 기지(용산기지, 평택 험프리스 기지, 오산공군기지, 대구, 진해)는 미국 영토로 간주한다. * 기타 전투 기지인 물류·통신 시설 부지는 미군이나 미 군무원이 주둔해 있지 않는다. 이 자료에는 주한미군의 규모를 2003년~2009년에는 28,000명(+/-) 로 기술하였으나, 2010년~2017년에는 따로 분명히 명시되지는 않았다. * 2011년 10월 11일 당시 정확한 인원은 총 26,000명이다. * 단, 2011년~2016년에는 5,700명(35%), 2012년~2020년에 14,250명(85%)이 3년간 가족을 동반할 수 있다고 기술하였다. 그러므로, 2015년 12월 대한민국의 전시작전권 전환 이후, 늦어도 2020년 이전 주한미군의 수는 대략 16,285 ~ 16,764명이다. 그러나 월터 L. 샤프 주한미군 사령관은 2009년 기준, 2012년 4월 17일에 대한민국의 전시작전권 전환에도 현 28,500명 정원을 유지할 것이라고 하였었다. 그 이후로는 1,000여 명 혹은 수십여 명만 남기는 방안도 있다. * 한편 2011년 10월 11일 당시 정확한 인원은 총 26,000명이다. 어떻게 보면 이 자료가 가족 동반을 비롯한 시설, 제도 추진을 2020년까지 상정하였으므로, 장차 도래할 남북 통일을 배제하고 만들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 그러므로 통일 후에도 주한미군이 주둔할 가능성은 높다고 할 수 있겠다. * 이와 관련하여 과거 한미동맹의 미래에 대한 공동협의 보고서에 이미 명시되어 있긴 하다. 1999년 제31차 한미연례안보회의(SCM)에서 조성태 대한민국 국방부 장관과 윌리엄 코언 미국 국방부 장관의 지시에 따라 2년 간의 협의 끝에 작성되어 2002년 제34차 SCM에 보고된 문서다. * 그러나 이후 2004년, 번복하고 미국 의회(의회 예산국)(CBO)에서 주한미군 축소 방안이 나왔다. 1989년 독일의 통일 관련 4자회담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에서 소련은 나토군이 구 동독지역에 주둔하지 않는 것을 조건으로 통일에 찬성하였기 때문에, 현재까지 구 동독지역은 독일 연방군만이 주둔하고 있다. * 미국은 서독 지방에 계속 미군을 주둔시킬 수 있었다. 이로 볼 때, 한국의 통일 시, 중국과 러시아는 적어도 주한미군을 휴전선 이북에 주둔하지 않는 것을 조건으로 하거나, 나아가 주한미군을 완전히 철수시킬 확률이 매우 높다 하겠다. * 해외 미군이 제일 많이 주둔하고 있는 독일(63,000여 명), 일본(33,400여 명)과 이탈리아 (12,000여 명)의 공통점은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킨 전범 국가(추축국)이라는 것도 통일 후 미군이 1개 여단전투단 이상 주둔시키기 어려운 이유이다. * 주한미군의 대규모 감축 대신 한반도의 비핵화와 미사일 개발 제한 등 비대칭 전력의 억제, 그리고 MD(미사일 방어)로 동북아의 평화 유지와 미국의 이익을 도모할 공산이 크다. * 감축방안은 아래의 예에 기술한 대로, 2020년 이전까지 15,000명으로 감축 & 2개 여단전투단 상시 순환 배치 후, 나아가 1,000여 명만 주둔, 1개 여단전투단 상시 순환 배치. * 그 이후 소수 장비관리 요원만 남기고 병력 전부를 본토로 철수시키고 여단전투단 순환배치도 아예 하지 않는 방안 까지도 될 수 있다. 물론 앞으로도 주한미군은 당시 규모 28,500명을 계속 유지하기로 하였었다. 또한 2002년에는 한국이 통일된 후에도 주한미군을 주둔시킬 것이라고도 합의하였다. * 2011년 10월 11일 당시 정확한 인원은 총 26,000명이다. 2004년 당시, 미 의회 예산국(CBO)은 주한미군 감축의 3가지 방안을 구체적으로 검토해 상원에 보고하였다. * 이 보고서는 주독미군과 주한미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당시 도널드 럼즈펠드 미국 국방부 장관은 같은 해 2004년 2월 "해외주둔 미군 재배치에 따른 가장 큰 변화는 독일과 대한민국 등에서 일어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이 보고서는 럼즈펠드 구상 에 따라 한국, 일본, 하와이 기지들이 통,폐합되는 가운데 태평양 지역의 안보의 주축으로 부상할 것이 확실시되는 주일 미군의 재배치 문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재정적자 감축을 주장해 온 미국 공화당의 중간선거 압승이 주한미군 예산 삭감으로 이어질 조짐을 보이고 있다. 특히 이번 중간선거에서 공화당 승리의 1등 공신인 보수주의 유권자 운동단체 티 파티 에서 주한미군 예산 삭감 주장이 벌써부터 제기되고 있다. * 티 파티 의 대표주자격으로 이번 상원의원 선거에서 당선된 랜드 폴(켄터키주) 당선자는 7일(현지시간) 미국 ABC방송에 출연, 한국.일본.유럽에 더 많은 방위비를 분담시키든지 아니면 미군을 철수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는 국방비 삭감 문제와 관련, "(유럽 주둔) 미군 일부를 집으로 불러들이든지 아니면 유럽으로 하여금 그들의 방위에 더 많은 돈을 내도록 해야 한다"면서 "일본과 한국도 자신들의 방위에 더 많이 돈을 내야 하고, 아니면 그곳에 주둔한) 군대를 고국으로 불러들여 (예산을) 절약해야 한다"고 말했다. 아직 어떤 분야에서 어떤 식으로 예산 삭감을 추진 할지에 대한 티 파티의 명확한 입장은 나오지 않고 있지만 폴 당선자의 이번 언급은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이나 기지이전 문제 등에서 한국의 부담이 커질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 미국 공화당은 그동안 선거 과정에서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재정적자 증가를 강하게 비난하며 불필요한 예산 삭감 등을 통한 재정 건전화를 주장해 왔다. 이번 선거가 있기 전에도 미 의회 내에서는 해외주둔 미군의 경비감축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표출돼 왔다. * 바니 프랭크(미국 민주당. 매사추세츠주) 하원 금융위원장을 비롯한 미국 상원.하원의원 57명은 지난달 `국가재정책임개혁위원회(NCFRR) 앞으로 보낸 서한에서 재정적자를 줄이기 위한 가장 현실적인 방법은 7,120억 달러에 이르는 국방예산의 삭감이라면서 유럽과 아시아의 미군 주둔비용 문제를 재점검하라고 요구했다. * 서한 발송을 주도한 프랭크 위원장은 지난 7월 주한미군을 포함한 해외주둔 미군 철수론을 제기하기도 했다. 리처드 부시 브루킹스연구소 동북아정책연구실장은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미국 공화당 주도의 의회가 한미동맹에 어떤 변화를 일으킬 것으로 생각할 수는 없다"면서도 "현재의 예산 환경 하에서 의회가 주한미군 기지 이전 등에 대한 모든 예산을 제공할지는 지켜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제임스 매티스 미국 국방장관은 2018년04월27일(현지시간) 남북 평화협정 체결 시 주한미군 문제도 향후 협상 의제로 포함될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고 AP통신이 보도했다. 매티스 장관은 이날 국방부에서 마리우시 브와슈차크 폴란드 국방장관과 회동 직전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평화협정이 체결되면 미군이 한반도에 계속 주둔할 필요가 있는가’라는 질문에 “아마도 그것은 먼저 동맹과의 협상에서, 물론 북한과의 협상에서도 우리가 논의할 이슈의 일부”라고 답했다. 미군 장갑차에 의한 여중생 압사 사건 지위협정 북미평화협정 주한미군지위협정(USFK SOFA) 한미연합사령부(ROK-US CFC) 캠프 험프리스 카투사(KATUSA) 주일 미군(USFJ) 대한민국 국군 대한민국의 전시작전권 전환 전시 작전통제권 조선인민군 주한 미국 육군/제8군 주한 미국 해군 사령부 주한 미국 공군 * 군산 공군기지 - 제8전투비행단 * 오산 공군기지 - 제51전투비행단 globalsecurity.org 2009년 12월 31일 기준 전 세계 국가별 현역 미군 배치 현황 분류:1954년 설립 분류:대한민국-미국 관계
모자이크 (Mosaic)는 1993년 미국 일리노이 대학교 NCSA 연구소의 대학생이었던 마크 앤드리슨(Marc Andreessen)과 에릭 비나(Eric Bina)가 공동 개발한 웹 브라우저이다. 팀 버너스리가 만든 기존의 WorldWideWeb 브라우저가 텍스트 위주였던 것과 달리, 모자이크는 이미지를 표시할 수 있는 최초의 그래픽 웹 브라우저였다. 출시 후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으나, 개발 책임자였던 마크 앤드리슨이 동료들을 데리고 1994년 넷스케이프 회사를 설립하고 넷스케이프 내비게이터 웹 브라우저를 개발함에 따라 사실상 개발이 중단되었다. 1994년 모자이크는 스파이글래스(Spyglass) 회사에 인수되었다. 1995년 마이크로소프트는 스파이글래스 회사에 저작권료를 지급하고 기존 모자이크 웹 브라우저의 소스 코드를 활용하여 인터넷 익스플로러 웹 브라우저를 개발했다. 모자이크는 1997년 1월 7일자로 공식적인 지원과 개발이 중단되었지만, NCSA FTP 서버에서 계속 다운로드할 수 있다. NCSA 모자이크는 NCSA의 마크 앤드리슨과 에릭 비나가 본래 유닉스의 X 윈도 시스템을 위해 설계/개발했다. 모자이크의 개발은 1992년 12월 시작됐다. 1.0 버전이 1993년 4월 22일 출시되고, 이후 1993년 여름 동안 두 개의 보완 버전이 나왔다. 1993년 12월에는 2.0 버전 출시와 함께 애플 매킨토시와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용 1.0 버전이 출시되었다. 에이콘 아르키메데스용 포팅을 1994년 5월에 추진하기도 했다. 모자이크는 인터넷이 교육 기관이나 대규모 산업 연구소 밖으로 급속도로 팽창하던 때, 제한된 정보 서비스(당시는 대개 FTP, 유즈넷, 고퍼 정도)만이 존재하던 인터넷 환경에 매끄러운 멀티미디어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제공하는 최초의 프로그램이었기 때문에 "1990년대의 최고 인기 프로그램"으로 올라서게 되었다. NCSA 모자이크는 상용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으로서는 관대한 라이선스를 채택했다. 모든 버전에서 비상업적 목적의 사용은 일정한 제한을 제외하고는 자유로웠다. 게다가 유닉스 X 윈도 시스템 버전의 소스 코드는 공개 배포되었다(다른 버전의 소스 코드는 동의 아래 이용 가능했다). 그러나 끊임없는 소문에도 불구하고, 모자이크가 주요 브라우저로서 군림하던 시기에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로서 출시된 적은 없으며, 구입하지 않은 경우에는 언제나 사용에 제약이 있었다. 그 뒤에 모자이크 개발팀의 지휘자였던 마크 앤드리슨은 실리콘 그래픽스(SGI)의 창립자들 가운데 한 명인 짐 클락과 함께 NCSA를 떠나 일리노이 대학교의 전 학생과 교원을 데리고 나중에 넷스케이프 내비게이터를 출시하는 넷스케이프 커뮤니케이션스 코퍼레이션이 될 모자이크 커뮤니케이션즈 코퍼레이션을 창립했다. 스파이글래스에서 자신들의 독자 웹 브라우저의 출시를 위해 기술과 상표를 라이선스했지만, NCSA 모자이크의 소스 코드는 사용하지는 않았다. 스파이글래스 모자이크는 이후에 마이크로소프트에게 라이선스되어 인터넷 익스플로러로 이름이 바뀌게 된다. 모자이크의 인기는 넷스케이프 네비게이터의 출시 이후 시들해가다가 1998년에는 사용자가 거의 사라졌다. 모자이크 홈페이지 현대 리눅스 시스템을 위한 모자이크 분류:크로스 플랫폼 소프트웨어 분류:소프트웨어의 역사 분류:웹 브라우저의 역사 분류:인터넷의 역사 분류:맥 OS 웹 브라우저 분류:POSIX 웹 브라우저 분류:윈도우 웹 브라우저 분류:1993년 소프트웨어
헨리 8세 (, 1491년 6월 28일 ~ 1547년 1월 28일)는 잉글랜드의 국왕(재위 1509년 4월 22일~1547년 1월 28일)이자 아일랜드의 영주(재위 1541년~1547년)이며, 청년 시절은 르네상스 군주로 알려졌으며 1509년 4월 21일부터 사망할 때까지 아일랜드와 프랑스의 왕위 소유권을 주장하였다. 그의 아버지 헨리 7세의 뒤를 이어 튜더 왕가 출신으로는 두 번째로 등극하였다 헨리 7세의 둘째 아들로 형 아서 튜더가 요절하여 왕세자가 되었다. 형수인 왕비 캐서린과 결혼하여 딸 메리 튜더를 두었지만 아들이 없어서 결혼한지 20년만에 별거하였다. 그리고 1520년대 초부터 자신의 정부였던, 왕비의 궁녀 출신 앤 불린과 혼인하려고 하였으나 교황 클레멘스 7세가 혼인 무효화를 허락하지 않아 로마 교황청과 오래도록 갈등을 겪었다. 그 뒤 그는 교황과의 결별을 선언하고 1534년 수장령(首長令)을 내려 잉글랜드 교회를 로마 가톨릭교회로부터 분리시켰다. 1536년과 1539년에는 로마 가톨릭교회와 수도원을 해산하고 그 소령(所領)과 재산을 몰수하였다. 두 명 왕비를 처형하고 두 명 왕비와 이혼했으며 토머스 모어, 토머스 크롬웰 등 시종과 공신을 처형하고 왕실에 대한 비판을 금지하였다.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고 절대왕정을 확립하였다. 헨리 8세는 영국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 가운데 한 명이다. 비록 치세 초반기에는 14세기 존 위클리프 이후 활력을 얻기 시작한 종교개혁을 강력히 억압하였지만, 기독교 역사에서 로마 교황청과 대립한 왕으로 더 알려졌다. 이 싸움은 결국 헨리 8세가 종교개혁을 단행하여 6세기 이래 로마 가톨릭교회 소속이었던 잉글랜드 교회를 독립시키고, 잉글랜드교회에서의 왕위지상령을 갖게 하였다. 헨리 8세가 자신의 첫 번째 부인인 아라곤의 캐서린과의 결혼을 무효로 선언하고 두 번째 부인인 앤 불린과 결혼하면서 로마 교황청에 의해 파문 당했지만, 임종때까지 헨리 8세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전례와 교리를 지지하였다. 본격적인 잉글랜드 종교개혁 운동은 그의 후계자인 에드워드 6세와 엘리자베스 1세 때부터였다. 또한 헨리 8세는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통합을 이끌기도 하였다. 대중문화에서 그는 강력한 왕권을 과시하며 여섯 번이나 결혼한 군주로 유명하다. 헨리 8세는 런던 교외의 그리니치에 있던 프라센티아 궁전에서 헨리 7세와 요크 왕조의 에드워드 4세의 딸인 요크의 엘리자베스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때는 형 아서 튜더가 있었다. 본래 헨리에게는 여섯 명의 형제가 있었지만, 그 가운데 겨우 세 명 - 아서 (웨일스 공), 마거릿, 메리 - 만이 유아기에서 살아남았다. 1493년, 아직 젖도 못 뗀 헨리는 드바 성의 성주로 임명되었다. 다음해 1494년에 그는 요크 공이라는 작위를 받았고, 그와 더불어 잉글랜드의 문장원 총재와 아일랜드의 총독으로 지명되었다. 헨리는 우수한 가정교사의 가르침을 받아 라틴어와 프랑스어, 스페인어를 유창하게 할 줄 알았다. 당시 관례상 맏이였던 아서 왕태자가 장차 왕위를 물려받을 것으로 예정되었던 탓에 헨리는 교회의 직분을 맡기 위한 준비를 하였다. 형 아서가 1502년에 죽자 헨리는 세자에 책봉되었다. 어려서부터 그는 독실한 가톨릭 교도였으나 훗날 앤 불린과의 연애 문제와 첫 왕비와의 이혼 문제 등으로 교황과 사사건건 대립하게 된다. 독실한 신앙이기도 했던 그는 1521년 교황 레오 10세에게 한때 신앙의 옹호자 라는 칭호를 수여받기도 했다. 그러나 1502년에 아서가 알려지지 않은 불치병(아마도 결핵이었을 것으로 추정됨)에 걸려 갑자기 죽었다. 그리하여 혼인관계를 통하여 잉글랜드 왕국과 스페인 왕국 간의 동맹을 강화하고자 하였던 헨리 7세의 노력이 잠시 수포로 돌아가는 듯하였다. 죽은 아서 대신에 그의 동생 헨리가 죽은 형의 뒤를 이어 왕위계승자가 되었다. 부왕 헨리 7세는 즉시 로마 교황에게 새로운 웨일스 공과 그의 형제인 미망인, 즉 카스티야의 이사벨 1세와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의 막내딸인 아라곤의 캐서린의 결혼을 허용해줄 것이 요청되었다. 캐서린은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와 카스티야의 이사벨 1세의 딸이자 후아나 1세 (카스티야)후아나의 언니로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카를 5세의 이모였다. 부왕 헨리 7세는 스페인과 영국 양국 간의 명예와 동맹을 위해 정략 결혼을 감행했다. 당시 캐서린은 아서 왕태자와 결혼은 했으나 처녀성을 잃지는 않았다고 맹세하였다. 결국, 교황으로부터 관면을 받은 후 자신의 젊은 남편이 죽은 지 14개월 만에 캐서린은 새로운 웨일스 공이자 죽은 남편의 형제와 다시 약혼하기로 결정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나 1505년까지 헨리 7세는 스페인과의 동맹에 대한 관심도가 떨어졌다. 그리고 아직 젊었던 헨리는 자신의 약혼이 자신의 동의 없이 치러진다고 여겼다. 두 사람의 결혼은 1509년 헨리 7세의 임종 때까지 늦추어지다가 그로부터 2개월 후인 6월 11일에서야 결혼하였다. 그리고 1509년 6월 24일에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이때 헨리의 나이 열일곱 살이었다. 그로부터 2일 후, 헨리 8세는 선왕의 중신 가운데 평판이 좋지 않은 장관들인 리처드 엠프슨과 에드먼드 더들리를 체포하였다. 그들은 가장 죄질이 나쁜 반역죄로 고발되었으나 증거는 없었다. 그럼에도, 1510년에 왕명에 따라 처형되었다. 이는 장차 자기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다루는 헨리 8세의 주요한 책략이 된다. 이후 어린 시절 헨리의 개인교사였던 요크 대주교 토머스 울지가 헨리 8세의 전폭적인 신임을 받게 되었다. 1509년 18살 때의 젊은 헨리 8세. 헨리 8세는 르네상스적 인간이었으며, 그의 궁정은 지나칠 정도로 화려하면서도 학구적이며 예술적인 혁신의 중심지였다. 그는 뛰어난 음악가, 작가, 시인이었다. 그가 작곡한 것으로 여겨지는 악보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합창곡 Pastime with Good Company 또는 The Kynges Ballade 이다. 또한, 그는 욕심 많은 노름꾼이었으며 주사위 선수였다. 특히 그는 운동에도 탁월한 재능을 발휘하였으며, 무예와 마상 경기, 사냥, 테니스 실력이 뛰어났다고 한다. 그리고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 신앙심이 투철하기까지 하였다. 일찍이 마르틴 루터를 비판한 《칠성사의 옹호》를 저술한 공로로 교황 레오 10세의 칭찬을 받아 ‘신앙의 옹호자( Defender of Faith )’라는 칭호를 받았을 정도였다. 덧붙여 ‘신앙의 옹호자’라는 칭호는 종교개혁으로 잉글랜드 교회가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분리된 후에도 헨리 8세와 그 후계자들에게 대대로 물려받아 현재 영국 군주인 엘리자베스 2세의 칭호 가운데 하나로 되어 있다. 1511년 교황 율리오 2세가 프랑스에 반대하는 신성동맹을 결성하였다. 이 새로운 동맹에는 수많은 나라가 신속히 참가하였는데, 스페인과 신성 로마 제국뿐만 아니라 잉글랜드까지 포함되었다. 헨리가 그러한 결정을 내린 진짜 이유는 프랑스 북부까지 영토를 확장하고자 하는 목적 때문이었다. 그는 1511년 11월에 스페인과 함께 프랑스를 공동의 적으로 규정한 웨스트민스터 조약을 맺었으며 캉브레 동맹 전쟁에 말려들 경우를 대비하였다. 1513년, 헨리 8세는 프랑스를 공격하였다. 잉글랜드군은 스퍼스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패배시켰다.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4세는 헨리의 경고를 무시하고 루이의 요청을 받아들여 잉글랜드를 침공하였다. 스코틀랜드군은 1513년 9월 9일에 플로든 전투에서 비참한 패배를 당하였다. 이때 전사한 스코틀랜드 병사 가운데는 스코틀랜드의 왕도 포함되어 있었다. 1520년대 초 시녀였다가 가면무도회에서 본 앤 불린을 보고 그의 한 눈에 들게 되었다. 앤은 바로 임신하였고 이는 그로 하여금 이혼을 결심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아라곤의 캐서린이 오랫동안 아들을 낳지 못함과 더불어 헨리 8세의 조급함은 날이 갈수록 더해갔다. 그러던 중 1525년, 헨리 8세는 당시 캐서린 왕비의 젊은 시녀이자 한때 자신의 애인이었던 메리 불린의 언니인 앤 불린에게 눈독을 들여 그녀에 대한 소유욕을 갖게 되었다. 앤 불린은 예전의 메리 불린처럼 그늘의 왕비가 되는 것을 거부하며 자신을 유혹하려는 그의 시도에 저항하였다. 그녀의 매몰찬 거절을 받은 헨리 8세는 오히려 더욱 그녀에 끌리게 되면서 집요하게 그녀를 유혹하였다. 이러한 헨리 8세의 계속된 유혹에도 앤 불린은 계속해서 거절하였다. 그러나 그녀가 헨리 8세에게 혼인을 무효화시키라는 제안을 했을 것이며, 그것이 아들을 상속자로 삼고자 하는 헨리 8세의 소원에 동기를 부여했을 것이라는 신빙성 있는 주장이 있다. 과거 헨리 8세의 아버지인 헨리 7세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잉글랜드 왕국은 왕위를 놓고 내전을 겪은 전례가 있었다(장미 전쟁). 그러한 일을 잘 알던 헨리 8세는 왕위 계승을 탄탄히 하고 싶어했다. 그와 캐서린 사이에는 딸 메리를 제외한 모든 아이들이 얼마 못 가 죽었기 때문에 아들이 없는 상태였다. aragon.jpg|섬네일|왼쪽|180px|아라곤의 캐서린, 헨리 8세의 첫 번째 아내. 이러한 헨리의 사정을 파악한 앤은 이 기회를 이용해 자신이 캐서린을 대신해 왕비로 등극하고자 하였다. 얼마 후 그녀는 헨리 8세의 소망을 이용하여 캐서린과의 혼인을 무효화시키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헨리 8세는 대리인 토머스 울지 추기경으로부터 독립하여 앤과 관련된 자신의 계획을 그에게 맨 처음 전하지도 않고 성좌에 호소하기로 하였다. 곧바로 왕의 비서인 윌리엄 나이트가 교황 클레멘스 7세에게 캐서린과의 혼인을 무효화시켜 줄 것을 청원하고자 보내졌다. 혼인이 무효라는 주장의 근거는 캐서린은 아서와의 이전 결혼에서 순결을 잃었으며, 따라서 헨리 8세는 형수와 결혼한 셈이 된 것이기 때문에 레위기(20:21)에 어긋나는 비(非) 성경적인 결혼이며 율리오 2세 교황의 관면은 효력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신명기(25:5)에는 이와 상반된 구절이 있다) 또한, 혼인이 무효 될 경우에는 헨리 8세가 새로운 여성과 새로 결혼식을 해도 허락해달라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새로운 여성은 사실상 앤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당시 교황은 신성 로마 제국의 카를 5세의 포로나 다름없는 신세였기 때문에 나이트는 교황과 접촉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에 결국 왕의 사절은 별다른 성과 없이 돌아와야 했다. 헨리 8세에게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카를 5세의 압력을 받는 교황이 카를 5세의 이모인 캐서린의 혼인 무효를 거부할 것은 명백했다. 교황은 로마에서 직접 판결을 내리기 전까지 헨리 8세가 새로 결혼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이에 울지 추기경이 배신했을 거라고 확신한 앤 불린은 그가 1529년에 공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헨리 8세에 대한 압력을 유지하였다. 1527년 헨리는 앤 불린과 결혼하기 위해 캐서린과 이혼을 하려고 했으나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이를 거부했다. 당시 영국의 대법관이었던 울지는 1515년부터 1527년까지 영국 국왕의 자문관을 겸하며 헨리의 조력자로서 완벽하게 국정을 이끄는데 도움을 주었지만 헨리의 이혼 문제를 놓고 교황청과 헨리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결국 해임되었다. 쫓겨난 울지는 앤에게 자신의 정권 복귀를 도와 달라고 부탁했으나 거절당했고 그러자 울지는 앤을 국외 추방하려는 책략을 비밀리에 꾸몄으며 캐서린 왕비와 로마 교황청과의 연락을 취하였다. 이 사실이 발각되자 헨리 8세는 울지의 체포를 명령하였으며, 1530년에 결국 붙잡혀 참수당했다. 울지를 대신해 대법관의 자리에 오른 토머스 모어는 헨리 8세의 새로운 정책에 협력하여 의회에서 울지를 탄핵하였고 헨리와 캐서린의 결혼이 불법이라는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의 신학자들의 견해를 공포하였다. 헨리 8세가 교황의 권위에 대해 반감을 품기 시작하면서 모어의 불안감은 커져만 갔다. 1년 후 법원의 판결에 따라 캐서린 왕비는 궁전에서 추방되었으며, 그녀의 방의 새 주인은 앤이 되었다. 예전의 울지처럼 앤은 각료 임명 등 정치적 문제에서 대단히 큰 영향력을 지니게 되었다. 앤은 윌리엄 워햄이 죽은 후 공석이 된 캔터베리 대주교 자리에 자기 가족의 개인 예배당 사제인 토머스 크랜머를 앉혔다. 이 결정은 프랑스 왕의 도움을 받아 로마로부터 인정받았다. 토머스 크랜머는 클레멘스 7세로부터 팔리움을 하사받았다. 새로 대법원장이 된 토머스 크롬웰은 1532년 영국 교회와 로마의 교회를 분리시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1533년 헨리와 앤 불린과의 결혼을 승락했다. 날이 갈수록 잉글랜드 내에서 로마의 힘은 조금씩 약해져 갔다. 1532년, 새로운 대법원장이 되고 임시 대주교가 된 토머스 크롬웰은 헨리의 첫 번째 결혼이 무효라고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앤의 지지자였던 법률가 토머스 크롬웰은 일찍이 의회의 반대를 물리치고 비서장관과 주교 총대리의 지위를 제수받았다. 이후 토머스 모어가 다시 대법관에 임명되자 대법관직을 사임함에 따라 헨리는 그를 장관들 우두머리의 지위에까지 올렸다. 이 일로 헨리는 결국 바티칸의 눈밖에 났고, 결국 로마와 결별하고 영국 국교회를 설립하며 종교개혁을 단행하게 된다. 1532년 겨울, 헨리 8세는 칼레에서 프랑스 왕과 회담했다. 그는 그곳에서 자신의 새로운 결혼에 대한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의 지지와 협력을 얻기를 원했다. 칼레에서의 회의는 프랑스 왕국이 헨리 8세의 재혼을 위해 지원해주었던 이래 정치적 승리였다. 즉시 잉글랜드의 도버로 돌아간 헨리와 앤은 비밀리에 결혼식을 올렸다. 앤은 곧바로 임신하였고, 왕실 관습에 따라 1533년 1월 25일 런던에서 다시 한 번 결혼식을 올렸다. 행사는 매우 신속하게 진행되었고 1533년 5월 23일, 크랜머는 헨리 8세와 캐서린의 혼인 합법성에 대한 결론을 내리고자 던스터블 수도원에서 특별 법원을 소집하였다. 그곳에서 크랜머는 헨리와 캐서린의 결혼을 무효라는 판결을 내렸으며, 5일이 지난 1533년 5월 28일에는 헨리와 앤의 결혼은 정당하다고 공식 선언하였다. 1533년 6월 1일에는 앤의 이름이 왕의 배우자 목록에 오름에 따라 캐서린의 왕비 칭호는 박탈되었다. 1533년 9월 7일, 앤은 예상보다 일찍 출산하였다. 앤은 헨리 8세의 모후(요크의 엘리자베스)의 이름을 딴 엘리자베스라는 이름의 여자아이를 낳았다. 교황의 판단을 거절한 의회는 1533년 계승법을 제정하면서 잉글랜드 왕국의 합법적인 왕비는 앤 볼린이라고 확정하였다. 그에 따라 캐서린의 딸인 메리는 서출로 신분이 격하되었으며, 왕위 계승 순서에서 엘리자베스 다음이 되었다. 특히 이 법안에는 ‘그 어떤 외국의 왕자 또는 유력자’도 거절한다는 조항이 포함되었다. 왕국의 모든 백성은 이 법안을 인정할 것을 요구받았으며, 만약 이를 거부할 땐 즉시 교도소에 투옥되었다. 특히 헨리와 앤의 결혼을 무효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간에 반역죄로 다스려 사형으로 처벌받았다. 1531년 헨리는 빈민 구제를 위한 법령인 헨리 8세 칙령을 선포한다. 그는 특별히 시장이나 치안판사로 하여금 교구에 머물러 노동 불능의 노인이나 빈민의 구호신청을 조사하도게 하고 이를 1531년에 발표한 칙령에도 명시하였다. 그는 각 지의 지방관들에게 명하여 걸인을 등록케 하여 지정된 지역에서만 구걸하도록 하였다. 또한 목적의 세금을 징수할 수 있는 지방관리에게 빈민을 보호할 책임 의무를 부과하고, 지방 행정 기관에서 빈민과 걸인의 수를 실시간으로 파악하고 관리하게 하는 등 빈민을 위한 공적책임을 갖도록 지시하였다. 공식적인 명칭은 건장한 부랑인과 거지의 처벌을 위한 법률 로 헨리 8세의 칙령 또는 헨리 구빈법이라 한다. 헨리는 각 지방과들에게 실업자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해주고 장애인들의 구걸도 제한, 금지하게 하였다. 이는 주요 목적은 국가가 신체 건강한 빈민을 다루는 방법을 조직화하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빈민들에게는 지나친 통제를, 걸인이나 부랑자에게는 잔인한 처벌을 가하는 근거가 되었다. 1536년 헨리 8세는 다시 1536년 빈민 법령(The Statute of 1536)을 제정하여 성공회의 각 교구단위로 노동 불능의 빈민과 장애인들의 수를 파악하고 이들을 구제토록 하고, 노동가능한 자에게는 취업, 취업지원을 하게 하며, 무차별 혜택과 생활비 지급을 금지하고, 노동력이 있는데도 취직을 거부하거나 기피하는 빈민, 걸인이나 부랑자에게는 처벌, 투옥하게 하는 법안을 마련했다. 노동능력이 있는 사람들의 구걸에 대한 처벌은 낙인을 찍고 투옥시키거나 노예로 삼고, 그들의 자녀를 떼어 놓으며 자녀는 지방 행정 기관에서 마련한 탁아소로 보내진다. 그 뒤에도 반복적인 위반 시에는 그 빈민, 걸인은 사형에 처해지고 자녀들에 대한 권리 역시 박탈되었다. 볼린, 헨리의 두 번째 왕비. 1534년 왕위지상령으로써 잉글랜드교회를 치리하는 자 는 왕임을 선포한다. 1534년 11월에 통과된 수장령은 잉글랜드교회의 수장은 군주임을 밝혔다. 동시에 영국 하원은 로마에 호소하는 것을 금지하였으며 잉글랜드 내에서 교황의 교서를 발표하면 가차없이 형벌에 처하기로 결의하였다. 또한, 왕의 동의 없이 교회가 어떤 규정도 만들 수 없도록 하였다. 많은 성직자들은 국왕도 속인이라 보고 아무래도 속인이 교회 통치권을 행사할 수는 없다고 믿었다. 헨리 8세는 교황이 상징했던 권력이 머물 곳은 단 한 군데라고 보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잉글랜드교회의 상징적인 지도자는 영국 국왕이라 선언했던 것이다. 헨리는 수장령을 발표하여 그는 왕이 정당하고 적법하게 교회의 수장임을 주장하였다. 이에 교황 클레멘스 7세는 마지막으로 헨리 8세와 크랜머 대주교를 파문에 처함과 동시에 대주교의 혼인무효 판결은 타당하지 않을뿐더러 앤과의 결혼은 법적 구속력이 없는 무익한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교황 대사를 잉글랜드에서 철수시킴에 따라 로마와 잉글랜드의 외교관계는 단절되었다. 그러자 잉글랜드에서는 몇몇 법률이 더 통과되었다. 1534년 성직임명법을 반포하여 국왕에 의해 지명된 후보만이 주교로 착좌할 수 있다고 선언하였으며, 1534년에 국왕지상법(수장령)을 반포하여 “잉글랜드 국왕만이 잉글랜드 교회의 유일한 우두머리”라고 단언하였으며, 위 법 조항을 거부하는 이는 1534년 반역법에 따라 왕에 대한 대역죄로 처벌하기로 승인하였다. 잉글랜드 신민들은 왕에게 “하느님 다음으로 높으신 폐하”를 의무적으로 말하게 하고 교황의 왕관 수여식을 “부당하고 무자비한 권리 침해이자 강요”라고 주장해 교황의 권위를 떨어뜨림으로써 파문에 응대하였다. 이로써 잉글랜드 교회는 로마 교회와 단절한 채 잉글랜드 국왕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된다. 종교정책 이외에도 왕권강화에 힘썼으며, 반왕실, 반체제적 귀족의 영지를 몰수하는 한편 울지, 토머스 크롬웰, 토머스 모어 등의 공신(功臣)들과 왕실의 시종들을 공개 처형하였으며 왕실과 왕의 왕권강화, 전쟁, 이혼, 종교 문제를 비판하는 문인들의 활동을 금지시켰다. 웨일스,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등의 지배와 방비를 강화하고, 성곽의 개보수와 병력 확충 등을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당시의 복잡한 국제정세 속에서도 몇 차례나 대륙에 출병하였다. 절대왕정을 더욱 강화하였고 지방과 조정의 대소사를 왕이 직접 결재, 관장하였다. 1536년과 1539년에는 가톨릭 교회와 수도원을 해산시키고 그 소령(所領, 영유하고 있는 땅)과 재산을 몰수하였다. 이로써 로마 교황청과의 관계는 극도로 악화된다. 그는 성격적인 결함 등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지만 종교개혁을 하고 군주정치를 구현한 것, 빈민과 실직자를 구제한 것 등은 그의 치적으로 평가된다. 헨리 8세와 앤 불린은 결혼 생활에 만족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평온하고 사랑스러운 날들을 즐겁게 보냈지만, 헨리 8세의 바람기와 빈번한 불신 때문에 앤 불린은 눈물과 격노를 함께 느끼며 힘겨워하였다. 반면에 헨리 8세는 앤의 끊임없는 성급함과 과격함을 싫어했다. 1534년 앤은 상상 임신 혹은 유산을 하게 되었고, 헨리 8세는 그녀가 자신에게 아들을 주지 못하는 것에 대해 배신감을 느꼈다. 1534년 성탄절 이전, 헨리는 비밀리에 크랜머와 크롬웰을 만나 캐서린의 복귀 없이 앤을 내쫓아 왕비를 교체할 방법을 상의하였다. 크롬웰 한편, 헨리의 종교 정책에 대한 반발은 잉글랜드 내에서 빠르게 진압되어갔고 1535년 토머스 모어가 결국 참수당한 것을 포함해 헨리 8세에게 항거한 무수히 많은 로마 가톨릭교도가 고문당한 다음 처형되었다. 그 가운데 가장 눈에 띈 사람은 로체스터의 주교 존 피셔와 헨리 8세의 전직 대법관 토머스 모어였다. 그들은 둘 다 수장령에 대해 서약하는 것을 거부한 일로 반역죄로 유죄 판결을 받아 티번에서 참수되었다. 로마 가톨릭교회에 대한 박해는 잉글랜드 백성 사이에 더 큰 반발심을 불러일으켜 전복 모의를 하기에 이르렀으며, 그 가운데 가장 크게 주목할 만한 사건이 모어와 피셔가 처형된 날 같은 해 10월 잉글랜드 북부에서 일어난 은총의 순례이다. 헨리 8세는 봉기의 지도자 로버트 애스크를 왕실 연회에 초대하여 그들에게 자신에 대한 반역을 용서할뿐더러 평화적으로 해산한다면 그들의 요구 사항을 경청해주겠노라고 약속하였다. 왕의 약속을 믿은 사람들을 흩어져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헨리는 봉기를 일으킨 사람들을 반역자로 간주했기 때문에 그들에게 한 약속을 지켜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이에 왕에게 속았다고 생각한 애스크는 다음해에 다시 봉기를 일으켰으나 그들의 힘은 예전만 못했기 때문에 손쉽게 진압할 수 있었다. 애스크를 포함한 지도자들 전원은 체포당한 후, 반역죄로 다스려 처형되었다. 이후 많은 수도원이 1539년 5월 의회의 승인에 따라 잇달아 강제로 해산되었다. 1536년 1월 8일 헨리 8세와 앤 불린에게 아라곤의 캐서린이 죽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그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헨리와 앤은 밝은 노란색 옷을 차려입었다고 한다. 헨리는 캐서린의 죽음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기쁨을 드러내었다. 앤은 다시 아이를 뱄으며, 만일 그녀가 이번에도 아들을 낳지 못할 시 어떻게 될지는 누구보다 그녀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다음날, 헨리 8세는 경기에서 그만 낙마하여 심한 상처를 입었다. 한때 헨리 8세의 생명이 위험한 것처럼 보였다. 사고 소식을 들은 앤은 그 충격으로 15주간 잉태하였던 사내아이를 유산하였다. 그날이 1536년 1월 29일로 마침 캐서린의 장례식을 거행한 날이었다. 대부분의 역사가는 이후부터 두 사람의 관계가 틀어졌다고 본다. 앤의 연이은 임신은 필사적으로 아들을 몹시 바라는 헨리의 관심을 끌었다. 저술가 마이크 애슐리는 앤은 엘리자베스를 낳고 1536년 사내아이를 유산한 후 두 명의 사산아를 더 낳았다고 적고 있다. 대부분 1533년 9월 엘리자베스의 탄생이 유일하며 1534년 여름의 유산과 1536년 1월의 거의 4개월간 잉태한 사내아이를 유산한 것으로 볼 때 있을 법한 증거가 된다. 앤이 마지막 유산에서 회복할 즈음, 헨리는 자신의 혼인이 마법에 의한 것이라고 단언하였다. 새로운 시대에 맞춰 헨리의 새로운 정부인 제인 시무어가 급격히 대두하였다. 앤의 형제에겐 거부된 가터훈장이 제인의 형제에게는 허락되었다. 앤은 자기 오빠를 포함하여 다섯 명의 남자와 근친상간을 하고 반역을 조장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었다. 그녀와 성관계를 가졌다고 의심되는 남자들도 모두 고소당했다. 1536년 5월 2일에 앤은 포박당한 채로 런던 탑에 투옥되었다. 그녀는 간통, 근친상간, 반역의 죄로 고발당했다. 비록 그들에게 불리한 증거는 불확실했지만, 법원에서는 피고인들에게 유죄를 선고하면서 죽음을 선고하였다. 조지 불린과 다른 피고인들은 1536년 5월 17일에 처형되었다. 같은 해 5월 19일 아침, 피의 탑으로 끌려간 앤은 그곳에서 도끼를 한 번 내려치면서 신속하게 처형되었다. 제인 시무어, 헨리의 세 번째 왕비. 1536년 헨리는 앤을 처형시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를 모시던 시녀 제인 시무어를 총애하여 약혼하였으며, 10일 후에는 결혼식을 올렸다. 그의 세 번째 결혼과 동시에 헨리는 웨일스를 잉글랜드에 합병시키는 문서에 승인하였다. 이로써 잉글랜드와 웨일스는 강력한 하나의 나라로 통합되었다. 그 후 1536년 개정된 왕위계승법에 따라 제인이 낳은 헨리의 아이들이 일차적으로 왕위계승권을 가지며, 메리와 엘리자베스 공주들은 서출로 선언되었다. 제인은 훗날 1537년에 에드워드 6세가 되는 에드워드 왕자를 낳았다. 출산은 위험했으며 제인은 출산 후유증으로 1537년 10월 24일 그리니치 궁전에서 죽고 만다. 제인의 죽음 후, 헨리와 전 왕실은 장기간 동안 애도하였다. 헨리는 제인만을 자신의 ‘참된’ 아내로 생각하였으며, 그 이유는 그녀만이 그에게 그토록 원하던 아들을 낳아 주었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된다. 훗날 헨리가 죽은 후 그 시신은 제인의 옆에 묻혔다. 1540년 헨리 8세는 성인의 유골과 유물을 모신 성소의 파괴를 인가하였다. 이번에 헨리 8세는 계승을 더 확실하게 하려고 다시 한번 결혼하기로 하였다. 에식스 백작으로 승진한 토머스 크롬웰은 로마 교황청이 잉글랜드를 향해 공격해올 경우 중요한 동맹자가 되어 줄 개신교도인 클레페 백작의 누이인 앤을 권하였다. 궁정화가 한스 홀베인이 그린 앤의 초상화가 헨리 8세에게 보내졌다. 초상화를 본 헨리는 만족해하며 앤과의 결혼에 동의하였다. 그러나 잉글랜드에 도착한 앤을 본 헨리는 그림과 다른 그녀의 실제 모습을 보고 실망하여 “플랑드르산 암말”이라고 부르며 멀리 하였다. 클레페의 앤, 헨리의 네 번째 왕비. 헨리는 다른 여인과 결혼하려고 또다시 혼인을 무효로 하고 싶어했다. 싸움을 원치 않았던 헨리와 함께 클레페 공작은 신성 로마 황제에 대한 항쟁에 종사하고 있었다. 클레페의 앤은 충분히 총명하여 헨리의 탐구를 방해하지 않았음에도 혼인 무효를 당하였다. 결혼 후 성생활에 관한 물음에서 그녀는 단 한 번도 잠자리를 같이하지 않았다고 증언하였다. 헨리는 단지 밤마다 그녀의 방에 들어가 이마에 입맞춤만 할 뿐이었다. 이리하여 혼인을 무효로 하는 것을 막는 모든 장애는 사라졌다. 그 후 결혼은 종료되었으며 앤은 ‘왕의 누이’라는 칭호를 받고 메리 불린의 가족들이 이전에 거주하였던 히버 성에 들어가 살았다. 동시에 헨리의 총애를 잃은 크롬웰은 그 뒤 그에게서 사권을 박탈당하고 참수되었다. 그가 창설한 교회 부섭정이란 독특한 자리도 사라졌다. 캐서린 하워드의 초상화 , 한스 홀베인, 1540. 1540년 7월 28일, 헨리는 토머스 크롬웰까지 참수한 뒤 헨리 8세는 외사촌이자 노퍽 공작 토머스 하워드의 조카 젊은 캐서린 하워드와 결혼하였다. 그는 자신의 새 왕비를 무척 좋아했다. 그러나 캐서린 하워드는 결혼 후 큰 사건을 겪게 되었다. 이전에 그녀는 프란시스 더햄과 비공식적으로 약혼하여 공공연히 잠자리를 같이 하였으며, 왕비가 된 후에는 왕의 시종 토머스 컬페퍼를 총애하였다. 독실한 가톨릭 집안이었던 하워드가를 좋게 생각하지 않았던 토머스 크랜머는 헨리 8세에게 캐서린의 헤픈 몸가짐에 대해 밀고하였다. 처음에 헨리는 그의 주장을 믿지 않았지만 크랜머가 캐서린과 관련된 문제를 조사하도록 허락했다. 심문 때 캐서린이 더햄과 이전에 결혼을 약속한 사이라는 것을 인정할 경우 그다음 헨리와의 결혼은 법적으로 무효가 될 수 있었으나, 그녀는 그렇게 하는 대신에 더햄이 자신에게 강제로 불륜 관계를 맺을 것을 강요했다고 주장하였다. 동시에 더햄은 토머스 컬페퍼와 캐서린 왕비의 관계를 폭로하였다. 앤 불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혼인이 공식적으로 가치가 없으며 처음부터 무효하다는 판결이 내려짐에 따라 캐서린 하워드는 간통죄로 1542년 2월 13일에 처형되었다. 그때 그녀의 나이는 겨우 열여덟 살이었다. 같은 해, 잉글랜드의 나머지 수도원들도 모두 폐쇄되었으며 수도원의 자산은 모두 왕실에 양도되었다. 대수도원장과 수도원 부원장은 상원에서의 자격을 박탈당하였다. 오직 대주교와 주교들만이 교회 구성원의 일원으로 포함되었다. 성직자로 구성된 상원의 고위 성직 의원은 귀족 의원과 더불어 잉글랜드 상원을 장악하였다. 헨리는 1543년에 유복한 미망인 캐서린 파와 마지막으로 결혼하였다. 그녀는 헨리와 종교를 주제로 논쟁하였다. 종교적으로 개혁자였던 캐서린 파에 비해 헨리는 보수주의자로 남아 있었다. 그래서 자칫 그녀의 파멸이 멀지 않았다고 여겨졌지만 그녀는 헨리에게 순종을 표함으로써 스스로 자신을 구하였다. 그녀는 헨리와 그의 첫 번째 두 명의 딸들인 메리와 엘리자베스를 화해시키는 데에 앞장섰다. 그녀들은 아직도 서출 신세를 면하지 못하였지만, 1544년 의회법에 따라 에드워드 다음으로 왕위계승자에 포함되었다. 헨리는 왕권을 강화시키며 강력한 전제정치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크롬웰, 모어 등과 같은 친구이자 공신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을 반역죄로 처형하면서 민심을 잃어갔다. 또한 빈민구제법으로 빈민과 노숙자들에게도 엄격한 법이 집행되자 시민들은 이를 지지, 찬성하면서도 속으로는 비판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게 되었다. 1547년 헨리 8세가 죽은 화이트홀 궁전 1534년 수장령을 발표하여 스스로 영국 교회의 수장이 되고, 로마 교회에서 이탈하여 가톨릭 계열의 수도원을 해산시키고 재산을 몰수하였다. 여기에 반발하는 가톨릭 신자들을 잡아서 직접 형문을 가하기도 했다. 헨리 8세는 말년에 몸집이 매우 비대해져 움직이려면 특별히 발명한 기계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그의 몸은 곪은 종기로 뒤덮였으며 통풍까지 앓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가 1536년 마상 경기 도중에 입은 다리 상처를 그대로 둔 까닭에 더는 운동을 하지 못하게 되었을뿐더러 점차 상처가 썩어가기 시작했다. 그 탓에 그의 죽음이 앞당겨졌으며, 결국 부왕의 제90회 생일날인 1547년 1월 28일 화이트홀 궁전에서 서거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 55살이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수도사들! 수도사들! 수도사들!”이라는 말을 남긴 다음 곧 숨을 거두었다. 그의 시신은 윈저 성에 있는 세인트 조지 예배당에 매장되었다. 그가 죽은 후 10년 이내에 그의 상속인 세 명이 연달아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세 명 모두 후손을 남기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1543년 왕위계승법에 따라 헨리의 유일한 적자인 에드워드가 왕위를 이어받아 에드워드 6세가 되었다. 당시 에드워드는 겨우 아홉 살에 불과했기 때문에 열여섯 살이 될 때까지 열여덟 명의 수행자들을 동반한 섭정 정치를 펼치게 된다. 후일 에드워드는 그의 수장령을 계승하여 영국을 공식적으로 프로테스탄트 국가로 삼았다. 헨리는 프로테스탄트가 아니었으나 영국 국교와 로마를 분리한 그의 행동은 확실히 종교개혁가들에게 하나의 모범이 되었다. 그는 치세기간 중 개혁 의회 라는 말을 광범위한 의미로 사용했으며, 그의 종교개혁은 영국 정치학이나 프로테스탄트의 역사에서 큰 중요성을 갖게 되었다. 그가 죽은 후 1554년 메리 여왕은 수장령을 철회하였으나 스튜어트 왕조가 다시 부활하였다. 왕비를 여섯 명이나 바꾸고, 이유 없는 이혼과 두 명의 왕비를 처형했으며 조정 대신과 측근의 많은 사람을 처형하는 등의 공포정치를 행했다는 비판이 있다. 헨리 8세의 별장이자 그가 오래도록 머무르던 런던 남서부 햄튼궁은 20세기 이후 영국 왕실이 공개하면서 관광코스로 개방되어 있는데 이 곳은 유령의 출몰지로 유명하였다. 관광지로 개방된 뒤에도 햄튼궁 내부와 주변에서 유령을 보았다는 관계자와 관광객들이 나타나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 곳에서는 헨리 8세의 유령, 제인 시무어의 유령, 캐서린 하워드의 유령, 그 밖에 그의 시종신과 왕족들의 유령을 봤다는 목격담이 계속 나타났다. 햄튼궁은 그의 세 번째 왕비인 제인 시무어가 아이를 낳다가 숨진 곳이자 다섯 번째 아내인 캐서린 하워드가 간통으로 붙잡혀 그가 참형 선고를 내린 곳이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캐서린 하워드의 유령이 나오는 것이라고 말하며 햄튼궁의 한 구역은 아예 `유령의 회랑 이라는 이름이 붙어있을 정도였다. 역사가들은 엘리자베스 블런트와 메리 불린 이 두 사람을 헨리의 정부(애인)로 확신하고 있다. 엘리자베스 블런트는 헨리의 사생아인 헨리 피츠로이를 낳았다. 이 소년은 어린 나이임에도 1525년 6월 리치먼드 공작의 작위를 받았다. 1533년에 그는 메리 하워드(앤 불린의 사촌)과 결혼하였으나, 3년 후에 후계자를 남기지 못한 채 죽었다. 피츠로이가 죽었을 무렵 헨리는 사생아에게도 왕위를 계승할 권리를 부여하는 법을 통과시키려고 매우 노력하였다. 메리 불린은 앤 불린의 누이로 여겨지며, 1519년과 1526년 동안 관계가 유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메리 불린의 두 아이, 즉 캐서린 캐리와 헨리 캐리가 사실은 헨리 8세가 진짜 아버지라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으나 아직은 그에 대한 증거가 없다. 일설에는 스코틀랜드의 민요였던 그린슬리브즈(Green Sleeves, 푸른 옷소매의 아가씨)가 악곡으로 정착된 것이 헨리 8세에 의해서였다고 한다. 헨리 8세의 애간장을 녹이던 푸른 옷소매의 아가씨의 존재도 여러가지 설이 있으나 보통 앤 불린이라고 보는 설이 유력하다. 아라곤의 캐서린 * 콘월 공작 헨리 * 메리 1세 앤 불린 * 엘리자베스 1세 제인 시모어 * 에드워드 6세 엘리자베스 블라운트 * 헨리 피츠로이 영국의 군주 성공회 종교개혁 피터 퍼타도 외, 《죽기 전에 꼭 알아야 할 세계 역사 1001 Days》 (마로니에북스, 2009년) 김상운, 《세계를 뒤흔든 광기의 지도자들》 (도서출판 자음과 모음, 2005년) 박은봉, 《세계사 100 장면》 (도서출판 가람기획, 1998년) Tudorhistory.Net 분류:1491년 태어남 분류:1547년 죽음 분류:영국의 군주 분류:영국의 군인 분류:잉글랜드의 성공회교도 분류:튜더가 분류:가족 살해자 분류:요크 공작 분류:웨일스 공 분류:콘월 공작 분류:사상가 헨리 8세 분류:로마 가톨릭교회에서 파문된 사람 분류:엘리자베스 1세 분류:병사한 사람 분류:웨일스계 잉글랜드인 분류:원수백 분류:오항총독경 분류:로마 가톨릭교회 이탈자 분류:이탈리아 전쟁의 전쟁 지도자 분류:16세기 작곡가 분류:16세기 유럽의 군주
도로의 교통체증 교통 (交通)이란 사람, 화물(화폐 포함)등의 장소적 이동 즉 수송 및 전달과 관련된 직접·간접적인 모든 행위와 조직 체계를 의미한다. 넓은 의미로는 인간과 재화에 관한 사고(思考)·정보(情報) 등이 전달행위도 포함시키나, 이 후자는 흔히 통신(通信)이라고 하여 협의(狹義)의 교통, 즉 교통·운송과 분리하여 생각한다. 생산의 기본적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물질적 재화의 생산이지만, 생산은 물질적 재화의 생산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특히 사회적 생산력이 발달, 단순한 생존 이상의 여러 가지 문화적 요구가 높아짐에 따라 생산물도 물적(物的)재화의 형태를 넘어서 무형의 용역(service)생산 영역이 발달해왔다. 서비스부문이라고 불리는 용역의 생산은 흔히 혼동되고 있는데, 재화의 매매, 금전대차 등의 유통행위는 아니며, 본질적으로 생산에 속하는 것이다. 따라서 공업·농업·건설업 등의 물질적 재화생산이나 교통·서비스 부문도 모두 생산인 한 ① 인간의 노동, ② 노동의 대상, ③ 노동수단을 생산과정의 계기로 삼게 된다. 교통의 생산물은 보통의 유형재(有形財)와는 달리 그 행위의 성과로 동시에 나타나기 때문에 교통용역 또는 교통서비스라는 특수한 즉시재(卽時財)의 성질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그 생산이 유형(有形)의 형태를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원재료 라는 것이 없고, 저장이 불가능하며, 생산과 소비가 동시에 성립됨으로써 장소적 거리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교통·운수용역이다. 교통·운수용역의 생산에 사용되는 물적 수단을 교통수단(수송수단) 또는 교통기관(수송기관)이라고 하는바, 교통수단은 도로·운반기기(運搬機器)·동력(動力)의 3대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교통의 발달은 교통수단의 기술 진보에 의하여 실현되는데, 오늘날의 주요 교통수단은 기계적 교통수단이 되고 있다. 그리하여 교통수단의 기술적 성질의 차이에 따라 교통은 철도수송·자동차수송·해운수송 및 항공수송 등으로 구별된다. 교통·운수용역의 질적수준은 신속성·안정성·규칙성·쾌적성 및 대량수송에 의한 경비절감 등의 지표로 측정한다. 따라서 교통용역의 질적 수준을 개선하려면 교통수단의 3대요소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기술적 특성과 그 효과를 향상시키도록 하는 것임은 물론이다. 인간이 군집 생활을 하면서 주거 지역을 점차 넓혀 감에 따라 자연적으로 발생되는 지리적 거리감의 장애를 없애기 위하여 효과적이고 편리한 교통 수단을 찾게 되었다. 예로부터 교통 수단의 발전은 한 사회적 집단이 거주하는 지역의 조건에 따라 좌우되었다. 즉 해안 지방에서는 바다가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주요한 생활 터전이기에 해상 교통 수단이 빨리 발전되었으며, 평지에 사는 사람들은 그들의 지역 환경에 적합한 자연적 혹은 인위적 교통 수단을 개발, 발전시켰다. 교통 수단의 혁신적 변화는 아마 지난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인간의 생활 전반에 변화를 가져온 기계 문명과 깊은 인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비행기의 발명은 전통적 교통 수단의 공간 범위를 확장했다. 이와 같은 기계 문명에 따른 첫 번째 교통 혁신 이후, 20세기 중반에 접어들면서 인간은 두 번째 커다란 교통 혁신을 현재에 이르기까지 경험하고 있다. 교통이라는 개념은 이제 정보의 교환과 눈에 보이지 않는 동산 재산의 거래(예컨대, 국제적 증권 거래)에까지 넓혀서 이해되고 있다. 현대 교통 수단의 발전이 지역과 국가 사이의 문화, 기술, 상품 및 정보 교환에 결정적인 구실을 함으로써 인류의 전반적 생활 수준을 향상시킨 반면, 적지 않은 부정적인 영향도 가져왔다.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자동차, 항공기, 초대형 선박이 빚어내는 많은 문제점은 현대 사회가 빨리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 예컨대 교통에 따른 공해, 소음, 환경 오염, 온실 효과, 에너지 자원 고갈 등은 개별 국가 차원을 벗어나 국제적 차원에서 토론되고 해결해야 할 문제로 여겨지고 있다(→자연환경 보호). 교통·운수업이란 이와 같은 교통용역을 영리(營利)를 목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제공하는 경영행위를 말하며, 이때 경영행위의 주체를 교통운수기업이라고 한다. 인적·물적 장소이동을 본질로 하는 교통업은 생산과정, 즉 노동과정에서 일반적 재화생산·서비스 생산과는 다른 독자적 성격을 지닌다. 공업·농업 등의 물적 재화생산이나 교통에서는 노동과정에서 노동대상의 물적 변화를 낳지만, 노동과정이 어떤 직접적·개인적 욕망을 충족시키는 서비스부문에서는 일반적으로 노동대상의 물적 변화를 낳지 않는다. 따라서 물재(物財) 생산에서의 노동대상은 생산물의 질료적(質料的) 기본이라고 하는 의미의 원재료 형태를 취하는 데 비해 교통은 노동대상, 즉 이동대상이 되는 사람·물(物)은 노동과정의 계기일 뿐 원재료가 되지는 않는다. 그 필연적 결과로서 물재생산에서의 생산물은 생산 과정의 완료 후에 그것이 자립된 존재로서 생기며, 유통과정에 들어가 소비된다. 반면에 교통에서는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운수업이 파는 것은 장소변경이다. 생기는 유용효과는 운수과정, 즉 운수업의 생산과정과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다. 이 유용효과는 생산과정에서만 소비된다. 그것은 이 생산과정과 별도의 사용물로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생산물은 생산과정을 떠나서는 존재하지 않으며, 생산과 동시에 같은 장소에서 소비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와 같이 교통에서의 생산물은 대상화된 물재(物財)가 아니라 무형의 용역이며, 저장·전환이 되지 않는 즉시재(卽時財)라고 불리는 점에서 교통서비스부문에 속한다. 즉 교통은 물재생산과 서비스부문의 속성을 지닌 그 중간적 존재라 할 수 있다. 교통의 진보가 인간의 경제생활에 중요한 이유로는, 우리의 경제생활이 육·해·공에 걸친 생활공간에서 이루어지며, 그 발달은 생활공간의 극복, 즉 교통의 진보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이거리의 극복은 교통수단에 의해 이루어지는 바, 이 수단에 따라 교통업은 육상교통·수상(水上) 교통·공중교통으로 대별(大別) 할 수 있으며, 산업의 분화에 따라 육·해·공의 교통업에 분화적으로 도로·파이프라인·철도·해운·항공 등의 여러 교통 운수업이 발달한다. 운수업은 용역제공수단의 종류에 따라 ① 철도업, ② 자동차업, ③ 해운업, ④ 항공업, ⑤ 송유관업(pipe line industry) 등으로 구별한다. 교통·운수업은 일반 생산기업과 같이 생산요소의 조달·생산·판매·재무 등 4개 부문에 걸친 경제활동을 행하는 바, 그 경제활동의 특수성은 이들 각 부문이 타산업과 구별되는 특수성으로 나타남과 동시에, 교통수단의 기술진보나 교통시장 상태의 변화도 각각의 부문에 있어서의 경제활동내용에 따라 특수한 과정을 거쳐 이루어진다. 따라서 특수경영학으로서의 교통·운수경영론의 과제는 이러한 교통기업의 경제활동이나 그 변화과정에서 보이는 특수성을 해명하는 데 있다고 할 것이다.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교통기업이 발생, 영리를 목적으로 교통의 주역을 맡아 교통용역이라는 상품을 생산·판매하는 활동이 지금처럼 보편화되기까지는 역사가 그렇게 긴 것이 못된다. 즉, 그것은 서양에서의 산업혁명 이후에 교통업의 선구자로서 해운기업이 성행함으로써 비롯되었다고 할 수가 있다. 고대에는 교통의 수요자가 자기 스스로 교통수단을 보유, 그 수요를 충족시키는 이른바 교통용역의 자기생산이 일반적인 형태였으나, 사회적 분업이 발달하면서 교통용역의 수요와 생산 양자가 분리되고 각각 독립된 경제활동 주체에 의하여 교통수급이 이루어짐으로써 교통업이란 독립된 산업이 발생하게 되었다. 여기에 그 계기를 마련한 것은 ① 산업혁명에 의한 교통수요의 증대와, ② 교통기술의 발전에 의한 대형교통수단의 출현이다. 다시 말하면 교통수요의 증대가 교통기업을 성립시킨 경제적 기초가 되는 한편, 증대된 교통수요를 충족하기 위해서는 투자단위가 큰 대형교통수단이 마련되어야 하는데, 이를 교통수요자 자신이 직접 투자함으로써 교통수단을 보유한다는 것은 자신의 실제의 운수 수요량에 비추어 불필요한 낭비적 손실을 초래한다. 따라서 교통공급자가 수요자로부터 분리되어 투자하고, 나아가 교통공급을 전담하는 기업으로 출발하게 된 것이다. 교통·운수업은 철도와 같이 교통수단에 대한 대단위투자·대규모경영의 경제가 현저한 부문에 있어서는 그 실용화의 첫 단계에서부터 대기업화하는 성격을 지니고 출발하게 되었고, 반대로 교통수단의 기술적 성질상 투자단위가 적은 자동차 운수업 같은 부문은 교통수요자 자신이 동시에 교통수단을 보유하고, 또 경영하기에 필요한 어느 정도의 투자를 겸행할 수 있을 만큼 교통용역의 자기생산영역이 상대적으로 넓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같은 이유로 경제가 발전하면서 생산기업이 대규모화하고, 제품이나 원료에 대한 수송수요가 대량으로 되는데 따라 비록 거대한 투자를 필요로 하는 교통수단이라도 수요자 자신이 직접 보유함으로써 훨씬 유리할 때도 있다. 대규모 생산기업은 종단적 통합(縱斷的統合)의 과정에 있어서 수송을 그 지배하에 흡수한다. 그 현저한 예가 해상수송에 있다. 특히 제2차세계대전 이래 탱커(tanker) 나 광석용 전용선(ore carrier) 등의 특수선에 대하여 석유회사나 철강회사 같은 생산회사가 보유하는 이른바 자기선박 보유량이 증가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처럼 생산기업이 자기선박에 의한 해상수송을 행하는 것을 인더스트리얼 캐리어(industrial carrier)라고 한다. 탱커에 의한 스탠더드 오일회사(Standard Oil Co.). 냉동선(reefer)을 사용하는 유나이티드 프루이트사(United Fruit Co.), 원광선(原鑛船;ore carrier)에 의한 유 에스 스틸사(U.S.Steel Corp.) 같은 것이 그 대표라고 할 것이다. 이에 대하여 해상운송품 생산자를 코먼 캐리어(common carrier) 또는 퍼블릭 캐리어(public carrier)라고 하며, 인더스트리얼 캐리어와 본질은 같지만 상업하는 사람이 운송업을 겸하는 경우를 머천트 캐리어(merchant carrier)라고 한다. 교통·운수기업의 경제활동은 교통용역의 생산이라고 하지만, 이 생산물은 저장성이 없고, 수요의 발생장소 및 그 시간이 바로 교통용역의 생산장소 및 시기와 일치해야 한다는 데 특성이 있다. 교통용역은 형태를 갖지 않는다. 따라서 그 생산에 있어서는 유형재의 생산인 경우와는 달리 교통·운수기업의 자본구성에 있어서 유동자본의 비중을 저하시킨다. 이에 따라 상대적으로는 기계적 교통수단에 의존하는 근대적 교통·운수기업에 있어서는 교통수단에 투하하는 고정자본의 비중이 높아진다. 특히 이런 경향은 기술적 이유에서 교통·운수기업이 애당초 통로를 보유해야 하는 철도업에서 현저하게 나타난다. 그 결과 고정자본의 이용은 가능한 생산 목적에 충당하는 이른바 조업도(操業度)·가동률(稼動率)을 높여야 하고, 교통용역 1단위 당 비용을 저하시키는 것이 교통·운수기업의 이윤획득을 위한 제1의 전제가 된다. 또한 교통용역은 즉시재(卽時財)로서 그 성질상 저장성이 없기 때문에 판매량(수요량) 이상으로 생산된 교통용역은 그 즉시 소멸된다. 즉, 경영면에서 손비요인(損費要因)이 된다. 따라서 이 손비요인을 제거하는 것이 교통·운수기업의 이윤획득을 위한 제2의 조건이 된다. 철도기업의 승차효율(승차인원÷승차인원)이나 적재효율(화물적재량 적재능력), 해운기업의 선박가행률〔화물적재량÷(선박적재톤수×항해거리)〕, 항공기업의 유상비행거리(有償飛行距離) 등이 각각 경영능률을 측정하는 주요지표가 되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교통시장의 지역적 범위는 수요가 발생하는 곳에서 생산해야 한다는 교통생산의 성질상 운반기구의 이동 가능범위에 의하여 한정된다. 교통 통로가 철도와 같이 기술적으로 일정노선의 운송이 불가피할 때에는 시장은 비교적 한정되고 고정되어 있으나, 통로가 고정되어 있지 않은 도로·해운·항공 등의 경우에서는 시장의 지역적 범위도 유동적이다. 따라서 그 때문에 교통시장의 형태는 완전경쟁상태와 독점상태로 양분되는 바, 시장의 지역적 범위가 넓고 그 경영을 행하는 기업이 소규모일 때에는 시장은 경쟁적이고, 반면 시장이 비교적 한정되어 있고 기업규모가 클 때에는 시장상태는 독점적인 경우가 많다. 전자의 예로는 부정기 항공이나 택시·트럭운수업 등의 면허제 가입제한이 없는 경우이며, 후자는 철도업·정기선박업·정기항공업 등이 있다. 교통독점은 대개 불완전독점이다. 이는 하나의 교통·운수기업은 한편으로는 지역적 또는 교통수요의 종류에 따라 독점적인 영역을 가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소수의 동종 교통·운수기업과 경쟁을 하여야 한다는 데 있다. 그 결과 독점과 경쟁의 영역한계는 각각의 개별기업이 설정하는 운임 및 제공되는 교통용역의 질적 수준에 따라 유동적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교통·운수기업은 독점적 영역에서 얻은 이윤을 원천으로 하여 운임의 절하, 교통수단의 기술적 개량을 비롯한 교통용역의 질을 개선하려는 경영상의 노력으로써 독점영역의 유지 내지 그 확대가 가능하다. 이러한 관계는 상이한 교통·운수기업 상호간에도 존재하는 바, 가령 철도와 자동차·항공, 또는 여객수송에 있어서의 해운과 항공, 석유운반에 있어서의 해운과 파이프 라인(송유관) 등의 관계가 그것으로, 각각의 교통부문은 교통수단의 기술적 특성에 입각하여 독점적인 영역을 갖는 반면, 그 밖의 영역에 있어서는 경쟁관계에 있다. 국가정책으로서의 교통·운수업에 대한 원조나 규제는 근본적으로 교통산업에 대한 정책목적의 달성과 경영의 능률화를 가능한 한 병존시키려는 데 그 목적이 있으며, 이를 위하여 경영수단의 소유가 그 경영에 간섭하고 있는 것이다. 국유 교통·운수업의 경영방식으로서 공공기업체의 형태를 채택하는 경향도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그리고 국유사업의 경영에 독립채산제(獨立採算制)를 실시, 민간기업의 그것과 근접시키고 경영능률 향상에 자극을 주기도 한다. 교통·운수업에 있어 국영과 민영간의 경영능률상의 득실 비교는 많은 논쟁을 수반하여 왔다. 그러나 민간기업도 거대화하고, 한편에서는 국영기업의 경영도 민간 기업방식과 접근하게 되면서 근래에는 크게 문제삼지 않으려는 경향이 강해졌고, 오히려 공공성이 더욱 강조되고 있다고 할 것이다. 특히 국제시장에 있어서 경쟁을 감당해야 한다는 점에서 국가적인 힘의 배경이 필요함을 인식, 극히 한정된 부문을 제외하고는 국영사업의 영역을 점차 확대시켜 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근래에 획기적인 전환을 보인 것은 미국과 함께 육상운송의 전통적 민영국이었던 영국에서의 국유화조치(1947년)라고 할 수 있는 바, 그 후 일부는 민영으로 환원되기도 하였지만, 철도·자동차 등 육상운송의 전체 분야에 걸쳐서 국영체제를 확립하기에 이르렀다. 현재 그 경영은 공공기업체에 해당하는 영국운수위원회(British Transportation Commission:BTC)에서 맡고 있다. 선로를 이용한 교통 수단 철도, 궤도, 삭도, 도시 철도, 경전철, 철도차량 도로를 이용한 교통 수단 자동차, 버스, 오토바이, 트럭 도로를 선로처럼 이용하는 교통 수단 노면전차, 간선급행버스체계 기타 자전거 선로를 이용한 교통 수단 철도, 궤도, 삭도, 도시 철도, 경전철, 철도차량 도로를 이용한 교통 수단 자동차, 버스, 오토바이, 트럭 도로를 선로처럼 이용하는 교통 수단 노면전차, 간선급행버스체계 기타 자전거, 도보 여객선, 유람선, 화물선잠수함 오늘날의 항공운송산업은 한마디로 시장경쟁의 심화와 불확실성의 증대, 공급과잉과 이로 인한 저수익성, 다양한 전략적 제휴 등으로 요약된다. 특히, 환율 및 금리의 급격한 변동, 감가상각비의 증가, 항공기 도입가격의 상승, 공항사용료의 인상, 보안의 강화 및 공해문제의 해결을 위한 비용의 증가 등이 오늘날 운송상품의 생산비용을 증가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실제로 생산비용의 상승은 산업의 지속적인 성장에 제약요인이 되고 있다. 비행기, 여객기, 수송기 스페이스셔틀 아시아 각지의 근대교통은 육·해상 모두가 후진지역 개발을 위한 수단으로, 유럽·아메리카의 선진국에 의하여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유럽의 교통근대화 과정과 그 양상을 달리하는 것으로서 유럽의 교통기관은 유럽인 전체를 위하여 발달하였지만, 아시아의 근대교통 수단은 아시아인을 위한 것이었다기보다는 그곳에 세력을 잡은 선진 열강의 자본에 의해 그들을 위한 것으로 발달하였다. 전후에는 열강의 식민지로부터 벗어난 이들 국가가 교통기관을 경제개발에 연결시켜 발전시킴으로써 주체적인 급속도의 발달을 이루었다. 그러나 그것도 육상교통의 경우에 한한 것이며, 해상 교통은 아직도 유럽·아메리카 선진국 선박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다. 가장 오래된 방법인 눈 속에서 신는 짚신에서부터 최신식 항공기에 이르기까지 몇 백 종류에 이르는 교통방법이 현재의 아시아에는 공존하고 있다. 아시아의 지형적 격리성은 여러 지역간의 교통 발달을 저해하여 왔다. 아시아의 큰 산맥은 대부분 동서 방향으로 달리고 있으므로, 특히 남북간의 교통이 불편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동서 교통로는 일찍부터 열려, 한나라 때부터 비단길이라고 불리어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동서간의 동맥로 역할을 하였다. 아시아에서는 또 지역간의 교통이 발달치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지역 내부의 교통도 충분히 발달하지는 못하였다. 그 원인은 아시아의 경제수준이 낮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특히 근대교통기관의 발달이 빨랐다. 우선 대륙을 가로질러 자동차교통이 성행하게 되었다. 세계 철도연장의 15%는 아시아에 있다. 철도는 어느 정도 인구밀도에 비례하여 발달했으며, 자바, 인도의 갠지스평야나 데칸반도도 동유럽 정도로 보급되고 있다. 뒤떨어진 아시아 교통에도 발달의 징조가 보여 일본·인도는 철도교통이 싱당히 발달하였고, 중국에서도 내륙 개발을 목적으로 하는 철도가 건설되고 있다. 아프리카의 교통 체계는 식민지시대에 식민국의 전략적 의도와 경제적 필요에 따라 광산·농업·임산자원의 개발·반출에 적합하도록 정비되었다. 각국의 식민지정부는 개별적으로 자국 식민지에 철도망을 건설하였으나, 이웃 여러 나라와의 연관성은 고려되지 않았다. 철도 교통은 화물수송을 위주로 하며 현재에도 총수송량의 약 3/4은 수출용 화물이다. 아프리카의 철도 총연장은 약 7만5,000km 로 약 30%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집중되어 있으며, 철도수입의 절반 이상을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차지하고 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이외 지역의 철도는 각 영역마다 궤도가 다르고 정합성(整合性)이나 제휴성이 약했지만, 독립 뒤에는 일부 지역에서 기존 노선의 연장과 새로운 노선이 건설되었다. 특히 내륙국인 잠비아와 탄자니아의 다레스살람을 연결한 탄자니아-잠비아 철도는 중국의 원조와 기술협력에 의해 완성되었다. 한편, 철도와 수운의 이용이 한정된 아프리카에서는 도로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농산품의 집하·운송과 소비물자 및 승객의 수송에 편리한 소형 트럭을 많이 이용하고 있지만, 도로포장률이 낮고 도로의 유지·보수 등이 완전하지 못하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국제 연합의 아프리카 경제 위원회는 몸바사와 라고스를 잇는 사하라 횡단 고속도로와 서아프리카의 라고스에서 다카르를 잇는 고속도로의 건설을 계획하고 있다. 도시 간의 교통은 자동차를 이용하고 있으나, 지역간 운반 교통으로는 북부지방에서는 낙타, 중부지방에서는 흑인, 남부에서는 소를 많이 이용한다. 도로망의 발달은 식민지 통치를 위한 정치적·군사적 필요성에서 시작되었으며, 경제 산업상의 목적은 그 다음이었다. 따라서 독립이 된 지금은 도로가 크게 부족하다. 수운은 콩고 강, 나일 강, 나이저 강, 잠베지 강 등이 하천 교통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해안지방의 도시인들은 국제적인 무역항이 많다. 특히 수에즈 운하는 유럽과 아시아의 지름길 역할을 한다. 남아메리카의 교통기관은 종합적인 체계가 이루어지지 않고 지역간의 연결이 매우 부족하다.철도의 건설은 원래 지역간의 연결을 위한 것이 아니라 농산품과 광물 및 임산자원의 수출을 위해 항구에서 내륙으로 뻗어 있다. 철도의 밀집지역은 대항구를 중심으로 동부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및 페루 지역이며, 내륙에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브라질의 철도 총연장은 3만 3,484km이고 이르헨티나는 4만 4,246km이나 대부분 단선철도이다.도로는 인구가 조밀한 해안지역의 대도시를 중심으로 발달하여 내륙과의 연결성은 희박하다. 그리고 지방간의 도로는 거의 포장되어 있지 않다. 도로 연장은 브라질과 아르헨티나가 각각 131만 2,700km, 30만 9,000km이다.철도와 도로가 주로 해안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 반면, 대륙의 내부 지역을 연결하는 교통 수단은 하천이 담당한다. 특히 아마존과 그 지류는 내륙의 교통 소통에 큰 역할을 담당한다.한편, 항공교통은 남아메리카에서 많이 보급되어 있다. 철도와 도로망의 불비로 지역간의 연결은 주로 항공 교통이 담당하고 있는 점이 타대륙과 다른 점이다. 도로용량 주어진 도로조건에서 15분 동안 최대로 통과할 수 있는 승용차 교통량을 1시간 단위로 환산한 값. 교통량 도로의 한 지점을 일정시간에 통과한 차량의 수. 교통혼잡은 반복적혼잡과 비반복적적혼잡(돌발상황에 의한)으로 구분 가능 트랜스포트 타이쿤 크리스 소여의 로코모션 오픈 트랜스포트 타이쿤 유도된 수요 루이스-모그리지 명제 브라에스의 역설 다운스-톰슨의 역설 카쉐어링 한국의 고속도로 한국의 철도 노선 온실 효과 교토 세계 환경 회담 한국 국토해양부(Ministry of Land, Transport and Maritime Affairs) 한국 교통안전공단-TS(Korea Transportation Safety Authority) 한국도로공사 한국철도공사 * 한국 철도박물관 일본 국토교통성 미국 교통안전부 유럽연합 교통관리부
승가 (僧迦)는 산스크리트어의 상가(संघ, saṃgha)의 음역으로서 중 (衆) 화합중 (和合衆)으로 번역된다. 승가는 교단 생활을 하는 화합한 대중을 가리킨다. 최소한 4인 이상의 승려가 모여 화합(和合)해서 수행하는 단체 또는 공동체로, 줄여서 승 (僧)이라고도 한다. 승가가 곧 불교 교단 (敎團)이다. 승가는 본래 가나 (gana)라고도 하며, 집단이라는 뜻으로 고타마 붓다 당시에는 동업조합(同業組合)으로서의 길드(guild)와 경제 단체나 어떤 종류의 종교 단체를 가리킨 것이었다. 이 경우, 예를 들어 카스트처럼 태생에 의해 규정된 집단이 아니라 동일 목적으로 모인 사람들의 공동체로서, 그 성원은 평등하며 동일한 규범에 복종하고 그 가맹은 자유 의지에 의한 것이다. 불교의 승가가 성립된 것은 보리수 밑에서 정각(正覺)을 얻은 고타마 붓다가 비나레스에서 처음으로 5명의 비구들에게 설법을 한 초전법륜(初轉法輪)의 때이며, 거기에서 고타마 붓다를 합친 6명의 승가가 성립된 셈이다. 그 후 불교 승가의 성원수는 증가되어 갔으나, 승가의 성원으로서는 고타마 붓다와 다른 비구들이 모두 평등하며, 모두 동일한 규율에 복종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 규율도 승가의 확장에 따라 여러 종류로 차차 증가되어 후일 율장(律藏)으로 통일되었다. 법 (불교) 부처 삼보 분류:불교 용어
right 지평 좌표 (地平座標)는 천체 관측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좌표 체계로, 지평선이 기준선, 남점(南點) 또는 북점(北點)이 기준점이 되는데, 현재는 북점을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 지평 좌표계에서는 천체의 위치를 고도와 방위각으로 나타낼 수 있는데, 고도는 지평선으로부터 그 천체까지 수직으로 잰 각, 방위각은 기준점(북점 또는 남점)으로부터 그 천체의 위치로부터 지평선에 내린 수직선과 지평선의 교점까지 시계 방향으로 잰 각으로 나타낸다. 또한 고도 대신 천정거리를 사용하는 방법도 있는데, 천정거리는 천정과 그 천체 사이의 각도로서, 90도에서 고도를 뺀 값과 동일하다. 지평 좌표는 천체가 어느 방향으로 보이고 있는지 직관적으로 알 수 있어 편리하지만, 천구의 일주운동에 의해 고도와 방위가 시시각각 달라지기 때문에 정해진 시각 외에는 사용할 수 없고, 지구상의 다른 장소에서 관측하게 되면 같은 시각이라도 서로 다르게 측정되는 단점이 있다. 정해진 시각에 특정 천체의 고도와 방위각을 알아 그 방향으로 바르게 향하게 할 수 있는 망원경, 또는 그 반대로 어떤 방향의 천체를 관측하여 그때의 고도와 방위각을 측정할 수 있는 망원경을 경위대식 망원경이라고 한다. *적도 좌표계 분류:구면천문학 분류:천구좌표계
부다페스트 (는 헝가리의 수도이자 정치·산업·상업·교통·문화의 중심지다. 인구는 180만을 상회하는데 1980년대 중반의 207만보다는 낮은 수치이다. 현재 중앙유럽 최대의 도시이다. 1873년에 도나우 강 서편의 부더(Buda)와 오부더( 古부더 Óbuda), 동편의 페슈트(Pest)가 합쳐져 오늘날의 부다페스트가 되었다. 따라서, 부다와 페스트의 두 지역으로 대별된다. 부더와 페스트는 전혀 다르다고 해도 좋을 만큼 서로 경치가 다르다. 역사적 전통이 남아 있는 부다의 사적들과 장려한 의사당 등으로 알려져 있는데, 1956년 헝가리 혁명으로도 유명하다. 부다페스트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에도 등록되어 있다. 도시 중심에 도나우강이 흐르고 있어 "도나우의 진주", "도나우의 장미"라고 불린다. 구릉지대인 부더는 기복이 심하고 녹음이 우거져 있다. 도나우 강과 이어지는 언덕에는 변화의 역사를 겪어온 왕궁이 장엄하게 서있고, 서쪽에는 야노슈 산이 우뚝 서있다. 그 산자락에 한적한 주택가가 펼쳐지며 평온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양안의 지구를 연결하는 대표적인 다리가 세체니 다리이다. 북위 47도 29분 57초, 동경 19도 2분 38초에 위치한다. 중세 부다성 부다페스트의 기록된 역사는 서기 89년경에 건설된 로마 제국의 아쿠인쿰(Aquincum) 성에서 시작된다. 이 성은 훗날의 오부더의 터에 가까운 곳에 자리잡았던 켈트족의 거주지역에 세워졌으며 106년부터 4세기말까지는 로마 제국의 저(低) 판노니아(Lower Pannonia) 주의 주도였다. 훗날의 페슈트 자리에는 아쿠인쿰 반대편 의 뜻인 콘트라 아쿠인쿰(Contra Aquincum) (또는 트란스 아쿠인쿰 Trans Aquincum)이 세워졌다. 900년경 이 지역에는 오늘날 헝가리인들의 조상인 마자르(Magyar)인들이 아르파드의 인솔하에 들어왔다. 이들은 판노니아와 도시를 점령하고, 1세기 후 헝가리 왕국을 세웠다. 이때 이미 중요한 성이었던 페슈트는 1241년 몽골제국의 바투가 이끄는 정서군(征西軍)의 침략을 받았다. 벨라 4세의 통치하에, 곧 피해를 복구하였다. 그러나, 1247년부터 왕궁 소재지였던 부더가 페슈트를 대체하여 헝가리의 수도가 되었다.(1361년) 16세기 오스만 제국이 헝가리 거의 대부분을 정복하면서 수도의 자리를 잃게 된 이들 도시의 성장이 지체되었다. 페슈트는 모하치 전투에 의해 헝가리 왕국이 거의 붕괴된 1526년에 오스만제국에 의해 침략당했다. 1541년에는 부더가 점령되고 헝가리중앙부를 지배하는 오스만제국 속령으로서 부더주(州)가 설치되어 부더는 오스만 총독의 주류지가 되었다. 한편, 페슈토지구는 그 시기에 대부분 버려진 상태였다. 1526년 이후, 명복 뿐이긴 하였으나 오스트리아 대공인 합스부르크 왕가가 헝가리 왕을 겸하게 되었다(헝가리 영토 대부분은 잃었지만). 합스부르크가는 1686녕 왕국령을 탈환하였다. 1686년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에 다시 점령될 때까지 페슈트는 상당히 낙후되었다. 1723년부터 왕국의 행정 기관 소재지였던 페슈트는 18세기와 19세기에 빠른 속도로 성장을 하게 되었다. 1873년 부더, 오부더와 합쳐진 후에도 부다페스트의 성장은 페슈트에서 주로 이루어졌다. 1800년에 이미 부더와 오부더를 합친 인구보다 많은 인구가 페슈트에서 살았으며 그 후 백년동안 20배로 증가하여 60만이 되었다. 같은 기간 부더와 오부더의 인구는 5배 증가에 그쳤다. 부다페스트 페슈트 지구 전경.의회 건물과 도나우 강이 보인다 부더와 오부더, 페슈트의 행정 통합은 1849년 헝가리의 혁명 정부가 처음 추진했지만 합스부르크 지배가 돌아오면서 철회되었다. 하지만 1867년 합스부르크와 헝가리의 대타협으로 헝가리 왕국의 자치 정부가 들어서면서 이들은 드디어 현재의 부다페스트로 합쳐졌다(오스트리아-헝가리 참조). 부다페스트의 총 인구는 1840년에서 1900년 사이 7배로 증가해 73만이 되었다. 1896년에는 런던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지하철이 개통됐다. 20세기 부다페스트의 인구 성장은 주로 외곽 지역에서 이루어졌다. 특히 헝가리의 산업이 수도에 집중되면서 우이페슈트(Újpest) 지역의 인구는 1890년-1910년간 2배 이상 증가했으며 키슈페슈트(Kispest) 인구는 1900년-1920년 사이에 5배 이상 증가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의 인명 피해와 1920년 헝가리 왕국이 원래 영토의 반 이상을 잃은 것도 부다페스트의 성장을 일시적으로 밖에 막지 못하였다. 헝가리의 영토가 축소된 뒤에도 부다페스트가 독립한 헝가리의 수도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1930년에 부다페스트의 인구는 백만이었으며 그 외곽 지역에는 40만이 더 살았다. 부다페스트에 거주하던 20만 유대인 인구의 3분의 1 정도가 제2차 세계 대전 때인 나치 독일 점령하에 행해진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에 희생되었다. 곧이어 1944년 겨울에는 소련의 포위 공격으로 도시가 심하게 파괴되었다. 그 후 부다페스트는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재건되면서 헝가리의 공산 정부(1947년-1989년)가 1960년부터 추진한 실용주의 노선의 선전에 어느 정도 이용되기도 하였다. 1980년대 이후 부다페스트는 헝가리에서 전체적으로 나타난 이민 증가와 자연적 인구 감소로 인구가 줄어드는 추세다. 인구 그래프 1800년 54,200명 1830년 102,700명 1850년 178,000명 1880년 370,800명 1900년 733,400명 1925년 957,800명 터반(Tabán), 바르(Vár) - 제1구 로저돔브(Rózsadomb), 퍼셔레트(Pasarét) - 제2구 오부더(Óbuda) - 제3구 우이페슈트(Újpest) - 제4구 리폿바로슈(Lipótváros) - 제5구 테레즈바로슈(Terézváros) - 제6구 엘리자벳바로슈(Erzsébetváros) - 제7구 요제프바로슈(Józsefváros) - 제8구 페렌츠바로슈(Ferencváros) - 제9구 쾨바녀(Kőbánya) - 제10구 켈렌푈드(Kelenföld) - 제11구 헤지비데크(Hegyvidék) - 제12구 언절푈드(Angyalföld) - 제13구 주글로(Zugló) - 제14구 (얼쇼라코슈(Alsórákos), 헤르미너메죄(Herminamező), 이슈트반메죄(Istvánmező), 키슈주글로(Kiszugló), 너지주글로(Nagyzugló), 라코슈펄버(Rákosfalva), 퇴뢰쾨르(Törökőr), 바로슈리게트(Városliget)) 라코슈펄로터(Rákospalota), 페슈투이헬리(Pestújhely) - 제15구 마차슈푈드(Mátyásföld), 셔슈헐롬(Sashalom), 친코터(Cinkota) - 제16구 라코슈케레스투르(Rákoskeresztúr), 라코슈처버(Rákoscsaba), 라코슈리게트(Rákosliget), 라코슈헤지(Rákoshegy), 라코슈케르트(Rákoskert) - 제17구 페슈트뢰린츠(Pestlőrinc) - 제18구 키슈페슈트(Kispest) - 제19구 페슈테르제베트(Pesterzsébet) - 제20구 체펠(Csepel) - 제21구 부더테테니(Budatétény), 너지테테니(Nagytétény), 부더포크(Budafok) - 제22구 쇼로크사르(Soroksár) - 제23구 부다페스트는 세계화 및 세계 도시 리서치 네트워크(GaWC, Globalization and World Cities Research Network)에서 알파 세계 도시 (주요 세계 도시)로 분류됐다. 부다페스트는 헝가리의 종주도시로 헝가리의 국민 소득의 39%가 부다페스트에서 나온다. 부다페스트의 GMP는 2012년 1천억 달러였으며 이는 유럽연합 국가 도시 중 가장 높은 수치 중 하나였다. 부다페스트의 시내 공공교통기관은 BKV(부다페스트교통공사)에 의해 일원적으로 운행되고 있다. 런던, 이스탄불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영업을 개시한 부다페스트 지하철과 트램, 트롤리버스를 운행하고 있다. 4호선 및 6호선의 트램은 트램 노선으로서는 세계에서 제일 가는 이용자 수를 나타내고, 54m의 차량편성은 세계 최장이다. 48시간·72시간의 2종류가 있는 부다페스트카드를 구입한 경우, 무제한 승차할 수 있다. 헝가리국철(MÁV)은 시내의 주요 3개역(부다페스트 동역(Keleti, 페스트 쪽)· 부다페스트 서역(Nyugati, 페스트 쪽)·부다페스트 남역(Déli, 부더 쪽))을 시발점으로 하여 헝가리 국내와 유럽 각지에 열차를 운영하고 있다. HÉV(Budapest commuter rail)에 의해 교외전차도 운행되고 있다. 그 밖에, 부다페스트 어린이 철도, 왕궁까지 올라가는 케이블카인 푸니쿨라(funicular) 등도 유명하다. 부다페스트의 항공 교통의 관문, 부다페스트 리스트 페렌츠 국제공항(Budapest Liszt Ferenc Nemzetközi Repülőtér)은 부다페스트 시내에서 동남쪽으로 약 16km인 페슈트뢰린츠에 위치해 있다. 네브리게드 장거리국제선 버스 터미널도 있다. 도나우 강을 이용하여 브라티슬라바를 경유하여 빈으로 가는 국제항로도 MAHART Passnave에 의해 운항되고 있다. 선착장은 시내 중심부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다. 1987년, "부다페스트, 도나우강안과 부다성"이라는 이름으로, 세계유산(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 2002년에 안드라시 거리 및 그 지하 (부다페스트 지하철)이 등록대상에 추가되어, 2003년에는 등록명칭이 "도나우강안, 부다성 지구, 안드레시 거리를 포함한 부다페스트"로 변경되었다. 국회의사당의 야경 부다 성 부다 성은 헝가리 국왕들이 살았던 역사적인 성채이다. 과거에는 왕궁(Királyi-palota) 또는 왕성(Királyi Vár)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부다 성은 중세와 바로크, 19세기 양식의 가옥들과 공공건물들로 유명한 옛 성곽 지역(Várnegyed) 옆에 있는 부다 언덕 남쪽 꼭대기에 지어졌다. 아담 클라크 광장과 푸니쿨라(계단식 열차) 옆 세체니 다리와 이어져 있다. 부다 성은 1987년 공표된 부다페스트 세계문화유산의 일부이기도 하다. 마차시 성당 1255년, 부다 성 내에 건축되어, 역대 국왕의 결혼식과 대관식의 장소로서 이용되었다. 1479년에 마차시 1세에 의해 대개축됨으로써, 높이 80미터의 첨탑이 증축되었다. 국회의사당 1904년에 완성된 네오 고딕 건축물로, 도나우 강변에 접하고 있다. 또한, 헝가리의 국장에도 포함되어 있는 성 이슈트반 왕관이 보관되어 있다. 세체니 다리 도나우강의 양안에 펼쳐진 부다지구와 페슈토지구를 연결한다. 안드라시 거리 2002년에 역사지구의 확장에 의해 추가된 거리이다. 거리 이름의 유래는, 건설을 추진하였던 안드라시 수상이다. 파리의 샹젤리제 거리를 모방하여 플라타너스를 나란히 심어놓은 거리이며, 세체니 다리의 끝에서 페슈토지구의 시민공원까지의 거리이다. 지하에 유라시아 대륙 처음의 지하철, 지상에는 성 이슈트반 대성당, 영웅광장, 세체니 온천, 리스트 음악원 등이 있다. 리스트의 조국인 헝가리는 다뉴브 강변의 국회의사당을 중심으로 뚜렷한 사계절 속에 아름다운 문화·관광지가 빛나는 곳이다. 부다 성은 부다 지구의 남쪽에 있는 네오바로크 양식의 화려한 성이다. 13세기 후반 벨러 4세의 명으로 방어를 목적으로 처음 건설되었다. 이후 19세기 후반부터 대규모 공사가 이루어져 1905년 바로크와 네오바로크양식으로 완성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파괴된 것을 1950년대에 복구하였다. 지금은 부다페스트 역사박물관과 국립박물관, 국립도서관으로 쓰이고 있으며, 성 곳곳에서 공연이 열리기도 한다. 고대에서부터 세계 2차대전까지 무기류 및 미술품, 노동운동의 역사에 관한 자료 등을 볼 수 있다. 어부의 성채(Halászbástya)는 부다의 구릉 뒤에 위치한 신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이다. 뾰족한 고깔 모양의 일곱 개의 탑이 마치 동화 속의 성을 연상케 한다. 일곱 개의 탑은 수천년 전 나라를 세운 일곱 개의 마자르 족을 상징한다. 어부의 성채란 이름의 유래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지역방위를 위하여 18세기에 어부들이 축조하여 놓았기 때문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옛날에 어시장이 있던 장소 때문이라는 설이다. 이곳에서는 도나우 강변의 아름다운 도시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한국의 시인 김춘수는 시(詩),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에서 1956년 헝가리 혁명을 묘사하고 있다. 네오 고딕 스타일의 헝가리 국회의사당 건물은 헝가리에서 가장 큰 건물(길이 268m)로 헝가리의 성 이슈트반 왕관이 전시되어 있다. 구시가지 마차시 성당(Mátyás templom) 부다 성(Budai Vár) 성 이슈트반 대성당(St. Stephen s Basilica) 세체니 다리(Széchenyi Lánchíd) 어부의 요새(Halaszbastya) 치타델라(Citadella) 헝가리 국회의사당(Országház) 1112.jpg|구시가지 거리 templom és a Szentháromság tér.JPG|마차시 성당 Budapest.JPG|부다 성 St. Stephen s Basilica C16.jpg|성 이슈트반 대성당 Bridge Budapest Hungary.jpg|세체니 다리 요새 from Citadella - Buda Side - Budapest - Hungary - 01.jpg|치타델라에서 바라본 부다페스트 시내 Parlament from Castle.jpg|헝가리 국회의사당 불가리아 소피아 프랑스 파리 (1956년) 이스라엘 텔아비브 (1989년) 오스트리아 빈 (1990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1990년) 미국 포트워스 (1990년) 루마니아 부쿠레슈티 (1991년) 미국 뉴욕 (1992년) 독일 베를린 (1992년) 포르투갈 리스본 (1992년) 우크라이나 리비우 (1993년) 크로아티아 자그레브 (1994년) 대한민국 대전 (1994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사라예보 (1995년) 슬로바키아 코시체 (1997년) 중국 베이징 시 (2005년) 폴란드 바르샤바 (2005년) 태국 방콕 (2007년) 이탈리아 피렌체 (2008년)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2009년) Budapest hotels and info Portal 부다페스트시 페이지 Budapest Business & Travel Portal 부다페스트와 헝가리 여행 안내 부다페스트에 관한 정보 론리플래닛(LonelyPlanet.com)의 부다페스트 여행정보 부다페스트에 대하여 네이버 캐스트 여행 - 부다페스트 분류:헝가리의 도시 분류:유럽에 위치한 수도 분류:도나우강 주변 도시 분류:헝가리의 세계유산 분류:헝가리의 주도
헝가리 ( , 는 중앙유럽에 있는 내륙국이며 수도는 부다페스트이다.. 서쪽과 북서쪽으로는 오스트리아, 북쪽으로는 슬로바키아, 북동쪽으로는 우크라이나, 동쪽과 남동쪽으로는 루마니아, 남쪽으로는 세르비아, 남서쪽으로는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폴란드, 체코, 슬로바키아와 함께 비셰그라드 그룹의 일원이자, 유럽 연합의 정회원국이다. 헝가리의 주민은 거의 대부분 우랄족에 속하는 헝가리인이다. 헝가리의 국토는 헝가리 평원이라 불리는 광대한 평원을 중심으로 하여, 예부터 다양한 민족이 침입하여 정착하여 왔다. 고대에는 판노니아라 불리고, 판노니아족 등이 거주하였다. 기원전 1세기에는 로마 제국에 점령되어, 속주 일리리쿰에 편입되었다가, 1세기 중엽 속주 판노니아로 분리되었다. 헝가리인이 10세기 말 헝가리 왕국을 수립하여, 14세기부터 15세기경에는 주변의 여러 왕국과 동군 연합을 맺고 오스만 제국의 침입을 받을 때까지는 중앙 유럽의 강국으로 군림하였다. 헝가리는 15세기 후반까지 오스만 제국의 강력한 압력을 받게 되었다. 1526년에 헝가리는 모하치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군에 패배하여, 국왕 러요시 2세가 전사하였다. 1541년에 부다가 함락되어, 그 결과 동남부와 중부의 3분의 2를 오스만 제국(오스만 제국령 헝가리), 북서부의 3분의 1을 합스부르크 왕가의 오스트리아에 의하여 분할 지배되어(왕령 헝가리), 양 제국이 충돌하여 만나는 최전선이 되었다. 오스만 제국이 군사적으로 후퇴하자, 1699년에 체결된 카를로비츠 조약에 따라 헝가리 및 헝가리 국왕령의 크로아티아와 트란실바니아는 오스트리아에 할양되었다. 헝가리 측에서는 지배자가 합스부르크 왕가로 변한 것일 뿐, 꾸준히 독립을 요구하는 운동이 반복되었다. 1848년 3월 혁명에서는 코슈트 러요시가 지도한 독립운동은 러시아군의 개입으로 실패하였으나, 오스트리아에 민족독립운동을 억제하기 위한 타협을 결단케하여, 1867년에 아우스글라이히(화협)가 맺어졌다. 이렇게 하여, 합스부르크 왕가는 오스트리아 제국과 헝가리왕국에서 이중군주로서 군림하였으나, 양국은 외교 등을 제외하고는 각각의 정부를 가지고 연합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직전에 헝가리는 제국으로부터 분리독립(1918년)하면서 공화국이 되었다. 1918년에 헝가리 최초의 공화제국가인 헝가리민주공화국이 성립하여, 사회민주당계의 카로이 미하이(Károlyi Mihály)가 초대 대통령 및 수상을 맡았다. 1920년에 체결된 트리아농 조약에 의해, 헝가리는 트란실바니아 등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시대의 왕국령 가운데, 면적의 72%, 인구의 64%를 잃고, 헝가리인의 전인구 중 반수 가량이 헝가리 국외로 남겨지게 되었다. 합스부르크가를 대신하는 왕이 선출되지 않음에 따라, 1920년 3월 1일 호르티 미클로시가 섭정으로서 통치하는 헝가리 왕국의 성립을 선언하였으나, 영토를 상실함에 따른 반작용으로 차츰 우경화되었다. 헝가리는 나치 독일의 후원하에 1930년대 말, 뮌헨 협정과 빈 중재, 슬로바키아-헝가리 전쟁 등으로 일부 영토를 회복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는 잃은 땅을 회복하기 위해, 또한 나치 독일의 압박을 받아, 추축국에 가담하였으나, 전쟁의 국면은 서서히 열세가 되어, 1944년에는 호르티는 추축국으로부터 이탈하려고 하였으나, 나치 독일군의 판처파우스트 작전, 화살십자당에 의한 쿠데타로 저지되어, 1945년 5월 8일의 패전까지 추축국으로서 전쟁을 치렀다. 1945년 5월 8일의 패전에 의해 소비에트연방에 점령된 헝가리에서는 공산화가 추진되었다. 1946년 2월 1일에 군주제가 폐지되고, 헝가리 왕국은 명실공히 붕괴하였다. 소비에트연방 점령하의 헝가리에서는, 1949년 사회주의공화국을 표방한 헝가리 공화국(제2공화국)이 성립하였다. 1989년 10월 공산당 일당지배체제를 청산하고 사회자유주의로 선회했다. 로마 제국은 기원전 35년부터 기원전 9년 사이에 도나우 강 서안 지역을 정복하였다. 이로써 기원전 9년부터 4세기 말엽까지, 로마 제국의 속주 판노니아가 훗날 헝가리의 영토가 되는 지역을 포함하는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4세기 후반에는 훈족이 침입, 서기 433년에 서로마 제국으로부터 판노니아의 지배를 인정받고, 훈족에 의하여 판노니아를 주요영토(일부는 현재의 불가리아, 루마니아를 포함)로 하는 독립국가가 처음으로 탄생하였다. 헝가리는 896년, 현재의 체코 및 슬로바키아를 중심으로 한 영토를 가지고 있던 대모라바 왕국(Great Moravia)을 멸망시키고 판노니아 평원(헝가리 분지)를 차지한 마자르인들과 이들을 이끌고 들어온 아르파드에 의해 건국되었다.(→그 이전의 역사는 헝가리인 참조). 그 후로는 지금의 스위스나 북이탈리아, 발칸 반도를 원정하면서 약탈을 계속했지만 955년 아우구스부르크 부근에서 독일 황제 오토 군대에 패해 지휘관들이 처형당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헝가리인들은 보다 평화적인 방향으로 노선을 바꿔 게자 공의 통치가 시작됐다. 마자르 대공 게저의 아들이었던 이슈트반 1세는 헝가리인 내부의 이교도인 부족장과의 싸움에서 이겨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이고 행정 조직을 정비하면서, 신성 로마 제국 오토 2세의 후원으로 헝가리 왕국을 건국(1000년)하고 국왕의 지위에 올랐다. 이렇게 해서 헝가리는 중앙유럽에 위치한 가톨릭 국가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102년에는 크로아티아와의 동군연합(同君聯合, 크로아티아-헝가리 동군연합)을 이루는 등 세력을 확장하였다. 12세기 후반 농업, 공업(수공업), 상업의 발전으로 세속 영주층의 권력이 커졌다. 토커이, 에게르 등의 와인 산지는 이 무렵 개척지에 들어온 프랑스인들에게 의해 확립된 것이다. 벨러 4세의 치하(1235년~70년)이던 1241년~1242년, 몽골의 침입으로 국토가 황폐화되고, 대다수의 주민들이 죽임을 당했다. 몽골군이 갑작스럽게 물러간 후 벨러 4세는 방위를 위해 봉건영주에게 석조 성을 쌓는 것을 허용했다. 벨러 4세 자신이 왕궁지 에스테르곰을 대주교에게 양도하고, 부더 남쪽에 있는 야트막한 언덕에 성벽을 쌓아 왕궁(부다 성)을 짓고 이 곳을 부더라고 명명했다. 그때까지 부더는 오부더(구(舊) 부더)였다. 1301년 언드라시 3세가 사망하자 아르파드 왕가는 단절되었고, 여러 가문들이 헝가리의 왕위를 소유하려고 분쟁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야노시 왕가의 마차시 1세의 절대주의 통치 하(1458년~90년)에서 헝가리는 영토를 확장하고 르네상스 문화를 도입해 영화를 누리는 헝가리의 황금시대가 열렸다. 그렇지만 그 영화는 길게 이어지지 못했고 도자 죄르지의 농민 전쟁(1514년), 중간 귀족과 대 귀족의 항쟁 등이 이어지며 나라는 쇠퇴의 길로 들어섰다. 서방으로의 팽창 정책을 추진하던 오스만 제국과 헝가리 왕국의 충돌이 불가피하였다. 1526년, 모하치 전투에서 러요시 2세가 지휘하던 헝가리 왕국군은 오스만 제국의 술탄인 쉴레이만 대제가 이끄는 오스만 제국군에게 완패하고, 국왕 자신도 전사하였다. 이 전쟁의 패배로 인하여 헝가리는 오스만 헝가리와 트란실바니아를 오스만 제국에게 할양하였다. 오스만 제국군은 이에 그치지 않고 진격하여 빈을 공격했고, 1541년에는 부더를 점령했다. 이로써, 헝가리는 약 150년간 합스부르크 왕가가 직접 통치하는 도나우 강 서쪽의 로열 헝가리(합스부르크 헝가리)와 오스만 왕가가 직접 통치하는 부다를 포함한 구 헝가리 왕국의 중앙부인 오스만 헝가리, 오스만 아래서 큰 자치를 누리는 트란실바니아를 통치한 터키 보호령의 헝가리 왕국(1570년부터 트란실바니아 공국)으로 3분된다. 헝가리의 황금기는 16세기 초 오스만 제국에 의해 정복되고 16세기 오스트리아가 헝가리의 나머지 땅마저 지배하게 되어 끝이 났다. 17세기 말에는 오스트리아가 헝가리 땅을 전부 차지하게 되었다. 국토의 3분할로 헝가리의 모든 도시는 각기 다른 발전의 길을 걷게 되면서 다른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일례로, 도나우 강 서쪽의 쇼프론이나 케세그는 경제, 상업 면에서 오스트리아와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된다. 트란실바니아 공국은 터키 보호령 하에 있었지만 헝가리인의 통치국가로 발전해 갔다. 콜로주바르(현 루마니아 령, 클루즈 또는 나포카)는 당시 가장 번성했던 도시였다. 3분할 시 베트렌, 라코츠, 그 후 테케리의 "클루츠" 군과 대 터키, 대 합스부르크 전쟁에 나서 조국통일을 이루는 중심지였다. 야노시 왕가와 합스부르크 왕가가 헝가리의 왕위를 두고 서로 다투었지만, 합스부르크의 혼인 정책으로 야노시 가문은 합스부르크 가문에 흡수당하면서, 오스트리아의 대공이 헝가리의 왕을 겸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1683년 대튀르크 전쟁의 결과, 카를로비츠 조약으로 최전성기 때의 영토를 모두 회복한다. 1703년 합스부르크의 통치에 반대하여 트란실바니아 대공 라코치 페렌츠 2세가 주동한 민족 반란이 일어나지만 결국 실패한다. 1848년에 코슈트의 주도로 1848년 헝가리 혁명이 일어났으나, 러시아 제국의 개입으로 실패한다. 그러나, 오스트리아가 보오전쟁에서 패배하고 헝가리에 호의적인 시씨 황후로 인해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에선 대타협이 이루어져,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 아래에 있던 헝가리는 1867년 오스트리아와의 타협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자치 왕국으로 승격되었다. 헝가리는 외교와 국방을 제외한 부분에서 엄청난 자치를 보장받으면서, 헝가리의 경제와 문화는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1914년 7월 28일 ~ 1918년 11월 11일) 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되면서 종전 직전인 1918년 10월 31일 헝가리는 독립을 선언하고, 헝가리 최초의 공화제 국가인 헝가리 민주공화국이 성립하여, 사회민주당계의 미하이 카로이(Mihály Károlyi)가 초대 대통령 및 수상을 맡았다. 1919년에는 공산 혁명이 일어나 헝가리 평의회 공화국이 세워졌지만 루마니아가 침공해 소비에트 공화국을 무너뜨리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해군 제독이었던 미클로시 호르티를 집권시키는 등, 1919년 8월~11월 중순까지 루마니아가 부다페스트를 점령하였다. 헝가리는 제1차 세계 대전의 패전국이었고, 전쟁의 책임을 마무리하는 교섭이 진행되어, 연합국과 헝가리간의 트리아농 조약(1920년 6월 4일)에 따라 전쟁 전의 영토(슬로바키아, 보이보디나, 트란실바니아, 슬라보니아)와 인구의 대부분을 중앙 유럽의 신생 독립국들에게 할양할 수 밖에 없는 손실을 입었다. 이는 나중에 헝가리가 추축국에 가담하게 되는 배경이 된다. 헝가리는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합스부르크 가를 대신하는 왕이 선출되지 않음에 따라, 왕정을 유지할지 공화정을 선포할 지 엄청난 논쟁에 있었다. 결국 헝가리 귀족들은 왕정을 우선 유지하고 서서히 공화정으로 나아가자고 합의했으며, 호르티 미클로시를 섭정왕으로 선출(1920년 3월 1일)하고, 그가 통치하는 헝가리 왕국의 성립을 선언하였다. 섭정왕 미클로시 호르티는 영토를 상실함에 따른 반작용으로 차츰 우경화되었다. 이리하여 헝가리는 1930년대에 나치 독일의 강요로 동맹 관계를 맺었다. 히틀러는 헝가리에 있는 유대인들을 학살하기 위해 헝가리를 침공하여 호르티를 나치 합작자로 대체해야 했다. 그 때문에 나치 독일은 호르티는 물론 아들까지도 감금했고, 소련군이 풀어주게 된다. 헝가리는 나치 독일 주도의 추축국에 가담하면서, 뮌헨 협정(1938년), 빈 중재(1938년 및 1940년)를 통해 루마니아로부터 트란실바니아 북서부를 할양받았고 슬로바키아-헝가리 전쟁(1939년) 등으로 슬로바키아와의 국경 지역 일부를 합병하였다. 헝가리는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잃은 땅을 회복하기 위해 또한 나치 독일의 압박을 받아, 추축국에 가담하여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공격해 현재의 슬로베니아 일부 지역과 세르비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전역을 합병, 대국이 되었다. 그러나, 전세가 불리해지자 1944년, 호르티는 추축국으로부터 이탈하려고 하였으나, 아돌프 히틀러의 도움을 받은 살러시 페렌츠가 이끄는 화살십자당이 헝가리를 장악{나치 독일군과 화살십자당에 의한 쿠데타(판처파우스트 작전)}함으로써, 이탈은 저지되었다. 결국 헝가리는 1945년 5월 8일의 패전까지 추축국으로서 전쟁을 치르고 부다페스트 포위전으로 연합국으로 돌아서게 된다. 종전 후, 1946년 2월 1일에 군주제가 폐지되고, 헝가리왕국은 명실공히 붕괴되었다. 헝가리는 파리 조약(1947년)에 따라, 전쟁으로 얻은 영토를 모두 잃었으며 소련에 의해 헝가리 인민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소비에트 연방 점령 하의 헝가리에서는, 1949년 사회주의공화국을 표방한 헝가리 공화국(헝가리 제2공화국)이 성립되었다. 1956년 10월 23일 발발한 1956년 헝가리 혁명 이후 10월 24일 수상으로 임명된 임레 너지는 소련의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바르샤바 조약 기구 탈퇴를 선언했다. 그러자 소련군이 개입, 독자노선 추구를 이끈 임레 너지를 사형시키고, 반공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했다. 하지만 이후 헝가리는 중앙유럽의 민주화를 주도한다. 1980년대 후반이 되자,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와 함께, 공산당(헝가리사회주의노동자당) 독재의 한계가 드러났다. 1980년대 후반의 헝가리 민주화운동 결과, 1989년 5월, 헝가리는 서방측 오스트리아와의 국경에 설치되어 있던 철조망인 이른바 "철의 커튼"을 철거하고 국경을 개방하였다. 1989년 8월에는 헝가리 사회주의노동자당이 하야하고, 1989년 10월 23일에는 신헌법(헝가리공화국헌법)의 시행으로, 다당제와 대통령제를 기반으로 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도입하고 국호를 " 헝가리 공화국 "()으로 변경했다. 이로써 헝가리 인민 공화국은 명실 공히 붕괴되었다. 헝가리는 1980년대 말 바르샤바 조약 폐지도 주도하였다. 1991년 소련이 해체되자 헝가리는 서유럽 국가들과 관계를 더욱 긴밀히 하며 1996년에는 OECD, 1999년에는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 2004년 5월 1일에는 폴란드, 체코, 슬로바키아와 함께 유럽 연합에 가입했다. 헝가리 제3공화국의 국기와 국장에는, 공산당 시대의 붉은 별의 문장이 제거되었다. 또한 나치 독일, 화살십자당,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 일당 독재에 의한 압제의 반발로서 하켄크로이츠, 화살십자, 낫과 망치, 붉은 별의 사용이 1993년 개정 형법에 의해 금지되어 있다. 헝가리는 지금까지도 정치가 안정되지 못하여 2007년에 반정부 폭동이 일어난 바 있다. 2009년 3월 15일에는 헝가리의 부다페스트에선 혁명기념일에 반정부 시위가 일어나기도 했다. 2011년 4월 18일 헝가리 의회에서 새 헌법인 《헝가리 기본법》이 통과되었다. 새 헌법은 2012년 1월 1일을 기해 효력이 발생했으며 정식 국호도 "헝가리 공화국"에서 "헝가리"로 변경되었다. 그러나 헝가리의 이러한 헌법 개정은 국체의 변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헝가리 공화국의 체제와 민주주의를 계승한다. 또한 헝가리는 헝가리 공화국과 동일한 명칭임을 의미한다. 2002년 사회당 출신의 주르차니 페렌츠가 총리로 선출되었다. 8년 뒤인 2010년, 총선에서 피데스가 압승함에 따라 피데스의 당수 오르반 빅토르가 총리로 선출되었다. 93,030km2의 면적을 지니고 있는 헝가리는 동남유럽에 있다. 남북 길이는 250km, 동서 길이는 524km이다. 2,258km의 국경을 이루며 서쪽으로는 오스트리아, 남서부로는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북동쪽으로는 우크라이나, 북쪽에는 슬로바키아와 국경을 접한다. 국토의 중앙부는 해발 고도 약 100m 전후의 헝가리 분지가 차지하고, 도나우 강 중앙 유역에 위치하는 내륙국이다. 서부에는 중앙유럽 최대의 벌러톤 호(湖)가 있어, 그 남쪽에는 옛 사구열(砂丘列)과 넓은 계곡이 발달되어 있다. 사구간에는 푸스타라고 불리는 스텝이 펼쳐져 있고, 관개로 비옥한 경지를 이루고 있다. 티서 강(Tisza 江) 동쪽에는 비사지(飛砂地)나 저습지가 많다. 헝가리의 현재 국경은 처음 1차 세계대전 이후 생긴 것으로 1920년 트리아농 조약 이후 헝가리 제국은 원래 영토의 71%를 잃었고 인구의 58.5%도 사라졌다. 나치군과 연합하여 슬로바키아와 우크라이나, 루마니아, 유고슬라비아와 맞닿고 있는 일부 지역에 대한 영토권을 확보하기도 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이후 이러한 영토를 모두 잃었다. 바다는 없으며, 내륙국이다. 헝가리 국토는 카르파티아 산맥의 기슭에 넓게 펼쳐진 카르파티아 분지의 가운데 평야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헝가리 평원 또는 헝가리 분지라고도 불리는 국토의 중심은 중앙을 흐르는 도나우 강에 의해 거의 양분되어 있다. 동쪽에는 큰 지류인 티사강도 흐르고 있다. 국토의 서부에도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큰 호수인 발라톤호가 있다. 또한 각지에 온천이 용출되어 공중 욕탕이 오래 전부터 건설, 이용되어 왔다. 유럽 유수의 온천 대국이어서, 많은 관광객이 온천을 목적으로 몰려든다. 기후는 전반적으로 대륙성 기후에 속하여 비교적 온화하고 사계절도 있다. 중부유럽의 해양성 기후와 러시아 남부의 스텝기후와의 접점(接點)에 있다. 위도가 비교적 높고, 겨울은 춥지만 지중해로부터 해양성기후의 영향을 받아, 겨울에도 습윤하고 흐린 경향이 있다. 최저 기온인 1월은 평균 영하 1℃ 이며 심한 경우 영하 20℃까지 내려가는 경우가 있으며, 최고인 7월은 22℃이다. 연간 평균 기온은 10℃ 전후이다. 연강수량은 500∼700mm로 서부에 약간 많고, 활엽수가 무성한데, 동부에는 초지가 많다. 헝가리는 대통령제와 의원내각제를 병행한다. 대통령은 임기 5년으로 의회에 의해 선출되며, 수상을 임명하는 등 의례적인 직무를 수행하는 국가 원수이다. 자신이 각료를 선택해서 행정을 행한다. 총리는 4년에 한번씩 총선을 통해 뽑으며 헝가리의 실질적 국정을 운영한다. 가장 최근의 선거는 2018년 치뤄졌으며, 현재 총리는 오르반 빅토르이다. 폴란드와 달리 점진적 개혁정책을 수행, 중앙유럽에서 가장 안정적인 민주화과정을 밟고 있다. 대통령의 임기는 의회가 5년마다 선출한다. 총리를 임명하거나, 의회 선거의 날짜를 잡는 것은 대통령의 몫이다. 입법부인 국민의회(Országgyűlés)는 일원제이며, 민선이고 임기 4년이다. 정원은 386명이다. 국민의회는 국가의 최고권위기관이고, 모든 법은 국민의회를 거치지 않고는 성립되지 않는다. 순수한 사법권을 행사하는 최고재판소와는 별도로 헌법재판소가 존재하여, 법률의 합헌성을 심사하고 있다. 피데스(FIDESZ)-민족보수주의, 우익대중주의 정당. 난민 문제에 대해 극도로 폐쇄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어, UN, EU와 마찰을 겪고있음. 199석 중 118석. 유럽 인민당 소속 요비크(Jobbik)-극우 정당. 2010년 총선에서 처음으로 의회에 진출했고, 2018년 총선에서 26석을 얻어 2당이 됨. 신나치주의 정당이라는 의혹이 있음. 헝가리 사회당(MSZP)-중도좌파 사민주의 정당. 헝가리 사회노동당의 후신으로 설립됨. 199석중 15석. 사회민주진보동맹 소속. 기독민주인민당(KDNP)-기독교민주주의 정당. 현재 피데스와 연합을 맺고있음. 199석 중 16석으로, 제 3당임. 민주연합(DK)-사회자유주의 정당. 전 총리였던 주르차니 페렌츠가 헝가리 사회당을 탈당해 창당함. 199석 중 9석. 또 다른 정치(LMP)-생태사회주의 정당. 2010년 이후 당세가 급격히 커짐. 199석 중 7석. 자유당(MLP)-자유주의 정당. 2016년 헝가리 이민자 쿼터제 국민투표에서 유이하게 찬성표를 던짐. 199석 중 1석. 헝가리 두 개의 꼬리가 있는 강아지의 당-장난 정당. 정치인들을 놀리겠다는 취지로 창당됨. 난민에 포용적 모습을 보이고 있음. 199석 중 0석. 2002년 4월 총선에서는 사회당-자유민주연합 중심의 중도좌파정당이 청년민주동맹-민주포럼 중심의 중도우파정당에 승리해 재집권에 성공했다. 2010년 총선에서 피데스가 압승을 거둔 뒤 쭉 오르반 빅토르가 집권해왔다. 2018년 총선에서 피데스-기독민주인민당 연합이 199석 중 138석을, 요비크가 26석을 차지해 EU의 우려를 사기도 했다. 헝가리는 43개의 지방 행정 구역으로 구분된다. 그중 19개는 주(州)로 번역될 수 있는 메제(megye)고 23개는 메제와 동격의 도시주(都市州, megyei város)다. 또한 수도 부다페스트(Budapest, 부더페슈트)는 시는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는 독립된 수도다. 부다페스트는 1873년에 부다(Buda, 부더)와 페스트(Pest, 페슈트)가 합병되면서 정해진 이름이다. 농업 지역에 위치하고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대학과 19세기 독립 혁명에 연유하는 교회가 있는 데브레첸(Debrecen)에도 공업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다. 북부의 미슈콜츠(Miskolc)는 제철·금속공업으로 알려져 있고, 남부의 세게드(Seged)과 터키적 영향이 강한 소도시 페치(Pécs)도 공업 중심지가 되어 가고 있다. 헝가리의 행정 구역 메제 및 도시주(都市州, megyei város)를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서부 버시 주 (Vas megye) - 솜버트헤이 (Szombathely) 절러 주 (Zala megye) - 절러에게르세그 (Zalaegerszeg) 쇼모지 주 (Somogy megye) - 커포슈바르 (Kaposvár) 베스프렘 주 (Veszprém megye) - 베스프렘 (Veszprém) 죄르모숀쇼프론 주 (Győr-Moson-Sopron megye) - 죄르 (Győr) 중앙 코마롬에스테르곰 주 (Komárom-Esztergom megye) - 터터바녀 (Tatabánya) 페예르 주 (Fejér megye) - 세케슈페헤르바르 (Székesfehérvár) 페슈트 주 (Pest megye) - 부다페스트 (Budapest) 노그라드 주 (Nógrád megye) - 셜고터랸 (Salgótarján) 남부 톨너 주 (Tolna megye) - 섹사르드 (Szekszárd) 버러녀 주 (Baranya megye) - 페치 (Pécs) 바치키슈쿤 주 (Bács-Kiskun megye) - 케치케메트 (Kecskemét) 촌그라드 주 (Csongrád megye) - 세게드 (Szeged) 베케시 주 (Békés megye) - 베케슈처버 (Békéscsaba) 동부 헤베시 주 (Heves megye) - 에게르 (Eger) 허이두비허르 주 (Hajdú-Bihar megye) - 데브레첸 (Debrecen) 야스너지쿤솔노크 주 (Jász-Nagykun-Szolnok megye) - 솔노크 (Szolnok) 서볼치서트마르베레그 주 (Szabolcs-Szatmár-Bereg megye) - 니레지하저 (Nyíregyháza) 보르쇼드어버우이젬플렌 주 (Borsod-Abaúj-Zemplén megye) - 미슈콜츠 (Miskolc) 그 외의 도시주 에르드 (Érd, 페슈트 주) 두너우이바로시 (Dunaújváros, 페예르 주) 호드메죄바샤르헤이 (Hódmezővásárhely, 촌그라드 주) 너지커니저 (Nagykanizsa, 절러 주) 쇼프론 (Sopron, 죄르모숀쇼프론 주) 현재의 국군은, 육군 및 공군의 2군 체제이다. 1999년에 북대서양 조약 기구에 가입하고, 서유럽 여러나라와 집단안전보장 체제를 갖추었다. 군의 역사는 길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서 추축국 군의 일원이었다. 전후의 독립 헝가리는 1920년의 트리아농 조약에 의해 병력을 제한 받게 된다. 그에 대한 반발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 다시 추축국으로 참전하여, 동부 전선에도 병력을 내보냈다. 1945년에는 소련군이 점령하여, 냉전시에는 공산권국가로서, 바르샤바 조약 기구에 가입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헝가리 경제는 농업과 소규모 공업을 위주로 하였으나, 전후 산업국으로 탈바꿈하였다. 1950년대 초 공산정부는 자급자족의 경제를 위해 산업화에 주력하였고, 주 관할의 공장과 농장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중공업에 치중한 결과 경공업이 경시되어 소비재 부족이 심화되고, 농업 생산성이 떨어지는 등 경제의 불균형 현상이 심각해졌다. 이러한 문제점을 타개하기 위해 1968년, 공산주의 시장경제발전을 목표로 한 대폭적인 경제 개혁이 시행되었다. 서방과의 무역을 확대하고 시장에 제한된 자유를 허용하는 새로운 경제 개혁을 전개하였고, 초반에는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어, 공업 생산량이 크게 늘어났으며, 중앙유럽 공산국가 중에서는 소비재가 풍부한 나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1990년대 초에 이르기까지 외채가 급격히 증가하여, 1993년에는 150억달러에 이르렀다. 경제 성장률도 1970년대에는 높은 수준을 유지했으나, 1980년대 들어 침체를 면치 못했다. 1982년 소규모 사기업 승인, 1986년 파산법 시행 등 일련의 경제개혁조치를 단행하였으며 1989년 사기업육성과 외국인에 대한 투자규제완화 등의 신회사법을 제정하였다. 이로 인해 외국 직접투자호조 및 관광수지 흑자를 보고 있다. 이런 가운데 1980년대에 민주화의 물결이 거세지면서, 민주주의 체제의 도입 필요성도 커졌으며, 공식적으로 체제를 전환하였다. 헝가리는 의 체제전환 이래, 외국자본을 받아들여 적극적으로 경제 개방을 진행하였다. 그 결과, 1997년 이후 연간 4% 이상의 고성장을 계속함과 함께, 2004년에는 경제의 민간부문이 국내총생산의 80%를 차지하고, "구 동구권의 우등생"이라고 불릴 정도가 되었다. 또한 2004년의 유럽연합 가입은 당시의 헝가리 경제에 순풍이 되었다. 민주주의 체제 도입 초기인 1990년대 초반에는 혼란과 인플레이션, 무역 구조의 변화 등으로 경제성장률은 마이너스를 기록하였다. 그러나 1994년 이후 안정기에 접어들어었으며, 1996년에는 OECD에 가입하였다. 1996년 이후 국영기업의 민영화 및 중소기업 육성에 노력하고 있다. 1990년대 후반 세계를 강타한 금융위기에도 별 영향을 받지 않고 안정적인 성장세를 보였다. 2000년대 들어 헝가리 경제는 5% 이상의 높은 성장률을 보였고, 2004년에는 유럽 연합(EU)에 가입하였다. 그러나 유럽 연합 가입 이후 침체기에 접어들어, 이후 연 1%대 성장에 머물고 있으며, 인플레이션도 심해지고 있다. 인플레이션과 실업률의 증가로 빈부의 격차가 커지고, 이것은 일상화된 사회문제가 되었다. 또한 거액의 재정적자도 중요한 과제이다. 최근 다소 침체기에 들었으나, 헝가리는 중앙유럽의 체제 전환국 중에서는 안정적인 성장을 나타냈으며, 국민소득도 높은 편이다. 현 정권이 목표로 하는 유로화 도입에의 전망은 보이지 않는다. 농업에서는 단고추가 명산품이고, 헝가리요리에도 흔히 사용된다. 거위의 사육도 번성하여, 도나우강 서안(두난툴(Dunántúl) 지방)이 주산지이다. 헝가리산 푸아그라도 많이 수출되고 있다. 헝가리의 광업은, 무연탄으로 이용가능한 아탄과 보크사이트가 중요 핵심이 되고 있다. 자원으로는 세계 시장 점유율 1.5%를 차지하는 아탄(1391만톤, 2002년), 석유(107만톤), 천연가스(11.5경줄)를 채굴한다. 유력한 탄전은 남동부 베치 근교, 부다페스트에서 서쪽으로 50km에 위치한 타타바니아 근교의 2 곳에 펼쳐져 있다. 유전은 중앙남부의 세게드 근교와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국경에 접하는 위치에 있다. 금속광물자원으로는 보크사이트(100만톤)가 유력하다. 벌러톤 호 북안부터 부다페스트로 향하는 북동쪽으로 이어지는 산지를 따라서 채굴되고 있다. 그러나, 채굴량은 감소 경향에 있다. (1991년에는 203.7만 톤이 채굴되었다.) 그 밖에도, 소규모이긴 하나 망간과 우라늄도 채굴되고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전의 헝가리는 비옥한 토양과 계획적인 관개시설비에 의한 농업국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식품공업을 중심으로 한 경공업이 번성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공산주의의 계획경제에 의해 중공업화가 진행되었다. 특히, 차량 생산, 일반 기계가 우선되어 화학공업, 약품공업이 그 다음이었다. 그러나, 유기광물자원과 보크사이트를 제외하면, 공업원 재료 쪽은 혜택을 받지 못하여, 수입원재료를 가공하여, 수출하는 형태를 취하였다. 1970년대에는 공업을 중심으로 한 무역이 국민소득의 40%를 점할 정도로 성장하였다. 공산주의체제에서 민주주의체제로 전환 후, 1990년대 초에는 화학공업의 비중이 점차 낮아지는 경향을 보였다. 2003년 시점에는 전 산업에서 차지하는 공업의 비율은 점차 높아져, 수출액의 86.8%를 공업제품이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무역의존도는 수출 54.5%, 수입 59.2%까지 높아졌다. 품목별로는 기계공업이 다시 번성하게 되었고,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전기기계 36.1%, 기계류 16.2%, 자동차 8.2%이다. 세계의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높은 공업제품은 와인 (1.7%, 49만톤), 질산(1.5%, 31만톤)이다. 전통적인 산업으로는 주류 제조업이 강하다. 특히 와인이 유명한데, 부르겐란트(), 쇼프론(Sopron), 비츠라니 등 유명한 산지가 있으나, 그중에서도 토커이(Tokaj)의 토커이 와인은 "와인의 왕"이라 불린다. 부다페스트는 서유럽에서 발칸방면으로 달리는 육상 국제선의 통과지로 도로 총연장은 8만 7,000km, 포장률이 97%이며 철도는 총연장 8,190km이다. 헝가리의 국제공항은 부다페스트에 있는 리스트 페렌츠 국제공항(옛 명칭 페리헤지 국제공항)뿐이므로 항공편으로 헝가리에 입국할 때는 모두 이 공항에 도착한다. 리스트 페렌츠 국제공항에는 두 개의 터미널이 있는데, 제1터미널은 1998년에 화물운송기나 전세기편 전용터미널로 지정되어, 일반 여객은 이용하지 않는다. 여객용으로 사용하는 제2터미널은 부다페스트의 중심부에서 약 24 km 남동쪽에 위치한다. 제2터미널은 2A, 2B로 나뉘어 있으며, 2A는 말레브 헝가리 항공의 전용터미널, 2B는 그 이외의 모든 항공기가 이착륙한다. 터미널 2A와 2B는 인접한데다 내부도 연결되어 있어 만약 착오를 하더라도 간단히 이동할 수 있다. 헝가리의 통화는 포린트(Forint, Ft)이다. 예전에는 보조통화로 피렐(1Ft=100피렐)이 있었지만, 지금은 이자 등 계산상으로만 사용하는 정도이다. 은행은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는 8시부터 15시까지, 금요일은 8시부터 13시까지 연다. 우체국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8시부터 18시까지 연다. 주요 기차역에 있는 우체국은 24시간 영업한다. 이 나라의 거의 대부분의 민족은 우랄족의 후예인 헝가리인이 거의 대부분이며, 언어도 슬라브어군나 게르만어군, 로망스어군도 아닌 우랄어족의 언어인, 헝가리어를 거의 대부분 사용한다. 또한, 집시라고 불리는 로마인이 5.3%를 차지한다. 기타 민족(독일인, 루마니아인, 터키인, 슬라브계의 슬로바키아인, 세르비아인, 슬로베니아인, 우크라이나인, 크로아티아인, 유대인)도 거주한다. 부다페스트에는 화교도 거주한다. 헝가리와 그 주변은, 매우 독특한 문화를 가졌던 다양한 민족이 거주하였던 것으로 19세기 이래 잘 알려져 있다. 2000년 현재 인구의 84.4%가 의 헝가리어를 사용하는 헝가리인(마자르인)이다. 헝가리공화국의 국민의 가 헝가리인(마자르인)이다. 마자르인은 핀우그리아어파의 헝가리어를 모어로 하고, 우랄 산맥 방면에서 이주해 온 민족이다. 마자르인의 인명은, 정식으로 표기하는 경우 성이 이름의 앞에 놓인다. 헝가리인은 구 헝가리 왕국령에 넒게 퍼져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세르비아의 보이보디나, 크로아티아 북부, 슬로베니아 남부, 루마니아의 트란실바니아 등에도 꽤 많은 헝가리인 인구가 남아있다. 또한 헝가리인 중에는 몰다비아의 찬고(Csángó), 트란실바니아의 세케이(Székely)인과, 헝가리공화국 영내의 야스(Jász)인, 마쵸, 쿤(Kun), 팔로츠(Palóc) 등의 개성적인 문화를 가진 서브 그룹이 알려져 있다. 야스인은 알라니족의 후예, 쿤인은 쿠만인의 후예라고 하는 것이 알려져 있고 이러한 다양한 출신을 가지고 헝가리 왕국에 이주하여 헝가리에 부분적으로 동화되어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 밖의 민족으로는 통계적으로 의미가 있는 인구를 가지는 로마인(집시)과 독일인이 거주한다. 헝가리의 집시는 개성적인 민족문화로 알려져 있다. 헝가리 과학 아카데미의 추계로는 인구 약 1천만명 중에서 약 60만명이 집시이다. 또한 독일인은 동방식민운동의 일환으로 헝가리 왕국으로 이전해 온 사람들의 자손으로, 트란실바니아의 사스인(작센인)(→루마니아 독일인)과 슬로바키아의 칩스() 독일인과 같이 헝가리 왕국 가운데 독자적인 민족공동체를 이룩한 사람들도 있다. 그 밖에도, 루티니아인(우크라이나인), 체코인, 크로아티아인, 루마니아인 등도 있으나, 모두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에는 유대인 인구도 상당히 많은 수에 이르렀으나, 제2차 세계 대전 중의 박해 등으로 미국이나 이스라엘로 이주하여 간 사람이 많다. 헝가리인이 황색 인종이라고 하는 설은 아시아 및 아시아인의 정의가 애매한 것과 또한 과거의 인종분류의 정의가 현재와는 다소 다르다는 것에서 비롯된 오류라고 말할 수 있다. 근년의 DNA 분석에 의하면 헝가리인은 코카소이드(Caucasoid, 백인)으로 분류되나, 아주 작게도 몽골로이드(황색 인종) 특유의 아세트알데히드 탈수소 효소 D형이 검출되고 있는 것은, 몽골로이드와의 혼혈에 의해 유전자의 유입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문화적으로 보면, 마자르족은 아시아의 문화와 유럽의 문화가 뒤섞여 있는 문화를 보유하고 있다. FAO가 발표한 헝가리 인구 변화(천 명 단위) 이 나라는 다른 중앙유럽 나라들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인구가 감소하는 추세에 있다. 2006년 Eurostat 추산에 따르면, 이 나라의 組(조)출산율은 천 명당 9.6명, 사망률은 천 명당 13.5명, 합계출산율은 2005년 현재 천 명당 1.28명이다. 현재 2014년 10월 22일 기준으로 헝가리 인구는 9,933,173명이다. 공용어는 헝가리어다. 소수민족의 대부분도 헝가리어를 말하여, 헝가리어 인구는 98%에 이른다. 지식인들은 러시아어, 영어, 독일어를 구사하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국가의 공용어인 헝가리어를 사용한다. 독일어, 영어는 소수가 사용하며, 제2언어등으로 사용한다. 또 헝가리는 프랑스어 사용국 기구(프랑코포니)의 참관국이다. 이것은 언어적으로는 영어로의, 경제적으로는 독일로의 급속한 편입을 막기 위한 측면도 있다. 영어는 상용어나 제2언어 등으로 구사자가 소수 사용한다. 20세기 헝가리에는 헝가리의 전통적 문화를 바탕으로 외래문화를 수용한 거물들이 있었다. 죄르지 리게티, 코다이 졸탄, 버르토크 벨러 등이다. 이 사람들의 민족적 전통의 창조적인 개발사상은 서로 연관을 갖는다. 2011년 기준으로 종교 분포는 다음과 같다. 전체 10,198,315명 (100%) * 가톨릭교회 5,558,901명 (54.5%) ** 로마 가톨릭교회 5,289,521명 (51.9%) ** 그리스 정교회 268,935명 (2.6%) * 개신교회 1,985,576명 (19.5%) * 동방정교회 15,298명 (0.1%) * 기타 기독교 24,340명 (0.2%) * 유대교 12,871명 (0.1%) * 기타 종교 13,537명 (0.1%) * 모든 종교 7,610,553명 (74.6%) * 무교 1,483,369 (14.5%) * 응답을 원치 않음 1,034,767명 (10.1%) * 잘 알 수 없음 69,566명 (0.7%) 헝가리에서는 공휴일이 화요일이나 목요일이면 그 사이의 월요일이나 금요일도 휴일로 만들고 직전 주 토요일을 평일로 하는 일종의 대체평일제 가 시행되고 있다. 헝가리는 세계적 음악가인 페렌츠 리스트(Ferenc Liszt)를 초대 교장으로 한 세계적 명성의 리스트 아카데미와 국립 오페라극장과 국립 필하모니아합창단 등 각종 대형공연장을 29개소나 지닌 음악적으로 뛰어난 국가다. 벨라 바르톡(Bela Bartok)과 졸탄 코다이(Zoltán Kodály) 등 뛰어난 작곡가들을 배출하였으며 이들은 헝가리 국민음악의 건설자다. 뛰어난 악기 연주자들도 많이 배출하였는데 바이올리니스트인 제노 후바이(Jeno Hubay), 피아니스트 E.도흐나니, L.크라우시 등이 널리 알려져 있다. 헝가리의 음악은 대개 집시음악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느림과 빠름, 슬픔과 기쁨, 열정을 동시에 지니고 있어 삶의 애환을 모두 지녔다고 평가되고 있다. 차르다시(Csárdás)는 헝가리의 전통적, 민속적, 국민적인 음악과 무용을 나타내는 말이다. 19세기 초엽 쯤 생겨난 차르다시는 본래 집시들의 음악과 무용이였으며 경기병이 집시악단의 반주에 맞추어 반주로 춤을 춘 베르분코시(verbunkos)라는 무용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한다. 4분의 4박자 또는 4분의 2박자로 구성되어 있다. 처음 도입부인 라시(lassú)는 느리고 우아한 동작으로 이루어져있으며 빠른 주부인 프리시(friss)는 속도가 빠르고 야성적이며 강렬한 동작들로 이루어진다. 특히 주부에서는 강렬한 당긴음과 리듬이 특징이다. 리스트의 《헝가리 광시곡》 제2번이 그 전형적인 예며, 들리브의 무용모음곡 《코펠리아》에도 차르다시가 도입되어 있다. 헝가리에서는 19세기 중엽부터 음악상의 국민주의운동이 대두되어 이 운동과 더불어 차르다시는 유럽 각지에 전파되었다. 이탈리아의 작곡가인 비트리오 몬티(Vittrorio Monti)의 차르다시는 수많은 바이올린 연주자들 사이에서 연주되고 있다. 2015년 4월 박근혜 대통령이 헝가리 야노쉬 아데르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북한이 헝가리의 체제성공을 본받아야 한다." 라고 발언하자, 북한은 "동족을 모함하고 시기질투하는 궤변"이라고 예민하게 반응했다. 헝가리 정부 공식 사이트 헝가리 의회 홈페이지 헝가리 관광 및 방문 주한 헝가리 대사관 주헝가리 대한민국 대사관 헝가리 해외여행(헝가리편) 헝가리 개요 론리플래닛의 정보(헝가리편) CIA의 세계정보(헝가리편) 분류:내륙국 분류:공화국 분류:유엔 회원국 분류:헝가리어권 분류:유럽 연합 회원국 분류:유럽 평의회 회원국 분류:북대서양 조약 기구 회원국 분류:경제 협력 개발 기구 회원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은 1867년부터 1918년까지 존속했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국가이다. 이중 제국 (), 또는 제국이자 왕국 ()로도 불렸다. 공식 명칭은 제국 회의에 대표된 왕국들과 영토 및 신성 헝가리의 성 이슈트반 왕관령 (이다. 1867년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제와 헝가리의 헝가리인 귀족들 사이의 대타협(으로 성립되었고, 오스트리아 황제가 헝가리의 사도왕(1867년 이전에는 헝가리 국왕 ), 보헤미아(지금은 체코) 왕을 겸임하였다. 이 타협으로 헝가리는 큰 자치권을 누리게 되었다. 헝가리인은 오스트리아인과 함께 지배 민족이 되었고, 헝가리어가 독일어와 함께 공용어가 되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 황제가 지배하는 제국의 서부, 북부 지역과 헝가리의 공동 사안(국방, 외교, 경제 등)에는 각각 비례 대표를 통해 참여하였다. 제국이 존재하는 동안,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는 역사적, 문화적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어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 전환된 이후 발칸 반도에서의 이권을 지키는데 큰 관심을 가졌으나 이는 제1차 세계 대전의 원인이 되어 독일, 오스만 제국과 함께 동맹국으로 참전하게 된다. 그러나 결국 이탈리아 전선에서 이탈리아(1915년 연합국으로 참전)에 의해 패배하였고, 1918년 11월 연합국에 항복하였다. 제국의 영토는 세르비아, 루마니아, 이탈리아, 폴란드, 우크라이나에게 할양당하고 남은 영토마저 오스트리아,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로 각각 독립함으로써 제국은 완전 해체된다. 황제는 퇴위하고, 공화국이 선포된다(오스트리아 제1공화국). 이후 한동안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는 긴 침체기를 맞았다. 수도로는 빈과 부다페스트 두 곳이 있었다. 당시 주민은 게르만족의 혈통인 오스트리아인, 슬라브족의 혈통인 체코인, 폴란드인, 슬로바키아인, 보스니아인,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슬로베니아인, 우크라이나인, 우랄족의 혈통인 헝가리인이 거주하였다. 다음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통용되었던 언어들로 제국의 명칭을 표기한 목록이다. 이 나라는 예전의 오스트리아 제국을 계속 지탱하기 위한 헝가리의 귀족들과 합스부르크 왕가 간의 대타협으로 세워졌다. 19세기는 유럽에서 민족주의가 싹이 텄던 시기로 당시 다민족 국가였던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정치 문제는 11개의 주 민족들 간의 분쟁이 주를 이루었다. 민족들 간의 분쟁이 많았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는 그 50년 역사 동안 급속도의 경제 성장과 근대화 및 민주화 개혁을 추진했다.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으로 해체되었다. 일부 영토는 이탈리아, 루마니아를 비롯한 이웃을 접한 국가들에게 할양되는 등 제1차 세계 대전 직후 유럽에서 가장 많은 영토 손실을 입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행정 구역 지도 오스트리아령 부분을 흔히 시스라이타니아 (, ‘라이타 강 안쪽(동쪽)’이라는 뜻)라고 부르는데 이는 그 영토 대부분이 라이타 강( 안쪽(동쪽)에 있었기 때문이다(동북부의 갈리치아도 오스트리아령). 이 지역은 오스트리아 본토 외에도 여러 딸린 영토로 이루어졌는데 1915년 이전에는 이를 아울러서 부르는 공식 명칭이 없었고 그때부터 제국 회의에 대표된 왕국들과 영토들 이란 공식 명칭을 사용했다. 제국 회의()는 시스라이타니아의 의회 역할을 하였다. 시스라이타니아와 마찬가지로 트란스라이타니아 (, ‘라이타 강 바깥쪽(서쪽)’이란 뜻), 즉 ‘헝가리령’ 부분은 헝가리 외에도 딸린 영토들이 많았고 공식적으로는 ‘신성 헝가리의 성 이슈트반 왕관령’이라 불렸다. 여기서 성 이슈트반은 헝가리 왕국의 첫 기독교도 왕으로 성인으로 추대받은 성 이슈트반 대왕()을 가리킨다. 가나다 순이다.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 (수도 리비우) 니더외스터라이히 대공국 (수도 빈) 달마티아 왕국 (수도 스플리트) 모라바 변경백국 (수도 브르노)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동통치령 (수도 사라예보) 보헤미아 왕국 (수도 프라하) 부코비나 공국 (수도 체르니우치) 슈타이어마르크 공국 (수도 그라츠) 오스트리아령 실레시아 (상실레시아 하실레시아 공국, 수도 트로파우) 오버외스터라이히 대공국 (수도 린츠) 잘츠부르크 공국 (수도 잘츠부르크) 케른텐 공국 (수도 클라겐푸르트) 오스트리아 연해 지대 (퀴스텐란트, 수도 트리에스테) 크라인 공국 (수도 류블랴나)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 (수도 자그레브) 티롤 백국 (수도 인스브루크) 포어아를베르크 제후백국 (수도 브레겐츠) 피우메와 주변 지구 헝가리 왕국 (수도 부다페스트) 시스라이타니아의 ‘왕국들과 영토들’ 보헤미아 왕국 부코비나 공국 케른텐 공국 크라인 공국 달마티아 왕국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 오스트리아 연해 지대 - 고리치아 그라디스카 후백국, 트리에스테 제국 자유 도시, 이스트라 변경백국 포함 니더외스터라이히(하오스트리아) 대공국 모라바 변경백국 잘츠부르크 공국 오스트리아령 실레시아 (상실레시아 하실레시아 공국) 슈타이어마르크 공국 티롤 백국 오버외스터라이히(상오스트리아) 대공국 포어아를베르크 제후백국 트란스라이타니아(성 이슈트반 왕관령)의 ‘영토들’ 헝가리 왕국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 피우메와 주변 지구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동통치령(1908년 합병)은 제국의 독자적인 부분을 형성하였으며 양쪽이 공동으로 통치하였다. 1907년부터 보통 선거제가 시행되었다. 이렇게 다민족국가였긴 했지만 정치적으로는 자유로웠으며 여러 정치적 위인이 등장했었다. 1848년 - 1916년 프란츠 요제프 1세 (1830-1916) * 1867년 이전에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제 1916년 - 1918년 카를 1세 (1887-1922) 징병제를 채택하여, 남자들은 병역의 의무를 수행해야 했다. 제1차 세계 대전 기간동안 병력의 90%가 손실을 입었으며(이 중 대부분이 포로), 이는 참전국 중 가장 많은 수치이다. 120만 명이 전사하였고, 360만 명이 부상을 당했다. 그당시 주력소총 만리허 m.95소총,권총류는 Frommer stop권총 과 Gasser1870리볼버,그리고 슈타이어M1912권총이 있었다. 오스트리아는 19세기까지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를 독점하며 오랜 세월 동안 독일어권 문화의 중심지였으나, 비스마르크가 소독일주의에 따라 오스트리아를 배제하고 통일독일제국을 수립함에 따라 독일어권 문화의 중심지 자리를 독일 제국에게 내줬다. 뿐만 아니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완전히 해체되어 여러 나라로 분열됨에 따라 제국의 문화적 유산 역시 국경에 따라 흩어지게 되었다. 기존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문화 라는 이름으로 묶여 있던 것들이 각국의 독립된 문화로 분리되어 나갔다. 이러한 이유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문화는 영국, 프랑스, 독일 등에 비해 상대적으로 축소 평가되어 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19세기 당시 유럽의 주요국가(유럽 대륙에서 면적은 2위, 인구는 3위)이자 열강으로서 1867년 ~1918년 존속하면서 수많은 문화적 유산을 남겼다. 이 시기에 활동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출신 사상가 중 가장 대표적인 사람은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비트겐슈타인이다.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을 창시함으로써, 비트겐슈타인은 논리 철학을 발전시킴으로써 후대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에드문트 후설도 오스트리아 출신이며, 신칸트학파에 대항하여 독일-오스트리아 학파를 세운 프란츠 브렌타노도 오스트리아 사람이다. 오스트리아 학파를 세운 카를 멩거, 오이겐 폰 뵘바베르크, 프리드리히 폰 비저가 활동했다. 건축가 오토 바그너가 대표적이다. 그는 유럽 근대 건축의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였다.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가 활동하였다. 입맞춤 등이 대표작인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가 이 나라 출신으로서, 빈 아르누보 운동을 이끌었다. 프란츠 카프카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프라하 출신이다. 오스트리아의 병리학자인 란트슈타이너에 의해 ABO식 혈액형과 Rh인자가 발견되었다. 그는 1930년에 노벨상을 수상하게 된다. + 민족 분포 민족 인구 비율 독일인헝가리인체코인폴란드인루테니아인루마니아인크로아티아인슬로바키아인세르비아인슬로베니아인이탈리아인 24%20%13%10%8%6%5%4%4%3%3% 체코인(보헤미아, 모라바, 오스트리아령 실레시아에서 다수 민족)·폴란드인·우크라이나인(갈리치아), 슬로베니아인(카르니올라, 카린티아, 스티리아 남부), 크로아티아인, 이탈리아인, 이스트라의 슬로베니아인은 각각 시스라이타니아의 정치에서 발언권을 확대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동시에 트란스라이타니아에서의 헝가리인(머저르인) 지배는 트란실바니아와 바나트 동부의 루마니아인, 오늘날의 슬로바키아 영토의 슬로바키아인,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과 달마티아 왕국(오늘날의 크로아티아 영토)·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보이보디나의 크로아티아인과 세르비아인의 도전을 받았다. 루마니아인들과 세르비아인들은 또 새로 세워진 독립국 루마니아(1859년-1878년)와 세르비아의 동족들과의 합병을 원하였다. 국교는 로마 가톨릭이었다. 종교 전체 오스트리아 제국 헝가리 왕국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 로마 가톨릭 76.6% 90.9% 61.8% 22.9% 개신교 8.9% 2.1% 19.0% 0% 동방정교회 8.7% 2.3% 14.3% 43.5% 유대교 4.4% 4.7% 4.9% 0.6% 이슬람교 1.3% 없음 없음 32.7%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국기로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기를 사용했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기를 국기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부터이며, 제국이 해체될 때까지 사용하였다. 해군기는 패턴이 현재의 국기와 같으나 가운데에 문장이 들어있는 기를 사용하였다. of the Habsburg Monarchy.svg|공식적인 국기 및 오스트리아의 기 of Hungary (1867-1918).svg|헝가리의 기 of Austria-Hungary 1869-1918.svg|상선기 23px Standard of Austria-Hungary (Before 1915).svg|황제기 Empress Standard (Before 1915).svg|황태후기 of the Archdukes of Austria (Before 1915).svg|오스트리아 대공(황태자)기 Standard of Austria-Hungary (1915-1918).svg|황제기 archducal standard (1915).svg|오스트리아 대공(황태자)기 of the Habsburg Monarchy.svg|육군기 c.k.regimentů.png|육군연대기 및 해군 항공대기 Generalfeldmarschall Österreich 1915.svg|육군 원수기 Großadmiral 1915.svg|대제독(원수)기 of an Austro-Hungarian Admiral (1915).svg|제독(대장)기 of an Austro-Hungarian Vice-Admiral (1915).svg|부제독(중장)기 of an Austro-Hungarian Rear Admiral (1915).svg|후방제독(소장)기 Kaisertum Österreich 1867 (Mittel).png|제국 전체의 국장 Kaisertum Österreich 1815 (Klein).png|오스트리아의 국장 Ungarische Länder 1867 (Mittel).png|헝가리의 국장 of Arms of Emperor Franz Joseph I.svg|황제의 문장 Kaiserin Elisabeth.png|황태후의 문장 transparency.png|제국 전체의 국장(대) Österreich-Ungarn 1916 (Klein).png|제국 전체의 국장(소) Österreichische Länder 1915 (Mittel).png|오스트리아의 국장(대) Coat of Arms of Austria.svg|오스트리아의 국장(소) 국장(대) Hungary Country History (1916).svg|헝가리의 국장(소) Kaisertum Österreich 1867 (Mittel).png|육군의 휘장 (1915년 이전) of arms of the Austro-Hungarian Navy.png|해군의 휘장 (1915년 이후) 흥선 대원군이 물러나기 전까지의 조선은 서양과의 수교를 강경하게 거부하였다. 그러나 1876년에 맺어진 강화도 조약으로 조선은 서양 열강들과 수교하게 되었다. 1892년 6월 23일에는 오스트리아와도 조오수호통상조약(朝奧修好通商條約)을 맺으면서 양국간의 정식 외교 관계가 시작되었다. 1897년 조선이 대한제국으로 바뀌면서 민영익이 주 오스트리아-헝가리 대사로 임명되었으나, 신병으로 부임하지 못하고 1900년 6월 이진범이 참사로 부임하였다. 이후 1905년 을사보호조약으로 대한제국이 외교권을 일본 제국에 빼앗기면서 양국간의 관계가 단절되었다. 독일(당시 프로이센)과는 같은 민족이지만 경쟁 관계였다. 그래서 프로이센과 전쟁을 했지만 지고 말았고, 1914년에 전쟁을 준비하던 독일과 삼국 동맹 (1882년)을 맺으며 관계가 회복됐다. 러시아와는 관계가 괜찮은 편이었지만, 1914년 독일이 러시아를 배신하면서 관계가 소원해졌다. 루마니아는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연합국에 가담하여 한때 전 국토가 동맹국에 유린당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연합국이 승리하여 오스트리아로부터 트란실바니아를 얻어냈다. 오스트리아 제국 제국에 관하여 분류:세르비아의 역사 분류:루마니아의 역사 분류:발칸반도의 옛 나라 분류:1918년 폐지
B 285 Bild-04413, KZ Auschwitz, Einfahrt.jpg|300px|섬네일|나치 독일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모습. 홀로코스트 (Holocaust, 그리스어 hólos(전체)+kaustós(타다)에서 유래) 또는 쇼아 (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아돌프 히틀러가 이끈 나치당이 독일 제국과 독일군 점령지 전반에 걸쳐 계획적으로 유태인과 슬라브족, 집시, 동성애자, 장애인, 정치범 등 약 1천1백만 명의 민간인과 전쟁포로를 학살한 사건을 의미한다. 사망자 중 유태인은 약 6백만여명으로, 그 당시 유럽에 거주하던 9백만 명의 유태인 중 약 2/3에 해당한다. 유태인 어린이 약 백만 명이 죽었으며, 여자 약 2백만 명과 남자 약 3백만 명이 죽은 것으로 파악된다. 유태인과 기타 피해자들은 독일 전역과 독일 점령지의 약 4만여개의 시설에 집단 수용, 구금되어 죽게 되었다. 이러한 박해와 학살은 단계적으로 진행되었다. 먼저, 1935년 제정된 뉘른베르크법을 비롯하여 유태인을 사회에서 배척하는 각종 법령들이 세계 대전 발발 전에 제정되었다. 또한 집단 수용소를 지은 후 수감자들을 각종 노역에 동원하였고, 이들은 대부분 과로사하거나 병사하였다. 동유럽 점령지의 경우, 특별행동부대라는 불법 무장 단체가 100만 명이 넘는 유태인과 정치사범을 총살했다고 알려졌다. 독일군은 유태인과 집시들을 게토에 수용한 후 화물 열차에 실어서 집단 학살 수용소로 이송했다. 화물 열차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 살아남은 이들은 차례대로 가스실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다. 이 학살에는 독일 관료제 전체가 관여했다고 알려져 있고, 한 홀로코스트 학자는 이 때문에 독일의 제3제국을 “학살국가”라고 칭하기도 하였다. 홀로코스트(Holocaust)는 그리스어 holókauston에서 유래하는데, 이는 고대 그리스에서 신에게 동물을(holos) 태워서(kaustos) 제물로 바치는 것을 의미한다. 196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홀로코스트는 대량 학살을 지칭하는 데 쓰였지만, 1960년대부터 학자들과 유명작가들에 의해 특별히 나치의 유태인 학살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쓰이기 시작하였다. 특히 1978년 방영되었던 TV 시리즈 홀로코스트 Holocaust는 이 개념을 대중적으로 널리 알리는 계기로 평가받는다. 성서 히브리어로 재앙을 뜻하는 쇼아(Shoah(שואה), Sho ah, Shoa라고도 표기됨)는 1940년대부터 유럽과 이스라엘에서 홀로코스트를 지칭하는 히브리어 단어가 되었다. 많은 유태인들은 홀로코스트보다 쇼아라는 표현을 더 선호하는데, 이는 종교학적으로 홀로코스트가 그리스 이교도의 문화에 어원을 두고 있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나치당은 홀로코스트를 순화하여 완곡법을 통해 “유대인 문제의 궁극적 해결”(영어 Final Solution to the Jewish Question, 독일어 Endlösung der Judenfrage)이라고 표현하였고, “궁극적 해결(Final Solution)"이라는 표현은 유태인 학살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널리 쓰였다. 또한 나치당은 살 가치가 없는 생명(lebensunwertes Leben)이라는 표현으로 유태인 학살을 정당화하고자 하였다. 2007년 국경(점선) 기준의 강제 수용소 위치 지도. 나치독일의 유대인 학살은 히틀러 한 사람만의 범죄가 아닌, 독일사회가 인종차별주의에 동조하는 구조악에 따른 범죄였다. 미국인이자 유태인 역사학자 마이클 베렌바움(Michael Berenbaum)은 자신의 저서에서 “국가(독일)의 정교한 관료제의 모든 부서가 학살 과정에 관여하였다. 독일교회와 내무부는 유태인들의 출생기록을 제공하였고, 우체국은 추방과 시민권 박탈 명령을 배달했으며, 재무부는 유태인의 재산을 몰수하였고, 독일 기업들은 유태인 노동자를 해고하고 유태인 주주들의 권리를 박탈하였다”고 썼다. 이와 더불어 대학교들은 유태인 지원자들을 거부하였고, 유태인 재학생들에게 학위를 수여하지 않았으며 유태인 교수들을 해고하였다. 교통부는 강제수용소로 이송할 기차편을 운영하였다. 독일 제약 회사들은 강제수용소에 수용된 사람들에게 생체실험을 행하였고, 기업들은 화장터 건설계약권을 따기 위해 경쟁하였다. 또한 데호막(Dehomag)(독일 IBM 지사)사의 천공카드를 이용하여 사망 수치를 매우 정밀하게 측정하였다. 수용자들은 집단 학살 수용소에 들어가면서 모든 개인 소지품을 반납하였고, 이는 다시 재분류되어 독일로 보내져 재활용되었다. 또한 독일 중앙은행은 비공개 계정을 통해 유대인학살 피해자들에게 갈취한 재산을 세탁하는 데 일조하였다. 베렌바움은 저서에서 이러한 궁극적 해결책이 “가해자들의 눈에는 ...독일의 가장 큰 업적이었다.” 라고 기술한다. 이스라엘 역사학자 자울 프리트랜더(Saul Friedländer)는 저서에서 “독일과 유럽 전역의 어떠한 사회적 집단, 종교 집단, 학술 기관 혹은 협회도 유태인과의 유대 관계를 인정하지 않았다”고 기술한다. 그는 반유태주의적 정책들이 일반적인 대항 세력(기업, 교회, 기타 이해관계자 등)의 별다른 반대 없이 펼쳐질 수 있었다는 점에서 홀로코스트가 독특한 현상이라고 주장한다. 다른 학살들의 경우, 학살 정책의 핵심은 영토와 자원의 통제 등 실리적 사항들이었다. 이에 대해 이스라엘 역사학자 예후다 바우어 (Yehuda Bauer)는 :“(홀로코스트의) 기본적 동기는 순수하게 이데올로기적이었는데,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아리아인이 지배해야 할 세상에서 국제적으로 유태인들이 반동을 일으킬 것이라는 나치의 허황된 상상에 기반을 두고 있다. 여태까지 알려진 어떠한 학살도 이렇게 전적으로 미신, 환상, 추상적이고 비합리적 이데올로기를 바탕으로 - 정작 실행은 매우 이성적이고 실리적인 수단을 통해 이루어졌다. - 하지 않는다” 고 주장한다. 또한 독일 역사학자 에버하르트 옉켈(Eberhard Jäckel)은 1986년 저서에서 홀로코스트의 한 가지 독특한 성격으로 :“이렇게 국가가 지도자의 권한으로 노인, 여자, 유아를 포함한 특정 인간 집단을 속전속결로 죽일 것을 공포하고, 이를 모든 국가 권력을 동원해 실행한 유례는 지금까지 없었다.” 는 것을 꼽았다. 학살은 독일 점령지역 전역(현재는 35개의 국가)에 걸쳐서 조직적으로 자행되었다. 가장 심했던 지역은 유럽 중부와 동부 지역이었다. 이 지역의 유태인 인구는 1939년에 700만 명이 넘었는데 약 500만 명이 학살당하였고, 특히 폴란드에서 300만 명, 소련에서 백만 명이 희생되었다. 또한 네덜란드, 프랑스, 벨기에, 유고슬라비아, 그리스 등지에서도 많은 수의 유태인이 죽었다. 반제 회의(Wannsee Protocol)에서는 나치당이 그들의 “궁극적 해결책(Final Solution)"을 영국과 아일랜드, 스위스, 터키, 스웨덴, 포르투갈, 스페인 등 중립 지역에서도 실행할 계획이었다고 밝혔다. 3대 혹은 4대에라도 유태인 조부가 있는 사람은 누구나 예외 없이 말살당하였다. 다른 학살의 경우 다른 종교로 개종하거나 다른 방법으로 동화되면 죽음을 면할 수 있었지만, 유럽 점령지역 유태인에게 이는 적용되지 않았다. 그들의 조부가 1871년 1월 18일 이전에 개종한 것이 아니라면, 모든 유태인 혈통의 사람들은 독일 통치 지역에서는 말살당할 운명이었다. 사람들을 조직적으로 집단으로 말살시키려는 목적으로 가스실을 구비한 수용소를 지은 것은 홀로코스트의 특징이자 역사적으로 유례가 없는 현상이다. 즉, 집단 인간살상이 유일한 목적인 장소는 이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었다. 이러한 수용소는 아우슈비츠(Auschwitz)를 비롯해 벨첵(Belzec), 헬름노(Chełmno), 야세노박(Jasenovac), 마자넥(Majdanek), 말리 트로스테네츠(Maly Trostenets)비보르(Sobibor), 트레블링카(Treblinka) 등에 세워졌다. 트레블링카 수용소에서 90만명, 벨첵에서 60만명, 그리고 소비보르에서 25만명이 희생되었다. 나치 학살의 특징적 요소 중 하나는 인간을 대상으로 의학실험을 자행했다는 점이다. 미국의 정치학자 라울 힐버그(Raul Hilberg)에 따르면 "독일 의사들은 다른 전문직에 비해 대단히 나치화되었다.“ 실험은 아우슈비츠를 비롯해 다샤우(Dachau), 부헨발트(Buchenwald), 라벤스브뤽(Ravensbrück), 작센하우젠(Sachsenhausen), 나츠바일러(Natzweiler) 등지의 수용소에서 이루어졌다. 이러한 생체 실험을 거행한 의사 중 가장 악명 높은 사람은 아우슈비츠에서 근무한 요제프 멩겔레(Josef Mengele) 박사였다. 멩겔레 박사는 여러 가지 실험을 하였는데, 이 중에는 실험대상자를 고압력 방 안에 집어넣는 실험, 얼음방 안에 집어넣는 실험, 약 임상 실험, 아이들의 눈에 염색약을 주사하여 눈 색깔을 바꾸는 실험 등이 포함되었고, 이외에도 수많은 잔인한 외과실험이 있었다. 실험으로부터 살아남은 자들은 거의 즉시 살해된 뒤 해부되었다. 멩겔레 박사의 실험기록은 현재 유실되었는데 이는 그가 기록을 보냈던 오트마 폰 페르슈어(Otmar von Verschuer) 박사가 기록들을 모두 파괴하였기 때문이다. 멩겔레 박사는 특히 집시아이들을 대상으로 많은 실험을 하였다. 그는 아이들에게 사탕과 장난감 등을 주면서 가스실로 데려갔다. 아이들은 그를 “멩겔레 삼촌(Onkel Mengele)"라고 불렀다고 한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50쌍의 집시 쌍둥이를 돌보았던 한 유태인 수감자는 ”한 쌍의 쌍둥이가 특별히 기억에 남는다. 4살 정도 된 구이도(Guido)와 이나(Ina)이다. 어느 날, 멩겔레는 그들을 데리고 갔고, 그들이 돌아왔을 때는 끔찍한 상태였다. 그들은 샴쌍둥이처럼 등이 꿰매져 있는 상태였다. 상처는 감염되었고 진물이 나왔다. 그들은 하루 종일 비명을 질렀다. 그것을 본 그들의 부모 - 엄마 이름이 스텔라였다 - 는 어딘가에서 모르핀을 구해왔고 아이들을 고통으로부터 해방시켜주기 위해 아이들을 죽이고 말았다"고 회상했다. 예후다 바우어(Yehuda Bauer)와 루시 다비도비치(Lucy Dawidowicz)에 따르면 중세시대부터 독일 사회와 문화는 반유대주의로 뒤덮여 왔다. 그리고 이것은 중세 대학살과 나치 수용소 간의 이데올로기적 직접 연결이 되었다. 19세기 후반 독일과 오스트리아, 헝가리 등에 휴스턴 스튜어트 체임벌린과 폴 드 라가르드와 같은 사상가에 의해 개발 된 민족주의 운동이 출현하였다. 이 운동은 의과학적, 생물학적 기반의 인종 차별주의인데, 이것은 유대인을 아리안 족이 세계를 지배하기 위해 반드시 사투해야 하는 인종으로 여겼다. 민족주의적 반유대주의는 기독교적 반유대주의로부터 나왔지만, 유대인을 종교라기보다는 인종으로 여겼다는 점이 달랐다. 1895년, 옛 독일제국의 의회 이전에 행해진 연설에서 민족주의 지도자 헤르만 알바르트(Hermann Ahlwardt)는 유대인을 “육식 동물”과 “콜레라균”이라 칭하며 독일국민의 이익을 위해 처형해야 한다고 말했다. 1912년 발간 된 그의 베스트셀러 "내가 황제라면 Wenn ich der Kaiser wäre"에서 하인리히 그룹의 민족주의 그룹 지도자 알 도이 버밴은 모든 독일 유대인들에게서 독일어 시민권을 박탈하고 외국인 법에 따라 이들의 권리를 축소시킬 것을 촉구했다. 이 그룹은 유대인들에게 소유지를 갖거나 공직에 진출하거나 혹은 언론에 참여하거나 은행업무 그리고 자유로운 직업활동 등이 모두 금지되어 독일의 모든 삶에서 제외되어야 할 것을 촉구했다. 이 그룹은 1871년 독일 제국이 선포된 이래로 유대인이였던 적이 있거나 적어도 조부모님이 유대인이었던 모든 사람을 유대인으로 명명하였다. 독일제국 기간 민족주의와 의과학적 인종차별주의는 독일에서 매우 만연했다. 특히 교육을 받은 높은 계층의 사람들이 이 인간 불평등적인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비록 민족주의 정당이 1912년에 독일 제국의회(Reichstag) 선거에서 패배하였지만 반유대주의는 주요 정당들의 기반에 자리잡았다.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 정당 (Nazi Party; NSDAP)은 민족주의 운동에서 발전하여 1920년에 설립되었으며 반유대주의를 채택하였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 까지 독일복지의 발전과 함께 나타난 엄청난 과학적, 기술적 변화는 모든 사회문제의 해결이 멀지 않았다는 유토피아적 희망을 만연하게 했다. 그와 동시에 몇몇 사람들은 다른 이들보다 생물학적으로 더 가치 있다고 여기는 세계관을 가진 인종차별주의자, 사회진화론 주장자, 우생학자들도 많이 있었다. 역사학자 데틀레프 포이케르트(Detlev Peukert)는 반유대주의가 유대인 대학살이 일어나게 된 유일한 이유가 아니라 굉장히 많은 작은 흐름이 큰 흐름으로 이어졌고 이것이 대학살을 일으키게 된 축적된 과격화의 산물이라고 말했다. 제 1차 세계대전 이후에 전전의 낙관적인 분위기는 독일 관료들이 이전에 생각했던 것보다 사회적문제가 더 잘 해결될 수 없음을 알고 환멸로 변했다. 점차 생물학적으로 맞지 않는 삶을 구제하는 것보다 생물학적으로 알맞은 삶들을 구제하는 것에 더욱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 경제 대공황의 경제적인 압박들은 독일 의학계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고칠 수 없는 사람들을 안락사 시키는 것이 고칠 수 있는 사람들을 위해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는 주장을 옹호하게 했다. 1933년에 나치는 힘을 얻게 되었고 그 때쯤 독일에는 이미 인종적으로 가치 있는 사람들을 구하는 반면, 인종적으로 가치 없는 이들을 사회에서 없애자는 사회정책이 존재했다. 히틀러는 유대인에 대한 그의 증오를 공공연하게 드러냈다. 그의 책 "나의 투쟁 Mein Kampf"에서 그는 유대인들을 독일의 정치적, 교육적, 문화적 사회에서 배제시키고자 하는 그의 의도를 경고했다. 그가 유대인들을 몰살시키고자 했다고 쓰지는 않았지만 사적으로는 매우 분명하게 얘기 되었다. 이미 1922년에 전해진 바에 따르면 그는 그 당시 저널리스트였던 마요르 요제프 헬(Major Joseph Hell)에게 말하기를 :"내가 정말 힘 있는 사람이 되면, 나는 제일 먼저 유대인을 몰살시킬 것이다. 내가 이것을 하게 될만큼 힘이 생기자마자 나는 교통 여건이 허락하는 한 뮌헨의 마리엔플레츠에 교수대를 차례로 지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 유대인들은 무차별적으로 교수형을 시킬 것이고 위생에 문제가 없을 만큼 오랜 시간, 악취가 진동할 때까지 그들을 내버려둘 것이다. 그들이 교수대에서 내려오자 마자 다음 유대인이 교수형에 처해지고 뮌헨에 유대인이 없어질 때까지 교수형을 행할 것이다. 다른 도시들은 이 관행을 따라 독일 전체의 유대인을 모두 몰살시킬 것이다. " 보수적인 반유대주의에 견주어, 독일의 가톨릭에 보다 조용한 반유대주의가 존재했는데 이는 학대에 반대하는 가톨릭 신자들을 없애는데 영향력을 미쳤다. 따라서 학대에 반대하는 유명한 가톨릭의 시위는 유대인 대학살을 반대하는 시위와는 동반되지 않았다. 독일(그리고 다른 어디든)의 가장 독설에 찬 세 번째 반유대주의는 민족주의 반유대주의 혹은 인종 차별주의라 불리는데, 이는 맨 처음으로 폭력을 정당화했다. 어떻게든 1938년이나 1939년에 히틀러가 독일 유대인들을 없애기 위해 강제로 이주하는 것을 알아차렸어야 했다. 그때는 아직 유대인을 죽이는 어떠한 행위도 일어나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것은 나치나 다른 곳에서 폭력적인 방식을 사용하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거나 유대인에 반하고 유대인의 상점에 침투하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전쟁의 두 번째 해까지는 어떠한 공식적인 학살도 일어나지 않았었다. 이것은 ‘예약(reservation) 프로젝트가 실패한 이후 진행되었다. 그렇다고 이것들이 치명적인 요소를 포함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나치 지도자는 민족공동체(Volksgemeinschaft)의 존재를 공표했다. 나치정책은 사람들을 두 가지 종류로 나누었는데 민족 공동체에 속하는 같은 국민과 그에 속하지 않는 이방인이다. 유태인 탄압에 대한 나치의 정책은 사람들을 세 종류의 적으로 나누었다. 먼저 혈통으로 인해 인종적인 적으로 간주된 유대인과 집시이다. 막스주의자, 진보주의자, 기독교 신자, 반동자와 같은 정치적인 적과 도덕적인 적으로는 동성애자, 일을 하기 싫어하는 사람 그리고 상습범들이 있었다. 이들 모두는 다루기 힘든 국가적인 적으로 간주되었다. 마지막 두 그룹은 재교육을 위해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는데, 이의 목적은 그들을 민족공동체로 흡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도덕적인 적으로 간주된 몇몇 사람들은 불임시술을 받아야 했고, 그들은 유전적으로 하등한 사람으로 여겨졌다. 정의에 의해 인종적인 적으로 여겨지는 유대인들은 절대 민족공동체에 속할 수 없었다. 그들은 철저히 사회로부터 배제되었다. 독일 역사학자 데틀레프 포이케르트가 말하기를 국가 사회주의자들의 목표는 이상적인 민족공동체를 만드는 것이었고, 완전한 경찰의 감시 하에 모든 이단적인 행동과 그러한 모든 시도를 테러로 간주하는 것이었다. 1933년 3월 독일의회 선거에서, 나치는 반대파에 폭력을 동반한 캠페인을 더욱 심화시켰다. 지방 정부 당국의 협조에 힘입어 이들은 자신들에게 반대하는 이들을 사법절차에 의하지 않고 구속시키기 위한 강제 수용소를 설립한다. 1933년 3월, 다하우에 가장 먼저 강제수용소가 설립되었다. 이 수용소의 초기 목적은 민족 공동체에 따르지 않는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심어 그들을 제지하는 것이었다. 1930년대에 유대인의 법적, 경제적, 사회적 권리는 꾸준히 제한되었다. 1933년 4월 1일 첫 국가적 유대주의 캠페인인 유대인 기업의 불매운동이 일어났다. 처음에는 1 주를 계획하였으나, 지지자가 부족하여 하루 만에 끝이 나버렸다. 1933 년, 일련의 법률이 입법되었는데, 이 법률은 핵심분야에서 유대인을 제외하는 것이었다 전문 공무 회복에 관한 법, 제 3제국에서 통과된 첫 번째 반유대주의 법, 의사나 법률가가 되는 것, 그리고 농장을 소유하거나 농업에 종사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 유대인 변호사는 자격을 박탈당하였는데, 특히 드레스덴에서 유대인 변호사와 판사들은 그들의 사무실과 법정 밖으로 끌려나와 몰매를 맞았다. 히틀러는 공무원들 중 제1차 세계대전 참전용사이거나 그의 아버지나 아들이 참전했다면 자격을 박탈하지 않고 계속 사무실에 남아 일 할 수 있도록 했다. 히틀러는 그러나 1937년 그 면제제도를 취소했다. 유대인들은 학교와 대학 (학교의 과밀을 방지하기 위한 법)에서 제외되었고, 기자협회에서도 제외되었으며 신문사를 소유하거나 신문사의 편집장이 되는 것도 금지되었다. 1933년 7월, 유전적으로 병이 있는 자손을 낳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열등한 사람을 강제적으로 불임화 하는 법이 통과되었다. 이러한 우생정책은 200여개가 넘는 유전건강 법원이 설립되게 했고, 나치 통치 하에 400,000명이 넘는 불임시술을 받게 되었다. 1935년, 히틀러는 뉘른베르크법을 소개했는데, 이 법은 아리안이 유대인과 성적관계를 맺거나 결혼을 하는 것을 금지시키는 것이다. 비록 이 법이 나중에 집시와 흑인 그리고 그들의 사생아 또한 포함하게 되었지만 (독일 혈통과 독일 명예를 지키는 법) 이 법으로 인하여 유대인들은 그들의 시민권을 박탈당했다. 이와 동시에 나치는 이러한 유대인 제한법을 정당화하기 위해 인종오염 개념을 널리 알리는 과장된 선전을 펼쳤다. 히틀러는 “혈통 법”을 문제에 대한 합법적인 규제가 미래에 일어나게 될 실패를 통해 법이 국가 사회주의 정당의 마지막 해결책이 될 것임을 말했다. 히틀러는 만약 유대인 문제가 이와 같은 법들로 해결되지 않는다면, 법에 의한 최후의 해결책을 제시하기 위해 국가사회주의 당이 이것을 맡아야 한다고 말했다. “최후의 해결책” 또는 “궁극적 해결”은 나치에게 유대인 몰살정책의 완곡한 표현이였다. 1939년 1월, 그는 공개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만약 유럽 ​​내부와 외부의 국제금융 유대인이 또 다른 세계 전쟁에 빠지게 하는데 성공한다면, 그 결과는 세계의 적화가 아니라 유대인의 승리를 말하므로 유럽에서 유대인들은 몰살되어야 한다." 연설 중 이 장면은 유럽에서 유대인을 몰살하기 위한 합리적인 근거와 청사진을 제공하기 위해 1940년 나치 선전영화인 영원한 유대인 (Der ewige Jude)에 사용되었다. 유대인들 중 지성인들이 가장 먼저 고향을 떠났다. 철학자 월터 벤자민은 1933년 3월 18일 파리로 떠났다. 소설가 레옹 페츠바그너는 스위스로 떠났다. 지휘자 브루노 월터는 그가 베를린 필하모닉 홀에서 콘서트를 하면 그곳이 불타게 될 것이라는 얘기를 듣고 떠났다 프랭크 펄터는 4월 6일 월터와 그의 동료 지휘자 오토 클램퍼러가 "예술적 유대 청산인" 에 의해 불러 일으켜진 독일 대중의 분위기를 정부가 보호해 줄 수 없었으므로 떠나야 했다. 알버트 아인슈타인은 1933년 1월 30일 미국에 방문중이었다. 그는 벨기에의 오스텐더로 돌아왔고, 다시는 독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는 빌헬름 황제 협회와 프로이센 학술회에서 쫓겨났으며, 그의 시민권은 박탈되었다. 1938년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합병했을 때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그의 가족은 비엔나에서 영국으로 도망가야 했다. 예술 프로이센 학술회의 명예로운 회장직을 맡은 맥스 리버만은 회장직을 박탈당하고 그의 동료 중 그 누구에게도 위로의 말을 들을 수 없었으며 2년 후 죽을 때까지 그는 철저히 외면당했다. 1943년 경찰이 자리를 보전하고 있는 85세의 미망인을 강제 추방시키기 위해 들 것을 들고 도착했을 때, 그녀는 들 것에 실려 나가기보다 바르비투르 과다복용으로 자살하는 것을 택했다. 1938년 11월 7일 미성년자 유대인 헤르쉘 그륀스판(Herschel Grünspan)은 파리에서 독일 나치의 외교관 에른스트 봄 레이스를 암살했다. 이 사건은 나치에 의해 유대인에 대한 법적 탄압을 넘어서는 대규모의 물리적 폭력구실로 사용되었다. 나치가 주장한 자발적인 공공의 분노 는 사실 나치당에 의해 집단 대학살을 선동하는 하나의 흐름이였으며 이는 SA 멤버와 오스트리아, 주데텐 지방을 포함한 독일 나치와 연관된 사람들에 의해 행해졌다. 이러한 집단 학살은 "깨진 유리의 밤" (Reichskristallnacht (문자 그대로“ 크리스탈 밤”) 혹은 11월 집단학살로 알려져 있다. 유대인들은 공격당했고, 유대인들의 공공재는 파손되었다. 7,000개가 넘는 유대인 상점과 1,200채가 넘은 유대교회당은 피해를 입거나 파괴되었다. 공식적으로 알려진 숫자인 91명의 사상자보다 더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을 것으로 예상된다. 약 30,000명이 다하우(Dachau), 작센하우젠(Sachsenhausen), 부헨발트(Buchenwald), 오라니부르크(Oranieburg), 등에 있는 강제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그들은 몇 주간 수감되었는데 곧 그들이 다른 곳으로 이주될 것이라 확실하거나 그들의 재산을 나치에 양도할 경우 풀려날 수도 있었다. 독일 유대인들은 대학살을 피하기 위해 물질적으로 보상하기도 했는데, 이는 수 백, 수 천 마르크였으며 이 뿐만 아니라 “속죄 세금”으로 10억 마르크가 넘는 돈을 지불해야 했다. 이러한 집단학살 이후 독일로부터 유대인들의 이주는 가속화되었고, 독일에서 공개적인 유대인의 삶은 끝장이 났다. 전쟁 이전 나치는 유럽으로부터 독일 유대인을 대량 강제추방하는 것을 고심하였다. 1938~1939년 히틀러는 샤흐트 계획에 동의했고 사흐트 계획이 필요 없어지질 때까지 수 천명의 유대인 강제추방이 이루어졌다. 이것은 히틀러가 그 때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던 대학살에 대한 관심을 보여준다. 이전에 독일의 식민지였던 탄자니아, 사우스 웨스트 아프리카 등에서 자신들의 나라를 되찾고자 했던 계획은 히틀러에 의해 중단되었다. 그는 세상 어느 곳도 용감한 독일인의 피가 흘려지지 않은 곳이 없으며 그들의 식민지는 독일의 가장 악질적인 적을 위한 거주지로 사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른 식민지 지배국가 (주로 영국과 프랑스 등)에서 쫓겨난 유대인을 그들의 식민지에 살 수 있도록 하는 외교적인 노력 또한 행해졌다. 재정착이 허락된 지역으로는 영국의 팔레스타인, 이탈리아의 에디오피아, 영국의 로데시아, 프랑스의 마다가스카르, 호주가 포함되었다. 이 지역들 중 마다가스카르는 가장 심각하게 거론되었다. 하이드리히는 마다가스카르 계획을 “지역적인 최후의 해결책”이라 불렀다. 마다가스카르는 외딴 곳에 위치했으며, 생존하기에 악조건을 갖추어 죽음을 재촉했다. 1938년 히틀러에 의해 승인된 재정착 계획은 아돌프 이치만의 사무실에서 시작되었으며, 1941년에 시작된 유대인 대량학살이 시작될 때 폐기되었다. 이 계획은 홀로코스트를 향한 중요한 심리적인 단계로 여겨졌다. 1942년 2월 10일 이 마다가스카스 계획이 중단되었음을 공표했다. 독일 외무부는 소비에트 연방과의 전쟁으로 인해 유대인을 동쪽으로 보냈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나치 관료들은 또한 유럽의 유대인을 시베리아로 이주하기 위한 계획도 세웠다. 오직 팔레스타인만이 나치의 재정착 계획에 대한 괄목할만한 결과를 냈기 때문에 독일의 시온주의 연방, 나치정부, 하바라 협정이 이 조약을 시작했다. 이 조약은 60,000 명의 독일 유대인을 이주시켰고, 제 2차 세계대전 발발 까지 독일에서 팔레스타인에 1억 달러를 수송했다. 제 3제국의 시작과 함께 강제수용소가 설립되었고, 처음부터 감금을 위한 곳으로 사용되었다. 강제수용소에서 50%에 육박하는 사망률을 보이긴 했지만, 그곳은 사람을 죽이기 위한 곳으로 설계 된 것이 아니었다. (1942년 나치 지배하의 폴란드에 오직 많은 학살만을 위한 6개의 대규모 집단 처형장이 세워졌다.) 1939년 이후, 많은 수용소가 유대인과 전쟁포로들이 처형당하거나, 강제 노역을 하는 장소로 변했다. 15,000개의 수용소와 보조 수용소가 독일에 세워졌으며, 대부분 동부 유럽에 위치했다. 독일 내에도 많은 유대인과 폴란드 지식인, 공산당원 혹은 로마와 신티 인구를 수용하기 위한 새로운 수용소가 많이 세워졌다. 수감자들을 화물차에 태워 이송하는 일은 많은 이들이 도착지에 다다르기도 전에 죽어버려 굉장히 공포스러운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노역을 통한 학살은 구조적인 학살정책이었다. 수용소의 수감자는 문자 그대로 죽을 때까지 일을 하거나, 체력적으로 일을 할 수 없게 되면 독가스에 의해 죽거나 총에 맞아 죽었다. 노역은 전쟁용품 생산에 사용되었다. 허락 하에 몇몇의 수용소는 수감자의 몸에 수감번호를 새겼다. 이것은 12시간에서 14시간을 교대로 일을 하게 하는데 편리했다. 노동 전후로 점호가 있었는데 이는 때때로 몇 시간 동안 이루어졌다. 폴란드 침공이후, 나치는 편입된 영토에 유대인이 제한된 게토와 일반정부를 설립했다. 유대인들은 유럽으로부터 추방될 때까지, 이것들은 처음에는 일시적으로 보였다. 하지만 밝혀진 것처럼, 그러한 추방은 일어나지 않았고 게토의 주민들은 대신에 학살수용소로 보내졌다. 독일인들은 각각의 게토에 유대인들의 공동체 지도자들로 구성된 유대인 공동체(Judenrat)에 의해 운영돼야 된다고 지시했고 그러한 위원회의 설립을 첫 번째 주문은 하이드리히(Heydrich)에서 특수행동부대(Einsatzgruppen)의 상부에 1939년 9월 29일 편지에 포함되었다. 게토는 다른 시간들과 다른 이유들로 형성되었고 외부세계로부터 베제되었다. 그 위원회들은 게토를 매일 운영해야 하는 책임이 있었고, 그것은 살 곳, 의료, 난방, 물, 음식의 배급문제들을 포함했다. 또한 독일인들은 위원회에 몰수시작, 강제 노동구성, 마지막으로 학살 수용소로의 추방을 용이하게 하게 하도록 하였다. 그 운영회의 기본적전략은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었고, 나치정권 또는 그 대행자이 주로 협력하였다. 점점 더 끔찍한 협정 뇌물수수와 청원을 받아들였다. 전반적으로 만연한 잔인함과 죽음을 피하기 위해 사람들은 위원회에 언어, 돈, 노동력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들의 목숨을 제공했다. 각각의 유대인 공동체의 궁극적인 임무는 살해되어야 할 추방자들의 이름을 수집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비록 그 주된 패턴은 이 마지막 과제를 준수하는 것이었지만, 몇몇 위원회 지도자들은 사형 이상의 범죄를 저지르지 않은 어떤 한 사람도 넘겨지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리스트 작성을 거부한 리비우(Lviv) 그리고 요제프 파르나스(Joseph Parnas) 같은 지도자들은 총살되었다. 1942년 10월 14일에 부아로짜(Buaroza)의 전체 위원회는 추방을 협력하는 대신에 자살했다. 1942년7월 23일에 바르샤바에 아담 체르니아코프(Adam Czerniakow)는 마지막으로 게토가 청산되어 그가 다이상 무엇인가를 할 수 없을 때 자살했다. 차임 룸코프스키(Chaim Rumkowski)와 같이 독재자에게 헌신하게 된 사람들은 그들의 임무는 살 수 있는 유대인들은 살리기 위해 다른 유대인들은 희생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게토의 박해와 살인을 용이하게 하는 위원회는 독일에서도 유지되었다. 한 사무실은 유대인 위원회의 권위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지지받고 강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다른 사무실은 유대인 위원회의 지시를 복종하지 않는 유대인은 파괴자로 다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대인 전투기관이 위원회의 권위를 떨어뜨린 후 바르샤바 게토에서 발생한 것과 같은 그러한 협력관계가 무너졌을 때 독일인들은 통제를 잃게 됐다. 바르샤바 게토는 380,000명의 인원으로 가장 컸고 우치 게토는 160,000명의 인원으로 2번째로 컸다. 요컨대 느리고 수동적인 살인자인 미하엘 베렌바움(Michael Berenbaum)에 따르면 그곳은 거대하게 북적이는 감옥이었다. 바르샤바 게토는 폴란드 수도인구의 30%를 포함했지만 그 곳은 폴란드 수도지역의 2.4% 만을 차지했고 한 방당 평균 9.2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1940년과 1942년 사이에, 기아와 질병 특히 장티푸스 때문에 수십만명의 사람들이 죽었다. 바르샤바 게토의 43,000명 이상의 거주자들은 1941년에 그곳에서 죽었고 테레지엔슈타트(Theresienstadt)에서 10분의 1이상이 죽었으며 1942년에는 그 거주자들의 반 이상이 죽었다. :"독일인들은 경찰이 되었고 그들은 집들을 두드리고 다니기 시작했다. “나가, 나가, 나가, 유대인은 나가(Raus, raus, raus, Juden raus)”한 아이가 울기 시작했다. 다른 아이도 울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 엄마가 그녀의 손에 오줌을 누어서 그 아이를 조용히 시키기 위해 음료로 주었다. 그 경찰이 갔을때 나는 그 엄마들에게 나오라고 했다. 그런데 한 아이는 두려움 때문에 죽어있었고, 다른 엄마는 그녀 자신의 아이를 기절시켜 죽였었다." ::- 아브라함 말릭(Abraham Malik)이 코브노(Kovno) 게토에서 경험을 저술한 것에서. 히틀러가 1942년 7월 19일에 추방의 시작을 지시했고 그로부터 3일 후 7월 22일에 바르샤바 게토의 추방이 시작되었다. 9월 12일까지 300,000명에 사람들이 바르샤바로부터 트레블링카(Treblinka) 학살수용소까지 화물기차로 수송되었다. 많은 다른 게토들도 완전히 인구가 줄어들었다. 첫 번째 빈민가 폭동은 남동 폴란드 라크바(Łachwa)의 작은 마을에서 1942년 9월 발생했다. 1943년 무장저항 시도는 바르샤바 게토봉기와 비알리스토크(Białystok) 빈민가 반란과 같이 큰 게토들에 의해 발생했지만 모든 경우 그들은 압도적인 나치 군대에 의해 실패했고 나머지 유대인들은 살해되거나 죽음의 수용소로 추방되었다. 지역의 인구에 의한 수많은 치명적인 학살은 제 2차 세계대전 나치의 격려에 의해 일부는 자발적으로 발생했다. 이것은 1941년 6월 30일 루마니아 이아시의 학살을 포함하는데 그 학살은 14,000 유대인이 루마니아 주민과 경찰에 의해 사망하는 사건이다. 또한 1941년 7월의 실크 프로그램(Jedwabne pogrom)을 포함하는데 이는 나치 질서경찰(Nazi Ordnungspolizei)가 있는 데서 300명 유대인이 불 난 헛간에 잠기게 되는 사건이다. 독일인에 의해 같은 곳에서 40명의 유대인 남성이 처형되었다. 이것은 발굴에 참여한 고고학 및 인류학 팀에 의해 조사된 두 개의 무덤에 있는 피해자의 숫자로 확인되었고 국립추모연구소에 의해 2000년에서 2003년 사이에 실시한 공식조사로 최종 발견되었다. 소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음을 반증한 것이다. 1939년 12월의 시작과 함께 나치는 가스를 이용한 다중 살인의 새로운 방법을 소개하였다. 첫째로, 가스 실린더를 장착한 실험용 가스차(gas van)와 밀폐된 트렁크 칸막이는 T-4 작전(나치의 인종정책 일환으로 안락사를 이용한 장애인 학살 계획)의 일환으로써 포메라니아, 동프로이센 그리고 점령된 폴란드의 요양원에 있는 정신 질환자들을 죽이는데 사용되었다. 작센하우젠 수용소에선 100명까지 수용할 수 있는 더 큰 가스차가 실린더 대신 엔진의 배기가스를 이용하면서 1941년 11월부터 사용되었다. 이 가스차들은 1941년 12월 헤움노 집단 수용소(Chełmno extermination camp)에 소개되었고 그것 중 15대는 점령된 소련에서 대량살상조직인 아인자츠그루펜에 의해 사용되었다. 이 가스차는 국가보안본부(SS-Reichssicherheitshauptamt)의 감독 아래에서 개발되었고 운영되었다. 또한 대략 50만명의 사람들을 죽이는데 사용되었는데 그 사람들은 주로 유대인이었지만 집시와 다른 나라 사람들도 포함되었다. 가스차는 신중하게 감독받았고 한달 동안의 관찰 후의 한 기록에서는 “기계에 어떠한 결함도 나타나지 않고 세 대의 가스차를 이용하여 9만7천번이 진행되었다” 라고 쓰여져 있다. 새로운 다중 살인 기법의 필요성은 군사정부의 통치자인 한스 프랑크(Hans Frank)에 의해서도 언급되었다. 한스 프랑크는 다수의 사람들을 간단히 쏘아 죽일 수는 없다고 말했다. “우리는 그들을 제거할 방법으로 설계된 단계를 밟아야 할 것입니다.”이것은 나치친위대(SS)가 독성 가스를 이용하여 거대한 규모의 살인이 동반된 실험을 하게 만든 문제였다. 크리스티안 비르트(Christian Wirth)는 가스방을 발명한 사람으로 생각된다. ===반제 회의(Wannsee Conference)와 최종해결법(Final Solution)(1942-1945)=== 반제 회의는 반제의 베를린 교외에서 1942년 1월 20일에 라인 하르트 하이드리히에 의해서 소집되었고 유대인 문제 와 관련된 정책에 책임이 있는 국가 사무총장, 고위 관리, 파티의 리더, SS 장교와 정부 부처의 다른 지도자의 숫자를 포함 약 15명의 나치 지도자들이 참석했다. 정책 회의의 초기 목적은 유럽안에서의 유대인 문제에 대한 전반적인 해결방법에 대한 계획을 논의하는 것이었다. 하이드리히는 히틀러의 명령에 의해 유럽내 유대인들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다양한 점령 지역에서 대량 살인을 계획했다. 특히 장관급 관료들이 이 정책을 위한 지식과 책임을 모두 공유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아이히만에 의해 그려진 분의 사본은 살아있다, 하지만 하이드리히의 지시에, 그것들은 "완곡 어법 언어"로서 쓰여졌다. 따라서 회의에서 사용 된 정확한 단어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하이드리히는 동쪽에 유대인 철수 정책에 의해 추방을 나타내는 회의는 대체되었다고 연설했다. 이는 독일에 의해서 통제 되는 지역뿐만 아니라 영국과 미국을 포함하는 나머지 나라들에 의해 통제되는 지역에 사는 11만 유대인들을 포함하는 임시적인 해결방법에서 궁극적인 해결방법까지 될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해결방법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하이드리히는 또한 최종 해결책 의 문구에 의해서 이해되도록 분명히 했다.” 최종해결책은 ‘유대인들이 강제 노동과 대량 학살의 조합에 의해 전멸할 것이다.’이다. 관계자는이 200만은 여전히 ​​소련의 통제하에 있었지만 230만 유대인은 일반정부, 850,000은 헝가리에, 다른 점령 국가에서 110만, USSR에서 안에 오백만까지 있었다고 들었다 - 총 약 650만. 이들은 모두 거의 모두가 한번에 가스로 죽을 폴란드에 있는 학살 수용소 (Vernichtungslager)로 기차에 의해 수송 될 것이다.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와 같은 일부 캠프에서는 일에 적합한 사람들은 잠시동안 살 수 있지만, 결국 모두 살해 될 것이다. 괴링의 대표, 박사 에리히 노이만은 산업 노동자들의 몇 가지 클래스에 대한 제한된 면제를 받았다. 그의 1983 책, 대중의 의견과 제 3제국의 정치적 반대에서, 이안 커쇼는 나치 기간 동안 바이에른에서 Alltagsgeschichte (일상 생활의 역사)를 조사했다. 대부분의 바이에른인의 태도를 묘사하면서, 커쇼는 가장 일반적인 관점은 유대인들에게 어떠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한 무관심이었다고 주장했다. 커쇼는 대부분의 바이에른인이 쇼아에 대해 막연하게 알고 있으나 “유대인 문제에 대한 마지막 해결책에” 관한 전챙에 대해서는 상당한 걱정을 하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커쇼는 "아우슈비츠로 가는 길이 증오에 의해 만들어졌고 무관심에 의해 길이 닦였다"고 비유했다. 대부분의 바바리아, 그리고 함축적으로 대부분의 독일인은, 쇼아에 무관심 있다는 커쇼의 평가는 이스라엘 역사학자 오토 도브 Kulka, 나치 독일의 여론에 대한 전문가 및 캐나다 역사학자 마이클 케이타 비판에 직면했다. 케이타는 커쇼가 반유대주의의 인기 정도를 경시했다고 주장했고, 나치 독일의 "자연스러운" 반유대주의가 행해지고 있다고 인정할 지라도 이러한 작업은 독일의 상당한 수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위로부터 단독으로 오는 것으로서 나치의 과도한 반유대주의를 보는 것은 옳지 않다. Kulka는 대부분의 독일인은 커쇼가 그들을 대중의견과 정치적 반대에서 묘사한 것보다 더 반유대적이라고 주장했고 오히려 "무관심", "수동적인 공모"가 독일인들의 반응을 묘사하는 더 나은 용어가 될 수 있다. 나치정권에 반대 하는 유대인들 또는 독일인들에 관한 관점으로만 연구를 집중 시키면, 나치 독일의 역사 학자 크리스토프 디퍼가 그의 1983년 에세이 "Der Deutsche Widerstand und die Juden" (영어로 번역하면 “독일인의 정황과 유대인들” Yad Vashem의 저서 16권, 1984)에서 반 나치 민족 보수주의자들의 대부분은 반유대주의라고 주장했다. 디퍼는 민족 보수주의자들의 대부분이 “유대인의 관료적인 것과 의사 법적 박탈이 1938년에 여전히 받아들여질때까지 행해졌다고” 썼다. 디퍼는 어떠한 독일 저항자들도 홀로코스트를 지지했다고 쓴 적이 없었지만 그는 또한 민족 보수주의자들은 히틀러에 의해 그들의 계획이 엎어지고 나서 유대인들의 시민권을 회복시킬 의도는 아니었다고 말했다. 디퍼가 정권의 상대방에 의해 세워진 관점에서 보면 독일인들의 대부분이 유대인 문제는 존재했고 해결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다고 주장했다. 2012년에 실시한 연구에서 베를린에 다양한 기능의 3,000개의 수용소가 있고 또 다른 1,300개가 함부르크에 있다고 이야기했고 그것의 공동 연구원은 독일 인구는 그러한 유행을 고려하면 박해에 대해 알고있는 것을 피할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로버트 Gellately는 대부분의 독일 민간인이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고 있다고 주장했다. Gellately에 따르면, 정부는 언론과 민간인을 통한 음모는 가스 챔버의 사용을 제외한 모든 측면에 대해 인식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반면에, 어떤 역사적 증거는 홀로 코스트 희생자의 대부분은, 이전의 강제 수용소에 추방당했고, 그들을 기다려온 운명을 알지도 못했고 거부 할 수도 없었다. 그들은 정직하게 그들이 다시 정착 할 수 있다고 믿었다. 독일의 역사학자 Hans Buchheim이 프랑크푸르트의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기소 측 전문 감정인으로서 활동했던 경험을 담아 1965년에 발간한 에세이 “Command and Compliance”에 따르면, 아우슈비츠 내에서 유대인을 비롯한 수감자들을 살해하는데 있어 가해자들의 자유의지를 침범하는 어떠한 강압적인 명령도 없었다고 한다. Buchheim은 범죄나 다름없는 그 명령들은 충분히 회피할 기회가 있었다고 저술하며, 이러한 명령을 이행하지 않은 SS친위대원들이 강제수용소에 수감되거나 처형당했다는 어떠한 증거도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게다가 하인리히 힘러가 그의 대원들에게 ‘모범적이고 예의바른’ 모습을 갖추길 강조한 만큼 SS친위대는 불필요한 가학행위는 오히려 지양하고 있었으며, 가학행위는 그들 중 특별히 잔인한 성향을 지녔거나 국가 사회주의에 과도한 충성을 증명해보이려는 개인들의 돌출행동 정도로 여겼다. 마지막으로 Buchheim은 결백한 사람들 중 그런 길로 빠져버린 이들 역시 소속감을 유지하기위해, 또는 명령을 거부할 경우 동료로부터 ‘약자’로 취급받지 않기 위해 그러한 선택을 한 것일 뿐 피할 수 없는 명령이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1992년에 발간된 홀로코스트 사학자 Christopher Browning의 저서 “Ordinary Men Reserve Police Battalion 101 and the Final Solution in Poland”에서 그는 유대인들을 체포하고 학살하며 수용소로 이송하던 임무를 수행한 경찰조직을 다뤘다. 101부대라 불린 이 경찰조직의 대원들은 대부분이 병역에 부적합한 함부르크 노동계급 출신의 동향 중년 남성들로, 학살에 대한 어떠한 교육도 받지 않았었다. 그리고 부대의 지휘관은 학살임무가 주어지면 이에 대해 불쾌감을 가지는 부대원들에게는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않을 선택권을 주었다. 대신에 학살현장통제와 저지선형성 등의 간접적인 작업에만 참여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500여명의 부대원 중 15명 미만의 대원만이 이를 선택하였고 절대다수는 학살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후일 Stanley Milgram은 Milgram Experiment를 통해서, 응집력이 강력한 그룹 내에서는 인정받은 권위자가 내린 명령이 도덕적으로 적합하지 않다고 여겨진다 하더라도 대다수의 개인은 이에 복종하듯이 따른다는 가설을 도출해내었다. 그리고 이에 큰 영향을 받은 Browning은 위의 101부대의 사례가 단순히 개인과 집단의 광기와 폭력성보다는 권위에의 복종(obedience to authority)이나 동류집단 압력(peer groop perssure)에 의한 결과일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한다. 러시아의 역사가 Sergei Kudryashov는 죽음의 수용소에 필요한 간수들을 훈련하여 제공하던 SS친위대의 트라브니키 훈련소에 대해 연구해왔다. 이 트라브니키 간수들 중 일부는 포로수용소에서 벗어나기 위해 SS친위대에 자원한 공산권 출신 전쟁포로들도 있었다. 사학자 Browning은 이러한 Hiwis(자원자)들은 반공의식과 반유대주의를 기준으로 선발되었으며 대부분이 우크라이나 혹은 발트 3국 출신이었다고 전한다. 그리고 Kudryashov는 이들이 대개 실제로는 반유대주의나 국가 사회주의에 별다른 애착이 없었다고 주장하며(Browning에 의해 확정되진 않음) 여전히 공산주의자로서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트라브니키 간수들의 대다수는 반유대주의에는 관심도 관련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SS친위대의 유대인 학살지침을 충실하게 이행했다. 이들의 유대인 학살은 “별다른 감정이나 목적은 없지만 체계적”이었다고 묘사된다. 전부는 아닐지라도 일단 유대인 집단학살수용소에서 근무한 이 간수의 대다수는 기본적으로 각자 두 자리수 이상의 유대인을 살해했다. 이 “트라브니키 사나이(Trawnikimänner)”들은 트라브니키(Trawniki)는 물론이고 아우슈비츠(Auschwitz)를 비롯해 베우제츠(Belzec), 소비버(Sobibór), 트레블링카 II(Treblinka II), 바르샤바(Warsaw)(3회), 쳉스토호바(Częstochowa), 루블린(Lublin), 리보프(Lvov), 라돔(Radom), 크라쿠프(Kraków), 비아위스토크(Białystok)(2회), 마이다네크(Majdanek) 등 “Final Solution"의 모든 주요현장에 파견되어 주도적으로 유대인 학살을 실시했다. +각 수용소별 개략적인 사망자 수 수용소 사망자 좌표 주석 Auschwitz II 1,000,000 Belzec 600,000 Chełmno 320,000 Jasenovac 58–97,000 Majdanek 360,000 Maly Trostinets 65,000 Sobibór 250,000 Treblinka 870,000 1942년, 아우슈비츠와 5개의 수용소들이 집단학살 수용소(Vernichtungslager)로 지정되어 라인하르트의 유대인 학살계획(Operation/Aktion Reinhard)을 수행하게 되었다. 이중 헤움노(Chełmno)와 마이다네크(Majdanek) 두 수용소는 이미 충실한 노동 및 전쟁포로 수용소로서 기능하고 있었기에 단순히 학살기능만 추가하면 되었다. 그 외 베우제츠(Belzec), 소비버(Sobibór), 트레블링카(Treblinka) 세 곳의 수용소는 오로지 유대인들을 더 많이 더 빨리 살처분하기 위한 목적만으로 건설되었다. 그리고 동일한 목적의 일곱 번째 수용소는 벨라루스의 말리 트로스티네츠(Maly Trostinets)에 건설되었고, 발칸반도의 야세노바츠(Jasenovac) 수용소에서는 주로 세르비아 민족이 처리되었다. 이 집단학살 수용소는 나치정권의 눈엣가시(대개 공산주의자나 우생학적 불합격자)들이 유폐되고 노동착취를 당하던 다하우(Dachau)나 벨젠(Belsen) 등 독일 내부에 위치한 집단 수용소와 혼동되곤 한다. 하지만 이는 확실히 구분지어야 하며, 독일의 괴뢰국들에 설립되어 전쟁포로를 비롯한 수감자들의 노동력을 강제로 착취하던 수용소들과도 역시 확실히 구별해야 한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향하는 철로 물론 모든 나치독일의 수용소에서는 기아와 질병 그리고 과로로 인해 굉장히 높은 사망률이 기록되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집단학살 수용소는 기존의 수용소와는 달리 수감자의 대량학살만을 위해 설계된 수용소임을 명심해야 한다. 이러한 집단학살 수용소는 SS장교에 의해 운영되었지만, 대부분의 간수와 기간병들은 위에서 언급되었다시피 반유대주의와는 별 인연이 없는 우크라이나나 발트 3국 출신이었다. 학살에 사용된 가스의 고형이 담겼던 빈 캔들과 아우슈비츠 박물관에 전시된 주인잃은 머리카락들 가스실을 구비한 모든 집단학살 수용소는 기차를 통해 모든 포로들을 받았다. 때로는 실려온 그대로 가스실로 보내지기도 했지만, 대개 수용소 군의관이 검사하여 강제노동 수용소로 보낼 극소수의 인부를 선별하곤 했다. 그리고 나머지는 접수 플랫폼으로 보내지고 여기서 모든 소유품들은 나치의 전쟁자금 마련을 위해 압수되었다. 그리고 알몸으로 가스실로 몰아넣어졌다. 간수들은 대개 방역을 위해 샤워를 시키는 것이라고 알리고는 입실이 완료되면 외부에서 ‘입욕’ 등과 같은 신호를 주고받는다. 가끔씩 입실 전에 비누나 수건을 쥐어주어 혹시 모를 유대인들의 공황상태를 예방하기도 했으며 심지어 긴 여정으로 인해 갈증을 호소하는 인원들에게는 샤워 후에 지급될 커피가 식고 있으니 빠르게 씻을 준비나 하라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정찰기에 의해 촬영된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수용소, 1944년 9월 13일 아우슈비츠의 소장이었던 Rudolf Höss에 의하면, 벙커1은 800명을 벙커2는 1,200명을 한번에 ‘처분’할수 있었다고 한다. 일단 가스실에 입실이 완료되면 모든 문은 잠기고 고체 알갱이상태의 치클론 B가 측벽의 환기구를 통해 투여되고 이는 곧 유독한 사이안화 수소를 내뿜는다. 1/3이 즉사하고 20분 이내에 환기구에 가까운 쪽부터 모든 입실자들이 사망하게 된다. 가스실을 감독하던 SS군의관으로 근무했던 Johann Kremer는 “고함과 비명이 가스실의 모든 틈새를 통해 들려왔고, 이를통해 그들이 살기 위해 얼마나 몸부림쳤는지 알 수 있었다.”고 진술했다. 희생자들이 모두 숨을 거두고 난 실내는 대개 아비규환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뒤틀린 채 죽은 이들의 피부는 붉거나 푸른 반점들로 가득했고 일부는 거품을 물거나 귀에서 피를 흘렸다. 잔여가스를 모두 제거하고 시신들을 모두 치우는 등 가스실의 사후처리 작업에는 최대 4시간이 걸렸으며, 화장하기 전 여성의 모발은 잘라내고 치과의사 포로를 이용해 금니들을 적출했다. 비워진 가스실의 바닥을 청소하고 벽은 흰색으로 덧칠했다. 이 모든 작업은 유대인 포로 작업반인 Sonderkommando에 의해 수행되었다. 화장터 1과 2의 Sonderkommando는 화장시설의 다락에서 살았고 3과 4는 가스실에서 살았다. 이들에 의해 시신 처리작업이 끝나면 SS대원이 적출된 금니의 개수와 시신의 구강상흔 수를 맞춰보고, 만약 금이 누락된 것으로 간주된다면 해당 포로는 그 자리에서 소각로에 던져졌다. 초기에 시신들은 가스실에서 꺼내져 그대로 깊은 구덩이에 묻혀 석회로 덮혔지만, 1942년 9월에서 11월 사이에 Heinrich Himmler의 명령에 의해 다시 꺼내어져 소각되었다. 우리가 알고있는 가스실과 화장터는 1943년부터 유대인 학살이 본격화되면서 지어진 것들이다. 바르샤바 게토 봉기(1943.1)체포되어 방공호에서 강제로 연행되어나가는 유대인들 -Heinrich Himmler에게 보고된Jurgen Stroop의 Stroop Report에서 Peter Longerich 역시 막대한 연구 끝에 “유대인들은 실질적으로 어떠한 저항도 하지 않았다”라고 결론지었다. Hilberg는 이러한 순응적인 태도는 유대인 박해의 역사를 통해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유대인들은 수세기동안 단순히 압제자들에게 애원하기만 할뿐, 명령에 복종하며 극적으로 치닫을 수 있는 상황은 되도록 피함으로써 자신들에 대한 박해가 수그러들 때까지 받을 수 있는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식을 선택해 왔다. 이 때문에 유대인 사회는 박해를 받는 시기에는 항상 수많은 피해를 받았지만, 마치 물이 빠지면 드러나는 바위와 같이 다시 재기하곤 했으며 사실상 이들이 지상에서 완전히 사라진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지금까지와 다르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는 것이 문제였다. 결국 그들은 반복되어온 순종의 역사가 각인시킨 타성 속에 갇혀버린 셈이다. 하지만 Yehuda Bauer를 비롯한 동료 사학자들은 당시 유대인들의 저항정신을 단순히 겉으로 드러난 물리적 항쟁뿐만이 아니라, 그들이 존엄성과 인권을 지키기 위해 취한 모든 종류의 행동들까지 포함해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Hilberg는 위에 인용된 Gilbert의 평가처럼 과잉되고 범위조차 명확치 않은 정의를 통해 유대인 저항을 필요이상으로 과대평가하는 흐름을 경계하며 이렇게 말했다. 연행되어온 유대인 레지스탕스, 바르샤바 게토, 1943 물론 무력저항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게토에서 비롯된 봉기의 일례로는 1943년 1월, 조악한 무장을 갖춘 유대인들이 SS부대를 4주나 지연시키다 독일 측 원군에 의해 패배했던 바르샤바 게토 봉기가 있다. 이 전투로 유대인 13,000명이 전사하고 57,885명이 추방되거나 집단학살 수용소로 보내졌다. 독일 측 피해는 진영별로 극명하게 갈리는데, 유대인 측 자료에는 독일군 수백명을 사살했다고 적혀있지만 독일 측에는 17명 사망에 93명 부상으로 적혀있다. 5월에는 비아위스토크 게토에서, 같은 해 9월에는 빌나 게토에서 단기간 봉기가 발생했다. 그 외에 가장 유명한 저항사례로는 바르샤바 봉기가 있다. 1944년 8월 1일부터 2달간 지속된 이 봉기는 Tadeusz Bór Komorowski 장군에 의해 주도되어 하루만에 바르샤바를 점령하고 해방지구를 형성하는데에 이르렀다. 하지만 또다른 대규모 봉기를 우려한 하인리히 힘러에 의해 강경진압이 결정되어, 봉기군 전원과 더불어 20만명에 가까운 시민이 학살되었다. 결국 바르샤바는 1943년의 게토 봉기와 1944년의 무력봉기를 거치면서 초토화되었다. 독일군에 붙잡힌 유대계 소련군 전쟁포로, 1941.8월대전중 50만명에 가까운 유대인들이 소련군으로 복역했다. 동유럽에서는 약 2~3만의 유대인이 나치와 그 동맹들을 상대로 파르티잔으로서 활발하게 활동했고, 리투아니아에서만 3천이 넘는 독일군이 이들에게 사살되었다. 이들은 주로 게릴라전과 함께 독일군 기반시설에 대한 사보타주를 벌였고, 이따금 게토의 봉기를 유도하거나 수용소의 탈출을 돕기도 하였다. 특히나 유대인 비중이 높은 리투아니아와 벨라루스에서는 집단학살 수용소의 비극에서 수천명의 유대인들을 구출하기도 했다. 암스테르담을 비롯한 네덜란드 전역에서도 활발히 게릴라를 벌였고 수많은 유대인들이 네덜란드 레지스탕스에 가담하여 활동했다. 프랑스에서 유대인들은 저항군 참여 뿐 아니라 유대 공동체의 자체 저항조직에서도 활발히 활동했었다. 유대인 생존자들은 대부분 프랑스 레지스탕스로서 나치와 비시 괴뢰정부에 맞서 게릴라전을 벌였다. 이들의 참여율과 적극성은 상당히 높아서 당시 프랑스에서 유대인 비율은 1%가 채 안되었음에도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유대인 비율을 20%에 육박할 정도였다. 유대인 청년조직이었던 EEIF는 비시 괴뢰정부에 의해 해산되자 그대로 레지스탕스 조직에 흡수되어 정보와 자금지원을 담당했다. 시오니스트들 역시 Armee Juive를 결성하여 나치의 유대인 체포와 강제이송을 방해하고 국외로 탈출하는 작업을 수행했다. 위 두 조직은 1944년에 연합하여 파리, 리옹, 툴루즈, 그르노블, 니스의 해방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리고 140만에 가까운 유대인들이 연합군에 지원하여 참전했다. 이들은 각각 50만은 공산권의 붉은 군대에, 55만은 미군에, 10만은 폴란드군, 3만은 영국군에 소속되어 있었다. 특이하게도 영국군에는 5천명의 팔레스타인 출신 유대인들이 모여 The Jewish Brigade을 결성하기도 했고, 독일어에 능통한 이들은 Special Interrogation Group에 자원하여 서부사막 전선 최전방에서 독일군에 사보타주나 특공작전을 벌였다. 1943년 5월 트레블링카 수용소에서 200명이 탈출하면서 어수선해진 수용소 내부에서 폭동이 발생했다. 이때 상당수의 독일군 간수가 살해‧제압되고 수용소 건물들이 불에 탔지만 수감자 900명이 사살됐고, 600여명이 탈출에 성공했지만 이중 40명만이 종전의 기쁨을 맛볼 수 있었다. 1943년 8월, 소련군 전쟁포로를 포함한 600여명의 유대인 수감자들이 소비버(Sobibór) 집단학살 수용소에서 탈출을 시도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로 인해 11명의 SS대원과 수많은 간수들이 사망했고, 발각되고 나서는 중화기까지 동원한 수용소 측의 공격으로 300명의 수감자가 사살되었다. 그나마 탈출한 인원의 대다수도 수용소를 둘러싼 지뢰밭을 통과하진 못하고 폭사하거나 사살되었다. 이들 중 60여명만이 탈출에 성공하여 소련의 파르티잔에 합류했다. 1년 뒤, 1944년 8월 7일에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250명의 Sonderkommando들이 간수들을 공격하고 여성수감자들이 인근 공장에서 밀입해온 폭약으로 4번 화장터를 폭파하는데 성공한다. 3명의 간수가 살해되었고 이중 하나는 오븐 속에 구겨진 채 발견되었다. Sonderkommando들은 이어서 바로 탈출을 시도했지만 곧 전원 사살되었다. 사실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저항활동과는 관련이 없는 수동적인 태도를 보였었지만, 그들 역시 강제이주라는 명분에 순순히 응하기보다는 탈출과 협상, 공무 방해와 때때로는 뇌물까지 제공하면서 저항정신과는 별개로 나치독일의 유대인 사냥을 지연시켰다. 하지만 나치와 RHSA(국가보안본부)는 이들의 순종과 수동성을 노리고, 오히려 유대 공동체가 자체적으로 구성원들의 복종을 강제하게 유도했다. 이 계획의 대표적인 타겟조직이 독일의 Reichsvereinigung der Juden(라이히 유대인 정부)와 폴란드 게토의 Judenräte(유대 의회)였다. 나치는 이들에게 유대인 권익보호와 시오니스트에 대한 지원책 등 거짓 공약을 제시해, 이들의 협조를 얻는 데 성공했다. 결국 이 두 공동체는 유대인들에게 라이히 정부(나치독일 정부)에 대한 순종과 협조를 강권하여, 도피에 전념하던 유대 사회에 혼란을 가중하고 희생자를 더욱 불리는 결과를 낳게 된다. :"유대인들은 2천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박해받으며, 저항은 구원이 아닌 죽음을 몰고 온다는 냉혹한 현실에 부딪혀 왔다. 이러한 역사의 반복 속에서 그들의 논리와 전승, 문화와 사회구조, 언어까지도 타협과 설득, 애원으로 가득차게 되었고 거기에 저항과 대결의 자리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Paul Johnson, 작가 및 사학자 1942년 6월,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암살되었고 그 뒤를 이어 SS소속 장성인 에른스트 칼텐브루너가 RHSA(국가보안본부)의 수장이 되었다. 하인리히 힘러의 감수 아래, 그는 최종 해결법(유대인 말살계획)을 착실히 전개해나가며 1943년부터 1년간 독일의 영향권 아래에 있는 모든 유대인들을 체포하여 수용소로 보내는 데 전념했다. 유대인 학살이 절정에 달했던 1944년 봄,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에서는 하루에 8천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사실 나치 정부의 일반 부문 중 유대인 게토의 강제노동에 기반한 군수산업의 생산성은 손에 꼽을 정도로 높은 편이었다. 하지만 Final Solution의 실행으로 인해 1943년 모든 게토의 생산은 중단되고 유대인들은 집단학살 수용소로 보내지게 되었다. 이 일환으로 1943년 초, 바르샤바 게토에서 1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강제 이송되어 학살되었고 이로 인해 바르샤바 게토 봉기가 발생했지만 무자비하게 진압되었다. 1943년 11월 3일 단 하루만에, 마이다네크(Majdanek) 수용소와 인근 캠프들에서는 추수감사 작전(Aktion Erntefest)라는 이상한 작전명 아래 4만2천명에 달하는 유대인들이 사살되었다. 러시아 점령지에서 잡힌 유대인들도 실려오는 족족 그 자리에서 사살한 이 작전은, 나치독일이 자행한 최대의 유대인 단일 학살작전로 기록되었다. 1944.8.20-22, 헝가리 부다페스트.붙잡힌 유대인 여성들 독일에서 유대인 수송차량은 철로 상에서 가장 우선권을 가졌었다. 심지어 1942년 끝자락에 스탈린그라드 전투로 지독한 소모전이 벌어지고, 기반시설과 철도에 대한 연합군의 폭격이 가중되던 시점에도 이 철칙은 지켜졌다. 이 때문에 군수품의 우회와 연착이 빈번하게 발생해 육군 사령관들의 빈축을 사기도 했다. 물론 숙련된 유대인 기술자들과 고학력자들이 처형이 예약된 상태로 이 차량들 속에 실려있었기 때문에 경제 부처와 경영인들의 눈길도 고울 순 없었다. 더군다나 전쟁이 막바지에 치닫을 수록 패전의 기색이 역력해졌기 때문에, 사실상 나치의 광신도가 아니라면 누구나 전후 전범처리에 대해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아돌프 히틀러의 권한을 쥐고 흔드는 하인리히 힘러와 강력한 SS의 억제력 때문에, 기본적인 군사적, 경제적 우선순위 따윈 안중에도 없는 최종 해결법을 지켜보면서도 정작 반발을 표하는 사람은 없었다. 당시 히믈러가 얼마나 이 소명에 미쳐있었는지는 나치 고위당원들의 공식 집회에서 한 연설의 녹취록 일부를 보면 알 수 있다. 1944,봄. 체코 동부에서 붙잡혀 아우슈비츠로 보내진 유대인 여성과 아이들 이 모임에는 해군 제독 카를 되니츠와 전시 군비 장관 알베르트 슈페어도 참석했었다. 이들 중 되니츠는 전후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최종 해결법이라는 계획의 존재 자체도 모르고 있었다고 주장했고, 이는 재판에서 인정 되었다. 재판이 벌어지던 당시에는 히믈러의 녹취록의 존재는 아무도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슈페어는 재판과 뒤이은 인터뷰에서 “만약 제가 모르는 사건이 있었다면, 그것은 제가 보지 못한 게 아니라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 겁니다.”라고 선언했다. 1944년 봄, 폴란드의 게토들이 공터가 되기 시작해서야 학살의 규모도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유대인 문제로 마찰이 빈번하던 헝가리에 대해 아돌프 히틀러는 일찌감치 배신의 기미를 파악하여 3월 19일에 선제공격했다. 공격 하루 전, 아돌프 히틀러는 개인적으로 헝가리의 섭정이자 제독인 호르티 미클로시에게 다음과 같이 불만을 표시했었다. :"헝가리는 유대인 문제에 대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결국 난민으로 인해 폭증한 유대인 인구를 해결할 준비가 전혀 되지 않았다.” 마침내 점령이 완료된 헝가리에서 80만의 유대인들이 대량학살 수용소로 강제 이송되었고, 이를 감독하기 위해 아돌프 아이히만이 부다페스트로 파견되었다. 이들 중 절반 이상이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이송되었고 세 달에 걸쳐 40만명 전부 살해되었다. 수용소장 이었던 루돌프 회스는 이후 전범재판에서 이 사실을 자백했다. -Blood for Goods 협상 헝가리 출신 유대인들을 학살하는 작전은 나치 내부에서도 강한 반발을 샀고, 아돌프 히틀러에게 그냥 학살하느니 차라리 이들에게 평화로운 정착지를 제공해주는 대신 연합국들에게 대가를 요구하라는 제안까지 나왔었다. 실제로 헝가리 출신 유대인들을 관리하던 아돌프 아이히만이 유대인 100만명과 트럭 1만대 분의 물품을 교환하는 거래를 발의했고, 이에 대해 이스탄불에서 하인리히 힘러와 영국, 유대인 단체의 대리인들이 모여 비공식 협상을 진행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런 성격과 규모의 거래가 제대로 성사 될 가능성은 애초에 없었다. 1944년 중순 쯤 되었을 때 “최종 해결법(Final Solution)"은 거의 실행이 완료된 상황이었다. 나치 정권에게 접근이 용이하였던 유태인 공동체의 대부분은 말살 당하였는데, 프랑스는 약 25%가 제거된 반면 폴란드는 파괴된 공동체 비율이 약 90%에 달하였다. 나치 친위대장 하임리히 힘러(Heinrich Himmler)는 5월 5일 연설에서 ”독일과 독일 점령지 내의 유태인 문제는 전반적으로 해결되었다“고 선포하였다. 1944년에는 이 임무가 점차 어려워졌는데, 독일군이 러시아, 발칸 반도, 이탈리아 등지에서 후퇴하기 시작하였고 전투에서도 연합군에게 패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6월에 연합군은 프랑스에 상륙하였고, 연합군의 공습과 게릴라 전투는 독일군의 철도 운영에 엄청난 차질을 빚게 만들었다. 이에 따라 기차의 일부를 죄수 운송에 쓰는 것에 할애하는 데에 대한 독일군의 반발도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이 당시 소련군이 점점 진격해오자 폴란드 동쪽에 있던 수용소들은 모두 폐쇄되었고 생존해있던 수감자들은 독일에 가까운 서쪽 수용소-처음에는 아우슈비츠로, 이후에는 실레지아(Silesia)에 있는 Gross Rosen으로-로 이송되었다. 마지막 13명의 죄수-모두 여성이었다-는 1944년 11월 25일 아우슈비츠 II에서 죽임을 당하였는데, 기록에 의하면 그들은 “전면적 죽음(unmittelbar getötet)"을 당하였다고 되어있어, 가스실에서 죽었는지 다른 방법으로 죽었는지는 불분명하다. 암울한 전쟁 형세에도 불구하고 수용소에서 있었던 일들을 은폐하기 위한 노력은 끊이지 않았다. 가스실은 해체되었고, 화장터는 폭파되었으며, 집단 매장지를 뒤엎고 시체들은 화장시켰다. 또한 폴란드 농부들에게 그 자리에 식물 씨앗을 키우도록 강제하여 그러한 장소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인상을 주고자 하였다. 그러나 지역 지휘관들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계속해서 유태인들을 죽이고 또 강제된 “죽음의 행군(Death March)"을 통해 수용소 간 이동을 시켰다. 수 년 간의 폭력과 굶주림으로 피폐해진 수감자들은 수용소에서 기차역까지 눈발을 뚫고 장거리를 걸어갈 것을 강요받았고, 이후 며칠씩 음식 없이 화물열차 안에 갇혀서 운송되었고, 내린 후에 또다시 수용소로 행군해야만 했다. 이 과정에서 뒤처지는 사람은 즉시 총살되었다. 이 행군 중에 죽은 유태인은 약 25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 이러한 죽음의 행군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잘 알려진 행군은 1945년 1월 폴란드에서 일어났다. 소련군이 아우슈비츠에 도착하기 9일 전이었는데, 수용소 경비대는 약 6만 명의 수감자들은 수용소에서 56km 떨어진 Wodzislaw(독일어 Loslau)까지 걸어가게 시켰다. 이 곳에서 수감자들은 화물열차를 통해 다른 수용소들로 이송되었는데, 여기까지의 행군 도중 약 15,000명이 죽었다고 알려졌다. 첫 번째 주요 수용소였던 Majdanek 수용소는 진격하는 소련군에 의해 1944년 7월 23일에 발견되었다. Chelmno 수용소는 소련군에 의해 1945년 1월 20일에 해방되었고, 아우슈비츠 수용소 또한 소련군에 의해 1945년 1월 27일에 해방되었다. Buchenwald 수용소는 미군에 의해 4월 11일, Bergen-Belsen 수용소는 영국군에 의해 4월 15일, Dachau 수용소는 미군에 의해 4월 29일, Ravensbrück 수용소는 같은 날 소련군에 의해, Mauthausen 수용소는 미군에 의해 5월 5일, Theresienstadt 수용소는 소련군에 의해 5월 8일에 해방되었다. Treblinka, Sobibor, Belzec 수용소는 해방되지 못하고 1943년에 나치에 의해 파괴되었다. 미7군 William W. Quinn 대령은 Dachau 수용소에 대해 “우리 부대는 그 곳에서 믿기 힘들 정도로 끔찍한 광경, 소리, 악취를 목격하였다. 도저히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엄청난 잔인함이었다”라고 회고한다. 소련군에 의해 발견된 수용소들의 대부분은 이미 죄수들을 이송하여 몇 천명만이 살아있었다. 아우슈비츠에서는 실험 대상이 되었던 180명의 아이들을 비롯해 7,600여 명의 수감자들이 발견되었다. Bergen-Belsen 수용소에서는 60,000여 명의 수감자들이 영국군 11사단에 의해 발견 되었는데, 13,000여 구의 시체가 매장되지 않은 채 발견되었고, 10,000여 명은 몇 주 후 티푸스나 영양실조로 사망하였다. 영국군은 남아있던 수용소 경비대를 시켜 시체를 모아서 집단 묘지를 만들게 하였다. 피해자 사망자수 출처 유태인 590만명 소련군 전쟁포로 2–3백만명 폴란드인 1.8–2백만명 집시 220,000–1,500,000명 장애인 200,000–250,000명 프리메이슨 80,000–200,000명 슬로베니아인 20,000–25,000명 동성애자 5,000–15,000명 여호와의 증인들 2,500–5,000명 스페인 공화주의자들 7000명 홀로코스트 피해자에 대한 통계치는 홀로코스트란 단어에 대한 정의에 따라 다르다. 일부 학자들은 이 단어가 500만 명 유럽 유태인에 대한 큰 규모의 학살을 의미하며, 홀로코스트란 단어에 정확한 정의가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 마틴 길버트의 측정치에 따르면 총 피해자 인원수은 600만 명 이하이며, 당시 유럽 유태인의 78%를 차지하다고 말했다. 티모시 스나이더는 홀로코스트란 단어를 두 가지 의미로 나눠 보았다. 하나는 독일군이 전쟁했을 때 모든 학살행위이며 하나는 나치가 유태인에 행한 모든 압박행위이다 포괄적인 의미의 홀로코스트로 인해 사망한 인원수는 소련 전쟁포로 200만~300만명, 폴란드인 200만명, 장애인 27만명, 집시 22만명, 프리메이슨 회원 22만명, 슬로베니아인 2만5천명, 동성애자 1만5천명, 여호와의 증인 신도 5천명, 스페인 공화주의자 5천명을 포함하여 총 1100만명이다. 더 넓은 통계범위로 600만 명의 소련 민간인을 포함하게 될 경우 총 사망인원수는 1700만 명에 달한다. 미국유태인학살기념관에서 전시된 수치에 따르면 1500~2000만 명의 사람이 사망하거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루돌프 럼멜은 홀로코스트로 인해 사망된 사람 수를 2100만 명이라고 측정하였으며, 다른 학자의 측정치에 따르면 소련 민간인의 사망 수를 합쳐 2600만 명이 사망했다고 추산한다. 1945년에서 지금까지 흔히 나온 학살을 당한 유태인사망인원수에 대한 측정치는 600만 명이다. 이스라엘 예루살렘에서 유태인대학살기념관에 이런 말이 전시되어 있다. 살해를 당한 유태인은 정확하게 통계할 수 없고 문서에서 300만 명의 유태인의 이름을 찾았고 , 유객센터에서 전시되어 있고, 인터넷을 통해 중심데이터베이스에서도 찾을 수 있다. 600만 명의 숫자는 당위군 장관을 맡은 Adolf Eichmann가 말한 것이다. 당위군 장관 Wilhelm Höttl의 증사에 따르면 1944년 8월에 Adolf Eichmann가 그한테 600만 명의 유태인이 학살을 당하고 ,400만 명이 강제수용소에서 죽었고 나머지 200만 명이 총사나 질병으로 죽었다고 말했다. 1953년에 Gerald Reitlinger가 쓴 《최종해결방안》이 피해자인원수에 대해 측정했다. 인원수는 4,200,000-4,500,000 명의 사이이었다. 이외에도 Raul Hilberg가 측정한 5,100,000하고 Jacob Lestschinsky측정한 5,950,000인 측정치가 있다. Yisrael Gutman와Robert Rozett가 쓴《유태인대학살백과전서》중에 측정한 사망 인원수는 5,590,000~ 5,860,000명의 사이였다. 베를린 공업대학의 교수 Wolfgang· lBenz 연구한 결과는 피해자인원수가 5,290,000-6,200,000명 사이인 것이다. 이스라엘유태인대학살기념관이 전시된 수치의 근거는 전쟁 전후의 인구통계대조하고 강제송환과 학살의 문서에서 온 것이다. Raul Hilberg가 측정한 5,100,000명의 피해자가 보수적인 측정으로 여긴다. 왜냐하면 Raul Hilberg가 찾을 수 있는 사망기록만 참조하면서 측정한 수치이기 때문이다. 《유럽유태인의 멸망》제3판에서 800,000명이 유태인 격리 구역에서 죽임을 당하고, 1,400,000명이 총사로 사망하고 2,900,000명이 강제수용소에서 죽었다고 쓰인다. 그는 폴란드 유태인의 사망인수 300만 명에 달한다고 측정했다. Martin Gilbert가 최소 5750000 명의 유태인을 살해당한다고 측정하고, 그 중에 Oświęcim에서 독약을 복용하게 함으로써 죽은 200만 명도 포함이 된다. Lucy Dawidowicz 전쟁 이전의 통계수치를 통해 5,934,000명의 유태인이 사망되었다고 지적했다. 각 강제수용소의 사망인원수가 3800000명을 넘고 그중에 80~90% 모두 유태인이다. 강제수용소에서 죽은 유태인이 나치 대학살로 인한 총 유태인피해자인원수의 반에 달했다. 폴란드의 유태인 거의 이런 수용소에서 죽임을 당했다. 이외에도 최소 50만 명의 유태인 기타 강제수용소에서 죽었고, 그중에 독일의 몇 개의 주요한 수용소 포함된다. 많은 유태인을 징역하고, 특히 전쟁의 마지막 1년 동안 나치가 폴란드에서 철수한 후, 약 100만 명의 사람이 이런 강제수용소에서 죽었다. 그중에 최소 50%가 유태인이고 구체적인 숫자도 알 수가 없다. 이외에도 80~100만 명의 유태인이 독일이 점령한 구역에서 살해를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질병이나 영양불량으로 송환되기 전에 폴란드에 있는 유태인 격리 구역에서 죽었다. +이하 수치는 Lucy Dawidowicz에 의해 제공된 전쟁 전 유럽 국가 내 유태인 인구의 학살을 잘 드러낸 수치다 국가 전쟁전유태인 인구(추정) 사망인구(추정) 사망비율 폴란드 3,300,000 3,000,000 90 발트해 국가들 253,000 228,000 90 독일과 오스트리아 240,000 210,000 90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90,000 80,000 89 슬로바키아 90,000 75,000 83 그리스 70,000 54,000 77 네덜란드 140,000 105,000 75 헝가리 650,000 450,000 70 벨로루시안 연합 375,000 245,000 65 우크라이나 연합 1,500,000 900,000 60 벨기에 65,000 40,000 60 유고슬라비아 43,000 26,000 60 루마니아 600,000 300,000 50 노르웨이 2,173 890 41 프랑스 350,000 90,000 26 불가리아 64,000 14,000 22 이탈리아 40,000 8,000 20 룩셈부르크 5,000 1,000 20 러시아 연방 975,000 107,000 11 덴마크 8,000 52 에서 히틀러는 프리메이슨이 유대인들에게 복종해 왔고, 상류층들을 자신들의 아젠다로 유혹하는 "뛰어난 도구"였다고 말했다. 1930년대 중반, 나치독일은 프리메이슨이 아주 큰 위협이라고 여긴다. 나치가 권력을 잡은 뒤, 히틀러는 프리메이슨을 불법화했고, 많은 로지lodges들을 폐쇄했다. 많은 형제들Brethren이 체포되었고, 집중 캠프로 보내졌다. 로지에서 훔친 물건들은 그 동업자들을 향한 두려움과 적대감을 일으킬 목적으로, 독일 전역에서 메이슨 반대 전시회를 개최하는 데에 사용되었다. 프리메이슨들도 처형되었고, 그들의 재산도 침략하고 점령한 나라(노르웨이, 덴마크,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 폴란드, 헝가리, 그리스 등)에서 나치가 훔쳤다. 역사가들은 적어도 8 만 명의 메이슨들이 유럽 전역에서 살해되었다고 말한다. 미국대학살기념관에서 제시된 자료에 따르면 많은 잡힌 프리메이슨 맨버들이 유태인 신분이나 반대파 신분을 갖고 있었다고 했다. 아직까지 프리메이슨 신분을 갖고 있는 원인으로 나치수용소에 보내는 사람 수가 얼마나 있는지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약 12,000명의 여호와의 증인 교인들이 나치한테 선서하거나 군대에 가는 것을 거절해서 수용소에 들어가게 되었고, 이중 약 2500 ~ 5000명이 살해되었다. 포그롬 H-HOLOCAUST, H-Net discussion list for librarians, scholars and advanced students Online documents available from the Dwight D. Eisenhower Presidential Library Guide to materials available at the Dwight D. Eisenhower Presidential Library The Wiener Library for the Study of the Holocaust & Genocide – The World s Oldest Holocaust Memorial Institution How Could God Have Allowed the Holocaust? Common Questions about the Holocaust by the United States Holocaust Memorial Museum 분류:독일의 역사 분류:반독 감정
고이즈미 준이치로 (, , 1942년 1월 8일 ~ )는 일본의 정치인이다. 중의원 의원(12선)과 내각총리대신(제87·88·89대), 우정대신(제56대)과 후생대신(제73·74·86대), 자유민주당 총재(제20대)를 지냈으며 총리로 재임할 당시 2차 대전 이후의 일본 정권으로는 사토 에이사쿠와 요시다 시게루 다음으로 두번 째로 긴 장기 집권기간 (1,980일)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나카소네 야스히로 이후로 사임하지 않고 임기를 끝까지 마친 자유민주당 총재가 되었다. 그의 첫 임무인 잃어버린 10년을 끝내고, 김대중 정부 시절 대한민국을 방문하여 온전한 한일 관계 유지에 노력하였으나 노무현 정부 시절 시마네현 의회가 다케시마의 날을 제정하면서 대한민국의 네티즌들로부터 비난과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고이즈미의 뒤를 이은 아베 신조 내각과 후쿠다 야스오 내각 또한 고이즈미의 노선을 기본적으로 답습하고 있는 등 2000년대 일본 정치는 물론 세계 정치에도 큰 영향력을 끼쳤다. 퇴임 후 수년간 대중 앞에 나서지 않던 고이즈미 전 총리는 2013년 후쿠시마 후쿠시마 제1 원자력 발전소 사고를 계기로 원자력 포기 옹호론자로 복귀했다. 이는 고이즈미 총리 임기 중과 이후 모두 포함해서 자민당이 지지해 왔던 친 원자력 발전과는 반대되는 입장이었다. 조부인 고이즈미 마타지로와 부친인 고이즈미 준야도 중의원 의원을 역임했으며 부친은 방위청 장관도 역임했다. 장남 고이즈미 고타로는 배우로 활동 중이며 차남 고이즈미 신지로는 2009년 7월 21일 열린 중의원 선거에서 준이치로의 지역구를 이어받아 출마, 당선되었다. 고이즈미 총리는 3 대에 걸친 정치인 집안 출신이다. 그의 아버지 고이즈미 준야 (小泉純也)는 일본 방위청장(현재 방위대신)과 중의원 의원을 역임했다. 할아버지 고타미 마타지로(高田麻田郞)는 몸에 큰 문신을 하고 다녀 "문신 장관"이라고도 불렸는데, 하마구치 총리와 와카쓰키 총리 내각에서 우정성 장관을 지냈으며 우편 민영화의 초기 옹호자였다. 1942년 1월 8일 가나가와 현 요코스카에서 태어난 고이즈미 총리는 요코스카 고등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고, 게이오 대학에서 경제학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1969년 8월 아버지의 부음으로 귀국할 때까지 University College London에 재학했다. 귀국 후 고이즈미는 자민당(LDP) 후보로 일본 하원 선거에 나갔으나 충분한 표를 얻지 못해 낙선했다. 1970년 당시 일본 재무부 장관이었던 후쿠다 다케오의 비서로 발탁되었는데, 후쿠다 다케오는 1976년 일본 수상이 된다. 1972년 12월 총선에서 고이즈미는 가나가와현 제11구의 하원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자민당 내 후쿠다 파벌에 합류했다. 그 이후로, 그는 10번 재선되었다. 1942년 1월 8일 - 가나가와현 요코스카 시의 정치가 집안에서 태어남. 1960년 3월 - 가나가와 현립 요코스카 고등학교 졸업. 1962년 4월 - 게이오기주쿠 대학 입학. 1967년 5월 - 1년 유급한 후 대학을 졸업. 1967년~1969년 - 런던 대학교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University College London UCL) 에서 유학 1969년 8월 - 부친상을 당하자 귀국. 1969년 12월 27일 - 제32회 중의원 선거에 자유민주당의 공천을 받아 입후보하였으나 낙선함. 1970년 - 후에 총리가 되는 후쿠다 다케오 중의원 의원의 개인비서로 들어감. 1972년 12월 10일 - 제33회 중의원 선거에 자유민주당의 공천을 받아 첫 당선되었으며 이후 계속해서 당선됨. 1978년 - 미야모토 가요코(宮本佳代子)와 결혼. 1979년 11월 - 대장성 정무차관으로 취임. 1982년 - 이혼. 장남 고타로와 차남 신지로는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아직 태어나지 않았던 3남은 미야모토가 친권을 가짐. 이후 독신으로 지내고 있다. 1988년 12월 - 후생성 대신으로 취임. 1992년 12월 - 우정성 대신으로 취임. 1995년 9월 - 자유민주당 총재선거에 출마했으나 하시모토 류타로에게 패함. 1996년 11월 - 후생성 장관으로 취임. 1998년 7월 - 자유민주당 총재선거에 출마했으나 오부치 게이조에게 패함. 2001년 4월 24일 - 3번째로 도전한 자유민주당 총재선거에서 당선. 2001년 4월 26일 - 제87대 내각수상에 취임. 2001년 8월 13일 - 수상 취임 후 첫 야스쿠니 신사 참배. 2001년 10월 15일 - 대한민국 김대중 대통령과 청와대에서 정상회담을 열음. 2002년 1월 29일 - 다나카 마키코 외무성 대신을 경질. 2002년 9월 17일 - 평양에서 북한의 김정일 위원장과 첫 정상회담, 조일평양선언 조인. 2003년 11월 19일, 제88대 총리에 취임. 2004년 1월 - 자위대의 이라크 파병을 결정. 2004년 5월 22일 - 다시 방북해 평양에서 북한의 김정일 위원장과의 정상회담을 통해, 북한에 대한 25만 톤의 식량과 1000만 달러 상당의 의료품 지원을 표명하고 북·일간의 국교 정상화를 진전시켰다고 발표함. 5명의 납치 피해자 가족의 귀국을 실현. 2004년 7월 - 제20회 참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민주당에 근소한 차이로 짐. 2005년 7월 5일 - 우정 민영화 관련 법안이 중의원 본회의에서 가결. 2005년 8월 8일 - 우정 민영화 관련 법안이 참의원 본회의에서 부결되자 내각에서 중의원 해산을 결정하고, 중의원 해산결의에 서명을 거부한 시마무라 요시노부 농림수산성 대신을 파면시킴. 같은 날, 헌법 7조에 의거해 중의원을 해산시키고, ‘우정 해산’이라고 명명함. 2005년 9월 11일 - 제4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민당이 296석을 획득하여 크게 승리함. 2005년 9월 21일 - 제89대 수상에 취임. 2006년 8월 15일 - 취임 당초의 공약에 따라 연미복 차림으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 2006년 9월 21일 - 자민당 총재 임기가 만료. 2006년 9월 26일 - 오전에 임시 각료회의를 갖고 5년 5개월 동안의 임기를 마감함과 동시에 내각 총 사퇴. 2006년 12월 15일 - 자민당 국회의원으로 구성된 개혁가속의원연맹 ()의 고문에 취임함. family.jpg|고이즈미 준이치로와 가족들 in Graceland 2006.jpg|2006년 6월 29일 미국 방문 중 록 가수 엘비스 프레슬리의 고향을 방문한 후 선글라스를 끼면서 손을 흔들고 있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with bush.jpg|부시 대통령과 함께 Koizumi and George W. Bush on South Lawn of White House.jpg|백악관에서 부시 대통령과 연설하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arriving at Andrews AFB 28 June 2006.jpg|앤드루스 공군 기지에 도착한 고이즈미 준이치로 and Koizumi.jpg|도널드 럼즈펠드와 함께 고이즈미 준이치로 내각총리대신 담화 자유민주당 아베 신조 아소 다로 이시하라 신타로 야스쿠니 신사 제1차 고이즈미 내각 제1차 고이즈미 내각 제1차 개조내각 제1차 고이즈미 내각 제2차 개조내각 제2차 고이즈미 내각 제2차 고이즈미 내각 개조내각 제3차 고이즈미 내각 제3차 고이즈미 내각 개조내각 역대 총리의 사진과 경력 - 고이즈미 준이치로(수상관저 홈페이지) 일본 국가전략본부 Biographical information on Junichiro Koizumi s divorce, ex-wife Kayoko Miyamoto, and their estranged children Yoshinaga Miyamoto, Kotaro Koizumi and Shinjiro Koizumi. 분류:1942년 태어남 분류:살아있는 사람 분류:고이즈미 가 분류:일본의 내각총리대신 분류:중의원 의원 분류:일본의 각료역임자 분류:헤이세이 시대의 정치 분류:요코스카시 출신 분류:게이오기주쿠 대학 동문 분류:런던 대학교 동문 분류: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 동문 분류:자유민주당 (일본)의 정치인 분류:일본의 외무대신 분류:일본의 후생대신 분류:일본의 우정대신 분류:영국에 거주한 일본인 분류:보스정치인 분류:요코하마시 출신 분류:일본의 농림수산대신
룡천 열차폭발 사고 (龍川列車爆發事故)는 2004년 4월 22일 중국과의 접경지역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안북도 룡천군 룡천역에서 열차가 폭발한 사건이다. 사건은 낮 오후 12시에서 1시 사이에 가연성 물질을 싣고 가던 기차에 노후된 전선의 불꽃이 튀면서 폭발하여, 폭발현장에는 10여 미터 깊이의 구덩이가 파이고, 주변 건물들이 충격으로 붕괴되어 54명이 사망하고, 1,249명이 부상당한 것으로 보도되었다. 북한은 이 지역에 국가 긴급 상태를 선포하였으며 이례적으로 국제사회에 구호를 요청했다. 사건이 일어난 당일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중국을 방문하고 기차로 귀국하는 날이어서, 김정일 위원장을 겨냥한 테러가 아니겠느냐는 추측이 있었고, 위키리크스에 따르면 김정일 스스로 룡천역 사건이 자신을 향한 암살시도라는 것을 인정하였다. ANFO 폭약 분류:2004년 철도 사고 분류:2004년 폭발 분류: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철도 사고 분류: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폭발 분류:룡천군 분류:2004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분류:2004년 4월
노르드 (Norse)는 북유럽, 스칸디나비아와 관련이 있다. 다음의 경우에 쓰인다. 중세의 노르드인 (흔히 바이킹이라 부르는 이들의 정확한 명칭); 고대 노르드어 (노르드인들이 사용한 현재 스칸디나비아 제어의 조어(祖語)). 6 SS산악사단 노르트 -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무장친위대 소속 사단으로 노르웨이와 덴마크 출신의 나치 동조자들로 편성한 부대. 독일인과 같은 게르만계로 분류되었다. 같은 어원으로 노르딕 (Nordic)이 있다. 노르딕 스키는 스키경기 종류의 하나이다. --------------------------------------------------------------------------------- 게임 마인크래프트 대규모 오픈필드형 MMORPG 서버인 Norde Online이라고 있다 참고 카페:
location map definitions.PNG|섬네일|300px|붉은색 엄격한 의미에서의 스칸디나비아.주황색 확장된 영역. 노랑색 노르딕 국가 영역 스칸디나비아 (Scandinavia)는 북유럽의 스칸디나비아 반도를 중심으로 한 문화·역사적 지역을 일컫는다. 대개 노르웨이·스웨덴·덴마크 세 왕국을 말하며, 때에 따라 핀란드와 아이슬란드를 포함하기도 한다. 이들 지역의 속령인 그린란드, 올란드 제도, 페로 제도를 스칸디나비아에 포함하기도 한다. 언급한 지역 전체를 말할 때 노르딕 국가라고도 한다. 언어학이나 문화 연구에서 고대 노르드어 사용했던 현재 북게르만어군 언어 사용권을 말한다. 이 정의에서는 아이슬란드와 페로 제도 및 스웨덴어를 사용하는 핀란드 일부 지역도 해당한다. 문화적, 역사적 관점에서 스칸디나비아에 오랜 기간 스웨덴의 일부였던 핀란드를 포함하기도 한다. (페노스칸디아 참조). 핀란드가 스칸디나비아의 다른 나라들과 문화적으로 가깝기는 하지만, 핀란드어는 인도유럽어족에 속하는 다른 스칸디나비아 제어와는 달리 우랄어족의 핀우그리아어파에 속한다. 1830년대의 범노르만 운동과 1830년대에서 1850년대까지의 정치적인 범스칸디나비아주의 이후, 스칸디나비아에 핀란드와 아이슬란드를 포함하는 것은 의견이 갈라진다. 문맥에 따라서는 이들 나라도 스칸디나비아에 포함되긴 하지만, 노르딕 국가라는 단어가 표현의 모호함 없이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페로 제도와 그린란드), 핀란드(올란드 제도), 아이슬란드 전체를 가리킨다. () 덴마크어·스웨덴어·노르웨이어는 사용자들끼리 대부분 서로 알아들을 수 있어 한 언어로 간주될 수도 있다. 하지만 서로 다른 독립 국가에서 사용되는 까닭에 조금씩 다른 방향으로 발전해 각각 다른 언어로 인정된다. 같은 북게르만어인 아이슬란드어와 페로어와 계통이 같지만 이들 언어와는 상호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들은 모두 고대 노르드어에서 파생되었지만 중세 이후 덴마크어·스웨덴어·노르웨이어는 저지 색슨어의 영향을 받아 섬나라에서 사용되어 변화가 적었던 아이슬란드어·페로어와 상당한 분화를 겪었다. 스칸디나비아 제어는 인도유럽어족 게르만어군에 속해 우랄어족 언어의 하나인 핀란드어와는 계통이 전혀 다르다. 이는 핀란드인들이 자신들을 스칸디나비아에 포함시키지 않는 이유 중 하나이다. 선사시대 이후 두 개의 언어 그룹이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공존해왔다. - 북게르만어군(스칸디나비나어)과 사미어. 이후의 이주로 인해 핀란드어, 이디시어, 로마니어는 수백년 넘게 동안 말해져 왔다. 덴마크는 또한 독일어를 사용하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다. 사미어와 인접 지역의 소의언어의 변형으로 말하는 다른 소수 그룹의 언어와 별개로 다음의 스칸디나비아의 소언어는 유럽 지방 언어, 소 언어 헌장 아래에 보호받고 있다. 현대적 의미에서의 지역학 용어 스칸디나비아 는 19세기 중반 활발했던 스칸디나비아주의 운동에서 기인한다. 이 정치적 운동은 특히 제1차 슬레스비(독일명 슐레스비히) 전쟁(1848년-1850년)과 제2차 슬레스비 전쟁(1864년) 사이 활기를 띠었다. 스칸디나비아주의 운동은 덴마크·스웨덴·노르웨이를 하나의 왕국으로 통일할 것을 주장했다. 그 역사적 배경은 19세기초 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해 스웨덴과 덴마크가 분할되는 시련을 겪은 것이다. 스웨덴에 속했던 핀란드는 1809년 제정 러시아령으로 넘어가 핀란드 대공국이 되었다. 또 1387년부터 명목상 덴마크와 연합 왕국을 이루었으나 사실상 덴마크에 속한 주에 불과했던 노르웨이는 1814년 독립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스웨덴과 인적 동군연합(人的 同君聯合, Personal Union)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핀란드는 제정 러시아령이 되었으므로 북유럽 국가들의 정치적 연합에 대한 계산에서 제외되었고 나머지 덴마크·스웨덴·노르웨이를 포괄하는 용어가 필요했는데 이때 만들어진 용어가 스칸디나비아였던 것이다. 지리학적으로 스칸디나비아는 노르웨이와 스웨덴에 해당하지만 정치적인 용어로는 덴마크까지 포함한 3국을 일컫게 되었다. 스웨덴과 노르웨이는 한 군주 아래 있는 인적동군연합 상태였고 덴마크는 대서양에 아이슬란드, 페로 제도, 그린란드 등의 보호령을 두고 있었다. 이들 보호령은 역사적으로 노르웨이의 속령이었지만 킬(Kiel) 조약에 의해 노르웨이가 덴마크에서 스웨덴으로 넘어갈 때 포함되지 않아 덴마크령으로 남아 있었다. 스칸디나비아주의 운동은 스웨덴-노르웨이가 슬레스비 공국을 합방시키려는 덴마크에게 군사 지원을 거부함으로써 끝이 났다. 슬레스비 공국은 인접한 독일의 홀슈타인 공국과 함께 덴마크와 인적동군연합 상태였다. 1864년 제2차 슬레스비 전쟁은 덴마크가 오스트리아의 지원을 받은 프로이센을 상대로 싸운 전쟁으로 단기간에 프로이센이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을 점령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이후 프로이센은 프랑스-프로이센 전쟁(보불전쟁)에서 승리하며 독일 제국을 세움으로써 발트 해 연안국들 사이에 새로운 힘의 균형이 자리잡았다. 그리하여 정치적 통일을 목적으로 한 스칸디나비아주의 운동은 실패로 끝났지만 1873년에는 스칸디나비아 통화 통합이 이루어져 크로나(Krona)/크로네(Krone)가 제1차 세계대전 때까지 단일 통화로 쓰였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스칸디나비아 국가들간의 협력은 새로 독립한 핀란드도 포함하게 되어 정치적 의미에서의 스칸디나비아라는 용어는 북유럽(노르드)이라는 용어로 대체되었다. 1952년에는 북유럽 이사회(Nordic Council)가 출범하였다. 스칸디나비아의 극심히 추운 지방인 탓에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 오래 봐도 질리지 않고 보기에 편안하며 과장되지 않는 것이 특징인 스칸디나비아 디자인이다. 스칸디나비아 디자인의 특징은 자연적인 것을 지향하며 전통적인 따스함과 현대적인 모던함을 동시에 포괄하는 디자인을 주로 추구한다. 이 디자인은 알바 알토에 의해 유명해졌다.
고대 노르드어 (古代──語, , , , , , 는 북게르만어군에 속하는 언어로서, 9세기에서 13세기에 걸쳐 스칸디나비아 및 바이킹들의 해상거주지에서 사용된 언어이다. 8세기경 노르드 조어가 노르드어로 진화했고, 노르드어는 14세기 중후반을 거치며 현대 북게르만어로 분화하면서 사멸했다. 다만 이 시기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며, 노르드어로 쓰인 문헌은 15세기에도 발견된다. 노르드어는 세 가지 방언으로 나뉜다. 동노르드어, 서노르드어, 고틀란드어가 그것이다. 동노르드어와 서노르드어는 방언연속체를 형성하여 명확한 지리적 경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예컨대 동부 노르웨이에서 동노르드어의 흔적이 발견되고, 서부 스웨덴에서 서노르드어의 흔적이 발견되는 식이다. 고대 서노르드어 사용자들은 오늘날의 노르웨이에 많이 살았고, 동노르드어 사용자들은 오늘날의 덴마크, 스웨덴, 고틀란드에 많이 살았다. 12세기 아이슬란드의 《그라가스》는 스웨덴인, 노르웨이인, 아이슬란드인, 데인인이 모두 같은 언어를 쓴다고 말하고 있으며, 그 언어를 데인어 ()라고 불렀다. 또 특히 서노르드어를 가리키는 다른 표현으로는 노르딕 말 ()이 있었다. 오늘날 노르드어는 북게르만어로 분화하여 아이슬란드어, 페로어, 노르웨이어, 덴마크어, 스웨덴어를 형성하였으며, 이 중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은 여전히 상호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고대 아이슬란드어는 본래 고대 노르웨이어와 기본적으로 동일했으며, 함께 고대 서노르드어를 이루었다.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맨 섬, 잉글랜드 북서부에 세워진 바이킹 정착지들과 노르망디의 노르웨이계 바이킹들이 서노르드어를 사용했다. 덴마크, 스웨덴과 키예프 루시 쪽으로 진출한 바이킹 정착지들과 잉글랜드 동부, 그리고 노르망디의 덴마크계 바이킹들이 동노르드어를 사용했다. 고틀란드 섬과 동유럽의 여러 정착지에서 고대 고틀란드어가 사용되었다. 11세기가 되면 노르드어는 서쪽으로는 빈란드에서 동쪽으로는 볼가 강에 이르기까지 유럽에서 가장 넓은 지역에서 사용되는 언어가 되었다. 키예프 루시에서는 노브고로드에서 노르드어가 가장 오래 살아남아 최소 13세기까지는 사용되었다. 서노르드어의 후계 언어는 아이슬란드어, 페로어, 노르웨이어, 그리고 사멸한 노른어 등의 서스칸디나비아어다. 한편 동노르드어의 후계 언어는 덴마크어, 스웨덴어로 이루어진 동스칸디나비아어다. 노르웨이어는 본래 서노르드어 계통이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동노르드어의 영향을 심하게 받게 되었는데, 덴마크-노르웨이 동군연합 때 특히 그러했다. 이들 언어 중 아이슬란드어와 페로어가 1천여년 동안 노르드어의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언어로 꼽힌다. 덴마크가 페로 제도를 지배하기는 했으나 페로어가 역으로 덴마크어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노르드어는 잉글랜드의 영어 및 저지 스코틀랜드의 스코트어에도 영향을 미쳐서, 영어와 스코트어에는 노르드어 왜래어가 많이 존재한다. 또 노르망디어의 형성과 현대 프랑스어에도 영향을 미쳤다. 노르드어와 같은 계통은 아니지만 노르드어, 특히 노르망디어에 강한 영향을 받은 언어로 스코틀랜드 게일어, 아일랜드어, 러시아어, 벨로루시어, 리투아니아어, 핀란드어, 라트비아어, 에스토니아어 등이 있으며 이들은 상당한 수의 노르드어 외래어를 거지고 있다. 혹설에서는 "러시아"의 어원이 된 "루스" 자체가 노르드인의 일파인 루스인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핀란드와 에스토니아에서 오늘날 스웨덴을 가리키는 말이 각각 "루오트시(), "루트시()라는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상술했듯 현대에 남아있는 언어들 중 옛 노르드어와 가장 가까운 언어는 아이슬란드어이다. 현대 아이슬란드어의 쓰기체계는 노르드어 음소체계에서 파생된 것이며, 현대 아이슬란드어 구사자들은 철자에 다소의 차이가 있지만 노르드어를 대체로 읽을 수 있다. 그러나 발음, 특히 홑소리 발음은 다른 북게르만어가 노르드어와 달라진 만큼 아이슬란드어도 많이 변화했다. 페로어도 노르드어와 유사한 점이 많이 남아 있지만 페로어는 덴마크어, 노르웨이어, 고이델어(스코틀랜드 및 아일랜드어)에 영향을 받았다. 스웨덴어, 덴마크어, 노르웨이어는 옛 노르드어에서 파생, 각자 많은 변화를 거쳤지만 그래도 비대칭적으로 상호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현대 스웨덴어, 노르웨이어, 덴마크어 사용자들은 서로의 말을 따로 공부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으며, 느리게 말하면 거의 알아듣는다. 이 언어들은 쓰기체계도 충분히 유사한데, 서로 국경을 맞대고 있는 탓이 클 것이다. 이 세 언어는 서로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발달했고, 중세 저지독일어에게도 유사한 영향을 받았다. 노르드어 홑소리 음소들은 대부분 장모음과 단모음의 짝을 이루고 있다. 표준 철자법은 장모음에 예음부호 ´를 찍어서 장모음임을 표시한다. 중세 문헌들에서는 이러한 표기가 잘 이루어져 있지 않지만 간혹 부호 표시나 중복표시로 표현하기도 한다. 노르드어는 9개 홑소리 위치가 모두 비음화될 수 있다. 홑소리의 이음이 앞에 비음 닿소리가 위치하면서, 근처 소리에 묻히지 않을 때 홑소리의 비음화가 일어난다. 홑소리에 실린 강세 때문에 비음이 묻혀 버릴 경우, 그 홑소리의 길이가 늘어진다. 이러한 비음화는 다른 게르만 계통 언어들에서도 나타나지만, 그렇게 길게 지속되지는 않는다. 이러한 사항들은 12세기에 쓰여진 《첫 번째 문법조약》에 나와 있기에 알 수 있는 것이며, 만일 여기 보존되어 있지 않았다면 알려지지 못했을 것이다. 《첫 번째 문법조약》에서는 글자 위에 점 하나를 찍어서 비음화를 표시하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이 표시법은 그다지 인기가 없었고 곧 무용지불이 되었다. 동노르드어에서는 11세기를 전후하여 비모음과 구모음이 대부분 융합된 것으로 생각된다.:3 그러나 달라르나 방언에서는 아직 구분이 이루어지고 있다.:4 이하 표에서는 점을 이용해 구모음과 비모음(문자 위에 틸다 부착)을 분리하고 있다. + 9 ~ 12세기 노르드어의 홑소리 체계 전설모음 후설모음 비원순음 원순모음 비원순음 원순모음 고모음 • • • • • • 중모음 • • • • • • 저모음/중저모음 • • • • • • • 비고 저모음/중저모음은 다음과 같이 달리 표현될 수도 있다. = = = 13세기를 전후하여 고대 덴마크어를 제외한 모든 노르드어 방언들에서 Ǫ ()가 Ø 또는 O와 융합했다. 아이슬란드에서는 모든 Ǫ가 Ø와 융합되었는데, 이는 12세기의 《첫 번째 문법조약》에서는 둘이 구분되고 있지만 13세기의 《고 에다》에서는 구분되고 있지 않음으로 증거된다. 또한 역시 《첫 번째 문법조약》에서는 명시된 비모음 구분도 13세기경에는 사라진 것으로 생각된다. + 13 ~ 14세기 노르드어의 홑소리 체계 전설모음 후설모음 비원순음 원순모음 비원순음 원순모음 고모음 중모음 저모음/중저모음 + 서노르드어 및 고대 아이슬란드어 홑소리의 역사 게르만 조어 북서 게르만어 원시 서노르드어 고대 아이슬란드어(첫 번째 문법조약) 후기 고대 아이슬란드어 예시 (노르드어) a a a ⟨a⟩ a a "땅" "노래" "터뜨리기" jɔ jø "방패" "만남" "아침" OWN vėtr/vėttr "우리의(복수형 소유격)" "더 어린 쪽" (acc. neut. wk.) v). 음소 는 n 또는 다른 g 뒤에서 로 발음되고, 와 앞에서는 로 발음된다. . 동노르드어의 /ʀ/ 음소는 그 발음 위치가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설첨음이었다가, 입천장 치찰음으로 재구축되었다.:2 이 음소는 게르만 조어의 음소 에서 파생된 것이며 최종적으로는 음소 로 진화했다. 이 과정은 서노르드어에서는 진작 이루어졌다. 순음 치음 치경음 후치경음 구개음 연구개음 순구개음 성문음 파열음 / / / 비음 () 마찰음 / () / () () 진동음 접근음 치경 설측접근음 겹닿소리 , , 은 단어 맨 앞에만 발생한다. 이 음가들이 앞의 가 ㅎ( 또는 )으로 발음되면서 그 뒤의 닿소리들도 발음되어 흘, 흐ㄹ, 흔ㄴ 식으로 발음되는 것이었는지, 아니면 각각 단일 무성 공명음 ㄹ, ㄹ, ㄴ으로 발음되는 것이었는지는 불확실하다. 고대 노르웨이어, 고대 덴마크어, 후기 고대 스웨덴어에서는 , , 이 홑닿소리 로 간략화되는데, 이를 근거로 노르드어에서도 단일 무성 공명음으로 발음된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의 발음도 불확실하다. (게르만조어의 발음), 또는 나 였을 수도 있다. 상술한 과 달리 는 모든 방언에서 겹닿소리 형태를 보다 오래 유지했다. 아이슬란드어에서는 아예 오늘날까지 무성 공명음으로 결합되지 않고 있으며, 대신 파열음 으로 경음화되었다. 이는 이 음가가 무성 공명음이 아니고 보다 강한 협착기식음이었음을 시사한다. 조상 언어인 노르드 조어는 대 푸타르크(고대 룬 문자)로 쓰여진 반면, 노르드어는 소 푸타르크로 쓰여졌다. 소 푸타르크는 16개 문자로만 구성되어 있었으며, 문자 수가 모자랐기 때문에 홑소리 에 해당하는 문자가 에도 사용되고 홑소리 에 해당하는 문자가 에도 사용되었다. 보다 시간이 지난 뒤에는 푸토르크(중세 룬 문자)가 사용되었다. 라틴 문자가 도입된 뒤에도 중세 당시에는 하나의 표준된 철자법이 존재하지 않았다. 룬 문자 윈(ᚹ)을 수정한 문자가 벤드(Ꝩ)라고 불리면서 음가 , , 를 나타내기 위해 잠깐 쓰였다. 장모음은 예음부호 ´ 를 찍어서 표시하기도 했지만, 해당 모음을 두 번 써서 장모음임을 표시하거나 아예 아무 표시도 하지 않기도 했다. 오늘날 사용되는 표준화된 노르드어 철자법은 19세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노르드어의 어순 배열은 영어에 비해 널널하다. 노르드어의 나열 구조는 영어와 다소 달라서, 영어에서 "a, b, 그리고 c" 및 "a, b, 또는 c"라고 할 경우 노르드어는 각각 "a와 b와 c" 또는 "a와 b 또는 c"라고 하게 된다. 노르드어는 어형변화가 중간 정도의 굴절어로서 명사와 동사에서 상당한 수준의 변화가 일어난다. 대부분의 결합 형태소는 현대 아이슬란드어에서, 특히 명사 어형변화군에서 그대로 가지고 있다. 반면 현대 노르웨이어는 이에 비해 보다 분석적인 단어 구조로 이행했다. 가장 오래된 노르드어 문헌은 8세기경 룬 문자로 새겨진 각석들이다. 룬 문자는 15세기까지도 널리 쓰였으며, 스웨덴의 일부 지역에서는 19세기에도 사용된 바 있다. 노르드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한 11세기 전후로 라틴 문자가 들어왔다. 라틴 문자로 쓰인 가장 오래된 노르드어 문헌은 12세기 중반의 물건이다. 그 뒤 노르드어는 중세 유럽 특유의 문헌 언어로 사용되었으며, 그 문헌들 중 아직까지 보존된 것은 대부분 아이슬란드에서 쓰여졌다. 가장 유명한 것들로는 아이슬란드 사가를 비롯한 사가들이 있으나, 그 외에도 기사 문학, 고전 신화, 구약성경 따위를 노르드어로 번역한 것도 존재한다. 교육용 자료도 노르드어로 쓰여져서, 상술한 《첫 번째 문법조약》이 그러한 예이다. 그 외에 많은 수의 서한이나 공문서가 노르드어로 쓰여졌다. 노르드어에서 발생한 혁신 대부분은 노르드어가 사용되는 지역 전체에 확산되었다. 그 결과 노르드어의 방언들은 서로 매우 닮았으며 같은 언어로 여겨졌다. 스노리 스툴루손의 《헤임스크링글라》에서 발췌한 다음 두 문장에 나오다시피, 당대에 노르드어는 "데인어()"라고도 불리고 "노르드 말()"이라고도 불렸다.
로마자 () 또는 라틴 문자 ()는 세계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문자이며, 음소 문자 체계이다. 영어를 포함한 대부분의 유럽 언어를 기록하는 표준 문자이며 유럽인이 정착한 곳과 그 밖의 나라들에서도 쓰이고 있는 문자다. 일반적으로 로마자를 쓰지 않는 언어가 공용어인 나라에는 로마자 표기법이라는 어문 규정이 따로 있다. 로마자는 본래 라틴어의 문자였으며, 오래전부터 서유럽·중부 유럽의 여러 언어에서 사용되고 있지만, 16세기 이후에 진행된 유럽 열강의 식민지 확장에 따라서 현대에는 이것들 이외에도 사용 언어가 많다. 로마자는 음소문자(알파벳)의 일종이다. 보통 단순히 "알파벳"을 말하면 로마자를 가리킨다. 그러나 본래 알파벳의 뜻은 그리스 문자나 키릴 문자 등을 포함한 총칭이다. 현재, 라틴어의 23자에 J, U, W를 더한 26자를 기본으로 본다. 현대 영어에서 쓰이는 로마자는 다음과 같다. 영어에 쓰이는 글자라는 뜻에서 영자 (英字)라고도 한다. 하지만 영어에서만 쓰이는 것이 아니므로 영자 는 올바른 표현이 아니다. A B C D E F G H I J K L M N O P Q R S T U V W X Y Z a b c d e f g h i j k l m n o p q r s t u v w x y z 영어, 라틴어, 이탈리아어 등에서는 사용하지 않지만, 일부 독일어, 아이슬란드어, 스웨덴어, 프랑스어, 포르투갈어, 스페인어 등에는 변형된 확장 문자를 사용한다. 양음 부호 억음 부호 곡절 부호 움라우트/트레마 Á É Í Ó Ú Ý À È Ì Ò Ù Â Ê Î Ô Û Ä Ë Ï Ö Ü Ÿ á é í ó ú ý à è ì ò ù â ê î ô û ä ë ï ö ü ÿ 세디유 물결표 오고넥 합자 룬 문자유래 Ç Ş Ã Õ Ñ Ą Ę Į Ų Æ Œ Ø IJ ẞ Þ ç ş ã õ ñ ą ę į ų æ œ ø ij ß þ 로마자는 기원전 7세기에 에트루리아 문자를 토대로 만들어졌다. 에트루리아 문자는 그리스 문자에 기원을 두었다. 에트루리아 문자의 26글자 중 로마인들은 21글자를 따왔다. 원래의 로마자에 사용된 글자는 A, B, C (/g/·/k/ 표시), D, E, F, Z (그리스 문자 Z/ze:ta/ 표기를 위함), H, I (/i/·/j/ 표시), K, L, M, N, O, P, Q, R (그리스 문자를 따라 오랫동안 P로 표기), S, T, V (/u/·/v/·/w/ 표시), X 이었다. 나중에 그리스어 Z(/ze:ta/)는 탈락되고 새 글자인 G가 그 자리에 추가되었다. 기원전 1세기에 그리스를 정복한 후에는 그리스 문자에서 Y(/y/, 그리스 문자와 소리를 땀)와 Z를 따와 끝에 붙였다. 그리하여 로마자는 23글자가 되었다. 중세에는 두 소리를 가진 I를 구별해 쓰기 위해 J가 추가되고 세 소리를 가진 V를 구별하기 위해 U와 W가 추가되었다. 로마자의 세계 분포도. 진한 녹색은 로마자를 유일한 문자로 사용하는 지역이며, 연한 녹색은 다른 문자와 함께 사용되는 지역이다. 로마자는 중세 이후, 라틴어에서 유래하는 로망스어 뿐만 아니라 서유럽·중부 유럽의서방 기독교(천주교·개신교) 지역의 거의 모든 언어의 문자로 사용된다. 여기에 해당되는 언어로는 게르만어파, 슬라브어파의 일부, 발트어파, 켈트어파, 바스크어, 몰타어, 우랄어족의 일부 등이다. 서방 기독교 지역은 아니지만, 알바니아어와 루마니아어의 표기에서도 사용된다. 현대 이후 문자가 없는 언어가 새롭게 문자 표기법을 정하는 경우, 대부분은 로마자가 채용되었다. 그러나 구소련 지역의 소수 민족 언어 표기에는 키릴 문자가 사용되었다. 이미 문자를 가지고 있었는데 로마자로 전환한 언어도 있다. 이것은 서양 열강에 의한 식민지화와 천주교·개신교 선교사의 활동에 의한 것이 크다. 근대 이후 로마자로 전환한 언어로는 베트남어, 인도네시아어, 타갈로그어, 터키어 등이 있다. 구소련 해체 이후 아제리어, 우즈베크어와 투르크멘어 표기에도 사용되고 있다. 문자 라틴어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에스페란토 한국어 A 에이 B 비 C , 시 D 디 E , 이 F , 에프 G 지 H , 에이치 I 아이 J 제이 K 케이 L , 엘 M , 엠 N , 엔 O 오 P 피 Q 큐 R , , 아르 S , 에스 T 티 U 유 V 브이 W X 엑스 Y , 와이 Z , 제트 비교하기 그리스 문자 히브리 문자 키릴 문자 로마자 글꼴 산세리프 로마체 로마 숫자
스칸디나비아반도 (Scandinavian Peninsula)는 유럽의 북서쪽 끝에 위치해 발트해를 낀 반도이다. 북쪽의 러시아와 핀란드에서 시작해 남쪽으로 덴마크에 거의 닿는다. 스칸디나비아반도에는 스칸디나비아산맥을 기준으로 서쪽에 노르웨이, 동쪽에 스웨덴이 있다. 스칸디나비아반도는 유럽에서 가장 큰 반도이다. 길이는 약 1,850km이며, 폭은 약 370~805km이다. 스칸디나비아반도는 여러 바다로 둘러싸여 있다. 동쪽으로 발트해(보트니아만 포함) 남서쪽과 서쪽으로 북해(카테가트 해협과 스카게라크 해협 포함) 서쪽으로 노르웨이해 북쪽으로 바렌츠해 반도에서 가장 높은 산은 노르웨이의 갈회피겐산이다. 유럽 최대의 빙하인 요스테달 빙하도 있다. 인구의 대부분은 반도의 남쪽 끝에 몰려 있다. 스웨덴의 스톡홀름과 예테보리, 노르웨이의 오슬로가 가장 큰 도시이다. 스칸디나비아반도의 기후는 매우 따뜻하다. 예를 들어 오슬로의 경우 겨울 평균 기온이 영하 5도 정도로 대한민국, 일본의 겨울 날씨와 비슷하다. 이는 멕시코 난류의 영향을 받아 겨울에도 중남미의 열이 스칸디나비아반도에도 올라오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스칸디나비아반도 남부 지역은 일본 도쿄보다도 겨울철 기후가 따뜻한 경우가 존재한다. 반면, 멕시코 난류의 영향을 거의 받지 못하는 스발바르 제도, 스웨덴 북부, 핀란드의 경우 겨울에는 영하 30~50도까지 떨어지기도 한다. 최근에는 지구 온난화의 영향으로 겨울에 영하 20도를 기록하거나 여름에 30도가 넘는 일이 많아졌다. 분류:유럽의 반도 분류:스칸디나비아 분류:노르웨이의 지리 분류:스웨덴의 지리 분류:핀란드의 지리 분류:러시아의 지리
스칸디나비아산맥 (은 스칸디나비아반도를 가로지르는 산맥이다. 이 산맥의 서쪽은 북해에까지 이르러 가파른 경사로 바다에 떨어져 유명한 노르웨이의 피오르 해안을 이룬다. 동쪽은 스웨덴으로 들어가면서 점점 완만해지며 평지로 접어든다. 이 산맥의 북쪽은 노르웨이와 스웨덴의 자연 국경 구실을 한다. 하지만 북쪽의 노르카프 가까이에서는 거의 언덕이나 구릉 수준으로 낮아진다. 이 산맥의 산은 그리 높지 않다. 노르웨이 남부의 갈회피겐산(Galdhøpiggen)이 스칸디나비아산맥의 최고봉으로 높이는 2,469 m 이다. 하지만 위도가 높고, 북대서양의 습기의 영향을 받음에 따라 빙원과 빙하가 많다. 스웨덴 쪽의 최고봉은 케브네카이세산(Kebnekaise)으로 높이는 2,111 m 이다. 지질학적으로 스칸디나비아산맥은 스코틀랜드와 아이슬란드를 거쳐 대서양 건너의 북아메리카 애팔래치아산맥과 연결된다. 지질학자들은 고대의 판게아 초대륙이 나뉘기 전까지는 하나의 산맥이었으며, 현재의 산맥은 칼레도니아 조산 운동의 흔적이라 여긴다. 분류:스칸디나비아 분류:유럽의 산맥 분류:노르웨이의 지리 분류:스웨덴의 지리 분류:핀란드의 지리
발트 3국 right 발트 3국 () 또는 발트 국가 는 발트해 동쪽의 세 나라를 지칭하는 말이다. 발트해 연안국이라는 명칭이 좁은 의미에서 발트 3국에 한해 쓰이기도 한다. 발트 3국에 해당하는 나라는 다음과 같다.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국가 공식명칭 면적km² 면적 비율% 수도 공용어 종교 통화 에스토니아 공화국 Eesti Vabarii 45,226 25.8 탈린 에스토니아어 루터교 유로 라트비아 공화국 Latvijas Republika 64,589 36.9 리가 라트비아어 루터교 유로,라트 리투아니아 공화국 Lietuvos Respublika 65,200 37.2 빌뉴스 리투아니아어 가톨릭 유로,라트스 이들은 오늘날 독립국이지만 소련의 지배하에 있는 공화국이었던 시절에는 발트해 연안의 공화국(Baltic Republics)으로 불리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에는 핀란드도 때로 "발트 4국"의 일원으로 포함되었다(특히 소련의 입장에서). 예를 들어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에서 나치 독일은 핀란드를 발트해 연안국으로 거론했다. 1920년대와 1930년대 이후, 핀란드는 발트해 연안국이 아니라 북유럽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핀란드의 입장이 점차 널리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보통 발트 3국은 한데 묶여 거론되지만 이들이 한 집단으로 보기에는 공통점이 적다는 것이 지적되기도 한다. 에스토니아는 노르딕 국가가 되고 싶어하며 리투아니아는 폴란드와 동유럽과의 관계에 중점을 둔다. 발트 3국은 제2차 세계 대전 후 반세기 동안 소련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흔히 동유럽의 일부로 간주된다. 그러나 역사적으로는 스웨덴·러시아·폴란드·독일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문화·지리적으로 발트 3국은 북유럽에 속한다. 그래서 타협안으로 발트 3국을 이를 때 북동유럽이라는 명칭을 쓰기도 한다. 발트해 연안국은 넓은 의미에서는 발트 3국에 한정되지 않고 발트해에 접해 있는 모든 국가를 이룬다. 발트 3국 가까이에는 옛 동프로이센의 북쪽 부분에 해당하는 러시아의 칼리닌그라드가 있다. 발트 3국은 세 나라의 면적을 모두 합쳐도 러시아의 100분의 1 가량에 불과한 작은 나라들이며, 발트해 동부 연안의 저평한 지역을 차지한다. 지형은 대부분의 지역이 매우 평탄하며, 가장 높은 곳도 300m 가량에 불과하다. 기후는 냉대에 속하여 춥고 긴 겨울을 가지고 있으나, 대서양과 발트해의 영향도 강하므로 위도에 비해서는 비교적 온화하여, 같은 위도의 러시아 내륙에 비해서는 훨씬 따뜻하다. 발트 3국의 공동 역사는 13세기경 독일계 검의 형제 기사단(Sword Brethren)이 기독교와 봉건주의를 가지고 들어오면서 시작되었다. 그 후 덴마크·스웨덴·폴란드·러시아·독일이 발트 3국 지역을 두고 각축을 벌였다. 1582년에는 에스토니아 북부를 제외한 발트 3국 지역 거의 전체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19세기에는 이 지역이 러시아 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독일인 제후들과 스웨덴인 지배층들이 있었으나 이들이 러시아 황제에게 충성을 다했기 때문에 이 지역은 자치권을 받아 독일 문화가 많이 퍼졌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면서 발트 3국은 독립국이 되었다. 그러나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이 체결됨에 따라 나치 독일은 소비에트 연방이 발트 3국 거의 모두를 합병하는 것에 동의했다. 단기간의 소련 통치 후 독일이 침공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말기에는 다시 소련이 침공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 발트 3국은 다시 소련에 합병되었다. 2차대전 종전 후 1991년 소련이 해체될 때까지 발트 3국은 소련의 점령하에 있었다. 이들은 1990년에 독립을 선언하였으며 소련은 1991년 9월 6일 발트 3국의 독립을 인정하였다. 발트 3국은 신생국이 아니라 1차대전과 2차대전 사이 존재했던 독립국이 복원된 것이라고 자처했다. 이로써 그들은 냉전 시대 소련의 지배가 불법 점령이었다는 그들의 주장을 재차 강조하였다. 오늘날 발트 3국은 자유 민주주의 의회 공화국으로 시장 경제는 고속도로 발전하고 있다. 2002년 발트 3국은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와 유럽 연합(EU)에 가입을 신청함으로써 오랜 정치적 숙원이자 소련 탈퇴 후 주된 목표이던 서유럽과의 통합 달성에 첫걸음을 내디뎠다. 그리하여 2004년 3월 29일 북대서양 조약 기구에, 2004년 5월 1일에는 유럽 연합에 가입했다. 발트 3국은 문화·역사적으로 공통점도 많지만 그들의 언어는 두개의 전혀 다른 어족에 속한다. 라트비아어와 리투아니아어는 인도유럽어족에 속한 발트어파를 이룬다. 에스토니아어는 우랄어족의 어파인 핀우그리아어파에 속한다. 계통적으로 핀란드어와 깊은 관련이 있다. 또 기독교의 서로 다른 교파에 속해있다.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는 개신교의 일파인 루터교 국가이다. 또 이들 국가에서 소수집단을 이루는 러시아인들은 러시아 정교 신자이다. 리투아니아는 가톨릭 신자들이 주를 이룬다. 중세 때부터 시작되어 오랫동안 계속된 독일계와 19세기 이후의 러시아계에 의한 지배의 영향으로 나이든 세대의 많은 수가 아직도 제2언어로 독일어와 러시아어를 사용한다. 또 역사적으로 스웨덴, 폴란드, 러시아의 영향권에 들어 있었다. 또 소련에 병합된 이후로 이들 국가, 그중에서도 특히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에는 러시아인들이 대거 들어오면서 러시아인이 중요한 소수민족 집단이 되었다. 소련 지배의 이러한 유산으로 독립 후 민감한 민족문제의 불씨를 남겨두고 있다. 1992년에 발트 3국은 음악 문화 발전을 위한 국제 협력적 지원의 공로로 폴라음악상을 공동수상하기도 했다. 스칸디나비아 *노르딕 국가 북유럽 발트해 연안국 유럽 *베네룩스 캅카스 3국 발틱컵 분류:폴라음악상 수상자 분류:명수 3 분류:발트해
게르만어파 (-語派 Germanic languages)는 인도유럽어족의 한 어파이다. 로마 제국의 북쪽 변경에 정착한 게르만인들이 게르만 제어를 사용했다. 몇 가지 독특한 언어학적 특성을 지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그림의 법칙으로 알려진 자음 추이이다. 일찍이 게르만어파의 몇몇 언어를 쓰는 사람들은 룬 문자를 개발했지만 그 사용은 상대적으로 제한되어 있었다. 동게르만어군의 조어(祖語)는 울필라스(Ulfilas) 주교가 성경을 고트어로 번역하려 고안한 고트 문자를 썼다. 그 후 모국어인 게르만어 외에도 라틴어를 구사하게 된 기독교 성직자들과 수도사들이 게르만어를 약간 수정된 로마 문자로 기록하기 시작했다. 여러 게르만 제어는 보통 쓰이는 로마 문자의 자모에 새 글자나 발음 구별 부호를 도입했다. 그 예로 움라우트, 에스체트 (ß), Ø, Æ, Å, Ð, ȝ, 룬 문자에서 따온 Þ·ƿ 등이 있다. 역사적으로 독일어 인쇄에는 프락투어 (Fraktur)라는 독특한 인쇄체가 사용되었다. 게르만어파의 고유한 특성은 다음과 같다. # 인도유럽 조어의 시제 체계가 과거와 현재(또는 공통시제)로 단순화되었다. # 과거형을 나타내기 위해 모음 전환 대신 치음 접미사(/d/ 또는 /t/)를 쓴다. # 두 가지 동사 활용 유형이 구별된다. 즉 약변화 동사와 강변화 동사가 있다. 영어에는 161개의 강변화 동사가 있는데 이들은 모두 영어에 고유한 낱말이다. # 약변화·강변화 형용사의 구별이 있다. 현대 영어의 형용사는 비교급·최상급 이외에는 어형이 변화하지 않지만 고대 영어에는 형용사 앞에 관사가 있는지, 지시사가 있는지, 둘다 없는지에 따라 어형이 바뀌었다. # 그림의 법칙으로 알려진 자음 추이. # 비(非)인도유럽어 어근이 상당히 많다. 즉 게르만어 어근 중에는 다른 인도유럽어에서 찾을 수 없는 것이 많다. 여기에는 "물다(bite)"·"씹다(chew)" 등의 보편적인 행동을 뜻하는 낱말과 {"배(boat)"를 제외하고} 배·바다에 관련된 모든 낱말이 포함된다. # 강세가 어근으로 옮겨졌다. 영어는 강세가 불규칙하지만 영어에 고유한 낱말은 어근에 무엇이 첨가되든 언제나 강세를 받는 음절이 동일하다. 게르만어파를 다른 인도유럽어족 어파와 구별하는 가장 중요한 특성이라 논증할 수 있겠다. 게르만어파는 모두 가상의 게르만 조어에서 파생된 것으로 생각된다. 게르만어파에 속하는 언어 간의 구분은 명확하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며 보통 연속체를 이루어 가까운 방언은 서로 알아들을 수 있는 반면, 멀리 떨어진 방언은 서로 알아듣기 힘든 경향이 있다. 이 가계도는 주요 언어와 특기할 만한 언어만이 표시되었다. 서게르만어군 동게르만어군 북게르만어군 (고대 노르드어에서 파생) * 서노르드어(섬 노르드어) ** 아이슬란드어 ** 페로어 ** 노른어 {사어(死語)} ** 노르웨이어 뉘노르스크 (신노르웨이어) * 동노르드어(대륙 노르드어) ** 덴마크어 *** 노르웨이어 보크몰 (덴마크-노르웨이어) ** 스웨덴어 뜻 아프리칸스어 네덜란드어 영어 독일어 덴마크어 고트어 아이슬란드어 스웨덴어 천 duizend duisend thousand tausend tusind tosen t? þúsund tusen 백 ☞ honderd hundred hundert hundrede hundreð hundr(u/a)ð hundra 열둘 ☞ twaalf twelve zwölf tolv tolv tólf tolv 이리/늑대 ☞ wolf wolf Wolf ulv wulv úlfur varg 열하나 ☞ elf eleven elf elleve eliv ellefu elva 다섯 vijf vyf five fünf fem femm fimm fem 넷 vier vier four vier fire før fjórir fyra 위하여 vir voor for für for faur fyrir för 자유로운 vry vrij free frei fri freis fri 나의 my mijn my mein min meins minn min (사냥/)개 hond hond (hunt)dog / hound Hund hund hunds hundur hund 공항 lughawe luchthaven airport(※flyhaggon/fliflat) Flughafen lufthavn - flygplats 학교 skool school school Schule skole skola 나쁜 sleg slecht bad schlecht / schlimm slet ubils slæmur dålig 남편 eggenoot echtgenoot husband Ehemann ægtemand eiginmaður man/husbonde 함께 saam samen together zusammen tilsammen samana saman tillsammans 행동, -질 aksie actie action Aktion aktion waurstwei aktion 새 voël vogel bird / fowl Vogel fugl fugls fugl fågel 부디, 제발 asseblief alstublieft please bitte jabai wileis varsågod 저녁 인사 goeienaand goedenavond good evening guten Abend god aften god kväll 열린 oop open open offen åben us-lukan opinn öppen 여자, 부인 vrou vrouw woman/wife Frau frue / kvinde qino kona kvinna 물 water water water Wasser vand wato vatn vatten 언어의 계통 게르만 조어 사전 게르만어 민족학 보고서(Ethnologue Report for Germanic) 게르만 조어 복원 모임
발칸반도 ()는 유럽의 남동부에 있는 반도이다. 아드리아해, 이오니아해, 에게해, 마르마라해, 흑해에 둘러싸였다. 유럽과 확실하게 구분짓는 지협이 없기 때문에 발칸반도의 범위와 지형적 경계를 정하는 기준이 언제나 일정하지는 않지만 북쪽 경계로 도나우강을 삼기도 한다. 보통 그리스, 알바니아, 불가리아, 터키의 유럽 부분, 그리고 유고슬라비아의 일부였던 나라들이 발칸반도에 포함된다. 루마니아가 포함되기도 한다. 고대부터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으며, 이 과정에서 다양한 세력이 뒤섞이며 오늘날 민족, 언어, 종교, 문화, 정치적으로 복잡한 구성을 가지게 되었다. 발칸반도의 이름은 불가리아와 세르비아에 걸친 발칸산맥에서 유래하였다. 발칸은 산 을 뜻하는 터키어이며, 오스만 제국의 지배기 이후로 산맥의 이름으로 사용되었다. 반도 전체를 지칭하는 이름으로 19세기 이후 확대되어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 이래 유럽의 화약고 라는 별칭을 가지게 되었고, 보다 최근에는 구유고슬라비아의 분열으로 발칸이라는 이름이 발칸화라는 용어를 낳았다. 이처럼 발칸이라는 용어는 부정적 의미를 함축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발칸반도라는 이름 대신 동남유럽 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발칸반도는 도나우강, 사바강, 쿠파강을 경계로 하여 그 이남의 지역을 말한다. 이에 따르면 발칸반도는 그리스, 몬테네그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북마케도니아, 불가리아, 알바니아, 코소보를 전부 포함하고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의 대부분을 포괄한다. 터키, 루마니아, 슬로베니아, 이탈리아의 일부도 여기에 속한다. 터키의 동트라키아 지방, 루마니아의 북도브루자 지방, 슬로베니아의 프리모르스카 지방, 이탈리아의 트리에스테과 고리치아가 발칸반도에 속하는 영역이다. 영토의 작은 부분만이 발칸반도에 속하기 때문에, 보통 루마니아, 슬로베니아, 이탈리아는 발칸 국가에서 제외된다. 그러나 유럽 대륙과 발칸반도를 구분하는 경계는 명확하지 않다. 정치적으로는 루마니아와 슬로베니아까지 포괄하여 발칸반도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이때 발칸반도의 범위는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헝가리, 우크라이나의 이남이 된다. 매우 드물게 이탈리아의 트리에스테와 우크라이나의 오데사를 잇는 직선의 이남으로 발칸반도를 정의하기도 한다. 남유럽을 이루는 세 반도 중 하나로서 아드리아해, 이오니아해, 에게해, 마르마라해, 흑해가 둘러싸고 있다. 발칸반도의 대부분은 산지로 이루어져 있다. 디나르알프스산맥이 발칸 반도의 7개 국(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코소보, 알바니아)을 지난다. 불가리아 중부와 세르비아 동부에 걸친 발칸산맥은 발칸반도라는 이름의 어원이 된 산맥이다. 발칸산맥 남쪽으로는 그리스에 인접한 로도피산맥이 있고, 북쪽으로는 루마니아를 가로지르는 트란실바니아알프스산맥이 있다. 발칸반도에서 루마니아를 제외하는 관점에서는 트란실바니아알프스산맥은 발칸반도에 포함되지 않는다. 산맥들은 주로 북서쪽에서 남동쪽을 향해 사선으로 뻗어 있다. 발칸반도 최대의 호수인 슈코더르호는 알바니아와 몬테네그로 사이에 있다. 람사르 협약이 지정한 국제적으로 중요한 습지이며, 유럽 최대의 조류 보호 구역이기도 하다. 보통 발칸반도에 포함되는 국가는 다음과 같다. - 이스탄불 주변의 유럽에 속한 부분만 포함되며, 전통적으로 루멜리아 또는 동트라키아로 불림. 와 도 때로 발칸반도 국가에 포함된다. 발칸반도 국가에 포함되지는 않지만 이웃하거나 발칸반도 지역에 지정학적·문화적·역사적으로 큰 영향을 끼친 나라는 다음과 같다. 키프로스 (키프로스 분쟁 참조)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참조) 이탈리아 (달마티아, 자다르, 리예카 참조) 우크라이나와 몰도바 (몰다비아 공국의 역사 참조) 러시아 (세르비아의 역사 참조) 발칸반도는 유럽과 아시아의 교차점으로 그 지정학적 중요성으로 인해 역사적으로 다양한 세력의 지배를 받았다. 오늘날 유럽의 화약고라 불리는 발칸반도의 복잡한 민족, 문화, 영토 문제는 발칸반도의 역사에서 기인한다. 1815년 발칸반도 18세기 말에 발칸반도는 크게 세 개의 세력에 의해 분할된 상태였다. 오스만 제국이 발칸반도의 대부분을 지배하는 가운데, 오스트리아는 슬로베니아를 계속 영유하였고, 베네치아 공화국은 달마티아 내부까지 영역을 확대하였다. 여기에 더하여 몬테네그로와 라구사 공화국 같은 작은 나라와 오스만 제국의 속령인 왈라키아 공국과 몰다비아 공국이 있었다. 나폴레옹의 정복활동은 발칸반도의 정세에 큰 변화를 가져오는데, 나폴레옹에 의해 베네치아 공화국(1797년), 라구사 공화국(1808년)이 멸망하고 오스트리아 제국도 발칸반도의 영토를 잃는다.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 성립된 빈 체제에서 오스트리아는 나폴레옹에게 상실했던 영토를 되찾았으며, 베네치아 공화국이 지배하던 영역과 라구사 등을 새로 장악함으로써 크로아티아, 슬라보니아, 시르미아 등을 얻는다. 한편 오스만 제국은 1817년 세르비아가 자치권을 얻고 1821년 그리스가 독립하는 등 발칸 지역에서의 영향력을 서서히 상실하고 있었고, 왈라키아 공국과 몰도바 공국도 1861년 하나의 나라로 통일되어 루마니아 공국이 된다. 이에 따라 오스만 제국이 지배하고 있던 발칸반도 지역은 독립 국가가 되거나 자치령으로 전환되기 시작한다. 이런 상황에서 오스트리아는 이탈리아 통일 전쟁과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연달아 패배한 이후 발칸반도로 관심을 돌려 발칸반도에서 영토 확장을 시도하였고, 러시아도 범슬라브주의에 따라 발칸반도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하였다. 1877년 러시아는 러시아-튀르크 전쟁을 일으켜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승리한다. 그 결과(산스테파노 조약) 발칸반도에서 러시아의 세력이 강해져 루마니아 공국은 루마니아 왕국이 되어 오스만 제국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나고,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도 완전 독립한다. 불가리아 역시 자치권을 얻어 오스만 제국은 발칸반도를 거의 상실하게 된다. 발칸반도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이 지나치게 강해지는 것을 경계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영국, 독일 등의 유럽 열강들은 1878년 오토 폰 비스마르크 주재로 베를린 회의를 열어 산스테파노 조약을 개정한다. 이 회의의 결과 발칸 지역에서의 거대 슬라브 국가의 출현이 방지되고, 오스만 제국은 마케도니아와 트라키아 지방을 돌려 받음으로써 러시아의 영향력은 제약받는다. 중재의 대가로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관할권을 얻고, 영국은 키프로스의 관할권을 얻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칸반도에서 오스만 제국의 쇠퇴는 계속되어, 1881년 오스만 제국은 그리스에게 테살리아를 양도한다. 1908년 불가리아는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완전 독립하여 불가리아 왕국이 된다. 한편 같은 해 오스만 제국에서는 청년 튀르크당이 혁명을 일으켜 압뒬하미트 2세가 퇴위하고 미드하트 헌법이 부활한다. 이에 따라 청년 튀르크당은 오스만 제국의 서구화, 근대화를 추진하는데, 이 과정에서 튀르크 민족주의가 확산되면서 발칸반도의 다른 민족들의 반발이 심해진다. 이런 상황에서 이탈리아는 오스만 제국이 지배하던 리비아를 얻기 위해 1911년 이탈리아-튀르크 전쟁을 일으킨다. 오스만 제국이 이 전쟁에서 대패함으로써 오스만 제국의 허약함이 드러났고, 이는 그리스 왕국, 세르비아 왕국, 몬테네그로 왕국, 불가리아 왕국 등 발칸 국가들이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여 선전포고하게 하는 계기가 된다. 1912년 그리스,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불가리아는 발칸 동맹을 결성하고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오스만 제국에 제1차 발칸 전쟁을 일으킨다.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던 알바니아도 독립을 위해 발칸 동맹군 편에서 싸우게 된다. 이탈리아-튀르크 전쟁 때문에 오스만 제국의 주력군이 아프리카에 있었던 까닭에, 두 달만에 오스만 제국은 대패한다. 발칸 전쟁에서 패배한 오스만 제국은 수도 이스탄불을 제외한 발칸반도의 모든 영토를 상실했으며, 알바니아도 독립국이 된다. 오스만 제국이 할양한 남은 영토는 세르비아, 불가리아, 그리스 등이 나누어 가지게 되는데, 영토 분배 과정에서 발칸 동맹 국가 간 불화가 생기게 되면서 제2차 발칸 전쟁이 일어난다. 제 1차 발칸 전쟁의 결과 세르비아는 마케도니아의 일부를, 그리스는 크레타섬을, 불가리아는 남루멜리아와 동트라키아, 그리고 마케도니아의 남은 일부를 차지한다. 불가리아의 지나친 팽창에 불만을 품은 세르비아는 그리스, 몬테네그로, 루마니아와 함께 동맹을 맺어 불가리아에 맞섰다. 1913년 불가리아가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발발한 제2차 발칸 전쟁은 불가리아에 대항하여 알바니아를 제외한 발칸 반도의 모든 국가가 싸우는 양상이 되었다. 여기에 오스만 제국이 영토 회복을 위해 불가리아에 선전포고를 하고, 결국 불가리아는 항복을 하게 된다. 불가리아는 부쿠레슈티 조약을 맺어 제 1차 발칸 전쟁으로 얻었던 모든 영토를 할양해야 했으며, 세르비아와 그리스, 루마니아는 영토를 확장한다. 오스만 제국도 조약을 통해 잃었던 영토를 일부 회복한다. 발칸반도는 제1차 세계대전의 직접적 도화선이 된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1908년에 보스니아를 완전 병합하고 발칸반도로의 진출을 계속하고 있었다. 한편 제 1, 2차 발칸 전쟁을 거쳐 세르비아가 신흥 강국으로 성장하게 되는데, 슬라브계 왕국이었던 세르비아는 러시아의 지원을 받으며 발칸반도 내의 슬라브 민족을 통일하여 강력한 국가를 수립하려는 구상이 있었다. 이러한 범슬라브주의는 다민족 국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게는 심각한 위협이었다 . 슬라브 민족의 이탈을 선동하여 제국의 붕괴를 야기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1914년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사라예보 사건이 터지자 세르비아를 침략할 구실을 찾고 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하였고, 갖가지 조약과 동맹 관계가 작용하여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된다. 제2차 발칸 전쟁 이후 세르비아와 원수 관계가 된 불가리아는 세르비아에 대항하여 동맹국으로 참전한다. 제1차 세계대전의 한가운데에 있었던 발칸반도는 전후 큰 변화를 겪게 된다. 동맹국이 패배하게 되면서 발칸반도의 정치적 지도는 완전히 새로 그려졌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오스만 제국이 해체되면서 신생 국가들이 새로 생겨났고, 세르비아는 이들 신생 국가 중 상당수를 흡수하여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수립함으로써 범슬라브주의를 실현한다. 그리스 역시 세브르 조약으로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영토를 할양받는다. 오스만 제국은 이스탄불 주변을 제외한 발칸반도의 모든 영토를 상실하고, 아나톨리아의 일부 지역까지도 그리스에게 내어 준다. 그리스는 더 나아가 패전한 오스만 제국을 침략하여 대그리스주의를 실현하여 비잔티움 제국을 재건하고자 하였으며, 1919년 그리스-터키 전쟁을 일으킨다. 그러나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이끄는 오스만 제국군에게 패전함으로써 대그리스주의는 몰락하고, 오스만 제국은 1923년 터키 공화국이 된 후 로잔 조약을 맺음으로써 세브르 조약을 폐기한다. 터키는 여기서 오늘날 발칸반도에서 가지고 있는 영토를 확보한다. 그리스와 터키의 불편한 관계는 여기서 비롯되어 뒤의 키프로스 분쟁으로 이어진다. 이탈리아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부터 이스트라반도를 확보한다. 1939년 무솔리니의 이탈리아가 알바니아를 병합한다. 1940년 11월 루마니아 왕국은 추축국에 가입하고 1941년 4월에 불가리아 왕국도 추축국에 가입한다. 이로써 유고슬라비아와 그리스를 제외한 발칸반도의 모든 국가가 추축국의 일원이 된다. 한편 대전 발발 초, 추축국이 승전을 이어가자 유고슬라비아 왕국은 1941년 추축국의 삼국 동맹 조약에 가입한다. 그러나 국민들의 반발로 3일만에 탈퇴하였고, 이는 추축국에게 침략 구실을 주게 되어 유고슬라비아 왕국은 1941년 4월 추축국의 점령으로 멸망한다. 그리스도 추축국의 침략을 받아 저항하였으나 그리스 공방전과 크레타 전투의 결과 추축국에 완전히 점령되었다. 이로써 발칸반도 전 지역이 추축국의 지배 하에 놓인다. 유고슬라비아와 그리스의 영토는 나치 독일, 이탈리아, 불가리아에 의해 분할되고 유고슬라비아의 일부는 크로아티아 독립국이라는 추축국의 괴뢰국가가 된다. 나치 독일의 점령 기간 동안 유고슬라비아에서는 대규모의 인종 청소가 일어나기도 하였다. 1944년 노르망디 상륙 작전 이후 추축국의 패색이 짙어지고, 같은 해 말 소련은 루마니아와 불가리아를 침공한다. 소련 침공 직전 불가리아는 중립국으로 전환하지만, 소련에 점령당해 불가리아 인민 공화국이 수립된다. 루마니아도 연합국으로 전환한다. 소련군이 유고슬라비아로 진격하자 독일군은 점차 후퇴하게 되고, 티토가 이끄는 유고슬라비아 공산당 게릴라도 가세해 나치 독일을 완전히 몰아낸다. 제2차 세계대전의 결과 추축국이 패배하게 됨으로써 발칸반도의 대부분의 국가는 소련군의 점령 하에 들어갔고, 불가리아, 루마니아, 알바니아 등은 소련의 위성국이 된다. 유고슬라비아도 티토의 지도 아래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이 되었으나, 다른 공산주의 국가와 달리 소련과 독립적인 티토주의를 펼치게 된다. 남슬라브어군, 그리스어, 알바니아어, 터키어, 동부 로망스어군 등 다양한 언어가 사용된다. 발칸반도는 역사적으로 비잔티움 제국(동방 정교회), 오스만 제국(이슬람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로마 가톨릭교회) 등 종교적으로 다양한 국가의 활동 영역이 되었기 때문에 종교 구성이 복잡하다. 발칸화 발칸 전쟁 *남동유럽 협력 프로세스 분류:그리스의 지리 분류:몬테네그로의 지리 분류: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지리 분류:북마케도니아의 지리 분류:불가리아의 지리 분류:세르비아의 지리 분류:알바니아의 지리 분류:코소보의 지리 분류:크로아티아의 지리 분류:터키의 지리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 은 1943년에서 1992년까지 발칸 반도에 존재했던 공산주의 국가이다. 유고슬라비아 연방 공화국(신유고슬라비아)과 대비해서 구유고슬라비아 연방 , 줄여서 구유고슬라비아 또는 구유고 연방 라고 부르기도 한다. 유고슬라비아 로 가장 많이 불리고 있다. 1943년 11월 29일 요시프 브로즈 티토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야이체에서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의 수립을 선언한 뒤부터 요시프 브로즈 티토가 이끄는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이 유고슬라비아에서 저항 운동을 전개했다. 1945년 요시프 브로즈 티토는 소련의 지원을 통해 군주제를 폐지하고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마케도니아, 몬테네그로, 세르비아 등 6개 공화국으로 이루어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구유고슬라비아)을 수립했다. 1946년에는 공산주의 신헌법을 제정했으며 1974년에는 세르비아의 보이보디나와 코소보를 연방직할 자치주로 승격시켰다. 국가원수에 취임한 티토는 1948년 민족주의를 주장, 소련의 지도권을 부인하다가 코민포름에서 제명된 후 "독자적이고 민족주의적인 공산주의"를 지향하였다. 비동맹 중립주의, 미국·소련의 권력 정치 배격으로 대표되는 티토주의는 동구권에서 서방권 측과 관계 개선을 도모한 이단자로 규정되었으나 제3세계 비동맹 운동의 지도자로서의 위상을 점하였다. 유고슬라비아는 동유럽·중앙유럽의 여타 공산주의 국가와 달리 바르샤바 조약에도 경제상호원조회의에도 가입하지 않았고, 북대서양 조약기구에도 가입하지 않은 채 요시프 브로즈 티토의 지도 아래 비동맹 운동 노선을 걸었다. 그래서 티토의 자주적인 정치노선을 티토주의라고 부른다. 1971년부터 1973년 사이에 전개된 브레즈네프·코시긴 등 소련 수뇌부와 티토 간의 상호 교환 방문과 1977년 소련의 불간섭 원칙의 확인으로 양국 관계가 호전되었으며 1970년대 대서방 접근은 더욱 구체화되었다. 유고슬라비아는 기업의 영리·이윤제 등 시장경제 구조를 도입, 독자적인 공산주의 경제체제를 추진함으로써 1970년대에는 경제적 발전을 달성하기도 하였다. 이로써 유고슬라비아는 남유럽의 가장 부유한 공산 국가로 발전했다. 1980년 5월 요시프 브로즈 티토의 사망과 함께 분열 조짐을 보이며 연방 간부 회의 집단 지도 체제로 전환하였다. 연방의회는 연방원과 공화국·자치주원의 양원제였다. 1987년 공산당 서기장에 오른 슬로보단 밀로셰비치(Slobodan Milosevic)가 대세르비아 민족주의를 주창하면서 유고슬라비아 전쟁이 촉발되었다. 1980년대 말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로 중앙유럽 공산주의 정권이 차례로 붕괴하자 유고 연방은 해체 수순을 밟았다. 1991년 유고슬라비아의 구성 공화국이었던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북마케도니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가 차례로 분리 독립했다. 유고슬라비아 전쟁을 치른 후 1992년 남은 공화국인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가 유고슬라비아 연방 공화국(신유고슬라비아)을 결성하면서 구유고슬라비아은 역사에서 사라졌다.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의 교육 분류:유고슬라비아의 역사 분류:유럽의 옛 나라 분류:발칸반도의 옛 나라 분류:유고슬라비아 분류:공산주의 국가 분류:유엔의 옛 회원국 분류:무신론 국가 분류:1992년 폐지 분류:냉전기의 정체
유고슬라비아 전쟁 은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영토에서 1991년부터 1999년까지 수차례에 걸쳐 일어난 전쟁을 일컫는다. 처음에는 흔히 "유고슬라비아 내전"이라 불렀지만 1992년 연방이 해체됨에 따라 내전으로 정의할 수 없게 되었다.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6개 구성 공화국 모두에게 영향을 끼쳤다. 여기에 2001년 일어났던 신 유고 연방의 알바니아계 UCPMB(프레셰보·메드베자·부야노바츠 해방군)의 봉기도 추가될 수 있다. 처음에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가 유고연방 이탈을 선언한 후, 이를 저지한다는 목적으로 전쟁이 시작되었지만 점차 민족 분규의 성격이 강해졌다. 그리하여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와 프라뇨 투지만 두 대통령으로 대표되는 세르비아 민족주의와 크로아티아 민족주의의 대결 양상을 띠었다. 보스니아에서는 이슬람교도인 보스니아인들이 이 틈새에 끼어 3파전이 되었다. 이는 민족청소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내며 유고슬라비아 전쟁 중 가장 참혹한 전쟁이 되었다. 코소보와 북마케도니아에서는 슬라브계 정부와 자치 내지 독립을 추구한 알바니아계 소수 주민들의 인종·정치적 갈등이 전쟁으로 이어졌다.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코소보에서는 세르비아/유고슬라비아의 패배로 끝났으며 보스니아와 북마케도니아에서는 국제 협상으로 끝났다. UCPMB 봉기는 유고슬라비아 정부가 성공적으로 진압하는 데 성공했다. 유고슬라비아 전쟁은 각종 매체와 단체 등에 따라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유고슬라비아 전쟁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명칭이다. 이후 유고슬라비아 연방이 해체되면서 구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전쟁 과 같은 명칭도 사용되었다. 발칸 전쟁 전쟁이 발칸반도 서부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이런 명칭이 붙었다. 그러나 중앙 유럽의 일부도 전장에 해당하기 때문에 잘 들어맞는 명칭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제3차 발칸 전쟁 1912년 - 1913년 사이에 있었던 발칸 전쟁 이후 발칸 반도에서 벌어진 전쟁이란 의미로 영국의 언론가 미사 그레니가 사용한 명칭이다. 그리 널리 사용되지는 않고 있다. 10년 전쟁 1991년 - 2001년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란 의미로 이탈리아 학자 알레산드로 마르조 마그노가 사용한 명칭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전, 유고슬라비아는 다양한 민족과 국가가 혼재하고 있었다. 독립국이었던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토였던 슬로베니아, 이스트리아, 달마티아, 크로아티아, 슬라보니아, 보이보디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그리고 오스만 제국의 마지막 유럽 영토였던 마케도니아가 여기에 해당한다. 이 지역에서는 19세기 말에서부터 확산된 슬라브주의 기치로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려는 움직임이 있어왔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이러한 민족주의 운동은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결성을 이루게 되었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에는 추축국에게 점령되어 크로아티아계의 파시스트 우스타샤의 대량학살이 자행되었다. 우스타샤는 약 33-39만명의 세르비아인을 학살하였다. 전후 유고슬라비아 연방이 수립된 뒤 1980년대까지 이 지역은 다양한 인종들이 서로 공존하며 사는 지역이었다. 1980년 티토가 사망하자 민족을 앞세우는 정치세력들을 원만히 중재하던 정치 지도력 역시 사라지게 되었다.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새 대통령이 된 밀로셰비치는 1987년부터 공공연히 세르비아인의 우월을 강조하는 세르비아주의를 표방하였으며 유고슬라비아 전체 인구의 6분의 1에 해당하는 무슬림을 적으로 간주하였다. 밀로세비치는 2차 세계대전 기간에 있었던 우스타냐의 학살을 교묘히 이용하여 크로아티아인을 탄압하였다. 세르비아주의의 팽배는 크로아티아인을 중심으로한 다른 민족들의 민족주의 감정을 자극하였고 점차 상호 대립하는 양상을 보였다.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 이후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각 공화국들은 큰 혼란에 빠져들었다. 1991년 6월 25일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가 독립을 선언하면서 유고슬라비아에는 대량학살을 동반한 전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기 시작하였다. 슬로베니아 국경에서 시작된 전쟁은 그 해 보스니아 전역으로 퍼졌으며 1992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로 확산되었다. 특히 세르비아의 지도자들은 인종 분리 정책을 펼치기 시작하였고 이에 따른 인종 청소가 자행되었다. 1992년 3월 유엔 평화유지군이 파견되었으나 대량 학살을 막지는 못했다. 국제 사회는 이러한 대량학살을 수수방관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400px 유고슬라비아 전쟁의 판도 변화(1989년 - 2008년) 슬로베니아 북마케도니아 중부 세르비아 세르비아 보이보디나 코소보 몬테네그로 크로아티아 스르프스카 크라이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서부 보스니아 헤르체고보스니아 크로아티아 스르프스카 유고슬라비아 전쟁은 분리 독립을 선언한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와 연방 유지를 주장한 세르비아간의 전투로 시작되었다. 전쟁 초기 연방은 여전히 주권국가로서 인정되고 있었으며 유고슬라비아의 대통령은 6개의 공화국을 대표한 국가원수의 지위와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의 통솔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제14차 유고슬라비아 공산당 전당대회에서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 위원들이 탈당하면서 유고슬라비아 연방은 해체의 과정에 접어들었다. 1991년 6월 25일 유고슬라비아 전쟁의 첫 시작인 슬로베니아 전쟁(십일 전쟁)이 슬로베니아 국경지대에서 시작되었다. 유고슬라비아 정부는 독립을 선언한 슬로베니아 지역의 진압을 목적으로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을 슬로베니아 국경에 투입하였다. 이에 슬로베니아는 국경수비대와 슬로베니아 지역방위군으로 대항하였다. 이들은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을 저지하기 위해 도로를 차단하고 진지를 구축하였다. 수 차례의 소규모 전투가 있었으며 수십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1991년 7월 9일 브리유니 섬에서 정전 협상이 시작되자 양측은 교전을 중단하였고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는 3개월 간의 휴전을 선언하였다. 협상 결과 인민군은 10월 26일까지 슬로베니아 지역에서 완전히 철수하였다. 파괴된 크로아티아인의 집에 세르비아인이 낙서를 해놓았다. 인종간의 전쟁은 유고슬라비아에서 증오와 불신만을 남기게 되었다. 슬로베니아 전쟁에 이어 연달아 일어난 크로아티아 전쟁은 세르비아계 크로아티아인들이 크로아티아의 독립을 반대하면서 발생하였다. 크로아티아 지역에서는 슬로베니아 전쟁 이전부터 세르비아인계의 독립 반대 운동이 지속되고 있었다. 이는 새롭게 제정된 크로아티아 헌법 때문이었다. 크로아티아 헌법은 세르비아계를 다른 국가 출신들과 동일하게 "자국민"으로 명시하였고 이는 세르비아계가 크로아티아 내에서 "소수민족"의 위치에 놓이게 된 것을 의미했다. 유고슬라비아 왕국 성립 이전의 상황으로 회귀하여 소수민족이 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세르비아계는 크로아티아 정부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한편 유고슬라비아 연방 전체에서 세르비아계는 다수민족이었고 연방정부 역시 세르비아계가 장악하고 있었다. 또한 연방정부의 통제하에 있던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은 개별 공화국의 분리 독립 움직임을 저지하고자 하였다. 연방정부는 유엔의 묵인 아래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의 지역 방위군을 무장해제 시켰으며 크로아티아 내의 세르비아계 반군을 지원하였다.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를 주축으로 한 군대가 크로아티아를 침공하여 북부의 부코바르와 유네스코의 세계 유산인 남부의 두브로브니크를 파괴하였다. 크로아티아 전쟁 초기 세르비아계의 이러한 공격에 대해 서유럽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방관하였는데, 영국의 언론인 존 V A 파인이 쓴 다음의 글은 당시 서유럽인들이 이 전쟁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서유럽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방관아래 벌어진 크로아티아 전쟁은 세르비아계와 크로아티아계 양측 모두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양측의 전쟁은 1995년 크로아티아군이 세르비아계에게 승리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세르비아계 군대의 탱크 공격으로 화염에 휩싸인 보스니아 의회 의사당 1991년 3월 크로아티아의 프라뇨 투지만과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는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의 해체 과정을 위한 카라도르데보 조약을 놓고 협상하였다. 그러나 두 대통령의 실제 관심은 보스니아의 분할을 어찌할 것인지에 쏠려있었다.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크로아티아 내의 세르비아계는 스르프스카 크라예냐 공화국을 선포하고 크로아티아와 교전하였다. 크로아티아 중부는 스릅스카 크라이나의 참모총장이 된 라트코 믈라디치가 이끄는 세르비아계 군대는 크로아티아의 여러 곳을 점령하고 많은 민간인을 학살하였다. 부코바르 학살 과 스카브르냐 학살이 널리 알려져 있다. 구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는 당시의 민간인 학살에 대한 책임을 물어 밀로셰비치와 믈라디치를 기소하였다. 밀로셰비치는 형 확정 뒤 옥중에서 사망하였으며, 믈라디치는 2011년 5월 체포되었다. 한편, 1992년 유엔은 민간인 학살을 방지하기 위해 크로아티아내에 유엔 관할 구역을 설정하고 1995년까지 관리하였다. 1992년부터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자그레브를 중심으로한 보스니아인과 크로아티아인이 한 축이 되고 유고슬라비아 연방군을 중심으로 한 세르비아인이 다른 한 축이 된 보스니아 전쟁이 일어났다. 특히 세르비아주의를 내세운 유고슬라비아 연방은 점령지역에서 보스니아인에 대한 인종 청소를 자행하였다. 이러한 인종주의에 의한 대량 학살을 막기 위해 1994년 북대서양조약기구는 세르비아에 대한 공격을 선언하고 1995년 세르비아계의 주요 군사 거점에 대한 폭격을 개시하였다. 1995년 12월 스르프스카 공화국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 합병됨으로써 보스니아 전쟁은 일단락되었다. 1995년에서 2002년에 걸쳐 코소보에서는 마케도니아와 세르비아 정부 간의 전쟁이 벌어졌다. 이 와중에 소수 민족이었던 알바니아인이 독립을 요구하였다. of Zastava factory.jpg|섬네일|NATO의 폭격을 받은 세르비아 군수 공장 1995년부터 제한적인 전투가 벌어져왔던 코소보 전쟁은 1998년 전면전으로 확대되었다. 2001년에는 마케도니아 전쟁과 남 세르비아 전쟁이 발생하였다. 1999년 북대서양조약기구가 코소보에 개입하여 세르비아군을 격퇴시켰다. 한편 마케도니아와 남 세르비아의 무력 충돌은 다자간 협상을 통해 코소보 유엔 잠정 통치구역을 설정하고 북대서양조약기구 아래 코소보군을 설립하여 해당 지역의 방위를 맞게 함으로써 종결되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코소보는 불안한 상황이 지속되어 2004년 코소보 소요에서 세르비아계와 알바니아계의 무력충돌이 있었으며 2008년 코소보의 분리 독립 때에도 소요가 있었다.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의 전쟁으로 혼란스러운 중, 마케도니아는 독립하고 유고슬라비아는 저지하려고 하였으나 실패하여 독립하였다. 코소보 전쟁이 진행되자 남 세르비아에 알바니아군이 침입하면서 남 세르비아 전쟁이 발발하였다. in the Yugoslav Wars - ko.png|섬네일|right|구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는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는 범죄적인 행위를 통해 넓은 지역에서 비세르비아인을 학살함으로써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내 세르비아인 거주구역을 포함한 대세르비아국 건국 시도 를 한 죄로 기소했다. 크로아티아 전쟁에서 세르비아계와 크로아티아계는 양측 모두 민간인에 대한 학살을 자행하였다. 크로아티아 전쟁 초기 세르비아계를 지배하고 있던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이 투항한 크로아티아 경찰에게 무차별 발포를 하여 13명의 경찰이 사망한 후 두 민족은 상대방에 대해 인종주의적인 적개심을 보였다. 2015년 2월 3일, 국제사법재판소는 세르비아군이 내전에서 전쟁 범죄를 저질렀지만, 점령지에서 크로아티아 인의 전체 또는 일부 를 학살할 의도가 있었음을 크로아티아가 입증하지 못했다며 세르비아의 학살 혐의가 없다고 판시했다. 보스니아 전쟁 기간 동안 세르비아계는 2차세계 대전 동안 있었던 대량학살을 명분으로 보스니아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았다. 1992년 세르비아의 지원을 받은 보스니아 내의 세르비아계 민병대는 보스니아의 3분의 2를 점령하였다. 이들이 점령한 지역에서 수많은 인종청소 사례가 보고되었다. 인종청소에는 약탈, 방화, 강간, 학살과 같은 극악한 범죄도 동반되었고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보스니아인들을 추방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이슬람 지도자들이 처형되었다. 대량으로 발생한 난민은 세르비아계의 전쟁 목적 그 자체에 의한 것이었다. 코소보 전쟁 기간 동안에도 세르비아계는 국제 감시단이 지켜보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인종청소를 자행하였다. 그러나 코소보에서의 인종청소는 미국의 즉각적인 개입을 불러일으켰으며 결과적으로 세르비아계가 단시간에 패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 보스니아와 달리 코소보는 터키와 같이 전통적인 세계의 화약고에 인접하여 있었고 미국은 이로 인한 국제대전이 발생하는 것을 우려하였다. 전쟁 후 유고슬라비아는 일곱 나라로 분리됐다. 몬테네그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연방과 스릅스카 공화국, 브르치코 행정구로 갈라짐) 북마케도니아 세르비아 슬로베니아 코소보 크로아티아 유고슬라비아 전쟁은 많은 인권 유린과 파괴 행위로 점철되면서 긴 시간 동안 구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구성국 전체를 몰락시켰다. 전쟁의 장기화로 피해가 커진 것에 대하여 서유럽 국가들에게 상당부분 책임이 있다는 지적이 있어왔다. 1991년 당시 진행되고 있던 동독의 붕괴, 걸프 전쟁 등으로 인하여 영국과 프랑스는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유지를 강력히 희망하였고, 이것이 오히려 전쟁을 장기화 하였다는 비판이 있다. 새뮤얼 헌팅턴과 같은 문명 충돌론자들은 유고슬라비아 전쟁을 서유럽에서는 2차세계 대전 이전에 이미 지나간 민족주의의 때늦은 발현으로 설명하였다. 즉, 과거의 해묵은 원한과 공산주의에 의해 지체된 역사 과정으로 인해 뒤늦게 나타난 민족주의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라는 것이 문명 충돌론의 설명이다. 그러나 이브 미쇼는 이러한 문명 충돌론은 유고슬라비아 전쟁의 결과로 세워진 신생 국가들 역시 다민족 국가라는 점과 전쟁 시기 이들 국가의 지배세력은 여전히 구 공산당 출신의 관리였다는 점을 들어 이러한 분석에 반대한다. 이브 미쇼는 옥스퍼드 대학 러프닉 교수의 논문을 인용하여 유고슬라비아 전쟁을 공산국가 체계가 무너지고 난 뒤에도 지배세력으로 군림하려는 관리들이 민족주의를 표방하여 저지른 전쟁 범죄라 주장한다. 유고슬라비아 전쟁 기간 동안 인터넷은 전쟁 지역의 주민들에게 가장 중요한 정보원이었다. 중앙 권력의 부재로 인해 검열이 사라지자 인터넷을 이용할 수 있는 주민들은 인터넷 게시판을 통해 서로의 정보를 주고 받았다. 세뮤얼 헌팅턴의 문명 충돌을 따르는 측에서는 인종 청소가 민족국가의 발현 과정에서 일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는 입장을 보여왔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반대하는 측에서는 인종청소의 주된 원인은 정치 권력과 경제 자원을 둘러싼 이익 집단의 충돌이며 인종이란 구분짓기 편리한 구분선에 불과하였다고 지적한다. 1995년 보스니아 전쟁을 종결한 데이턴 협약의 실무 담당자였던 리처드 홀부르크는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분류:유럽의 내전 분류:전쟁사 분류:유고슬라비아의 전쟁 분류:1991년 분쟁 분류:1992년 분쟁 분류:1993년 분쟁 분류:1994년 분쟁 분류:1995년 분쟁
민족 청소 (民族淸掃 또는 인종 청소 (人種淸掃)는 이방인 또는 적대적인 민족을 배제·말살함으로써 그 민족이나 인종이 뿌리내리지 못하도록 하는 정책을 통틀어 일컫는다. 이 용어에 해당하는 정책은 그 강도에 따라 긴 연속체를 이루는데 경미한 쪽은 강제 이민과 인구 이동 정책과 구별이 거의 불가능한 데 반해 심한 쪽은 강제 이주와 대량 학살에 통한다. 1990년대 유고슬라비아 전쟁 때 구유고연방 방송·언론에서 자주 사용하던 세르비아어·크로아티아어의 ‘etničko čišćenje’를 영어로 ‘ethnic cleansing’이라 대략적으로 번역한데서 나온 신조어이다. 하지만 우리가 오늘날 민족 청소라 부르는 개념 자체는 오래전부터 있어왔고 그 예가 많아 많은 학자들이 이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보통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청소"라는 말을 악성 정책에 사용한다 하여 이 용어 사용을 꺼리는 이들도 많다. "청소"라는 말을 이런 용도로 처음 사용한 것은 나치 독일이었다. 이른바 "최종 해결"을 준비하면서 청소, 이주, 정화(淨化) 등의 용어를 직접적인 단어 대신에 사용했던 것이다. 유대인 대학살(홀로코스트) 일본의 전쟁범죄(아시안 홀로코스트) 나치 강제수용소 보호책임 유고슬라비아 전쟁 코소보 전쟁 킬링필드 제노사이드 미얀마의 로힝야족 박해
노르드인 ( 또는 북게르만족 (north Germanic tribes)은 8세기에서 11세기 사이에 스칸디나비아를 중심으로 활약했던, 고대 노르드어를 사용했던 게르만족 일파를 가리킨다. 이 언어는 인도유럽어족의 북게르만어군의 갈래로, 현대 여러 스칸디나비아 어들의 초기 형태였다. "노르드인"이라는 이름은 ‘북방에서 온 사람들’(people from the North)에서 유래되었으며, 그들은 핀란드를 비롯해 서쪽으로 캐나다와 그린란드, 동쪽으로는 우크라이나와 에스토니아에 까지 진출하여 각지에서 ‘노르딕 국가’(Norse Countries)들을 만들었다. 노르드인은 정착 지역의 선주민족과 혼합하여 새로운 민족을 형성하기도 했다. 예컨대 프랑스 해안에 정착한 이들은 노르만인이 되었고, 그들이 살았던 지역이 오늘날의 노르망디다. 노르드인은 북게르만어에 속하는 고대 스칸디나비아어를 사용했다. 고대 스칸디나비아어는 나중에 덴마크어와 아이슬란드어, 노르웨이어, 스웨덴어로 분기되었다. Expansion KO.svg|섬네일|800px|center|8세기에서 11세기(바이킹 시대) 동안 노르드인들이 진출, 정착한 지역을 보여주는 지도 고대 프랑크어(고대 서유럽의 언어)인 Nortmann (Northman이라는 의미)은 라틴어에서 노르마니 ( Normanni )로 변이되었고, 고대 프랑스어로 ‘ 노흐망 ’( Normands )이 되었다. 여기에서 ‘노르만인’이라는 이름과 ‘노르망디’라는 이름이 탄생했으며, 이것은 10세기 ‘노스멘’(Norsemen)의 정착으로 고착되었다. and voyages of the Vikings.png|섬네일|300px|바이킹의 활동 영역, 지중해에서 흑해, 카스피해로, 영국에서 아이슬란드, 북미 대륙에까지 이르렀다 고대 노르드 어에서, 용어 norrœnir menn ( northern men )은 현대 영어의 이름인 Norsemen 에 해당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스웨덴의, 덴마크의, 노르웨이의, 페로 제도의, 아이슬랜드,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현대 스칸디나비아 어군은 Norsmen에 대한 공통어를 가지고 있다. nordbo 는 스웨덴어로 nordborna , 덴마크어로 nordboerne , 노르웨이어로 nordboerne 또는 nordbuane 로 모두 복수형이다. 이 말은 노르딕 국가에 사는 고대 그리고 현대인들과 스칸디나비아의 독일계 언어를 말하는 사람들을 을 가리키는 말이다.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의 현대인들은 그들 스스로를 스칸디나버 ( skandinaver , 영어로 Scandinavians라는 의미)로 칭한다. ‘바이킹’이라는 단어는 덴마크어와 노르웨이어로 비킹에 ( Vikinger ) 그리고 스웨덴어로 비킹에 ( Vikingar )다. 이 말을 현지인은 ‘노스맨’(Norsemen)에 상응하는 말로 사용하지 않는다. 바이킹은 특정 활동 / 점령(약탈)으로 사용되며, 민족 집단을 가리키는 말은 아니다. 바이킹족들은 단순히 약탈(‘바이킹 가기’로 알려진)에 참여하는 사람(민족, 또는 혈통)일 뿐이다. 때로는 핀란드도 ‘스칸디나비아 국가’( Scandinavian country )로 언급된다. 핀란드어는 독일어 또는 심지어 인도 유럽어도 아니지만, 핀란드는 약 6백년(12세기 말부터 1809년까지)동안 스웨덴의 일부였고, 약 핀란드 인구 중 6%가 여전히 제1 국어로 스웨덴어를 사용하고 있다. 올란드 제도에서는 스웨덴어가 여전히 다수 언어이지만, 핀란드 어디를 가던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1918년 독립을 쟁취한 이후에도 스웨덴어 화자의 비율은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다. 아이슬란드, 그린란드, 그리고 파로 제도도 지리적으로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떨어져 있다. 노르딕 국가 ( Nordic countries )라는 용어는 그러므로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아이슬란드, 그린란드, 파로 제도 그리고 핀란드)을 포괄하는 용어로 사용된다. 바이킹 노르만 빈란드 - 랑스 오 메도즈 HowStuffWorks.com – Norsemen 분류:북게르만족 분류:노르웨이의 역사 분류:덴마크의 역사 분류:스웨덴의 중세사
najemnicy.jpg|섬네일|235px|바이킹 리인액트 바이킹이 사용하던 배의 모델 바이킹 (; )은 노르드어 비킹그 ()에서 유래한 표현이다. 이들은 게르만족 노르드인이고, 노르드어를 사용하며, 고향 땅인 스칸디나비아로부터 8세기 말에서 11세기 말까지 북유럽과 중앙유럽까지 항해하며 교역하거나 약탈로 활보한 바닷사람을 가리켜 바이킹이라고 부른다. 바이킹이 활동한 시기를 바이킹 시대라고 한다. 노르드인들의 군사적 상업적 성장과 인구 팽창은 중세 스칸디나비아 뿐 아니라 브리튼 제도, 아일랜드 섬, 프랑스, 키예프 루시, 시칠리아 등 광범한 지역에 중요한 요소로 영향을 미쳤다. 롱쉽으로 대표되는 진보한 항해 기술로 인하여, 본거지인 스칸디나비아에서 멀리 떨어진 지중해 연안, 북아프리카, 중동, 중앙아시아까지 바이킹의 활동이 미친 적도 있었다. 바다와 강을 통한 탐험과 식민의 시기가 지난 뒤 바이킹들은 북서유럽, 러시아, 북대서양 도서, 멀리는 북아메리카 북동해안에 이르기까지 각지에 정착했다. 이 시기 동안 노르드 문화가 다른 지역에 폭넓게 보급됨은 물론 역으로 외래 문화도 스칸디나비아에 영향을 미쳤다. "바이킹"의 어원은 확실치 않다. "작은 만"·"후미"를 뜻하는 고대 노르드어의 "vík"에 접미사 "-ing"이 붙은 데서 유래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작은 만의 거주자", 특히 덴마크와 스웨덴 사이의 카테가트 만 쪽 비켄(Viken) 지역의 거주자라는 뜻이다. "비킹르(vikingr)"라는 단어는 스칸디나비아에 남겨진 룬 문자로 새겨진 금석문에 많이 발견된다. 하지만 이 단어가 처음 나타나는 곳은 6세기 또는 7세기의 고대 영어(앵글로색슨어) 시 "위드시스(Widsith)"이다. 때문에 또 하나의 설은 고대 영어의 "wíc" 즉 "무역도시"("마을"을 뜻하는 라틴어의 "vic"에서 유래)에서 왔다는 것이다. 이외에도 "떠나다."라는 뜻의 "av viker "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고향을 떠나 바다로 나간 이들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스웨덴의 작가 얀 기유(Jan Guillou)에 의하면 바이킹이라는 말을 긍정적 의미로 주로 사용하게 된 것은 에리크 구스타프 예이예르(Erik Gustaf Geijer)가〈바이킹(The Viking)〉이라는 시를 쓰면서부터였다. 오늘날 바이킹을 용감하고 호전적인 해양 전사로 생각하는 것은 당시의 정치적 이유와 관련이 깊다. 즉 1809년 스웨덴이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600년간 스웨덴 영토였던 핀란드를 잃자 이를 회복할 자신감을 북돋기 위해 용감하고 영화로운 과거 역사를 창조할 필요가 있던 것이다. 예이예르가 회원으로 있던 예타회(Geatish Society)라는 단체는 용맹스런 바이킹 역사 창조에 큰 역할을 했다. 역시 예타회 회원이었던 작가 에사이아스 텡네르(Esaias Tegnér)는 사가문학 작품〈프리티오프 사가(Frithiofs Saga)〉를 근대적으로 개작해 북유럽과 영국, 독일에서 큰 인기를 얻어 바이킹에 대한 인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바이킹의 무역 활동이 활발했다는 것은 헤데뷔(Hedeby)와 같은 큰 무역 도시를 보면 알 수 있다. 헤데뷔는 프랑크 왕국과의 국경지대에 위치하여 1050년경 노르웨이인들 사이의 내분으로 파괴될 때까지 문화의 십자로 역할을 했다. 최초의 바이킹 약탈에 대한 기록은 앵글로색슨 전기에 나오는데 789년 포틀랜드(Portland)가 습격당했다는 기록이다. 좀 더 확실한 기록은 793년 잉글랜드 동쪽 해안의 린디스판(Lindisfarne)에 있는 수도원이 약탈당했다는 기록이다(보통 이를 최초의 바이킹 약탈 기록으로 거론한다.). 그 후 200년간 유럽사는 바이킹과 그들의 약탈에 대한 기록으로 점철되었다.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의 해안이 바이킹의 영향권에 들어갔으며 잉글랜드 영토의 태반이 바이킹(데인족) 지배하에 들어갔다(데인로 참조). 바이킹들은 프랑스와 스페인의 강을 거슬러 올라갔으며 발트 해 연안, 러시아, 우크라이나 등을 장악하였다. 9세기 초, 바이킹은 대형 보트를 몰고 프랑스의 론 강이나 센 강을 비롯한 내륙 수로를 따라 공격을 감행했다. 샤를 3세(재위:898년 ~ 922년)의 통치 기간 동안에, 노르웨이 출신 바이킹 롤로와 덴마크 출신 베른하르트가 이끄는 노르만족이 파리로부터 흐르는 센 강 하류의 양안에 정착하였고, 그로 인해 그 지역의 이름이 노르망디가 되었다.(→중세 프랑스) 지중해와 동쪽 카스피 해에까지 바이킹 습격이 있었다. 바이킹이 건설한 도시로는 잉글랜드의 요르비크(현 요크), 우크라이나의 키이우, 아일랜드의 더블린 등이 있다. 덴마크 출신 바이킹들은 프리슬란트, 프랑스, 잉글랜드 남쪽에 진출했다. 1013년 - 1016년에는 크누트 대왕이 잉글랜드 왕위에 있었다. 스웨덴 출신 바이킹들은 동쪽 발트족과 슬라브족의 땅(오늘날의 발트 해 연안, 러시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에 진출해 루리크가 최초의 슬라브 국가를 건설하였다. 이 지역의 강을 따라 흑해, 콘스탄티노폴리스(현 이스탄불), 비잔티움 제국에까지 진출하였다. 노르웨이 출신 바이킹들은 주로 북서쪽과 서쪽으로 향해 페로 제도, 셰틀랜드 제도, 오크니 제도, 아일랜드, 영국 북부와 아이슬란드에 진출하였다. 아일랜드와 영국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무인도거나 거주자가 거의 없는 상태였으며 노르웨이인들은 그곳에 정착하였다. 붉은 에이리크는 그린란드를 발견하여 정착이 이루어졌다. 1000년경에는 비아르니 헤리올프손(Bjarni Herjólfsson)이 북아메리카를 발견하였다. 붉은 에이리크의 아들 레이프 에이릭손과 토르핀 칼세프니(Þórfinnur Karlsefni)가 그린란드로부터 정착을 시도하였다. 그들은 발견한 땅을 빈란드(Vinland)라고 불렀다. 뉴펀들랜드 섬 북쪽 반도에 있는 랑스 오 메도즈 근처에 소규모 정착촌이 시작되었지만 원주민들과의 마찰과 기후 변화로 몇 세대 이상은 지속되진 못하였다. 랑스 오 메도즈의 고고학 유적지는 현재 유엔 지정 세계문화유산이다. 바이킹의 해외 진출이 최고점에 달했을 때 북반구가 수백 년 동안 유난히 추워지게 된 소(小)빙하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이지고 있다. 이 때문에 그린란드의 식민지는 몇백 년을 못가고 몰락했으며 바이킹의 서부 진출도 멈추었고 바이킹의 고향도 타격을 받았다. 북유럽 신화 노르드 문학 노르드 시 (詩) 헤데뷔 (Hedeby) 아담 폰 브레멘 레이당 (Leidang) 비르칼족 (Birkarl) 사미인 (라프족) 바랑기아인
붉은 에이리크 에이리크 힌 라우디 토르발드손 (, , 950년 ~ 1005년경)는 바이킹이다. 그린란드에 최초로 노르드인 식민지를 개척하였다. 노르웨이에서 태어났다. 960년경 에이리크의 아버지가 살인사건 때문에 노르웨이를 도주하게 되어 가족이 아이슬란드에 정착하였다. 982년에는 아들 에이리크 역시 살인사건 때문에 추방당할 처지에 처하자 서쪽으로 새로 정착할 땅을 찾기로 결심하였다. 군비외른(Gunnbjörn)이라는 탐험가가 아이슬란드 서쪽에 있는 땅을 발견, 보고한 바 있어 이를 찾아나선 것이다. 에이리크는 이 땅에 "푸른 땅"이라는 그린란드라는 이름을 붙였다. 〈붉은 에이리크 사가〉에 의하면 3년간의 추방기간동안 그린란드의 해안을 탐험했다고 한다. 아이슬란드에 돌아와서는 그린란드를 대대로 선전해 985년 많은 수의 식민지 개척자들과 함께 그린란드에 들어갔다. 에이리크는 프레위디스(Freydís)라는 딸과 탐험가 레이프 에이릭손(Leifr Eiríksson), 토르발드(Þorvaldr), 토르스테인(Þorsteinn) 등 세 아들을 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들 레이프와 달리 기독교 신자가 아니었다. 분류:950년 태어남 분류:1005년 죽음 분류:노르웨이의 탐험가 분류:아이슬란드의 탐험가 분류:북아메리카 탐험가 분류:바이킹 탐험가 분류:노르웨이계 아이슬란드인 분류:노르드인 분류:노르드인의 아메리카 식민화 분류:10세기 노르웨이 사람 분류:11세기 노르웨이 사람 분류:10세기 아이슬란드 사람 분류:11세기 아이슬란드 사람 분류:바이킹 전사
Heimer och Aslög.jpg|섬네일|300px|헤이메르 왕과 아슬라우그 노르드 신화 ( ── 神話, , , , , 혹은 (협의의) 스칸디나비아 신화 는 기독교 개종 이전 스칸디나비아와 북부 유럽(오늘날의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아이슬란드, 그리고 그린란드 일부, 북부 독일 등지)에 살았던 게르만인의 일파인 노르드인들의 종교·신앙·전설 등을 일컫는다. 노르드 신화는 게르만 신화의 연속이며 유럽 대부분이 기독교로 개종한 이후에도 스칸디나비아 지역에서 옛 종교가 계속 버텨서 노르드 신화가 게르만 신화를 대표하게 되었다. 한국어권에서는 흔히 북유럽 신화 라고도 한다. 노르드 신화의 문헌에는 온갖 다양한 신들이 등장한다. 묠니르를 들고 적들의 머리를 깨부수는 인류의 수호신 토르, 애꾸눈에 도래까마귀를 부리며 세계의 지식을 탐욕적으로 추구하는 오딘, 깃털 망토를 걸치고 세이드라는 주술을 부리는 아름다운 여신 프레이야, 겨울의 늑대 울음소리를 좋아하는 잔인한 스키의 여신 스카디, 바다와 불 및 땅의 지력을 상징하는 강력한 신 뇨르드, 뇨르드의 아들이며 날씨와 농사와 관계되어 인류에게 기쁨을 주는 프레이, 영원한 젊음을 주는 사과가 열리는 나무를 관리하는 여신 이둔, 아홉 명의 어머니에게서 태어났고 풀이 자라는 소리를 들으며 금으로 된 이빨을 가졌다는 정체불명 괴상한 헤임달, 오딘의 아내 프리그와 그 아름다운 아들 발드르, 그리고 발드르를 죽음으로 몰아넣어 신들에게 파멸을 가져오는 요툰 출신의 로키 등이 있으며, 그 외에도 많다. 현재까지 전해지는 노르드 신화들의 내용은 대부분 신들이 다른 종족(인간, 요툰, 드베르그 등)들과 상호작용하면서 일어나는 일들을 다루고 있다. 그들은 친구가 될 수도 있고, 애인이 될 수도 있고, 가족이 되거나 원수가 되기도 한다. 노르드 신화의 세계관은 아홉 개의 세계가 세계수 위그드라실에 매달려 있다고 하는데, 각 세계의 구성은 전승마다 다소 차이가 있다. 또 시간, 천체, 물리현상을 비롯한 다양한 개념들이 의인화되어 신 또는 다른 존재로 나타난다. 또 다양한 형태의 창조신화들이 변주되는데, 세상은 맨 처음 태초의 존재 위미르의 몸을 찢어 그 시체로 만들어졌고, 최초의 인간 한 쌍 아스크와 엠블라는 나무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이 세계는 언젠가 라그나로크라는 말세가 오면 망하고 새로이 태어날 것이라고 한다. 라그나로크 때 신들과 신들에 적대하는 모든 존재들은 건곤일척의 대전쟁을 벌이고, 세상은 불길에 휩싸인 뒤 물에 잠겨 멸망한다. 그 뒤 살아남은 소수의 신들이 다시 만나고, 푸르고 비옥한 새 땅이 솟아나며, 리프와 리프트라시르라는 한 쌍의 부부로부터 다시 세상에 인간들이 번성할 것이다. 노르드 신화는 17세기부터 학자적 관심의 주제가 되어 왔다. 비교신화학 및 역사언어학의 성과를 통하여 학자들은 노르드 신화 및 그 원류인 게르만 신화가 태고의 인도유럽조어 사용자들의 공통신화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을 밝혀냈다. 또한 낭만주의적 바이킹 부흥 문화의 결과 다양한 근현대 대중문화에 노르드 신화의 영향이 더해졌으며, 게르만 신이교주의와 같은 신흥종교에서는 고대의 종교적 맥락까지 부활하고 있다. 북유럽 신화에 대해 현존하는 기록 대부분은 13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공식적으로 북유럽이 기독교 사회가 되어버린 이후에도 2세기 이상 구전되며 보존되어 있었다. 13세기에 학자들은 이 구두로 남아 있었던 신화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특히 기독교 이전의 신들이 실제 역사적 인물로 추적할 수 있다고 믿었던 학자, 스노리 스투를루손을 통해 《신 에다》(산문 형식의 에다로 새로 지은 에다)나 《헤임스크링글라》가 쓰여졌다. 이들은 스칸디나비아의 기독교 개종 이후에 자료를 남겼지만 옛 신들을 악마로 매도하지 않고 학문적으로 탐구하려는 자세를 보였다. 노르드 이외의 초기 게르만 사회의 신화에 대한 정보를 담은 자료는 《앵글로색슨 전기》, 《베오울프》, 삭소 그라마티쿠스의 《데인인의 사적》 등이 있다. 타키투스의 〈게르마니아〉에도 제한적으로나마 정보를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에다”라고 불리는 두 작품, 즉 스노리의《신 에다》와 《고 에다》가 노르드 신화 연구에 가장 귀중한 자료이다. 《신 에다》(산문 에다)를 13세기 초기에 쓴 스노리 스투를루손이라는 인물은 뛰어난 시인이자, 지도자로 아이슬란드의 외교관이기도 했다. 이 ‘에다’는 본래 그 기법을 배우고자 하는 시인들을 위한 입문서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 작품에는 전통적인 케닝(완곡표현 기법)이나 시에 담긴 은유 표현을 산문 형식으로 설명하는 내용이 포함되어있다. 이러한 산문체의 이야기가 북유럽의 신들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체계적이고, 시작과 끝을 일관되게 한 것이다. 《고 에다》(운문 에다)는 산문 에다가 쓰여진 다음 대략 50년 이후에 집필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운문 에다’는 29절의 긴 시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 11번 시는 게르만의 신들을 다룬 것으로, 나머지는 《볼숭 일족의 사가》의 시구르드(중세 독일의 서사시 〈니벨룽겐의 노래〉의 주인공 지크프리트)와 같은 전설적인 영웅에 대해 쓴 것이다. 학자들은 이 ‘에다’를 다른 ‘에다’ 보다 이후의 시대에 기록된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 이야기의 언어와 시의 형식으로 비추어 볼 때 다른 에다가 쓰여진 시대보다 1세기 이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이러한 원전 외에도 9세기에서 14세기에 걸쳐 북유럽에서 편찬된 《사가》나 《사트르》, 《스칼드》 등에도 북유럽의 신앙이 반영되어 있다. 따라서 이것들로부터 엿볼 수 있는 신화도 존재한다. 그 밖에도 스칸디나비아의 전승 등에도 남아 있는 전설이 있다. 그중 일부는 고대 영어로 쓰여진 ‘핀네스버그 단편’에 대한 이야기와 ‘데오르의 한탄’ 중에 등장하는 신화적인 이야기에 대한 언급 등 오래된 옛 게르만 문학에 나타나는 전설들이 뒷받침되고 있다. 수많은 단편적 문헌이나 전설이 남아 있을 때 학자들이 시의 뒤에 숨어있는 의미와 표현을 추론할 수 있다. 더불어 스칸디나비아에는 신의 이름을 따서 붙여진 지명들이 많이 존재한다. 프랑크 왕국의 카를 대제는 게르만족의 기독교 이전 기록을 많이 수집했다고 하지만 이는 그의 사후 다른 이들이 없애 버렸다. 중 하나인 레이크 룬돌 레이크 룬돌(Rök Runestone)과 크비네비 목걸이(Kvinneby amulet)처럼 표면에 새겨져 있는 극소수의 룬 문자의 비문에도 신화에 대한 언급이 존재한다. 토르의 낚시 여행과 볼숭 사가의 장면, 오딘과 슬레이프니르와 펜리르에 삼켜지는 오딘 등 북유럽 신화의 장면을 그린 룬 비석이나 그림 비석도 있다. 현존하는 훈네스타트 비석(Hunnestad Monument) 중 하나에는 늑대에 걸터앉아 발드르의 장례식에 가는 히로킨이 그려져 있다. 덴마크에는 말린 콧수염이 나 있고, 입을 닫고 있는 로키의 그림이 그려진 이미지 스톤이 존재하며, 영국의 고스포스 십자가 비석에도 복잡하게 뒤얽힌 그림이 그려져 있다. 또한 외눈박이 오딘과 망치를 든 토르, 직립한 남근의 프레이 등 신들을 그린 작은 입상도 존재한다. 가톨릭 주교 등 고위 성직자들도 게르만 민족의 신앙에 대한 기술을 남겼다. 삭소 그라마티쿠스는 《데인인의 사적》에서 스칸디나비아의 신들에 대해 다루고 있으며, 아담 폰 브레멘은 《함부르크 교회사》를 저술했다. 또한 이러한 북유럽에서 저술된 것 외에도, 1세기경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가 저술한 《게르마니아》와 이븐 파들란의 《볼가 불가르 여행기》 등에도 게르만 민족의 신앙 진술을 남겨 두었다. 이그드라실 북방 민족은 세상에 아홉 개의 세계가 있다고 믿었다. 1) 아스가르드 - 아스의 세계를 일컫는다. 오딘의 거성 발할라가 위치한 그라즈헤임도 이 세계에 포함된다. 발할라 위대한 전사들의 영혼인 에인헤랴르가 모이는 장소이기도 했다. 이러한 전사들은 오딘을 섬기는 여성체 사신 발키리에 의해 인도된다. 그들이 입고 있는 빛나는 갑옷이 밤하늘에 오로라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에인헤랴르는 라그나로크에서 신들을 호위한다. 라그나로크는 사악한 적들과 신들의 큰 싸움으로 살아있는 모든 존재가 죽음으로 이어지는 북유럽 신화의 마지막 전쟁이다. 선과 악의 극단으로 나뉘어진 싸움은 고대의 많은 신화에서 매우 보편적으로 볼 수 있는 주제이다. 2) 바나헤임 - 반족의 세계 3) 미드가르드 -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인간의 땅 4) 무스펠스헤임 - 화염과 수르트의 세계. 수르트는 용암의 피부와 불의 머리를 가진 거인이다. 5) 니플헤임 - 얼음으로 뒤덮인 세상. 로키가 앙그르보다와 사이에서 낳은 반 거인인 딸 헬이 지배하고, 얼음 거인들이 사는 세계 6) 알프헤임 - 엘프의 세계 7) 스바르트알파헤임 - 다크 엘프 스바르트 아르발이 사는 세상 8) 니다벨리르 - 뛰어난 광부이자, 손재주가 뛰어난 대장장이인 드워프와 소인들의 세계. 그들은 토르의 망치와 프레이 기계로 만든 멧돼지 등 신들에게 마법의 힘에 의한 도구를 종종 만들어 냈다. 9) 요툰헤임 - 서리 거인 요툰을 포함한 거인들의 세계 이들의 세계는 세계수 이그드라실에 의해 연결되어 있으며, 아스가르드가 최상에 위치한다. 그 최하층에 위치하는 니플헤임에서 뿌리를 씹는 것은 사나운 뱀(또는 용)인 니드호그 이다. 아스가르드는 헤임달이 지키고 있는 마법의 무지개 다리, 비프로스트가 달려있다. 헤임달은 수천 마일 떨어진 곳을 보고, 들을 수 있는 불침번을 서는 신이다. 북유럽 신화의 우주관은 강한 이원론적 요소를 포함한다. 예를 들어 낮과 밤은 낮의 신 다그와 그가 타는 말 스킨팍시, 밤의 신 노트와 그가 타는 말 흐림팍시가 신화에서 상응하는 것이다. 이 외에도 태양의 여신 솔을 쫓는 늑대 스콜과 달의 신 마니를 쫓는 늑대 하티도 역시 그러한 요소이다. 세계의 기원이 되는 니플헤임과 무스펠스헤임이 모든 면에서 상반되고 있는 점도 그러한 관점에서 찾을 수 있다. 이것은 세계 창조의 대립에서 깊은 형이상학적 신앙을 반영한 것일 수도 있다. 신으로는 아스, 반족, 요툰 세 종족이 있었다. 처음부터 서로 다투던 아스와 반족은 결국 오랜 전쟁을 통해 아스가 승리한 이후 화해를 하고 인질을 교환했으며, 이족 간의 결혼과 공동통치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양자는 상호교류를 하고 있었다. 일부 신들은 모든 가문에 속해 있기도 했다. 이 이야기가 태고적부터 살고 있던 원주민들이 믿고 있었던 자연의 신들이 침략해 온 인도 - 유럽계 민족의 신들로 대체된 사실을 상징한 것이 아닐까 추측하는 연구자도 있었지만, 그것은 단순한 추측에 불과하다고 강하게 지적하고 있다. 다른 권위자(미르체아 엘리아데와 J. P. 말로리 등)들은 이러한 아스와 반신족의 구분은 인도 - 유럽계 민족에 의한 신들의 구분이 북유럽에서 표현된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이들이 그리스 신화에서 올림포스 12신과 티탄의 구분이나, 마하바라타의 일부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고찰하였다. 아스와 반족은 전체적으로 요툰과 대립한다. 요툰은 그리스 신화에서 말하는 티탄과 기가스와 같은 존재이며, 일반적으로 거인(giants)으로 번역되지만, 트롤(trolls)이나 악마(demons) 등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할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하지만 아스는 이 요툰의 후손이며, 아스와 반족 중에는 요툰과 이족 간의 결혼을 한 존재도 있다. 예를 들어, 로키는 두 거인의 자식이며, 헬은 반 거인이다. 물론 최초의 신들 오딘, 빌리와 베이는 암소 아우둠블라의 아버지가 기원이다. 에다에서는 일부의 거인이 언급되며 자연력의 표현인 것처럼 보인다. 거인은 일반적으로 터스(Thurse)와 보통의 횡포거인의 두 가지 유형이 있는데, 그 밖에도 바위 거인과 불의 거인이 있다. 엘프나 드워프 같은 존재도 보인다. 그들의 역할은 모호한 점도 있지만 대체로 신들의 옆에 붙어 있었다고 생각되고 있다. 그 밖에도 많은 영적인 존재가 있다. 먼저 거대한 늑대인 펜리르와 미드가르드 바다를 휘감는 바다뱀 요르문간드라는 괴물이 있다. 이 괴물들은 장난꾸러기 신 로키와 거인 앙그르보다의 자식으로 그려져 있다. (세 번째 자식은 헬이다). CyberSamurai Encyclopedia - Norse Mythology (영어) 분류:유럽의 신화 분류:신화